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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券 第四 義解 券五- 慈藏定律

慈藏定律

자장이 계율을 정하다.

 

大德慈藏 金氏 本辰韓眞骨蘇判[三級爵名]茂林之子. 其父歷官淸要 絶無後胤 乃歸心三寶 造于千部觀音 希生一息 祝曰 若生男子 捨作法海津梁.”

대덕자장 김씨 본진한진골소판[삼급작명]무림지자. 기부역관청요 절무후윤 내귀심삼보 조우천부관음 희생일식 축왈 약생남자 사작법해진량.”

 

대덕(大德) 자장(慈藏)은 김씨로, 본래 진한(辰韓)의 진골 소판(蘇判)[3급의 벼슬이다.]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주요 관직을 두루 지냈으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삼보에 귀의하여 천부관음(千部觀音)에게 나아가 아들 하나 낳기를 바라며 이렇게 축원하였다. “만약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를 내놓아서 불법으로 건너가는 나루터와 다리로 삼겠습니다.”

 

* 淸要: 청환(淸宦)과 요직(要職). 곧 높은 관직과 중요한 직분

 

母忽夢星墜入懷 因有娠 及誕. 與釋尊同日 名善宗郞.

모홀몽성추입회 인유신 급탄. 여석존동일 명선종랑.

 

얼마 후 자장의 어머니가 갑자기 별이 떨어져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여 아기를 낳았다. 석가모니와 생일이 같았으므로 선종랑(善宗郞)이라 이름을 지었다.

 

神志澄睿 文思日贍 而無染世趣. 早喪二親 轉厭塵譁 捐妻息 捨田園爲元寧寺. 獨處幽險 不避狼虎. 修枯骨觀 微或倦弊 乃作小室 周障荊棘 裸坐其中 動輒箴刺 頭懸在梁 以祛昏瞑.

신지징예 문사일섬 이무염세취. 조상이친 전염진화 손처식 사전원위원녕사. 독처유험 불피랑호. 수고골관 미혹권폐 내작소실 주장형극 나좌기중 동첩잠자 두현대량 이거혼명.

 

그는 정신과 뜻이 맑고 슬기로웠으며 문장력이 나날이 풍부해졌고 세속의 취미에 물들지 않았다. 두 부모를 일찍 여의자 속세의 시끄러움을 싫어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자신의 땅과 정원을 희사하여 원녕사(元寧寺)를 세웠다. 홀로 깊고 험준한 곳에 머물면서 이리나 호랑이도 피하지 않았다. 고골관(시체나 백골을 보고 인생이 덧없음을 깨닫는 수행법.)을 닦았는데, 조금 게을러지거나 피곤해지면 작은 방을 만들어 가시덤불로 둘러치고 그 안에 발가벗고 앉아 움직이면 찔리도록 하였으며, 또 머리를 들보에 매달아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도록 하였다.

 

適台輔有闕 門閥當議 累徵不赴. 王乃勅曰 不就斬之 藏聞之曰 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 事聞 上許令出家.

적대보유궐 문벌당의 누징불부. 왕내칙왈 불취참지.” 장문지왈 오녕일일지계이사 불원백년파계이생.” 사문 상허영출가.

 

마침 조정에서는 재상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문벌(門閥)로 보아 자장이 마땅하다고 여기어서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왕이 칙령을 내려 말하였다.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자장은 칙명을 듣고 말하였다. “저는 차라리 하루라도 계율을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백년 동안 계율을 어기며 사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출가를 허락하였다.

 

乃深隱岩叢 粮粒不恤. 時有異禽 含菓來供 就手而喰. 俄夢天人來授五戒. 方始出谷 鄕邑士女 爭來受戒.

내심은암총 양립불휼. 시유이금 함과래동 취수이식. 아몽천인래수오계. 방시출곡 향읍사녀 쟁래수계.

 

자장은 바위 사이에 깊이 숨어 살았기 때문에 아무도 양식을 주지 않았다. 이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어와 공양하여서 손으로 받아 먹었다. 얼마 뒤 꿈에 하늘의 사람이 와서 다섯 가지 계를 주었다. 그제야 비로소 자장은 골짜기에서 나왔는데, 고을의 남녀가 다투어 와서 계를 받았다.

