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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남화경

庚 桑 楚

庚 桑 楚 


1. 

老聃之役,有庚桑楚者,偏得老聃之道,以北居畏壘之山,其臣之畵然知者去之,其妾之挈然仁者遠之.,擁腫之與居,鞅掌之爲使. 居三年,畏壘大壤. 畏壘之民相與言曰:「庚桑子之始來,吾洒然異之. 今吾日計之而不足,歲計之而有餘. 庶幾其聖人乎! 子胡不相與尸而祝之,社而稷之乎?」 
庚桑子聞之,南面而不釋然. 弟子異之. 庚桑子曰:「弟子何異乎予? 夫春氣發而百草生,正得秋而萬寶成. 夫春與秋,豈无得而然哉? 天道已行矣! 吾聞至人,尸居環堵之室,而百姓猖狂不知所如往. 今以畏壘之細民而竊竊焉欲俎豆予于賢人之間, 我其杓之人邪! 吾是以不釋於老聃之言.」 

노자의 제자중에 경상초라고 있어 노자의 도를 좀 깨우치고 북쪽 외루라는 데서 사는데 그 따르는 무리중에 지혜롭다는 자는 떠나고 첩들중 어질다는 사람은 멀리하여 그릇 됨이 작다는 이들 만이 같이사는데 일을 열심히 시키더라. 3년이 지나 외루가 크게 확장되었다. 외루 주민들이 서로 얘기하길:[경상자가 처음 올땐 우리는 그저 소탈하여 지금과 달랐는데 우리가 지금보면 하루하루 살기는 빠듯한데도 일년 살기는 여유롭다. 뭔가 성인됨이라! 어찌 신주로 기리고 사당에 모시고 섬기지않으리?] 

-경상자의 출현이 이들에게 변화를 줬지요. 스스로 현자니 어진 이니 하는 이들을 멀리하고 그저 질박한 사람들의 삶으로... 

경상자가 이를 듣고 남면하여 앉아 못마땅해 했다. 제자가 이상히 여겼다. 경상자 왈:[넌 뭐가 이상하냐? 봄기운이 발하면 모든 풀이 살아나고 가을 기운이 되면 모든 보배로움이 이뤄진다. 봄 가을이 되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함이 이치인가? 하늘도리가 이미 그런걸! 내 깨친 이에게 들었는데 신주가 갖힌 방 안에 있으면 백성들이 어디로 갈 지모르고 미쳐날뛰는 법. 이제 외루 사람들이 슬그머니 나를 젯상 뒤에 가두어 현인들 사이에 두려하니 내 그들과 함께 마주 대작하겠는가? 난 이것이 노자의 말의 해석이 아니라 본다] 

-사람들이 경상자를 성인으로 추대하려 하지만 경상자는 그를 못마땅해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추구하는 진리가 자신의 영달이 아닌 탓이지요. 그저 그들과 호흡하고 부대끼며 사는 삶을 바랐기 때문이지요. 

弟子曰:「不然. 夫尋常之溝,巨魚无所還其體,而鯢鰌爲之制.,步仞之丘,巨獸无所隱其軀,而鯢狐爲之祥. 且夫尊賢授能,先善與利.自古堯舜以然,而況畏壘之民乎! 夫子亦聽矣!」 

제자 왈:[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얕은 도랑에선 큰 물고기가 몸을 돌릴 만한 장소가 없지요 그래서 잔물고기 미꾸라지나 가능하지요. 한 길 언덕에선 큰 짐승이 그 몸을 가릴 수 없어 자잘한 여우가 왕입니다. 대저 현인을 존중하고 능력을 발휘한 이는 상주지만 먼저 그 나오는 이익에 밝지요! 요순시대도 그랬는데 하물며 외루사람들이야! 그런 소리 들음을 괘념치 마소서] 

-큰 물이 되었으니 큰 틀을 짜자! 요순시대도 그랬는데..라는 입발린 소리지요 제멋대로 상고시대를 갖다 붙이는 겁니다. 그럼 소인배는 우쭐하지요 드디어 내가 큰 뭔가를 만들었구나... 

庚桑子曰:「小子來! 夫函車之獸,介而離山,則不免於罔罟之患.,呑舟之魚,碭而失水,則蟻能苦之. 故鳥獸不厭高,魚鼈不厭深. 夫全其形生之人,藏其身也,不厭深眇而已矣. 

경상자가 이르길:[어린아이야 와 봐라! 무릇 함거지수란 짐승도 산을 떠나면 그물에 잡힐 위험을 안고 살고 탄주지어도 물을 떠나면 개미에게 고통 당하는 법. 그래서 새나 짐승은 높은데를 마다하지 않고 물고기와 자라는 깊은 물도 마다하지 않아 몸을 보존하니 깊고도 외진 곳을 마다하지 않는 것] 

-커졌다하니 말하자 커질 수록 숨어지내게 되는 법. 함거지수: 수레를 상자정도로 여길 힘센 짐승, 탄주지어:배를 삼킬 정도로 큰 물고기...칼과 검은 무서워 않아도 그물은 못 당하는 법, 아무리 큰 물고기도 제 물 떠나면 힘쓸 일 없는 법. 非道勿行이라고 내 길 아니면 깨끗이 버릴 줄 알아야죠 남들이 추킨다고 속으면 안됩니다. 

「且夫二子者,又何足以稱揚哉! 是其於辯也,將妄鑿垣牆而殖蓬蒿也. 簡髮而櫛,數米而炊,竊竊乎又何足以濟世哉! 擧賢則民相軋,任知則民相盜. 之數物者,不足以厚民. 民之於利甚勤,子有殺父,臣有殺君,正晝爲盜,日中穴牆. 吾語女,大亂之本,必生於堯舜之間,其末存乎千世之後. 千世之後,其必有人與人相食者也!」 

또 요순 두 사람은 칭찬에 어찌 합당하리! 분변 뿐이라 장차 담장을 허물고 쑥대밭이 될 뿐. 머리를 빗는데 머리카락을 세고 밥알을 세는 듯, 인색하고 곤궁하고 음침하니 세상을 다스림에 족한가! 현자를 받드니 사람들이 서로 삐걱거리며 안다는 사람에게 책임을 주니 백성이 서로 도둑질한다. 사물을 헤아리는 것이 사람들을 후덕하게하지 못하는 법. 사람이 이문을 깊이 따지면 자식이 애비를 죽이게 되고 신하가 임금을 죽이며 한낮에 도둑질하고 한낮에 담장을 뚫게 만든다. 내 네게 말하니 큰 분란의 기본은 요순시대에 생긴것이요. 그 폐해는 천대후까지 미치리. 천년이 지나면 사람들이 사람을 서로 잡아 먹으리] 

-요순이 해 놓은 일이 무어냐? 잘 구분하고 밝히 한다며 따지고 사람들 심기만 흩어놓았지... 정의니 인의니 예의니를 가르쳐 오히려 궤변이 나올 가능성을 열어 뒀으니 종래는 궤변이 득세하여 사람이 사람을 서로 죽이는 경우가 되리라.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신하가 왕을 죽이는 것들이 가능함은 자기 생각을 정당화 하는 근거만 생기면 그리 할 것이니... 자기 정당화, 제 논리에 혹하지말고 하늘소리에 순명하여야 한다는 것... 

