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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第五- 寶壤梨木

寶壤梨木

 

釋寶壤傳 不載鄕井氏族 謹按淸道郡司籍載 天福八年癸卯[大祖卽位 第二十六年也]正月日 淸道郡界里審使順英 大乃末水文等 柱貼公文 雲門山禪院長生 南阿尼岾 東嘉西峴.[云云] 同藪三綱典主人寶壤和尙 院主玄會長老 典座玄兩上座 直歲信元禪師.”[右公文 淸道郡 都田帳傳准]

석보양전 부재향정씨족 근안청도군사적재 천복팔년계묘[대조득위 제이십육년야]정월일 청도군계리심사순영 대내말수문등 주첩공문 운문산선원장생 남아니점 동가서현[운운] 동수삼강전주인보양화상 원주현회장노 전좌현양상좌 직세신원선사[우공문 청도군 도전장전준]

 

승려 보양(寶壤)의 전기에는 그의 고향과 성씨가 실려 있지 않다. 청도군(淸道郡)의 문서를 살펴보면 이러한 기록이 있다. “천복(天福) 8년 계묘(서기 943)[고려 태조가 왕위에 오른 지 26년이다.] 정월 모일에 청도군 계리심사(界里審使) 순영(順英)과 대내말(大乃末) 수문(水文) 등이 작성한 공문을 보면, 운문산선원(雲門山禪院)의 경계표는 남쪽은 아니점(阿尼岾) 동쪽은 가서현(嘉西峴)이다.[라고 하였다.] 절의 간부 승려 중에서 주된 사람은 보양화상(寶壤和尙)이고 선원의 주인은 현회장로(玄會長老)이며, 선원의 일은 현량상좌(玄兩上座)가 담당하고 직세(直歲)는 신원선사(信元禪師)이다.”[위의 공문은 청도군의 토지대장에 의한 것이다.]

 

又開運三年丙午 雲門山禪院長生標塔公文一道 長生十一 阿尼岾嘉西峴畝峴西北買峴[一作面知村]北猪足門等.

우개운삼년병오 운문산선원당생표탑공문일도 장생십일 아니점가서현묘현서북매현[일작면지촌]북저족문등.

 

또 개운(開運) 3년 병오(서기 946)의 운문산선원의 장생표탑에 관한 공문에는, 장승은 열한 개로 아니점, 가서현, 묘현(畝峴), 서북매현(西北買峴)[면지촌(面知村)이라고도 한다.], 북저족문(北猪足門) 등에 있다고 하였다.

 

又庚寅年 晉陽府貼 五道按察使 各道禪敎寺院 始創年月形止 審檢成籍時 差使員東京掌書記李僐 審檢記載.

우경인년 진양부점 오도안찰사 각도선교사원 시창년월형상 심검성적사 차사원동경장서기이선 심검기재.

 

또 경인년(서기 1230) 진양부첩(晉陽府貼)에는, 5도 안찰사가 각 도의 선종과 교종이 처음 창건된 연월과 그 실제의 상황을 상세히 조사하여 장부를 만들 때, 차사원 동경장서기 이선(李僐)이 자세히 조사하여 적었다고 하였다.

 

正隆六年辛巳[大金年號. 本朝毅宗卽位十六年也]九月 郡中古籍裨補記 准淸道郡前副戶長禦侮副尉李則楨戶 在古人消息及諺傳記載 致仕上戶長金亮辛 致仕戶長旻育 戶長同正尹應前 其人珍奇等 與時上戶長用成等言語. 時太守李思老 戶長亮辛年八十九 餘輩皆七十已上 用成年六十已上[云云次不准].

정륭육년신사[대금연호. 본조의종즉위십육년야]구월 군중고적비보기 준청도군전부호장어모부위이즉정호 재고인소식급언전기재 치사상호장김양신 치사로장민육 호장동정윤응전 기인진기등 여시상호장용성등언어. 시태수이사노 호장양신연팔십구 여배개칠십이상 용성년육십이상[운운차불준].

