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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列傳 第六- 貴山

貴山

 

貴山 沙梁部人也 父 武殷阿干. 貴山少與部人箒項爲友 二人相謂曰 我等期與士君子遊 而不先正心修身 則恐不免於招辱 盍聞道於賢者之側乎?” 時 圓光法師 入隋遊學 還居加悉寺 爲時人所尊禮.

귀산 사량부인야 부 무은아간. 귀산소여부인추항위우 이인상위왈 아등기여사군자유 이불선정심수신 즉공불면어초욕 개문도어현자지측호?” 시 원광법사 입수유학 환거가실사 위시인소존예.

 

귀산(貴山)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서 아버지는 아간 무은(武殷)이다. 귀산은 어려서부터 같은 부의 사람 추항(箒項)과 벗이 되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우리가 선비나 군자와 함께 교유하기를 기대하면서도,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는다면 욕됨을 면치 못할까 두려우니, 어찌 어진 사람 곁에서 도를 배우지 않겠는가?” 당시에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수나라에 유학을 다녀와서 가실사(加悉寺)에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에게 높은 예우를 받고 있었다.

 

貴山等詣門 摳衣進告曰 俗士顓蒙 無所知識 願賜一言 以爲終身之誡.”

귀산등지문 구의진고왈 속사전몽 무소지식 원사일언 이위종신지계.”

 

귀산 등이 그 문하에 이르러 옷자락을 여미고 나아가 말하였다. “속세의 선비가 어리석고 몽매하여 아는 것이 없사오니, 한 말씀 해주시어 종신토록 계율로 삼게 해 주소서.”

 

法師曰 佛戒有菩薩戒 其別有十 若等爲人臣子 恐不能堪 今有世俗五戒 一曰事君以忠 二曰事親以孝 三曰交友以信 四曰臨戰無退 五曰殺生有擇 若等 行之無忽.”

법사왈 불계유보살계 기별십유 약등위인신자 공불능감. 금유세속오계 일왈사군이충 이왈사친이효 삼왈교우이신 사왈임전무퇴 오왈살생유택 약등 행지무홀!”

 

법사가 말했다. “불가의 계율에 보살계(菩薩戒)가 있어 그것이 열 가지로 구별되어 있으나, 그대들이 남의 신하로서는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으니, 첫째 임금을 섬기는 데는 충성으로 하고, 둘째 부모를 모시는 데는 효성으로써 하고, 셋째 벗과 사귀는데 신의로써 하고, 넷째 전쟁에 임하여서는 물러서지 않으며, 다섯째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 그대들은 이를 실행함에 소홀함이 없게 하라!”

 

貴山等曰 他則旣受命矣 所謂殺生有擇 獨未曉也.”

귀산등왈 타즉기수명의 소위살생유택 독미효야.”

 

귀산 등이 말했다. “다른 것은 말씀을 받들겠습니다만, 이른바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려하라는 말씀만은 이해가 안 갑니다.”

 

師曰 六齋日春夏月不殺 是擇時也. 不殺使畜 謂馬牛雞犬 不殺細物 謂肉不足一臠 是擇物也. 如此 唯其所用 不求多殺 此可謂世俗之善戒也.”

사왈 육제일춘하추동불살 시택시야. 불살사축 위마우계견 불살세물 위육부족일련 시택물야. 여차 유기소용 불구다살 차가위세속지선계야.”

 

법사가 대답했다. “육재일(六齋日:불교용어로 한 달 가운데 부정한 것을 멀리하고 심신을 깨끗하게 하는 여섯 날로 음력 8, 14, 15, 23, 29, 30일을 말한다. )과 봄, 여름에는 살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는 시기를 택함이다. 부리는 가축은 죽이지 않는 것이니 말ㆍ소ㆍ닭ㆍ개를 이르는 것이며, 작은 생물은 죽이지 않는 것이니 고기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이르는 것으로, 이는 대상을 택함이다. 이와 같이 오직 필요한 경우에만 하고 그 이상으로 많이 죽이지 말 것이니, 이는 세속의 좋은 계율이라고 할 만하다.”

 

貴山等曰 自今已後 奉以周旋 不敢失墜.”

귀산등왈 자금이후 봉이주선 불감실추.”

 

귀산 등이 말했다. “지금 이후로는 이 가르침을 받들어 두루 실행하고, 감히 어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眞平王建福十九年壬戌秋八月 百濟大發兵 來圍阿莫[莫 一作暮]. 王使將軍波珍干乾品武梨屈伊梨伐級干武殷比梨耶等 領兵拒之 貴山箒項 幷以少監赴焉.

진평왕건복십구년임술추팔월 백제대발병 래위아막[막 일작모]. 왕사장군차진간건품우리굴이이벌급간무은비리야등 영병거지 귀산추항 병이소감부언.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9년 임술(서기 602) 가을 8월에 백제가 크게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와서 아막성(阿莫城)[()을 모()로도 쓴다.]을 포위하였다. 왕은 장군 파진간 건품(乾品), 무리굴(武梨屈), 이리벌(伊梨伐)과 급간 무은(武殷), 비리야(比梨耶)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였다. 귀산과 추항은 함께 소감(少監) 직으로 전선에 나갔다.

 

百濟敗 退於泉山之澤 伏兵以待之 我軍進擊 力困引還 時 武殷爲殿 立於軍尾 伏猝出 鉤而下之 貴山大言曰 吾嘗聞之師曰 士當軍無退豈敢奔北乎.”

백제패 퇴어천산지택 복병이대지 아군진격 역곤인환 시 무은위전 입어군미 복졸출 구이하지 귀간대언왈 오상문지사왈 사당군무퇴이감분배호.”

 

백제가 패하여 천산(泉山)의 못으로 물러나 병사를 숨겨두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 군대가 진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이때 무은이 후군이 되어 대오의 맨 뒤에 있었는데, 복병이 갑자기 튀어나와 갈고리로 그를 잡아당겨 떨어뜨렸다. 귀산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일찍이 스승에게 듣기를 무사는 적군을 만나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달아나겠는가?”

 

擊殺賊數十人 以己馬出父 與箒項揮戈力鬪 諸軍見之奮擊 橫尸滿野 匹馬隻輪 無反者 貴山等金瘡滿身 半路而卒 王與群臣 迎於阿那之野 臨尸痛哭 以禮殯葬 追賜位貴山奈麻 箒項大舍.

격살적수십인 이기마출부 여추항휘과역투 재군견지분격 횡시만야 필마쌍수 무반자 귀산등금창만신 반로이졸 왕여군신 영어아나지야 임시통곡 이례빈장 추사위귀산나마 추항대사

 

그는 적군 수십 명을 쳐 죽이고 자기 말에 아버지를 태워 탈출하게 한 다음,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웠다. 모든 군사들이 이를 보고 떨쳐나가 공격하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메우고 말 한 필, 수레 한 대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귀산 등은 온 몸에 창칼의 상처를 입고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왕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아나(阿那)의 들에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왕은 그들의 시체 앞으로 나아가 통곡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으며, 귀산에게는 나마를, 추항에게는 대사를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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