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장자 남화경

達 生

達 生 

달생이란 말은 "생명의 본의미를 깨달음"이란 뜻입니다. 


1. 

達生之情者,不務生之所无以爲,達命之情者,不務命之所无奈何. 養形必先之以物,物有餘而形不養者有之矣.,有生必先无離形,形不離而生亡者有之矣. 生之來不能却,其去不能止. 悲夫! 世之人以爲養形足以存生.,而養形果不足以存生,則世奚足爲哉! 雖不足爲而不可不爲者,其爲不免矣. 

달생의 뜻을 품은자는 뭐 인생사에 뭔가 함으로 애쓰지 않으며, 운명의 의미를 깨달은 자는 뭐가됐든 운명이란 말로 자기 합리화하려 애쓰지 않는다. 인격(양형)은 반드시 물질이 앞서야하는데(삶의 여유가 있어야), 물질이 여유로우면서도 제 꼴 갖추기 조차를 않는 사람이 있다. 인생을 살자면 그런 꼴갖춤이 너무 이상하게 어그러지지 말아야 하는데, 꼴 갖춤에 너무 매여 사람이되 삶은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인생의 시작은 감히 거스르기 힘들고 그 떠남도 막을 수 없는 법. 슬프도다! 세상사람들은 그런 꼴갖춤으로 생을 살 뿐이니 꼴갖춤으로 생을 보존하기 부족한 결과가 나면 세상사람들은 그 부족함을 뭐로 메꾸리? 부족한 짓이라도 아무것도 않는 것보다 낫다며 그리하는 사람은 그리함으로 부족한 짓을 한 죄를 면하기 어렵다.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단어를 정의하죠. 여기서 形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매너요 수련의 결과물인 꼴, 동시에 사람들이 그게 옳다 믿는 암묵의 굴레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養形이란 말은 前章에 나온 形勞처럼 남들 보는 자기를 닦는 것을 말하지요. 한마디로 장자가 말하고자하는 요지는 공자니 뭐니 제자백가의 사상들은 그런 겉핥기 겉닦기일 뿐 진정 진리와 하나됨 아니라는 경고지요. 뭐 시비를 가리는 것은 한학자나, 철학자의 몫이니 우린 그저 의미나 음미하며 갈 따름이지요. 

즉, 이글을 이리 읽을 수 있겠지요. 사람들은 진리에 다다르기 보다 그저 쉽게 성인이니 뭐니하는 남들이 전하는 말을 읊조리며 진리를 아는 척하는 것에 익숙하다. 인생사란 서로 얽히고 섥히는데서 희노애락이 나오는데 중요한 것은 그런 희노애락의 현상을 부정함 아니라 그런 얽히고 섥힘을 푸는 것, 그 얽힌 것에 하나를 정당화하자니 말만 많아지는 것, 가장 나은 방법은 둘이 같은 하나의 진리를 보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같은 하나 아니 같은 죽을 고생을 하면 서로 여유롭고 솔직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게 어렵다고 쉽게 가는 길을 택한다면 서로 종내 이견만 세우다 그치는 게지요. 


夫欲免爲形者,莫如棄世. 棄世則无累,无累則正平,正平則與彼更生,更生則幾矣. 事奚足棄而生奚足遺? 棄事則形不勞,遺生則精不虧. 夫形全精復,與天爲一. 天地者,萬物之父母也,合則成體,散則成始. 形精不虧,是謂能移.,精而又精,反以相天. 

대저 그런 꼴세우기를 면코자 하는 자는 세상사 번잡함을 버린다. 세상을 버림은 쌓는 것도 없는 것, 쌓음이 없으니 즉, 바르고 고르게 되며, 바르고 고르면 저들을 되살릴 수있다. 그런 인생사를 어찌 버려야 인생이 온전하게 보존할까? 그런 인생사를 버린다는 말은 꼴갖추기에 애쓰지 않는다는 것, 생이 온전하다는 것은 그 본디 정기가 어지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저 꼴갖추기가 온전히 되어 정기를 회복한다면 그는 하늘 진리와 하나된 것이다. 천지란 만물을 낳고 자라게하는 어미요, 서로 하나되면 눈에 뵈는 몸이되고 흩어지면 모든 것의 발단이요 시초로 남는다. 꼴갖추기와 정기가 어지러지지 않았으면 이를 能移:쉽게 옮겨가고 바꿀 수 있는... 라 하니 바뀌어도 다시 그 본 정기에 합하고 정기가 변한 듯 해도 하늘 진리의 한 모습이라... 

