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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列傳 第四-張保皐, 鄭年

張保皐, 鄭年

 

張保臯[羅紀作弓福]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鄕邑父祖. 皆善鬪戰 年復能沒海底 行五十里不噎. 角其勇壯 保臯差不及也 年以兄呼保臯. 保臯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二人如唐 爲武寧軍小將 騎而用槍 無能敵者.

장보고[라기작궁복]정년[년혹작연] 개신라인 단부기향읍부조. 개선투전 연복능몰해저 행오십리불열. 각기용장 보고차불급야 연이형호보고. 보고이치 연이예 상저어불상하. 이인여당 위무령군소장 기이용창 무능적자.

 

장보고(張保臯)[신라본기에는 궁복(弓福)으로 되어 있다.]와 정년(鄭年)[()은 연()이라고도 한다.]은 모두 신라 사람인데 그들의 고향과 조상은 알 수 없다. 두 사람 다 싸움을 잘하였는데, 정년은 또한 물밑에서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차지 않았다. 그 날램과 씩씩함을 견주어 보면 보고가 연에게 좀 미치지 못하였으나, 연은 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그러나 보고는 나이로, 연은 기예로 항상 맞서서 서로 지려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당나라에 가서 무령군(武寧軍) 小將으로 있을 때, 말을 달리고 창을 쓰는 데 있어서 대적할 자가 없었다.

 

後 保臯還國 謁大王曰 遍中國 以吾人爲奴婢 願得鎭淸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淸海 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大王與保臯萬人 此後 海上無鬻鄕人者.

후 보고환국 알대왕왈 편중국 이오인위노비 원득진청해 사적부득략인서거 청해 신라해로지요 금위지완도 대왕여보고만인 차후 해상무죽향인자.

 

그 뒤에 보고가 귀국하여 대왕(흥덕왕)에게 아뢰었다. “중국을 두루 다녀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었습니다.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하여 적들이 백성들을 약탈하여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소서.”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지로 지금은 완도(莞島)라고 부른다. 대왕이 보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게 하니, 이후로는 해상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팔아먹는 자가 없어졌다.

 

保臯旣貴 年去職饑寒 在泗之漣水縣. 一日 言於戍將馮元規曰 我欲東歸 乞食於張保臯.” 元規曰 若與保臯所負如何 奈何去取死其手.” 年曰 饑寒死 不如兵死快 況死故鄕耶?” 遂去謁保臯.

보고기귀 연거직기한 재사지연수현. 일일 연어수장풍원규왈 아욕동귀 걸식어장보고.” 원규왈 약여보고소부여하 내하거취사기수.” 연왈 기한가 불여병사쾌 황사고향야.” 수거알보고.

 

보고는 이미 귀한 자리에 올랐으나, 정년은 직업을 잃고 사수(泗水)의 연수현(漣水縣)에서 춥고 배고프게 살았다. 하루는 수비군 장수 풍원규(馮元規)에게 말했다. “나는 동쪽으로 돌아가서 장보고에게 의탁하려 한다.” 원규가 말했다. “그대는 보고와 사이가 어떠한가? 어찌하여 그곳에 가서 그의 손에 죽으려 하는가?” 정년이 말했다. “굶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통쾌하게 죽는 게 낫다. 더구나 고향에서 죽는다면 좋지 않겠는가?” 드디어 그곳을 떠나 장보고를 만났다.

 

飮之極歡 飮未卒 聞王弑國亂無主. 保臯分兵五千人與年. 持年手泣曰 非子不能平禍難.” 年入國 誅叛者立王. 王召保臯爲相 以年代守淸海[此與新羅傳記頗異 以杜牧立傳 故兩存之].

음지극롼 음미졸 문왕시국난무주. 보고분병오천인여연 지연수읍왈 비자불능평화란.” 연입국주반자입왕. 왕소보고위상 이연대수청해[차여신라전기파이 이두목입전 고우존지]

 

정년이 보고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마음껏 즐기는데, 술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왕이 시해되어 나라가 어지러우며 임금이 없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보고가 군사 5천 명을 나누어 정년에게 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했다. “그대가 아니면 나라의 화란을 평정할 수 없다.” 정년이 서울로 들어가 배반한 자를 죽이고 왕을 세웠다. 왕은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은 보고를 대신하여 청해를 지키게 하였다.[이는 신라의 전기와는 사뭇 다르지만, 두목(杜牧)이 지은 전기이므로 두 가지를 다 남겨둔다.]

