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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남화경

田子方

1.

 

田子方侍坐於魏文侯,數稱谿工.

 

전자방이 위나라 문후와 함게 자리했는데 누차 계공의 얘기를 하더라.

 

文侯曰:「谿工,子之師邪?」

 

문후가 묻길:[계공이 당신의 스승인가요?]

 

子方曰:「非也,无擇之里人也.,稱道數當,故无擇稱之.」

 

자방이 이르길:[아니요. 그냥 동네 사람이지요. 도리가 합당하니 그저 얘기하는 겁니다]

 

文侯曰:「然則子无師邪?」

 

문후 왈:[그럼 스승이 따로 없으신가요?]

 

子方曰:「有.」

 

자방이 말하길:[있지요]

 

曰:「子之師誰邪?」

 

묻길:[스승이 누구신데요?]

 

子方曰:「東郭順子.」

 

자방 왈: [동곽의 순자입니다]

 

文侯曰:「然則夫子何故未嘗稱之?」

 

문후 묻길:[그럼 왜 그대는 스승에 대해 아무 말도 안합니까?]

 

子方曰:「其爲人也眞,人貌而天虛,緣而葆眞,淸而容物. 物無道,正容以悟之,使人之意也消. 无擇何足以稱之!」

 

자방 왈:[그 사람됨이 진실하고, 사는 모습이 하늘의 비임과 같고 인연을 진실히 쌓으며 맑아서 만물을 포용하지요. 만물이 무도함에도 안색을 바로하여 깨달으며 사람의 생각을 잘라내지요. 그러니 뭐라 칭할 말을 고를 수 없지요.]

 

-일단 남을 가르침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느낄 수있는 것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만약 문후가 직접 동곽 순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 그러겠지요. 그런 사람은 인간세엔 없다고... 즉, 전자방은 문후가 들을 귀 있는 만큼의 예를 들어준거지요. 

 

지극한 진리를 그저 던져준다고 덥석 받아들 그릇이 몇이나 될까요? 그러니 전하는 자는 그저 그릇에 맞추어 전할 따름이지요.

 

지극한 진리를 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허약한 우리의 자기 위로요 합리화 일 뿐.... 

 

子方出,文侯儻然終日不言,召前立臣而語之曰:「遠矣,全德之君子! 始吾以聖知之言仁義之行爲至矣,吾聞子方之師,吾形解而不欲動,口鉗而不欲言. 吾所學者直土梗耳,夫魏眞爲我累耳!」

 

자방이 나가고 난후 문후가 갑자기 말없이 종일 앉았더라, 신하를 불러 말하길:[멀고도 멀구나 온전히 덕을 가진 군자되기란! 처음에 난 성인과 지혜자의 가르침과 인의를 따름이 깨달음인 줄 알았더니 내 자방의 스승 얘기를 들으니 내 그간의 몸닦음이 허물어져 더욕구도 없고 입이 다물어저 뭔 말을 할 수 없구나. 내 여적 공부한 것은 맨바닥의 병폐들이니 대저 위나라에서 진리란 것은 내게 하나의 업보나 같구나.

 

-문후 역시 난 사람이나... 스스로 고백하거니와 그저 성인이나 지혜자의 말을 기억하고 알 따름이지 그저 하늘 사람으로 살지는 못하는 거지요. 세상 것 많이 안다고 진리를 아는 것 아닙니다. 아는 것을 살아내야지요.

 

하늘 사람은 사람됨이 진실함에서 부터 시작하고, 작은 인연도 귀히 진실되게 만나며, 청아하여 그저 모든 걸 포용하지요. 만물에 진리가 없다고 하지않고 바로 보고 깨달으려하며 사람들의 의지를 지워내지요. 다만 알만한 사람이라면 전할 뿐...

 

계공은 눈에 뵈는 문후의 스승감이요 동곽 순자는 전자방 같은 이의 스승이지요. 전자방은 현인 중 하나요... 눈이 떠야 스승도 만나지요.

 

진리는 들으려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줄 아는 겸허한 이에게나 주어지는 거지요. 


2.

溫伯雪子適齊,舍於魯. 魯人有請見之者,溫伯雪子曰.「不可. 吾聞中國之君子,明乎禮義而陋於知人心,吾不欲見也.」


온백설자가 제나라로 가던 중 노나라에 머물게 되었다. 노나라 사람들이 뵙기를 청하나 온백설자 이르길:[안된다. 내 듣기론 중원의 깨친 사람들이 예의는 바르나 사람의 마음을 읽는데는 지지리 못나다라 들었다. 난 보고싶지 않다] 


-예의가 바르고 선이 바르다고 도를 깨친 것인가요? 사람의 마음을 읽고 서로의 마음을 세울 대화가 불가하면 아무나 만날 일 없지요.


至於齊,反舍於魯,是人也又請見. 溫伯雪子曰:「往也蘄見我,今也又蘄見我. 是必有以振我也.」


제 나라에 갔다가 다시 노나라에 머무는데 이 사람이 다시 만나길 청하였다. 온백설자 이르길:[갈 때도 만나길 청하더니 이제 또 만나자 하는구나. 이는 반드시 뭔가 나에게 도움이 있으리라]


-그래도 사람을 귀히 여기는 태도지요. 하다못해 이웃집 짓는 개소리에도 귀 기울이려는 깨친 이의 자세를 보여주지요. 이게 하나님 사람 사는 방식입니다. 작은 것 하나에도 귀 기울이려는 마음...

만나보니 그 타령일 줄 뻔히 알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이를 통해 뭔가 원하시는 것이 있으리라 믿기에... 미련이 남아서 아니요 그저 하나님 마음으로 하는 거죠.


