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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券 第四 義解 券五- 良志使錫

良志使錫

 

釋良志 未詳祖考鄕邑. 唯現迹於善德王朝. 錫杖頭掛一布帒 錫自飛至檀越家 振拂而鳴. 戶知之納齋費. 帒滿則飛還. 故名其所住曰錫杖寺.

석양지 미상조고향읍. 유련적어선덕왕조. 석장두괘일포대 석자비지단월가 진불이명. 호지지납재비. 대만즉비환. 고명기소주왈 석장사.

 

승려 양지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신라 선덕왕(善德王) 때의 행적이 드러났을 뿐이다. 지팡이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두면 지팡이가 저절로 시주의 집으로 날아가서 흔들면서 소리를 내었다. 그 집에서도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담아주었다. 포대가 차면 다시 날아서 돌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양지가 머무른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하였다.

 

其神異莫測 皆類此. 旁通雜藝 神妙絶比. 又善筆札 靈廟丈六三尊天王像 幷殿塔之瓦天王寺塔下八部神將 法林寺主佛三尊左右金剛神等 皆所塑也. 書靈廟法林二寺額. 又嘗彫磚造一小塔 幷造三千佛 安其塔置於寺中 致敬焉. 其塑靈廟之丈六也 自入定 以正受所對 爲揉式 故傾城士女 爭運泥土.

기신이막측 개유차. 방통잡예 신묘절비. 우선필례 영묘장육삼존천왕상 병전탑지와천왕사탑하팔부신장 법림사주불삼존좌우금강신장 개소소야. 서영묘법림이사액. 우상조전조일소탑 병조삼천불 안기탑치어사중 치경언. 기소영묘지장육야 자입정 이정수소대 위유식 고경성사녀 쟁운니토.

 

양지의 신기하고 기이한 행적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이 외에도 여러 잡다한 기예에도 두루 통달하여 그 신묘함을 비길 곳이 없었다. 또 글씨와 그림 실력도 뛰어났으니, 영묘사(靈廟寺)의 장륙삼존상과 천왕상, 전각과 탑의 기와, 천왕사(天王寺) 탑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과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 등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이 외에도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을 썼다.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작은 탑 하나를 만들었고, 아울러 삼천불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시고 예를 드렸다. 양지 스님이 영묘사의 장륙상을 만들 때 선정에 들어가 삼매경에서 뵌 부처를 모형으로 삼았는데, 온 성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하였다.

 

風謠云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

풍요운 래여래여래여 래여애반다라 애반다의도량 공덕수비여양래여

 

그 당시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이 세상은 서럽더라.

서럽더라 무리여,

공덕 닦으러 절에 오다.

 

至今土人舂相役作皆用之 蓋始于此 像成之費 入穀二萬三千七百碩[或云改金時租]

지금토인용상역작개용지개시우차 상성지비 입적이만삼천칠백석[혹운개금시조]

 

지금도 그곳 사람들이 방아를 찧거나 다른 일을 할 때면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아마도 이때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불상을 만들 때 든 비용은 곡식 23,700석이었다.[혹은 금색을 칠할 때 쓴 비용이라고 한다.]

 

議曰 師可謂才全德充而以大方隱於末技者也.”

의왈 사가위재전덕충이이대방은어말지자야.”

 

논평하여 말한다. “양지스님은 재주가 완전하고 덕이 충분하였지만 하찮은 재주에 자신의 능력을 숨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讚曰 齋罷堂前錫杖閑 靜裝爐鴨自焚檀 殘經讀了無餘事 聊塑圓容合掌看.

찬왈 재차당전석장한 정장노압자분단 잔경독료무여사 연소원용합장간.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재 마치니 법당 앞에 지팡이는 한가로운데

단정히 향로에 향불 피운다네.

남은 불경 다 읽자 할 일이 없어

불상 빚어 놓고 합장하며 뵌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