 

藏自嘆邊生 西希大化. 以仁平三年丙申歲[卽貞觀十年也] 受勅 與門人僧實等十餘輩 西入唐 謁淸凉山. 山有曼殊大聖塑相 彼國相傳云 帝釋天將工來彫也.”

장자탄변생 서희대화. 이인평삼년병신세[즉정관십년야] 수칙 여문인승실등십여배 서입당 알청량산. 산유만수개성소상 치국상전운 제석천장공래조야.”

 

자장은 변방 나라에 태어난 것을 스스로 탄식하며 중국에 가서 불법 배우기를 원하였다. 인평(仁平) 2년 병신(서기 636)[즉 정관(貞觀) 10년이다.]에 칙명을 받아 제자인 승려 실() 10여 명과 함께 서쪽 당나라에 들어가 청량산(淸凉山)을 찾았다. 이 산에는 문수보살의 소상이 있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말하였다. “제석천이 공인을 데리고 와서 조각해 만든 것이다.”

 

藏於像前 禱祈冥感 夢像摩頂授梵偈 覺而未解. 及旦有異僧來釋云[已出皇龍塔篇] 又曰 雖學萬敎 未有過此.”

장어상전 도기명감 몽상파정수범게 각이미해. 급잔유이승래석운[이출황룡탑편] 우왈 수학만교 미유과차.”

 

자장은 소상 앞에서 기도하고 명상하였는데, 꿈에 소상이 이마를 쓰다듬으며 범어로 된 불시()를 주었지만 깨어나서도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이상한 중이 와서 풀어주고 말하였다.[이미 황룡사 탑 편에 나왔다.] “비록 만 가지 가르침을 배운다 해도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소이다.”

 

又以袈裟舍利等付之而滅[藏公初匿之 故唐僧傳不載] 藏知已蒙聖莂 乃下北臺 抵太和池 入京師. 太宗勅使慰撫 安置勝光別院. 寵賜頻厚 藏嫌其繁擁 啓表入終南雲際寺之東崿 架嵓爲室 居三年. 人神受戒 靈應日錯 辭繁不載. 旣而再入京 又蒙勅慰 賜絹二百疋 用資衣費.

우이가사사리등부지이멸[장공초닉지 고당승전부재] 장지이몽성별 내하북대 저태화지 입경사. 태종칙사위무 안치승광별원. 총사빈후 장혐기번옹 계표입종남운제사지동악 가암위실 거삼년. 인신수계 영응일착 사번부재. 기이재입경 우몽칙위 사뎐이백필 용자의비.

 

그리고 가사와 사리 등을 주고 사라졌다.[자장이 처음에는 이 일을 숨겼기 때문에 당승전에는 실려 있지 않았다.] 자장은 이미 자신이 성불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곧 북대에서 내려와 태화지(太和池)에 이르러 당나라 서울로 들어갔다. 당나라 태종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편안히 머물도록 하였다. 태종이 자장을 총애하여 많은 물건을 자주 하사하였지만 자장은 그 번잡한 것이 싫어서 글을 올리고,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 동쪽 절벽에 들어가서 바위를 걸쳐서 방을 만들고 3년 동안 머물렀다. 사람들과 신들이 계를 받았고 그 영험이 날로 행해졌지만, 말이 번거로우므로 여기에는 싣지 않는다. 이윽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자 황제가 보낸 칙사의 위문을 받았는데, 비단 200필을 내려서 의복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貞觀十七年癸卯 本國善德王上表乞還. 詔許引入宮 賜絹一領 雜綵五百端 東宮亦賜二百端 又多禮貺.

정관십칠년계묘 본국선덕왕상표걸환. 조허인입숭 사견일영 잡채오백단 동궁역사이백단 우가예황.

 

정관 17년 계묘(서기 643)에 신라 선덕왕(善德王)이 글을 보내 자장을 돌려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대궐로 불러들여서, 비단 가사 한 벌과 여러 색깔의 비단 500단을 내려주었고 태자도 비단 200단을 내려주었으며, 또 많은 예물을 주었다.