이런 꼴을 우리는 이미 겪었지요. 공산당이 나찌가 논리로 제 아비를 반동으로 제 상전을 반동으로 몰아 죽인 예가 있지요. 저 살겠다고 왜놈 앞잡이 되어 제 하나 영달을 꾀하곤 결국 저도 죽고 남들 가슴에 못박는 짓 하는것이 인의예지라는 하급 논리에 매인 자들의 종말이지요.  

종교는 논리도 인의예지 아닙니다. 늘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그에 귀를 열어 놓는 자입니다. 그럴싸 한 입에 발린 말이 종교의 가르침 아닙니다. 내 자존심을 깎고 대신 진리에 귀를 여는 권면이지요. 

장자가 말하는 것은 그러니 판단 정지하자. 그리고 그저 지금 있는 것에나 잘 맞춰 살아가자는 불가지론 아니고, 노세노세 팔자론도 아닙니다. 늘 움직이고 늘 하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가자는 말입니다. 

수염기르고 도포입고 구름타고 다니자는 말 아닙니다. 생활 속의 진리를 살자는 말이지요. 


2. 

南榮趎蹴然正坐曰:「若趎之年者已長矣,將惡乎託業以及此言邪?」 
庚桑子曰:「全汝形,抱汝生无使汝思慮營營. 若此三年,則可以及此言矣.」 
南榮趎曰:「目之與形,吾不知其異也,而盲者不能自見.,耳之與形,吾不知其異也,而聲者不能自聞.,心之與形,吾不知其異也,而狂者不能自得. 形之與形亦辟矣,而物或間之邪,欲相求而不能相得? 今謂趎曰:'全汝形,抱汝生,勿使汝思慮營營.' 趎勉聞道耳矣!」 
庚桑子曰:「辭盡矣. 奔蜂不能化藿蠋,越鷄不能伏鵠卵,魯鷄固能矣. 鷄之與鷄,其德非不同也,有能與不能者,其才固有巨小也. 今吾才小,不足以化子. 子胡不南見老子!」 

남영주가 삼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이르길:[저처럼 나이가 든 사람은 어떤 일을 유의해야 대과없이 이 말의 경지에 이를 수 있나요?] 
경상자왈:[저 받은 꼴을 온전히 하시고 삶가운데서 생각과 염려가 많아지지 않도록 하세요. 이러길 3년이면 이런 경지에 이를겁니다] 

-깨친 삶을 살려면 간단합니다. 내 받은 꼴을 잘알고 쓸데없는 생각을 3년만 줄이면 됩니다. 

남영주 왈:[눈으로 보는 내 꼴을 내 보면 별 이상없으나, 맹인은 보지 못하고, 귀로 형을 들어도 그 이상을 못느끼나 소리를 스스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꼴을 따져도 그 이상을 모르니 저같은 허탄한 이는 스스로 깨달을 수 없군요. 형이 형에 갖혀 피하니 사물이 차이가 있어서인가요 서로 구함이 커서 깨닫지 못하나요? 제게 이르시길:'꼴을 온전하게, 삶을 다잡아 내 생각과 염려를 번다하게 하지 마라'하셨는데 제 힘써 진리에 대해 듣기원합니다] 경상자 왈:[분봉은 콩벌레 되지 못하고 월나라 닭이 백조의 알을 품지 못하나 노나라 닭은 가능합니다. 닭은 닭으로 그 덕이 다르지는 않으나 가능함과 불가능함은 그 재능에 크고작음이 있어서입니다. 난 재주가 없어 당신을 교화하지 못하니. 당신이 남으로가서 노자를 뵘이 어떨지요] 

-이미 뭔가를 안다하니 가르치기 더 어렵죠. 저 보기엔 잘 살아왔다는 강변입니다. 즉, 딱히 드러나는 흉 없으니 뭐가 문제냐? 거기다가 배운 건 있어서 말장난을 더하지요 이것 저것 옳다는 말 중 어느걸 따를까요 아님 내가 열심이 과해서 못 보는가요? 

묵은 닭은 그 고기가 질깁니다 제 고집 제 해오던 방식 저 나름 안다는 것 못버립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영계를 찾지요. 이미 뭔가 가득 들어있는데 새 것 들어갈 자리 있나요? 여적 가득 채운 것 뭔가 아니다 싶으면 얼른 비워낼 줄 모르고.. 제 것에 꿰어 맞추려 들지요. 유연함이 부족한거지요. 어디든 무엇에든 맞춰가지 못합니다. 

그리곤 슬쩍 눙치며 들어갑니다. '全汝形,抱汝生,勿使汝思慮營營'이 뭔 뜻입니까? 경상자가 말하지요 그리 배운 것에 자부심이 강하니 난 그릇이 안되니 내 스승 노자를 만나보라. 

南榮趎贏糧,七日七夜至老子之所. 
老子曰:「子自楚之所來乎?」 南榮趎曰:'唯.' 
老子曰:「子何與人偕來之衆也?」 南榮趎懼然顧其後. 
老子曰:「子不知吾所謂乎?」 
南榮趎俯而慙,仰而歎曰:「今者吾忘吾答,因失吾問.」 
老子曰:「何謂也?」 
南榮趎曰:「不知乎? 人謂我朱愚. 知乎? 反愁我軀. 不仁則害人,仁則反愁我身.,不義則傷彼,義則反愁我己. 我安逃此而可? 此三言者,趎之所患也,顧因楚而問之.」 
老子曰:「向吾見若眉睫之間,吾因以得汝矣,今汝又言而信之. 若規規然若喪父母,揭竿而求諸海也. 女亡人哉,惘惘乎! 汝欲反汝情性而无由入,可憐哉!」 

남영주가 식량을 모아 7일야를 걸려 노자 사는 곳에 이르렀다. 노자 왈:[넌 경상초에게서 오느냐?] 
답이:'예' 
노자 묻길:[넌 어째 뭇 군중과 함께 왔는가?] 남영주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노자 왈:[넌 내 말을 못알아 들었구나?] 
남영주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우러러 탄식하며 가로되:[전 지금 제 대답이 생각나지 않고 제 할 물음도 잊었읍니다] 
노자왈:[뭔 소리요?] 
남영주 왈:[지식이없으면? 사람들이 어리석다합니다. 앎이 있으면? 내 자신을 근심합니다. 어질지 않으면 사람을 해칠 것이요, 어질면 나를 근심할 것이며, 내가 의롭지않으면 남을 상할 것이며 의로우면 내 자신을 볶을겁니다, 내 이런 경지를 어찌 벗을까요? 이 세가지가 제게 병이됩니다 경상초 선생이 가보라해서 이리 왔읍니다] 

-노자의 첫 질문은 선문답이지요. "떼거리"로 더덕더덕 헤진옷 기운듯한 모습을 짚어내는 겁니다. 이미 나이 들었으니 제 고집 제 아는 것 못버리지요. 그러나 그 아는 것이란 이리저리 꿰어맞춘 남의 말들이지요. 제 생각은 없고 뭇 사람들의 생각만 들었으니... 성경에 군대라는 귀신든 이와 같지요. 저가 제 몸의 주인아니라 군대급 산만함에 싸인... 

