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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券 第四 義解 券五- 元曉不覊

元曉不覊

원효불기

 

원효는 굴레가 없다.

 

聖師元曉 俗姓薛氏 祖仍皮公 亦云赤大公. 今赤大淵側 有仍皮公廟. 父談捺乃末. 初示生于押梁郡南[今章山郡]佛地村北 栗谷裟羅樹下. 村名佛地 或作發智村[俚云弗等乙村]. 裟羅樹者 諺云. “師之家 本住此谷西南 母旣娠而月滿 適過此谷栗樹下 忽分産 而倉皇不能歸家 且以夫衣掛樹 而寢處其中 因號樹曰裟羅樹.”

성사원효 속성설씨. 조잉피공 역운적대공. 금적대연측 유잉피공묘. 부담내내말. 초시생우압량군남[금장산군]불지촌북 율곡사라수하. 촌명불지 혹작발지촌[매운불등을촌]. 사라수자 언운 사지가 본주차곡서남 모기신이월만 적과차곡율수하 혹분산 이창황불능귀가 차이부의괘수 이침처기중 인호수왈사라수.”

 

성사(聖師) 원효(元曉)의 세속의 성은 설()씨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인데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적대(赤大) 연못 옆에 잉피공의 묘가 있다. 아버지는 담내내말(談捺乃末)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押梁郡)의 남쪽[지금의 장산군(章山郡)이다.] 불지촌(佛地村) 북쪽 밤나무골 사라수(裟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다. 마을 이름이 불지인데 혹은 발지촌(發智村)[세속에서는 불등을촌(弗等乙村)이라고도 한다.]이라고도 한다. 사라수에 대해 민간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법사의 집은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어머니가 아기를 가져 만삭이 되었을 때 이 골짜기를 지나다 밤나무 아래에서 갑자기 해산하게 되었다. 너무나 급해서 집에 가지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 누워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사라수(裟羅樹)라고 한다.”

 

其樹之實 亦異於常 至今稱裟羅栗. 古傳 昔有主寺者 給寺奴一人 一夕饌栗二枚 奴訟于官. 官吏怪之 取栗檢之 一枚盈一鉢 乃反自判給一枚. 故因名栗谷.”

기수지실 역이어상 지금칭사라율. 고전 석유주사자 급사노일인 일석찬율이매 노송우관 관리괴지 취율검지 일매잉일발 내반자반급일매. 고인명율곡.”

 

그 나무의 열매도 보통 열매와 달라서 지금도 사라율이라고 한다. 옛부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절의 주지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는데, 종이 관청에 소송을 하였다. 관리가 이상하게 여기고 그 밤을 가져다 검사해 보았더니, 한 알이 그릇에 가득 찼으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고 판결하였다. 이런 이유로 밤나무골이라고 하였다.”

 

師旣出家 捨其宅爲寺 名初開. 樹之旁置寺 曰裟羅. 師之行狀云 是京師人 從祖考也 唐僧傳云 本下湘州之人. 按麟德二年間 文武王割上州下州之地. 置歃良州 則下州乃今之昌寧郡也 押梁郡本下州之屬縣. 上州則今尙州 亦作湘州也. 佛地村今屬慈仁縣 則乃押梁之所分開也. 師生 小名誓幢 第名新幢[幢者 俗云毛也].

사기출가 사기택위사 명초개. 수지방치사 왈사라. 사지행장운 시경사인 종조고야 당승전운 본하상주지인. 안린덕이년간 문무왕할상주하주지지. 치삽량주 즉하주내금지창녕군 압량군본하주지속현. 상주즉금상주 역작상주야. 불지촌금속자인현 즉내압향지소분개지. 사생소명서당 제명신당[당자 속운모야].

 

스님은 출가하자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고,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하였다. 사라수나무 옆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裟羅寺)라고 하였다. 스님의 행장(行狀)에는 서울 사람이라 했는데 이것은 할아버지를 따른 것이고, 당승전에는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인덕(麟德) 2(서기 665) 사이에 문무왕(文武王)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歃良州)를 두었는데, 하주는 지금의 창녕군(昌寧郡)이고 압량군은 본래 하주의 속한 현이었다.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인데 상주(湘州)라고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의 자인현(慈仁縣)에 속해 있는데, 곧 압량군에서 나누어진 것이다. 스님의 아명은 서당(誓幢)이고 다른 이름은 신당(新幢)[()은 우리말로 털()이다.]이다.