 

藏以本朝經像未充 乞齎藏經一部 洎諸幡幢花蓋 堪爲福利者 皆載之. 旣至 洎擧國欣迎. 命住芬皇寺[唐傳作王芬] 給侍稠渥.

장이본조경상비충 걸재장경일부 계제번당화개 감위복리자 개재지. 기지 계거국흔영. 명주분황사[당전작왕분] 급시주악.

 

자장은 본국에는 아직 불경과 불상이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어서, 대장경 1부와 여러 번당(幡幢)과 화개(花蓋) 등에 이르기까지 복과 이로움이 될 만한 것을 청하여 모두 실어 왔다. 이리하여 본국으로 돌아오자 온 나라가 환영하였다. 왕은 자장을 분황사(芬皇寺)[당전에는 왕분사(王芬寺)라 하였다.]에 머물게 하고, 물건과 시중드는 사람을 주어 극진히 대하였다.

 

一夏請至宮中講大乘論 又於皇龍寺 演菩薩戒本七日七夜 天降甘澍 雲霧暗靄 覆所講堂. 四衆咸服其異.

일하청지궁중강대승론 우어황룡사 연보살계본칠일칠야 첮강감수 운무암애 부소강당. 사중함복기이.

 

어느 여름에 궁궐로 자장을 청하여서 대승론을 강의하게 하고 또 황룡사에서 보살계본(菩薩戒本)7일 밤낮으로 강연하게 하였는데,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강당을 덮었다. 이를 본 청중들이 모두 그의 신이함을 탄복하였다.

 

朝廷議曰 佛敎東漸 雖百千齡 其於住持修奉 軌儀闕如也 非夫綱理 無以肅淸.” 啓勅藏爲大國統 凡僧尼一切規猷 摠委僧統主之.[按北齊天保中 國置十統 有司奏宜甄異之.’ 於是宣帝以法上法師爲大統 餘爲通統.

조정의왈 불교동점 수백천영 기어주지수봉 궤의궐여야 비부강리 무이숙청.” 계칙장위대국통범승니일체규유 총위승통주지.[안북제천보중 국치십통 유사주의견이지.’ 어시선제이법상법사위대통 여위통통.

 

조정에서 이렇게 의논하였다. “불교가 우리 동방에 들어온 지 오래되었지만 불법을 유지하고 받드는 규범이 없다. 통괄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다.” 이 의논을 왕에게 아뢰자, 왕이 칙명을 내려 자장을 대국통(大國統)으로 삼고, 승려의 모든 규범을 승통에게 위임하여 주관하도록 하였다.[살펴보면, 북제(北齊) 천보(天保) 연간에 나라에 10통을 두었다. 관원이 마땅히 직위를 구별해야 한다.’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선제(宣帝)가 법상법사(法上法師)를 대통으로 삼고 나머지는 통통(通統)으로 삼았다.

 

又梁陳之間 有國統州統國都州都僧都僧正都維乃等名 摠屬昭玄曺 曺卽領僧尼官名. 唐初又有十大德之盛.

우영진지간 유국통주통국도주도승도승정도유내등명 총속소현조 조즉령승니관명. 당초우유십대덕지성.

 

또 양나라와 진나라 시대에 국통(國統), 주통(州統), 국도(國都), 주도(州都), 승도(僧都), 승정(僧正), 도유내(都維乃) 등의 명칭이 있었는데, 모두 소현조(昭玄曺)에 속해 있었다. 소현조는 곧 승려를 거느리는 관직 이름이다. 당나라 초에 또 10대덕이 나올 정도로 번성하였다.

新羅眞興王十一年庚午 以安藏法師爲大書省一人 又有小書省二人. 明年辛未 以高麗惠亮法師爲國統 亦云寺主 寶良法師爲大都維那一人 及州統九人 郡統十八人等. 至藏更置大國統一人 蓋非常職也 亦猶夫禮郞爲大角干 金庾信大大角干. 後至元聖大王元年 又置僧官 名政法典 以大舍一人史二人爲司 棟僧中有才行者爲之. 有故卽替 無定年限. 故今紫衣之徒 亦律宗之別也 鄕傳云 藏入唐 太宗迎至式乾殿 請講華嚴 天降甘露 開爲國師云者妄矣.” 唐傳與國史皆無文].