 

정륭(正隆) 6년 신사(서기 1161)[()나라의 연호이다. 우리 고려 의종(毅宗)이 왕위에 오른 지 16년이다.] 9월의 군중고적비보기(郡中古籍裨補記)에 의하면, 청도군 전 부호장(副戶長) 어모부위(禦侮副尉) 이즉정(李則楨)의 집에는 옛 사람들의 소식과 우리말로 전해 내려오는 기록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상호장(上戶長)을 지낸 김양신(金亮辛), 호장(戶長)을 지낸 민육(旻育), 호장동정(戶長同正) 윤응전(尹應前), 기인(其人) 진기(珍奇) 등과 당시 상호장 용성(用成) 등의 말이 실려 있다. 이때 태수 이사로(李思老)와 호장 김양신은 나이 89세였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70세 이상이었으며 용성은 나이가 60세 이상이었다.[‘라고 하였다.’라는 말은 이후부터는 쓰지 않는다.]

 

羅代已來 當郡寺院 鵲岬已下中小寺院 三韓亂亡間 大鵲岬小鵲岬所寶岬天門岬嘉西岬等五岬 皆亡壞. 五岬柱合在大鵲岬.

라기이래 당군사원 작갑이하중소사원 삼한란망간 대작갑소착갑소보갑천문갑가서삽등오갑 개망괴. 오갑주합재대작갑.

 

신라시대 이래로 이 청도군의 절로써 작갑사(鵲岬寺)와 그 이하의 중소 사원 중에서, 후삼국이 싸우는 사이에 대작갑사(大鵲岬寺)ㆍ소작갑사(小鵲岬寺)ㆍ소보갑사(所寶岬寺)ㆍ천문갑사(天門岬寺)ㆍ가서갑사(嘉西岬寺) 등 다섯 갑사가 모두 붕괴되어 없어졌다. 그래서 다섯 갑사의 기둥만 대작갑사에 모아 두었다.

 

祖師知識[上文云寶壤] 大國傳法來還 次西海中 龍邀入宮中念經 施金羅袈裟一領. 兼施一子璃目 爲侍奉而追之. 囑曰 于時三國擾動 未有歸依佛法之君主 若與吾子歸本國 鵲岬創寺而居 可以避賊. 抑亦不數年內 必有護法賢君 出定三國矣 言訖相別而來還.

조사지식[상문운보양] 대국전법래환 차서해중 용요입궁중념경 시금하가사일령. 겸시일자리목위시봉이추지. 촉왈 우시삼국요동 미유귀의불법지군주 약여오자귀본국 작갑창사이거 가이피적. 억역불수연내 필유호법현군 출정삼국의.” 언흘상별이래환.

 

이 절의 시조인 지식(知識)[위의 글에서는 보양(寶壤)이라고 하였다.]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해 받고 돌아오는 길에, 서해 중간에 이르렀을 때 용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우게 하고, 금빛 비단 가사 한 벌을 시주하였다. 아울러 아들 이목(璃目)에게 조사를 모시고 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용왕이 부탁하여 말하였다. “지금 후삼국이 어지러워 불법에 귀의한 왕이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서 작갑(鵲岬)에 절을 짓고 머문다면 적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수년 이내로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 삼국을 평정할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서로 작별한 뒤 돌아왔다.

 

 

 

及至玆洞 忽有老僧 自稱圓光 抱印櫃而出 授之而沒[按圓光以陳末入中國 開皇間東還. 住嘉西岬 而沒於皇隆. 計至淸泰之初 無慮三百年矣. 今悲嘆諸岬皆廢 而喜見壤來而將興 故告之爾] 於是壤師 將興廢寺 而登北嶺望之 庭有五層黃塔. 下來尋之則無跡. 再陟望之 有群鵲啄地. 乃思海龍鵲岬之言 尋掘之 果有遺塼無數. 聚而蘊崇之 塔成而無遺塼. 知是前代伽藍墟也. 畢創寺而住焉 因名鵲岬寺.

