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타잔이 사람이 되는 것(?)이 제인이라는 짝이 있어서라면... 사람사이에 살아야 사람 아닐까? 동시에 불가언의 진리를 말로 풀어쓸 때 이미 자연의 본성을 해친 것이기에 그 균형의 상대적인 것도 말의 꼴로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말 아닌것을 말한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
2. 莊子謂惠子曰:「孔子行年六十而六十化,始時所是,卒而非之,未知今之所謂是之非五十九非也.」
장자가 혜자에게 일러 말하길:[공자가 60평생 살면서 60번을 변했는데 처음에는 올바름에서 였으나 끝은 틀림으로 마무리됐다. 지금 옳다라는 것이 59번 틀렸던 것을 안 틀린 것이라 고집함을 모른다]
-공자는 일이관지 논리가 없다. 왜냐면 지금 이 순간 옳다라는 것 조차 지난 59번을 틀렸다고 하던 것을 뒤집는 것 이기에... 시비를 가릴거면 혹독하게 가리든지...
우리는 그럽니다 진리는 영원무궁 절대 불변이라고... 그러나 시비도 그럴까요? 시비란 오늘 옳은 것이 내일 그릇 것 되는 법입니다. 그러니 옳다 그르다를 어찌 확연하게 자를 수있는가? 자연이란 동전의 양면인데???
惠子曰:「孔子勤志服知也.」
혜자 답하길:[공자가 의지를 성실히 따르고 지혜를 따랐기 때문이겠지요]
莊子曰:「孔子謝之矣,而其未之嘗言. 孔子云:"夫受才乎大本,復靈以生,鳴而當律,言而當法,利義陳乎前,而好惡是非直服人之口而已矣. 使人乃以心服,而不敢蘁立,定天下之定." 已乎已乎! 吾且不得及彼乎!」
장자왈:[공자는 그를 버린 겁니다 말할 자격이 없지요. 공자가 전하길 "대저 받은 그릇이 큰 본질이라면 본디의 영감이 살아나 울음소리도 운율에 맞고 말을 하면 이치에 닿으니 이해나 정의 문제 앞에서 사람의 입으로 좋고싫음, 시비나 따짐은 남들도 다 하는 짓입니다. 사람으로 마음에 복종하도록 함으로서 감히 대립하지 않도록하면 천하의 정한 이치를 바로하는 것입니다" 맞고 맞다 내 깨달음이 저만 못하구나!]
-공자가 시비에 능하면서 정작 자기에겐 관대한 듯하여 일이관지함이 없어보여 하는 장자의 얘기입니다.
공자가 이르길 "내 본성이 자연에 합하는 것이라면 자연 그 본성으로 합할 겁니다. 울음도 그저 악창이 아니라 사리에 맞을 것이요 말도 이치에 닿게 될 겁니다. 이해, 정의, 시비의 문제 앞에서 그저 입으로 이러네 저러네 따지는 짓은 이미 (사람들이)해 온 일입니다. 다만 무슨 일을 보든 그게 이해든 정의든 시비의 문제든 그저 본디 하늘 뜻을 타고난 마음 가는 대로 따르며 그를 이런저런 궁리로 거스르지 않는 것 그것이 하늘의 바른 이치를 바로하는 것입니다" 맞도다 내가 아직 저만한 깨달음이 없구나...
우린 그럽니다. 그럼 이도저도 아니고 않된다(시비 가림을 부정)하면 진리를 어찌 알 것이며 살 수있느냐?...
간단하지요. 우리의 몸도 마음도 다 자연으로 나눠 받은 것 특히 마음은 늘 하늘이치로 향하고 있지요. 그를 따르면 됩니다. 잇속이나 지혜니 뭐니로 가리지 말고...
그게 성령이요 양심이요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지입니다. 그를 따르면 되지요...
장자가 탄식합니다. 아... 내가 외려 시비나 따지는 말장난에 빠졌구나...
늘 말가지고 논다고 깐보던 공자에게도 진리가 담겨있는 겁니다. 다만 늘 부족하기에 서로 충돌하고 대화하는 겁니다. 더 갈고닦아 진리로 다가서려고... 이게 도반의 만남이지요. 저 잘못을 툭 인정해버리는 쿨한 만남...
|
4.
