圓光西學
唐續高僧傳第十三卷載 新羅皇隆寺釋圓光 俗姓朴氏. 本住三韓 光卽辰韓人也 家世海東 祖習綿遠 而神器恢廓 愛染篇章 校獵玄儒 討讐子史. 文華騰翥於韓服 博贍猶愧於中原. 遂割略親朋 發憤溟渤. 年二十五 乘舶造于金陵. 有陳之世 號稱文國. 故得諮考先疑 詢猷了義.
당속고승전제십삼권재 신라왕륭사석권광 속성박씨. 본주삼한 광즉진한인야. 가세해동 조습면원 이신기회확 애염편장 교렵현유 토수자사. 문화등저어한복 박섬유괴어중원. 수할략친붕 발분명발 연이십오 승박조우금릉 유진지세 호칭문국 고득자고선의 순유료의.
당나라 『속고승전(續高僧傳)』 제13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라 황륭사(皇隆寺, 황룡사(皇龍寺)를 말한다.)의 승려 원광(圓光)의 속세의 성은 박씨이다. 본래 삼한(三韓, 변한ㆍ진한ㆍ마한을 말한다.)에 살았는데, 원광은 바로 진한 사람이다. 대대로 해동(海東)에 살면서 조상의 풍습이 오랜 세월 동안 계승되어 왔다. 원광의 기량은 넓고 컸으며 글을 매우 좋아하여 노장학과 유학을 두루 섭렵하였고 제자서와 역사서를 연구하였다. 그는 문명을 삼한에 크게 떨쳤지만, 해박하고 풍부한 것은 오히려 중국에 비해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드디어 친구들과 작별하고 용기를 내오 발해를 건너 해외로 나가기로 하였다. 나이 25세에 배를 타고 금릉(金陵)으로 건너갔다. 그 당시는 진(陳)나라 시대로 문명국이라 일컬어졌다. 고로 많은 선인들에게 의심스러운 점을 물어 의미를 알게 되었다.
初聽莊嚴旻公弟子講 素霑世典 謂理窮神. 及聞釋宗 反同腐芥 虛尋名敎 實懼生涯. 乃上啓陳主 請歸道法 有勅許焉.
초청장엄민공제가구 소점세전 위리궁신. 급문석종 반동부개. 허심명교 실구생애 냐상계진주 청귀도법 유칙허언.
처음에는 장엄사(莊嚴寺) 민공(旻公)의 제자로 강의를 들었다. 본래 속세의 서적을 읽었기 때문에 신비로운 일을 연구하는 것만을 이치라고 여겼지만, 불교의 진리를 듣고는 도리어 이전의 배움을 한낱 지푸라기와 같다고 여기게됐고 헛되이 명분과 가르침에 매이느니 실제로는 생애를 근심거리로 만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진나라 왕에게 글을 올려 불교에 귀의하겠다고 청하자 칙명으로 허락하였다.
旣爰初落采 卽稟具戒 遊歷講肆 具盡嘉謀 領牒微言 不謝光景 故得成實涅槃 蘊括心府 三藏釋論 徧所披尋. 末又投吳之虎丘山 念定相沿 無忘覺觀. 息心之衆 雲結林泉 竝以綜涉四含 功流八定 明善易擬 簡直難虧. 深副夙心 遂有終焉之慮 於卽頓絶人事 盤遊聖迹 攝想靑霄 緬謝終古.
시원초낙채 즉품구계 유역강사 구진가모 영첩미언 불사광경 고득성실열반 온괄심부 삼장석혼 편소피심 말우역오지호구산 영정상연 무망각관 식심지중 운결임천 병이종섭사함 공유팔정 명선이의 간직난휴. 심부숙심 수유종언지려 어즉돈절인사 반유성적 섭상청소 면사종고.
그리하여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불법을 강의하는 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좋은 생각들을 갖추고 자잘한 말들은 접어두고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아 열반의 본디 의미를 마음 속에 쌓아 간직하여 삼장(三藏)과 석론(釋論)을 두루 탐구하였다. 나중에는 오(吳)나라의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 바른 길을 따라 깨우침을 노력하여 대중들의 마음과 합하고 구름이 숲위에 모이듯하여 부처님의 언행록(阿含經의 4 경)을 충실히 따르니 그 공덕이 팔정(八定)의 경지에 들어 선을 밝히고 의심스러운 것을 간단하고 직설적으로 풀이하는 경지로 마음깊이 새겨 모든 염려를 벗어난 경지에 이르렀기에 속된 일들을 끊고 성인의 삶을 그대로 따르며 살고자 하늘의(靑霄) 이치를 생각하며 옛 생각들을 총정리하려 했다.
八定: 색계의 유심유사정, 무심유사정, 무심무사정, 사념법사정의 4선정과 무색계의 공무변처정, 식무변처정, 무소유처정, 비상 비비상처정의 4공정: 사물의 이치를 깨달은 경지
時有信士 宅居山下 請光出講 固辭不許 苦事邀延 遂從其志 創通成論 末講般若. 皆思解俊徹 嘉問飛移 兼imagefont以絢采 織綜詞義 聽者欣欣 會其心府.