-여기서 能移란 말은 단어 그대로 이동이 자유롭다 변화가 자유롭다는 말이지요. 아니 더 깊은 의미로는 이미 진리와 하나됐다는 말이지요. 큰 그릇엔 국도 밥도 감자도 담을 수 있듯이 어떤 논리든 포용할 수 있읍니다. 이거냐 저거냐 선택의 문제가 아니죠. 
더 큰 진리와 하나되려는 자는 더 큰 게임의 룰을 따라야지요... 아니 동네 축구든 월드컵이든 룰이야 똑같지요마는 뛰는 마음이 달라져야지요. 골하나 넣고 지 혼자 우쭐하는 영웅되려하는 것 아니라 나라의 명예를 짊어지는... 나 하나 영달아니라 나라의 명예, 국민들의 자부심을 높이는 정도의 자기 의식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니 이리 말해도 좋을 겁니다. 꼴갖추기란 남에게 잘 보이고 도통한 것으로 인정받기 위한 짓거리요 진리를 알고 사는 것은 나의 평안과 위로를 위함이니 그 추구하는 얻음이 다르지요... 가는 길, 하는 짓은 같아보여도... 
당연히 그런 꼴닦기 놀음은 버려야죠. 그러면 공정하고 편평하게 고르니 남들의 잘못도 바로잡을 수 있지요.


2.

 

子列子問關尹曰:「至人潛行不窒,蹈火不熱,行乎萬物之上而不慄. 請問何以至於此?」

 

열자가 관윤에게 묻길:[지극한 깨달음을 얻은자는 물속에 잠기어도 숨막히지 않고, 불 위를 걸어도 열을 느끼지 못하고, 세상 가장 높은 꼭대기에 올라도 두려워 않는답니다. 묻거니와 깨달은 자는 어찌 이 정도에 이르지요?]

 

-뭐 깨달은 사람이 슈퍼맨이 되는 것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물에 혹하지 않음을 얘기하는 것일 따름...

 

關尹曰:「是純氣之守也,非知巧果敢之列. 居,予語汝! 凡有貌象聲色者,皆物也,物與物何以相遠? 夫奚足以至乎先? 是形色而已. 則物之造乎不形而止乎无所化,夫得是而窮之者,物焉得而止焉! 彼將處乎不淫之度,而藏乎无端之紀,遊乎萬物之所終始,壹其性,養其氣,合其德,以通乎物之所造. 夫若是者,其天守全,其神無卻,物奚自入焉!

 

관윤 이르길;[이는 정순한 기를 지키기 때문이요, 지식으로나 꾸밈으로나 어떤 결과로나 감히 노력하는 것으로 되는 일 아니다. 자, 내가 네게 말하리라! 무릇 모양이나 모습, 소리 빛깔을 가진 것은 다 물건이라, 물건이 어찌 물건과 따로 갈 수 있을까? 게중 어느것에 지극하다고 앞선다 할수있을까? 이미 형색이 각각인 걸. 물건이 지어내는 것중에 形이 없이 머무는 것을 변화없음이라 하는데 대저 이런 경지를 얻어야 궁극에 이른 것이라 하며, 만물을 이해하려는 것을 멈춘 것! 그런 이들이 머물 곳은 깊이 혹하지 않는 정도의 자리라 그래서 감추어져 뭐라 말할거리 없으며, 만물의 시종을 자유로이 노니니, 그 본성을 하나로 하고 그 기를 돋우며, 덕에 화하여 만물의 조화를 깨닫게 된다. 대저 이와같은 자는 하늘이 온전히 지켜주고 신명이 외면하지 않으니 어찌 사물에 매이겠는가!]

 

-사물에 매인다는 말은 "주체 객체의 이분법 구조"에 빠지는 것인데 이런 주체-객체란 서로 상호작용으로 분분한 모습으로 나뉘니 사실 종잡기 힘들다. 그래서 사물의 어떤 形이 없음-분화되지 않음을 본질이라 하니 이런 본질을 보고 아는 사람은 만물의 시작과 끝을 아니 굳이 끌려다니지 않고 살게된다. 