顔成子游謂東郭子綦,曰:「自吾聞子之言,一年而野,二年而從,三年而通,四年而物,五年而來,六年而鬼入,七年而天成,八年而不知死,不知生,九年而大妙.」
안성자유가 스승인 동곽자기에게 말하길:[내 스승님 가르침을 듣고 한마디 합니다만 1년되니 우쭐하고, 2년되니 수그러들고, 3년되니 뭔가 알듯하고,4년이 되니 그저 그대로 뵈고, 5년이 지나니 그 의미가 뭔지 알 듯 하고, 6년이 되니 잔 궁리가 늘고, 7년 지나니 하늘 뜻이 이뤄지고, 8년 지나니 생사의 문제(승부의 문제)가 의미없고, 9년 지나니 큰 신묘함을 알게 됐습니다]
-뭐든 공부하는 사람이 겪는 단계지요... 한 1년 지나니 뭔가 아는듯 우쭐하고 나가서 떠들고 싶어집니다. 2년 지나니 아직 멀엇구나 싶어 잠잠해지고, 3년 지나니 다시 뭔가 아는 듯... 4년 지나니 저나 내가 뭐 다른지 좀 구분되어 보이고 5년 지나니 저의 그대로가 보이고 6년 지나 역으로 내 궁리가 늘고 7년 지나 하늘바라는 뜻을 알 것 같고 8년 지나 승부보다 그 자체의 재미를 알고 9년 지나니 저나 내나 만나게 된 뜻을 알게 됩디다....
9년에 깨우침한다면 못 깨우칠 사람 없겠지요 아홉단계로 보시면 되지요. "나"라는 자의식이 3단계로 튀어 나옵니다. 나만 뭔가 아는 듯 우쭐해짐이 시작이고, 다시 내가 뭘 깨달았다 느끼고, 다시 내가 신명에 통했다 느끼지만... 이는 모두 내가 나를 속이는 겁니다.
진짜 깨우침에 들어설 사람은 호기심, 재미를 느끼기 시작할 때 부터 입니다. 그리고 그 현묘함을 마주하며 놀라운 마음으로 존경심이 들어야 깨우침의 바다에 발 담글 준비 된 겁니다.
그리고 혼자만의 항해를 시작하게되고 아무생각없이 바다 그 자체의 변화에 혹하고 치이다가 겨우 배멀미 진정될만 할 때 다른 배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들과 경쟁심이 죽어지고나서야 그들과 대화를 하게되지요. 진리를 찾는 도반의 만남이지요.
배움이란 이리 주고받는 겁니다 부딪히며 서로 커가는 거지요. 그러나 공부하는 재미를 알지 못하는 학생이 성적이 오르지 않듯 결국 재미를 알게 되어야 이제 맛을 본 것이고 이리되는 이치를 깨달아야 이제 겨우 진리 문턱에 서는 겁니다.
도박의 재미를 느끼면 도박으로 빠져들고, 술 맛에 재미들면 술에 빠져드는 법... 그러나 그들은 자기 몸, 영을 상하게 하나나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영을 살찌우는 법, 진리에 재미를 느끼면 진리에 빠져드는 법... |
5.
生有爲,死也. 勸公,以其死也,有自也而生陽也,无自也而果然乎? 惡乎其所適? 惡乎其所不適? 川有曆數,地有人據,吾惡乎求之? 莫知其所終,若之何其无命也? 莫知其所始,若之何其有命也? 有以相應也,若之何其无鬼邪? 无以相應也,若之何其有鬼邪?
뭔가 함이 생기면 죽음입니다. 公(두루 통하는 대중성)을 힘쓰기에 그 유위를 죽음이라 하는데 자기라는 것이 생기는 탓에 양을 만들지요(음:고적하고 조용함,의 상대로), 자기를 없이함이 과연 될까요? 자기를 없이함이 적절할까 아님 부적절할까? 흐름(아마 하늘 天이 옳을 듯)에는 그 역수(천체의 운행하는 이치)가 있고, 땅은 사람들이 기대는 것(사람들의 사는 근거), 내가 잘못되어 그를 구하는가? 그 끝나는 데를 알지 못하니 어찌 그 운명이 없다 할까? 그 시작을 알지 못하니 어찌 운명이란게 있다 할까? 있다면 오직 서로 상응하는 것 뿐인데 어찌 신명이 없다 할 것인가? 상응함이 없다면 신명이 있다는 것인가?
-漢文章은 끊어읽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지요.
무위를 강조하는 노장에서 有爲란 人爲로 자기 본성을 죽이는 것으로 봅니다.