그래도 이 정도면 진리 문턱에는 온 셈입니다. 자유하지 못해 그렇지.. '안다고하니 나만 괴롭고 모르고 넘어가자니 어리석단 소린 듣기 싫고 남을 해하자니 양심이 꺼리고 양심을 따르자니 속 복잡하고, 어진이로 살자니 까맣게 속은 문드러지고 그리 안살자니 흠이 두렵다' 설 깨친 이의 병이지요. 이것도 저것도 놓치기 싫은... 자유하고도 싶고 남들에게 흠잡히긴 싫고... 이중적인 마음이지요. 

노자왈:[이리 가까이 좀 오시오 내 자세히 보게 당신이 말하니 내 믿겠소. 마치 부모를 잃은 슬픔을 이기려듯 다잡고 있고 잣대 하나로 온 세상을 알려하네요. 참 급하시군요! 네 욕심이 네 본성에 반하니 들어오는 게 없지 가련하구먼!] 

-예의에 매여 제 감정에도 충실하지 못하고 그러나 그걸 놓치긴 싫어 진짜는 못잡는 가련함 

南榮趎請入就舍,召其所好,去其所惡,十日自愁,復見老子. 

남영주가 문하에 들어 좋은것을 따르고 악한 것을 버리며 10일을 근심하고 다시 노자를 만나니라. 

老子曰:「汝自酒濯,熟哉鬱鬱乎! 然而其中津津乎猶有惡也. 夫外韄者不可繁而捉,將內揵.,內韄者不可繆而捉,將外揵. 外內韄者,道德不能持,而況放道而行者乎!」 

노자 왈:[스스로 닦아 이젠 심오함이 원숙하오! 그러나 아직 악기가 남아있는 것 같소. 대저 외물에 사로잡힌 자는 번민을 닫지 못하니 장차 안에서 문제 될거요. 내 자신에 사로잡힌 자는 얽힌 속을 다잡지 못할 것이니 밖으로 문제가 생길 거외다. 안팎으로 사로잡힌 자는 도덕을 갖출 수 없으니 진리의 길을 가지 못하는 보통 사람이야!] 

-문제의 핵심이 뭔가요? 안팎으로 자기를 몰아세우니 힘들지요. 바깥에 치중하니 온갖 번민이 횡행하고, 자신을 곧추세우자니 쉽지않지요. 이미 뭔가가 나를 휘두르는 중인데... 

南榮趎曰:「里人有病,里人問之,病者能言其病,然其病病者,猶未病也. 若趎之聞大道,譬猶飮藥以加病也,趎願聞衛生之經而已矣.」 

남영주왈:[마을 사람이 병이나서 다른 이가 문병갔는데 환자가 그 병을 설명할 수 있으니 그 병을 앓는 환자는 병이 심한 것 아니라. 제가 큰 진리를 듣는데도 비유하자면 약을 마셔 오히려 병을 더하는 것 같으니 제 원하는 것은 그저 깨끗이나 하는 법이나 배웠으면 합니다] 

-섣부른 교만 또 꺼내지요 '그래도 지가 지 증상 알면 나름 똘똘한 거요 병 걸린 건 아니지 않나요' 똘똘하지요 자기 증상을 꿰뚫어 볼 정도면... 그러나 자유함이 없는데, 병이 나아야지요... 진리를 온전히 누리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 아직 멀었다는 겁니다. 아직 진리로 자유하지 못한데 뭔 이룸이 있나요? 

老子曰:「衛生之經,能抱一乎? 能勿失乎? 能无卜筮而知吉凶乎? 能止乎? 能已乎? 能舍諸人而求諸己乎? 能翛然乎? 能侗然乎? 能兒子乎? 兒子終日嗥而嗌不嗄,和之至也.,終日握而手不掜,共其德也.,終日視而目不瞚,偏不在外也. 行不知所之,居不知所爲,與物委蛇,而同其波. 是衛生之經已.」 

노자 이르길:[깨끗이 하는 법이라 능히 하나를 붙들고 놓치지 않을 자신 있소? 점술이 길흉화복을 알 수 있나? 그럼 그치게 할 수 있나 그리 만들 수 있나? 다른 사람을 버림으로 저 자신을 깨달을 수 있나? 잊을 수 있나 모른 척할 수 있나 아이처럼? 아이는 하루 종일을 울어도 목이 잠기지 않는데 그 이유는 (제 본성에)지극하기 때문이라. 종일 손을 움켜쥐고 있어도 손이 저리질 않는데 그건 덕과 함께 하기 때문이라 종일 눈도 깜짝않고 바라봐도 외물에 엮이질 않는 법. 뭘해야 할 지 모르는 그 자리에 있으니 그런거요 사물에 흔들리지 않는 까닭이요 뭘 할지 의도하는 바가 없어서요. 이게 깨끗이 하는 비방이요] 

-남의말에 혹하지 않을 자신 있소? 그저 어린아이처럼 유연하게 살 수 있나? 이미 맺은 인연 잘라낸다고 깨우침이 오나? 오히려 번민이 더커지지... 잘라내는 것이 깨침 아니요 늘 어린아이처럼 하나하나를 열고 배워가는 것 그게 깨친 이의 삶이요. 

슬프면 울고 화나면 내뱉고 그리 자기에 충실하면서... 꾹꾹 억누르는 건 자기사랑 아닙니다. 자기 학대지요 그러며 뭔가 이뤘다라는 말은 자기 기만이지요. 자기에게 솔직한 모습이 어린 아이요. 싫고 좋음이 의뭉스럽게 겉다르고 속다르지 않아야 어린 아이지요.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는 성경말씀은 나이어린 사람이 천국간다는 말 아니라 뭐 하나에도 선입견, 제 판단 들이대지 않는 천진난만함이, 그리고 뭐 하나든 하나님 주시는 것으로 알고 배우고 익히려는 겸허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南榮趎曰:「然則是至人之德已乎?」 
曰:「非也. 是乃所謂氷解凍釋者,能乎? 夫至人者,相與交食乎地而交樂乎天,不以人物利害相攖,不相與爲怪,不相與爲謀,不相與爲事,翛然而往,侗然而來. 是謂衛生之經已.」 
曰:「然則是至乎?」 
曰:「未也. 吾固告汝曰:'能兒子乎?' 兒子動不知所爲,行不知所之,身若槁木之枝而心若死灰. 若是者,禍亦不至,福亦不來. 禍福无有,惡有人災也!」 