시유신사 택거산하 청광출강 고사불허 고사요연 수종기지 창통성론 말강반야. 개사래준철 가문비이 겸*이현채 직종사의 청자흔흔 회기심부.
이때 어떤 신도가 산 밑에 살고 있었는데, 원광에게 나와서 강의해 주기를 청하였다.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으나 너무나 간절하게 청하므로 드디어 그의 뜻에 따라 처음에는 성실론(成實論)을 강의하고 마지막에는 반야경(般若經)을 강의하였다. 모든 생각과 풀이가 뛰어나서 좋은 질문은 잘 다듬어 주고 글의 뜻을 짜임새있게 해주니 듣는 사람들의 마음도 상쾌하여 그들의 마음에 쏙쏙 들어 하였다.
從此因循舊章 開化成任 每法輪一動 輒傾注江湖. 雖是異域通傳 而沐道頓除嫌郄 故名望橫流 播于嶺表 披榛負橐而至者 相接如鱗.
종차인순구장 개화성임 매법륜일동 첩경주강호. 수시이역통전 이목도돈재혐극. 고명망횡류 파우영표 피진부탁이지자 상접여린.
이로부터 옛 기준을 쫒아 중생을 깨우쳐 본분을 이루도록 하니 매번 설법 할 때마다 강물이 흐르듯 하였다. 비록 다른 나라의 가르침을 설명함에도 거부감없이 젖어들 수 있었고 그래서 잘못 알려진 것들과 경계를 세우니 헛된 장애들을 벗어나니 가르침들이 마치 고기비늘처럼 잘 이어졌다.
會隋后御宇 威加南國 曆窮其數. 軍入楊都 遂被亂兵 將加刑戮. 有大主將 望見寺塔火燒 走赴救之. 了無火狀 但見光在塔前 被縛將殺. 旣怪其異 卽解而放之 斯臨危達感如此也.
회수휴어우 위가남국 역궁기수. 군입양도 수피난병 장가형참. 유대주장 망견사탑화소 주부구지. 료무화상 단견광재탑전 치박장살. 기괴기이 즉해이방지 사임위달감여차야.
때마침 수(隋)나라 왕이 천하를 통치하니, 위력이 남쪽 나라에까지 미치어서 진나라의 운명도 다해가고 있었다. 수나라 군사들이 진나라의 서울인 양도(楊都)까지 침입하자 드디어 전쟁통에 원광도 살해될 위험에 처하였다. 때마침 어떤 대장이 절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 구하려 하였다. 그런데 불이 난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단지 원광이 탑 앞에 결박된 채 곧 죽게 될 처지에 있었다. 대장은 이 일을 괴이하게 여기고 즉시 원광을 놓아주었다. 위기에 직면하여 영험을 나타낸 것이 이와 같았다.
光學通吳越 便欲觀化周秦. 開皇九年 來遊帝宇. 値佛法初會 攝論肇興 奉佩文言 振績微緖 又馳慧解 宣譽京皐. 勣業旣成 道東須繼. 本國遠聞 上啓頻請. 有勅厚加勞問 放歸桑梓.
광학통오월 변욕관화주진. 개황구년 래유제우. 치불법초회 섭론조흥 봉패문언 진적미서 우치혜해 선예경고. 적업기성 도동수계. 본국원문 상계번청. 유칙후가노문 방귀상재.
원광은 오나라와 월나라 학문을 통달하였지만, 문득 주(周)나라와 진(秦)나라의 문화도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개황(開皇) 9년(서기 589)에 수나라의 서울로 유학을 갔다. 처음 불법 모임을 가져 섭론(攝論)을 소개하고 글귀를 본 뜻에 맞게 이해하도록 하고 해석해주니 그 명성이 수나라 서울에 떨쳐졌다. 일을 마치자 신라에도 불법을 퍼뜨리기 원하니 신라에서도 멀리서 이 소식을 듣고 수나라 황제에게 원광을 돌려보내 주기를 자주 청하였다. 그래서 수나라 황제는 칙령을 내려 후하게 위로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 攝論: 4세기경 인도의 아상가(Asanga)가 대승 불교를 통일하기 위하여 지은 불서(佛書). 유식설(唯識說)의 입장에서 대승 불교 전체를 하나의 정연한 조직으로 묶어 논한 책
光往還累紀 老幼相欣. 新羅王金氏 面申虔敬 仰若聖人. 光性在虛閑 情多汎愛 言常含笑 慍結不形. 而牋表啓書 往還國命 竝出自胸襟 一隅傾奉 皆委以治方 詢之道化. 事異錦衣 情同觀國 乘機敷訓 垂範于今.
광왕환누기 노유상흔. 신라왕김씨 면시건경 앙약성인. 광성재허한 정다범애 언상함소 온결불형. 이전표계서 왕환국명 병출자흉금 일우뎡봉 개위이치방 순지도화. 사이금의 정동관국 승시부훈 수범우금.
