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460) 썸네일형 리스트형 列傳 第五-祿眞 祿眞 祿眞 姓與字 未詳 父秀奉一吉飡. 祿眞二十三歲始仕 屢經內外官 至憲德大王十年戊戌 爲執事侍郞. 十四年 國王無嗣子 以母弟秀宗 爲儲貳 入月池宮. 時 忠恭角干爲上大等 坐政事堂 注擬內外官 退公感疾. 召國醫診脈 曰 “病在心臟 須服龍齒湯.” 遂告暇三七日 杜門不見賓客. 녹진 성여자 미상. 부수봉일길찬 녹진이십삼세시사 누경내외관 지헌덕대왕십년무술 위집사시랑. 십사년 국왕무사자 이모제수종 위저이 입월지궁. 시 충공각간위상대등 좌정사당 주의내외관 퇴공감질. 소국의진맥 왈 “병재심장 수복용치탕 수고가삼칠일 두문불견빈객. 녹진(祿眞)의 성과 자는 자세하지 않다. 아버지는 일길찬 수봉(秀奉)이다. 녹진은 23세에 비로소 관직에 올라 여러 차례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다가 헌덕대왕(憲德大王) 10년 무술(서기 818)에 집사시랑(執.. 列傳 第五 -金后稷 金后稷 金后稷 智證王之曾孫 事眞平大王 爲伊飡 轉兵部令 大王頗好田獵 后稷諫曰 古之王者 必一日萬機 深思遠慮 左右正士 容受直諫 孶孶矻矻 不敢逸豫 然後 德政醇美 國家可保 今 殿下日與狂夫獵士 放鷹犬 逐雉兎 奔馳山野 不能自止 老子曰 馳騁田獵 令人心狂 書曰 內作色荒 外作禽荒 有一于此 未或不亡. 由是觀之 內則蕩心 外則亡國 不可不省也 殿下其念之. 김후직 지증왕지증손 사진평대왕 위이찬 전병부령. 대왕번호전렵 후직간언 “고지왕자 필일일만기 심사원려 좌우정사 영수직간 자자골골 불감일예. 연후 덕정순미 국가가보. 금 전라일여 광부렵사 방응견 축치토 분치산야 불능자지. 노자왈 ‘치빙전렵 영인심광.’ 서왈 ‘내작색광 외작금황 유일우차 미혹불망.’ 유시관지 내즉탕심 외즉망국 불가불성야 전하기념지.” 김후직(金后稷)은 지증왕(智證王).. 列傳 第五-乙巴素 列傳 第五-乙巴素 乙巴素 高句麗人也 國川王時 沛者於卑留評者左可慮等 皆以外戚擅權 多行不義 國人怨憤. 王怒欲誅之 左可慮等謀反 王誅竄之. 을파소 고구려인야. 국천왕시 패자어비류평자좌가려등 개이외척천권 다행불의 국인원분. 왕노역주지 좌가려등모반 왕주찬지. 을파소(乙巴素)는 고구려(高句麗) 사람이다. 국천왕(國川王) 때의 패자(沛者) 어비류(於卑留)와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 등이 모두 외척의 신분으로 권세를 부리고 불의한 행동을 많이 하자,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개하였다. 왕이 노하여 그들을 목 베려 하자 좌가려 등이 모반하였으므로, 왕이 그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遂下令曰 “近者 官以寵授 位非德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今 汝四部 各擧賢良在下者.” 於是 四部共擧東部晏留 王徵之 委以國政. .. 列傳 第四-斯多含 斯多含 斯多含 系出眞骨 奈密王七世孫也 父仇梨知級飡 本高門華冑 風標淸秀 志氣方正. 時人請奉爲花郞 不得已爲之. 其徒無慮一千人 盡得其歡心. 사다함 계출진골 내밀왕칠세손야 부구리지급찬 본고문화주 풍표청수 지기방정. 시인청봉위화랑 부득이위지. 기도무려일천인 진득기환심. 사다함(斯多含)은 진골 계통으로 내밀왕(奈密王, 내물왕)의 7세손이요, 아버지는 급찬 구리지(仇梨知)이다. 본래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서 풍채가 깨끗하고 준수하며 뜻과 기백이 방정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하므로 마지못해 화랑이 되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무려 1천 명이나 되었는데 사다함은 그들 모두의 환심을 얻었다. 眞興王命伊飡異斯夫 襲加羅[一作加耶]國 時 斯多含年十五六 請從軍 王以幼少不許. 其請勤而志確 遂命爲貴幢裨將 .. 列傳 第四-張保皐, 鄭年 張保皐, 鄭年 張保臯[羅紀作弓福]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鄕邑父祖. 皆善鬪戰 年復能沒海底 行五十里不噎. 