남영주가 묻길:[그럼 이것이 깨친 이의 갖춘 덕입니까?] 
노자 왈:[아니요. 이는 소위 이제 막 얼음이 녹는 단계요 알겠소? 대저 깨친이는 땅에서 같이 먹고 마시면서도 하늘 즐거움을 누리는 자요. 사람이나 사물에 얽매여 해치는 것이 없지요 그런다고 기괴함도 같이하지 않으며 음모를 꾸미지도 않으며 같이 일하지도 않으며 그저 떨어져 행하며 잊으며 같이하죠. 이가 깨끗이하는 방도요]  
[그럼 이게 깨친겁니까?] 
답이:[아직이요. 내 말한 바있듯 "아이처럼 될 수 있소'라는 말처럼 아이들은 뭔 의도없이 움직이고, 목적없이 행하며 몸은 고목나무 가지처럼 마음은 죽은 재 모양입니다. 이리해야만 화가 끝까지 미치지 않고 복이 오지 않지요. 화복이 없으면 어찌 재난이 있겠소?] 

-진리를 사는 사람은 탈속한 사람 아니요 '땅에서 같이 먹고 마시면서도 하늘 즐거움을 누리는 자'입니다. 다만 뭔가 인위적인 짓 안하는 거지요. 그저 배우는 자세로 모든 걸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꼼수를 내거나 제 기분에 맞지않음을 빌미로 남을 해하고 내치는 것은 어린아이 아니지요. 

나를 없애고 모든 하나하나를 나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라는 마음으로 기꺼이 받는 사람 그가 깨친이 입니다. 아니 받는다 안받는다를 생각도 않는 이...


3.

 

宇泰定者,發乎天光. 發乎天光者,人見其人,物見其物. 人有修者,乃今有恒.,有恒者,人舍之天助之. 人之所舍,謂之天民.,天之所助,謂之天子.

 

하늘의 큰 진리를 아는 자는 하늘 빛을 발하니 그 하늘 빛으로 사람은 그 사람됨을 알게되고 만물은 제 자리를 지키게 되네. 수련된 이는 항여하니 항여함은 사람에 매이지 않고 하늘이 돕는다. 사람에 연연하지 않는 이는 일컬어 하늘 사람이라하고. 그를 돕는 것을 하늘이라 부른다.


4.

 

學者,學其所不能學也.,行者,行其所不能行也.,辯者,辯其所不能辯也. 知止乎其所不能知,至矣.,若有不卽是者,天鈞敗之.

 

배움이란 배우기 어려운 것을 배우려 함이요. 실천이란 실천하기 어려운 것을 실천하려는 것. 분별이란 구분되지 않는 그것을 분별하려함이다. 앎의 끝은 알지 못하는 것에 다다름이니 깨달음이라하고,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하늘의 고른 이치를 깨게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러지요 그저 내 인생 꾸릴 정도의 배움만 있으면 된다. 그게 구차한 자기 변명이어선 안되지요. 어떤 이는 그를 넘어 진리를 살게끔 된 사람도 있지요. 진정 배운다 함은 궁극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도둑질도 예술의 경지가 있듯...

 

실천하는 사람이란 흔들리는 사람 아니지요. 남들이 다 '그깟걸 뭐하러 하냐 어려운 걸...' 그리 말하는 그것을 몸에 익혀 행하려는 사람입니다.

 

그저 띄엄띄엄 아는 것으로 인생 미봉하는 사람과는 다르지요. 토막토막 끊어진 정신줄을 하나로 주욱 이어가는 자세가 필요하지요. 마치 중세교회의 모자이크 처럼 그리 조각조각이지만 질서를 갖추어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듯...

 

기왕 여기까지 왔으면 끝을 봐야지요. 기독교에 그런 말이 있읍니다. 천사와 마귀는 한 끗 차이라고... 천사란 하나님의 진리를 보좌하는 존재지요 그러나 자기 판단이 개입하면 마귀되는 법.



5.

 

備物以將形,藏不虞以生心,敬中以達彼,若是而萬惡至者,皆天也,而非人也,不足以滑成,不可內於靈臺. 靈臺者有持,而不知其所持,而不可持者也.

 

사물에 대비하여야 내 꼴갖춤이 되고 마음을 다스려 염려가 없어야 나라는 중심이 생기니 제 마음을 공경하여야 바깥 사물에 달관하게 된다 이리하여 모든 허물에 대해 그 끝을 알면 하늘에 이르니 사람의 것 아니다. 뭔가 부족하니 어지러워지고 마음에 중심이 가능하지 못하게 된다. 마음과 교통하는 자는 자기란 것을 갖는데 그게 뭔지 모르면서 유지할 수 없다.

 

-사물의 본질을 꿰고있어야 내 처신이 올바르고 내 마음에 염려나 근심이 없어야 남을 향한 마음이 열리고 그런 자신을 존중할 줄 알아야 바깥에게도 달관할 수 있다. 이런 정도로 모든 허물까지 그 끝간데까지 다다라야 하늘 뜻에 이르고 사람의 한계를 벗을수 있다 모자라면 혼란되고 정신 줄이 잡히지 않는 법이다. 정신 줄이 뭔가를 지탱한다 하나 그게 뭔지 모르면 뭘 잡고 있을것인가?

 

 敬中以達彼: 자기를 존경해야 외물에 달관한다는 말입니다. 말은 그럴싸하고 맞는 말인데 존경한다는 말이 뭔가요?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존경인가요? 그런 염려가 없어야 나라는 중심이 섭니다. 

 

不見其誠己而發,每發而不當,業入而不舍,每更爲失. 爲不善乎顯明之中者,人得而誅之.,爲不善乎幽闇之中者,鬼得而誅之. 明乎人,明乎鬼者,然後能獨行.

 

자기의 진실을 보지 못하고 뭔가 하면 그 하는 것 모두가 당당하지 못하며 업이 끊이질 않고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간다. 이런 최선(사물을 대비하고 자기를 존중하는)없는 이가 뭘 분별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사람에게 얻는 것은 형벌이며, 최선을 다하지 않으며 음습한 마음이면 귀신이 형벌하리라. 사람에게나 귀신에게나 떳떳히 된 연후 스스로 섬이 가능하리라. 

 

-자기 성실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앞에 당당하지 못하며 모든 것에서 실수가 나오기 마련 무엇보다 자기를 먼저 발견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노력없이 뭘 분별만 하면 사람들에게 원성을 사고, 홀로 있어도 이런 노력않는 상태로 있으면 귀신 눈에도 나는 법.

