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新羅始祖 赫居世王

新羅始祖 赫居世王

 

辰韓之地 古有六村.

진한지지 고유육촌.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이 있었다.

 

一曰 閼川楊山村. 南今曇嚴寺 長曰謁平. 初降于瓢嵒峰 是爲及梁部李氏祖[弩禮王九年置 名及梁部 本朝太祖天福五年庚子 改名中興部 波潛 東山 彼上 東村屬焉]

일왈 알천양산촌. 남금담엄사 장왈알평. 초항우표암봉 시위금양부이씨조[노례왕구년치 명급양부 본조태조천복오년경자 개명중훙부 파잠 동산 피상 동촌속언]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다.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요 그 촌장은 알평(謁平)이다. 처음 하늘에서 표암봉(瓢嵒峰)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급량부(及梁部) 이(李)씨의 조상이다.[노례왕 9년(서기 32)에 부를 두고 이름을 급량부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서기 940)에 중흥부(中興部)로 이름을 바꾸었다. 파잠(波潛)ㆍ동산(東山)ㆍ피상(彼上)ㆍ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二曰 突山高墟村 長曰蘇伐都利 初降于兄山 是爲沙梁部[梁讀云道 或作涿 亦音道] 鄭氏祖 今曰南山部 仇良伐 麻等烏 道北 廻德等南村屬焉[稱今曰者 太祖所致也. 下例如].

이왈 돌사고허촌 장왈소벌도리 초강우형산 시위사량부[영독운도 혹작탁 역음도] 정씨조 금왈남산부 구량벌 마등오 도북 회덕등남촌속어[칭금왈자 태조소치야. 하례여]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다.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 형산(兄山)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사량부 정(鄭)씨의 조상이다. [량(梁)은 도(道)라고 읽는다. 량을 혹은 탁(涿)이라고도 하는데 읽을 때는 역시 도(道)라고 한다.]지금의 남산부(南山部)라고 하는데, 구량벌(仇良伐)ㆍ마등오(麻等烏)ㆍ도북(道北)ㆍ회덕(廻德) 등의 남촌이 여기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 때 설치한 것이다. 아래도 같다.]

 

三曰 茂山大樹村 長曰俱[一作仇]禮馬. 初降于伊山[一作皆比山] 是爲漸梁[一作涿] 部 又牟梁部孫氏之祖. 今云長福部 朴谷村等西村屬焉.

삼왈 무산대수촌 장왈구[일작구]례마. 초강우이산[일작개비산] 시위점량[일작탁] 부 우모량부손씨지조. 금운장복부 박곡촌등서촌속언.

 

셋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다. 촌장은 구례마(俱禮馬)[구(俱)를 구(仇)라고도 한다.]이다. 처음엔 이산(伊山)[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한다.]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점량부(漸梁部)[량(梁)을 탁(涿)이라고도 한다.]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孫)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는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이 여기에 속한다.

 

四曰 觜山珍支村[一作賓之 又賓子 又氷之] 長曰智伯虎. 初降于花山 是爲本彼部崔氏祖. 今曰通仙部 柴巴等東南村屬焉 致遠乃本彼部人也 今皇龍寺南 味呑寺南有古墟 云是崔侯古宅也 殆明矣.

사왈 자산진지촌[일작빈지 우빈자 우빙지] 장왈지백호. 초항우화산 시위본피부최씨조. 금왈통선부. 자읍등동남촌속언 치원내본피부인야. 금황룡사남 미탄사유고허. 운시최루고택야 태명의.

 

넷째는 자산(觜山) 진지촌(珍支村)이다.[빈지(賓之), 또는 빈자(賓子)나 빙지(氷之)라고도 한다.] 촌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처음 화산(花山)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본피부(本彼部) 최(崔)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고 한다. 시파(柴巴) 등 동남촌이 여기에 속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皇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의 남쪽에 옛 터가 있다. 여기가 최치원의 옛집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맞는 것 같다.

 

五曰 金山加利村[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 長曰祗沱[一作只他]. 初降于明活山 是爲漢岐部 又作韓歧部裵氏祖. 今云加德部 上下西知 乃兒等東村屬焉.

