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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第一 紀異 第一- 第二 南解王 第二 南解王 南解居西干 亦云次次雄 是尊長之稱 唯此王稱之. 父赫居世 母閼英夫人 妃雲帝夫人[一作雲梯 今迎日縣西 有雲梯山聖母 祈旱有應] 前漢平帝元始四年甲子 卽位 御理二十一年 以地皇四年甲申崩. 此王乃三皇之第一云. 남해거서간 역운차차웅 시존장지칭 유차왕칭지. 부혁거세 모알영부인 비운제부인[일작운제. 금영일현서 유운제산성모 기한유응] 전한평제원시사년갑자 즉위 어리이십일년 이지황사년갑신붕. 차왕내삼황지제일운.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은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존장(尊長)의 칭호로 오직 이 왕만을 이렇게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이고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며, 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다.[운제(雲梯)라고도 한다. 지금의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성모(雲梯山聖母)가 있는데, 가물 때 기도를 하면 감응이 있..
卷第一 紀異 第一-新羅始祖 赫居世王 新羅始祖 赫居世王 辰韓之地 古有六村. 진한지지 고유육촌.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이 있었다. 一曰 閼川楊山村. 南今曇嚴寺 長曰謁平. 初降于瓢嵒峰 是爲及梁部李氏祖[弩禮王九年置 名及梁部 本朝太祖天福五年庚子 改名中興部 波潛 東山 彼上 東村屬焉] 일왈 알천양산촌. 남금담엄사 장왈알평. 초항우표암봉 시위금양부이씨조[노례왕구년치 명급양부 본조태조천복오년경자 개명중훙부 파잠 동산 피상 동촌속언]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다.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요 그 촌장은 알평(謁平)이다. 처음 하늘에서 표암봉(瓢嵒峰)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급량부(及梁部) 이(李)씨의 조상이다.[노례왕 9년(서기 32)에 부를 두고 이름을 급량부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서기 940)에 ..
卷第一 紀異 第一-又四節遊宅 又四節遊宅 春東野宅 夏谷良宅 秋仇知宅 冬加伊宅. 춘동야택 하곡양택 푸구지택 동가이택.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에서 놀았다. 第四十九憲康大王代 城中無一草屋 接角連墻. 歌吹滿路 晝夜不絶. 제사십구헌강대왕대 성중무일초옥 접각연장. 가취만로 주야부절.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성안에 초가집이 단 한 채도 없었고 이웃집과 처마가 서로 맞붙고 담장이 이어져 있었다. 노래와 피리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하였으며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다.
卷第一 紀異 第一- 辰韓 辰韓 [亦作秦韓]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後漢書云 “辰韓耆老自言 秦之亡人 來適韓國 而馬韓割東界地以與之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十二小國 各萬戶 稱國.” 후한서운 “진한기노자언 진지망인 래적한국 이마한할동계지이여지 상호위도 유사진어. 고혹명지위진한 유십이소국 각만호 칭국.” 후한서(後漢書)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진한의 노인들이 직접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한국(韓國)에 왔는데,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갈라주고는 서로 도(徒)라고 불렀으니, 진나라 말과 비슷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혹 이름을 ‘진한(秦韓)’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곳에는 12개의 작은 나라가 있었고 각기 1만호로 저마다 나라라고 불렀다.” 又崔致遠云 “辰韓本燕人避之者 故取涿水之名 稱所居之邑里 云沙涿..
卷第一 紀異 第一- 卞韓 百濟 卞韓 百濟 [亦云 南扶餘 卽泗沘城也] [역운 남부여 즉사비성야] [백제는 또한 남부여라고도 하니, 곧 사비성(泗沘城)이다.] 新羅始祖赫居世卽位十九年壬午 卞韓人以國來降. 新舊唐書云 “卞韓苗裔在樂浪之地.” 後漢書云 “卞韓在南 馬韓在西 辰韓在東.” 致遠云 “卞韓 百濟也.” 신라시저혁거세즉위십구년임오 변한인이국래항. 신구당서운 “변한묘예재낙랑지지.” 후한서운 “변한재남 마한재서 진한재동.” 치원운 “변한백제야.”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가 즉위한 지 19년인 임오(기원전 39)에 변한(卞韓) 사람들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왔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는 모두 “변한의 후손들이 낙랑에 있었다.”라고 하였고, 『후한서(後漢書)』에는 “변한은 남쪽에 있고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고 진한(辰韓)은 ..
卷第一 紀異 第一 - 高句麗 高句麗 高句麗 卽卒本扶餘也 或云今和州 又成州等 皆誤矣. 卒本州在遼東界. 國史高麗本記云. 고구려 즉졸본부영야 혹운금화주 우성주등 개오의. 졸본주재요동계. 국사고려본기운.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卒本扶餘)이다. 혹은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주(成州)라고 하나 모두 잘못된 것이다. 졸본주는 요동 경계에 있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이러한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始祖東明聖帝 姓高氏 諱朱蒙. 先是 北扶餘王解夫婁 旣避地于東扶餘. 及夫婁薨 金蛙嗣位. 于時得一女子於太伯山南優渤水 問之. 云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神山下鴨淥邊室中私之 而往不返[壇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 有産子 名曰夫婁.” 今按此記 則解慕漱 私河伯之女 而後産朱蒙 壇君記云 産子名曰夫婁 夫婁與朱蒙 異母兄弟也]..
卷第一 紀異 第一 東扶餘 東扶餘 北扶餘王解夫婁之相阿蘭弗夢 天帝降而謂曰 “將使吾子孫 立國於此 汝其避之[謂東明將興之兆也] 東海之濱 有地名迦葉原 土壤膏腴 宜立王都.” 阿蘭弗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북부여왕해부루지상아란불몽 천제강이위왈 “장사오자손 입국어차 여기피지[위동명장흥지조야] 동해지빈 우지명가섭원 토양고유 의립왕도.” 아란불권왕 이도어피 국호동부여. 북부여의 왕 해부루(解夫婁)의 대신인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가라.[동명제가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한 것이다.]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왕도를 세우기에 적당하다.” 아란불이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그곳으로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고 하였다...
卷第一 紀異 第一- 北扶餘 北扶餘 古記云 前漢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 天帝降于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 乘五龍車. 立都稱王 國號北扶餘 自稱名解慕漱. 生子名扶婁 以解爲氏焉. 王後因上帝之命 移都于東扶餘. 東明帝繼北扶餘而興 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 卽高句麗之始祖[見下]. 고기운 전한선제신작삼년임술사월팔일 천제강우흘승골성[재대요의주계] 승어룡거. 입도칭왕국호북부여 자칭명해모수. 생자명부루 이해위씨언. 왕후인상제지명 이도우동부여 동명제계북부여이흥 입도우졸본주 위졸본부여 즉고구려지시조[견하] 고기(古記)에 이르길, 전한(前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기원전 59)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訖升骨城)[대요(大遼)의 의주(醫州) 경계에 있다.]에 내려왔는데,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왔다.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칭하고는 국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