出而見客,入而歎. 明日見客,又入而歎. 其僕曰:「每見之客也,必入而歎,何耶?」


나아가 객을 만나곤 돌아와 탄식하였다. 다음날 다시 만나고 또 탄식하였다. 그 노복이 말하길:[매 번 손님을 만나곤 들어오면 탄식하시니 왜지요?]


曰:「吾固告子矣:"中國之民,明乎禮義而陋乎知人心." 昔之見我者,進退一成規一成矩,從容一若龍一若虎,其諫我也似子,其道我也似父,是以歎也.」


답하길:[내 이리 말한 바있다:"중원사람은 예의에는 밝으나 사람 마음을 읽지 못한다"고... 어제 만난 이는 들고 나섬이 발라서 용같고 호랑이 같더라, 뭔가 간할 때는 자식같이 그리고 뭔가 가르쳐줄 땐 아비같으니 탄식한 것이요]


-배우긴 제대로 배웠으되 인간미가 없고 제 스스로 우쭐함에 만족하는 것을 본 게지요. 제 멋에 겨워 늘어진 능수버들도 아니고... 깨우친 삶은 하나님=절대자 앞에 마주 서는 겁니다. 

깎아놓은 밤같은 이도 있지요마는 진리를 산다는 것은 남에게 보이려 사는 거 아닙니다. 다윗과 같은 이는 오히려 무지한 양치기요 하는 짓도 못 배운 테가 절절 나지만 다른 이들을 보는 것 아니라 하나님께 선 자기를 보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그를 메시아의 원형으로 불리우기까지 사랑하시지요. 


仲尼見之而不言. 子路曰:「吾子欲見溫伯雪子久矣,見之而不言,何邪?」


공자가 그런 행동을 본 후에 말이 없더라. 자로가 묻길:[오래동안 온백설자를 만나기 원하시더니 만나곤 말이 없으십니다 왜죠?]


仲尼曰:「若夫人者,目擊而道存矣,亦不可以容聲矣.」


공자 이르길:[그런 이는 보기만 해도 도가 있으니 모양이나 소리를 낼 필요가 없

지]


-그러지요 더 담을 것 없는 그릇에 미련 둘 필요 있나요. 공자와 예를 겨뤄보려는용심... 그저 면전에 와 저 나름으로 지혜, 진리를 겨루려는 것은 아직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짓이지요.

어린아이에겐 금지와 규율이 중요하고 청소년에겐 따를 만한 본보기가 필요하지만 다 큰 어른에겐 그저 저 만큼의 안목이 중요하지요. 


하질 지도자가 힘으로 목소리로 권위를 세우지만, 잘된 스승이 본으로 보여주는 법... 그러니 남앞에 서자면 깔끔하고 온전한 모습이 갖춰짐이 중요하지요. 이 만큼이라도 하는 이가 드물지만 사람으로 나서 진리 한 번 맛보지 못함도 어리석은 겁니다. 진리를 사는 허허로운 모습... 잡다한 굴레를 벗은 자유자


진리를 맛보는 법은 내가 바라보는 방향을 달리해야하는 겁니다. 그것 만으로도 일단 발은 들여 놓은거지요.


쉬운길과 어려운 길이 있으면 어려운 길을 택하라는 양단간의 선택을 말함 아닙니다. "나"를 어느쪽으로 세울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거지요.


3.

 

顔淵問於仲尼曰:「夫子步亦步,夫子趨亦趨,夫子馳亦馳.,夫子奔逸絶塵,而回瞠若乎後矣!」

 

안연이 공자에게 묻길;[선생님께서 걸으시면 저도 걷고, 선생님께서 빨리 걸으시면 저도 빨리 걷고, 선생님께서 달리시면 저도 달립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먼지도 내지않고 달려버리시면 저는 뒤에서 눈만 멀뚱히 뜨고 있습니다.]

 

仲尼曰:「回,何謂邪?」

 

공자 말하길:[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曰:「夫子步,亦步也.,夫子言,亦言也.,夫子趨,亦趨也.,夫子辯,亦辯也.,夫子馳,亦馳也.,夫子言道,回亦言道也.,及奔逸絶塵而回瞠若乎後者,夫子不言而信,不比而周,无器而民滔乎前,而不知所以然而已矣.」

 

안회가 대답하길:[선생님께서 걸으시면 저도 걷는다는 것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면 저도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빨리 걸으시면 저도 빨리 걷는다는 것은 선생님께서 이론을 펴시면 저도 이론을 편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달리시면 저도 달린다는 것은 선생님께서 도를 말씀하시면 저도 도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지도 내지않고 달려가버리시면 저는 뒤에서 눈만 멀뚱히 뜨고 있다는 말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남에게 믿음을 받고, 남과 친하려 하지 않으셔도 남들이 친하게 따르고, 벼슬이나 권력이 없어도 백성들이 굴복해 오는데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仲尼曰:「惡! 可不察與! 夫哀莫大於心死,而人死亦次之. 日出東方而入於西極,萬物莫不比方,有首有趾者,待是而後成功,是出則存,是入則亡. 萬物亦然,有待也而死,有待也而生. 吾一受其成形,而不化以待盡,效物而動,日夜无隙,而不知其所終.,薰然其成形,知命不能規乎其前,丘以是日徂.]

