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仁問
金仁問 字仁壽 太宗大王第二子也. 幼而就學 多讀儒家之書 兼涉莊老浮屠之說. 又善隸書射御鄕樂 行藝純熟 識量宏弘 時人推許.
김인문 자인수 태종대왕제이자야. 유이취학 다독유가지서 겸섭장노부도지설. 우선예서사어행약 행예순숙 식량굉홍 시인추허.
김인문(金仁問)의 자는 인수(仁壽)이고, 태종대왕(太宗大王)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 학문의 길로 나아가 유가의 서적을 많이 읽었으며, 동시에 『장자』, 『노자』 및 불교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또 예서를 잘 쓰고 활쏘기, 말타기, 향악을 잘하였는데, 기예에 익숙하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시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였다.
永徽二年 仁問年二十三歲 受王命 入大唐宿衛. 高宗謂涉海來朝 忠誠可尙 特授左領軍衛將軍 四年 詔許歸國覲省. 太宗大王授以押督州摠管. 於是 築獐山城 以設險 太宗錄其功 授食邑三百戶. 新羅屢爲百濟所侵 願得唐兵爲援助 以雪羞恥 擬諭宿衛仁問乞師. 會 高宗 以蘇定方爲神丘道大摠管 率師討百濟.
영휘이년 인문년이십삼세 수왕명 입대당숙위. 고종위섭해래조 충성가상 특수좌영위장군 사년 조허귀국근성. 태종대왕수이압독주총관. 어시 축장산성 이설험 태종록기공 수식읍삼백호. 신라누위백제소침 원득당병위원조 이설수치 의유숙위인문걸사. 회 고종 이소정방위신구대도총관 솔사토백제.
영휘(永徽) 2년(서기 651) 인문의 나이 23세 때 왕명을 받들어 당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하였다. 고종(高宗)은 그가 바다를 건너와 조회하자 충성이 가상하다 여겨 특별히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을 제수하였고, 4년(서기 653)에 조서를 내려 본국으로 돌아가 부모를 만나게 하였다. 태종대왕이 그에게 압독주(押督州) 총관을 제수하였다. 이에 그가 장산성(獐山城)을 쌓아 방비 시설을 하니, 태종이 그의 공로를 기록하고 식읍 3백 호를 내렸다. 신라가 여러 번 백제의 침공을 받게 되자, 태종은 당나라 군대의 원조를 얻어 수치를 씻고자 하여, 당에 숙위하러 가는 인문을 통해 군사를 청하려 하였다. 때마침 고종이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도록 하였다.
帝徵仁問 問道路險易 去就便宜. 仁問應對尤詳 帝悅制授神丘道副大摠管 勑赴軍中. 遂與定方濟海 到德物島. 王命太子 與將軍庾信眞珠天存等 以巨艦一百艘 載兵迎延之. 至熊津口 賊瀕江屯兵 戰破之 乘勝入其都城滅之. 定方俘王義慈及太子孝王子泰等 廻唐.
제징인문 문도로험이 거취편이. 인문응대우상 제열제수신구조부대총관 칙부군중. 수여정방제해 도덕물도. 왕명태자 여장군유신진주천존등 이거함일백수 재병영정지 지웅진구 적빈강둔병전파지 승승입기도성멸지. 정방부왕의자급태자효왕자태등 회당.
황제가 인문을 불러 도로의 험난한 사정과 행군의 편의에 대하여 물었다. 인문이 한층 자세히 대답하니, 황제가 기뻐하여 인문에게 신구도 부대총관의 관직을 제수하고 종군하도록 명하였다. 인문은 마침내 정방과 함께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 왕은 태자에게 명령하여 장군 유신(庾信). 진주(眞珠), 천존(天存) 등과 함께 큰 배 1백 척에 군사를 싣고 당군을 맞아들이게 하였다. 웅진구(熊津口, 금강 입구)에 이르니 백제군이 강가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싸워 격파하고, 승세를 몰아 백제의 도성에 들어가 멸망시켰다. 정방은 백제의 왕 의자(義慈)와 태자 효(孝), 왕자 태(泰) 등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돌아갔다.
