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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第一 紀異 第一-五伽耶 五伽耶 [按駕洛記贊云 垂一紫纓 下六圓卵 五歸各邑 一在玆城 則一爲首露王 餘五各爲五伽耶之主 金官不入五數 當矣 而本朝史略 並數金官 而濫記昌寧 誤] [안가락기찬운 수일자영 하육원란 오귀각읍 일재자성 즉일위수로왕 여오각위오가야지주 금관불입오수 당의. 이본조사략 병수금관 이람기창녕 오] [가락기(駕洛記)의 찬(贊)을 살펴보면, ‘자줏빛 끈 하나가 내려와 둥근 알 여섯 개를 내려주었는데, 이 중 다섯 개는 각 읍에 보냈고 한 개는 이 성에 있었다. 그래서 하나는 수로왕(首露王)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개는 각각 다섯 가야의 군주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금관(金官)을 다섯의 숫자에 넣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 고려의 『사략(史略)』에는 금관을 그 수에 넣고 창녕(昌寧)까지 더 기록했으니 잘못된 것이..
卷第一 紀異 第一- 伊西國 伊西國 弩禮王十四年 伊西國人 來攻金城 按雲門寺古傳諸寺納田記云 貞觀六年壬辰 伊西郡今郚村零味寺納田 則今郚村 今淸道地 卽淸道郡 古伊西郡也. 노례왕십사년 이서국인 래공금성 안운문사고전제사남전기운 “정관육년임진 이서군금오촌영미사납전 즉금오촌 금청도지 즉청도군 고이서군야.” 노례왕(弩禮王) 14년에 이서국 사람들이 와서 금성을 공격하였다. 운문사(雲門寺)에 예로부터 전해오는 제사납전기(諸寺納田記)를 살펴보면, “정관(貞觀) 6년 임진(서기 632)에 이서군(伊西郡)의 금오촌(今郚村) 영미사(零味寺)에서 밭을 바쳤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즉 금오촌은 지금의 청도(淸道) 땅이니, 곧 청도군이 옛날 이서군이다.
卷第一 紀異 第一- 靺鞨 渤海 靺鞨 渤海 [一作勿吉] [일작물길] [말갈은 물길(勿吉)이라고도 한다.] 通典云 渤海 “本粟末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 先天中[玄宗壬子]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開元七年[己未] 祚榮死 諡爲高王. 통전운 발해 본속말말갈 지기추조영입국 자호진단 선천중[현종임자] 시가말갈호 전친발해개원칠년[기미] 조영사 시위고왕. 통전(通典)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다. 그 우두머리인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진단(震旦)이라고 불렀다. 선천(先天) 연간[당나라 현종 임자년(서기 712)이다.]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만 불렀다. 개원(開元) 7년[기미, 서기 719]에 대조영이 죽자 시호를 고왕(高王)이라고 하였다. 世子襲立 明皇賜典冊襲王...
卷第一 紀異 第一-南帶方 南帶方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조위시 시치남대벙군[금남원부] 고운 대방지남. 해수천리 왈한해[후한건안중 이만한남황지위대방군 왜한수속 시야] 조위(曹魏) 때 처음으로 남대방군(南帶方郡)[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이다.]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하였다.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리나 되는데 한해(瀚海)라고 한다.[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서기 196~220)에 마한 남쪽의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삼았다.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예속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 瀚海의 한이나 渤.....
卷第一 紀異 第一-北帶方 北帶方 北帶方 本竹覃城. 新羅弩禮王四年 帶方人與樂浪人投于羅[此皆前漢所置二郡名 其後僭稱國 今來降]. 북대방 본죽담성 신라노례왕사년 대방인여낙랑인투우라[차개전한소치이군명 기후참칭국 금래항]. 북대방은 본래 죽담성(竹覃城, 전라 나주)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기원전 27)에 대방 사람들과 낙랑 사람들이 신라에 항복해 왔다. [이것은 모두 전한 때 설치한 두 군의 이름이다. 그 후에 함부로 나라라고 불러오다가 지금에 이르러 항복해 온 것이다.] * 죽담성이 나주요 북대방????? 도시국가 급이니 무리없다??? 십만 병력을 동원하던 고.백.신은?????
卷第一 紀異 第一 - 樂浪國 樂浪國 前漢時 始置樂浪郡 應邵曰 “故朝鮮國也.” 전한시 시치낙랑군 응소왈 “고조선국야.” 전한(前漢) 때에 처음으로 낙랑군을 두었다. 응소(應邵)는 이를 “옛 조선국이다.”라고 하였다. 新唐書注云 平壤城 古漢之樂浪郡也. 신당서주운 평양성 고한지낙랑군야. 『신당서(新唐書)』의 주에서는, “평양성은 옛 한나라의 낙랑군이다.”라고 하였다. 國史云 “赫居世三十年 樂浪人來投.” 又“第三弩禮王四年 高麗第三無恤王 伐樂浪滅之 其國人與帶方[北帶方] 投于羅.” 又“無恤王二十七年 光武帝遣使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據上諸文 樂浪卽平壤城 宜矣 或云樂浪中頭山下 靺鞨之界 薩水今大同江也 未詳孰是]. 국사운 혁거새삼십년 낙랑인래투 우제삼노례왕사년 고려제삼무휼왕 벌낙랑멸지 기국인여대방[북대방] 투우라 우무휼왕이십칠년 광무제견..
卷第一 紀異 第一-七十二國 七十二國 通典云 “朝鮮之遺民 分爲七十餘國 皆地方百里.” 통전운 “조선지유민 분위칠십여국 개지방백리.” 통전(通典)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조선의 유민은 나누어져서 70여 나라가 되었는데, 모두 다 땅이 사방 100리였다.” 後漢書云 “西漢以朝鮮舊地 初置爲四郡 後置二府 法令漸煩 分爲七十八國 各萬戶.”[馬韓在西 有五十四小邑 皆稱國. 辰韓在東 有十二小邑 稱國 卞韓在南 有十二小邑 各稱國]. 후한서운 서한이조선구지 초치위사군 후치아부 법령점번 분위칠십팔국 각만호[마한재서 유오십사소읍 개칭국. 진한재동 유십이소읍 칭국 변한재남 유십이소읍 각칭국] 후한서(後漢書)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서한(西漢)이 조선의 옛 땅에 처음에는 사군(四郡)을 두었다가 후에 이부(二府)를 두었다. 법령이 점차 복잡해지자 이것을 78개..
卷第一 紀異 第一- 二府 二府 前漢書 “昭帝始元五年己亥 置二外府.” 謂朝鮮舊地 平那及玄菟郡等 爲平州都督府 臨屯樂浪等兩郡之地 置東部都尉府[私曰 朝鮮傳 則眞番玄菟臨屯樂浪等四 今有平那無眞番 蓋一地二名也] 전한서 소제시원년기해 치이외부 위조선구지 평나급현도군등 휘평주도독부 임둔낙랑등양군지지 치동부도독부[사왈 조선전 즉진번현도임둔낙랑등사 금유평나무진번 개일기이명야] 전한서(前漢書)에,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 기해(기원전 82)에 두 외부(外府)를 두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옛 땅인 평나(平那)와 현도군(玄菟郡) 등을 합쳐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를 만들고, 또 임둔(臨屯)과 낙랑(樂浪) 등의 두 군의 땅에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설치한 것을 말한 것이다.[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조선전(朝鮮傳)」에는 진번(眞番)ㆍ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