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三國史記

列傳 第六- 崔致遠

崔致遠

 

崔致遠 字孤雲[或云海雲] 王京沙梁部人也. 史傳泯滅 不知其世系. 致遠少 精敏好學. 至年十二 將隨海舶入唐求學 其父謂曰 十年不第 卽非吾子也 行矣勉之.” 致遠至唐 追師學問無怠.

최치원 자고운[혹운해운] 왕경사량부인야. 사전민멸 부지기세계. 치원소 정민호학. 지년십이장수해박입당구학 기부위왈 십년불제 즉비오자야 행의면지.” 치원지당 추사학문무태.

 

최치원(崔致遠)은 자가 고운(孤雲)[혹은 해운(海雲)이라고도 한다.]이며 서울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역사의 기록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의 집안 내력은 알 수가 없다. 치원은 어려서부터 세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가 되어 배편으로 당에 들어가 유학하고자 할 때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10년이 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힘써 노력하여라!” 치원은 당에 도착하여 스승을 좇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乾符元年甲午 禮部侍郞裴瓚下 一擧及第 調授宣州溧水縣尉 考績爲承務郞侍御史內供奉 賜紫金魚袋. 時黃巢叛 高騈爲諸道行營兵馬都統以討之 辟致遠爲從事. 以委書記之任 其表狀書啓傳之至今.

건부원년갑오 예부시랑배찬 일거급제 조수선주율수현위 고작위승무랑시어사내공봉 사자금어대. 시황소반 고병위제도행영병마도통이토지 벽치원위종사. 이위서기지임 기표상서계전지지금.

 

건부(乾符) 원년 갑오(서기 874)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裴瓚) 아래에서 단번에 급제하여 선주(宣州) 율수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고, 그 치적의 평가에 따라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이 되었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 붉은 동으로된 증표)를 받았다. 이때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병(高騈)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토벌하게 되었는데, 치원을 불러 종사관으로 삼아 서기의 임무를 맡겼다. 그가 지은 표문(表文), 장계(表啓), 서한(書翰), 계사(啓辭)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及年二十八歲 有歸寧之志 僖宗知之 光啓元年 使將詔書來聘. 留爲侍讀 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

급년이십팔세 유귀녕지지 휘종지지 광구원년 사장조서래빙. 유위시독 겸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

 

28세가 되자 귀국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당 희종(僖宗)이 그의 뜻을 알고 광계(光啓) 원년(서기 885)에 그에게 조서를 가지고 신라를 예방하게 하였다. 본국에 머물며 시독(侍讀)에 겸하여 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이 되었다.

 

致遠自以西學多所得 及來將行己志. 而衰季多疑忌 不能容 出爲大山郡太守.

치원자이서락다소득 급래장행기지. 이쇄이다의기 불능용 출위대산군태수.

 

치원은 중국으로 유학한 이래 얻은 바가 많다고 생각하여 돌아온 뒤에는 자기의 뜻을 펼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조 말기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이러한 생각이 용납되지 못하고 외직으로 나가 대산군(大山郡) 태수가 되었다.

 

唐昭宗景福二年 納旌節使兵部侍郞金處誨 沒於海 卽差橻城郡太守金峻爲告奏使. 時致遠爲富城郡太守 柢召爲賀正使 以比歲饑荒 因之 盜賊交午 道梗不果行. 其後致遠亦嘗奉使如唐 但不知其歲月耳.

당소종경복이년 납정절사병부시랑김처회 몰어해 즉차추성군태수김준위고주사. 시치원위부성군태수 저소위가정사 이비세기황 인지 도작교오 도경불과행. 기후치원역상봉사여당 단부지기세월이.

 

당 소종(昭宗) 경복(景福) 2(서기 893)에 납정절사병부시랑(納旌節使兵部侍郞)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 빠져 죽었으므로 곧 추성군(橻城郡) 태수 김준(金峻)을 고주사(告奏使, 국내의 일을 당에 보고하는 사신)로 삼아 보냈다. 이때 치원은 부성군(富城郡) 태수로 있다가 부름을 받아 하정사(賀正使)가 되었으나, 그즈음 당에 해마다 흉년이 들고 이로 인해 도적이 횡행하여 길이 막혀 가지는 못하였다. 그 뒤에도 치원은 당에 사신으로 간 일이 있으나, 그 날짜는 알 수가 없다.

 

故其文集有上太師侍中狀云 伏聞 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隋皇失馭 由於征遼. 貞觀中 我唐太宗皇帝 親統六軍渡海 恭行天罰 高麗畏威請和 文皇受降廻蹕.

