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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남화경

寓言



1. 
寓言十九,重言十七,巵言日出,和以天倪. 
寓言十九,藉外論之. 親父不爲其子媒. 親父譽之,不若非其父者也.,非吾罪也,人之罪也. 與己同則應,不與己同則反.,同於己爲是之,異於己爲非之. 

가르침을 주는 말은 우화가 10에 9이요, 옛글을 인용함이 10에 7이요, 반어법이 튀어나와 천예(하늘 본성)에 조화를 이룬다. 

-형용할 수 없는 진리를 설명하는 방법 중 제일은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요, 다음이 옛 글을 인용하는 것, 그리고 혹간 반어법으로 진리를 형용하는데 이는 서로 상대되는 것을 가져 균형을 유지하는 하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이다. 

10에 9인 우화는 서적 바깥의 논의이다. 친부는 자식을 중매하지 못한다. 친부의 칭찬은 아비로서 할 짓이 아니기 때문에, 내 탓 아니라 사람들 탓이다. 자기 마음에 합하면 동의하지만 자기 마음에 합하지 않으면 반대하고 나서는 탓 저와 같으면 옳고 저와 다르면 틀리다 한다. 

-비유로 설명하는 것은 아비가 제 자식 자랑하는 것처럼 드러내 놓고 할 일 아니기 때문에 돌려 말하는 것이다. 그리 직설법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거부감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알량한 자존심이 진리를 거부하게 하기에 비유를 들어 말하는 것이다. 

重言十七,所以已言也,是爲耆艾,年先矣,而无經緯本末以期年耆者,是非先也. 人而无以先人,无人道也.,人而无人道,是之謂陳人. 

옛말을 인용한 중언 열에 7은 이미 있던 말이라, 옳기에 오래도록 쓰이는 것, 세월이 앞서기에 경위와 본말이 없으면 그 사이에 시비가 가려졌을 것. 사람들에게 먼저 산 선대 조상이 없다면 사람사는 도리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터, 사람이 사람사는 도리를 모르거나 무시하면 이를 이르러 陳人(무식한 이)이라 부른다. 

-옛 글을 인용함은 오랜동안 검증된 말들이고, 또 선대가 누적해 온 것이 오늘날 우리 사는 도리이니 이를 무시하거나 무지하면 진인(불학무식한 천둥벌거숭이)라 한다. 


늑대소녀라해서 토픽이 된 적 있다 어려서 늑대에게 길리워진 아이 그 아이가 사람일까? 늑대일까? 꼴은 사람이나 사람 사는 식은 전혀 못배웠다면 사람이라 하기 어렵다. 
타잔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타잔이 사람일까 원숭이일까? 

그 타잔이 사람이 되는 것(?)이 제인이라는 짝이 있어서라면... 

사람사이에 살아야 사람 아닐까? 

巵言日出,和以天倪,因以曼衍,所以窮年. 不言則齊,齊與言不齊,言與齊不齊也,故曰言无言. 言无言,終身言,未嘗言.,終身不言,未嘗不言. 有自也而可,有自也而不可.,有自也而然,有自也而不然. 惡乎然? 然於然. 惡乎不然,不然於不然. 惡乎可? 可於可. 惡乎不可? 不可於不可. 物固有所然,物固有所可,无物不然,无物不可. 非巵言日出,和以天倪,孰得其久! 萬物皆種也,以不同形相禪,始卒若環,莫得其倫,是謂天均. 天均者天倪也. 

반어법이 툭툭 튀어나와 하늘 본성과 조화한다는 것은 두루 합당하여 세상 끝날까지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말을 않으면 가지런하니, 가지런함은 가지런하지 않다는 말까지 품고 있어 말을 한다는 것은 가지런하지 않음도 가지런하게 함을 품고있는 것 그래서 말이 아닌 것을 말한다 하는 것이다. 말 아닌 것을 말함은 종신토록 말해도 말한 것 아니며 종신토록 말안해도 말 안한 것 아니다. 출처가 있으니 가하고 출처가 있으니 불가함이 가려지는 것, 출처가 있으니 그렇구나 하고 출처가 있으니 그렇지 않구나 하는 것. 어째 그러한가? 그러니 그런거지. 그렇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그렇지 않으니 그렇지 않은 것. 가하다는 것은 어떤가? 가하니 가하다 하고, 불가하다는 것은 어째서인가? 불가하니 불가한 것 뿐. 만물은 이미 그러함에, 가함에 있는것 그렇지 못하고, 가하지 못한 물건은 없다. 반어법아닌 직설법으로 하늘 본성에 조화된다면 누가 그 깨달음을 오래 간직할까! 만물은 모두 다 제 꼴 됨이 있어 형태는 달라도 서로 침착하니 있으니 시작과 끝이 연결되어있어 그 이치를 알기 어렵다 이를 하늘의 고름이라 하고 그런 고름이 하늘 본성이다. 

