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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券 第四 義解 券五-二惠同塵

二惠同塵

 

속세에 묻혀산 두 승려 혜숙과 혜공

 

釋惠宿 沈光於好世郞徒 郞旣讓名黃卷. 師亦隱居赤善村[今安康縣有赤谷村]二十餘年. 時國仙瞿旵公 嘗往其郊縱獵 一日 宿出於道左 攬轡而請曰 庸僧亦願隨從 可乎?”

석혜숙 침광어호세랑도 낭기양명황권. 사역은거적선촌[금안강형유적곡촌]이십여년. 시국선구담공 상왕기교종렵 일일 숙출어도좌 남비이청왈 용승역원수종 가호?”

 

승려 혜숙(惠宿)이 호세랑(好世郞)의 무리에서 자취를 감추자 호세랑은 화랑 명단에서 혜숙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혜숙은 적선촌(赤善村)[지금의 안강현(安康縣)에 적곡촌(赤谷村)이 있다.]에 숨어 지낸 지가 20여 년이나 되었다. 이때 국선 구담공(瞿旵公)이 일찍이 적선촌에서 사냥을 하였데, 어느 날 혜숙이 길가에 나와 말고삐를 잡고 청하였다. “소승도 따라가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公許之 於是縱橫馳突 裸袒相先 公旣悅. 及休勞坐 數炮烹相餉 宿亦與啖囓 略無忤色. 旣而進於前曰 今有美鮮於此 益薦之何?” 公曰 .”

공허지 어시종횡치돌 나단상선 공기열. 급휴노좌 수포팽상향 숙역여담설 약무오색. 기이진어전왈 금유미선어차 익천지하?” 공왈 .”

 

공이 허락하였다. 그러자 혜숙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옷을 벗어젖히고 서로 앞을 다투니 공이 기뻐하였다. 앉아 쉬면서 고기를 굽고 삶아서 서로 먹기를 권하였는데, 혜숙도 같이 먹으면서 조금도 꺼려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윽고 공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지금 맛있는 고기가 여기 있는데 좀 더 드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다!”

 

宿屛人割其股 寘盤以薦 衣血淋漓. 公愕然曰 何至此耶?” 宿曰 始吾謂公仁人也 能恕己通物也 故從之爾. 今察公所好 唯殺戮之耽篤 害彼自養而已 豈仁人君子之所爲 非吾徒也.

숙병인할기고 치반이천 의혈임리. 공악연왈 하지차야?” 숙왈 시오위공인인야 능서기통물야 고종지이. 금찰공소호 유살육지탐독 해피자양이이 기인인군자지소위? 비오도야.”

 

혜숙이 사람들을 물리치고 자기 넓적다리를 베어 소반에 담아 올리니, 옷에 붉은 피가 줄줄 흘렀다. 공이 경악하며 물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가?” 혜숙이 말하였다. “처음에 저는 공은 어지신 분이니 자신의 경우를 미루어서 만물에까지 생각이 미치리라 여기었기 때문에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공이 좋아하는 것을 살펴보니, 오로지 죽이는 것만 탐내어 남을 해쳐 자신을 먹이니 이것이 어찌 어진 군자가 할 일이겠습니까? 우리와 같은 부류가 아닙니다.”

 

遂拂衣而行 公大慙. 視其所食 盤中鮮胾不滅. 公甚異之 歸奏於朝.

수불의이행 공대참. 시기소식 반중선자불감. 공심이지 귀주어조.

 

마침내 옷을 떨치고 가버리자, 공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혜숙이 먹던 것을 보니 소반에는 신선한 고기 살점이 그대로 있었다. 공은 매우 이상하게 여기고는 돌아와 조정에 이 일을 아뢰었다.

 

眞平王聞之 遣使徵迎 宿示臥婦床而寢 中使陋焉 返行七八里 逢師於途 問其所從來 曰 城中檀越家 赴七日齋 席罷而來矣.”

진평왕문지 견사징영 숙시와부상이침 중사루언 반행칠팔리 봉사어도 문기소종래 왈 성중단월가 부칠일재 석파이래의.”

