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堤上
朴堤上[或云毛末] 始祖赫居世之後 婆娑尼師今五世孫. 祖 阿道葛文王 父 勿品波珍飡. 堤上仕爲歃良州干.
박제상[혹운모말] 시조혁거세지후 파사이사금오세손. 조 아도갈문왕 부 물품파진찬. 제상사위삽량주간.
박제상(朴堤上)[혹은 모말(毛末)이라고도 한다.]은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요, 파사 이사금(婆娑尼師今)의 5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아도 갈문왕(阿道葛文王)이며, 아버지는 파진찬 물품(勿品)이다. 제상도 벼슬길에 나아가 삽량주(歃良州) 간이 되었다.
先是 實聖王元年壬寅 與倭國講和 倭王請以奈勿王之子未斯欣爲質. 王嘗恨奈勿王使己質於高句麗 思有以釋憾於其子 故不拒而遣之. 又十一年壬子 高句麗 亦欲得未斯欣之兄卜好爲質 大王又遣之. 及訥祗王卽位 思得辯士 往迎之. 聞水酒村干伐寶靺一利村干仇里迺利伊村干波老三人有賢智 召問曰 “吾弟二人 質於倭麗二國 多年不還 兄弟之故 思念不能自止 願使生還 若之何而可?”
선시 실성왕원년임인 여왜국강화 왜왕첨이내물왕지자미사흔위질. 왕상한내물왕사기질어고구려 사유이석감어기자 고불거이견지. 우십일년임자 고구려 역욕득미사흔지형복호위질 대왕우견지. 급눌지왕즉위 사득변사 왕영지. 문수주촌간벌보말일리촌간구리내이이촌간파노삼인유현지 소문왈 “오제이인 질어왜려이국 다년불환 형제지고 사념불능자지 원사생환 약지하이가?”
이보다 앞서 실성왕(實聖王) 원년 임인(서기 402) 왜국과 화친을 맺을 때, 왜왕이 내물왕(奈勿王)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요구하였다. 실성왕은 일찍이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여 내물왕의 아들에게 원한을 풀고자 했으므로, 왜왕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보냈다. 게다가 11년 임자(서기 412)에 고구려에서도 미사흔의 형 복호(卜好)를 볼모로 삼고자 하여, 대왕이 또한 그를 보냈다. 눌지왕(訥祗王)은 즉위하자 말 잘하는 이를 구해 그들을 데려올 생각을 하였다. 대왕은 수주촌(水酒村) 간(干) 벌보말(伐寶靺), 일리촌(一利村) 간 구리내(仇里迺), 이이촌(利伊村) 간 파로(波老) 등 세 사람이 어질고 지혜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불러 물었다. “나의 두 아우가 왜와 고구려 두 나라에 볼모로 가서 여러 해가 되어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형제간인 까닭에 그리운 생각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어 그들을 살아 돌아오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三人同對曰 “臣等聞歃良州干堤上 剛勇而有謀 可得以解殿下之憂.”
삼인동대왈 “신등문삽량주간제상 강영이유모 가득이해전하지우.”
세 사람이 다 같이 아뢰었다. “신들은 삽량주 간 제상이 굳세고 용감하며 지모가 있다 들었습니다. 그가 전하의 근심을 풀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於是 徵堤上使前 告三臣之言 而請行 堤上對曰 “臣雖愚不肖 敢不唯命祗承.”
어시 징제상사전 고삼신지언 이청행 제상대왈 “신수우불초 감불유명지승.”
이에 제상을 불러 어전에 나오게 하여 세 신하의 말을 일러주고, 고구려로 가주기를 요청하니 제상이 대답하였다. “신이 비록 어리석고 불초하오나 어찌 감히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遂以聘禮入高句麗 語王曰 “臣聞交隣國之道 誠信而已 若交質子 則不及五霸 誠末世之事也 今 寡君之愛弟在此 殆將十年 寡君以鶺鴒在原之意 永懷不已 若大王惠然歸之 則若九牛之落一毛 無所損也 而寡君之德大王也 不可量也 王其念之.
수이빙예입고구려 어왕왈 “신문교린국지도 성신이이 약교질자 즉불급오패 성말세지사야. 금과군지애제재차 태장십년 과군이척령재원지의 영회불이 약대왕혜연귀지 즉약구우지락일모 무소손야 이과군지덕대왕야 불가양야 왕기념지.”