 

愼獨이란 말이 있지요. 진짜 선비라면 홀로 있어도 의관 정제하고 늘 사람들 앞에 있듯 하라는... 아무도 안 본다고 망가지는 사람은 언젠가는 남앞에서도 망가지는 법 사람은 밖 공부 안공부 두루 되야 합니다. 그래야 獨行 스스로 섬이 가능하죠. 밖공부 많이 했으면 이젠 안공부해야지요.

 

券內者,行乎无名.,券外者,志乎期費. 行乎无名者,唯庸有光.,志乎期費者,唯賈人也,人見其跂,猶之魁然. 與物窮者,物入焉.,與物且者,其身之不能容,焉能容人! 不能容人者无親,无親者盡人. 兵莫憯於志,鏌鎁爲下.,寇莫大於陰陽,无所逃於天地之間. 非陰陽賊之,心則使之也.

 

자신을 중시하는 자는 행함에도 이름을 내지 않고, 바깥을 중시하는 자는 뜻부터가 뭔가 이득을 바란다. 행함에 이름내지 않는 자는 떳떳하여 빛이 나지만 이문을 좇는 이는 오직 장사치나 한가지라. 사람들이 뻔히 그 하는 짓을 아는데도 제가 우두머리인 줄 처신한다. 사물의 궁극을 구하면 사물이 내 안에 들어오며 사물에 끌려가는 이는 제 몸뚱이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사람을 다루지도 못한다! 사람을 다룰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없고 친구가 없는 이는 다 된 인간이다. 잔혹한 병사는 막야(명검)아래 있고, 음양의 이치를 도적질 함이니 천지지간 어디든 숨을 곳이 없다. 음양의 이치가 도적질하도록 하는 것 아니고 마음이 하는 짓이다.

 

-천박한 사람들의 병이 그겁니다. "내 하는 짓, 아는 것 다른 이들은 모를거라는 착각"... 참 중병이지요. 하늘이 알고 내가 알고 땅이 알면 다 아는 겁니다. 남들이 그저 '오냐 너도 인간이니...' 그러며 넘어가 줌을 모르고 잘나서 그런 줄 알고 기고만장 까부는 병 넌즈시 일러줘도 외려 분만 내지요.

 

그리 바깥에 매인 사람은 말에서부터 일관되지 못하지요. 뜻이 곧질 못하니... 제 몸도 제 것으로 다스리지 못하니... 남들 눈치봐서 이리저리 휩쓸려 살지요 아님 반대로 되지도 않을 똥고집이 자기 신념인 양 내세우고... 다른 이들과 같이 사는 법을 모르니 외롭고 볼 짱 다 본 사람으로 전락하지요.

 

사람들은 그리 말하지요 세상이 시계추 마냥 선과 악사이를 오가는데 나더러 어쩌라구... 그건 핑계지요. 사람들의 무지 뒤로 숨는 겁니다. 그 시계추 같은 음양을 빌미로 자기의 구차함을 숨겨선 진리 추구하는 태도 아닙니다. 음양의 오고가는 조화속이 일을 그르치는 것 아니고 그 오고감에 안주하는 내 마음이 병의 근원입니다.   



6.

 

道通. 其分也成也,其成也毁也. 所惡乎分者,其分也以備.,所以惡乎備者,其有以備. 故出而不反,見其鬼.,出而得,是謂得死. 滅而有實,鬼之一也. 以有形者象无形者而定矣.

 

사물의 이치를 알아 진리를 안다. 사물의 이치를 나누어 보면 진리를 이루고 깨달음이 이뤄지면 파괴된다는 것이 진리다. 구별함이란 나쁜 것, 분변함으로 사물에 대비함이라. 그러니 나쁘다라는 말은 준비하는 것을 말하며 뭔가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가기만하지 돌아오지 않음은 그 사악함만 보는 것, 내 보내며 뭔가를 얻음은 일컬어 죽음을 얻는것. 제 본성은 죽었으나 실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귀신이 된 것, 꼴을 가진 이는 꼴없음을 본받아야 안정을 이루게 된다.

 

-진리를 깨치려면 먼저는 분변함으로 사물을 정확히 보되 나중에 그 분변의 틀을 벗고 전체를 봐야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저 분변함만 하면 사물에 매여만 있는 꼴이니 진리를 누릴 내 본성은 죽고 사물에 대해 반응하는 껍데기만 남은 것... 진리와 교통할 정신이 죽었다면 그건 헛깨비요 살아도 산 것 아니다. 몸은 살아 있으되 제 정신은 없으니... 몸뚱이를 가졌으면 그 정신을 닮아 몸뚱이도 하나되야 한다. 

 

어떤 이는 사물에 대해서 대응할 처신을 잘알아 지혜를 이룬 듯 보인다. 사물과 그에 반응하며 사는 인간을 동시에 아우르는 진리를 모르고 그저 세상에 잘 대꾸함만 아는 것은 헛 껍데기만 사는 것이다. 몸은 실재해도 그 신령이 없는 자극에 반응만 하는 산 송장과 같다. 

 

出无本,入无竅. 有實而无乎處,有長而无乎本剽,有所出而無竅者有實. 有實而无乎處者,宇也. 有長而无本剽者,宙也. 有乎生,有乎死,有乎出,有乎入,入出而无見其形,是謂天門. 天門者,无有也,萬物出乎无有. 有不能以有爲有,必出乎无有,而无有一无有. 聖人藏乎是.

 

본디 생의 나오는 근본도 없고 그 돌아가는 곳도 없다. 실재하니 자리란 게 따로없다, 오래 됐으나 시작점이 없고 그저 났으니 무궁함이 실재이다. 실재는 있으나 처할 자리 없다함은 공간적인 우주요. 장구하여 시작점이 없다함은 시간적인 우주라. 생사가 있고 들고 남이 있다는데 그 들고 남에 그 모습이 보이나? 그 들고나는 문을 하늘문이라 한다. 하늘문이란 말 자체가 의미없는것 온갖 만물이 다 나오니 한마디로 어떻다 정할 수 없는것이다. 불가능한 줄 아니 가능하다는 말도 있고 반드시 나온다하니 없는 것 그러니 없음이란 없음이요. 성인이 감추고 있는것이 이것이라.

 

-장자의 인식에서 중요한 특징은 천하의 돌아가는 이치를 설명하는 인과론적인 사고가 문제로 그를 만들어내는 기독교적 직선적 시간관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그저 이 세계란 뭔 원인이나 결말이 있는 것 아니고 다만 이 세계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나'가 문제라는 것... 그 반응에 자신의 감정으로 할 것인가? 아님 이론으로 반응할 것인가?의 문제가 유묵의 맹점으로 본다는 것이다. 나라는 것도 사실상 보면 시공적인 현재에 살 뿐이다.

 

즉, 세상은 바로 나에게 주어진 하나의 場이며 동시에 남들에게도 주어진 場이라. 그러니 내 눈에 보면 내 것이어야 하는데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아니요 동시에 남들 것도 아니니 중요한 것은 그런 '관계'에 예민함이 진리를 사는 자세라는 것... 

