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外物不可必,故龍逢誅,比干戮,箕子狂,惡來死,桀紂亡. 人主莫不欲其臣之忠,而忠未必信,故伍員流于江,萇弘死于蜀,藏其血三年而化爲碧. 人親莫不欲其子之孝,而孝未必愛,故孝己憂而曾參悲. 木與木相摩則然, 金與火相守則流. 陰陽錯行,則天地大絯,於是乎有雷有霆,水中有火,乃焚大槐,有甚憂兩陷而无所逃,螴蜳不得成,心若懸於天地之間,慰暋沈屯,利害相摩,生火甚多,衆人焚和,月固不勝火,於是乎有僓然而道盡.
인간의 외부의 사물들에는 꼭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용봉은 주살당하고, 비간은 도륙되었으며, 기자는 미친 척하고 살았고, 악래는 죽었으며, 걸왕, 주왕도 망한 것이다. 군주들은 자기의 신하가 충성스럽기를 바라지만, 충신이라고 다 군주의 신임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원은 그 시체가 강물에 띄워졌고, 장홍은 죄없이 촉에서 죽어 삼년만에 그의 피가 푸른 옥이 되었던 것이다. 부모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의 자식이 효성스럽기를 바라지만, 효자라고 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효기는 괴로워했고, 증참은 슬퍼했던 것이다.
-우리는 바깥 사물이 영원 무궁하다 하지만 그리되지 못하는 법... 그러니 저 홀로 곧게 산다고 그리 살아지는 것 아니다. 그 이유는 결국 서로의 상호작용으로 세상이 돌아가기 때문... 나무와 나무를 마찰시키면 불이 붙고, 쇠가 불 속에 있으면 녹아흐른다. 음양이 뒤섞여 운행되면 하늘과 땅에 큰 변동이 일어난다. 여기에서 천둥과 번개가 생기고, 빗 속에서 벼락이 쳐서 큰 느티나무를 태운다. 사람에게는 과함과 근심이라는 두가지 함정이 있어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도망칠 수가 없다.
-서로 마주치고 마찰이 생기니 인생사 복잡다단해지듯, 그저 외물이 한 가지 모습으로만 되어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심한 빗속에 치는 벼락은 불가운데서도 으뜸 아니냐? 사람들이란 안정함을 몰라 안절부절하거나 미리 근심하여 일을 그르치는데 그를 피하는 사람 없다. 언제나 두려워하는 가운데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그 마음은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린 듯 불안한 것이다. 또 걱정스런 마음이 응집해 근심에 빠지게 되며, 이로움과 해로움 사이서 갈등하여 고민이 불같이 일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 태우니, 마음이 달처럼 허허로워도 그런 불길을 잠재우지 못한다. 이에 익숙하니 바른 도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자연의 이치 속에서 늘 불안하고 안정되지 못하여 무슨 일을 만나든 이것이 이로울까 해로울까를 염려하는데 이런 서로의 염려가 인생의 잡다한 만화경을 만들어 내는 것... 그저 양쪽의 흔들림에 따라 흔들리며 사는데 익숙하니 진리를 살기 어려워지는 것...
진리는 절대무변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서 비롯되는가? 그건 바로 이런 시계추와 같은 운동성안에 살고있는 인간의 바람일 뿐... 그래서 이것이 진리다 하면 그에 혹하는 법. 그러면서도 사람은 모든 일에 그저 속 계산으로 이리저리 재며 사니 마음도 복잡하고, 그런 속 계산들이 맞딱드리니 벼라별 일들이 생기는 것...
사람들이 말하는 깨달음이란 "절대무변함"과 "이도저도...양비론"에 근거한 처세론으로 그쳐 저 하나 잘 보신함을 깨달음이라 한다.
어느 누구든 그런 속 계산을 멈추고 그저 만나면 될 것을... 그러나 실제 현상계에서도 이런 경지의 만남을 할 수 있으니 그것이 소위의 사랑... 무조건의 희생과 줌...
그런 사랑의 본성을 타고났으나 그 사랑을 오래 누리지 못함은 단 하나... 불안과 이로움과 해로움을 따지는 그런 속마음을 다루지 못하는 탓... 깨달은 사람은 그런 불안을 지워낸 사람... 2. 莊周家貧,故往貸粟於監河侯. 監河侯曰:「諾. 我將得邑金,將貸子三百金,可乎?」
장자의 집이 가난하였다. 그래서 감하후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다. 감하후 왈:[그러시죠. 내 세금받을 것이 있는데 300금정도 빌려드릴 수 있읍니다 됐나요?]