 

「夫醉者之墜車,雖疾不死. 骨節與人同而犯害與人異,其神全也,乘亦不知也,墜亦不知也,死生驚懼不入乎其胸中,是故遻物而不慴. 彼得全於酒而猶若是,而況得全於天乎? 聖人藏於天,故莫之能傷也.」

 

대저 술취한 자는 수레에서 떨어져도 다치긴해도 죽지는 않는다. 뼈가 상함은 다른 이와 같으나 그 피해는 다른 이와 다른데, 그 정신이 따로 놀기 때문이요 수레에 오른 것도 모르기 때문에 떨어진 것도 모르니 죽고살고,놀라고 두려움이 그의 마음에 있지 않음이라 따라서 사물을 거스름에 두려움이 없는 법. 저가 술에 온전히 취한 탓에 이와 같은 것, 그러니 하늘에 온전을 깨달은 자야 어떻겠는가? 성인은 하늘에 감추인 것 그러니 감히 상하지 못하지]

 

-하물며 술취한 자도 다치지 않는다는 말은 뭔가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말이니 내가 뭔가를 의식하지 않으면 그 제반 변화가 나완 상관없는 것... 옆에서 천둥이치건 벼락이 치건 그를 의식지 못하는 자에게 뭔 두려움이 생길까?

 

<復讐者不折鏌干,雖有忮心者不怨飄瓦,是以天下平均. 故无攻戰之亂,无殺戮之刑者,由此道也. 不開人之天,而開天之天,開天者德生,開人者賊生. 不厭其天,不忽於人,民幾乎以其眞!>

 

원수를 갚으려고 칼을 세운자도 분을 잘내는 자도 날아온 기와는 원망않는 법이니 이는 하늘이 주시는 고른 공평함이라. 고로 서로 다투는 일이 없으니 살인의 죄가 일어나지 않으니 이런 도리라. 사람이 하늘의 법을 여는 것 아니요 하늘이 하늘 법을 여니 하늘이 열면 덕이 나고, 사람이 열면 도적이 생긴다. 하늘 뜻을 마다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지 않으면 사람됨이 그 진실함에 있는 것!

 

-지금 당장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은 그저 바람에 날린 기왓장이 나를 때려도 그를 화내거나 연연해하지 않는 법... 뭔가에 사로잡힌 사람은(여기선 진리) 남에게 화를 내거나 분을 낼 필요도 없는 것...  


3. 

仲尼適楚,出於林中,見痀僂者承蜩,猶掇之也.

 

공자가 초나라에 가서 숲으로 산보나왔는데 곱사등이가 매미를 잡는데 주워담듯 하더라.

 

仲尼曰:「子巧乎! 有道邪?」

 

공자 말하길;[당신 참 재주 좋소! 뭔 수로 그리하오?]

 

曰:「我有道也. 五六月累丸二而不墜,則失者錙銖.,累三而不墜,則失者十一.,累五而不墜,猶掇之也. 吾處身也,若厥株拘.,吾執臂也,若槁木之枝.,雖天地之大,萬物之多,而唯蜩翼之知. 吾不反不側,不以萬物易蜩之翼,何爲而不得!」

 

답하길;[예 재주있지요. 5,6개월을 연습해서 2개의 알을 쌓아 안 넘어트리면 실수가 적어지고 셋을 쌓고도 안 넘어트리면 실수가 10분의 1이 됩니다. 다섯을 쌓고도 넘어지지 않으면 주워담는 경지가 됩니다. 전 몸을 웅크리어 나무등걸처럼 하고, 어깨를 고목나무 가지처럼 움직이질 않으니 비록 천하가 웅대하고 만물이 많다해도  오직 매미 날개만 집중하지요. 몸을 꼼짝도 않고 다른 것에 말고 매미 날개만 집중하지요 그러니 못 잡을리 없지요!]

 

-우리는 재주를 별다른 것, 타고나는 것이라 할 지모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무념무상으로 한 가지에 전념함은 어쩌면 기술이나 재주를 넘어서는 길이 아니겠는가? 그 정도는 되어야 하나의 도라 할 것이니... 부러 말하자면 백정질에도 도가 있을 수 있고 도둑질에도 도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그 정도 이르면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도 저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을 것이다.

 

물론 이를 시샘하는 무리도 있을 것.. 곱사등이니 겨우 그런 재주로 먹고산다 할지 모르나 진정 진리를 사는 사람은 그가 이룬 진리의 경지를 보지 겉모습은 판단하지도 않는 법...