 

장자의 말로 돌아가면 우리에게 주어진 장에서의  “생명의 도” 혹은 “혼돈”에 대해 공간적인 이해인 理性으로 규정하려하면 닫힌 공간에 갇혀 시간적인 생명이 죽어버린다는 뜻입니다.


환언하면 장자가 말한 요지는 살아있음은 운동이며 그 운동은 공간의 운동 즉 시간이기 때문에, 공간적인 인식 기관인 감각과 이성만으로는 생명현상을 완전하게 인식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감각 이성 경험 영감 등 열린 생명의 직관만이 도를 인식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분명한 것은 장자의 출현은 당대 백가쟁명의 폐해를 전제로 하기에 유묵의 사고를 꼬집는 대립각의 한 축으로 봐야한다. 그러므로 유묵 vs 노장 의 대립구도는 기실은 진리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각축으로 볼 것이며 그러한 각축은 모든 종교안에서 비일비재 일어나는 현상이다.

 

유묵을 절대시 할 일 없듯 노장을 절대시 하지 말고 그저 그들의 각축을 보며 기독교 안에서의 진리라는 미명으로 벌어지는 각축을 직시하면 되리라... 


7.

古之人,其知有所至矣. 惡乎至? 有以爲未始有物者,至矣,盡矣,弗可以加矣. 其次以爲有物矣,將以生爲喪也,以死爲反也,是以分已. 其次曰始无有,旣而有生,生俄而死.,以无有爲首,以生爲體,以死爲尻,孰知有无死生之一守者,吾與之爲友. 是三者雖異,公族也. 昭景也,著戴也,甲氏也,著封也,非一也.


옛사람이 있어 그 지혜가 지극한데 이르렀다. 지극함이 뭔가? 뭘 함에 만물을 구별함 이전에 있는 자라야 지극한 것이요 다함이요 더 이상 더할 것 없는 자라. 그 다음이 만물을 구별하는 사람이라 죽음으로나 돌아설 수 있으니 그게 그의 분수라. 그 다음이 무유를 말하는 자라 살아가다가 죽는자라. 무유를 으뜸으로 삼으며 생을 몸으로 살아내고 죽음이란 하챦아진 사람 누가 그런 생사의 하나됨을 지켜냄이 중요함을 안다면 난 그와 벗이 되리라. 이 세 경우는 달라보여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라. 소씨니 경씨니 나뉨은 모여사니 그리 되고 갑씨니 함은 봉토에 따름이니 하나되지 못하는 것. 


-깨달음이란 본디 모습은 무차별이며, 동시에 잘 가려 봄이며, 무유(있음에 매여 시비를 하는 것 아닌)로 중심잡음이다. 즉, 사람을 나눔에 있어 모여사는 모습, 그 사는 지역으로 사람이 구분하나 각 사람마다의 차이가 있는 법. 그러나 그 획일성과 개인의 개별성으로 사람을 판단할 것 아니라 생을 사랑하고 살아내며 죽음을 초월한 이가 있다면 그가 진리를 살 줄 아는 도반이지요...


有生,堷也,披然曰移是. 嘗言移是,非所言也. 雖然,不可知者也. 臘者之有膍胲,可散而不可散也.,觀室者周於寢廟,又適其偃焉,爲是擧移是.

請常言移是. 是以生爲本,以知爲師,因以乘是非.,果有名實,因以己爲質,使人以爲己節,因以死償節. 若然者,以用爲知,以不用爲愚,以徹爲名,以窮爲辱. 移是,今之人也,是蜩與學鳩同於同也.


살아있는 것은 묻히는 법 풀어헤치니 이리 옮겨지는 것. 옮김이란 것을 알자면 말로서는 되지 않는다. 그러니 알 수 없지. 납기 제사 제물은 내장과 발톱까지 제물로 쓰는데, 나눠내도 되지만 나눠서는 안되는 것(온전한 제물을 훼손하는 것) 집을 구경하는 사람이 침실과 사당을 보지만 화장실까지 봐야 적절한 것 그래야 선악을 고루 볼 수 있다.

보통하는 말로 이 옮김을 말하면 지금 삶을 본으로 하고 지금 아는 걸 스승삼아 그로 시비를 가리는 것, 명분과 실리의 구별이 이로인해 생겨 자기란 것이 되니 그걸 기질이라하며 사람을 부리려하니 그 절차가 죽음으로 보답되리라. 이런 사람은 소용을 앎이 지혜요 소용안닿는 것을 어리석음이라하며 다스림을 명예라하고 궁핍함을 치욕이라 한다. 이런 옮겨감이 당대 사람들이니 매미가 비둘기를 알고 흉내내며 일부 같은 걸 전부 같다라 하는 격이다.


-우리는 뭐든 좋은 것(?)을 택함이 옳다라 알지만 집을 보아도 좋은 것만 보다보면 정작 필요한 것이 걸림돌이 되는 법. 뭘 판단하기 전에 온전히 좋은 것 뿐 아니라 더럽다는 곳까지 전부 봐야하는 법. 이를 풀어 설명하면 항구한 진리가 아닌 당장의 삶으로 지식으로는 자신에게나 남에게 강요하기 십상이다.


그저 소용닿으면, 맘닿으면 진리요 아니면 진리 아니다라는 말하는 자는 남 위에 올라타기 즐기고 검소함을 외면한다. 이런 것을 매미나 비둘기가 날 수 있으니 같다고 같은 것이라는 것 만치나 희한한 왜곡이다. 


역으로 이해하면 공중에 날아다닌다고 곤충인 매미가 조류인 비둘기가 같은 것이라는 궤변으로 '비슷하니 진리다' 하면 안된다. 참새나 매미가 날개 짓한다고 붕새와 격이 같은가?


소용에 따라 선별함이 언뜻보면 명쾌하지만 그 명쾌함이 진리의 본성 아니다. 진리란 양날의 칼과 같아 그 쓰는 사람에 따라 천양지차를 보이고, 소위의 하늘에 드리는 제물도 깨끗한 부분만이 아닌 전체 더러운 내장이나 발굽까지 갖춘 온전함임을 모르나...


하나님은 등심만 따로 떼어 제사 지내라 한 적 없고... 온전히 다 드리면 냄새로 흠향한다 하셨으니... 고깃 점 떼어 먹는 것 아니고 그 삶의 가치를 본다는 말....

더러운 걸 피하고 꺼리낌은 사람사는 모습이긴 하지만 그러면서 진리까지 시비를 가리고 제 판단으로 취사선택함은 잘못이다. 


8.

 

蹍市人之足,則辭以放鷔,兄則以嫗,大親則已矣. 故曰,至禮有不人,至義不物,至知不謀,至仁無親,至信辟金.

