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460) 썸네일형 리스트형 券 第四 義解 券五- 蛇福不言 蛇福不言 사복은 말수가 적다. 京師萬善北里 有寡女 不夫而孕 旣産. 年至十二歲 不語亦不起 因號蛇童[下或作蛇卜 又巴又伏等 皆言童也]. 경사만선북리 유과녀 불부이잉 기산 연지십이세 불어역불기 인호사동[하혹작사복 우차우복등 개언동야]. 서울 만선북리(萬善北里)에 한 과부가 있었는데, 남편 없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12세가 되도록 말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사동(蛇童)[혹 사복(蛇卜)이라고도 하고, 또는 사파(蛇巴)나 사복(蛇伏) 등으로 썼으니, 모두 사동을 말한다.]이라 불렀다. 一日其母死. 時元曉 住高仙寺 曉見之迎禮 福不答拜而曰 “君我昔日駄經牸牛 今已亡矣 偕葬何如?” 曉曰 諾. 일일기모사. 시원효 주고선자 효견지양례 복부답배이왈 “군아석일태경자우 금이망의 해장하여?” 효왈 “.. 券 第四 義解 券五- 義湘傳敎 義湘傳敎 의상전교 의상이 화엄종을 전하다. 法師義湘 考曰韓信 金氏. 年二十九 依京師皇福寺落髮 未幾西圖觀化 遂與元曉道出遼東邊. 戍邏之爲諜者 囚閉者累旬 僅免而還.[事在崔侯本傳及曉師行狀等] 법사의상 고왈한신 김씨. 연이십구세 의경사황복사낙발 미기서도관화 수여원효도출요동변. 수라지위첩자 수폐자누순 근면이환[사재최후본전급효사행장등] 법사 의상(義湘)의 아버지는 한신(韓信)이고 성은 김씨다. 나이 29세에 서울 황복사(皇福寺)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얼마 후 중국으로 가 부처의 교화를 보고 싶어서, 드디어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다. 그러나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이 첩자로 여겨 갇혀 있은 지 수십 일만에 간신히 풀려나 돌아왔다.[이 일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의상본전(義湘本傳)」과 원효대사.. 券 第四 義解 券五- 元曉不覊 元曉不覊 원효불기 원효는 굴레가 없다. 聖師元曉 俗姓薛氏 祖仍皮公 亦云赤大公. 今赤大淵側 有仍皮公廟. 父談捺乃末. 初示生于押梁郡南[今章山郡]佛地村北 栗谷裟羅樹下. 村名佛地 或作發智村[俚云弗等乙村]. 裟羅樹者 諺云. “師之家 本住此谷西南 母旣娠而月滿 適過此谷栗樹下 忽分産 而倉皇不能歸家 且以夫衣掛樹 而寢處其中 因號樹曰裟羅樹.” 성사원효 속성설씨. 조잉피공 역운적대공. 금적대연측 유잉피공묘. 부담내내말. 초시생우압량군남[금장산군]불지촌북 율곡사라수하. 촌명불지 혹작발지촌[매운불등을촌]. 사라수자 언운 “사지가 본주차곡서남 모기신이월만 적과차곡율수하 혹분산 이창황불능귀가 차이부의괘수 이침처기중 인호수왈사라수.” 성사(聖師) 원효(元曉)의 세속의 성은 설(薛)씨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인데 또는 적대공(赤.. 券 第四 義解 券五- 慈藏定律 慈藏定律 자장이 계율을 정하다. 大德慈藏 金氏 本辰韓眞骨蘇判[三級爵名]茂林之子. 其父歷官淸要 絶無後胤 乃歸心三寶 造于千部觀音 希生一息 祝曰 “若生男子 捨作法海津梁.” 대덕자장 김씨 본진한진골소판[삼급작명]무림지자. 기부역관청요 절무후윤 내귀심삼보 조우천부관음 희생일식 축왈 “약생남자 사작법해진량.” 대덕(大德) 자장(慈藏)은 김씨로, 본래 진한(辰韓)의 진골 소판(蘇判)[3급의 벼슬이다.]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주요 관직을 두루 지냈으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삼보에 귀의하여 천부관음(千部觀音)에게 나아가 아들 하나 낳기를 바라며 이렇게 축원하였다. “만약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를 내놓아서 불법으로 건너가는 나루터와 다리로 삼겠습니다.” * 淸要: 청환(淸宦)과 요직(要職)... 