신라진흥왕십일년경오 이안장법사위대서성일일 우유소서성이인. 명년신미 이고려혜량법사위국통 역운사주 보량법사위대도유나일인 급주통구인 군통십팔인등. 지장경치대국통일인 개비상직야 역유부례랑위대각간 김유신대대각간. 후지원성대왕원년 우치승관 명정법전 이대사일인사이인위사 동승중유재향자위지. 유고즉체 무정년한. 고금자의지도 역율종지별야, 향전운 장입당 태종영지식건전 청강화엄 천강감로 개위국사운자망의.” 당전여국사개무문]

 

신라 진흥왕(眞興王) 11년 경오(서기 550)에 안장법사(安藏法師)를 대서성(大書省)으로 삼았는데 한 사람뿐이었고 또 소서성(小書省) 두 사람이 있었다. 다음해 신미년에 고구려 혜량법사(惠亮法師)를 국통(國統)으로 삼았는데 사주(寺主)라고도 한다. 보량법사(寶良法師)를 대도유나(大都維那)로 삼았는데 한 사람뿐이었고, 주통(州統) 9명과 군통(郡統) 18명 등을 두었다. 자장 때에 와서 다시 대국통 한 명을 두었으나 항상 있는 직책은 아니었으니, 또한 부례랑(夫禮郞)이 대각간이 되고 김유신(金庾信)이 태대각간이 된 예와 같다. 후에 원성대왕(元聖大王) 원년(서기 785)에 또 승관을 두고 정법전(政法典)이라 하고 대사(大舍) 1인과 사() 2인을 사()로 삼아, 승려들 중 재능과 행실이 뛰어난 자를 뽑아 그 직책을 맡겼다. 특별한 일이 생기면 교체하였는데 임기는 따로 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자줏빛 승복을 입은 무리들은 역시 율종과 다르다. 향전(鄕傳)에 이르기를, “자장이 당나라에 갔는데, 태종이 맞이하여 식건전(式乾殿)에 와서 화엄경(華嚴經)을 강의하도록 하였더니, 하늘에서 단이슬을 내렸으므로 처음으로 국사(國師)로 삼았다.”라고 하였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당전과 국사에는 이러한 글이 없다.]

 

藏値斯嘉會 勇激弘通. 令僧尼五部各增舊學 半月說戒 冬春摠試 令知持犯 置員管維持之. 又遣巡使 歷檢外寺 誡礪僧失 嚴飾經像 爲恒式. 一代護法 於斯盛矣. 如夫子自衛返魯 樂正 雅頌各得其宜.

장치사가회 용격홍통. 영승니오부각증구학 반월설계 동춘총식 영지지범 치원관유지지. 우견순사 역검외사 계여승실 엄식경상 위항식. 일대호법 어사성의. 여부자자위반노 악정 아송각득기의.

 

자장은 이러한 좋은 기회를 만나 용감히 나아가 불교를 널리 전파하였다. 승려들에게 구학(舊學)을 더 증가시키고 보름마다 계율을 설법하였으며, 겨울과 봄에는 이들을 모아 시험을 쳐서 계율을 지키는지 여부를 알게 하였고, 관원을 두어 이 제도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또 순찰하는 관리를 보내어 서울 밖에 있는 절들을 검사하여 승려들의 과실을 징계하고, 불경과 불상을 잘 관리하는 것을 영원한 법식으로 삼았다. 한 시대에 불법을 보호하는 것이 이때가 가장 융성하였다. 이것은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와 음악을 바로잡자 아()와 송()이 각각 그 마땅함을 얻게 된 것과 같다고 하겠다.

 

當此之際 國中之人 受戒奉佛 十室八九 祝髮請度 歲月增至. 乃創通度寺 築戒壇 以度四來.[戒壇事已出上] 又改營生緣里第元寧寺 設落成會 講雜花萬偈 感五十二女 現身證聽. 使門人植樹如其數 以旌厥異 因號知識樹.

당차지제 국중지인 수계봉불 십실팔구 축박청도 세월증지. 내창통도사 축계단 이도사래.[계단사이출상] 우개영생연리제원녕사 설낙성회 강잡화만게 감오십이녀 현신증청. 사문인식수여기수 이정궐이 인호지식수.