-참 통 큰 사람인가요? 당장의 끼니를 위한 곡식이나 꾸려는 자에게 300냥의 금을 빌려준다니... 아니 그 반대입니다. 세금받고나면 줄테니 기다려라... 아무리 큰 성읍이라도 금 300냥을 거두기 쉬운가요?
莊周忿然作色曰:「周昨來,有中道而呼者. 周顧視車轍中,有鮒魚焉. 周問之曰:"鮒魚來! 子何爲者邪"? 對曰:「我,東海之波臣也. 君豈有斗升之水而活我哉???" 周曰:"諾. 我且南遊吳越之土,激西江之水而迎子,可乎" 鮒魚忿然作色曰:"吾失我常與,我无所處. 吾得斗升之水然活耳,君乃言此,曾不如早索我於枯魚之肆!"
장자가 성나 얼굴빛이 바뀌며 말하길:[내 어제 오는 길에 누가 날 부릅디다. 내 돌아보니 차바퀴 자국 가운데 붕어입디다. 내 물었소:"붕어로군! 무슨 일이요?" 답이: "난 동해의 파도를 담당하는 신하요. 당신이 날 물에 담아서 살려줄 수 있겠소?" 내 말하길:"그럽시다. 내 남쪽 오월 땅으로 내려가 서강을 끌어 당신을 보내드리면 되겠소?" 붕어가 성나서 말하길:"내 살던 물이 없어 거할 처소가 없을 뿐이지. 내 한 되박의 물이면 살 수있는데 당신이 그리 말한다니..차라리 날 건어물 가게서 찾으시오!" 합디다.
-비유로 말합니다. 기실 당신이 날 귀히 대하는 듯 하지만... 비아냥임을... 자기 주제를 과장하는 감하라는 지역의 일개 벼슬아치의 교만을...
또 하나, 그를 돕자면 그의 필요를 채우면 될 일을 거창하게 존대하듯 함은 도리에 맞지 않지요. 그저 제 주변 사람에게 허세를 부리려 상대를 깎아내는 허언이지요.
깨우친 이의 처신이라면 적어도 제 허세를 위해 어려움에 처한 상대를 깎아내리진 않지요. 그 어려움에 공감하고 그를 도울 방법을 찾음이 도리지요.
허세부리는 자 치고 깨우친 자 없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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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儒以詩禮發冢,大儒臚傳曰:「東方作矣! 事之何若?」 小儒曰:「未解裙襦,口中有珠.」 「詩固有之曰:"靑靑之麥,生於陵陵,生不佈施,死何含珠爲" 接其鬢,壓其劌,而以金椎控其頤,徐別其頰,无傷口中珠.」
유학자가 시경과 예기를 근거로 남의 무덤을 도굴했다. 함께 간 큰선비가 무덤 위에서 아래쪽에 대고 말했다:[동녘이 밝아오는데 일이 어찌 되고 있는가?”] 작은 선비가 말했다:[속옷도 아직 다 벗기지 못했습니다만 입 속에 구슬이 있습니다.’ 큰선비가 말하기를, “시경에 이르기를 ‘푸른 보리가 무덤 가에 자라고 있네. 살아서 은혜를 베풀지도 못하고서 죽어서 어찌 구슬을 물겠는가?"라고 했네 그 놈의 머리를 잡고 그의 턱수염을 누른 다음, 쇠망치로 그의 턱을 쳐서 천천히 그의 볼까지 벌리고, 입 속의 구슬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잘 꺼내게.']
-자칭 깨쳤다하는 이들이 제 논리로 무도한 짓을 저지르는데, 하늘과 남의 이목 무서운 줄은 알아서 서둘지요. 이미 저 스스로 잠잠한 진리를 까발립니다.
겉모습이나 겨우 깨닫고 있는 것도 가상은 합니다만 이제 썩은 시체의 속옷까지 벗겨내려 하지요. 그러다가 입속에 구슬을 봅니다... 말하지요... "저 혼자 청청한 척하고 남들에게 일제 도움을 주지않았는데 무슨 구슬을 머금어?" 진리를 자기들처럼 일일이 밝히지 않고 그저 그대로 죽어 넘어진 주제에 구슬(정수)을??? 진리의 온전함을 시기하는 겁니다. 진리란 어느 하나만 잘라내어 이거다 할 것 있나요?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겁니다.