 

論曰. 杜牧言 天寶安祿山亂 朔方節度使安思順 以祿山從弟賜死 詔郭汾陽代之. 後旬日 復詔李臨淮 持節分朔方半兵 東出趙魏. 當思順時 汾陽臨淮俱爲牙門都將 二人不相能 雖同盤飮食 常睇相視 不交一言.

논왈 두목언 천보안록산란 역방절도사안사순 이녹산종제사사 조곽분양대지. 후순일 복조이임회 지절분삭방반병 동출조위. 당사순시 분양임회구위아문도장 이인불상능 수동반음식 상상시 불교일언.

 

사관이 논평한다. 두목이 말하였다. “천보(天寶, 당 현종의 연호) 연간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삭방절도사 안사순(安思順)은 녹산의 사촌동생이라는 이유로 사형당했고, 곽분양(郭汾陽)에게 그를 대신하라는 조서가 내려졌다. 열흘 후에는 다시 이임회(李臨淮)에게 조서를 내려, 부절(符節, 조정의 명령을 받았다는 증표)을 가지고 가서 삭방 군사의 절반을 나누어 동쪽 조()ㆍ위() 지방에 나가게 하였다. 사순 때는 분양과 임회가 모두 본진의 장수로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한솥밥을 먹으면서도 항상 서로 눈을 흘기고 한 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았었다.

 

及汾陽代思順 臨淮欲亡去 計未決 詔臨淮 分汾陽半兵東討. 臨淮入請曰 一死固甘 乞免妻子.’ 汾陽趍下 持手上堂 偶坐曰 今國亂主遷 非公不能東伐 豈懷私忿時耶?’

급분양대사순 임회욕망거 계미결 조임회 분분양반병동토. 임회입청왈 일사고감 걸면처자 분양추하 지수상당 우좌왈 금국난주천 비공자불능동벌 이회사분시야.

 

분양이 사순을 대신하게 되자 임회는 도망하려 하였으나 미처 결행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임회에게 조서가 내려져 분양의 병력 절반을 나누어 동쪽을 토벌하라고 하였다. 임회가 들어가 분양에게 청하였다. ‘이 한 몸이 죽는 것은 실로 달게 받겠으나 처자식만은 죽음을 면하게 해주시오.’ 분양은 아래로 내려와 임회의 손을 잡고 당상으로 올라 마주 앉으며 지금 나라가 어지러워 임금이 피난하였는데 그대가 아니면 동쪽의 적을 토벌할 수가 없소. 어찌 사사로운 원한을 생각할 때이겠는가.’라고 말했다.

 

及別 執手泣涕 相勉以忠義 訖平巨盜 實二公之力. 知其心不叛 知其材可任 然後 心不疑 兵可分. 平生積憤 知其心 難也 忿必見短 知其材 益難也 此保臯與汾陽之賢等耳.

급별 집수읍채 상면이충의 평거도 실이공지력. 지기심불반 지기재가임 연후 심불의 병가분.평생적분 지기심 란의 분필견단 지기재 익난야 차보고여분양지현등이.

 

그들은 작별할 때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충성과 의리로써 서로 격려하였으니, 큰 도적을 평정하게 된 것은 실로 두 사람의 힘이었다. 그 마음이 배반하지 않을 것을 알고, 그 재능이 일을 맡길 만한 것임을 안 뒤에라야 비로소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평생토록 상대에게 분한 심정을 쌓고 있으면 상대의 마음을 알기 어렵다. 원한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상대의 단점이 먼저 보이게 되므로 상대의 재능을 알아보기가 더욱 어렵다. 이 점에서는 장보고와 분양의 어짊에 차이가 없다.