 

이때 나라 안 사람으로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드는 이가 열에 여덟 아홉 집은 되었으며, 머리 깎고 중이 되기를 청하는 자가 나날이 늘어났다. 그래서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하고 계를 받는 단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제도하였다.[계를 받는 단에 대한 일은 이미 앞에서 나왔다.] 또 자장 자신이 태어난 집을 원녕사(元寧寺)로 고치고 낙성회를 열어서 화엄경 1만 게송을 강의하자, 52명의 여인이 감동하여 몸을 현세에 드러내고 와서 강의를 들었다. 제자들에게 그들의 수만큼 나무를 심게 하여 그 기이한 자취를 나타내게 하고 그 나무를 지식수(知識樹)라고 하였다.

 

* 祝髮: 삭발

 

嘗以邦國服章不同諸夏 擧議於朝 簽允曰臧. 乃以眞德王三年己酉 始服中朝衣冠 明年庚戌 又奉正朔 始行永徽號. 自後每有朝覲 列在上蕃 藏之功也.

상이방국복장부동제하 거의어조 첨윤왈장. 내이진덕왕삼년기유 시복중조의관 명년경술 우봉정삭 치행영휘호. 자후매유조근 열재상번 장지공야.

 

일찍이 우리나라의 복식이 중국와 같지 않았으므로 조정에 건의하여 허락받았다. 그래서 진덕왕(眞德王) 3년 기유(서기 649)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입게 하였고, 다음 해인 경술년(서기 650)에 중국의 달력을 받들어서 처음으로 중국의 연호 영휘(永徽)를 사용하였다. 이후로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조회할 때는 여러 나라 사신들 중에서 신라의 사신이 가장 윗자리에 앉았으니, 이것은 자장의 공이었다.

 

* 簽允: 인가하다.

 

暮年謝辭京輦 於江陵郡[今溟州也] 創水多寺居焉. 復夢異僧 狀北臺所見 來告曰 明日見汝於大松汀.”

모년서서경련 어강릉군[금명주야] 창수다사거언. 복몽이승 상북대소견 래고왈 명일여어대송정.”

 

말년에는 서울을 떠나 강릉군(江陵郡)[지금의 명주(溟州)이다.]에 수다사(水多寺)를 창건하고 머물렀다. 북대에서 본 신이한 스님이 다시 꿈에 나타나 말하였다.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그대를 만날 것이다.”

 

驚悸而起 早行至松汀 果感文殊來格 諮詢法要 乃曰 重期於太伯葛蟠地.

경계이기 조행지송정 과감문수래격 자순법요 내왈 중기어태백갈반지.

 

자장은 깜짝 놀라 일어나서 일찌감치 송정(松汀)으로 갔는데, 과연 문수보살이 감응하여 와 계셨다. 그래서 불법의 요지 를 물었더니 말하였다. “태백산(太白山) 갈반지(葛蟠地)에서 다시 만나자.”

 

遂隱不現[松汀至今不生荊刺 亦不棲鷹鸇之類云] 藏往太伯山尋之 見巨蟒蟠結樹下 謂侍者曰 此所謂葛蟠地.”

수은불현[송정지금불생형극 역불서응전지류운] 장왕태백산심지 견거망반결수하 위시자왈 차소위갈반지.”

 

마침내 자취를 감추고 나타나지 않았다.[송정에는 지금까지도 가시나무가 나지 않고, 매와 새매처럼 사나운 종류의 새는 깃들지 않는다고 한다.] 자장이 태백산으로 찾아가다가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 서리어 있는 것을 보고 모시고 온 사람에게 말하였다. “이곳이 이른바 갈반지다.”

 

乃創石南院[今淨岩寺]以候聖降. 粤有老居士 方袍襤縷 荷葛簣 盛死狗兒來 謂侍者曰 欲見慈藏來爾.”

내창석남원[금정암사]이후성항. 월유노거사 방포남루 하갈궤 성사구아래 위시자왈 욕견자장래이.”