급지자동 홀유노승 자칭원광 포인궤이출 수지이몰[안원광이진말입중국 개황간동환. 주가서삽이몰어황륭. 계지청태지초 무려삼백년의. 금비탄제갑개폐 이희견양래이장흥 고고지이] 어시양사 장흥폐사 이등북령망지 정유오층황탑. 하래심지즉무적. 재척망지 유군작탁지. 내사해룡작갑지언 심굴지 과유유전무수. 취이온숭지 탑성이무유전. 지시전대가람허야. 필창사이주언 인명작갑사.

 

이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어떤 노승이 자신을 원광(圓光)이라 하고는 도장이 든 상자를 안고 나와 조사에게 주고는 사라졌다.[살펴보건대, 원광은 진나라 말에 중국으로 들어가서 개원 연간에 돌아왔다. 가서갑에 머물다가 황륭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청태 초까지 연수를 계산하면 무려 300년이나 된다. 이제 여러 갑사가 모두 없어진 것을 슬피 탄식하다가 보양이 와서 다시 일으키려는 것을 보고 기뻐하여 이렇게 말해준 것이다.] 그래서 보양법사는 없어진 절을 일으키려고 북쪽 고개에 올라 바라보니, 뜰에 5층의 황색탑이 있었다. 하지만 내려와서 찾아보면 흔적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올라가 바라보니 까치가 땅을 쪼고 있었다. 그제야 서해 용이 작갑이라 했던 말이 생각나서, 그곳을 찾아가 땅을 파보니 과연 예전 벽돌이 무수히 나왔다. 이것을 모아 높이 쌓아올려 탑을 완성하였는데, 남는 벽돌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이곳이 이전 시대의 절터였음을 알았다. 절을 다 창건하고 머무르면서 작갑사(鵲岬寺)라고 하였다.

 

未幾太祖統一三國 聞師至此 創院而居 乃合五岬田束五百結納寺 以淸泰四年丁酉 賜額曰雲門禪寺 以奉袈裟之靈蔭.

미기태조동일삼국 문사지차 창원이거 내합오갑존속오백결납사 이청태사년정유 사액왈운문선사 이봉가사지영음.

 

얼마 후 고려 태조(太祖)가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보양법사가 여기서 절을 창건하고 머물러 있다는 말을 듣고 곧 다섯 갑의 밭 500결을 합하여 이 절에 바쳤다. 청태(淸泰) 4년 정유(서기 937)에 절 이름을 운문선사(雲門禪寺)라 내리고, 가사의 신령스러운 음덕을 받들게 하였다.

 

璃目常在寺側小潭 陰騭法化. 忽一年亢旱 田蔬焦槁. 壤勅璃目行雨. 一境告足 天帝將誅不職. 璃目告急於師 師藏於床下. 俄有天使到庭 請出璃目. 師指庭前梨木 乃震之而上天. 梨木萎摧 龍撫之卽蘇.[一云師呪之而生] 其木近年倒地 有人作楗椎 安置善法堂及食堂. 其椎柄有銘.

이목상재사측소담 음즐법화. 홀일년항한 전소초고. 양칙이목행우. 일경고족 천제장주불직. 이목고습어사 사장어상하. 아유천사도정 청출이목. 사지정전이목 내진지이상천. 이목이최 용무지즉소.[일운사주지이생] 기목근년도지 유인작건추 안치선법당급식당. 기추병유명.