부모가 나를 꾸중하면 '사랑이 없으니 부모 아니다' 하는 것이나 같지요. 내 세운 왜곡된 잣대를 알지 못하는 겁니다. 꾸중도 부모님 사랑인 줄 모르는 치졸한 어린 아이의 생각이지요.
'그 구슬이나 잘 꺼내오게...' 상대인 송장의 턱이야 부숴지든 말든, 수염이야 빠지든 말든 저 생각하는 보배 진리의 정수만 얻겠다는 욕심이지요. 그리 상대를 존중할 줄 모르는 이가 진리를??? 언감생심이지요. 설혹 사람의 가치가 사유하는 능력이라고 그만 뽑아내면 사람인가요? 컴퓨터가 사유하면 사람이라 부를 어리석은 판단이지요.
禮를 안다면 죽은 시신을 그리 부관참시할 일 아니지요. 예란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것 아닌가요? 진리공부란 정수를 뽑아내는 것 아니고 그 진리 고대로 살아내는 겁니다.
진리를 물건처럼 여기는 자들이 저지르는 고약한 짓이지요. 알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淺薄한 자들이 진리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만행입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법... 남앞에 칼 춤이라도 출 정도는 되어야 무당질이라도 하는 법입니다. |
5. 老萊子之弟子出取薪,遇仲尼,反以告,曰:「有人於彼,修上而趨下,末僂而後耳,視若營四海,不知其誰氏之子?」 老萊子曰:「是丘也. 召而來.」 仲尼至. 曰:「丘! 去汝躬矜與汝容知,斯爲君子矣.」 仲尼揖而退,蹙然改容而問曰:「業可得進乎?」 老萊子曰:「夫不忍一世之傷而驚萬世之患,抑固窶邪,亡其略弗及邪?惠以歡爲鷔,終身之醜,中民之行進焉耳,相引以名,相結以隱. 與其譽堯而非桀,不如兩忘而閉其所非譽.反无非傷也,動无非邪也. 聖人躊躇,以興事,以每成功. 奈何哉其載焉終矜爾!」
노래자의 제자가 땔섶을 구하러 갔다가 공자를 만나고 돌아와 말했다 : [저기 한 사람이 있는데, 상체는 길고 하체는 짧으며 등은 꼽추에다 귀는 머리 뒤편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눈빛은 세상을 다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누구의 아들일까요?]
노래자가 말했다. [그가 공자다. 불러오너라.]
공자가 오자 노래자가 공자에게 말했다. [그대 뭔가 안다는 얼굴빛과 스스로의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군자다.]
공자가 읍을 하고 물러서서 송구스러운 듯 안색을 고르고 말했다. [그러면 저의 배움도 진보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는 적어도 저를 꿰뚫어 보는 사람을 알아볼 정도 겸손하고 열린 사람입니다. 그러니 깨달음으로 오늘날까지 이름을 날리겠지요...
아마 공자의 얼굴은 그랬을겁니다. 현실에의 불만과 못마땅함이 가득한 얼굴 빛이었을 겁니다. 사람은 누구든 남들이 알아주고 대접해주길 원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기의 허점을 꿰뚫어보면서 더 매진할 것을 말해주면 싫어라 하지요. 여기서 깨칠 사람과 멈출 사람이 나뉘는 법.
노래자가 말했다. [그대는 지금 당대의 혼란을 참지 못하고 만세의 혼란을 가볍게 보고 있다. 고집스레 그리하는가 아님 머리가 안돌아 그리하는 것인가? 그대는 신이 나서 그렇게 하고 있겠지만, 평생의 치욕이 될 것이다.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 처신하는 대로 하는데, 명성으로 서로 뭉치고, 서로의 음흉함 때문에 맺어지는 것이다. 그런 잇속으로 요임금을 칭송하고 걸왕을 비난하느니 차라리 둘 다를 다 잊고 비난을 멈추는 것이 더 좋다. 서로 반대하여 상하지않으면 뭘 하든 사사로움 없이 할 수 있다. 성인은 조심하면서 일을 추이를 만들기에 언제나 성공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방법을 알고 자랑스럽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
-네가 당장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를 애씀은 가상하지만 그리함이 외려 만세의 문제를 일으킴을 모른다. 머리가 나쁜거냐 고집이냐?
그저 "사람들 사는 것이 그런데요" 라는 변명으로 너를 합리화하지만 사람들이란 이름(권세)에 이끌려가는 법이고, 음흉한 잇속에 뭉치는데...진리를 산다는 사람이 그리 따라갈 것인가?