角其勇壯 保臯差不及也 年以兄呼保臯. 保臯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二人如唐 爲武寧軍小將 騎而用槍 無能敵者. 장보고[라기작궁복]정년[년혹작연] 개신라인 단부기향읍부조. 개선투전 연복능몰해저 행오십리불열. 각기용장 보고차불급야 연이형호보고. 보고이치 연이예 상저어불상하. 이인여당 위무령군소장 기이용창 무능적자. 장보고(張保臯)[『신라본기』에는 궁복(弓福)으로 되어 있다.]와 정년(鄭年)[년(年)은 연(連)이라고도 한다.]은 모두 신라 사람인데 그들의 고향과 조상은 알 수 없다. 두 사람 다 싸움을 잘하였는데, 정년은 또한 물밑에서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차지 않았다. 그 날램과 씩씩함을 견주어 보면 .. 列傳 第四-黑齒常之 黑齒常之 黑齒常之 百濟西部人 長七尺餘 驍毅有謀略 爲百濟達率兼風達郡將 猶唐刺史云 蘇定方平百濟 常之以所部降. 而定方囚老王 縱兵大掠 常之懼 與左右酋長十餘人遯去 嘯合逋亡 依任存山自固 不旬日 歸者三萬. 定方勒兵攻之 不克. 遂復二百餘城. 흑치상지 백제서부인 장칠척여 효의유모략 위백제달솔경풍달군장 유당자사운. 소정방평백제상지이소부항. 이정방인노왕 종별대략 상지구 여좌우추장십여인둔거 소합포망 임존산자고불순일 귀자삼만 정방칙병공지 불극. 수복이백여성.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의 서부 사람인데 키가 7척이 넘고 날래고 굳세며 지모가 있었다. 그는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군(風達郡)의 장수를 겸하였는데, 이 직위는 당의 자사(刺史, 지방 관리)와 같다고 한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였을 때, 그는 자기 부하를 데리고 항복하였.. 列傳 第四-金陽 金陽 金陽字魏昕 太宗大王九世孫也. 曾祖周元伊飡 祖宗基蘇判 考貞茹波珍飡 皆以世家爲將相. 陽生而英傑 太和二年 興德王三年 爲固城郡太守 尋拜中原大尹 俄轉武州都督 所臨有政譽. 김양자위흔 태종대왕구세손야. 증조주원이찬 조종기소판 고정여파진찬 개이세가위장상. 양생이영걸 태화이년 흥덕왕삼년 위고성군태수 심배중원대윤 아전무주도독 소임유정예. 김양(金陽)의 자(字)는 위흔(魏昕)이니, 태종대왕(太宗大王)의 9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찬 주원(周元)이오, 할아버지는 소판 종기(宗基)요, 아버지는 파진찬 정여(貞茹)이니 모두 대대로 장군과 재상이었다. 양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였다. 태화(太和) 2년, 흥덕왕 3년(서기 828)에 고성군(固城郡, 경남 고성) 태수가 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중원(中原, 충북 충주) 대윤(大.. 列傳 第四-金仁問 金仁問 金仁問 字仁壽 太宗大王第二子也. 幼而就學 多讀儒家之書 兼涉莊老浮屠之說. 又善隸書射御鄕樂 行藝純熟 識量宏弘 時人推許. 김인문 자인수 태종대왕제이자야. 유이취학 다독유가지서 겸섭장노부도지설. 우선예서사어행약 행예순숙 식량굉홍 시인추허. 김인문(金仁問)의 자는 인수(仁壽)이고, 태종대왕(太宗大王)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 학문의 길로 나아가 유가의 서적을 많이 읽었으며, 동시에 『장자』, 『노자』 및 불교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또 예서를 잘 쓰고 활쏘기, 말타기, 향악을 잘하였는데, 기예에 익숙하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시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였다. 永徽二年 仁問年二十三歲 受王命 入大唐宿衛. 高宗謂涉海來朝 忠誠可尙 特授左領軍衛將軍 四年 詔許歸國覲省. 太宗大王授以押督州摠管. 於是 築獐山城 以設險.. 이전 1 ··· 28 29 30 31 32 33 34 ··· 18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