원광이 수십 년 만에 돌아오자 늙은이도 젋은이도 서로 기뻐하였다. 신라왕 김씨는 원광을 만난 후 그를 공경하여 성인처럼 우러러보았다. 원광은 성품이 겸허하고 여유롭고 정도 사랑도 많아서 누구나 사랑하고 말할 때에도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아서 노여움을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중국과의 외교문서나 오고 가는 국서가 모두 그의 생각에 의하여 쓰여졌으니 온 나라가 받들어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원광에게 맡기고 도(道)로 교화하는 방법을 물었다. 원광은 벼슬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나라의 정치를 돌보는 것과 같았으니, 시의적절한 교훈을 펼쳐서 오늘날까지도 모범이 되고 있다.
年齒旣高 乘輿入內 衣服藥食 竝王手自營 不許佐助. 用希專福 其感敬爲此類也. 將終之前 王親執慰 囑累遺法 兼濟民斯. 爲說徵祥 被于海曲.
연치기고 승여입내 의복약식 병왕수장영 불허좌조. 용희전복 기삼경위차유야. 장종지전 왕친집위 촉누유법 겸제민사. 위설징상 피우해곡.
원광은 나이가 이미 많아 수레를 타고 대궐에 들어갔으며, 왕이 손수 의복과 약과 음식을 마련하였고 다른 사람이 돕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듯 왕이 혼자서만 복을 받으려 했을 정도로 원광에게 감복하고 그를 존경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세상을 떠나려 하자 왕이 친히 그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법을 남기어서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하였다. 원광이 상세히 설명하여주니 공덕이 나라 곳곳에 미쳤다.
以彼建福五十八年 少覺不念 經于七日 遺誡淸切 端坐終于所住皇隆寺中. 春秋九十有九 卽唐貞觀四年也[宜云十四年] 當終之時 寺東北虛中 音樂滿空 異香充院 道俗悲慶 知其靈感. 遂葬于郊外 國給羽儀葬具 同於王禮.
이피선복오십팔년 소각불년 경우칠일 유계청절 단좌종우소주황룡사중. 춘추구십유구 즉당정관사년야[의운십사년] 당종지시 사동북허중 음악만공 이향충원 도속비경 지기영감. 수장우교외 국급우의장구 동어왕례.
신라 건복(建福) 58년에 원광은 몸이 조금 불편한 것을 느끼다가, 7일이 지나 계에 어긋나지않게 황륭사(皇隆寺)에서 단정히 앉은 채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99세로 당나라 정관(貞觀) 4년이었다.[마땅히 14년(서기 630)이라 해야 한다.] 임종할 때 절의 동북쪽 허공에 음악 소리가 가득했고 이상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 찼으니 모든 승려와 속인들이 슬퍼하면서도 한편으론 경사로 여겼는데, 그의 영험임을 익히 알았기 때문이다. 교외에 장사 지내었는데 나라에서 우의(羽儀:장레 위원)와 장례 도구를 내려주었으니 임금의 장례와 똑같이 하였다.
後有俗人兒胎死者 彼土諺云 ‘當於有福人墓埋之 種胤不絶.’ 乃私瘞於墳側 當日震此胎屍. 擲于塋外. 由此不懷敬者 率崇仰焉.
후유속인아태사자 피사언운 ‘당어유복인묘애지 종윤부절.’ 내사예어분측 당일진차태시. 척우영외. 유차불회경자 솔숭앙언.
그 후 어떤 세속 사람이 죽은 태아를 낳았는데, 세속에 퍼진 말이 ‘복 있는 사람의 묘에 묻으면 후손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몰래 원광의 무덤 옆에 묻었다. 그러나 그 당일로 벼락이 태아의 시체에 떨어져서 무덤 밖으로 내던져졌다. 이 일로 인해 평소에 원광을 공경하지 않던 사람들도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有弟子圓安 神慧機穎 性希歷覽 慕仰幽求. 遂北趣丸都 東觀不耐 又西燕魏 後展帝京. 備通方俗 尋諸經論 跨轢大綱 洞淸纖旨. 晩歸心學 高軌光塵. 初住京寺 以道素有聞 特進蕭瑀 奏請住於藍田所造津梁寺 四事供給 無替六時矣.
유제자원안 신혜기영 성희역람 모앙유구, 수부취환도 동관불내 우서연위. 후전제경 비통방속 심재경론 과력대강 동청섬지 만귀심학 고궤광진. 초주경사 이도소유문 특진소우 진청주어람전소조진양사 사사공급 무체육시의.
