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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列傳 第五- 密友ㆍ紐由

密友紐由

 

密友紐由者 並高句麗人也 東川王二十年 魏幽州刺史毌丘儉 將兵來侵 陷丸都城 王出奔 將軍王頎追之. 王欲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奔散殆盡 唯東部密友 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遁矣.”

밀우유유자 병고구려인야. 동천왕이십년 위유주자사관구검 장병래침 함환도성 왕출분 장군왕기추지. 왕욕분남옥저 지우죽령 군사분산태진 유동부밀우 독재측. 위왕왈 금추병심박 세불가탈. 신청결사이어지 왕가둔의.”

 

밀우(密友)와 유유(紐由)는 모두 고구려인이다. 동천왕(東川王) 20(서기 246)에 위()의 유주 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키니, 왕이 성에서 나와 달아났는데 장군 왕기(王頎)가 뒤쫓았다. 왕이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고자 하여 죽령(竹嶺)에 이르렀을 때, 군사들은 거의 다 달아나고 흩어져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만이 혼자 왕 옆에 있었다. 그가 왕에게 아뢰었다. “이제 추격해오는 병사가 매우 가까이 있으니 형세가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이 결사적으로 막으면 왕께서는 도망하소서.”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僅得脫而去 依山谷 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수모사사 여지부적역전. 왕근득탈이거 의산곡 취산졸자위 위왈 약유능취밀우자 후상지.” 하부유옥구전대왈 신시왕언수어전지 견밀우복지 내부이지. 왕침지이고 구이내소.

 

마침내 결사대를 모아 함께 적진으로 달려가 힘껏 싸웠다. 왕은 이 틈을 타서 겨우 탈출하고,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병졸들을 모아 스스로 방위하며 말하길 만약 밀우를 찾아올 수 있는 자가 있다면 후한 상을 줄 것이다.” 하부(下部, 서부의 별칭) 사람 유옥구(劉屋句)가 앞으로 나서면서 대답하기를 신이 가보겠습니다.”라 하더니, 마침내 싸움터로 가서 땅에 쓰러져 있는 밀우를 발견하고 즉시 업어 왔다. 왕이 무릎에 받쳐 눕히자 한참 있다가 소생하였다.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 往犒魏軍 因伺隙 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

왕문행전전 지남옥저 위군추불지 왕계궁세굴 부지소위. 동부인유유진왈 세심위박 불가도사. 신유우계 청이음식 왕호위군 인사극 자살피장 약신계득성 즉왕가탈격결승.”

 

왕은 사잇길로 이리저리 헤매다가 남옥저에 이르렀지만 위군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계책이 다하고 형세도 꺾여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 동부 사람 유유가 나와 말했다. “형세가 매우 위급하오나 그냥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하나 있사온데,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를 대접하는 척 하다가 틈을 보아 저들의 장수를 찔러 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신의 계책이 이루어진다면 이때 왕께서 떨쳐 공격해 승부를 결판내소서.”

 

 

王曰 紐由入魏軍 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矣.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왕왈 유유입위군 사항왈 과군획죄어대국 도지해빈 초궁무지의. 장이청항어진전 귀사사구 선견소신 치불전지물 위종자차.”

 

왕이 좋다.”고 하였다. 유유가 위의 군중에 들어가서 거짓으로 항복하고 말하길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도망하여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 둘 곳이 없습니다. 장차 귀국 진영 앞에 나와 항복하고 사구(司寇, 형벌을 맡은 관리)에게 목숨을 맡기려 하는데, 먼저 저를 보내 변변치 않은 음식으로 종군하는 이들에게 대접하라 했습니다.” 하니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拔刀 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위장문지 장수기항 유유은도식기 진전발도 자위장흉 여지구나 위군수란.

 

위의 장수가 이 말을 듣고 항복을 받아들이려 했다. 유유가 칼을 음식 그릇에 숨겼다가 앞으로 나가면서 칼을 뽑아 위장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으니, 위나라 군중이 갑자기 혼란에 빠졌다.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 不能陳 遂自樂浪而退.

왕분군위삼도 급격지 위군요란 불능진 수자낙랑이퇴.

 

왕은 군대를 세 길로 나누어 급히 그들을 공격하니 위나라 군대가 어지러워져 진을 정비하지 못하더니, 마침내 낙랑(樂浪)으로부터 물러갔다.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 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綠豆訥河原 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왕복국논공 이밀우유유 위제일 사밀우거곡청목곡 사옥구압록누눌하원 이위식읍 추증유유위구사자 우이기자다우위대사자.

 

왕이 서울로 돌아와서 전공을 논의했는데 밀우와 유유를 제일로 삼아 밀우에게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하사하고, 옥구에게 압록(鴨綠)의 두눌하원(豆訥河原)을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유유에게는 구사자(九使者)를 추증하고, 또한 그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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