4.

 

顔淵問仲尼曰:「吾嘗濟乎觴深之淵,津人操舟若神. 吾問焉,曰:'操舟可學邪?' 曰:'可. 善游者數能. 若乃夫沒人,則未嘗見舟而便操之也.' 吾問焉而不吾告,敢問何謂也?」

 

안연이 공자에게 묻기를:[제가 상심이란 호수를 건너오는데 강사람의 배젓는 솜씨가 가히 신의 경지입디다. 그래 내 묻기를; 배젓기를 배울수 있나? 답이: 그럼요 수영을 하는 사람은 쉽게 배우고, 잠수할 줄 아는 사람은 배를 본 적 없어도 쉽게 저을 수 있지요.' 내 물어 봤으나 내게 알려주지 않습디다, 감히 청합니다 이는 뭐라 설명할 것인가요?]

 

仲尼曰:「善游者數能,忘水也. 若乃夫沒人之未嘗見舟而便操之也,彼視淵若陵,視舟之覆猶其車却也. 覆却萬方陳乎前而不得入其舍,惡往而不暇! 以瓦注者巧,以鉤注者憚,以黃金注者殙. 其巧一也,而有所矜,則重外也. 凡外重者內拙.」

 

공자 답하길:[수영을 잘하는 자는 물에의 공포를 잊으니 그런 것. 잠수하는 자가 배를 본 적없어도 배 젓기를 한다 함은 그는 그런 깊은 물을 땅처럼 보기 때문이요 배가 뒤집히는 것을 수레가 그런 것처럼 알기 때문이라. 뒤집히고 뭔 일이 눈앞에 일어나든 개의치 않으니 두려움이 없으니 한가하지 않을까!  질그릇을 내기로 걸고 활을 쏘면 잘 쏠 수 있지만, 띠고리를 내기로 걸고 쏘면 마음이 걸리게 되고, 황금을 내기로 걸고 쏘면 눈이 가물가물하게 된다. 그의 기술은 항상 같지만 아껴야 할 물건이 있게 되면 밖의 물건이 소중하게 여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밖의 물건을 소중히 여기게 되면 자기 속마음은 졸렬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판단함에 있어 어떤 외연적인 행동이나 태도로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사는 세상에서 행동이란 다 거기서 거기... 배젓기를 예로들어도 그저 배를 젓는다는 동작 하나로만 보면 누구나 다 같을 뿐... 다만 배 젓기라는 동작을 볼 것이 아니라 배를 조종하는 것을 봐야 할 것이다. 즉, 그 노젓는 행동 하나로 판단을 내리기 힘든 법... 배를 조종한다는 것은 물을 안다는 것 물을 안다는 것은 노젓기, 배를 안다는 것과 다른 것 물을 안다는 것은 물속의 지형, 때에 따른 흐름의 차이등을 다 볼 줄 안다는 것... 그러나 그저 노젓기만 가지고 본다면 졸렬한 것... 전체를 읽는 눈이 있느냐 없느냐...  

최고의 조정 선수가 한탄강 급물살을 잘 타나? 

중요한 건 그 모든 것을 성찰할 줄 아는 경험...


5.

 

田開之見周威公. 威公曰:「吾聞祝腎學生,吾子與祝腎游,亦何聞焉?」

 

전개지가 주나라 위공을 만났다. 위공이 묻길:[내 듣기에 축신과 양생법을 공부한다던데  자네가 그와 같이 다니니 뭔가 들은 바있는가?]

 

田開之曰.「開之操拔篲以侍門庭,亦何聞於夫子!」

 

전개지가 답하길:[저야 풀이나 뽑고 비질이나 하면서 문밖 정원에 있었는데 스승에게 뭘 들었겠읍니까!]

 

威公曰:「田子无讓,寡人願聞之.」

 

위공이 말하길:[전선생 사양치 말고 내 듣기원하네]

 

開之曰:「聞之夫子曰:'善養生者,若牧羊然,視其後者而鞭之.'」

 

개지가 답하길: 제 스승이 말씀하시길 '양생을 잘하는 자는 양떼를 다스리는 것 같아서 뒤 처지는 것을 재촉하는 것이지' 했읍니다.