그의 제자 원안(圓安)은 지혜롭고 영민하였으며 천성이 유람을 좋아하였고 그윽한 곳에서 도를 구하면서 스승을 사모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옛 수도인 환도성(丸都城)까지 갔고 동쪽으로는 불내(不耐)를 보았으며, 또 서쪽으로는 연(燕)나라와 위(魏)나라를 돌아본 후에 중국 황제가 있는 장안(長安)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각 지방의 풍속을 잘 알았고 여러 불경의 이론을 연구하여 큰 줄기를 꿰뚫었으며 미묘한 뜻까지도 훤하게 알게되어 만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세속의 도를 고양시켰다. 처음에 장안의 절에 있을 때 도가 높다고 소문이 나자, 특진(特進) 소우(簫瑀)가 황제에게 청하여 남전(藍田) 땅에 지은 진량사(津梁寺)에 머물도록 하고, 네 가지 공양물을 넉넉하게 주어 염불과 독경에 충실하게 했다.
安嘗敍光云 本國王染患 醫治不損. 請光入宮 別省安置. 夜別二時爲說深法 受戒懺悔 王大信奉. 一時初夜 王見光首 金色晃然 有象日輪 隨身而至. 王后宮女同共觀之. 由是重發勝心 克留疾所 不久遂差. 光於辰韓馬韓之間 盛通正法 每歲再講 匠成後學 䞋施之資 竝充營寺 餘惟衣鉢而已[載達函].
한상서광군 “본국왕염환 의치불손. 청광입궁 별성안치. 야별이시위설심법 수계참회 왕대신봉. 일시초야 왕견광수 금색황연 유상일륜 수신이지. 왕후궁녀동공관지. 유시중발승심 극유질소불구수차. 광어진한마한지간 성통정법 매세재강 장성후학 친시지자 병충영사 여유의발이이.”[재달함]
원안은 일찍이 원광의 일을 이렇게 서술하였다. “신라의 왕이 병이 났는데 의원이 치료해도 차도가 없었다. 그래서 원광을 궁으로 들어오도록 청하여서 별성(別省)에 있게 하였다. 매일 밤 두 시간씩 심오한 법을 말하고 계를 받게 하여 참회하게 하였더니 왕이 원광을 크게 신봉하였다. 어느 날 초저녁에 왕이 원광의 머리를 보았더니, 금빛이 찬란하고 태양처럼 생긴 것이 그의 몸을 따라다녔다. 왕후와 궁녀들도 모두 함께 이것을 보았다. 이 일로 인해 더욱 승심(勝心)을 내어 원광을 병실에 머물게 하였더니 오래지 않아 드디어 병이 나았다. 원광은 진한과 마한 사이에서 불법을 널리 펼쳤고 해마다 두 차례씩 강론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시주 받은 재물은 모두 절의 경비로 사용하였으니 남은 것은 오직 가사와 바리때뿐이었다.”[달자함(達字函)에 실려 있다.]
又東京安逸戶長貞孝家在古本殊異傳 載圓光法師傳曰.
우동경안일호장정효가재고본수이전 재원광법사전왈
또 경주의 안일 호장(戶長) 정효(貞孝)의 집에 있는 古本 『수이전(殊異傳)』의 「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法師俗姓薛氏 王京人也. 初爲僧學佛法 年三十歲 思靜居修道 獨居三岐山. 後四年 有一比丘來 所居不遠 別作蘭若 居二年. 爲人强猛 好修呪術. 法師夜獨坐誦經 忽有神聲呼其名 “善哉善哉 汝之修行 凡修者雖衆 如法者稀有. 今見隣有比丘 徑修呪術而無所得. 喧聲惱他靜念. 住處礙我行路 每有去來 幾發惡心. 法師爲我語告而使移遷 若久住者 恐我忽作罪業.”
법사속성설씨 왕경인야. 초위승학불법 연삽십세 사정거수도 독거삼기산 후사년 유일비구래소거불원 별작난약 거이년. 위인강맹 호수주술. 법사야독좌송경 홀유신성호기명 “선재선재 여지수행 범수자수중 여법자희유. 금견린유비구 경수주술이무소득. 훤성뇌타정념. 주처애아행로 매유거래 기발악심. 법사위아어고이사이천 약구주자 공아홀작죄업.”
법사의 세속의 성은 설씨(薛氏)로 경주 사람이다. 처음 승려가 되어 불법을 배웠는데, 나이 30세에 한가로이 지내면서 수도하려고 삼기산(三岐山)에 홀로 머물렀다. 그 후 4년이 지나 어떤 승려가 와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따로 절을 짓고 2년을 살았다. 그 승려는 사람됨이 강하고 사나웠으며 주술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어느 날 밤 법사가 혼자 앉아 불경을 외는데, 홀연히 신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하였다. “좋고 좋도다! 그대의 수행이여! 무릇 수행하는 자는 비록 많지만 법대로 하는 이는 드물지. 지금 이웃의 중을 보니, 주술을 곧잘 하지만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시끄러운 소리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고요한 생각을 괴롭히지. 그가 머무는 곳은 내가 다니는 길에 방해가 되어서, 매번 지날 때마다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야. 나를 위해 법사가 그 사람에게 말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도록 해주게나. 만일 오래 머무른다면 내가 갑자기 죄를 저지를지도 모르거든.”