大王嘉尙仁問功業 授波珍飡 又加角干 尋 入唐宿衛如前.
대왕가상인문공업 수파진찬 우가각간 심 입당숙위여전.
대왕이 인문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파진찬을 제수하고 또 각간 벼슬을 더 주었다. 그는 얼마 안 있어서 당에 들어가 전과 같이 숙위하였다.
龍朔元年 高宗召謂曰 “朕旣滅百濟 除爾國患 今 高句麗負固 與穢貊同惡 違事大之禮. 棄善隣之義 朕欲遣兵致討 爾歸告國王 出師同伐 以殲垂亡之虜.”
용삭원년 고종소위왈 “짐기멸백제 제이국환 금 고구려부고 여예맥동악 위사대지례 기선린지의 짐욕견병치토 이귀고국왕 출사동벌 이섬수망지로.”
용삭(龍朔) 원년(서기 661)에 당 고종이 불러 말했다. “짐이 이미 백제를 멸하여 너희 나라의 근심을 제거하였는데, 이제 고구려가 지리의 험함을 믿고 예맥(穢貊)과 함께 악한 짓을 하여 큰 나라를 섬기는 예를 어기고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는 의리를 저버리고 있다. 짐은 병사를 보내어 치려고 하니, 너도 돌아가 너희 국왕에게 고하여 군대를 출동시켜 우리와 함께 망해가는 오랑캐를 섬멸케 하라.”
仁問便歸國 以致帝命 國王使仁問與庾信等 練兵以待 皇帝命邢國公蘇定方 爲遼東道行軍大摠管 以六軍 長驅萬里 迕麗人於浿江 擊破之 遂圍平壤 麗人固守 故不能克 士馬多死傷. 糧道不繼 仁問與留鎭劉仁願 率兵兼輸米四千石租二萬餘斛 赴之 唐人得食 以大雪 解圍還.
인문편귀국 이치제명. 국왕사인문여유신등 연병이대. 황제명형국공소정방 위요동도행군대총관이육군 장구만리 오려인어패강 격파지. 수위평양 려인고수 고불능극 사마다사상 양도불계. 인문여유진유인원 솔병겸수미사천석조이만여곡. 부지 당인득식 이대설 애위환.
인문은 즉시 귀국하여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왕은 인문에게 유신 등과 함께 군사를 조련하여 기다리게 하였다. 황제는 형국공(邢國公) 소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았다. 소정방은 6군을 거느리고 만리길을 달려 패강(浿江)에서 고구려 군사를 마주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평양(平壤)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인들이 굳게 수비하자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병마가 많이 죽거나 부상당했고 군량미의 수송도 여의치 않았다. 인문은 웅진에 남아 지키던 장수 유인원(劉仁願)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쌀 4천 섬과 벼 2만여 斛(10말 들이)를 싣고 평양으로 갔다. 당군은 식량을 얻었으나 큰 눈이 내렸으므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羅人將歸 高句麗謀要擊於半塗 仁問與庾信 詭謀夜遁. 麗人翌日覺而追之 仁問等 廻擊大敗之 斬首一萬餘級 獲人五千餘口而歸.
라인장귀 고구려모요격어반도 인문여유신 궤모야둔. 려인익일각이추지 인문등 회격대패지 참수일만여급 획인오천여구이귀.
신라군이 돌아가려 했을 때, 고구려군이 도중에서 요격하려 하자 인문은 유신과 함께 꾀를 내어 야밤에 도망하였다. 고구려인이 다음 날에야 이를 알고 추격해오자 인문 등이 반격하여 대파하고, 1만여 명의 목을 베고 5천여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仁問又入唐 以乾封元年 扈駕登封泰山. 加授右驍衛大將軍 食邑四百戶.
인문우입당 이건봉원년 호가등봉태산. 가수우효위대장군 식읍사백호.
인문은 다시 당에 들어갔다. 건봉(乾封) 원년(서기 666)에 당 황제를 모시고 태산(泰山)에 올라 봉선(封禪, 하늘에 제사 지냄.)하였다. 당 황제가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을 제수하고 식읍 4백 호를 더 주었다.
