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高句麗 卽卒本扶餘也 或云今和州 又成州等 皆誤矣. 卒本州在遼東界. 國史高麗本記云.
고구려 즉졸본부영야 혹운금화주 우성주등 개오의. 졸본주재요동계. 국사고려본기운.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卒本扶餘)이다. 혹은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주(成州)라고 하나 모두 잘못된 것이다. 졸본주는 요동 경계에 있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이러한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始祖東明聖帝 姓高氏 諱朱蒙. 先是 北扶餘王解夫婁 旣避地于東扶餘. 及夫婁薨 金蛙嗣位. 于時得一女子於太伯山南優渤水 問之. 云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神山下鴨淥邊室中私之 而往不返[壇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 有産子 名曰夫婁.” 今按此記 則解慕漱 私河伯之女 而後産朱蒙 壇君記云 産子名曰夫婁 夫婁與朱蒙 異母兄弟也]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于此.”
시조동명성제 성고씨 휘주몽. 선시 북부여왕해부루 즉피지우동부여. 급부루훙 금와사위. 우시득일녀아어태백산남우발수 문지. 운 “아시하백지여 명유화 여제제물유 시유남자 자언천제자해모수 유아어웅신산하압록변실중사지 이왕불반[단군기운 “군여서하하백지여요친 유산자 명왈부루.” 금안차기 즉해모수 사하백지녀 이후산주몽 단군기운 “산자명왈부루 부루여주몽 이모형제야.”] 부모책아무모이종인 수적거우차.”
시조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성은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이에 앞서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부루(解夫婁)가 이미 동부여(東扶餘)로 땅을 피해 갔다. 부루가 죽자 금와(金蛙)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어떤 여자를 만나 여기로 온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여자가 말하였다. “저는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은 유화(柳花)라고 합니다. 여러 동생들과 놀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남자가 자신을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말하고는 저를 웅신산(熊神山) 아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였습니다. 거기서 남몰래 정을 통해 놓고는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단군기(壇君記)에서는 “단군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기록을 살펴보면 해모수는 하백의 딸과 정을 통한 후 주몽을 낳았다. 『단군기』에서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였다.”고 했으니, 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형제인 것이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중매도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으시고는, 마침내 저를 이곳으로 귀양 보내셨습니다.”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光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照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五升許. 王棄之與犬猪 皆不食. 又棄之路 牛馬避之 棄之野 鳥獸覆之. 王欲剖之而不能破 乃還其母.
금와이지 유폐어실중. 위일광소조 인신피지 일영우축이조지. 인이유잉 생일란 대오승허. 왕기지여견저 개불식. 우기지로 우마피지 기지야 저수복지. 왕욕부지이불능파 내환기모.
금와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그 여자를 방 속에 가두어 두었다. 그러자 햇빛이 그 여자를 비추었는데 여자가 몸을 피하면 햇빛도 쫓아와서 비추었다. 그리하여 임신을 해서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 정도 되었다. 왕은 그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지만 모두 먹지 않았다. 그래서 길에 내다 버렸지만 소와 말이 모두 이 알을 피해서 다녔고, 다시 들에 버렸지만 새와 짐승들이 이 알을 덮어주었다. 왕이 알을 갈라보려고 하였지만 깨뜨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母以物裹之 置於暖處. 有一兒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岐嶷異常 自作弓失 百發百中. 國俗謂善射爲朱蒙 故以名焉.
모이물과지 치어난처. 유일아파각이출 골표영기. 년포칠세 기의이상 자작궁시 백발백중. 국속위선사위주몽 고이명언.
그 어머니는 알을 천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다. 그러자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나이 겨우 일곱에 기골이 뛰어나서 일반 사람들과는 달랐다. 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번 쏘면 백번 다 맞혔다. 나라 풍속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기 때문에 주몽으로 이름을 지었다.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技能莫及. 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若不早圖 恐有後患.”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減食令瘦 駑者 善養令肥. 王自乘肥 瘦者給蒙.
금와유칠자 상여주몽유희 기능막급. 장자대소언어왕왈 “주몽비인소생 약부조도 공유후환.” 왕불청 사지양마. 주몽지기준자 감식영수 노자영비. 왕자승비 수자급몽.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어 늘 주몽과 함께 놀았지만 재주가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장남인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였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만일 일찍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걱정됩니다.” 하지만 왕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좋은 말을 알아본 주몽은 먹이를 줄여 여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서 살찌게 하였다. 그러자 왕은 살찐 말을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王之諸子與諸臣 將謀害之 蒙母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不可 宜速圖之. 於是蒙與烏伊等三人爲友 行至淹水[今未詳]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孫 今日逃遁 追者垂及 奈何 於是魚鼈成橋 得渡而橋解 追騎不得渡.