 

威公曰:「何謂也?」

 

위공이 묻길: [뭔 소리인가?]

 

田開之曰:「魯有單豹者,巖居而水飮,不與民共利,行年七十而猶有嬰兒之色.,不幸遇餓虎,餓虎殺而食之. 有張毅者,高門縣薄,无不走也,行年四十而有內熱之病以死. 豹養其內而虎食其外,毅養其外而病攻其內,此二子者,皆不鞭其後者也.」

 

전개지가 답하길:[노나라에 單豹라는 이가 있는데, 바위굴에 살면서 물만 마시고 살며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문에는 같이하지 않았으며 70인데도 아이와 같은 기색을 지녔읍니다. 불행히도 굶주린 호랑이를 만나 그 호랑이에 죽임을 당하고 먹히웠지요. 張毅라는 자는 지체높고 널리 알려진 이라 거침이 없었지요, 40에 화병이 들어 죽었읍니다. 선표는 마음을 다스렸고 호랑이가 그 외연을 먹었지만, 毅는 그 외연을 닦다가 속병이 그 마음을 삼켰읍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뒤처진 것을 채근하지 못한 겁니다]

 

-여기서 양치기 같다는 말은 그저 양들을 제멋대로 다니도록 하는 것 아니요 모자란 부분을 돋우는 것이 진리의 삶의 진수임을 말하는 것... 진리란 몸과 마음이 고루 균형을 이뤄야 하는 법...

스스로 늘 자기 모자람을 보면 채우고 나아가려해야 하는 법. 무얼 가져서 진리를 사는 것 아니요 늘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그를 채워가는 자세가 진리자의 삶이다.

 

仲尼曰:「无入而藏,无出而陽,柴立其中央. 三者若得,其名必極. 夫畏塗者,十殺一人,則父子兄弟相戒也,必盛卒徒而後敢出焉,不亦知乎! 人之所取畏者,袵席之上,飮食之間.,而不知爲之戒者,過也!」

 

공자 이르길:[안을 다스리되 감추지 말고, 드러내되 빛내지 말며 그 중심을 잘 지켜야 한다. 이 세가지를 깨달아야 그 이름이 지극해질 것이요.  그저 조심히 한 면만 닦으면 열가지 사람의 본성을 죽이니 부자인 형제가 서로 서로 경계함이나 같아서 제 무리를 긁어모으고야 나설 수 있게 되는 법, 이는 참 지혜가 아니다! 이런 조심스러움을 따르는 이는 편안한 잔치 자리에서는 상석을 차지하여 날 경책해줄 상대가 없으니 과도한 것 뿐이라]

 

-안을 다스리되 감추지 말라 함은 혹여 마음에 다른 이들을 경원시하는 그런 마음 두지 말라는 것이요. 드러내되 빛내지 말라함은 자랑하고 남에게 우쭐하여 서지 말라는 뜻인게지요. 그러면 진리를 사는 공부한 것 아니요 결국 다른 이들처럼 출세하자는 욕구밖에 아닌 겁니다.

 

여기서 十殺一人이란 열가지 조심스러움: 굴레가 한 사람을 옭아매 본연을 살지 못하게 하고, 서로서로 분분한 의견으로 제 따르는 무리를 짓고서야 일어나니 이는 파당일 뿐... 그런 자는 그저 번지르르 모양내기에 급급하고 대접받기를 즐기니 그런 마음 조차가 이미 진리를 진리가 아닌 자기 입신출세의 도구로 이용해 먹는 것이다.

 

그리고 조심하여 자기를 닦아감도 너무 과도하면 기실은 늘 상석에서고 편안하기위해 진리 공부 이용하는 것 정도일뿐이지요. 그저 모르는 것, 부족한 것 있으면 서로 나누고 서로 보정해나가는 자세가 진짜 겸허한 자세지요. 높은자리에 올라 누구도 내게 함부로 말 못하게하는 것은 기실 허약한 자기보호의식 일 뿐입니다.


6.

 

祝宗人玄端以臨牢筴,說彘曰:「汝奚惡死? 吾將三月豢汝,十日戒,三日齊,藉白茅,加汝肩尻乎彫俎之上,則汝爲之乎?」 爲彘謀,曰不如食以糠糟而錯之牢筴之中,自爲謀,則苟生有軒冕之尊,死得於豚楯之上,聚僂之中則爲之. 爲彘謀則去之,自爲謀則取之,所異彘者何也? 