摠章元年戊辰 高宗皇帝遣英國公李勣 帥師伐高句麗 又遣仁問徵兵於我. 文武大王與仁問 出兵二十萬 行至北漢山城. 王住此 先遣仁問等 領兵會唐兵 擊平壤. 月餘 執王臧 仁問使王跪於英公前 數其罪 王再拜 英公禮答之. 卽以王及男産男建男生等還.
총장원년무진 고종황제견영국공이적 수사벌고구려 우견인문징병어아. 문무대왕여인문 출병이십만 행지북한산성. 왕왕차 선견인문등 영병회당병 격평양. 월여 집왕장 인문사왕궤어영공전수기죄 왕재배 영공예답지. 즉이왕급남산남건만생등환.
총장(摠章) 원년(서기 668) 무진에 당 고종 황제가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고 또한 인문을 보내 우리에게도 병사를 징발하라고 하였다. 문무대왕(文武大王)은 인문과 함께 병사 20만을 출동시켜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갔다. 왕은 그곳에 머무르며 먼저 인문 등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당군과 만나 평양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한 달 남짓하여 고구려왕을 사로잡았다. 인문이 고구려왕을 영공 앞에 꿇어앉히고 그의 죄를 따지니, 고구려왕이 재배하고 영공이 답례를 하였다. 영공은 곧 고구려왕과 남산(男産)ㆍ남건(男建)ㆍ남생(男生) 등을 데리고 돌아갔다.
文武大王 以仁問英略勇功 特異常倫 賜故大琢角干朴紐食邑五百戶. 高宗亦聞仁問屢有戰功. 制曰 “爪牙良將 文武英材 制爵疏封 尤宜嘉命.” 仍加爵秩 食邑二千戶. 自後 侍衛宮禁 多歷年所.
문무대왕 이인문영략용공 득이상윤 사고대탁각간박뉴식읍오백호. 고종역문인문누유전공. 제왈 “조아양장 문무영제 제작소봉 우의가명.” 잉가작일 식읍이찬호. 자후 시위궁금 다역연소.
문무대왕은 인문의 뛰어난 계략과 용감한 공적이 특별하다고 하여 죽은 대탁각간(大琢角干) 박뉴(朴紐)의 식읍 5백 호를 내렸다. 당 고종도 인문이 여러 차례 전쟁에서 공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말했다. “조아(爪牙, 매우 쓸모가 있음)의 양장(良將)이요, 문무의 영재이다. 작위를 제정하고 새로이 봉읍을 내려 칭찬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에 작위를 더하고 식읍 2천 호를 더 주었다. 그 뒤로 그는 궁중에서 당 황제를 가까이 모시며 여러 해를 보냈다.
上元元年 文武王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 唐皇帝大怒 以劉仁軌爲雞林道大摠管 發兵來討 詔削王官爵. 時 仁問爲右驍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 在京師. 立以爲王 令歸國 以代其兄 仍策爲雞林州大都督開府儀同三司. 仁問懇辭不得命 遂上道. 會 王遣使 入貢且謝罪 皇帝赦之 復王官爵. 仁問中路而還 亦復前銜.
상원원년 문무왕납고구려반중 우거백제고지. 당황제대노 이유인궤위계림도태총관 발병래토 조삭왕관작. 시 인문위우효위원외대장군임해군공 재경사. 입이위왕 영귀국 이대기형 잉책위계림주대도독개부의동삼사. 인문간사부득명 수상도. 회 왕견사 입공차사죄 황제사지 복왕관작. 인문중로이환 역복전함.
상원(上元) 원년(서기 674)에 문무왕은 고구려의 반군을 받아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당 황제는 크게 노하여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雞林道大摠管)으로 삼아 병사를 내어 신라를 공격케 하고,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박탈하였다. 이때 인문은 우효위원외대장군임해군공(右驍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이 되어 당나라 서울에 있었다. 황제는 인문을 임금으로 삼아 본국으로 돌아가서 그의 형을 대신하라 하고, 계림주대도독개부의동삼사(雞林州大都督開府儀同三司)로 책봉하였다. 인문이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황제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결국 길을 떠났다. 그때 마침 왕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며 사죄하므로 황제가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복구시켰다. 인문도 중도에서 돌아가 다시 복위하여 전에 하던 일을 다시 했다.