-반어적인 표현은 직설적 표현법에 대칭되어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고 

동시에 불가언의 진리를 말로 풀어쓸 때 이미 자연의 본성을 해친 것이기에 그 균형의 상대적인 것도 말의 꼴로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말 아닌것을 말한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 


옛 노인네들이 "우리 개똥이"하는 것은 이쁜 손주가 개x끼라는 뜻 아님은 알 터... 다만 지나친 사랑이 하늘 뜻 거슬려 탈 날까 그리하는 것임을 알려나? 


우리는 그러함과 가함 이란 것을 무진 풀어 설명하고자 하나 간단한 방법은 그러함 vs 그러지 못함, 가함vs 불가함의 상대적인 모습으로 하는 것. 그러나 그런 비교가 하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말이란 도구 안에 있음을 알면 되는 것... 출처나 기원을 따지거나 원인과 결과를 상대시키려하는 것은 명확히 하자는 노력이다. 
한쪽으로 치우쳐 밝은 면 만 밝히다 보면 그 이면을 보지 못하거나 헷갈릴 것... 세상은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은 것... 한 면만 있다고 동전인가? 양쪽이 다 갖춰져야 비로서 동전이 동전이듯 세상진리를 이해하고자 하면 언어의 그런 상대성도 잘 알아야 한다. 


선의 반대가 악인가? 아니 오히려 선을 상하게 하는 것은 선을 가장하는 것이다. 반대말이 아니라 상대하는 말인 것... 그런 상대함 중간의 것을 이해하기 위한 언어의 부득이한 선택이 반어법으로 드러나는 것... 그래야 하늘의 고름을 살게되는 것... 


성경도 말한다 그리스도의 의를 해치는 것은 마귀가 아니라 적그리스도라고... 겉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하지만 속은 사람들을 꺼꾸리려는... 우리 눈에 반대되는 것이 문제 아니라 비슷한 것이 문제라...



2.

莊子謂惠子曰:「孔子行年六十而六十化,始時所是,卒而非之,未知今之所謂是之非五十九非也.」

 

장자가 혜자에게 일러 말하길:[공자가 60평생 살면서 60번을 변했는데 처음에는 올바름에서 였으나 끝은 틀림으로 마무리됐다. 지금 옳다라는 것이 59번 틀렸던 것을 안 틀린 것이라 고집함을 모른다]

 

-공자는 일이관지 논리가 없다. 왜냐면 지금 이 순간 옳다라는 것 조차 지난 59번을 틀렸다고 하던 것을 뒤집는 것 이기에... 시비를 가릴거면 혹독하게 가리든지...

 

우리는 그럽니다 진리는 영원무궁 절대 불변이라고... 그러나 시비도 그럴까요? 시비란 오늘 옳은 것이 내일 그릇 것 되는 법입니다. 그러니 옳다 그르다를 어찌 확연하게 자를  수있는가? 자연이란 동전의 양면인데???

 

惠子曰:「孔子勤志服知也.」

 

혜자 답하길:[공자가 의지를 성실히 따르고 지혜를 따랐기 때문이겠지요]

 

莊子曰:「孔子謝之矣,而其未之嘗言. 孔子云:"夫受才乎大本,復靈以生,鳴而當律,言而當法,利義陳乎前,而好惡是非直服人之口而已矣. 使人乃以心服,而不敢蘁立,定天下之定." 已乎已乎! 吾且不得及彼乎!」

 

장자왈:[공자는 그를 버린 겁니다 말할 자격이 없지요. 공자가 전하길 "대저 받은 그릇이 큰 본질이라면 본디의 영감이 살아나 울음소리도 운율에 맞고 말을 하면 이치에 닿으니 이해나 정의 문제 앞에서 사람의 입으로 좋고싫음, 시비나 따짐은 남들도 다 하는 짓입니다. 사람으로 마음에 복종하도록 함으로서 감히 대립하지 않도록하면 천하의 정한 이치를 바로하는 것입니다" 

맞고 맞다 내 깨달음이 저만 못하구나!]