왕지제자여제신 장모해지 주모지지 고왈 “국인장해여 이여재략 하왕불가 의속도지.” 어시몽여 오이등삼인위우 행지엄수[금미상] 수고왈 “아시천제자 금일도군 추자수급 내하?” 어시어별성교 득도이교해 추기불득도.
왕의 여러 아들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해치려고 모의하자, 주몽의 어머니는 이를 알고 아들에게 말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고 한다. 너의 재주와 지략이라면 어디를 간들 살지 못하겠느냐? 빨리 대책을 세우도록 해라!” 그리하여 주몽은 오이(烏伊)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도망가다가 엄수(淹水)[지금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에 이르자 물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바로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손자다. 오늘 도망가는데 뒤쫓는 자들이 거의 따라왔으니 어찌해야 좋단 말이냐?”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건너가게 한 다음, 흩어져 다리가 사라지자 쫓아오던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至卒本州[玄菟郡之界] 遂都焉. 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 時年十二歲 漢孝元帝建昭二年甲申歲 卽位稱王. 高麗全盛之日 二十一萬五百八戶.
지졸본성주[현토군지계] 수도언. 미황작궁실 단결려어비류수상거지 국호고구려. 인이고위씨[본성해야 금자언시천제자 승일광이생 고자이고위씨] 시년십이세 한효원제건소이년갑신세 즉위칭왕. 고려전성지일 이십일만오백팔호.
주몽은 졸본주[현도군의 경계이다.]에 이르러 드디어 여기에 도읍을 정하였다. 하지만 미처 궁궐을 지을 겨를이 없어서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가집을 짓고 살며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그리고 고(高)를 성으로 삼았다.[본래의 성은 해씨이다. 지금 자신이 천제의 아들로 햇빛을 받고 태어났다고 하였기 때문에 고를 성으로 삼은 것이다.] 그 당시 나이가 12세로, 한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갑신(기원전 37)에 즉위하여 왕이라 하였다. 고구려가 전성기였을 때는 210,508호나 되었다.
珠琳傳第二十一卷載. 昔寧禀離王侍婢有娠 相者占之曰 “貴而當王.” 王曰 非我之胤也 當殺之 婢曰 氣從天來 故我有娠.
주림전제이십일권재. 석영품리왕시비유신 상자점지왈 “귀이당왕.” 왕왈 “비아지윤야 당살지.” 비왈 “기종천래 고아유신.
주림전(珠琳傳) 제21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옛날 영품리왕(寧禀離王)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는데, 관상을 보는 사람이 점을 치고 말하였다. “임신한 아이는 귀하게 되어서 당연히 왕이 될 것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내 아들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겠다.” 그러자 시녀가 이렇게 말하였다.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 때문에 임신을 한 것입니다.”
及子之産 謂爲不祥 捐圈則猪噓 棄欄則馬乳 而得不死. 卒爲扶餘之王[卽東明帝爲卒本扶餘王之謂也 此卒本扶餘 亦是北扶餘之別都 故云扶餘王也 寧禀離 乃夫婁王之異稱也].
급자지산 위위불상 연권즉저허 기란즉마유 이득불사. 졸위부여지왕[즉동명제위졸본부여왕지위야 차졸본부여 역시북부여지별도 고운부여왕야 영품리 내부루왕지이칭야]
그 아이가 태어나자 왕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여기어 돼지우리에 버렸지만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었고, 다시 마구간에 버렸더니 말이 젖을 먹여주어서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이 아이가 자라서 마침내 부여의 왕이 되었다.[즉 동명제가 졸본부여의 왕이 된 것을 말한다. 이 졸본부여는 북부여의 다른 도읍이기 때문에 부여왕이라 한 것이다. 영품리(寧禀離)는 곧 부루왕의 다른 이름이다.]
'三國遺事' 카테고리의 다른 글
卷第一 紀異 第一- 辰韓 (0) | 2020.04.25 |
---|---|
卷第一 紀異 第一- 卞韓 百濟 (0) | 2020.04.24 |
卷第一 紀異 第一 東扶餘 (0) | 2020.04.23 |
卷第一 紀異 第一- 北扶餘 (0) | 2020.04.23 |
卷第一 紀異 第一-五伽耶 (0) | 2020.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