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陽
金陽字魏昕 太宗大王九世孫也. 曾祖周元伊飡 祖宗基蘇判 考貞茹波珍飡 皆以世家爲將相. 陽生而英傑 太和二年 興德王三年 爲固城郡太守 尋拜中原大尹 俄轉武州都督 所臨有政譽.
김양자위흔 태종대왕구세손야. 증조주원이찬 조종기소판 고정여파진찬 개이세가위장상. 양생이영걸 태화이년 흥덕왕삼년 위고성군태수 심배중원대윤 아전무주도독 소임유정예.
김양(金陽)의 자(字)는 위흔(魏昕)이니, 태종대왕(太宗大王)의 9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찬 주원(周元)이오, 할아버지는 소판 종기(宗基)요, 아버지는 파진찬 정여(貞茹)이니 모두 대대로 장군과 재상이었다. 양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였다. 태화(太和) 2년, 흥덕왕 3년(서기 828)에 고성군(固城郡, 경남 고성) 태수가 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중원(中原, 충북 충주) 대윤(大尹)으로 임명되었다가 곧 무주(武州, 광주) 도독으로 전임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정치를 잘한다는 칭송을 들었다.
開成元年丙辰 興德王薨 無嫡嗣 王之堂弟均貞 堂弟之子悌隆 爭嗣位. 陽與均貞之子阿飡祐徵均貞妹壻禮徵 奉均貞爲王 入積板宮 以族兵宿衛. 悌隆之黨金明利弘等來圍. 陽陳兵宮門 以拒之曰 “新君在此 爾等何敢兇逆如此.” 遂引弓射殺十數人 悌隆下裴萱伯 射陽中股. 均貞曰 “彼衆我寡 勢不可飡 公其佯退 以爲後圖.” 陽於是突圍而出 至韓歧[一作韓祇]市 均貞沒於亂兵 陽號泣旻天 誓心白日 潛藏山野 以俟時來.
개성원년병진 흥덕왕훙 무적사 왕지당제균정 당제지자재륭 쟁사위. 양여균정지자아찬우징슌정매서예징 봉균정위왕. 입적판궁 이족병숙위. 제륭지당김명리홍등래위 양진병군문 이거지왈 “신군재차 이등아감흉역여차.” 수인궁사살십수인 제륭하배훤백 사양중굉. 균정왈 “치중아과 세불가찬 공기양퇴 이위후도.” 양어시돌위이출 지한기[일작한기]시 군정몰어난병 양호읍호천 서심백일 잠장산야 이사이래.
개성(開成) 원년(서기 836) 병진에 흥덕왕(興德王)이 돌아가시고, 물려받을 적장자가 없자 왕의 사촌동생 균정(均貞)과 다른 사촌동생의 아들 제륭(悌隆)이 서로 왕위를 이어받고자 다투었다. 이때 김양은 균정의 아들인 아찬 우징(祐徵)과 균정의 매부인 예징(禮徵)과 함께 균정을 받들어 왕으로 삼고 적판궁(積板宮)에 들어가 사병으로서 숙위케 하였다. 그때 제륭의 일당인 김명(金明), 이홍(利弘) 등이 적판궁을 포위하였다. 양은 병사들을 궁문에 배치하여 그들을 막으면서 말했다. “새 임금이 여기 계시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처럼 흉악하게 거역하느냐?” 그는 드디어 활을 당겨 십여 명을 쏘아 죽였는데 제륭의 부하 배훤백(裴萱伯)이 양을 쏘아 다리를 맞혔다. 균정이 말했다. “저들은 숫자가 많고 우리는 적어 막을 수 없는 형편이니 공은 물러나는 체하여 뒷날을 도모하시오!” 김양이 이에 포위망을 뚫고 나와서 한기(韓岐)[한기(漢祈)라고도 한다.] 시에 이르렀는데, 균정은 반란군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양은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며 해를 두고 복수를 맹세하고, 산야에 숨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至開成二年八月 前侍中祐徵 收殘兵 入淸海鎭 結大使弓福 謀報不同天之讐 陽聞之 募集謀士兵卒 以三年二月 入海 見祐徵 與謀擧事 三月 以勁卒五千人 襲武州 至城下 州人悉降 進次南原 迕新羅兵 與戰克之 祐徵以士卒久勞 且歸海鎭 養兵秣馬
지개성이년팔월 전시중우징 수잔병 입청해진 결대사궁복 모보부동천지수. 양문지 모집모사병졸 이삼년이월 입해 견우징 여모거사. 삼월 이경졸오천인 습무주 지성라 주인실항 진차남원오신라병 여전극지. 우징이사졸구노 차귀해진 양병말마.