 

-공자가 시비에 능하면서 정작 자기에겐 관대한 듯하여 일이관지함이 없어보여 하는 장자의 얘기입니다.

 

공자가 이르길 "내 본성이 자연에 합하는 것이라면  자연 그 본성으로 합할 겁니다. 울음도 그저 악창이 아니라 사리에 맞을 것이요 말도 이치에 닿게 될 겁니다. 이해, 정의, 시비의 문제 앞에서 그저 입으로 이러네 저러네 따지는 짓은 이미 (사람들이)해 온 일입니다. 다만 무슨 일을 보든 그게 이해든 정의든 시비의 문제든 그저 본디 하늘 뜻을 타고난 마음 가는 대로 따르며 그를 이런저런 궁리로 거스르지 않는 것 그것이 하늘의 바른 이치를 바로하는 것입니다"

맞도다 내가 아직 저만한 깨달음이 없구나...

 

우린 그럽니다. 그럼 이도저도 아니고 않된다(시비 가림을 부정)하면 진리를 어찌 알 것이며 살 수있느냐?...

 

간단하지요. 우리의 몸도 마음도 다 자연으로 나눠 받은 것 특히 마음은 늘 하늘이치로 향하고 있지요. 그를 따르면 됩니다. 잇속이나 지혜니 뭐니로 가리지 말고...

 

그게 성령이요 양심이요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지입니다. 그를 따르면 되지요...

 

장자가 탄식합니다. 아... 내가 외려 시비나 따지는 말장난에 빠졌구나...

 

늘 말가지고 논다고 깐보던 공자에게도 진리가 담겨있는 겁니다. 다만 늘 부족하기에 서로 충돌하고 대화하는 겁니다. 더 갈고닦아 진리로 다가서려고... 이게 도반의 만남이지요. 저 잘못을 툭 인정해버리는 쿨한 만남... 


 

3.

 

曾子再任而心再化,曰:「吾及親仕,三釜而心樂.,後仕,三千鍾而不洎親,吾心悲.」

弟子問於仲尼曰:「若參者,可謂无所縣其罪乎?」

曰:「旣已縣矣. 夫无所縣者,可以有哀乎? 彼視三釜三千鍾, 如觀鳥雀蚊虻相過乎前也.」

 

증자가 두 번 중용되어 쓰였는데 두 번 마음가짐이 변하여 이르길:[내가 직접 일할 때엔 三釜(3x 釜 (6말 4되))를 봉급으로 밭아도 마음이 즐거웠는데 뒤에서(남부리며) 일하며 3천종이나 받아도 친히 일할 때만 못하고 마음이 슬프더라]

제자가 공자에게 묻기를:[증삼같은 이를 허물없는 자라 이를수 있나요?]

공자 왈:[이미 허물있는 자다. 마음이 끌리지 않으면 뭘 슬퍼할까? 저가 삼부,삼천종을 보고, 참새나 모기가 서로 지나치듯 달관하지만..]

 

-증자는 효와 충을 중시한 공자의 제자로 자서(공자의 아들)을 가르친 뛰어난 제자요 겉 예절보다 속 마음을 중시하던 사람이다.

 

삼부 vs 삼천종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親仕,後仕의 문제... 뭐든 제 스스로 할 때야 그 결과나 성과가 중요한가? 성취감이 있으니... 남 부리며 아무리 많은 걸 얻은 들 직접 자기가 함 만치 성취감이 없음을 한탄한 글...

 

공자는 제자에게 답합니다. 허물이 있다면 있다... 뭔가 외물에 따라 판단하니... 비록 그 외물에 끌려가지는 않지만 마음을 빼앗겼으니... 증자를 잘 아는 공자다운 답이지요.

 

그렇다고 "하물며 증자도 외물에 마음이 가는데... 나 하나야..." 어떠랴 "자기 합리화 핑계거리"인가요? 아닙니다. 비유로 말하는 겁니다. 마음 곧추세우라는... 우화의 실례지요.