「吾終身與汝交一臂而失之,可不哀與! 女殆著乎吾所以著也. 彼已盡矣,而女求之以爲有,是求馬於唐肆也. 吾服女也甚忘,女服吾也亦甚忘. 雖然,女奚患焉! 雖忘乎故吾,吾有不忘者存.」

 

공자가 말하길:[틀렸다! 잘 봐라! 슬픔 중에 믿음이 죽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고, 사람의 죽음은 그 다음 가는 슬픔이다. 해는 동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가는데 만물은 모두가 이에 따라 방향을 정한다. 눈이 있고 발이 있는 사람들은 해를 기다렸다 일을 하기 시작한다. 해가 뜨면 세상일이 시작되고, 해가 지면 세상일도 그치는 것이다. 만물도 역시 그러니, 그것에 의해 죽기도 하고 그것에 의해 살기도 한다. 우리는 한번 형체를 타고난 이상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고 그 다함을 기다릴뿐 만물이 움직임을 따르라. 낮이나 밤이나 빈틈없으니 그것이 끝나는 곳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교훈을 얻으니 형을 닦아가는 것 제 운명을 아는 것도 그 앞에선 기준이될 수 없다. 난 이를 따를 뿐이다] 

 

[내가 평생토록 너와 어깨를 맞대고 지낸다 해도 결국은 서로를 잃게 될 것이니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는 드러나 보이는 나의 겉의 것을 그대로 행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나간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그것이 현재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추구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텅 빈 시장에 가서 말을 사려고 하는 것과 같다. 내가 너를 생각하는 것도 매우 빨리 잊게 될 순간적인 것이고, 네가 나를 생각하는 것도 매우 빨리 잊게 될 순간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너는 무엇을 걱정하느냐? 비록 옛날의 나를 잊어버린다 해도 나에게는 언제나 잊혀질 수 없는 참된 나도 그 중에 존재하는 것이다.] 

 

-잘 고를 안목이 설 때까진 뭘 알아도 제대로 아는 것 아닙니다. 내 눈이 틔여야 가려보고 진리를 살아갈 능력이 생기게 되지요.


4. 

孔子見老聃,老聃新沐,方將被髮而乾,慹然似非人. 孔子便而待之,少焉見,曰:「丘也眩與,其信然與? 向者先生形體掘若槁木,似遺物離人而立於獨也.」 

공자가 노자를 만나러 가니 노자는 막 목욕을 마치고 머리를 말리려 하고 있었는 데, 꼼짝 않고 있는 것이 사람의 모습 같지 않았다. 공자는 기다렸다가 잠시 후에 이야기 하길:[제가 눈이 어지러운 것일까요? 아니면 당신의 그런 모습이 정말 그렇다 믿은 것일까요? 조금 전의 선생의 형체는 뻣뻣한 게 마른나무 같았으며, 외물을 잊고 사람을 떠나 홀로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깨달은 자는 뭐 하나에 의지하거나 기대지 않지요 이미 그 마음속에 진리라는 든든한 중심 추가 있으니... 

老聃曰:「吾遊心於物之初.」 

노자 이르길:[나는 만물의 시초의 생각으로 내 마음을 돌아보던 중이었소.] 

-진리란 별거인가요? 만물의 변화 이전과 변화를 가려 봄이지요. 만물의 변환만상에 눈을 빼앗기지 않음이 깨우치는 첫 걸음이지요. 그 하많은 변화를 어찌 한 마디로 담을 수 있나요? 그러니 그 처음 이치로 돌아갈 따름... 


孔子曰:「何謂邪?」 

공자 말하길:[어찌 가능한가요?] 


曰:「心困焉而不能知,口辟焉而不能言,嘗爲汝議乎其將. 至陰肅肅,至陽赫赫.,肅肅出乎天,赫赫發乎地.,兩者交通成和而物生焉,或爲之紀而莫見其形. 消息滿虛,一晦一明,日改月化,日有所爲,而莫見其功. 生有所乎萌,死有所乎歸,始終相反乎无端而莫知乎其所窮. 非是也,且孰爲之宗!」 

마음이 원인되는 것은 알 수가 없고, 입이 피하면 말로 뱉을 수 없소, 시험삼아 당신의 이해를 위해 그 대략을 논해 보겠소. 지극한 음기는 엄숙하고, 차가우며, 지극한 양기는 밝고 뜨거운데 엄숙하고 차가운 음기는 하늘에서 나오고, 밝고 뜨거운 양기는 땅에서 나와 이 두가지 기운이 서로 통하고 조화를 이룸으로써 사물이 생겨나는 것이오. 혹자가 그 기원을 살펴보지만 그 형을 볼 수는 없지요. 가득찼다 비었다 하기도 하고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기도 하오. 해가 달로 변하여도 날마다 뭔가 있으나 그 공력을 보지 못하는 것. 삶에는 싹이 있고, 죽음이란 돌아감이란 것이 있으니 사물의 처음과 끝이 서로 끝없이 반복됨에 경계가 없으니 그 무궁한 소용을 알지 못하오.그러나 이것이 아니라면 또 그 무엇이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있겠소] 

-마음 속의 일이란 말로든 뭐든 꺼내 놓기 전엔 알 수 없는 법. 세상이치란 음 양의 조화로 서로 상호작용으로 이뤄지는 법 그를 인과론으로 살핀다고 알아지는 것 아닙니다. 아니 그리 아는 것은 서술일 뿐이지 당장 일어나는 일의 설명은 되지 못합니다. 그런 상호작용의 조화가 같은 일도 다르게 보게 만드는 법 그 상호작용의 조화를 잘 이해함이 진리를 가려봄의 시작이지요 


孔子曰:「願聞其方.」 

공자 묻길: [그 방도를 듣기원합니다] 