 

진평왕(眞平王)이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혜숙을 맞이하여 오도록 하였는데, 그 사람이 가서 보니 혜숙이 여자의 침상에 누워 자고 있었다. 이를 더럽게 여기고 7~8리쯤 되돌아오는데, 도중에 혜숙을 만났다. 그 사람은 혜숙에게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더니 혜숙이 말하였다. “성 안에 있는 시주(檀越) 집에서 7일재에 갔다가 마치고 오는 길이오.”

 

中使以其語達於上 又遣人檢檀越家 其事亦實. 未幾宿忽死 村人轝葬於耳峴[一作硎峴]. 其村人有自峴西來者 逢宿於途中 問其何往 曰 久居此地 欲遊他方爾.”

중사이기어달어상 우견인검단월가 기사역실. 미기숙홀사 촌인여장어이현[일작형현]. 기촌인유자현서래자 봉숙어도중 문기하왕 왈 구거차지 욕유타방이.”

 

그 사람이 돌아와서 왕에게 아뢰었고, 그래서 또 사람을 보내 시주집을 조사해보니 이 또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혜숙이 갑자기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현(耳峴)[형현(硎峴)이라고도 한다.] 동쪽에 장사 지냈다. 그 마을 사람 중에 이현 서쪽에서 오는 이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도중에 혜숙을 만나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이곳에 오래 살았으니 다른 지방으로 유람 가려고 하오.”

 

相揖而別 行半許里 躡雲而逝. 其人至峴東 見葬者未散. 具說其由 開塚視之 唯芒鞋一隻而已. 今安康縣之北 有寺名惠宿 乃其所居云 亦有浮圖焉.

상읍이별 행반허리 섭운이서. 기인지현동 견장자미산. 기설기유 개총시지 유망혜일쌍이이. 금안강현지북 유사명혜숙 냐기소거운 역유부도언,

 

그래서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져서 반 리쯤 가다가 보니, 혜숙이 구름을 타고 가고 있었다. 그 사람이 고개 동쪽에 이르렀는데 장사 지내던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래서 혜숙을 만난 사연을 말하고 무덤을 파보았더니 다만 짚신 한 짝만 들어 있을 뿐이었다. 지금 안강현 북쪽에 혜숙사(惠宿寺)라는 절이 있으니, 바로 혜숙이 살던 집이라 한다. 또 부도도 있다.

 

釋惠空 天眞公之家傭嫗之子 小名憂助[蓋方言也] 公嘗患瘡濱於死 而候慰塡街 憂助年七歲 謂其母曰 家有何事 賓客之多也?” 母曰 家公發惡疾將死矣 爾何不知?” 助曰 吾能右之.”

석혜공 천진공지가용구지자 소명우조[개방언야] 공상환창빈어사 이후위전가 우조년칠세 위기모왈 가유하사 빈객지다야? 모왈 가공발악질장사의 이하부지?“ 조왈 오능우지.“

 

승려 혜공은 천진공(天眞公)의 집에서 품팔이하던 노파의 아들로, 어려서의 이름은 우조(憂助)[아마도 우리말일 것이다.]였다. 천진공이 일찍이 몹쓸 종기가 나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자 문병하는 사람이 길을 가득 메웠다. 당시 우조는 7세였는데, 어머니에게 물었다. “집에 무슨 일이 있어서 손님이 이렇게 많아요?” “주인께서 몹쓸 병에 걸려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너는 어찌 그것도 모르고 있었니?” 우조가 말하였다. “제가 고칠 수 있어요.”

 

母異其言 告於公 公使喚來. 至坐床下 無一語. 須臾瘡潰 公謂偶爾 不甚異之.

모이기언 고어공 공사환래. 지좌상하 무일어. 수유창궤 공위우이 불십이지.

 

어머니는 그 말을 이상하게 여기어 공에게 알리자 공이 그를 불러오게 하였다. 우조는 침상 아래에 한마디 말도 없이 앉았다. 그런데 잠시 후 종기가 터져버렸다. 공은 우연한 일이라 여기고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旣壯 爲公養鷹 甚愜公意. 初公之弟 有得官赴外者. 請公之選鷹歸治所 一夕公忽憶其鷹 明晨擬遣助取之. 助已先知之 俄頃取鷹 昧爽獻之. 公大驚悟 方知昔日救瘡之事 皆叵測也.

