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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傳 第六- 崔致遠 崔致遠 崔致遠 字孤雲[或云海雲] 王京沙梁部人也. 史傳泯滅 不知其世系. 致遠少 精敏好學. 至年十二 將隨海舶入唐求學 其父謂曰 “十年不第 卽非吾子也 行矣勉之.” 致遠至唐 追師學問無怠. 최치원 자고운[혹운해운] 왕경사량부인야. 사전민멸 부지기세계. 치원소 정민호학. 지년십이장수해박입당구학 기부위왈 “십년불제 즉비오자야 행의면지.” 치원지당 추사학문무태. 최치원(崔致遠)은 자가 고운(孤雲)[혹은 해운(海雲)이라고도 한다.]이며 서울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역사의 기록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의 집안 내력은 알 수가 없다. 치원은 어려서부터 세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가 되어 배편으로 당에 들어가 유학하고자 할 때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10년이 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
列傳 第六- 强首 强首 强首 中原京沙梁人也 父昔諦奈麻. 其母 夢見人有角 而妊身及生 頭後有高骨. 昔諦以兒就當時所謂賢者 問曰 “此兒頭骨如此 何也?” 강수 중원경사량인야 부석제나마 기모 몽견인유각 이임신급생 두루유고골. 석제이아취당시소위현자 문왈 차아두골여차 하야. 강수는 중원경(中原京, 충북 충주) 사량(沙梁) 사람으로 아버지는 나마 석제(昔諦)이다. 그 어머니가 꿈에 뿔이 있는 사람을 보고 임신하여 낳았는데 머리 뒤쪽에 불거진 뼈가 있었다. 석체가 아이를 안고 당시의 현자라고 알려진 이에게 가서 물었다. “이 아이의 두골이 이렇게 생겼으니 어떻습니까?” 答曰 “吾聞之 伏羲虎形 女媧蛇身 神農牛頭 皐陶馬口 則聖賢同類 而其相亦有不凡者. 又觀兒首有黶子 於相法 面黶無好 頭黶無惡 則此必奇物乎. 답왈 오문지 복희호형 여와사신 신농우두 ..
列傳 第六-溫達 溫達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鐘可笑 中心則睦然.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온달 고구려평강왕시인야. 용모용종가소 중심즉목연. 가심빈 상걸식이양모. 파삼폐리 왕래어시정간 시인목지위‘우온달’.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 사람이다. 용모는 구부정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빛이 났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발을 걸치고 시정(市井) 사이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戱曰 “汝常啼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평강왕소녀아호제 왕희왈 “여상제아이 장필부득위사대부처 당귀지우온달.” 왕매언지.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니 왕이..
列傳 第六- 貴山 貴山 貴山 沙梁部人也 父 武殷阿干. 貴山少與部人箒項爲友 二人相謂曰 “我等期與士君子遊 而不先正心修身 則恐不免於招辱 盍聞道於賢者之側乎?” 時 圓光法師 入隋遊學 還居加悉寺 爲時人所尊禮. 귀산 사량부인야 부 무은아간. 귀산소여부인추항위우 이인상위왈 “아등기여사군자유 이불선정심수신 즉공불면어초욕 개문도어현자지측호?” 시 원광법사 입수유학 환거가실사 위시인소존예. 귀산(貴山)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서 아버지는 아간 무은(武殷)이다. 귀산은 어려서부터 같은 부의 사람 추항(箒項)과 벗이 되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우리가 선비나 군자와 함께 교유하기를 기대하면서도,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는다면 욕됨을 면치 못할까 두려우니, 어찌 어진 사람 곁에서 도를 배우지 않겠는가?” 당시에 원광법사(..