明日法師往而告曰 “吾於昨夜有聽神言 比丘可移別處 不然 應有餘殃.” 比丘對曰 “至行者爲魔所眩 法師何憂狐鬼之言乎?” 其夜神又來曰 “向我告事 比丘有何答乎?” 法師恐神瞋怒而對曰 “終未了說 若强語者 何敢不聽?” 神曰 “吾已具聞 法師何須補說 但可黙然 見我所爲.”
그래서 이튿날 법사가 찾아가 말하였다. “어젯밤 내가 신의 말을 들었는데, 스님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 좋겠소. 그렇지 않으면 응당 재앙이 있을 것이오.”
그러자 중이 대답하였다. “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마귀에게 현혹됩니까? 법사는 어찌 여우 귀신의 말 때문에 근심하시오?”
그날 밤 또 신이 와서 말하였다. “지난번에 내가 한 말에 대해 중이 뭐라고 대답합디까?”
법사는 신이 노여워할까봐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결국 아직 말을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굳이 말을 하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신이 말하였다. “내 이미 다 들었소. 법사는 어찌하여 말을 덧붙이는 것이오? 단지 잠자코 내가 하는 것만 보시오!”
遂辭而去. 夜中有聲如雷震 明日視之 山頹塡比丘所在蘭若. 神亦來曰 “師見如何?” 法師對曰 “見甚驚懼.”
수사이거. 야중유성여뢰진 명일시지 산뢰전비구소재난야. 신역래왈 “사견여하?” 법사대왈 “견심경구.”
마침내 작별하고 가버렸다. 밤중에 벼락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는데, 다음 날 보니 산이 무너져 중이 있던 암자를 묻어버렸다. 신이 또 와서 말하였다. “법사가 보기에는 어떻소?” 법사가 대답하였다. “보기에 너무나 놀랍고 두려웠습니다.”
蘭若: 암자 따위
神曰 “我歲幾於三千年 神術最壯 此是小事 何足爲驚? 但復將來之事 無所不知 天下之事 無所不達. 今思法師唯居此處 雖有自利之行 而無利他之功 現在不揚高名 未來不取勝果. 盍採佛法於中國. 導群迷於東海
신왈 ”아세기어삼천년 신술최장 차시소사 하족위경? 단복장래지사 무소부지 천하지사 무소부달. 굼사법사유거차처 수유자리이행 이무리타지공 현쟈불양고명 미래불위승과. 개채불법어중국 도군미어동해.“
신이 말하길 “내 나이가 3천 세에 가깝고 신술(神術)도 가장 뛰어나니, 이런 건 작은 일인데 어찌 놀랄 것이 있겠소? 단지 미래의 일도 모르는 게 없을 뿐더러 천하의 일도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소. 이제 생각해 보니, 법사가 이곳에만 있으면 비록 자신을 이롭게는 하는 행위는 되겠지만 남을 이롭게 하는 공은 없을 것이오. 지금 높은 명성을 날리지 못하면 미래에도 뛰어난 성과를 이루지 못할 것이오. 어찌하여 중국에서 불법을 배워 이 나라의 중생들을 인도하지 않는 것이오?”
對曰 “學道中國 是本所願 海陸逈阻 不能自通而已.” 神詳誘歸中國所行之計 法師依其言歸中國 留十一年 博通三藏 兼學儒術.
대왈 ”학도중국 시본소원 해륙형조 불능자통이이 신상유귀중국소행지계 법사의기언귀중국 유십일년 박통삼장 겸학유술.
법사가 대답하였다. “중국에서 도를 배우는 것은 본래 저의 소원입니다. 하지만 바다와 육지가 멀리 막혀 있어서 가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자 신이 중국으로 갈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법사는 그 말대로 중국에 가서 11년을 머무르며, 삼장(三藏)을 널리 통달하고 아울러 유학(儒術)도 배웠다.
* 儒術: 아마도 유교는 처세술정도로 판단하는 듯...
眞平王二十二年庚申[三國史云 明年辛酉來] 師將理策東還 乃隨中國朝聘使還國. 法師欲謝神 至前住三岐山寺 夜中神亦來呼其名曰 “海陸途間 往還如何?” 對曰 “蒙神鴻恩 平安到訖.” 神曰 “吾亦授戒於師.”
진평왕이십이년경신[삼국사운 명년신유래] 사장이책동환 내수중국조빙사환국. 법사욕사신 지전주삼기산사 야중신역래호기명왈 “해륙도간 왕환여하?” 대왈 “몽신홍은 평안도흘.” 신왈 “오역수계어사.”
진평왕 22년 경신(서기 600)에[『삼국사(三國史)』에서는 그 다음 해인 신유년에 왔다고 하였다.] 행장을 정리하여 중국에 왔던 사신을 따라 귀국하였다. 그리고 법사는 신에게 감사를 드리려고 예전에 머물던 삼기산의 절로 갔다. 밤이 되자 신도 역시 와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말하였다. “바다와 육지의 길을 다녀온 것이 어떠한가?” 법사가 대답하였다. “신의 크나큰 은혜를 입어 편안히 다녀왔습니다.” 신이 말하였다. “나 또한 법사에게 계(戒)를 드리겠소.”