 

성경에도 이릅니다. "마음으로 짓는 죄도..." 단, 음심을 품는 것에 대한 경계이지요. 죄=허물이란 결과가 나타나서야 죄가 되는 것 아닙니다 이미 "마음이 외부 사물에 끌렸을 때" 정상에서 미끌어졌으니 죄나 한가지다 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마음을 누가 읽고 죄다 아니다를 판단하나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경책함이 자기 수양의 길이지요... 마음에 그런 것이 생김을 탓할 것 아니라 그런 자기를 바로보고 바로 잡아가는 겁니다. 

 

마음의 중심은 하늘이 알고, 양심, 성령을 통하여 이미 심판하시지요.  진리 공부하는 사람은 자신과 하늘을 두려워합니다.



4.

 

顔成子游謂東郭子綦,曰:「自吾聞子之言,一年而野,二年而從,三年而通,四年而物,五年而來,六年而鬼入,七年而天成,八年而不知死,不知生,九年而大妙.」

 

안성자유가 스승인 동곽자기에게 말하길:[내 스승님 가르침을 듣고 한마디 합니다만 1년되니 우쭐하고, 2년되니 수그러들고, 3년되니 뭔가 알듯하고,4년이 되니 그저 그대로 뵈고, 5년이 지나니 그 의미가 뭔지 알 듯 하고, 6년이 되니 잔 궁리가 늘고, 7년 지나니 하늘 뜻이 이뤄지고, 8년 지나니 생사의 문제(승부의 문제)가 의미없고, 9년 지나니 큰 신묘함을 알게 됐습니다]

 

-뭐든 공부하는 사람이 겪는 단계지요... 한 1년 지나니 뭔가 아는듯 우쭐하고 나가서 떠들고 싶어집니다. 2년 지나니 아직 멀엇구나 싶어 잠잠해지고, 3년 지나니 다시 뭔가 아는 듯... 4년 지나니 저나 내가 뭐 다른지 좀 구분되어 보이고  5년 지나니 저의 그대로가 보이고 6년 지나 역으로 내 궁리가 늘고 7년 지나 하늘바라는 뜻을 알 것 같고 8년 지나 승부보다 그 자체의 재미를 알고 9년 지나니 저나 내나 만나게 된 뜻을 알게 됩디다....

 

9년에 깨우침한다면 못 깨우칠 사람 없겠지요 아홉단계로 보시면 되지요. "나"라는 자의식이 3단계로 튀어 나옵니다. 나만 뭔가 아는 듯 우쭐해짐이 시작이고, 다시 내가 뭘 깨달았다 느끼고, 다시 내가 신명에 통했다 느끼지만... 이는 모두 내가 나를 속이는 겁니다.

 

진짜 깨우침에 들어설 사람은 호기심, 재미를 느끼기 시작할 때 부터 입니다. 그리고 그 현묘함을 마주하며 놀라운 마음으로 존경심이 들어야 깨우침의 바다에 발 담글 준비 된 겁니다.

 

그리고 혼자만의 항해를 시작하게되고 아무생각없이 바다 그 자체의 변화에 혹하고 치이다가 겨우 배멀미 진정될만 할 때 다른 배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들과 경쟁심이 죽어지고나서야 그들과 대화를 하게되지요. 진리를 찾는 도반의 만남이지요.  

 

배움이란 이리 주고받는 겁니다 부딪히며 서로 커가는 거지요. 그러나 공부하는 재미를 알지 못하는 학생이 성적이 오르지 않듯 결국 재미를 알게 되어야 이제 맛을 본 것이고 이리되는 이치를 깨달아야 이제 겨우 진리 문턱에 서는 겁니다.

 

도박의 재미를 느끼면 도박으로 빠져들고, 술 맛에 재미들면 술에 빠져드는 법... 그러나 그들은 자기 몸, 영을 상하게 하나나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영을 살찌우는 법, 진리에 재미를 느끼면 진리에 빠져드는 법... 



5.

 

生有爲,死也. 勸公,以其死也,有自也而生陽也,无自也而果然乎? 惡乎其所適? 惡乎其所不適? 川有曆數,地有人據,吾惡乎求之? 莫知其所終,若之何其无命也? 莫知其所始,若之何其有命也? 有以相應也,若之何其无鬼邪? 无以相應也,若之何其有鬼邪?