曰:「草食之獸不疾易藪,水生之蟲不疾易水,行小變而不失其大常也,喜怒哀樂不入於胸次. 夫天下也者,萬物之所一也. 得其所一而同焉,則四肢百體將爲塵垢,而死生終始將爲晝夜而莫之能滑,而況得喪禍福之所介乎! 棄隸者若棄泥塗,知身貴於隸也,貴在於我而不失於變. 且萬化而未始有極也,夫孰足以患心! 已爲道者解乎此.」 

풀을 먹는 짐승은 풀이 바뀐다고 꺼리지 않고 물에 사는 벌레는 그가 사는 물이 바뀌는 것을 싫어하지 않소. 작은 변화가 생긴다고 큰 틀의 삶이 바뀌는 것 아니오, 그러니 희노애락의 감정이 가슴 속에 스며 들지 않는 것이오. 

-우리는 우리가 지금 처한 장을 바꾸면 달라질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갖지요 초식동물이 다른 초원의 풀을 먹는다고 육식동물되지 않듯 작은 변화가 전체의 삶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전체의 큰 틀에서 세상사를 보면 그에 대한 집착이나 고집이 없어지니 감정이 개입하지 않지요. 

무릇 천하라는 것은 만물이 존재하는 하나의 장소지요. 그 자리에 처해 하나로 동화될 수만 있다면, 육신과 사지는 먼지나 때와 같은 것이 될 것이며, 죽음과 삶, 끝과 시작은 밤과 낮의 변화처럼 일상적인 것이 되어, 아무것도 그를 어지럽게 할 수 없을 것이오. 하물며 죽음이니 재앙과 복 따위가 끼어들겠소? 하인을 버리되 진흙처럼 버리는 자는, 내 한 몸이 노예됨보다 귀함을 아는 것이요. 귀함이 내게있다면 변한다고 잃어버릴까요. 또한 만물이 변화하지 않고있으니 경계가 있는 것이니 대저 누가 근심어린 마음을 달랠 수 있나! 이미 도를 터득한 사람의 해법이 이것이라오.] 

-세상을 그저 더러운 것으로 보며 탈속을 강조함은 진정한 진리 사는 것 아닙니다. 세상이란 만물이 존재하는 터전이지요. 다만 그러한 상호작용을 깨달아 같이 동화해서 사는 것 그것이 진리자의 삶입니다. 남에게 의지하며 사는 삶을 버림은 뭔가 인과에 매여 안정?됨을 버리고 그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깨달은 자의 삶이란 그런 흐름을 타고 즐길 줄 아는 것이라오... 

孔子曰:「夫子德配天地,而猶假至言以修心,古之君子,孰能脫焉?」 

공자 이르길:[선생의 덕은 하늘의 짝이 될 만한데도 그저 한가로이 말을 쉬며 마음닦기에 열심이시니 옛날의 군자라 하더라도 누가 이보다 뛰어날 수 있겠습니까?] 

-진리를 말 안에 가둠은 미련한 짓이지요. 내가 무엇을 무엇으로 이르는 순간 그것은 이미 본성을 떠나 "나의 판단"에 가두어는 것이지요. 그런 가둠을 안함이 깨친 이의 길이지요. 칭찬이요 존경심의 발로겠지만... 

老聃曰:「不然. 夫水之於汋也,无爲而才自然矣. 至人之於德也, 不修而物不能離焉,若天之自高,地之自厚,日月之自明,夫何修焉!」 

노자 말하길:[그렇지 않소. 물이 솟아 흐르는 것은 물이 작용해서가 아니라 물의 본성에 따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깨달은 이가 갖춘 것이 덕이지요. 의식적으로 덕을 닦지 않아도 만물이 다가와 떠나지 않게 되는 것이오. 이는 하늘이 스스로 높고, 땅이 스스로 두꺼우며, 해와 달이 스스로 밝은 것과 같은 이치이니, 또 무슨 수련이 필요하겠소] 

-물의 본성이란 뭐다라고 규정하려 들지 말고 그저 그를 닮아 살면 됩니다. 물의 본성을 따지는 것은 눈에 뵈는 현상에 매인자일 뿐... 정작 배워야 할 것은 그의 덕성이지요. 낮은 자리로 흐르면 흐르고 솟구쳐 나올 때면 솟구치는... 물이 그리 됨은 물 자체에 어떤 힘이 있어서 아니라 다른 외물과의 만남에서 그리되지요... 

孔子出,以告顔回曰:「丘之於道也,其猶醯鷄與! 微夫子之發吾覆也,吾不知天地之大全也.」 

공자가 나와 안회에게 이르길:[나의 도라는 것은 항아리 속의 바구미 같은 것이었다. 만일 선생께서 나를 뒤집어 꺼내주지 않았다면, 나는 하늘과 땅의 위대하고 완전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니라.] 

-우물 속에 갇히면 모든 것이 내 눈에 내 생각에 있으니 안정되다 느끼나요? 그런 가둠을 빨리 벗어야 대명천지 맑은 하늘아래 햇빛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리 말합니다. 내것을 포기하면 내겐 남을 것이 없을거라고... 아니요... 사람들은 이미 세상이란 큰 틀에 천지의 조화로 타고 났기에 다른 무엇이 채워지지요.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무엇을 꼬집어 채우려는 목적이 아니라 하늘이 채워주심을 그대로 받아들임입니다. 나를 포기하면 하늘이 내거 되는 겁니다. 


5.