券 第四 義解 券五-二惠同塵 二惠同塵 속세에 묻혀산 두 승려 혜숙과 혜공 釋惠宿 沈光於好世郞徒 郞旣讓名黃卷. 師亦隱居赤善村[今安康縣有赤谷村]二十餘年. 時國仙瞿旵公 嘗往其郊縱獵 一日 宿出於道左 攬轡而請曰 “庸僧亦願隨從 可乎?” 석혜숙 침광어호세랑도 낭기양명황권. 사역은거적선촌[금안강형유적곡촌]이십여년. 시국선구담공 상왕기교종렵 일일 숙출어도좌 남비이청왈 “용승역원수종 가호?” 승려 혜숙(惠宿)이 호세랑(好世郞)의 무리에서 자취를 감추자 호세랑은 화랑 명단에서 혜숙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혜숙은 적선촌(赤善村)[지금의 안강현(安康縣)에 적곡촌(赤谷村)이 있다.]에 숨어 지낸 지가 20여 년이나 되었다. 이때 국선 구담공(瞿旵公)이 일찍이 적선촌에서 사냥을 하였데, 어느 날 혜숙이 길가에 나와 말고삐를 잡고 청하였다. “소승도 따라가고 싶.. 券 第四 義解 券五- 歸竺諸師 歸竺諸師 인도에서 돌아온 여러 승려들 廣函求法高僧傳云 “釋阿離那[一作耶]跋摩[一作磨] 新羅人也. 初希正敎 早入中華 思覲聖蹤 勇銳彌增. 以貞觀年中 離長安到五天 住那蘭陀寺 多閱律論 抄寫貝莢. 痛矣歸心 所期不遂 忽於寺中無常 齡七十餘.” 광함구법고승전운 “석아리나[일작야]발마[일작마] 신라인야. 처희정교 조입중화 사근성종 용예미증. 이정관년중 이장안도오천 주나란타사 다열율론 초사패협. 통의귀심 소기불수 홀어사중무상 영칠십세.” 광함(廣函)의 『구법고승전(求法高僧傳)』에 이러한 기록이 있다. 승려 아리나(阿離那)[나(那)는 야(耶)라고도 한다.] 발마(跋摩)[마(摩)는 磨라고도 한다.]는 신라 사람이다. 처음 불교에 뜻을 두고 일찍 중국에 들어가서 성인의 자취를 두루 찾아보다가 용기가 더욱 솟아올랐다. 그래서 정.. 券 第四 義解 券五- 良志使錫 良志使錫 釋良志 未詳祖考鄕邑. 唯現迹於善德王朝. 錫杖頭掛一布帒 錫自飛至檀越家 振拂而鳴. 戶知之納齋費. 帒滿則飛還. 故名其所住曰錫杖寺. 석양지 미상조고향읍. 유련적어선덕왕조. 석장두괘일포대 석자비지단월가 진불이명. 호지지납재비. 대만즉비환. 고명기소주왈 석장사. 승려 양지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신라 선덕왕(善德王) 때의 행적이 드러났을 뿐이다. 지팡이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두면 지팡이가 저절로 시주의 집으로 날아가서 흔들면서 소리를 내었다. 그 집에서도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담아주었다. 포대가 차면 다시 날아서 돌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양지가 머무른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하였다. 其神異莫測 皆類此. 旁通雜藝 神妙絶比. 又善筆札 靈廟丈六三尊天王像 幷殿塔之瓦天王寺塔下八.. 卷第四 義解 第五- 寶壤梨木 寶壤梨木 釋寶壤傳 不載鄕井氏族 謹按淸道郡司籍載 “天福八年癸卯[大祖卽位 第二十六年也]正月日 淸道郡界里審使順英 大乃末水文等 柱貼公文 雲門山禪院長生 南阿尼岾 東嘉西峴.[云云] 同藪三綱典主人寶壤和尙 院主玄會長老 典座玄兩上座 直歲信元禪師.”[右公文 淸道郡 都田帳傳准] 석보양전 부재향정씨족 근안청도군사적재 천복팔년계묘[대조득위 제이십육년야]정월일 청도군계리심사순영 대내말수문등 주첩공문 운문산선원장생 남아니점 동가서현[운운] 동수삼강전주인보양화상 원주현회장노 전좌현양상좌 직세신원선사[우공문 청도군 도전장전준] 승려 보양(寶壤)의 전기에는 그의 고향과 성씨가 실려 있지 않다. 청도군(淸道郡)의 문서를 살펴보면 이러한 기록이 있다. “천복(天福) 8년 계묘(서기 943)[고려 태조가 왕위에 오른 지 26년이다.] 정월 .. 이전 1 ··· 9 10 11 12 13 14 15 ··· 18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