 

뭔가 함이 생기면 죽음입니다. 公(두루 통하는 대중성)을 힘쓰기에 그 유위를 죽음이라 하는데 자기라는 것이 생기는 탓에 양을 만들지요(음:고적하고 조용함,의 상대로), 자기를 없이함이 과연 될까요? 

자기를 없이함이 적절할까 아님 부적절할까? 흐름(아마 하늘 天이 옳을 듯)에는 그 역수(천체의 운행하는 이치)가 있고, 땅은 사람들이 기대는 것(사람들의 사는 근거), 내가 잘못되어 그를 구하는가? 그 끝나는 데를 알지 못하니 어찌 그 운명이 없다 할까? 그 시작을 알지 못하니 어찌 운명이란게 있다 할까? 있다면 오직 서로 상응하는 것 뿐인데 어찌 신명이 없다 할 것인가? 상응함이 없다면 신명이 있다는 것인가?

 

-漢文章은 끊어읽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지요.

 

무위를 강조하는 노장에서 有爲란 人爲로 자기 본성을 죽이는 것으로 봅니다.

 

자연은 커다란 陰으로 그저 고요하고 조용함입니다. 사람이 인위를 하게되면 그에 반하는 陽을 만드는 것. 그리하며 공공성을 확보하려고드니 제 본성은 뒷 전으로 밀리게 되지요. 음을 자연으로 보면 자연에 거스르는 겁니다.

 

제 본성은 하늘 진리와 연결된 끈인데 그게 죽으면? 깨침공부는 남의 일 되지요.

 

사람들은 하늘이치를 알기 원합니다. 그러며 동시에 땅에 근거한 사람들의 이치도... 그게 진리공부의 시작이라 믿고...  그러나 천지의 이치를 인간이 아는 법칙으로 가둘 수 있나요?

 

삶과 죽음은 자연의 관점으론 변화의 하나...그를 생이니 죽음이니로 구분함은 우리 이성의 작용이라 그리하면 하늘이치가 손상됨을 모르나요?

 

만물이 돌아가는 이치는 서로가 연을 맺음으로 이뤄진다고 하면(인과론으로 이성적으로 설명된다면) 우리의 생에 개입하는 천지신명이란게 없는 건가요? 

 

예수는 성령의 역사를 말함으로 유대인의 직선 사관을 보충합니다.

 

세상과 절연하면 마음에 평안이 오지요. 그러나 진리공부는 그런 절연을 추구함이 아니라 생을 생으로 살아내자는 겁니다.

 

상응의 이치를 알아 그를 살아내는 것 그것이 깨우침입니다.

 

이것이 서양의 과정철학이 가르치는 진리의 모습이지요. 이성주의라는 이름의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아우르는...


6.


罔兩問於景曰:「若向也俯而今也仰,向也括撮而今也被髮,向也坐而今也起,向也行而今也止,何也?」

景曰:「搜搜也,奚稍問也! 予有而不知其所以. 予,蜩甲也,蛇蛻也,似之而非也. 火與日,吾屯也.,陰與夜,吾代也. 彼吾所以有待邪? 而況乎以无有待者乎! 彼來則我與之來,彼往則我與之往,彼强陽則我與之强陽. 强陽者又何以有問乎!」


망량이 그림자에게 묻습니다:[전에는 구부리고있다가 지금은 우러르고 있고, 전에는 묶고있다가 산발하고 있고, 전에는 앉아있다가 지금은 일어서있고, 전에는 움직이다가 지금은 멈춰있으니 어찜이냐?]

그림자 왈:[탐구하는 이들이여 어찌 그리 묻는가! 나란 것이 있어도 나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난 매미 날개나 뱀의 피부라 흡사해보여도 실상이 아닙니다. 불과 해앞에서는 내가 있지만 그늘과 밤엔 바뀝니다. 저들이 내가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난 의지의 대상이 되지 못하지요! 저들이 나타나니 나도 나타나고 저들이 가니 저도 사라지고 저들이 강양이니 나도 강양처럼 보일 뿐... 강양자 역시 어찜인지 내게 묻습니다!]