 

그리고 곧 석남원(石南院)[지금의 정암사(淨岩寺)이다.]을 창건하고 문수보살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어떤 늙은 거사가 남루한 도포를 입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메고 와서는 자장을 수행하는 제자에게 말하였다. “자장을 보려고 왔다.”

 

門者曰 自奉巾箒 未見忤犯吾師諱者 汝何人 斯爾狂言乎?”

문자왈 자봉건추 미견오범오사휘자 여하인 사이광언호?”

 

그러자 모시는 제자가 말하였다. “내가 스승님을 받들어 모신 이래로 우리 스승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보지 못했거늘,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미친 소리를 하느냐?”

 

居士曰 但告汝師.” 遂入告 藏不之覺曰 殆狂者耶.” 門人出詬逐之 居士曰 歸歟歸歟 有我相者 焉得見我.

거사왈 단고여사.” 수입고 장부지각왈 태광자야.” 문인출후축지 거사왈 귀여귀여 유아상자 언득견아.”

 

거사가 다시 말하였다. “다만 네 스승에게 알리기만 하거라.” 그래서 들어가 알렸더니 자장도 깨닫지 못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마도 미친 사람이겠지.” 그래서 제자가 나가 꾸짖어 내쫓자 거사가 말하였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자신의 학문과 지위에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느냐?”

 

 

 

乃倒簣拂之 狗變爲師子寶座 陞坐放光而去 藏聞之 方具威儀 尋 光而趨 登南嶺已 杳然不及 遂殞身而卒. 茶毗安骨於石穴中.

내도궤불지 구변위사자보좌. 승좌방광이거 장문지 방구위의 심 광이추 등남령이 묘연불급 수운신이졸. 다비안골어석혈중,

 

그리고는 삼태기를 뒤집어 털자, 강아지가 사자보좌(師子寶座)로 변하였다. 거사는 그 위에 올라앉자 빛을 발하며 사라졌다. 자장을 이 말을 듣고 그제야 몸가짐을 바로 하고 빛을 찾아 남쪽 고개로 올라갔지만, 이미 아득해서 따라가지 못하고 마침내 몸을 던져 죽었다. 시체는 화장하여 유골을 돌구멍 속에 모셨다.

 

凡藏之締構寺塔 十有餘所 每一興造 必有異祥 故蒲塞供塡市 不日而成. 藏之道具布襪 幷大和龍所獻木鴨枕 與釋尊由衣等 合在通度寺. 又巘陽縣[今彦陽] 有鴨遊寺 枕鴨嘗於此現異 故名之.

범장지체구사탑 십유여소 매일흥조 필유이상 고포색공전시 불일이성. 장지도구포말 병대화용소헌목압침 여석존유의등 합재통도사. 우헌양현[금언양] 우압유사 침압상어차현이 고명지.

 

자장이 세운 절과 탑이 10여 곳인데, 세울 적마다 반드시 신이하고 상서로움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며칠이 되지 않아 절과 탑이 완성되었다. 자장이 쓰던 도구와 옷감과 버선, 그리고 태화지의 용이 바친 오리 모양의 목침과 석가여래가 입었던 가사 등은 모두 통도사에 있다. 또 헌양현(巘陽縣)[지금의 언양(彦陽)이다.]에 압유사(鴨遊寺)가 있는데, 오리 모양의 목침이 일찍이 이곳에서 신이한 일을 나타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又有釋圓勝者 先藏西學 而同還桑梓 助弘律部云.

우유석원승자 선장서학 이동환상재 조홍율부운.

 

또 원승(圓勝)이란 승려는 자장보다 먼저 중국에 유학하였는데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자장을 도와 널리 계율을 폈다고 한다.

 

讚曰 曾向淸凉夢破廻 七篇三聚一時開 欲令緇素衣慙愧 東國衣冠上國裁.

찬왈 증향청량몽파회 칠편삼취일시개 욕령치소의참괴 동국의관상국재.

 

다음과 같은 노래로 기린다.

 

일찍이 청량산으로 가 꿈을 깨고 돌아오니 모든 사람을 이끌 계율 일시에 열렸다네.

승려와 속인의 옷 부끄러이 여겨 우리나라 의관을 중국처럼 만들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