고기문집유상태사시중장운 복문 동해지외유삼국 기명마한변한진한 마한즉고려 변한즉백제진한즉신라야. 고려백제 전성지시 강병백만 남침오월 불뇨유연제노 위중국거두 수황실어 유어정요. 정관중 아당태종황제 친통육군도해 공행천벌 고랴외위청화 문황수항회필.

 

그런 까닭에 그의 문집에는 태사시중(太師侍中)에게 올리는 편지가 있는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엎드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마한(馬韓), 변한(卞韓), 진한(辰韓)입니다.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요,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 명이나 되어 남으로 오(), ()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 (), (), ()를 뒤흔들어 중국의 커다란 고민거리가 되었으며, () 황제가 세력을 잃은 것도 요동 정벌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당 태종(太宗) 황제께서 친히 6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하늘의 징벌을 집행하니, 고구려가 그 위엄을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므로 문황제(당 태종)께서 항복을 받아주시고 되돌아갔습니다.

 

此際我武烈大王 請以犬馬之誠 助定一方之難 入唐朝謁 自此而始. 後以高麗百濟 踵前造惡 武烈王朝請爲鄕導. 至高宗皇帝顯慶五年 勅蘇定方 統十道强兵樓舡萬隻 大破百濟. 乃於其地 置扶餘都督府 招緝遺氓 蒞以漢官 以臭味不同 屢聞離叛 遂徙其人於河南.

차제아무열대왕 청이견마지성 조정일방지란 입당조알 자차이시. 후이고려백제 종전조악 무열왕조청위향도. 지고종황제현경오년 칙소정방 통십도강병루강만척 대파백제. 내어기지 치부여도독부 초집유맹 리이한관 이취미부동 누문이반 수사기인어하남.

 

이 무렵 우리 무열대왕(武烈大王)이 갖은 정성을 다해 한 지방의 어려움을 평정하는데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으니, 당에 들어가 조회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에 고구려와 백제가 이전처럼 흉악한 행위를 계속하자, 무열왕이 당 조정으로 들어가 길잡이가 될 것을 청하였습니다. 고종(高宗) 황제 현경(顯慶) 5(서기 660)에 이르러 소정방(蘇定方)에게 칙령을 내려 10도의 강병과 병선 일만 척을 거느리고 백제를 크게 깨뜨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땅에 부여도독부(扶餘都督府)를 두어 유민을 불러 모으고 중국 관리가 다스리게 하였으나, 생활 습속이 같지 않아 배반한다는 말이 자주 들리자 마침내 그 사람들을 하남(河南)으로 옮겼습니다.

 

摠章元年 命英公李勣 破高句麗 置安東都督府 至儀鳳三年 徙其人於河南隴右. 高句麗殘孽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爲渤海. 開元二十年 怨恨天朝 將兵掩襲登州 殺刺史韋俊. 於是 明皇帝大怒 命內史高品何行成太僕卿金思蘭 發兵過海攻討.

총장원년 명영공이적 파고구려 치안동도독부 지의봉삼년 사기인어하남농우. 고구려잔얼류츄취북의태백산하 국호위발해 개원이십년 원한천조 장병엄습등주 살자사위준. 어시 명황제대노명내사고춤하행성태복경김사란 발병과해공토.

 

총장(摠章) 원년(서기 668)에는 영공 이적(李勣)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격파케 하고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의봉(儀鳳) 3(서기 678)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하남과 농우(隴右)에 옮겼습니다.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으로 태백산(太白山, 백두산) 아래를 근거지로 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개원(開元) 20(서기 732)에 당에 원한을 품고 불시에 등주(登州)를 습격하여 자사 위준(韋俊)을 죽였습니다. 이에 명황제(당 현종)께서 크게 노하여 내사 고품(高品)ㆍ하행성(何行成)과 태복경 김사란(金思蘭)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바다를 건너 토벌하게 했습니다.

 

仍就加我王金某 爲正大尉持節充寧海軍事雞林州大都督 以冬深雪厚 蕃漢苦寒 勅命廻軍. 至今三百餘年 一方無事 滄海晏然 此乃我武烈大王之功也. 今某儒門末學 海外凡材 謬奉表章 來朝樂土.

잉취가아왕김모 위정대위지절충녕해군사계림주대도독 이동심설후 번한고한 칙명회군. 지금삼백여년 일방무사 창해안연 차내아무열대왕지공야. 금모유문말학 해외범재 류봉표장 래조낙토.