 

年投保臯 必曰 彼貴我賤 我降下之 不宜以舊忿殺我.’ 保臯果不殺 人之常情也 臨淮請死於汾陽 亦人之常情也. 保臯任年事 出於己 年且饑寒 易爲感動.

연투보고 필왈 피귀아천 아항하지 불의이구분살아.’ 보고과불살 인지상정야 임회청사어분양 역인지상정야. 보고임연사 출어기 년차기한 역위감동.

 

정년이 보고에게 의탁할 때 틀림없이 저 사람은 귀하게 되었고 나는 비천하니, 내가 자신을 낮춘다면 옛날의 원한 때문에 나를 죽이지는 않으리라.’라고 하였을 것이다. 보고가 과연 그를 죽이지 않았으니 이는 인지상정이오, 임회가 분양에게 죽기를 청한 것도 역시 인지상정이었다. 장보고가 정년에게 임무를 맡긴 것은 자신이 결정한 것이었다. 정년 또한 춥고 배고픈 처지였으므로 감동되기도 쉬운 일이었다.

 

汾陽臨淮平生抗立 臨淮之命 出於天子 攉於保臯 汾陽爲優. 此乃聖賢遲疑成敗之際也. 彼無他也 仁義之心 與雜情並植 雜情勝則仁義滅 仁義勝則雜情消. 彼二人 仁義之心旣勝 復資之以明 故卒成功.

분양임회평생항립 임회지명 출어천자 확어보고 분영위우. 차내성현지의성패지제야. 피무타야 인의지심 여잡정병식 잡정승즉인의멸 인의승즉잡정소. 피이인 인의지심기승 복자지이명 고졸성공.

 

그러나 분양과 임회는 평생 대립하였으며 임회가 받은 명령은 천자가 결정한 것이니, 장보고와 비교하자면 곽분양이 조금 낫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현들이 성패를 속단하지 못하는 대목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의의 마음이 잡스런 감정과 함께 존재하여 잡스런 감정이 이기면 인의가 사라지고, 인의가 이기면 잡스런 감정이 사라지는 이치이다. 장보고와 곽분양 두 사람은 인의의 마음이 이긴 데다 현명함이 바탕을 이루었기 때문에 마침내 성공하였던 것이다.

 

世稱周召爲百代之師 周公擁孺子 而召公疑之. 以周公之聖召公之賢 少事文王 老佐武王 能平天下 周公之心 召公且不知之. 苟有仁義之心 不資以明 雖召公尙爾 況其下哉.

세칭주소위백대지사 주공옹유자 이소공의지. 이주공지성소공지현 소사문왕 노좌무왕 능평천하 주공지심 소공차부지지 구유인의지심 부자이명 수소공상이 황기하재.

 

세상 사람들이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을 백 대의 스승으로 일컫지만, 주공이 어린 임금을 끼고 돌 때 소공이 그를 의심했었다. 주공의 성스러움과 소공의 어짊으로 젊어서는 문왕(文王)을 섬기고, 늙어서는 무왕(武王)을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하였으나, 주공의 마음을 소공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인의의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바탕에 현명함이 없다면, 소공도 이러한데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들이야 어떠하겠는가?

 

語曰 國有一人 其國不亡.’ 夫亡國 非無人也 丁其亡時 賢人不用 苟能用之 一人足矣.”

어왈 국유일인 기국불망 부망국 비무인야 정기망시 현인불용 구능용지 일인족의.

 

옛말에 나라에 군자 한 사람만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무릇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망할 때에 어진 사람이 등용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어진 사람이 등용된다면 한 사람으로도 족한 것이다.”

 

宋祁曰 嗟乎 不以怨毒相甚 而先國家之憂 晋有祁奚 唐有汾陽 保臯 孰謂夷無人哉?”

송기왈 차호 불이원독상심 이선국가지우 진유기해 당유분양 보고 수위이무인재?”

 

송기(宋祁)는 말하였다. “아아! 개인적인 원한으로 서로 해치지 않고 나라의 우환을 먼저 생각한 사람으로 진()에 기해(祁奚)가 있고, 당에 곽분양과 장보고가 있었으니 누가 동이(東夷)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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