仍結生生相濟之約 又請曰 “神之眞容 可得見耶?” 神曰 “法師若欲見我形 平旦可望東天之際.”
잉결생생상제지약 우청왈 “신지진용 가득견야?” 신왈 “법사약욕견아형 평단가망동천지제.”
이렇게 말하고는 곧 윤회하는 모든 세상에서 서로 구제하기로 약속을 맺었다. 법사는 또 청하여 말하였다. “신의 실제 모습을 뵐 수 있겠습니까?” 신이 말하였다. “법사가 만일 내 모습을 보고 싶거든, 내일 아침에 동쪽 하늘 끝을 바라보시게.”
法師明日望之 有大臂貫雲 接於天際 其夜 神亦來曰 “法師見我臂耶?” 對曰 “見已甚奇絶異.”
법사명일망지 유대비관윤 접어천제 기야 신역래왈 “법사견아비야?” 대왈 “견기심기절이.”
법사가 다음날 아침 동쪽 하늘을 바라보니 커다란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 신이 또 와서 말하였다.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는가?” 법사가 대답하였다. “보았습니다만, 너무도 신기하고 기이했습니다.”
因此俗號臂長山. 神曰 “雖有此身 不免無常之害. 故吾無月日 捨身其嶺 法師來送長逝之魂.”
인차속호비장산. 신왈 “수유차신 불면무상지해. 고오무월일 사신기영 법사래송장서지혼.”
이러한 일 때문에 세간에서는 삼기산을 비장산(臂長山)이라고도 한다. 신은 말하였다. “비록 이 몸이 있다 해도 덧없는 죽음은 면할 수 없다네. 그래서 나는 얼마 후에 그 고개에 내 몸을 버릴 것이니, 법사는 그곳으로 와서 영원히 떠나는 내 영혼을 전송해 주시게나.”
待約日往看 有一老狐黑如漆 但吸吸無息 俄然而死.
지약일왕간 유일노호흑여칠 단흡흡무식 아연이사.
약속한 날이 되어 법사가 그곳으로 가보니, 옻칠을 한 것처럼 새까만 늙은 여우 한 마리가 단지 숨만 들이 쉬고 내쉬지 못하더니 잠시 뒤에 죽어버렸다.
法師始自中國來 本朝君臣敬重爲師. 常講大乘經典. 此時高麗百濟 常侵邊鄙 王甚患之. 欲請兵於隋[宜作唐] 請法師作乞兵表. 皇帝見 以三十萬兵 親征高麗. 自此知法師旁通儒術也. 享年八十四入寂 葬明活城西.
법사시자중국래 본조군신경중위사. 상강대승경전. 차시고려백제 상침변비 왕심환지. 욕청병어수[의작당] 청법사작걸병표. 황제견 이삼십만병 친정고려. 자차지법사방통유술야. 향년팔십사입적 장명활성서.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신라의 왕과 신하들이 매우 존경하여서 법사를 스승으로 삼았다. 법사는 늘 대승경전을 강의하였다. 그 당시는 고구려와 백제가 늘 국경을 침략했기 때문에 왕은 이를 몹시 걱정하였다. 그래서 수나라[당연히 당나라가 되어야 한다.]에 군사를 청하려고 법사에게 구원병을 청하는 글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수나라 황제는 그 글을 보고 30만 군사로 직접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법사가 유술(儒術)까지 두루 통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 84세로 세상을 떠나니 명활성(明活城) 서쪽에 장사 지냈다.
又三國史列傳云 賢士貴山者 沙梁部人也. 與同里箒項爲友 二人相謂曰 “我等期與士君子遊 而不先正心持身 則恐不免招辱 盍問道於賢者之側乎?”
우삼국사열전운 현사귀산자 사량부인야. 여동리추항위우 이인상위왈 “아등기여사군자유 이불선정심지신 즉공불면초욕 개문도어현자지측호?”
또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에는 기록되길 귀산(貴山)이라는 어진 선비는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그는 같은 마을의 추항(箒項)과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말하였다. “우리들이 덕망 있는 사람들과 사귀려고 하면서 먼저 마음을 바로잡아 처신하지 않는다면 모욕을 당하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어진 사람을 찾아가 도를 묻지 않겠는가?”
時聞圓光法師入隋回 寓止嘉瑟岬[或作加西 又嘉栖 皆方言也. 岬 俗云 古尸 故或云 古尸寺 猶言岬寺也. 今雲門寺東九千步許 有加西峴 或云 嘉瑟峴. 峴之北洞有寺基是也] 二人詣門進告曰 “俗士顓蒙 無所知識 願賜一言 以爲終身之誡.”
시문원광법사귀입수회 우지가금갑[혹작가서 우가서 개방언야. 갑 속운고시 고혹운 고시사 유언갑사야. 금운문사동구천보허 유가서현 혹운 가슬현. 현지북동유사기시야] 이인지문진고왈 “속사전몽 무고지식 고사일언 이위종신지계.”