 

莊子見魯哀公. 哀公曰:「魯多儒士,少爲先生方者.」

 

장자가 노나라 애공을 만났는데 애공이 말하길:[노나라엔 유교를 따르는 선비가 많읍니다만 당신의 방법을 따르는 이는 적지요]

 

-노나라는 공자의 나라 그러니 진리를 찾는다는 사람들은 다 유생의 복장을 하고 서로 진리를 찾노라, 아노라 합니다. 장자의 논지를 따르지 않음을 얘기하지요. 유생이라 함은 공자의 무리라는 말이기 보다 공자를 통해 진리를 찾는 선비를 말함이고...

 

莊子曰:「魯少儒.」

 

장자 말하길: [노나라엔 선비가 적습니다]

 

-장자는 말하지요 복장만 갖추고 흉내나 낸다고 다 진리를 찾는 선비랴?

 

哀公曰:「擧魯國而儒服,何謂少乎?」

 

애공왈:[노나라 거국적으로 유생 복장을 한 이가 많은데요 왜 적다고 하시지요?]

 

-전국에 유생 복장으로 공자왈 떠드는 이들이 가득하다고 진리를 모두 다 아나요? 공자의 무리가 예수의 교당이 많으면 진리가 이 땅에 이뤄진건가요?

 

莊子曰:「周聞之,儒者冠圜冠者,知天時.,履句屨者,知地形.,緩佩玦者,事至於斷. 君子有其道者,未必爲其服也.,爲其服者.,未必知其道也. 公固以爲不然,何不號於國中曰:'无此道而爲此服者,其罪邪!'」

 

장자 왈:[내 듣기엔 유생들은 둥근 관을 쓴다는데 하늘의 때를 알아서랍디다, 이구라는 신을 신은 것은 땅의 도리를 알아서랍디다. 패결을 느슨히 맨 사람들이 많음은 임금과의 인연이 끊어져도 섬김을 다한다는 뜻이랍디다. 군자로 그런 깨우침이 있으면 굳이 그런 복장할 필요없을겁니다. 그런 복장을 한다고 그런 깨우침 한다는 보장도 없구요. 귀공이 그리 생각하신다면 왜 나라에 명을 내려:'이런 도리를 제대로 모르면 이런 복장을 하지마라 그건 죄로 다스린다'해보시지요]

 

-그런 복식을 갖추자면 적어도 그 의미 정도는 알고 입어야죠... 하늘의 때를 알고, 땅의 이치를 알고, 패결을 차고 비록 임금의 부름을 받지 못하더라도 임금에 대한 충절이 있다라 드러낼 양이면 적어도 진짜를 알고 있어야지요.

 

진짜 진리를 아는 이는 그런 외양에 매이지 않지요 남들이 그리 봐주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저 할 도리하는데 뭔 장식이나 꾸밈이 필요한가요?

 

於是哀公號之五日,而魯國无敢儒服者,獨有一丈夫儒服而立乎公門.

 

그래서 애공이 이런 명을 내린지 5일만에 노나라안에 이런 유생복장을 한 자들이 없어졌더라 오직 한 사람이 이 복장으로 애공의 문앞에 섰다]

 

-방을 내려보니 모두들 옷을 벗어던집니다. 칼앞에 권력앞에 무릎꿇는 자는 진리를 모르는 자입니다. 아직도 소소한 자기 이익에 매인, 제 비천한 목숨 소중한 줄 아는 사람이 태반이요. 아마 일부는 기실 자신들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흉내나 냄을 알게된 지도 모르지요. 그저 뭘 안다는 치들에게 이리 칼을 들이대보면 저 스스로 속임에서 벗어나는 법이지요.  

 

남들이 다 현실에 야합하고 휘둘려도 스스로 떳떳한 자는 그대로이지요. 진리를 아는 사람은 어려운 때 드러나는 법입니다.

 

公卽召而問以國事,千轉萬變而不窮.

 

애공이 불러 나랏일을 물으니 천가지 움직임과 만가지 변화를 두루 알더라

 

-진실로 유생의 복장이라도 입을 정도로 자신을 아는 정도의 사람이 한 사람뿐이지요. 하늘의 이치를 알고 땅의 이치를 아는 자만이 스스로 진리를 따르는 자라 말할 만 한 겁니다.

 

莊子曰:「以魯國而儒者一人耳,可謂多乎?」

 

장자왈:[보듯이 노나라엔 진정한 선비가 한 사람뿐이요 어찌 많다하리요?]

 

-진리를 사는 사람은 당당합니다. 그런 당당함이 없는 사람은 진리를 아는 체 꾸미고 있는 치사한 자일 뿐...

 

겨우 그 정도의 당당함도 없이 급하면 사람들의 이목 뒷전으로 숨는 자는 오히려 무지한 자보다 더 사악하지요. 성경에도 이르길 '마지막 때가 되면 적 그리스도들이 횡행한다'합니다. "소경으로 소경을 인도하여 오히려 죄의 구렁텅이로 몰고가는...' 그러니 스승인 체 한다고 다 깨친 이 아니지요.  

 

전혀 흠잡히지 않을 입에 발린 소리하는 사람도 많지요 정작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기 깨우침을 내어놓을 당당함이 없는 이는 독사도 못되는 비천한 뱀의 자식입니다. 더더구나 지 살자고 남을 희생으로 잡는 자야 말해 뭣할까요?

 

남앞에서 지도자로 서자면 적어도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는 확신이 있어야 할거구요. 더 나아가서는 늘 작은 꼬마의 소리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를 바로잡고 고쳐가는 사람이 되야 할 겁니다.