요와 걸을 비교하여 누군 좋고 누군 나쁘다라는 것이 기실은 그런 판단 기준 때문이니 그런 판단을 잊어 옳다 그르다를 따지지 마라.
깨달은 성인이란 그런 판단이나 선입견 서는 것을 두려워하여 사람들과 멀리하고 일을 할 때는 조심조심 일을 진행해나가니 매사가 성취되는 것 그런 이치나 깨달으시게..
싸구려 말장난이나 하며 존중받기 원하고 그런 수단이나 배울거면 그리 사람들 하는대로 뒤쫓아 행하면 되지만 진리를 알자면 그런 남 뒤 쫓는 방법으로 될까? 방법이 달라야 다른 결과를 얻는 법.
진리를 깨닫기 원하면 우선 버려야 할 것이 바로 "사람인데 남들도 그리하는데"라는 자기 합리화 자기 변명입니다. 진리와 그런 자기 합리화는 같이 할 수 없는 것... 그야말로 남의 이목에 야합하는 꾸밈이요 눈속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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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惠子謂莊子曰:「子言无用.」 莊子曰:「知无用而始可與言用矣.天地非不廣且大也,人之所用容足耳. 然則厠足而墊之致黃泉,人尙有用乎?」 惠子曰:「无用.」 莊子曰:「然則无用之爲用也亦明矣.」
혜자가 장자에게 말하길:[네 말들은 쓸모없다] 장자 답하길:[쓸모없단 것을 아는 순간 말이 쓸모있게 되기 시작하는 것. 천지가 넓고 또 크지만 사람에겐 밟을 정도면 족한 것. 그러니 발자국 빼고 땅이 황천에 이르기 까지 가라앉으면 사람에게 유용한가?] 혜자 왈:[쓸모없죠] 장자 말하길:[쓸모없는 것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네요]
-혜자란 장자에겐 유일한 짝이 되는 벗... 사람들은 그럽니다. 필요한 부분만 건지면 됐지... 그럴까요? 아무리 아름다운 보석도 줄에 매달지 않으면 돌덩어리... 사람이 머리로만 산다고 사지 잘라놓으면 사람인가요?
진리란 내 맘에 안드는 그것까지 다 진리입니다. 식탁에 하얗고 고급스러운 Iodized 정제염이 있읍니다. 백 설탕도 있지요...그러나 시커먼 천일염이, 흑설탕이 몸에는 더 좋은 것...
쓰임이니 뭐니 하는 건 내 판단이요 선택일 뿐... 진리는 내 몸 담굴 바다이지 한 되박 소금물 아닙니다. 내 손에 가지려 말고 내 몸 푹 담궈 살아야지요.
진리란 내 인생 꾸며주는 장신구 아니라 내가 살아야 할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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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目徹爲明,耳徹爲聰,鼻徹爲顫,口徹爲甘,心徹爲知,知徹爲德.
凡道不欲壅,壅則哽,哽而不止則跈,跈則衆害生. 物之有知者
恃息,其不殷,非天之罪. 天之穿之,日夜无降,人則顧塞其竇.
胞有重閬,心有天遊. 室无空虛,則婦姑勃谿,心无天遊,則六鑿
相攘. 大林丘山之善於人也,亦神者不勝.
눈이 밝아지면 밝히 보게되고, 귀가 밝아지면 총명해지며, 코가 뚫리면 냄새를 잘 가리고, 입이 뚫리면 소리가 감미로워지며 마음이 트이면 지혜가 깃들고, 앎이 트이면 덕이 된다. 진리는 갖히기 원치않는다, 막히면 더듬거리고, 더듬거림은 멈출 줄 모르니 즉, 나아가지 못하고, 나아가지 못하면 인생에 무수한 해를 끼친다. 사물이 지혜를 갖추면 쉼을 알게되는데 그것이 자라지 못한다고 하늘이 낸 죄는 아니다. 하늘은 늘 통하게 하니 낮이나 밤이나 멈춤이 없는 법 사람이란 막힌 곳에선 그 솟아날 구멍을 찾는 법이다. 사람의 뱃속엔 중요한 돌파구가 있고 마음은 천지를 노닐 여유가 있는 법. 집에 공간이 없으면 고부가 다투고, 마음에 하늘 여유가 없으면 6개 기관이 서로 충돌하는 법이다. 큰숲과 산야의 이로움이 사람에게 필요하니 정신으로 이를 억누르지 못하는 탓이다.