列傳 第五- 朴堤上 朴堤上 朴堤上[或云毛末] 始祖赫居世之後 婆娑尼師今五世孫. 祖 阿道葛文王 父 勿品波珍飡. 堤上仕爲歃良州干. 박제상[혹운모말] 시조혁거세지후 파사이사금오세손. 조 아도갈문왕 부 물품파진찬. 제상사위삽량주간. 박제상(朴堤上)[혹은 모말(毛末)이라고도 한다.]은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요, 파사 이사금(婆娑尼師今)의 5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아도 갈문왕(阿道葛文王)이며, 아버지는 파진찬 물품(勿品)이다. 제상도 벼슬길에 나아가 삽량주(歃良州) 간이 되었다. 先是 實聖王元年壬寅 與倭國講和 倭王請以奈勿王之子未斯欣爲質. 王嘗恨奈勿王使己質於高句麗 思有以釋憾於其子 故不拒而遣之. 又十一年壬子 高句麗 亦欲得未斯欣之兄卜好爲質 大王又遣之. 及訥祗王卽位 思得辯士 往迎之. 聞水酒村干伐寶靺一利村干仇里迺利伊村干波老三人有賢智 召問曰..
列傳 第五-昔于老 昔于老 昔于老 奈解尼師今之子[或云 角干水老之子也] 助賁王二年七月 以伊飡爲大將軍 出討甘文國 破之 以其地爲郡縣. 석우노 내해이사금지자[혹운 각간수노지자야] 조분왕이년칠월 이이찬위대장군 출토감문국파지 이기지위군현. 석우노(昔于老)는 내해 이사금(奈解尼師今)의 아들이다.[혹은 각간 수노(水老)의 아들이라고 한다.]조분왕(助賁王) 2년(서기 231) 7월에 이찬으로서 대장군이 되어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하여 이를 격파하고 그 땅을 군현으로 만들었다. 四年七月 倭人來侵 于老逆戰於沙道 乘風縱火 焚賊戰艦 賊溺死且盡. 十五年正月 進爲舒弗邯兼知兵馬事. 사년칠월 왜인래침 우노약전어사도 승풍종화 분적전함 적익사차진. 십오년정월 진위서불한겸지병마사. 4년(서기 233) 7월에 왜인이 침략해오자 우노가 사도(沙道)에서 맞아 싸웠..
列傳 第五- 明臨答夫 明臨答夫 明臨荅夫 高句麗人也 新大王時 爲國相 漢玄菟郡太守耿臨 發大兵欲攻我. 王問群臣戰守孰便 衆議曰 “漢兵 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명림답부 고구려인야. 신대왕시 위국상. 한현토군태수경림 발대병욕공아. 왕문군신전수집편 중의왈 “한병 시중경아 약불출전 피이아위겁 수래. 차아국산험이로애 차소위일부당관 만부막당자야. 한병수중 무여아하. 청출사어지.” 명림답부(明臨荅夫)는 고구려인이다. 신대왕(新大王) 때 국상이 되었다. 한나라 현도군(玄菟郡) 태수 경림(耿臨)이 대병을 내어 우리를 치려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공격과 방어 가운데 어느 편이 유리할 것인가를 물으니,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길 “한나라 군사는 병사의 수가 많..
列傳 第五- 密友ㆍ紐由 密友ㆍ紐由 密友紐由者 並高句麗人也 東川王二十年 魏幽州刺史毌丘儉 將兵來侵 陷丸都城 王出奔 將軍王頎追之. 王欲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奔散殆盡 唯東部密友 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遁矣.” 밀우유유자 병고구려인야. 동천왕이십년 위유주자사관구검 장병래침 함환도성 왕출분 장군왕기추지. 왕욕분남옥저 지우죽령 군사분산태진 유동부밀우 독재측. 위왕왈 “금추병심박 세불가탈. 신청결사이어지 왕가둔의.” 밀우(密友)와 유유(紐由)는 모두 고구려인이다. 동천왕(東川王) 20년(서기 246)에 위(魏)의 유주 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키니, 왕이 성에서 나와 달아났는데 장군 왕기(王頎)가 뒤쫓았다. 왕이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고자 하여 죽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