기장 위공양응 심협공의. 초공지제 유득관부외자. 청공지선응귀치소 일석동홀억기응 명신의견조취지. 조이선지지 아경취응 매상헌지. 공대경오 방지석일구창지사 개파측야.

 

이미 장성해서는 공을 위해 매를 길렀는데 공은 매우 흡족해 하였다. 공의 동생이 처음으로 벼슬을 얻어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동생은 공에게 부탁하여 공이 골라준 좋은 매를 가지고 근무지로 떠났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공은 갑자기 그 매 생각이 나서, 다음 날 새벽에 우조를 보내어 가져오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우조는 벌써 알고서 잠깐 사이에 매를 가져다가 새벽에 공에게 바쳤다. 공은 크게 놀라 깨달았다. 그제야 예전에 종기를 치료한 일이 모두 헤아리기 어려운 일임을 안 것이다.

 

謂曰 僕不知至聖之托吾家 狂言非禮汚辱之 厥罪何雪 而後乃今願爲導師導我也.” 遂下拜.

위왈 복부지지성지탁오가 광언비례오욕지 궐죄하설 이루내금원위도사도아야.” 수하배.

 

그래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지극한 성인께서 제 집에 계신 줄도 모르고 버릇없는 말과 예의에 어긋난 행동으로 모욕을 했으니, 그 죄를 어찌 다 씻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 스승이 되시어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마침내 공은 내려가서 우조에게 절을 하였다.

 

靈異旣著 遂出家爲僧 易名惠空. 常住一小寺 每猖狂大醉 負簣歌舞於街巷. 號負簣和尙 所居寺因名夫蓋寺 乃簣之鄕言也. 每入寺之井中 數月不出 因以師名 名其井. 每出有碧衣神童先湧 故寺僧以此爲候. 旣出 衣裳不濕.

영이기저 수출가위승 역명혜공. 상주일소자 매창광대취 부궤가무어가항 호부궤화상 소거사인명부개사 내궤지향언야. 매입사지정중 수월불출 인이사명 명기정. 매출유벽의신동선용 고사승이차위후. 기출 의상불습.

 

영험과 이적이 이미 드러나자, 드디어 출가하여 이름을 혜공(惠空)이라 바꾸었다. 항상 작은 절에 살며 매번 미치광이 행세를 하였으니, 크게 취하여서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곤 하여 사람들을 그를 부궤화상(負簣和尙)이라 불렀고 그가 머무는 절을 부개사(夫蓋寺)라 했으니, 곧 우리말로 삼태기를 말한다. 혜공은 또 절의 우물 속으로 들어가면 몇 달씩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우물 이름도 지었다. 우물에서 나올 때마다 푸른 옷을 입은 신동이 먼저 솟아나왔기 때문에, 절의 승려들은 이것으로 그가 나올 것을 미리 알 수 있었다. 혜공은 우물에서 나왔는데도 옷이 젖지 않았다.

 

晩年移止恒沙寺[今迎日縣吾魚寺 諺云 恒沙人出世 故名恒沙洞] 時元曉撰諸經疏 每就師質疑 或相調戱. 一日二公 沿溪掇魚蝦而啖之 放便於石上 公指之戱曰 汝屎吾魚.”

만년이지항사사[금영일현오어사 언운 항사인출세 고명항사동] 시원효찬제경소 매취사질의록상조희. 일일이공 연계철어하이담지 방변어석성 공지지희왈 여뇨오어.”

 

만년에는 항사사(恒沙寺)에 머물렀다.[지금의 영일현(迎日縣) 오어사(吾魚寺)인데, 세속에서는 항하사(恒河沙)처럼 많은 사람들이 승려가 되었기 때문에 항사동(恒沙洞)이라고 하였다.] 당시에 원효가 여러 불경의 주석을 달면서 매번 혜공법사에게 가서 물었는데, 혹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어느 날 두 스님이 시내를 따라가면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 위에 대변을 보았는데, 혜공이 그것을 가리키며 농담을 하였다. “너는 똥이요 나는 물고기다.”

 

故因名吾魚寺 或人以此爲曉師之語 濫也. 鄕俗訛呼其溪 曰芼矣川.

고인명오어사 혹인이차위효사지어 람야. 향속와호기계 왈모의천.

 

그래서 오어사(吾魚寺)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원효대사가 한 말이라고 하지만 잘못이다. 세간에서는 그 시내를 잘못 불러서 모의천(芼矣川)이라고 한다.