 

初母夢流星入懷 因而有娠 及將産 有五色雲覆地. 眞平王三十九年 大業十三年丁丑歲也. 生而穎異 學不從師. 其遊方始末 弘通茂跡 具載唐傳與行狀 不可具載. 唯鄕傳所記 有一二段異事.

초모몽유성입회 인이유신 급장산 유오색운복지. 진평왕삼십구년 대업십삼년정축세야. 생이영이 학불종사. 기유방시말 홍총무적 구재당전여행정 불가구재. 유향전소기 유일이단필사.

 

처음에 어머니가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했는데, 해산할 때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이때가 진평왕(眞平王) 39년인 대업(大業) 13년 정축(서기 617)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뛰어나서 스승 없이 혼자 공부하였다. 법사가 사방으로 다니며 수행한 일과 불교를 널리 전파한 업적은 당전과 법사의 행장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일일이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향전(鄕傳)에 실린 한두 가지 기이한 일만 기록한다.

 

師嘗一日 風顚唱街云

법상일일 풍전창가운

 

법사가 어느 날 평시와 다른 이상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 주려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人皆未喩 時太宗聞之曰 此師殆欲得貴婦産賢子之謂爾 國有大賢 利莫大焉.”

인개미유 시태종문지왈 차사태욕득귀부산현자지위이 국유대현 이막대언.”

 

사람들은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태종이 이 노래를 듣고 말하였다. “이 법사는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으려는 것 같구나. 나라에 위대한 현인이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時瑤石宮[今學院是也] 有寡公主. 勅宮吏覓曉引入 宮吏奉勅將求之. 已自南山來過蚊川橋[沙川 俗云年川 又蚊川 又橋名楡橋也] 遇之. 佯墮水中濕衣袴. 吏引師於宮 褫衣曬㫰 因留宿焉

시요석궁[금학원시야] 유과공주. 칙궁리멱효인입 궁리봉칙장구지. 이자남산래과문천교[사천 속운년천 금문천 우굔명유교야] 우지. 영추수둥습의궤. 리인사어궁 치의쇄랑 인유숙언.

 

이때 요석궁(瑤石宮)[지금의 학원(學院)이 이곳이다.]에 과부가 된 공주가 있었다. 그래서 궁의 관리에게 칙명을 내려 원효를 찾아서 데려오게 하였다. 관리가 칙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려고 하였는데, 원효는 벌써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사천(沙川)인데 세간에서는 연천(年川) 또는 문천(蚊川)이라고 한다. 또 다리를 유교(楡橋)라고 한다.]를 지나오고 있어서 곧 만나게 되었다.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관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서 옷을 벗어 말리게 하자 그곳에 머물렀다.

 

公主果有娠 生薛聰. 聰生而睿敏 博通經史 新羅十賢中一也. 以方音通會華夷方俗物名 訓解六經文學 至今海東業明經者 傳受不絶.

공주과유신 생설총. 총생이예민 박통경사 신라십현중일야. 이방음통회화이방속물명 훈래육경문한 기금래동업명경자 전수부절.

 

공주는 과연 임신을 해서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영민하여 경서와 역사를 두루 통달하였으며 신라의 열 명의 현인 중 하나가 되었다. 설총은 우리말로 중국과 신라의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도 통달하여 육경과 문학을 풀이했으니,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유교 경전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은 이를 전수하여 끊어지지 않고 있다.

 

曉旣失戒生聰 已後易俗服 自號小姓居士. 偶得優人舞弄大瓠 其狀瑰奇. 因其形製爲道具 以華嚴經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命名曰無碍 仍作歌流于世. 嘗持此 千村萬落 且歌且舞 化詠而歸 使桑樞瓮牖玃猴之輩 皆識佛陀之號 咸作南無之稱 曉之化大矣哉.

효기실계생총 이후역속복 자로소성거사. 유득우인무롱대호 기상괴기. 인기형제위도구 이화엄경일절무애인 일도출생사.” 명명왈무애 잉작가유우세. 상지차 천촌만악 차가차무 화영이귀 사상추옹유확후지배 개식부타지호 함작남무지칭 효지화대의재.