 

저자거리서 남의 발을 밟으면 즉시 사과하여 흉함 일을 떨쳐내나, 형이면 편하게 대하고, 아주 친하면 그저 지나간다. 그래서 이르길 지극한 예의는 사람을 가리지 않음에 있고, 지극한 옳음은 물건에 달린 것 아니요, 지극한 지혜는 음모하지 않으며 지극한 인은 딱히 친함이 없고 지극한 신뢰는 금전문제를 피한다.

 

-우리는 예의를 행함에 친소를 따진다. 예를 차리는 관계라면 상대를 믿지 못하는 것... 잘 알고 친하면 예라는 것이 중요치 않으며, 올바름이 뭘 행하거나 무언가 사물에 기준하는 것 아니라 자기 맘을 옳게 가짐이며 지극한 어짋은 굳이 친소(親疎)를 두지않고 모든 것에 진리의 입장에서 대하는 것이며, 지극한 지혜는 저 안다고 모르는 자를 농단하거나, 뒷구멍으로 뭘 도모함아니다 그것은 지혜로움이 아니라 꾀일 뿐, 지극한 신뢰는 금전이라는 외물을 거치지 않고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예를 행함에도 계산 속을 가짐을 본다. 인간의 예란 이와같은 것... 예를 잘차린다는 말은 외려 깊은 신뢰가 없는 것... 남을 믿지 못하고 저만 꾸미고 생각하는 것... 어린 아이가 아무나에게 웃고 장난함은 예가 없어서, 예의를 몰라서 아니라 그 안의 믿음이 큰 탓이다.

 

옳음, 정의는 바깥 사물이 결정하는 것 아니라 내 자신이 옳음을 추구함이 지극한 옳음을 사는 태도이다. 호랑이가 사슴을 찢는다고 호랑이는 틀리고 사슴은 옳은가? 그것은 내 감정의 개입일 뿐... 호랑이에게도 배고플 때 아니면 살생을 않는 의가 있음은 모르는 가 아님 외면하는가? 이런 일도양단의 생각이 외려 참 올바름을 가리는 걸 모르나?

 

어진 이란 누구에게나 잘 대하는 사람 아니라 누구에게나 진리로 대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하는 것은 누구나 한다. 역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꾸중하는 것은 아무나 못한다. 사랑이란 감정으로 남에게 잘하는 것 아니라 진리의 눈으로 잘 잘못을 가려 대할 줄 알아야 진짜 어진 이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라도 옳은 것에는 기꺼이 박수할 줄 아는 이가 어진 이요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그른 것을 그르다 할 줄 알아야 어진 이다.

 

지혜를 깨달은 자는 자기 꾀를 과신하고 함부로 쓰는 자 아니라 그 지혜를 씀에 어려워하고 늘 "하나님이 이 자리 이 경우를 당하시면 어쩌실까"를 고민하는 사람이 지혜의 지극함을 깨달은 자다. 자기 꾀로 뒷 전에서 음모를 꾸미는 자는 일단은 지혜로운 자 아니라 사특한 마귀와 같은 사람이다. 

 

신뢰란 돈으로 살 수 없고, 신뢰란 무엇을 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 아니다. 신뢰란 그저 같이 죽을 고생을 견뎌냄으로 생겨난다. 즉 두 사람 앞의 고난은 신뢰를 쌓을 좋은 기회인 것... 그를 모르고 고통을 가져왔다고 상대를 비난하거나 고난을 피하려고만 하는 자는 신뢰를 업수이 여기는 자이다.     



8.

 

蹍市人之足,則辭以放鷔,兄則以嫗,大親則已矣. 故曰,至禮有不人,至義不物,至知不謀,至仁無親,至信辟金.

 

저자거리서 남의 발을 밟으면 즉시 사과하여 흉함 일을 떨쳐내나, 형이면 편하게 대하고, 아주 친하면 그저 지나간다. 그래서 이르길 지극한 예의는 사람을 가리지 않음에 있고, 지극한 옳음은 물건에 달린 것 아니요, 지극한 지혜는 음모하지 않으며 지극한 인은 딱히 친함이 없고 지극한 신뢰는 금전문제를 피한다.

 

-우리는 예의를 행함에 친소를 따진다. 예를 차리는 관계라면 상대를 믿지 못하는 것... 잘 알고 친하면 예라는 것이 중요치 않으며, 올바름이 뭘 행하거나 무언가 사물에 기준하는 것 아니라 자기 맘을 옳게 가짐이며 지극한 어짋은 굳이 친소(親疎)를 두지않고 모든 것에 진리의 입장에서 대하는 것이며, 지극한 지혜는 저 안다고 모르는 자를 농단하거나, 뒷구멍으로 뭘 도모함아니다 그것은 지혜로움이 아니라 꾀일 뿐, 지극한 신뢰는 금전이라는 외물을 거치지 않고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예를 행함에도 계산 속을 가짐을 본다. 인간의 예란 이와같은 것... 예를 잘차린다는 말은 외려 깊은 신뢰가 없는 것... 남을 믿지 못하고 저만 꾸미고 생각하는 것... 어린 아이가 아무나에게 웃고 장난함은 예가 없어서, 예의를 몰라서 아니라 그 안의 믿음이 큰 탓이다.

 

옳음, 정의는 바깥 사물이 결정하는 것 아니라 내 자신이 옳음을 추구함이 지극한 옳음을 사는 태도이다. 호랑이가 사슴을 찢는다고 호랑이는 틀리고 사슴은 옳은가? 그것은 내 감정의 개입일 뿐... 호랑이에게도 배고플 때 아니면 살생을 않는 의가 있음은 모르는 가 아님 외면하는가? 이런 일도양단의 생각이 외려 참 올바름을 가리는 걸 모르나?

 

어진 이란 누구에게나 잘 대하는 사람 아니라 누구에게나 진리로 대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하는 것은 누구나 한다. 역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꾸중하는 것은 아무나 못한다. 사랑이란 감정으로 남에게 잘하는 것 아니라 진리의 눈으로 잘 잘못을 가려 대할 줄 알아야 진짜 어진 이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라도 옳은 것에는 기꺼이 박수할 줄 아는 이가 어진 이요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그른 것을 그르다 할 줄 알아야 어진 이다.

 

지혜를 깨달은 자는 자기 꾀를 과신하고 함부로 쓰는 자 아니라 그 지혜를 씀에 어려워하고 늘 "하나님이 이 자리 이 경우를 당하시면 어쩌실까"를 고민하는 사람이 지혜의 지극함을 깨달은 자다. 자기 꾀로 뒷 전에서 음모를 꾸미는 자는 일단은 지혜로운 자 아니라 사특한 마귀와 같은 사람이다. 

 

신뢰란 돈으로 살 수 없고, 신뢰란 무엇을 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 아니다. 신뢰란 그저 같이 죽을 고생을 견뎌냄으로 생겨난다. 즉 두 사람 앞의 고난은 신뢰를 쌓을 좋은 기회인 것... 그를 모르고 고통을 가져왔다고 상대를 비난하거나 고난을 피하려고만 하는 자는 신뢰를 업수이 여기는 자이다.     