 

이게 나이 먹는다고 되는 일 아니지요. 나이 먹어 나이 값 한는다는 건 세상을 살아가는 재주만 배워 눈치껏 한세상 사는 노회한 구렁이 되는 것과는 다른 겁니다. 그 모든 치사함을 알아도 꿋꿋이 제 할 일하는 사람이 되야지요.


6.

 

百里奚爵祿不入於心,故飯牛而牛肥,使秦穆公忘其賤,與之政也. 有虞氏死生不入於心,故足以動人.

 

백리해는 벼슬에 뜻이없어 소나 키우며 사는데 진나라 목공은 그의 천한 위치를 괘념치 않고 정치를 같이했다. 유우씨는 생사를 마음에 두지 않아 사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명예나 물욕을 벗어야만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 재목이요, 생사를 초월한 사람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법... 여기서 유우씨는 요순의 순임금이고 요순 시대까지는 하늘 진리가 살아있던 시대고....


7.

 

宋元君將畵圖,衆史皆至,受揖而立.,舐筆和墨,在外者半. 有一史後至者,儃儃然不趨,受揖不立,因之舍. 公使人視之,則解衣般礴臝. 君曰:「可矣,是眞畵者也.」

 

송나라 원군이 그림을 그리려는데 사가들이 떼로 몰려들어 시립하여 붓을 먹물에 적시는데 밖에서 기다리는 자가 반이라. 사가 한 명이 뒤에 왔는데 천천히 재촉하지 않고 시립하지 않고 사양하더라. 원군이 사람을 시켜 살피게하니 너럭바위에 옷을 풀어헤치고 활개뻗고 있더라. 원군 왈:[좋도다. 그가 진짜 그림장이로다]

 

*사가들이 모여서 그리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전쟁 전략이요 정치의 비젼이지요.

 

-그저 무리에 들어 다투지 않고 그저 쓰일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이가 초연함을 사는 이... 진리를 사는 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름내기도 돈 벌기도 떠나 주어진 진리 그 자체를 음미하며 살기에도 바쁜  이... 그런이는 범상하지 않지요 그러니 이상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8. 

文王觀於臧,見一丈人釣,而其釣莫釣.,非持其釣有釣者也,常釣也. 

문왕이 장 땅을 돌아 볼때 한 사람이 낚시를 하는 것을 보았는데 낚시를 하는건지 않는 건지 드리우기만 했지 잡는 것이 없는 그냥 낚시질이더라. 

-진짜 재미를 아는 사람은 결과에 집착하지 않지요. 그저 그를 즐길 뿐... 

文王欲擧而授之政,而恐大臣父兄之弗安也.,欲終而釋之,而不忍百姓之无天也. 於是旦而屬之大夫曰:「昔者寡人夢見良人,黑色而髯,乘駁馬而偏朱蹄,號曰:寓而政於臧丈人,庶幾乎民有瘳乎!」 

문왕이 마음이 동하여 그를 거두어 정치를 맡기고자 하나 대신들과 가족들이 불안할까 했다. 그런 마음이 마침내 뜻을 풀기를 백성이 하늘도리 없음을 참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마음이 풀려 대부들을 불러모아 이르길:[어제 내가 꿈에 훌륭한 사람을 봤소 검은 수염이 나고 한쪽 발굽이 붉은 얼룩말을 타고 있읍디다 불러세워 이르길: 장땅의 어른에게 정치를 맡기면 백성들이 치유됨을 얻으리라 합디다!] 

-문왕은 사람을 알아 볼 눈은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진리를 그대로 대면시키면 아무도 못 알아 볼 것도 아는 지혜자지요. 그래서 꿈 얘기를 빌지요. 

諸大夫蹴然曰:「先君王也.」 

모든 대부들이 삼가며 말하길:[선왕이시군요] 

諸大夫曰:「先君之命,王其无它,又何卜焉!」 

모든 대부들이 말하길:[선왕의 말씀이 분명하니 해몽이 필요할까요!] 

-사람들은 진리 그 자체를 보기보다 뭔가 권위있고 근거있는 걸 바랍니다. 선왕을 빙자함은 그런 사람들의 얕고 깊지않은 천박한 속을 아는 탓이지요. 백성을 속이려하는 것 아니라 더 큰 걸 채워주려는 배려지요 

사람들이란 자기가 속을? 근거를 대주면 얼토당토않은 비상식적인 것에도 속아넘어갑니다. 

遂迎臧丈人而授之政. 典法无出,偏令无出. 三年,文王觀於國,則列士壞植散群,長官者不成德,螤斛不敢入於四竟. 列士壞植散群,則尙同也.,長官者不成德,則同務也.,螤斛不敢入於四竟,則諸侯无二心也. 

장 땅 사람을 불러 정치를 맡기었다. 새로 법을 만들거나 규례를 만들지 않더라. 3년이 지나 문왕이 나라를 두루 살피는데 제 선비들이 무리를 흩고 장관들이 스스로 덕있다 않고 도량형이 나라안에 틈타지 않았더라 즉, 제후들이 두 마음을 품지 않더라 

-진리를 그대로 실현하는데 삿된 것들이 들어 설 틈 있을까요? 새로이 사람이 서면 뭔가 전임과 차별을 두려합니다. 그러나 그런 차별은 또다른 쓸모없는 논쟁을 부를 뿐이지요. 어떤 나라든 모임이든 도량형(가치관 기준)이 잘 세워져 있어야지요. 상인들이 다 저마다 저울을 들고 장사하면 상도덕이 무너지는 겁니다. 사공이 많으면 않되지요 


文王於是焉以爲大師,北面而問曰.「政可以及天下乎?」 臧丈人昧然而不應,泛然而辭,朝令而夜遁,終身无聞. 