 

원효는 이미 계를 어겨 설총을 낳은 후에는 세속의 옷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하였다. 우연히 광대들이 춤출 때 사용하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하였다. 그래서 그 모양에 따라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의 한 구절인 일절 무애인(無碍人, 장애가 없는 자유로운 사람)은 한 번에 생사에서 벗어난다.”라는 구절에서 따서 무애(無碍)라 이름 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 무애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시키고 읊조리며 다녔으니, 가난한 사람들과 산골에 사는 무지몽매한 자들까지도 모두 다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모두들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는 위대하다 할 것이다.

 

其生緣之村名佛地 寺名初開 自稱元曉者 蓋初輝佛日之意爾. 元曉亦是方言也 當時人 皆以鄕言稱之始旦也.

기생연지촌명불지 사명초개 자칭원효자 개초휘불일지의이. 원효역시방언야 당시인 개이향언칭지시단야.

 

그가 태어난 마을을 불지촌이라 하고 절을 초개사라 하였으며 스스로의 이름을 원효라 한 것은, 아마도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원효라는 이름도 역시 우리말이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우리말로 원효를 일러 새벽[始旦]’이라고 하였다.

 

曾住芬皇寺 纂華嚴疏 至第四十廻向品 終乃絶筆. 又嘗因訟 分軀於百松 故皆謂位階初地矣.

증주분황사 찬화엄소 지제사십회향품 종내절필. 우상인송 분구어백송 고개위위계초지의.

 

그는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편찬하던 중, 40 회향품(廻向品)에 이르러 마침내 멈췄다. 또 일찍이 송사로 인하여 몸을 100그루 소나무에 나누었기 때문에, 모두들 원효가 위계(位階)의 초지(初地)에 도달했다고 하였다.

 

亦因海龍之誘 承詔於路上 撰三昧經疏 置筆硯於牛之兩角上 因謂之角乘 亦表本始二覺之微旨也. 大安法師排來而粘紙 亦知音唱和也.

역인해룡지유 승조어로상 찬삼매경소 치필연어우지양각 인위지각승 역표본시이각지미지야. 대안법사배래이첨지 역지음창화야.

 

또 바다 용의 권유로 길에서 조서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었는데, 글을 지을 때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사이에 놓았기 때문에 각승(角乘)이라고도 하였으니, 이것은 본각(本覺)과 시각(視覺)의 숨은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大安法師)가 와서 종이를 붙여 경전의 순서를 바로잡았는데, 이 또한 서로를 알아보고 뜻이 맞았던 것이다.

 

* 왕이 대안법사에게 흩어진 경전의 순서를 정하도록 명하였다. 대안법사는 종이를 붙여 경전의 순서를 정하였다. 그리고 원효에게 전해주어 풀이하게 하라고 하였다. 원효는 그 경전을 받고, ‘이 경전은 본각과 시각의 두 각을 종()으로 삼고 있다.’고 말한 후, 소의 두 뿔 사이에 붓과 벼루를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소의 수레에서 경전에 주석을 붙여 5권을 완성했다고 한다. 소의 수레를 탔다는 것은 대승(大乘)을 의미한다.

 

旣入寂 聰碎遺骸 塑眞容 安芬皇寺 以表敬慕終天之志. 聰時旁禮 像忽廻顧 至今猶顧矣. 曉嘗所居穴寺旁 有聰家之墟云.

즉입적 총쇄유해 소진용 안분황사 이표경모종천지지. 총시방례 상홀회고 지금유고의. 효상소거혈사방 유총가지허운,

 

법사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설총이 그 유해를 부수어 실제 모습처럼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흠모하며 하늘이 무너진듯 슬퍼하였다. 설총이 그 당시 옆에서 예를 올리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본 모습 그대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머물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한다.

 

讚曰 角乘初開三昧軸 舞壺終掛萬街風 月明瑤石春眠去 門掩芬皇顧影空.

찬왈 각승초개삼매축 무호종괘만가풍 월명요석춘면거 문엄분황고영공,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각승(角乘)은 삼매경의 기준을 처음 잡았고 바가지들고 추던 춤을 멈추고 온 거리에 바람을 일으켰네.

달 밝은 요석궁에서 잠깐 졸더니 문의 그늘에 깨달음의 그림자를 드렸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