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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列傳 第五- 明臨答夫

明臨答夫

 

明臨荅夫 高句麗人也 新大王時 爲國相 漢玄菟郡太守耿臨 發大兵欲攻我. 王問群臣戰守孰便 衆議曰 漢兵 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명림답부 고구려인야. 신대왕시 위국상. 한현토군태수경림 발대병욕공아. 왕문군신전수집편 중의왈 한병 시중경아 약불출전 피이아위겁 수래. 차아국산험이로애 차소위일부당관 만부막당자야. 한병수중 무여아하. 청출사어지.”

 

명림답부(明臨荅夫)는 고구려인이다. 신대왕(新大王) 때 국상이 되었다. 한나라 현도군(玄菟郡) 태수 경림(耿臨)이 대병을 내어 우리를 치려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공격과 방어 가운데 어느 편이 유리할 것인가를 물으니,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길 한나라 군사는 병사의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데,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는다면 저들이 우리를 비겁하다 하여 자주 올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야말로 한 명이 관문을 지키면 만 명이 당해낼 수 없는 형국입니다. 한나라 군사가 비록 많다고 하지만 우리를 어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청컨대 군대를 출동시켜 막으소서.”

 

荅夫曰 不然. 漢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少者宜守 兵家之常也. 今 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迫之 可以得志.” 王然之 嬰城固守.

답부왈 불연. 한국대민중 금이강병원투 기봉불가당야. 이우병중자의전 병소자의수 병가지상야. 금 한인천리전량 불능지구. 약아심구고루 청야이대지 피필불과순월 기인이귀 아이경졸박지 가이득지.” 왕연지 영성고수.

 

답부가 그렇지 않습니다. 한은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으며, 지금 강병으로 멀리서 쳐들어 왔으니 그 예봉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또한 병사가 많은 경우에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병사가 적은 경우에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 병가의 법칙입니다. 지금 한나라 사람들은 천리길로 군량을 운반해 왔으므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들판의 곡식을 모두 비워놓고 기다린다면 저들은 틀림없이 한 달이 넘지 않아서 굶주리고 피곤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굳센 병사들로 들이닥친다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옳다 여기고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荅夫帥師數千騎 追之 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 賜答夫坐原及質山爲食邑.

한인공지불극 사졸기아인환. 답부사수수천기 추지 전어좌원 한군대패 필마불반. 왕대열 사답부좌원급질산위식읍.

 

한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장수와 병졸들이 굶주리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답부가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쫓아 좌원(坐原)에서 싸웠는데, 한나라 군사가 대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質山)을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十五年秋九月卒 年百十三歲 王自臨慟 罷朝七日 以禮葬於質山 置守墓二十家.

십오년추구월졸 년백십삼세 왕자림통 차조칠일 이례장어질산 치수묘이십가.

 

그가 15(서기 179) 가을 9월에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왕이 몸소 가서 애통해하고 7일간 조정업무를 파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사 지내고 묘지기 20가구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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