그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와 가슬갑(嘉瑟岬)[가서(加西)라고도 하고 또 가서(嘉栖)라고도 하니 모두 우리말이다. 갑(岬)을 세속에서는 곳(古尸)이라 하기 때문에, 곳절(古尸寺)이라 하니, 갑사(岬寺)라는 말과 같다. 지금 운문사(雲門寺) 동쪽으로 9천 보쯤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는데, 혹은 가슬현(嘉瑟峴)이라고도 한다.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는데 바로 이곳이다.]에 머물러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찾아가서 이렇게 아뢰었다.
“세속의 선비라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부디 한 말씀 내려주시면 평생 명심하여 실천하겠습니다.”
光曰 “佛敎有菩薩戒 其別有十 若等爲人臣子 恐不能堪. 今有世俗五戒 一曰事君以忠 二曰事親以孝 三曰交友有信 四曰臨戰無退 五曰殺生有擇. 若等行之無忽.”
광왈 불교유보살계 기별유십 약등위인신자 공불능감. 금유세속오계 일왈사군이충 이왈사친이효 삼왈뭉우유신 사왈임전무퇴 오왈살생유택. 약등행지무홀.
원광법사가 말하였다.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어 그 조항이 열 가지가 있다. 그러나 너희들은 남의 신하와 자식 된 몸이니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지금 세속에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인 세속오계가 있으니 첫째는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이고, 둘째는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고, 셋째는 신의로써 벗을 사귀는 것이고, 넷째는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을 것이고, 다섯째는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죽이는 일이다. 너희들이 이를 실행하는데 소홀히 하지 말라.”
貴山等曰 “他則旣受命矣 所謂殺生有擇 特未曉也.” 光曰 “六齋日春夏月不殺 是擇時也 不殺使畜. 謂馬牛雞犬. 不殺細物 謂肉不足一臠. 是擇物也. 此亦唯其所用 不求多殺. 此是世俗之善戒也.”
귀산등왈 “타즉기수명의 소위살생유택 특미효야 광왈 육재일춘하월불살 시택기야 불살사축. 위마우계견. 불살세물 위육부족일련. 시택물야. 차역유기소용 불구다살. 차시세속지선계야.”
귀산 등이 말하였다. “다른 것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죽이라는 말씀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원광이 말하깋 “육재일(六齋日, 매월 8일ㆍ14일ㆍ15일ㆍ23일ㆍ29일ㆍ30일)과 봄ㆍ여름에는 생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시기를 가리는 것이다. 가축을 죽이지 말아야 하니, 말ㆍ소ㆍ닭ㆍ개 등을 말하는 것이다. 미물을 죽이지 말아야 하니,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물을 가리는 것이니, 이 또한 필요한 만큼만 죽이고 많이 죽이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세속의 좋은 계이다.”
貴山等曰 “自今以後 奉以周旋 不敢失墜 後二人從軍事 皆有奇功於國家.”
귀산등왈 “자금이후 봉이주선 불감실추 후이인종군사 개유기공어국가.”
귀산 등이 말하였다. “지금부터 이 말씀을 받들어 행하여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
훗날 두 사람은 전쟁터에 나가 모두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又建福三十年癸酉[卽眞平王卽位三十五年也]秋 隋使王世儀至. 於皇龍寺設百座道場 請諸高德說經 光最居上首.
우건복삼십년계유[즉진평왕즉위삼십오년야]추 수사왕세의지. 어황룡사설백좌도장 청제고덕설경 광최거상도,
또 건복(建福) 30년 계유(서기 613)[즉 진평왕(眞平王)이 왕위에 오른 지 35년이다.] 가을에 수나라 사신으로 왕세의(王世儀)가 왔다. 그래서 황룡사(皇龍寺)에서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열고 여러 고승을 청해 불경을 강의했는데, 원광이 가장 윗자리에 앉았다.
議曰 原宗興法已來 津梁始置 而未遑堂奧. 故宜以歸戒滅懺之法 開曉愚迷. 故光於所住嘉栖岬 置占察寶 以爲恒規. 時有檀越尼 納田於占察寶 今東平郡之田一百結是也. 古籍猶存.
의왈 원종흥법이래 진양시치 이미왕당오. 고의이귀계멸참지법 개효우미. 고광어소주가서갑 치잠찰보 이위항규. 시유단월니 납전어고찰보 금동평군지전일백결시야. 고적유존.
논평하여 말한다. 원종(原宗)이 불법을 일으킨 이래로 불법으로 갈 수 있는 나루터와 다리가 비로소 마련되었지만 아직까지 불법의 심오한 진리에 도달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불교에 귀의하여 일체의 번뇌를 제거하고 참회하는 법으로 우매한 중생을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원광은 자신이 머물던 가서갑(嘉栖岬)에 점찰보(占察寶, 점찰법회를 후원하기 위한 재단)를 두어 불변의 규칙으로 삼았다. 당시에 어떤 여승이 점찰보에 밭을 시주했는데, 지금의 동평군(東平郡)에 있는 밭 100결이 바로 이것이다. 옛날 문서가 아직도 남아 있다.