마침내 방문의 예를 갖추어 고구려로 들어가서 왕에게 말했다. “신이 듣건대 이웃나라와 교유하는 도리는 정성과 믿음뿐이라고 합니다. 볼모를 교환하는 것과 같은 일은 오패(五霸:춘추시대 다섯 명의 패왕 제(齊) 환공, 진(晉) 문공, 초(楚) 장왕, 오(吳) 합려, 월(越) 구천을 이르는데 왕도(王道)보다는 권모술수로 제패하였다 하여 유가(儒家)에서는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만도 못한 것이니 실로 말세의 일입니다. 지금 저희 임금의 사랑하는 아우가 여기에 있은 지 거의 10년이 됩니다. 저희 임금은 척령(鶺鴒: 시경 소아(小雅) 상체장(常棣障) ‘척령재원(鶺鴒在原) 형제급난(兄弟急難)’에서 유래. 형제가 위급하거나 어려운 일을 당해 서로 돕는 것을 비유한다.)이 들판에 있는 듯이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은혜롭게 그를 돌려보내 주신다면 이는 마치 아홉 마리 소에서 터럭이 하나 빠진 정도와 같아 손해 될 것이 없고, 저희 임금이 대왕께 입는 은덕은 헤아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왕께서는 이 점을 살펴주소서!”
王曰“諾” 許與同歸 及歸國. 大王喜慰曰 “我念二弟 如左右臂 今只得一臂 奈何?”
왕왈“락” 허여동귀 급귀국. 대왕희위왈 “아념이제 여좌우비 금지득일비 내하?”
왕은 “좋다.”고 하면서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들이 귀국하자 대왕은 기뻐하고 노고를 위로하며 말했다. “나는 두 아우 생각하기를 좌우의 팔처럼 했는데, 지금 다만 한 팔만 얻었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堤上報曰 “臣雖奴才 旣以身許國 終不辱命 然 高句麗大國 王亦賢君 是故 臣得以一言悟之 若倭人 不可以口舌諭 當以詐謀 可使王子歸來 臣適彼 則請以背國論使彼聞之.”
제상보왈 “신구노재 기이신허국 종불욕명 연 고구려대국 왕역현군 시고 신득이일언오지 약왜인 불가이구설유 당이사모 가사왕자귀래 신적피 즉청이배국논사피문지.”
제상이 아뢰었다. “신이 비록 재주가 보잘 것 없으나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끝까지 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큰 나라이고 그 왕 또한 어진 임금이었기 때문에 신이 한 마디 말로써 그를 깨닫게 할 수 있었사오나, 왜인 같은 경우는 말로써 깨우칠 수 없으니 속임수를 써야 왕자를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저 곳에 가거든 신이 나라를 배반하였다는 이야기를 퍼뜨려서 저들이 그 소문을 듣게 하소서.”
乃以死自誓 不見妻子 扺栗浦 汎舟向倭. 其妻聞之 奔至浦口 望舟大哭曰 “好歸來.” 堤上回顧曰 “我將命入敵國 爾莫作再見期.”
내이사자서 불견처자 저율포 범주향외. 기처문지 분지포구 망주대곡왈 “호귀래.” 제상회고왈 “아장명입적국 이막작재견기.”
제상은 이에 죽기를 맹세하고 처자식도 만나지 않은 채 율포(栗浦)로 가서 배를 타고 왜로 향하였다. 그의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포구로 달려와 배를 바라보며 크게 통곡하며 “잘 다녀오십시오.”하니 제상이 돌아보면서 말했다. “내가 명을 받들어 적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당신은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지 마시오.”
遂徑入倭國 若叛來者 倭王疑之. 百濟人 前入倭 讒言 新羅與高句麗謀侵王國. 倭遂遣兵 邏戍新羅境外 會高句麗來侵 幷擒殺倭邏人. 倭王乃以百濟人言爲實. 又聞羅王囚未斯欣堤上之家人 謂堤上實叛者.
수경입왜국 약반래자 왜왕의지. 백제인 전입왜 참언 신라여고구려모침왕국. 왜수견병 라수신라경외 회고구려래침 병금살왜라인. 왜왕내이백제인언위실. 우문라왕수미사흔제상지가인 위제상실반자.
드디어 곧바로 왜국에 들어가 마치 고국을 배반하고 온 사람처럼 하였으나, 왜왕이 그를 의심하였다. 한편 백제인이 앞서 왜에 들어와 참소하기를 ‘신라와 고구려가 왕의 나라를 침입하려 모의한다.’고 하였다. 왜가 마침내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 밖에서 순찰하게 하였는데, 때마침 고구려가 침입하고 아울러 왜의 순찰병을 잡아 죽였다. 이로 인하여 왜왕은 백제인의 말을 사실로 여겼다. 또한 신라왕이 미사흔과 제상의 집안 사람들을 가두었다는 소식을 듣자, 제상이 정말 배반자라고 생각하였다.