10.


羿工乎中微而拙乎使人無己譽. 聖人工乎天而拙乎人. 夫工乎天而俍乎人者,唯全人能之. 唯蟲能蟲,唯蟲能天. 全人惡天? 惡人之天, 而況吾天乎人乎!


예공이란 활 잘 쏘는 이는 작은 것을 잘 맞추었지만 사람들의 칭찬을 버거워 했다. 성인은 하늘 일에 애쓰니 사람들의 일에는 서툴다. 대저 하늘 일을 애쓰며 사람의 일에도 훌륭함은 오직 온전한 사람 만이 가능한 것. 오직 벌레가 벌레일 때 벌레로서 하늘 주신 일을 감당한다 말한다. 그럼 이 온전한 사람은 하늘 법을 거스리는가? 아니다 사람들이 하늘 법이라는 것을 싫어하고 거스리는 것 하물며 우리가 하늘이라 말하는 것은 기실 사람의 판단임에랴!


-된 사람은 칭찬에 좌우되지 않고 오히려 그 자리를 거북스러워하지요. 응당 해야 할 일 하고 받는 칭찬은 칭찬이 아니기에... 

역으로 칭찬을 즐기는 사람은 남의 이목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진실한 사람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성인이란게 보면 하늘 일에는 밝으나 사람 섞여 사는 일에는 어눌한 사람들을 말한다 생각하는데 온전한 사람이란 그 둘 다 잘 해내는 사람이다. 그러니 사람으로 났으니 사람 일에만 능하면 되나? 온전한 이가 본디 하늘 도리를 거스르는 것인가? 아니다 그저 사람들이 "사람으로 났으니 그 만치만.." 말하는 그 사람이 하늘 도리를 거스리는 것...


사람에게 예니 의니 인이니가 필요겠는가? 짐승처럼 벌레처럼 죽고 죽이며 다투며 살면될 것... 그것이 우리 살아야 할 진리인가?


그러나 사람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에 진리를 나눠 살도록 부름 받았기에 그 부어진 삶을 온전히 살아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요... 이것이 진정한 자기 사랑이요 인생을 감사하는 것... 

예니 의니 인이니 따짐은 기실 이런 진리의 삶을 가로막는 장애들을 밝히려는 노력인데 그것에 천착하여 그와 상치되는 것은 진리 아니라하는 아집을 꼬집는 것...


장자의 사상은 세상은 헛되도다라는 염세주의도 날개달고 구름타고 장수하자는 신비주의 아니요. 운명론적으로 생을 감내하자는 팔자론도 아닌 진정 제 받은 삶을 사랑하는 애정이다. 

유교가 말하는 5륜이란 그런 삶을 사는 최소한의 선이니 그를 넘어 그 뒤의 본질을 보자는 권고이다.


굳이 말하면 장자는 유교의 맹점을 보완하자는 글.... 

소위 허례허식을 이겨내자는 글...


11.

 

一雀適羿,羿必得之,威也.,以天下爲之籠,則雀無所逃. 是故湯以胞人籠伊尹,秦穆公以五羊之皮籠百里奚. 是故非以其所好籠之而可得者,無有也.

 

한마리 참새라도 예를 만나면 예가 반드시 그를 잡을 것이니 두려울 것이다. 천하를 조롱 삼으면 참새가 도망칠 곳이 없지않나. 탕왕은 이윤을 포인을 써서 붙잡았고 진 나라 목공은 다섯장의 양피로 백리해를 붙들어 두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으로 미끼삼지 않고 얻음은 무유다.

 

-좋아하는 것으로 미끼삼지 않고 얻음은 무유라는 말은 뭔 대가가 아닌 참됨으로 사람을 얻어야 한다는 말.



12.

 

介者侈畵,外非譽也.,胥靡登高而不懼,遺死生也. 夫復謵不餽而忘人,忘人,因以爲天人矣. 故敬之而不喜,侮之而不怒者,唯同乎天和者爲然. 出怒不怒,則怒出於不怒矣.,出爲无爲,則爲出於无爲矣. 欲靜則平氣,欲神則順心,有爲也欲當,則緣於不得已,不得已之類,聖人之道.

 

발꿈치 잘리는 형벌을 받은 이가 겉으로 근심없는 것은 밖으로 명예를 구하지 않음이라. 죄수가 높은 곳에 올라도 겁을 내지 않음은 생사를 이미 버린 탓이다. 반복하여 헛것에 치중하기를 버리는 공부하면 사람을 잊게된다. 사람을 잊음은 그로 하늘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고로 존경받아도 기쁘지 않으며, 모욕당해도 노하지 않음은 하늘과 합한 이와 같아서 그리되는 것. 화나도 화를 발하지 않음은 화가 화 아닌 것이 되기 때문. 발하되 뭐가 없으면 발하되 아무 것도 안한 것. 순정하기 원하면 기운을 평활히 다스려라 정신이 바르려면 마음을 순히하라 뭔가를 하면 당당하기 원하니 그러려면 인연에 따라 부득이할 경우만 그리하라 부득이하여 함은 성인의 도리이다.

 

-발꿈치 잘리는 형벌을 받은 이가 당당하게 삶은 그가 바깥 영화를 마음에서 비워낸 것이라, 죄수가 높고 위험한 지경에 서도 겁이 없음은 이미 생이란 것에 미련을 버렸기 때문...

 

귀신을 섬기는 짓(헛 짓:허상을 꾸며 이르는)을 버리는 훈련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고민하는 문제를 잊게된다. 그를 버림으로 하늘사람에 합하기 때문이다. 하늘사람이란 명예나 분노를 잃은 사람 아니라 저 하는 일이 응당 할 일이기에 겸허해지며 사람들이 그러지 못함을 아량으로 이해하기에 분을 발하지 않게 되는 것... 

 

분을 드러내지 않으면 분이 없는 것이라 사람들은 믿는다 당장의 분을 삭이면 그도 잠깐임을 알게된다. 기운을 평활히 다스리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마음에 따르면 정신이 곧아진다.

 

우리는 뭔가 함에 있어 그 당위성을 구하려 한다. 그래서 이리저리 말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그리하지 말고 일이 되어감을 보고 정히 나서야 할 자리에서는 물러서지 말고 나서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런 경우를 본다 참고 넘어가면 사람이 물렁한 줄 알고 오히려 되치는 것을... 그 조차에 아무 말 않음은 오히려 진리를 곡해하게 하니 진리를 사는 것 아니다. 할 말은 부득이 할 경우라며 해야하는 법... 그래야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게 된다.

 

장자의 생각은 그저 세상과 절연함 아니라 헛 짓거리를 피하여 진리에 따르는 삶을 살자는 것...

 

뭐든 참음이 진리공부 아니고 잘 말하고 소통함 배움이 진리 공부다...혀 뽑고 눈 뽑고 귀막으면 깨우치나? 그리 병신됨이 깨우침이라면 안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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