光性好虛靜 言常含笑 形無慍色. 年臘旣邁 乘輿入內 當時群彦 德義攸屬 無敢出其右者. 文藻之贍 一隅所傾. 年八十餘 卒於貞觀間 浮圖在三岐山金谷寺[今安康之西南洞也 亦明活之西也] 唐傳云 告寂皇隆寺 未詳其地. 疑皇龍之訛也. 如芬皇作王芬寺之例也.
광성호허정 언상함소 형무온색 연납기매 승여입내 당시군언 덕의유속 무감출기우자. 문조지섬 일우소경. 연팔십여 졸어정관간 부도재삼기산금곡사[금안강지서남동야 역명활지서야] 당전운 고적황륭사 미상기지. 의항룡지와야. 여분황작왕분사기예야.
원광의 천성은 텅 비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였으며, 말할 때에는 늘 웃음을 머금었고 얼굴에는 화가 난 기색이 없었다. 나이가 이미 많았으므로 수레를 타고 대궐로 들어갔는데, 당시에 덕망과 인의를 갖춘 뛰어난 선비들이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그리고 뛰어난 문장 실력은 한 나라를 기울일 만큼 훌륭하였다. 나이 80여 세가 되어 정관(貞觀) 연간(서기 627~649)에 세상을 떠났는데, 부도가 삼기산(三岐山) 금곡사(金谷寺)에 있다.[지금의 안강(安康) 서남쪽 골짜기이며 명활(明活)의 서쪽이다.] 당전(唐傳)에서는 황륭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했지만, 그 장소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황룡사를 잘못 전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분황사(芬皇寺)를 왕분사(王芬寺)라고 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據如上唐鄕二傳之文 但姓氏之朴薛 出家之東西 如二人焉 不敢詳定 故兩存之. 然彼諸傳記 皆無鵲岬璃目與雲門之事. 而鄕人金陟明 謬以街巷之說 潤文作光師傳 濫記雲門開山祖寶壤師之事迹 合爲一傳. 後撰海東僧傳者 承誤而錄之 故時人多惑之. 因辨於此 不加減一字 載二傳之文詳矣.
거여상당행이전지문 단성씨지박설 출가지동서 여이인언 불감상정 고양존지. 연피제전기 개무작압리목여운문지사. 이향인김척명 류이가항지설 윤문작광사전 남기운문개산조보양사지사적합위일전. 후찬해동승전 승오이록지 고시인다혹지. 인변어차 불가감일자 재이잔지문상의.
위의 우리나라와 당나라의 두 전기를 비교해보면, 그의 성씨는 박씨와 설씨로 되어 있고 출가한 곳도 우리나라와 중국으로 되어 있어서 마치 서로 다른 두 사람인 것 같지만, 감히 명확하게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두 전기를 모두 기록해 두었다. 하지만 여러 전기에 모두 작갑(鵲岬)과 이목(璃目)과 운문(雲門) 등의 절에 대한 일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인 김척명(金陟明)이 항간의 말로 잘못 윤색하여 「원광법사전」을 지었는데, 함부로 운문사의 개조 보양사(寶壤師)의 사적을 기록하여 원광법사의 것과 합쳐서 하나의 전기를 만들어 놓았다. 그 후로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을 엮은 사람도 그 잘못을 그대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많이들 잘못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오류를 분별하기 위해 한 글자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두 전기의 글을 상세하게 실었다.
陳隋之世 海東人鮮有航海問道者 設有 猶未大振. 及光之後 繼踵西學者憧憧焉. 光乃啓途矣.
진수지세 해동인선유항해문도자 설유 유미대진. 급광지후 계종서학자동동언. 광내계도의.
진나라와 수나라의 시대에 해동 사람으로 바다를 건너가 도를 물은 사람은 적었으며, 설사 있다 해도 그 이름을 크게 떨치지 못하였다. 그런데 원광 이후에 중국으로 유학 가는 사람들이 계속 이어져 끊이지 않았다. 원광이 바로 그 길을 열었던 것이다.
讚曰
찬왈
다음과 같이 기려 노래한다.
航海初穿漢地雲 幾人來往挹淸芬 昔年蹤迹靑山在 金谷嘉西事可聞.
항해초천한지운 기인래왕웁청분 석년종적청산좌 금곡가서사가문.
바다 건너 처음으로 중국 땅의 구름을 뚫으니 몇 사람이나 오가며 맑은 향기(불법) 배웠을까.
옛날의 자취는 푸른 산에 남았으니 금곡(金谷)과 가서(嘉西)의 일을 들을 수 있다네.
* 본문에 보면 殺生有擇은 齋일에 부정타지 않도록 그리고 소위 가축을 다치지않고 쓸데없는 살생을 방지하자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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