 

아울러 우리 임금 김 아무개에게 지위를 더하여 정대위지절충녕해군사계림주대도독(正大尉持節充寧海軍事雞林州大都督)으로 삼아 참전하게 하였는데, 깊은 겨울에 눈이 많이 쌓여 양국 군사가 추위에 시달리므로 칙명을 내려 회군케 하셨습니다. 그 후 오늘날까지 3백여 년 동안 한 지방이 무사하고 창해가 평안했던 것은 바로 우리 무열대왕의 공로입니다. 지금 저는 유가의 말단 학자요, 외국의 평범한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표장(表章)을 받들고 좋은 나라에 오게 되었습니다.

 

凡有誠懇 禮合披陳 伏見 元和十二年 本國王子 金張廉風飄 至明州下岸 浙東某官 發送入京 中和二年 入朝使金直諒 爲叛臣作亂 道路不通 遂於楚州下岸 邐迤至楊州 得知聖駕幸蜀 高太尉差都頭張儉 監押送至西川.

범유성간 예합피진 복견 원화십이년 본국왕자 김장렴풍표 지명주하안 절동모관 발송입경. 중화이년 입조사김직량 위반신작난 도로불통 수어초주하안 이이지양주 득지성가행촉 고태위차도두장검 감압송지서천.

 

무릇 진실로 간청이 있어 예에 맞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엎드려 살펴보건대 원화(元和) 12(서기 817)에 본국의 왕자 김장렴(金張廉)이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명주(明州) 해안에 상륙하였을 때 절동(浙東)의 어떤 관리가 서울로 들여보내 주었고, 중화(中和) 2(서기 882)에는 조회하러 간 사신 김직량(金直諒)이 반란군 때문에 길이 막혀 마침내는 초주(楚州)에 상륙하여 헤매다가 양주(楊州)에 이르러서야 황제의 행차가 촉()으로 거동하신 것을 알았는데, 고태위(高太尉)가 도두 장검(張儉)을 보내 서천(西川)까지 호송하였습니다.

 

已前事例分明 伏乞 太師侍中 俯降台恩 特賜水陸券牒 令所在供給舟舡 熟食及長行驢馬草料 幷差軍將 監送至駕前.

이전사례분명 복걸 태사시중 부강대은 특사수륙승첩 영소재공급주강 숙식급장행려마초료 병차군장 감송지가전.”

 

이전의 사례가 이처럼 분명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태사시중께서는 큰 은혜를 베푸시어 특별히 뱃길과 육로의 통행증을 내려주시고, 저희들의 있는 곳에 배편, 음식물 및 장거리 여행에 필요한 말과 사료를 공급하게 하며, 아울러 장졸을 보내 어가에 이르기까지 호송하도록 하여 주소서.”

 

此所謂太師侍中 姓名亦不可知也.

차소위태사시중 성명역불가지야.

 

여기에서 말한 태사시중의 성명은 또한 알 수 없다.

 

致遠自西事大唐 東歸故國 皆遭亂世 屯邅蹇連 動輒得咎 自傷不遇 無復仕進意. 逍遙自放 山林之下江海之濱 營臺榭植松竹 枕藉書史 嘯詠風月 若慶州南山剛州氷山陜州淸凉寺智異山雙溪寺合浦縣別墅 此皆遊焉之所. 最後 帶家隱伽耶山海印寺 與母兄浮圖賢俊及定玄師 結爲道友 棲遲偃仰 以終老焉.

치원자서사대당 동귀고국 개조난세 둔전건연 동첩득구 자상불우 무복사진의. 소요자방 산입지하강해지빈 영대사식송죽 침자서사 소영풍월 약경주남산강주영산협주청량사지리산쌍계사합포현별초 차개유언지소. 최후 대가은가여산해인사 여모형부도현준급정현사 결위도우 서지언앙 이종노언.

 

치원은 서쪽에서 대당을 섬길 때부터 동으로 고국에 돌아왔을 때에도 모두 어지러운 시절을 만나 처신하기가 어렵고 걸핏하면 허물을 뒤집어쓰니,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유유자적 노닐며 자유로운 몸이 되어 산림이나 강과 바닷가에 누각과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놓고 책을 베개 삼아 읽고 풍월을 읊조렸다. 경주의 남산(南山), 강주(剛州)의 빙산(氷山), 합주(陜州)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경남 창원)의 별장과 같은 곳이 다 그가 노닐었던 곳이다. 마지막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耶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면서, 형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定玄)대사와 도우(道友)를 맺고 한가롭게 지내다가 노년을 마쳤다.