-이목구비가 트이면 총명해지고, 마음과 앎이 트이면 지혜와 덕이 커진다. 진리란 그저 갖혀 숨어있는 것 아니다. 그런 본성의 진리를 가두어두면 흐르지 못하니 삶의 근본 이치가 막힌 꼴, 삶이 매끄럽지 못하여 생에 해로움이 많다.
그러나 이는 하늘이 그리 만든 것 아니다. 하늘은 늘 통하게 하는 본성이라 일절 쉼이 없다. 사람의 배포에도 그런 뚫린 데가 있기 마련이고, 마음에 그런 여유가 없으면 인간의 장기가 서로 뒤꼬이는 법이다. 그래서 자연을 만끽함이 필요한데 이런 속볶임을 정신력(의지)으로 억제할 수 있는 것 아니기 때문이다.
뭐든 고여있으면 탈이 많은 법, 하늘의 이치도 사람의 몸도 내쉬고 들이쉬며 서로 나누는 흐름 가운데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강인한 정신력이란 이름으로 이런 신체와의 부조화를 만들어 냄은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다.
우리는 마음공부를 정신력으로 몸의 정욕을 꺾는 것이라 본다. 이는 깨침의 자세 조화의 자세가 아니다. 몸을 부정하고 정신만 옳다하는 것은 한 쪽으로 편향된 것은 자연을 따라 사는 진리의 삶의 모습 아니다. 마음속에 쌓인 것을 억누르기보다 잘 펼쳐냄을 배우는 것이 깨우침의 자세다. |
10.
德溢乎名,名溢乎暴,謀稽乎誸,知出乎爭,柴生乎守,官事果乎衆宜. 春雨日時,草木怒生,銚鎒於是乎始修,草木之到植者過半而不知其然.
덕이 넘쳐나면 이름나고, 이름이 분에 넘치면 해로우니, 모사와 궁리는 성급함이며 지혜가 드러나면 경쟁이 생기고, 목책을 만듦은 수비함 때문이요, 나랏 일의 성과는 대중이 마땅히 함이어야 한다. 봄비가 내리면 초목이 왕성하게 자라니 이를 김매는 것이 수련의 시작이라, 초목을 심은 이의 반수 이상은 그리 해야함을 알지 못한다.
-진리를 깨치려 수양하면서 덕을 키운다는 것이 이름이나 날리자는 것인가? 너무 명성이 높으면 오히려 나를 해치고, 남보다 더 안다고 잔꾀나 부리며 모사나 궁리를 함은 경솔한 것, 수양으로 얻은 지혜를 자랑하면 싸움이나 다툼이 생기고, 부족한 스스로를 지키려하며 방어논리를 목책삼아 두름은 허약한 자기를 방어하기 위함이라, 깨침을 이뤄 나랏 일을 감당하려 하는데 나랏 일의 성과는 사람들이 다 옳다고 따르고 행하는 그것이지 특정한 이론을 따름이 아니다.
깨우침을 수양하다보면 반드시 조심할 것이 생각이란 마치 봄비를 맞고 왕성해지는 초목과 같아 계기만 주어지면 산만해지는 법, 그를 잘 김매듯 다뤄주는 것이 수양의 시작이다. 수양한다는 사람들의 과반 이상이 이런 이치를 알지 못한다.
9편이 말하는 절제라는 이름으로 자기 본성을 억누르는 것도 옳지 않듯...너무 자기에 충실하여 산만해지도록 함도 그릇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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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演門有親死者,以善毁爵爲官師,其黨人毁而死者半. 堯與許由天下,許由逃之.,湯與務光,務光怒之紀他聞之,帥弟子而踆於窾水,諸侯弔之,三年,申徒狄因以踣河.
연문에 부친상 당한 이가 있는데, 상을 당하여 몸이 기진하므로 관사라는 벼슬을 하게 됐는데 벼슬아치 중 상을 슬퍼하여 죽은 이가 반이라. 요가 허유에게 천하를 양위하려하자 허유는 도망갔고 탕이 무광에게 양위하려 하자 무광이 노했다 소리듣고 기타가 다음이 자기차례라 하여 관수로 가 은거하였는데 제후들이 3년을 찾아뵈었다. 신도적은 기타를 사모하여 물에 빠져 죽었다.
-허유나 무광, 기타같은 이들은 하늘을 사는 사람들이라 어찌 성인이라 불리는 이들을 따라갈까? 출세하려는 자들이나 남 따라 외려 더 과장하는 법... 그리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버림만 못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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