오왈 금산가리촌[금금강산백율사지북산야] 장왈지타[일작지타]. 초강우명활산 시위한기부 우작한기부배씨조. 금운가덕부 상하서지 내아등동촌속언.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이다.[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의 북쪽 산이다.] 촌장은 지타(祗沱)[지타(只他)라고도 한다.]이다. 처음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곧 한기부(漢歧部) 배(裵)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ㆍ하서지(下西知)ㆍ내아(乃兒) 등의 동촌이 여기에 속한다.

 

六曰 明活山高耶村. 長曰虎珍. 初降于金剛山 是爲習比部薛氏祖. 今臨川部 勿伊村 仍仇旀村 閼谷[一作葛谷]等東北村屬焉.

육왈 명활산고야촌. 장왈호진. 초강우금강산 시위습비부설씨조. 금임천부 물이촌 잉구며촌 알골[일작갈곡]등북부천속언.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다.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 금강산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습비부(習比部) 설(薛)씨의 조상이다. 지금의 임천부(臨川部)로 물이촌(勿伊村)ㆍ잉구며촌(仍仇旀村)ㆍ궐곡(闕谷)[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이 여기에 속한다.

 

按上文 此六部之祖 似皆從天而降. 弩禮王九年 始改六部名 又賜六姓. 今俗中興部爲母 長福部爲父 臨川部爲子 加德部爲女 其實未詳.

안상문 차육부지조 사개종천이강. 노례왕구년 시개육부명 우사육성. 금속중흥부위모 장복부위부 임천부위자 가덕부위녀 기실미상.

 

위의 글을 살펴보면 이 여섯 부의 조상들은 모두 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9년(서기 32)에 비로소 여섯 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 여섯 성(姓)을 내려주었다. 지금 풍속에 중흥부를 어머니라 하고 장복부를 아버지라 하며, 임천부를 아들이라 하고 가덕부를 딸이라고 하는데, 그 실상은 자세하지 않다.

 

前漢地節元年壬子[古本云 建虎元年 又云建元三年等 皆誤] 三月朔 六部祖各率子弟 俱會於閼川岸上 議曰 “我輩上無君主臨理蒸民 民皆放逸 自從所欲. 盍覓有德人 爲之君主 立邦設都乎?”

전한지절원년임자[고본운 건호원년 우운건원삼년등 개오= 삼월삭 육부조각솔자제 구회어알천안상 의왈 “아배상무군주임리증민 민개방일 자종소욕. 합멱유덕인 위지군주 입방설도호?”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 임자(기원전 69)[고본(古本)에는 건호 원년 또는 건원 3년이라 하는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의 조상들은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閼川)의 언덕 위에 모여서 의논하여 말하였다. “우리들은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임금이 없어서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고 안일하여 제멋대로 하고 있소. 그러니 어찌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하지 않을 수 있겠소?”

 

於是乘高南望 楊山下蘿井傍 異氣如電光垂地 有一白馬跪拜之狀. 尋撿之 有一紫卵[一云靑大卵] 馬見人長嘶上天.

어시승고남망 양산하나정방 이기여운광수지 유일백마궤배지상. 심검지 유일자란[일운청대란] 마견인장시상천.

그래서 이들은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았는데 양산(楊山) 밑에 있는 나정(蘿井) 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드리워져 있고, 한 백마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곳을 찾아가보니 자줏빛 알[푸른빛의 큰 알이라고도 한다.] 하나가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剖其卵得童男 形儀端美 驚異之 浴於東泉[東泉寺在詞腦野北] 身生光彩 鳥獸率舞 天地振動 日月淸明. 因名赫居世王[蓋鄕言也 或作弗矩內王 言光明理世也 說者云 “是西述聖母之所誕也 故中華人 讚仙桃聖母 ‘有娠賢肇邦’之語是也.” 乃至雞龍現瑞産閼英 又焉知非西述聖母之所現耶] 位號曰居瑟邯[或作居西干 初開口之時 自稱云 ‘閼智居西干一起.’ 因其言稱之. 自後爲王者之尊稱]

부기란득동남 형의단미 경이지. 욕어동천[동천사재사뇌야북] 신생광채 조수솔무 천지진동 일월청명. 인명혁거세[개향언야 혹작불구내왕 언광명이세야 설자운 “시서술성모지소탄야 고중화인 찬선도성모 ‘유신현조방’지어시야.” 내지계룡현서산알영 우언지비서술성모지소현야] 위호왈거슬한[혹작거서간 초개구지시 자칭운 알지거서간일기 인기언칭지. 자후위왕자지존칭]