문왕이 이로 큰 스승을 삼고 북쪽을 향해 묻길 [이런 다스림을 천하에 전할 수 있나요?] 장 땅 대인은 어지러운 듯 답을 않더라 그저 사직하니 아침에 명령하던 이가 밤에 숨어버리곤 죽는 날까지 소식이 없더라 

-남면하여 앉는 이는 천하에 왕뿐이지요. 진리를 말로 설명하면 알아듣나요? 그저 느끼고 깨달아야지요. 

顔淵問於仲尼曰:「文王其猶未邪? 又何以夢爲乎?」 

안연이 공자에게 묻되:[문왕이 아직 덜 된건가요? 왜 꿈을 빙자했나요?] 

-문왕같은 사람이 어째 꼼수를 쓰느냐 묻지요. 진리를 사는 모습이 아직 뭔지 모르는 제자의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뭐가 꼼수인지는 알 정도의 안목은 있으나 진리의 마음은 아직 모르는 겁니다. 

仲尼曰:「黙,汝无言! 夫文王盡之也,而又何論刺焉! 彼直以循斯須也.」 

공자왈:[말 말고 입 다물어라! 문왕의 극진함이라 그러니 새삼 왜 따지려드는가! 저는 그저 잠깐 임시로 그리했을 뿐이라] 

-문왕이 그냥 꼼수 부린 것 아니지요. 저가 나름의 극진함을 한 연후 충분히 고민하고 뭐가 백성을 위한 길인지를 찾아 행하지요 而恐大臣父兄之弗安也.,欲終而釋之... 

진리를 막바로 들이대면 선선히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그럽니다 깨친이면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고...하다 못해 하얀 수염이라도 휘날려야 한다고... 마음이 한없이 넓어 모두를 사랑으로 감싸야 한다고...사랑이면 따스하고 달콤한 것이라고... 사랑하는 사람이면 화도 안내고, 매도 들어선 안된다고... 

아니지요 그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조차도 계산속으로 하는 겁니다. 깨친이는 계산속으로 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남들에게 비난받더라도, 상대에게 오해받더라도 저 할일 하는겁니다. 매를 들어서라도 그 사람을 깨우치고 스스로 서게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제 평판 체면에 매여 성심을 다하지 못함은 사랑을 모욕하는 겁니다. 

아버지는 아이가 당장은 서운해해도 그 미래를 열어줘야 하기에 꾸중도하고 매도 드는겁니다. 아니 진정 사랑하기에 꼼수쓴다는 오해도 감내하지요...


9.

列禦寇爲伯昏无人射,引之盈貫,措杯水其肘上,發之,適矢復沓,方矢復寓. 當是時,猶象人也.


열어구가 백혼무인을 위해 활을 쏘는데 활을 당당하게 잔뜩 당기며 措杯水가 팔꿈치 위에 있고 쏘면 다시 살이 재어있고 쏘면 다시 재어있더라 이때엔 마치 象人: 장수같더라.


伯昏无人曰:「是射之射,非不射之射也. 嘗與汝登高山,履危石,臨百仞之淵,若能射乎?」


백혼무인 왈:[이리 쏘는 것은 누구나 하지만, 쏠만하지 못한 곳에서 쏘지는 못하리. 시험삼아 높은 산에 올라 위험한 백길 낭떠러지에서도 쏠 수있나 볼까?]


於是无人遂登高山,履危石,臨百仞之淵,背逡巡,足二分垂在外,揖而進之.


그래서 어구가 무인과 산에 올라가는데 백길 낭떠러지 절벽에서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서도 발의 5분의 일이 낭떠지 밖으로 걸리는 데로 어구에게 오라하니.


禦寇伏地,汗流至踵.


어구가 땅에 바짝 엎드려 땀을 발꿈치까지 흘리더라


伯昏无人曰:「夫至人者,上闚靑天,下潛黃泉,揮斥八極,神氣不變. 今汝怵然有恂目之志,爾於中也殆矣夫!」


백혼무인이 이르길:[대저 깨달은 자는 위로 하늘의 도리를 알고 아래로는 황천 깊은 구렁에도 잠기니 8극:온 세상을 휘젖고 다녀도 정신이 변하지 않는 법. 지금 넌 두려움에 눈앞의 것에 뜻이 갇히니 이런 위태함에 떠는 졸장부라]


-한마디로 똥폼 만 잔뜩 잡는 사람을 말합니다. 

활이란 사냥도구... 

금메달 양궁선수가 사냥의 달인은 아닐터... 

 

진실로 잘하는 사람은 어느 상황 어느 때든 제 할 도리를 하지요. 높은 절벽에서 화살을 쏘지 못하고 너른 평지에서 잘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진정 위험 속에서도 제 할 일을 해내는 이가 깨달은 자입니다. 깨달음이란 만사외물을 하나로 보는 것... 눈앞의 허상에 마음 빼앗기는 자는 아직도 진리를 깨달은 것 아니지요.

누구나 차려진 자리에서야 잘났지요만... 궁핍함에도 비굴하지 않고, 어려움에 들어도 꿋꿋하게 사는 이는 적지요..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로 핑계를 합리화하지만 기실은 제 마음이 허약한 것 뿐이지요.

이런 허약한 정신을 가진 이에겐 절대 물어뜯을 거리 주면 안되지요. 마치 건강한 영양은 쫓지도 못하다가 병들고 상처입은 짐승에게는 떼거지로 달려들어 이빨을 들이대는 하이에나 근성밖에 없으니... 