 

始西遊時 與江東詩人羅隱相知. 隱負才自高 不輕許可人 示致遠所製歌詩五軸.

시서유시 여강동시인나은상지. 은부재자고 불경허가인 시치원소재가시오축.

 

처음 서쪽으로 가서 유학할 때 강동(江東) 시인 나은(羅隱)과 서로 알게 되었다. 은이라는 사람은 자기의 재주를 믿고 스스로 잘난 체하여 좀처럼 다른 사람을 인정해 주지 않았는데, 치원에게는 자기가 지은 노래와 시 다섯 묶음을 보여 주었다.

 

又與同年顧雲友善 將歸 顧雲以詩送別 略曰

우여동년고운우선 장귀 고운이시송별 약왈

 

또한 같은 해에 급제한 고운(顧雲)과도 잘 사귀었는데, 치원이 돌아오려 할 때 고운이 시를 지어 송별하였으니 대략 다음과 같다.

 

我聞海上三金鼈 金鼈頭戴山高高.

아문해상삼금별 금별두재산고고.

 

내 들으니 바다 위에 금색자라 셋이 있어 머리마다 높고 높은 산을 이었다.

 

山之上兮 珠宮 貝闕 黃金殿 山之下兮 千里萬里之洪濤.

산지상혜 주궁 패궐 황금전 산지하혜 천리만리지홍도.

 

산 위에는 구슬과 자개 궁궐, 황금전각이 있고 산 아래는 천리만리 큰 파도로다.

 

傍邊一點雞林碧 鼈山孕秀生奇特.

방변일점계림벽 별산잉수생기특.

 

그 곁에 점 하나 푸른 계림의 땅 자라산의 정기 어려 기특한 인재 났도다.

 

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箭射破金門策.

십이승선도해래 문장감동중화국 십팔횡행전사원일전사파금문책.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그 문장이 온 중국을 감동시켰고, 열여덟에 과거장을 휩쓸고 다니더니 한 대의 화살로 금문책(궁궐 대문)을 깨뜨렸다.

 

新唐書藝文志云 崔致遠四六集一卷桂苑筆耕二十卷 注云 崔致遠高麗人 賓貢及第爲高騈從事.” 其名聞上國如此 又有文集三十卷 行於世.

신당서예문지운 최치원사육집일권계원필경이십권 주운 최치원고려인 빈공급제위고병종사.“ 기명문상국여차. 우유문집삼십원 행어세.

 

신당서(新唐書)』「예문지(藝文志)에는 최치원의 사륙집(四六集)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주()에는 최치원은 고려인으로서 빈공과(賓貢科, 중국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하던 과거 시험)에 급제하여 고병(高騈)의 종사관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이와 같이 중국에 알려져 있었다. 또한 문집 30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初我太祖作興 致遠知非常人 必受命開國. 因致書問 有雞林黃葉 鵠嶺靑松之句 其門人等 至國初來朝 仕至達官者非一. 顯宗在位 爲致遠密贊祖業 功不可忘. 下敎 贈內史令 至十四歲太平三年壬戌五月[壬戌五月 當作癸亥二月] 贈諡文昌侯.

초아태조작흥 치원지비상인 필수명개국 인치서문 유계림황엽 곡령청송지구 기문인등 지국초래조 임지달관자비일 현종재위 취치원밀찬조업 공불가망. 하교 증내사령 지십사세태평삼년임술오월[임술오월 당작계해이월] 증시문창후.

 

처음 우리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일으키려 할 때, 치원은 태조가 비상한 인물이므로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임을 알았다. 이런 까닭으로 태조에게 글을 보내 문안하였는데, 그 글에 계림(雞林)은 누른 잎이오, 곡령(鵠嶺)은 푸른 솔이로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의 제자들이 개국 초기에 조정에 와서 높은 벼슬에 이른 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현종(顯宗, 고려 현종)이 왕위에 있을 때, 치원이 은밀히 태조의 왕업을 도왔으니 공로를 잊을 수 없다하여 교서를 내려 내사령(內史令)을 추증했고, 14년 태평(太平) 2[3년의 잘못] 임술(壬戌) 5[계해(癸亥) 2월의 잘못]에는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三國史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列傳 第六-崔承祐  (0) 2020.03.28
列傳 第六- 薛聰  (0) 2020.03.28
列傳 第六- 强首  (0) 2020.03.26
列傳 第六-溫達  (0) 2020.03.26
列傳 第六- 貴山  (0) 2020.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