자연은 커다란 陰으로 그저 고요하고 조용함입니다. 사람이 인위를 하게되면 그에 반하는 陽을 만드는 것. 그리하며 공공성을 확보하려고드니 제 본성은 뒷 전으로 밀리게 되지요. 음을 자연으로 보면 자연에 거스르는 겁니다.
제 본성은 하늘 진리와 연결된 끈인데 그게 죽으면? 깨침공부는 남의 일 되지요.
사람들은 하늘이치를 알기 원합니다. 그러며 동시에 땅에 근거한 사람들의 이치도... 그게 진리공부의 시작이라 믿고... 그러나 천지의 이치를 인간이 아는 법칙으로 가둘 수 있나요?
삶과 죽음은 자연의 관점으론 변화의 하나...그를 생이니 죽음이니로 구분함은 우리 이성의 작용이라 그리하면 하늘이치가 손상됨을 모르나요?
만물이 돌아가는 이치는 서로가 연을 맺음으로 이뤄진다고 하면(인과론으로 이성적으로 설명된다면) 우리의 생에 개입하는 천지신명이란게 없는 건가요?
예수는 성령의 역사를 말함으로 유대인의 직선 사관을 보충합니다.
세상과 절연하면 마음에 평안이 오지요. 그러나 진리공부는 그런 절연을 추구함이 아니라 생을 생으로 살아내자는 겁니다.
상응의 이치를 알아 그를 살아내는 것 그것이 깨우침입니다.
이것이 서양의 과정철학이 가르치는 진리의 모습이지요. 이성주의라는 이름의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아우르는...
|
7.
陽子居南之沛,老聃西遊於秦,邀於郊,至於梁而遇老子.
老子中道仰天而歎曰:「始以汝爲可敎,今不可也.」
陽子居不答. 至舍,進盥漱巾櫛,脫屨戶外,膝行而前曰:「向者弟子欲請夫子夫子行不閒,是以不敢. 今閒矣,請問其過.」
老子曰:「而睢睢盱盱,而誰與居? 大白若辱,盛德若不足.」
陽子居蹴然變容曰:「敬聞命矣!」
其往也,舍者迎將,其家公執席,妻執巾櫛,舍者避席,煬者避竈. 其反也,舍者與之爭席矣.
양자거가 남족 패땅을 여행할 때 노자는 진을 향해 서쪽으로 여행하였다. 교외에서 마주치게 되었는데 양땅에서 노자를 만났다. 노자는 길 가운데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길:[처음엔 너로 가르치려 했으나 이제보니 않되겠다] 양자거가 대꾸를 않았다. 숙소에 이르러 깨끗히 씻고 빗질한 후 신을 벗어두고 무릎걸음으로 앞에 나와 말하길:[아까는제자가 여쭙고 싶었으나 스승이 바쁘신 듯하여 감히 여쭙지 못했읍니다. 이제 한가하시니 그 까닭을 여쭙니다.]
노자 왈:[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누가 너랑 같이할까? 큰 술잔(지위가 높음)은 외려 욕되고 덕이 큰 사람은 부족한 듯 처신하는 법이다]
양자거가 놀라 안색을 바꾸며 말하길:[가르침을 받듭니다]
전에는 여관 일꾼이 그를 마중하러 나왔고, 주인은 방석을 내오고, 안주인은 수건과 빗을 들고 서있었으며 일하는 사람들이 그와 마주함을 피했고 불때는 사람들도 눈을 피했다.
이제 돌아가니 모든 사람들이 자리를 다투더라.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서 위와 같은 대접 받음을 좋아라한다. 사람과 어울리기 보다 사람 위에 서기 좋아하는 사람은 진리를 살기 부족한 법이다. 덕이 부족하고 자비가 없기에...
스스로 자신만만하여 거드름 피우는 자에게 진리가 들어설 자리 어디 있는가? 진리를 깨칠 사람은 늘 뭔가를 배우려하고 비워 둔 사람이다. 꽉찬 상자에는 아무리 황금이라도 더 넣을 공간없듯 이미 '자기'라는 자의식으로 꽉 채운 사람에겐 그가 아무리 진리를 바라는 마음이 커도 진리가 들어 올 틈이 없는 법.
인의예지라는 사람의 처신이 가득찬 사람은 진리가 들어설 틈이 없다. 따지면 인의예지라는 유묵사상이란 진리를 설명하는 중간 다리이기에... 건너면 지나쳐 잊어야 할 것인데 그를 꼭 붙잡고 진리가 들어오기 바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