調露元年 轉鎭軍大將軍行右武威衛大將軍 載初元年 授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左羽林軍將軍.
조로원년 전진군대장군행우무위위대장군 재초원년 수보국대장군상주국임해군개국공좌우림군장군.
조로(調露) 원년(서기 679)에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행우무위위대장군(行右武威衛大將軍)에 전임되었고, 재초(載初) 원년(서기 690)에는 보국대장군상주국임해군개국공좌우림군장군(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左羽林軍將軍)에 제수되었다.
延載元年四月二十九日 寢疾薨於帝都 享年六十六. 訃聞 上震悼 贈襚加等. 命朝散大夫行司禮寺大醫署令陸元景判官朝散郞直司禮寺某等 押送靈柩.
연재원년사월이십구일 침질훙어제도 향년육십육 부문 상진도 증수가등 명조산대부행사례사대의서령육원경판관조산랑직사례사모등 압송영구.
연재(延載) 원년(서기 694) 4월 29일, 당나라 서울에서 병으로 죽으니 향년 66세였다. 부음을 듣고 황제가 놀라고 슬퍼하며 수의를 주고 관등을 더 높여 주었다. 그리고 조산대부행사례시대의서령(朝散大夫行司禮寺大醫署令) 육원경(陸元景)과 판관조산랑직사례시(判官朝散郞直司禮寺) 모(某) 등에게 명하여 영구를 호송하게 하였다.
孝昭大王追贈太大角干 命有司 以延載二年十月二十七日 窆于京西原 仁問七入大唐 在朝宿衛 計月日 凡二十二年 時 亦有良圖海飡 六入唐 死于西京 失其行事始末.
효소대왕추증태대각간 명유사 이연재이년시월이십칠일 폄우경서원. 인문칠입대당 재조숙위계월일 범이십이년. 시 역유양도해찬 육입당 사우서경 실기행사시말.
효소대왕(孝昭大王)은 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추증하고, 담당관에게 명하여 연재 2년(서기 695) 10월 27일 서울의 서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 인문은 일곱 번이나 당에 들어갔으니, 당의 조정에서 숙위한 날짜를 계산하면 무려 22년이나 된다. 그때에 해찬 양도(良圖)도 역시 여섯 번 당에 들어갔다가 서경(西京)에서 죽었는데 그 행적의 시말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 여기서 다뤄야할 문제는 왜 신라는 당나라에 숙위를 보냈는가????
상수리제도나 기인제도와 유사성으로 본다면 신라와 당의 관계는????
보통 주나라 봉건제도와 뿌리를 같이 하는게 아닌지....
그렇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이 말하는 “속국”이란 말이 의미를 가지겠지만...
중요한 건 주나라 봉건제는 속국이 아닌 왕족의 분봉왕 개념이 강했다.
따라서 왕족내지 실권자라는 인증이 아닌가????
소위 춘추시대의 단초가 뭔가 주나라의 후신으로 인정되던 晉나라가 韓,魏,趙 3국으로 분열하면서부터...
춘추시대는 한마디로 주나라의 정통성을 누가 이어받느냐라는 주도권 싸움.....
거기에 소위 서쪽 변방 秦,楚가 주도권 싸움에 끼어든 형국.....
이 와중에 결국 3황5제를 이은 소위 천자국 주나라(회맹 맹주)의 권위가 군사력으로 대치되는 과정....
소위 전국 7웅(한(韓), 위(魏), 조(趙), 제(齊:田齊), 진(秦), 초(楚), 연(燕)간의 군사력 대결....
구도로 본다면....
소위 성인들의 德治가 힘의 논리로 전환하는 과정이요, 덕치의 명분으로 각축하던 상황의 종지부를 찍은게 소위 중원세력이 아닌 秦시황제....
춘추전국을 거쳐 소위 힘의 논리로 옮겨간 것....
강대국이 패권을 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