개성(開成) 2년(서기 837) 8월, 전 시중 우징(祐徵)이 남은 병사를 수습하여 청해진(淸海鎭, 완도)으로 들어가 대사 궁복(弓福, 장보고)과 결탁하고 불구대천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양은 이 소식을 듣고 참모와 병졸들을 모집하여 3년(서기 838) 2월에 청해진으로 가서 우징을 만나 함께 거사할 것을 모의하였다. 3월에 정예병 5천을 거느리고 무주를 습격하여 성 밑에 다다르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그들은 계속 진군하여 남원(南原)에 이르러 신라군과 마주 싸워 이겼다. 우징은 군사들이 오랫동안 싸우느라 피로했다 하여 다시 청해진으로 돌아가 군사를 휴양하도록 하고 말들을 잘 먹였다.
冬 彗孛見西方 芒角指東 衆賀曰 “此除舊布新 報寃雪恥之祥也.” 陽號爲平東將軍 十二月再出. 金亮詢以鵡洲軍來. 祐徵又遣驍勇閻長張弁鄭年駱金張建榮李順行六將統兵 軍容甚盛. 鼓行至武州鐵冶縣北州 新羅大監金敏周 以兵逆之. 將軍駱金李順行 以馬兵三千 突入彼軍 殺傷殆盡.
동 혜패견서방 망각지동 중하왈 “차제구포신 보원설치지상야.” 양로위평동장운 십이월재출. 김양순이무주군래. 우징우견효용염장장변정년낙금장건영이순행육장통병 군용심성. 고행지무주철야현북주 신갈대감김민주 이병역지. 장군낙금이순행 이마병삼천 돌입피군 살상태진.
겨울에 혜성이 서쪽 방향에 나타났는데 광채 나는 꼬리가 동쪽을 가리키니 여러 사람들이 축하하며 말했다. “이는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며,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을 좋은 징조이다.” 김양은 평동장군(平東將軍)이라 칭하고 12월에 재차 출동하였는데 김양순(金亮詢)이 무주(鵡洲) 군사를 거느리고 왔고, 우징이 또한 날래고 용맹한 염장(閻長), 장변(張弁), 정년(鄭年), 낙금(駱金), 장건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 등 여섯 장수를 시켜 병사를 통솔하니 군대의 기세가 매우 왕성하였다. 북을 치며 행군하여 무주 철야현(鐵冶縣, 전남 나주) 북쪽에 도착하니, 신라 대감 김민주(金敏周)가 군사를 이끌고 대항하였다. 장군 낙금과 이순행이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상대 군중으로 돌입하여 거의 다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
四年正月十九日 軍至大丘 王以兵迎拒. 逆擊之 王軍敗北 生擒斬獲 莫之能計. 時 王顚沛逃入離宮 兵士尋害之. 陽於是命左右將軍領騎士 徇曰 “本爲報讐 今 渠魁就戮 衣冠士女百姓 宜各安居 勿妄動.” 遂收復王城 人民案堵.
사년정월십구일 군지대구 왕이병영거. 역격지 왕군패배 생금참획 막지능계. 시 왕진패도입이궁 병사심해지. 양어시명좌우장군영기사 순왈 “본위보수 금 거괴취륙 위관사여백성 의각안더 물망동.” 수수복왕성 인민안도.
4년(서기 839) 정월 19일, 김양의 군사가 대구(大丘)에 도착하자 왕(민애왕)이 병사를 보내 항거하였다. 양의 군대가 이들에 맞서 싸우니 왕의 군대가 패배하여, 생포되거나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때에 왕이 허둥지둥 도망하여 이궁(離宮, 별궁)으로 갔으나 병사들이 찾아내어 죽여버렸다. 양이 이에 주위의 장군에게 명하여 기병들을 인솔하게 하고 군령을 내렸다. “이 싸움은 본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그 수괴가 죽었으니 의관(衣冠, 상류층)과 남녀 백성들은 각자 안심하고 살 것이며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 그가 드디어 왕성을 수복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陽召萱伯曰 “犬各吠非其主 爾以其主射我 義士也. 我勿校 爾安無恐.” 衆聞之曰 “萱伯如此 其他何憂.” 無不感悅.
양소훤백왈 “견각폐비기주 이이기주사아 의사야. 아물교 이안무공.” 중문지왈 “훤백여차 기타하우.” 무불감열.
김양이 훤백을 불러 말했다. “개는 저마다 제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다. 너는 네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의사(義士)로다. 내가 괘념치 않을 것이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훤백에게도 저렇게 하니 나머지야 무슨 걱정이랴.” 그들은 감복하며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四月淸宮 奉迎侍中祐徵卽位 是爲神武王. 至七月二十三日 大王薨 太子嗣位 是爲文聖王. 追錄功 授蘇判兼倉部令 轉侍中兼兵部令. 唐聘問 兼授公檢校衛尉卿.