 

瞿旵公嘗遊山 見公死僵於山路中 其屍膖脹 爛生虫蛆 悲嘆久之 及廻轡入城. 見公大醉歌舞於市中.

구담공상유산 견공사강어산로중 기시방창 난생충저 비탄구지 급회비입성. 견공대취가무어시중.

 

구담공이 일찍이 산으로 유람을 갔다가 혜공이 산길에서 죽어 쓰러진 것을 보았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 시체가 썩어 구더기가 났다. 구담공은 한참을 슬퍼하며 탄식하다가 말고삐를 돌려 성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혜공이 크게 취하여 시장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아닌가?

 

又一日將草索綯 入靈廟寺 圍結於金堂與左右經樓及南門廊廡 告剛司 此索須三日後取之.”

우일일장초색도 입영묘사 위결어금당여좌유경루급남문낭무 고강사 차색수삼일후취지.”

 

또 어느 날은 풀로 새끼를 꼬아서 영묘사(靈廟寺)에 들어가서는, 금당과 좌우에 있는 경루, 및 남문의 회랑을 새끼줄로 묶어 놓은 후, 절을 관리하는 스님에게 말하였다. “이 새끼줄은 반드시 사흘 후에 풀어야 하느니라!”

 

剛司異焉而從之. 果三日善德王駕幸入寺. 志鬼心火出燒其塔 唯結索處獲免.

강사이언이종지. 과삼일선덕왕가행입사. 지귀심화출소기탑 유결색처보면.

 

그 스님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 말대로 하였다. 그런데 과연 사흘만에 선덕왕(善德王)이 행차하여 절로 들어왔다. 그때 지귀(志鬼:선덕여왕을 짝사랑한 사람)의 심화(心火)가 나와 그 탑을 불태웠는데, 단지 새끼줄로 묶은 곳만 화재를 면하였다.

 

又神印祖師明朗 新創金剛寺 設落成會 龍象畢集 唯師不赴. 朗卽焚香虔禱 小選公至. 時方大雨 衣袴不濕 足不沾泥. 謂明朗曰 辱召懃懃 故玆來矣.”

우신인조사명랑 신창금강사 설낙성회 용상필집 유사불부. 랑즉분향건도 소선공지. 시방대우 의궤불습 족불점니. 위명랑왈 욕소근근 고자래의.”

 

또 신인종(神印宗)의 조사 명랑(明朗)이 새로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고 낙성회를 열었는데, 고승들이 모두 모였지만 오로지 혜공만은 오지 않았다. 명랑은 곧 향을 피우고 정성껏 기도하였는데, 잠시 후 혜공이 왔다. 당시에 많은 비가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혜공의 옷은 젖지 않았고 신발에는 진흙도 묻지 않았다. 혜공이 명랑에게 말하였다. “하도 간절하게 불러서 왔소이다!”

 

靈迹頗多 及終 浮空告寂 舍利莫知其數 嘗見肇論曰 是吾昔所撰也.” 乃知僧肇之後有也.

영적번다 급종 부공고적 사리막지기수 강견조론왈 시오석소찬야.” 내지승조지후유야.

 

이처럼 영험이 자못 많았다. 죽을 때는 공중에 떠서 세상을 떠났는데, 사리는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혜공이 일찍이 조론(肇論)을 보고 말하였다. “이것은 내가 옛날에 지은 것이다.” 이 말로 혜공이 승조(僧肇: 진나라 승려로 용수의 대승불교를 공부하고 조론을 저술)의 후신임을 알 수 있다.

 

讚曰 草原縱獵床頭臥 酒肆狂歌井底眠 隻履浮空何處去 一雙珍重火中蓮.

찬왈 초원종렵상두와 주사광가정저면 척리부공하처거 일쌍진중화중연.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초원에서 맘껏 사냥하고 침상에 누웠으며 술집에서 미친 듯 노래하고 우물 속에서 잤다네.

번뇌의 불바다 속의 한쌍의 보배중 하나를 들고 공중을 날아 어디로 갔는가?

 

-속세의 번뇌를 떠나 훌훌 날아감을 달마의 현신 고사를 빌어 묘사한 것...

隻履를 검색하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