우쭐거리기 좋아하고 정작 자리만 바꿔도 기신을 못하는 사람은 진짜배기 아닙니다.


10.

 

肩吾問於孫叔敖曰:「子三爲令尹而不榮華,三去之而无憂色. 吾始也疑子,今視者之鼻間栩栩然,子之用心獨奈何?」

 

견오가 손숙오에게 묻길:[당신이 3번을 초나라의 영윤으로 지냈어도 영화로 알지않고 떠날때마다 근심어린 기색을 않으시는군요. 내 처음엔 그대를 의심했으나 지금 보니 얼굴이 황홀한듯 합니다 어찌하면 마음을 그리 다스리는지요?]

 

孫叔敖曰:「吾何以過人哉! 吾以其來不可却也,其去不可止也,吾以爲得失之非我也,而无憂色而已矣. 我何以過人哉! 且不知其在彼乎,其在我乎? 其在彼邪? 亡乎我.,在我邪? 亡乎彼. 方將躊躇,方將四顧,何暇至乎人貴人賤哉!」

 

손숙오가 답하길:[내 어찌 뛰어난 사람이리요! 난 그저 오는것을 막을 수 없고 가는 것을 잡을 수 없다 생각하지요 또 득실의 문제에선 그건 내 것 아니라 여기니 근심할 일이 없더군요. 나란 존재도 그저 사람이지요! 나란 것이 벼슬에 따르는지 내게 있는지도 모르니 그게 나의 마음에 있을까요?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걸까요? 내게 없으면 그들에게 있나요? 그들에게도 없다면 주저할 것이요 사위를 돌아 볼 것이니 어느 틈에 사람의 귀천을 따질까요!]

 

-대신을 지내면서도 그저 심상하게 "오는 것이니 감당하고 가는 것이니 마음 비우며 득실의 문제에선 그저 내 것 아니라"고 여기는 화통한 마음가짐이 있어야지요.

 

나라는 것이 그들이 본 것이 나인가요 내가 생각하는 내가 나인가요? 그것도 제대로 모르는데 귀천을 따질 틈 있나요?  아니 내가 귀한지 천한지도 모르는 판에 남을 귀하다 천하다 할 기준이나 있나요? 그저 하나님이 주셨거니 다만 나 할도리하기도 바쁜데... 귀천을 가리지 않으니 초연하게 살 수 있는거지요.

 

仲尼聞之曰:「古之眞人,知者不得說,美人不得濫,盜人不得劫,伏戱黃帝不得友. 死生亦大矣,而无變乎己,況爵祿乎! 若然者,其神經乎大山而无介,入乎淵泉而不濡,處卑細而不憊,充滿天地,旣以與人,己愈有.」

 

공자가 듣고 말하길:[옛날 깨친 이는 지혜자라도 설득할 수 없고 미인이라도 유혹하지 못하고 도둑이라도 상치 못했고 복희 황제씨도 벗하지 못했다. 생사의 문제가 크긴 하나 그를 흔들지 못했는데 하물며 벼슬쯤이야! 이와 같은 이는 정신이 큰 산이라도 끼어들 틈이 없고 깊은 샘에 빠져도 젖지 않으며 비천한 자리에 처해도 약해지지 않으니 천지를 가득채우며 이미 사람들과 함께하니 뛰어남이 있는 법.]

 

-眞人이란 참 사람이요 진리중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그저 하늘 그대로를 닮아 누구의 편이 되거나 적이 되지않는 3자의 입지로 살고 벼슬이니 뭐니 바깥 명칭에 휘둘리지 않으며 그저 사람들 속에서 묻혀 살아내는 법... 구름타고 신선놀음하는 것이 참사람 아니요 진리 사는 것 아니지요.

 

사람들 속에 살되 초연함이 갖춰진 사람 그게 참 사람입니다. 초연함이란 말그대로 오는것 가는것 막고잡지않으며, 이해득실에서 한 발 떠난 사람이 초연한 것... 뭐에들 끼어들고 나를 욺켜쥐고 있음은 초연함 아니지요.

 

만나지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 주시는 것으로 알고 품어안을 줄 알고, 만남에 그를 나를 향한 선물로 보는 것 아니라 내가 그에게 선물임을 알고 그에게 정성을 다하는 삶을 살 줄 알며 그에게 필요한 것 다 내어주고 떠나가더라도  아쉬워 않으면 그가 하나님 사람입니다.


11.

 

楚王與凡君坐,少焉,楚王左右曰凡亡者三. 凡君曰:「凡之亡也,不足以喪吾存. 夫凡之亡不足以喪吾存,則楚之存不足以存存. 由是觀之,則凡未始亡而楚未始存也.」

 

초왕이 범나라 왕과 자리했는데 초왕의 신하들이 범나라가 망한 나라라고 3번을 말하더라. 범나라 임금이 이르길:[범나라의 망함이 내 존재를 상하기엔 부족하다. 그리 말한다면 초나라가 존재한다는 것도 존재라는 걸 말하기에 부족한 것. 이를 잘 보면 범나라가 망하기 시작하여 초나라가 있게된 것이나 마찬가지] 

 

-왕끼리 만나는 자리에서 신하들이 그러지요 범나라 왕이면 나라가 있어야 왕도 있으니 나라가 망하면 왕도 아니지 않느냐? 도대체 왕은 왕이전에 사람 아닌가요? 왕은 왕만 친구하나요? 이렇듯 외연에 매이면 사람을 사람 그대로 볼 수 있나요?

 

사람을 껍질말고 그대로 볼 때 그 사람이 참 사람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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