於是 出師將襲新羅 兼差堤上與未斯欣爲將 兼使之鄕導. 行至海中山島 倭諸將密議 滅新羅後 執堤上未斯欣妻孥以還. 堤上知之 與未斯欣乘舟遊 若捉魚鴨者 倭人見之 以謂無心喜焉. 於是 堤上勸未斯欣潛歸本國 未斯欣曰 “僕奉將軍如父 豈可獨歸.” 堤上曰 “若二人俱發 則恐謀不成.”
어시 출사장습신라 경차제상여미사흔위장 겸사지향도. 행지해중산도 왜제장밀의 멸신라후 집제상미사흔처나이환. 제상지지 여미사흔승즈유 약착어압자 왜인견지 이위무심희언. 어시 제상권미사흔잠귀본국 미사흔왈 “복봉장군여부 이가독귀.” 제상왈 “약이인구발 즉공모불성.”
이에 왜는 군대를 내어 신라를 습격하기로 하고, 제상과 미사흔을 장수로 삼아 길잡이가 되게 하였다. 행렬이 바다 가운데 섬에 이르자 왜의 여러 장수들이 신라를 멸한 뒤에는 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잡아오자고 은밀히 의논하였다. 제상이 이를 알고 미사흔과 함께 배를 타고 노닐면서 마치 물고기와 오리를 잡는 것처럼 행동하니, 왜인들은 이를 보고 아무 생각이 없다고 여겨 기뻐하였다. 이때 제상이 미사흔에게 본국으로 몰래 돌아갈 것을 권하니 미사흔이 말했다. “제가 장군을 아버지처럼 받들고 있는데 어찌 저 혼자 돌아가겠습니까?” 제상이 말하길 “만약 두 사람이 함께 떠난다면 일이 성사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했다.
未斯欣抱堤上項 泣辭而歸. 堤上獨眠室內 晏起 欲使未斯欣遠行. 諸人問 將軍何起之晩 答曰 “前日 行舟勞困 不得夙興.” 及出 知未斯欣之逃 遂縛堤上 行舡追之. 適 煙霧晦冥 望不及焉.
미사흔포제상항 읍사이귀 제상독면실내 안기 욕사미사흔원행. 제인문 장군하기지만? 답왈 “전일 행주노곤 부득숙흥.” 급출 지미사흔지도 수박제상 행강추지. 적 연무회명 망불급언.
미사흔은 제상의 목을 끌어안고 울며 작별하고 신라로 돌아갔다. 제상은 방안에서 혼자 자고 늦게야 일어나, 미사흔이 멀리 도망갈 수 있도록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장군은 어찌 이리 일어나시는 게 늦느냐’고 물으니, 제상이 대답하였다. “어제 뱃놀이로 노곤하여 일찍 일어날 수가 없다.” 그가 밖으로 나와서야 왜인들은 미사흔이 도망한 것을 알고, 마침내 제상을 포박하고 배를 달려 추격하였다. 때마침 안개가 연기처럼 어두컴컴하게 끼어 시야가 미치지 못했다.
歸堤上於王所 則流於木島 未幾 使人以薪火燒爛支體 然後 斬之.
귀제상어왕소 즉유어목도 미기 사인이신화소란지체 연후 참지.
제상을 왜왕이 있는 곳에 돌려보내니, 곧바로 목도(木島)로 유배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을 시켜 섶불로 온 몸을 지지게 한 뒤 목을 베었다.
大王聞之哀慟 追贈大阿飡 厚賜其家 使未斯欣 娶其堤上之第二女爲妻 以報之.
대왕문지애통 추증대아찬 후사기가 사미사흔 취기제상지제이녀위처 이보지.
대왕은 이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며 대아찬을 추증하고 그의 가족들에게 후하게 상을 내렸으며, 미사흔에게 제상의 둘째 딸을 데려다가 아내로 삼게 함으로써 은혜에 보답하였다.
初 未斯欣之來也 命六部遠迎之 及見 握手相泣. 會兄弟置酒極娛 王自作歌舞 以宣其意 今 鄕樂憂息曲 是也.
초 미사흔지래야 명육부원영지 급견 악수상읍. 회형제치주극오 왕자작가무 이선기의 금 향악우식곡 시야.
왕은 처음에 미사흔이 돌아왔을 때 6부에 명하여 멀리 나가서 그를 맞이하고, 만나게 되자 손을 붙잡고 서로 울었다. 형제들이 모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마음껏 즐기다가 왕이 스스로 가무를 지어 그 뜻을 내보였는데, 지금 향악(鄕樂)의 우식곡(憂息曲)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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