-망량은 그림자 주위의 어릿어릿한 그림자를 말합니다. 굳이 말하면 그림자 가운데도 또 그림자인 셈, 진리를 흉내내는 반푼이를 말하지요.

망량은 저들이 보기에 진짜(더 진하니)인 그림자에게 왜 일이관지 주체적이지 못하나 핀잔하지요. 종잡을 수 없으니... 사람들이 성인들에게 "너도 결국 삶의 탈을 못 벗는구나" 핀잔함과 같지요.


그림자는 그리 말합니다. 난 매미 껍질(날개)이요 뱀의 피부같아서 매미가 날면 움직이고, 뱀이 움직이면 움직이듯... 난 뱀 그자체도 매미 그자체도 아닌 그저 부수적인 것...


깨친자의 움직임은 하늘 이치를 따를 뿐이지... 제 맘대로 제 뜻대로 움직이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깨달은 사람은 뭐든 자유자재로 휘두른다고 생각하지만 깨친 이는 그저 진리에 따라 갈 뿐입니다.

그림자는 말합니다 "내가 당신들 보기엔 陽일지 몰라도 그건 상대적인 겁니다. 나보다 더 근원적인 强陽이 있는 겁니다."


당신들이 나를 우러르나 强陽者=진리,실체는 외려 나에게 줏대없다 합니다.

나를 의지말고 더 근원적인 진리를 의지하시오. 


7.

陽子居南之沛,老聃西遊於秦,邀於郊,至於梁而遇老子.

老子中道仰天而歎曰:「始以汝爲可敎,今不可也.」

陽子居不答. 至舍,進盥漱巾櫛,脫屨戶外,膝行而前曰:「向者弟子欲請夫子夫子行不閒,是以不敢. 今閒矣,請問其過.」

老子曰:「而睢睢盱盱,而誰與居? 大白若辱,盛德若不足.」

陽子居蹴然變容曰:「敬聞命矣!」

其往也,舍者迎將,其家公執席,妻執巾櫛,舍者避席,煬者避竈. 其反也,舍者與之爭席矣.

 

양자거가 남족 패땅을 여행할 때 노자는 진을 향해 서쪽으로 여행하였다. 교외에서 마주치게 되었는데 양땅에서 노자를 만났다.  노자는 길 가운데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길:[처음엔 너로 가르치려 했으나 이제보니 않되겠다] 양자거가 대꾸를 않았다. 숙소에 이르러 깨끗히 씻고 빗질한 후 신을 벗어두고 무릎걸음으로 앞에 나와 말하길:[아까는제자가 여쭙고 싶었으나 스승이 바쁘신 듯하여 감히 여쭙지 못했읍니다. 이제 한가하시니 그 까닭을 여쭙니다.]

 

노자 왈:[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누가 너랑 같이할까? 큰 술잔(지위가 높음)은 외려 욕되고 덕이 큰 사람은 부족한 듯 처신하는 법이다]

양자거가 놀라 안색을 바꾸며 말하길:[가르침을 받듭니다]

 

전에는 여관 일꾼이 그를 마중하러 나왔고, 주인은 방석을 내오고, 안주인은 수건과 빗을 들고 서있었으며 일하는 사람들이 그와 마주함을 피했고 불때는 사람들도 눈을 피했다.

 

이제 돌아가니 모든 사람들이 자리를 다투더라.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서 위와 같은 대접 받음을 좋아라한다. 사람과 어울리기 보다 사람 위에 서기 좋아하는 사람은 진리를 살기 부족한 법이다. 덕이 부족하고 자비가 없기에...  

 

스스로 자신만만하여 거드름 피우는 자에게 진리가 들어설 자리 어디 있는가? 진리를 깨칠 사람은 늘 뭔가를 배우려하고 비워 둔 사람이다. 꽉찬 상자에는 아무리 황금이라도 더 넣을 공간없듯 이미 '자기'라는 자의식으로 꽉 채운 사람에겐 그가 아무리 진리를 바라는 마음이 커도 진리가 들어 올 틈이 없는 법.

 

인의예지라는 사람의 처신이 가득찬 사람은 진리가 들어설 틈이 없다. 따지면 인의예지라는 유묵사상이란 진리를 설명하는 중간 다리이기에... 건너면 지나쳐 잊어야 할 것인데 그를 꼭 붙잡고 진리가 들어오기 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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