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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列傳 第四-斯多含

斯多含

 

斯多含 系出眞骨 奈密王七世孫也 父仇梨知級飡 本高門華冑 風標淸秀 志氣方正. 時人請奉爲花郞 不得已爲之. 其徒無慮一千人 盡得其歡心.

사다함 계출진골 내밀왕칠세손야 부구리지급찬 본고문화주 풍표청수 지기방정. 시인청봉위화랑 부득이위지. 기도무려일천인 진득기환심.

 

사다함(斯多含)은 진골 계통으로 내밀왕(奈密王, 내물왕)7세손이요, 아버지는 급찬 구리지(仇梨知)이다. 본래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서 풍채가 깨끗하고 준수하며 뜻과 기백이 방정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하므로 마지못해 화랑이 되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무려 1천 명이나 되었는데 사다함은 그들 모두의 환심을 얻었다.

 

眞興王命伊飡異斯夫 襲加羅[一作加耶]國 時 斯多含年十五六 請從軍 王以幼少不許. 其請勤而志確 遂命爲貴幢裨將 其徒從之者亦衆. 及抵其國界 請於元帥 領麾下兵 先入旃檀梁[旃檀梁 城門名 加羅語謂門爲梁云]. 其國人 不意兵猝至 驚動不能禦 大兵乘之 遂滅其國.

진흥왕명이찬이사부 습가라[일작가야]국 시사다함연십오세 청종군. 왕이유소불허 기청근이지확 수명위귀당비장 기도종지자역중. 급저기국계 청어원수 영휘하병 선입전단량[전단량 성문명 가라어위문위량운]. 기국인 불의병졸지 경동불능어 대병승지 수멸기국.

 

진흥왕(眞興王)이 이찬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가라(加羅)[가야(加耶)라고도 한다.]국을 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사다함은 십오륙 세의 나이로 종군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나이가 너무 어리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계속해서 요청하고 의지가 확고하므로 마침내 그를 귀당(貴幢) 비장(裨將)으로 임명하였는데, 그의 낭도로서 그를 따라 나서는 자가 많았다. 국경에 이르자 원수에게 청하여 그 휘하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전단량(旃檀梁)[전단량은 성문 이름이다. 가라의 말로 문을 양()이라 한다.]으로 들어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하게 병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놀라 막지 못하므로, 대군이 이 틈을 타서 마침내 가야국을 멸망시켰다.

 

洎師還 王策功 賜加羅人口三百 受已皆放 無一留者. 又賜田 固辭 王强之 請賜閼川不毛之地而已.

자사환 왕책공 사가라인구삼백 수기개방 무일유자. 우사전 고사 왕강지 청사알천불모지지이이.

 

군대가 돌아오자 왕은 그의 공훈을 책정하여 가라 인구 3백을 사다함에게 주었으나 그는 받은 즉시 모두 놓아주어 한 명도 남겨두지 않았다. 또 토지를 하사하였는데 굳이 사양하였는데 왕이 강권하니 알천(閼川)에 있는 불모지만을 청할 따름이었다.

 

含始與武官郞 約爲死友 及武官病卒 哭之慟甚 七日亦卒 時年十七歲.

함시여무관랑 약위사우 급무관병졸 곡지통심 칠일역졸 시년십칠세.

 

사다함은 애초에 무관랑(武官郞)과 생사를 같이하는 벗이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무관이 병들어 죽자 너무 슬프게 울다가 7일 만에 그 역시 죽었다. 그때 나이가 1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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