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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列傳 第四-黑齒常之

黑齒常之

 

黑齒常之 百濟西部人 長七尺餘 驍毅有謀略 爲百濟達率兼風達郡將 猶唐刺史云 蘇定方平百濟 常之以所部降. 而定方囚老王 縱兵大掠 常之懼 與左右酋長十餘人遯去 嘯合逋亡 依任存山自固 不旬日 歸者三萬. 定方勒兵攻之 不克. 遂復二百餘城.

흑치상지 백제서부인 장칠척여 효의유모략 위백제달솔경풍달군장 유당자사운. 소정방평백제상지이소부항. 이정방인노왕 종별대략 상지구 여좌우추장십여인둔거 소합포망 임존산자고불순일 귀자삼만 정방칙병공지 불극. 수복이백여성.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의 서부 사람인데 키가 7척이 넘고 날래고 굳세며 지모가 있었다. 그는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군(風達郡)의 장수를 겸하였는데, 이 직위는 당의 자사(刺史, 지방 관리)와 같다고 한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였을 때, 그는 자기 부하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정방은 늙은 왕을 가두고 군사를 풀어놓아 크게 노략질을 하였다. 상지가 두려워하여 가까운 촌장 10여 명과 함께 달아나,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임존산(任存山, 충남 예산)에 웅거하며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 되어 그에게 귀순한 자가 3만이나 되었다. 정방이 군사를 정비하여 그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상지는 드디어 2백여 성을 회복하였다.

 

龍朔中 高宗遣使招諭 乃詣劉仁軌降. 入唐爲左領軍員外將軍徉州[徉 唐書作洋]刺史 累從征伐積功 授爵賞殊等. 久之 爲燕然道大摠管 與李多祚等 擊突厥破之. 左監門衛中郞將寶璧 欲窮追邀功 詔與常之共討 寶璧獨進 爲虜所覆 擧軍沒. 寶璧下吏誅 常之坐無功. 會 周興等誣其與鷹揚將軍趙懷節叛 捕繫詔獄 投繯死.

용삭중 고종견사초유 내지유인궤항. 입당위재영군원외장군양주[양 당서작양]지시 누정정벌작공 수작상수등. 구지 위연연도대총관 여이다조등 격돌궐파지. 좌감문위중낭장보벽 욕궁추격공 조여상지공토 보벽독진 위노소복 거군몰. 보벽하리주 상지좌무공. 회 주흥등무기여응양장군조회절반 포계조옥 투현사.

 

용삭(龍朔) 연간에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 그를 불러 타이르자, 그는 유인궤(劉仁軌)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그는 당에 들어가서 좌령군원외장군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徉州刺史)가 되었으며, 수차례 정벌에 종군하여 공을 쌓아 특별한 작위와 상을 제수 받았다. 오랜 뒤에 연연도대총관(燕然道大摠管)이 되어 이다조(李多祚) 등과 함께 돌궐(突厥)을 쳐부수었다. 이때 좌감문위중랑장(左監門衛中郞將) 보벽(寶璧)이 돌궐을 끝까지 추격하여 공을 차지하려 하자 황제가 상지와 함께 공격하라고 명령하였으나, 보벽이 단독으로 진공하다가 적에게 패하여 전군이 몰살되었다. 보벽은 옥리에게 보내져 처형되고, 상지도 죄를 입어 공적이 없게 되었다. 그때 마침 주흥(周興) 등이 그가 응양장군 조회절(趙懷節)과 함께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하였으므로, 상지는 조옥(詔獄, 중죄인을 다스리는 옥사)에 갇혔다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常之御下有恩 所乘馬爲士所箠 或請罪之 答曰 何遽以私馬 鞭官兵乎 前後賞賜分麾下 無留貲 及死 人皆哀其枉.

상지어하유은 소승마위사소추 혹청죄지 답왈 하거이사마 편관병호? 전후상사분휘하 무유자급사 인개애기왕.

 

상지는 아랫사람들을 은덕으로 다스렸다. 그가 타는 말이 병졸에게 채찍을 맞는 일이 생기자, 어떤 자가 병졸을 처벌하라고 하였다. 상지가 대답했다. “어찌 사사로운 개인의 말에 대한 일로, 관병을 매질할 수 있겠는가?” 그는 자기가 받은 상을 휘하의 부하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어 남겨둔 재산이라고는 없었다. 그가 죽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억울함을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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