사월청궁 봉영시중우징즉위 시위신무왕. 지칠월이십삼일 대왕훙. 태자사위 시위문성왕 추록공 수소판경창부령 전시중겸병부령 당빙문 겸수공검교위위경.
4월에 왕궁을 깨끗이 정리하고 시중 우징을 맞아들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바로 신무왕(神武王)이다. 신무왕이 7월 23일에 돌아가시고 태자가 왕위를 이으니, 이가 문성왕(文聖王)이다. 양의 공로를 추가로 기록하여 소판 겸 창부령을 제수하고, 다시 시중 겸 병부령으로 전임하였다. 당에서 예방하고 공에게 검교위위경(檢校衛尉卿)을 제수하였다.
大中十一年八月十三日 薨于私第 享年五十 訃聞 大王哀慟 追贈舒發翰 其贈賻殮葬 一依金庾信舊例 以其年十二月八日 陪葬于太宗大王之陵.
대중십일년팔월십삼일 훙우사제 향년오십 부문 대왕애통 추증사발한 기증부염장 일의김유신구례 이기년십이월팔일 부장우태종대왕지능.
대중(大中) 11년(서기 857) 8월 13일에 김양이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50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대왕은 애통해하며 서발한을 추증하고, 부의와 장사를 모두 김유신의 전례에 따랐다. 그해 12월 8일에 태종대왕의 능 곁에 묻었다.
從父兄昕 字泰 父璋如 仕至侍中波珍飡. 昕幼而聰悟 好學問. 長慶二年 憲德王將遣人入唐 難其人. 或薦昕太宗之裔 精神朗秀 器宇深沈 可以當選 遂令入朝宿衛. 歲餘請還 皇帝詔授金紫光祿大夫試太常卿.
종부형흔 자태 부장여 사지시중파진찬. 흔유이총오 호학문. 장경이년 헌덕왕장견인입당 난기인. 혹천흔태종지예 정신명수 지우심침 가이당선 수령입조숙위. 세여청환 황제조수김자광록대부시태상경.
김양의 사촌형 흔(昕)은 자가 태(泰)이며 아버지 장여(璋如)는 벼슬이 시중 파진찬에 이르렀다. 흔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장경(長慶) 2년(서기 822)에 헌덕왕(憲德王)이 당에 사신을 보내려 했으나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김흔을 추천하며 ‘이는 태종의 후예로 정신이 밝고 빼어나며, 도량이 깊고 침착하니 뽑아 보낼 만하다.’라고 하므로 드디어 그를 당에 들여보내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그가 한 해 남짓 당에 있다가 돌아가기를 청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금자광록대부시태상경(金紫光祿大夫試太常卿)을 제수하였다.
及歸 國王以不辱命 擢授南原太守. 累遷至康州大都督 尋加伊飡兼相國.
급귀 국왕이불욕명 탁수남원태수. 누천지강주대도독 심가이찬겸상국.
그가 귀국하자 국왕은 그가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남원(南原) 태수를 제수하였다. 그 후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강주(康州) 대도독이 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이찬 겸 상국 벼슬이 더해졌다.
開成己未閏正月 爲大將軍 領軍十萬 禦淸海兵於大丘 敗績. 自以敗軍 又不能死綏 不復仕宦. 入小白山 葛衣蔬食 與浮圖遊 至大中三年八月二十七日 感疾終於山齋 享年四十七歲. 以其年九月十日 葬於奈靈郡之南原. 無嗣子 夫人主喪事 後爲比丘尼.
개성기미윤정월 위대장군 영군십만 어청해병어대구 패적. 자이패군 우불능사수 불복사환. 입소백산 갈의소식 여부도유 지대중삼년팔월이십칠일 감질종어산제 향년사십칠세. 이기년구월십일 장아내령군지남원. 무사자 부인주상사 후위비구니.
그는 개성(開成) 기미 윤 정월(서기 839)에 대장군이 되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대구에서 청해진의 병사를 막다가 패하였다. 그는 자신이 전쟁에서 패하였고 또한 전사하지도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소백산(小白山)에 들어가 갈옷을 입고 나물밥을 먹으며 중들과 함께 지내다가 대중 3년(서기 859) 8월 27일에 병으로 산막에서 죽으니 향년 47세였다. 그해 9월 10일에 내령군(奈靈郡) 남쪽 벌판에 장사 지냈다. 아들이 없어서 그의 부인이 상사(喪事)를 주관하였는데, 그녀는 후에 비구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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