 

그 알을 깨뜨리자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들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며 아이를 동천(東泉)[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켰는데,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을 추었으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해와 달이 맑고 밝아졌다. 그래서 이름을 혁거세왕이라고 하였다.[‘혁거세’를 방언으로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는데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해설하는 자는 “이것은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은 것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하면서 ‘어진 이를 임신해서 나라를 열었다.’라는 구절이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계룡(雞龍)이 상서로움을 나타내서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것도 어찌 서술성모가 나타났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왕위를 거슬한(居瑟邯)이라고 하였다.[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에 ‘알지(閼智) 거서간(居西干)이 한 번 일어났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에 따라 이렇게 부른 것이다. 이후로 왕의 존칭이 되었다.]

 

時人爭賀曰 “今天子已降 宜覓有德女君配之.”

시인쟁하왈 “금천자이강 의멱유덕녀군배지.”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천자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으니, 당연히 덕 있는 왕후를 찾아 임금의 배필로 삼아야 하리라.”

 

是日 沙梁里閼英井[一作娥利英井] 邊有雞龍現 而左脇誕生童女[一云龍現死 而剖其腹得之] 姿容殊麗 然而唇似雞觜. 將浴於月城北川 其觜撥落. 因名其川曰撥川.

시왈 사량부알영정[일작아리영정] 변유계룡현 이좌협탄생동녀[일운용현사 이부기복득지] 자용수려 연이순사계자. 장욕어월성북천 기자발락. 인명기천왈발천.

 

이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도 한다.] 주변에 계룡이 나타났는데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혹은 용이 나타났다가 죽었는데, 그 배를 가르고 여자아이를 얻었다고도 한다.] 얼굴과 모습이 매우 고왔지만 입술이 닭의 부리와 비슷하였다. 월성(月城)의 북쪽 시내에서 목욕을 시켰는데, 그 부리가 떨어졌다. 그래서 그 시내 이름을 발천(撥川)이라고 하였다.

 

營宮室於南山西麓[今昌林寺] 奉養二聖兒 男以卵生 卵如瓠 鄕人以瓠爲朴 故因姓朴 女以所出井名名之 二聖年至十三歲 以五鳳元年甲子 男立爲王 仍以女爲后 國號徐羅伐 又徐伐[今俗訓京字云徐伐 以此故也] 或云斯羅 又斯盧 初王生於雞井 故或云雞林國 以其雞龍現瑞也 一說 脫解王時 得金閼智 而雞鳴於林中 乃改國號爲雞林 後世遂定新羅之號.

영궁실어남산서록[금창림사] 봉양이성아 남이란생 란여호 향인이호위박 고인성박. 여이소출정명명지 이성년지십삼세 이오봉원년갑자 남입위왕 잉이여위후 국호서라벌 우서벌[금속훈경자운서벌 이차고지] 혹운사라 우사로 초왕생어계정 고혹운계림국 이기계룡현서야 일설 탈해왕시 득김알지 이계명어림중 내개국호위계림 후세수정신라지호.

 

남산의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이다.]에 궁궐을 짓고 신성한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 아이가 알에서 나왔는데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박을 박(朴)이라 하였기 때문에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여자 아이는 그 아이가 나온 우물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이 나이 13세가 되자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에 남자는 즉위하여 왕이 되었고 이어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 풍속에 ‘경(京)’을 ‘서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이라 하는데, 혹은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처음에 왕후가 계정(雞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계림국(雞林國)이라고도 하였는데,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을 당시에 숲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곧 나라 이름을 고쳐 ‘계림’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고 정하였다.

 

理國六十一年 王升于天 七日後 遺體散落于地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 有大蛇逐禁. 各葬五體爲五陵 亦名蛇陵. 曇嚴寺北陵是也 太子南解王繼位.

리국육십일년 왕승우천 칠일후 견체산락우지 후역운망. 국인속합이장지 유대사축금 각장오체위오릉 역명사릉. 담엄사북릉시야 태자남해왕계위.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는 해에 왕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후 왕의 죽은 육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고 왕후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시신을 합하여 장사 지내려 하였지만 큰 뱀이 쫓아다니며 방해하였다. 그래서 결국 머리와 사지를 따로 장사 지내어 오릉(五陵)을 만들고 능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하였다. 담엄사(曇嚴寺) 북쪽의 능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인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