 

이목(璃目)은 항상 절 옆의 작은 연못에 살면서 불법의 교화를 남몰래 도왔다. 어느 해에 갑자기 가물어서 밭의 채소가 말라 죽을 지경이었다. 보양이 이목에게 비를 내리게 하자 한 고을이 충분할 정도의 비가 내렸다. 그러나 천제는 이목이 자신의 직분을 어겼다며 죽이려고 하였다. 이목이 보양에게 위급함을 알렸고, 법사는 이목을 침상 밑에 숨겨 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에 천사가 뜰에 내려와 이목을 내어달라고 청하였다. 법사가 뜰의 배나무를 가리키자 곧 벼락을 친 후에 하늘로 올라갔다. 배나무가 시들고 부러졌지만 용이 어루만지자 곧 다시 살아났다.[법사가 주문을 외워서 살렸다고도 한다.] 그 나무는 최근에 땅에 쓰러졌는데, 어느 사람이 빗장 방망이를 만들어서 선법당(善法堂)과 식당에 두었다. 그 방망이 자루에는 글이 새겨져 있다.

 

初師入唐廻 先止于推火之奉聖寺 適太祖東征 至淸道境 山賊嘯聚于犬城[有山岑臨水峭立 今俗惡其名 改云犬城] 驕傲不格 太祖至于山下 問師以易制之術 師答曰 夫犬之爲物 司夜而不司晝 守前而忘其後 宜以晝擊其北

 

처음에 법사는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먼저 추화군(推火郡)의 봉성사(奉聖寺)에 머물렀다. 마침 고려 태조가 동쪽을 정벌해서 청도(淸道) 지역까지 이르렀는데, 산적들이 견성(犬城)[산봉우리가 물을 굽어보며 뽀족하게 서 있는데, 지금 세간에서는 그것을 미워하여 견성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에 모여서 교만을 부리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산 밑에 이르러 법사에게 산적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술책을 묻자, 법사가 말하였다.

무릇 개란 짐승은 밤에만 지키지 낮에는 지키지 않으며, 앞만 지키지 그 뒤는 잊어버립니다. 그러니 마땅히 낮에 그 북쪽으로 쳐야 할 것입니다.”

 

太祖從之 果敗降 太祖嘉乃神謀 歲給近縣租五十碩 以供香火 是以寺安二聖眞容 因名奉聖寺 後遷至鵲岬 而大創終焉

태조가 그 말을 따랐더니 과연 적이 패하여 항복하였다. 태조는 법사의 신통한 계책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주변 고을의 세금 50석을 주어 향불을 받들도록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태조와 보양법사의 두 성인의 초상화를 모시고 이름도 봉성사(奉聖寺)라 하였다. 후에 법사는 작갑사로 옮겨 크게 절을 창건하고 세상을 마쳤다.

 

師之行狀 古傳不載 諺云 與石崛備虛師[一作毗虛]爲昆弟 奉聖石崛雲門三寺 連峰櫛比 交相往還爾.

사지행장 고전부재 언운 여석굴비허사[일작비허]위곤제 봉성석굴운문삼사 연봉즐차 교상왕환이.

 

법사의 행장은 고전(古傳)에는 실리지 않았고, 단지 민간에 이러한 말이 있다. “석굴사(石崛寺)의 비허사(備虛師)[비허(毗虛)라고도 한다.]와 형제가 되어 봉성, 석굴, 운문 등 세 절이 이어진 산봉우리에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서로 왕래하였다.”

 

後人改作新羅異傳 濫記鵲塔璃目之事于圓光傳中. 系犬城事於毗虛傳 旣謬矣. 又作海東僧傳者 從而潤文 使寶壤無傳 而疑誤後人. 誣妄幾何.

후인개자신라이전 람기작탑이목지사우원광전중. 계견성사어비허전 기류의. 우작해동승전자종이윤문 사보양무전 이의오후인. 무망기하.

 

후세 사람들이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을 고쳐 지으면서, 작갑사의 탑과 이목의 사실을 원광법사의 전기 속에 잘못 기록하였다. 견성의 사실을 비허의 전기에 넣은 것도 이미 잘못된 것이다. 해동고승전을 지은 사람이 이에 따라 글을 다듬고 보양의 전기를 없애버렸기 때문에 후인들이 의심하거나 잘못 알게 되었다. 이 얼마나 무망(誣妄,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남을 속임)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