 

제사지내는 사람이 검은 예복을 입고 (제상에 올리려고) 돼지우리에 와 말하길, [너는 어찌 죽음을 싫어하느냐  내가 석 달이나 너를 잘 먹여 길렀으며, 열흘을 삼갔으며, 사흘 동안 몸을 깨끗이 하였고 흰띠풀 자리를 깔아주었고 거기다가 아름답게 차려진 상 위에 네 엉덩이와 어깨를 놓아 줄 것이거늘, 그걸 마다하나?] 하였는데 돼지를 위해 그리까지 한다지만, 차라리 겨나 지게미를 먹으며 돼지우리 속에 방치되는 것만 못하니 사람이 살 때엔 잘먹으며 대접받기를 원하고 죽어서는 잘 꾸며진 상여에 태워져 그 훌륭한 관속에 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러나 돼지의 입장은 몰라라 버려두고 자기입장 만을 도모하니 돼지가 그러는 것과 뭐가 다른가?  

 

-우리는 그리 말합니다. 난 너에게 최선을 다해줬다... 그러나 받는 상대가 모르면 그도 소용없는 짓이요 역으로 최선을 다해줘라하지만 문제는 그 뭐에 최선을 다할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지요.

 

그저 잘먹고 종생함이 행복이라면 그리 대해주면 될 일인가요? 젯상에 올릴 돼지라 그야말로 지극정성으로 대접해도 변치 않는 것은 젯상에 올려진다는 사실은 변치않고... 진정 돼지를 위한다면 뭔가 목적이 있어 대접함이 아니라 그저 본성대로 살도록 둠이 옳은 것... 의미란 것을 두어 속이고,  속는들... 뭐가 달라질까?

 

그리 의미부여를 하는 사람들의 인위를 조심할 일이다. 생명가진 이들의 본성은 딱하나 그 생명이 상하지 않고 천수를 누림이니... 짐승인 돼지란 그런 젯상 꾸밈 정도의 본성을 지닌다고 사람도 그래야 할까? 사람의 본성이란 돼지와는 같지않을 터... 세상을 그저 끌려사는 것 아니라 세상 이치를 꿰뚫어 보려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 아닐까? 


7. 

桓公田於澤,管仲御,見鬼焉. 公撫管仲之手曰:「仲父何見?」 對曰:「臣无所見.」 

제나라 환공이 물가로 사냥을 나갔는데 관중이 호위하더라 귀신을 보고. 환공이 손으로 관중을 잡고 물어 가로되:[관중 어르신 뭐 보셨읍니까?] 대꾸하길:[전 본 게 없읍니다] 

公反,誒詒爲病,數日不出. 齊士有皇子告敖者曰:「公則自傷,鬼惡能傷公! 夫忿滀之氣,散而不反,則爲不足.,上而不下,則使人善怒.,下而不上,則使人善忘.,不上不下,中身當心,則爲病.」 

환공이 돌아와 웅얼거리며 병이나 며칠을 출입을 못하더라. 제 나라 선비중에 황자고오라는 이가 말하길:[환공은 스스로를 상하게 하셨읍니다 귀신이 어찌 그대를 상할 수 있읍니까! 대저 한이 쌓이면 흩어내기 어렵죠 즉, 균형이 깨진겁니다. 위로 솟으면 사람이 화를 내어 풀 수있고 아래에 맺혀있으면 잊혀지지요 위도 아래도 아니고 몸 가운데 마음에 맺히면 병이되는 겁니다] 

-우리는 귀신을 보면 횡액이 있다 봅니다. 그러나 기실은 그 귀신이란 내 마음에 보이는 허상이지요... 사람이 살다보면 한이 쌓이기 십상입니다만... 그를 풀어내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억누르고 이겼다고 속이는게 깨친 이의 처신이라 보나봅니다. 그러나 한은 화로 풀어내든 잊어버리든 해야지요. 잊고 삭이기 힘들면 화를 내어라도 풀어내야 합니다. 그걸 가슴에 쌓고 있으면 병이 됩니다. 

桓公曰:「然則有鬼乎?」 

환공이 묻길:[그럼 귀신이란게 있긴 있단 말이요?] 

-귀신이 있을까요? 하긴 그러겠지요 귀신을 본 사람이 있으니 귀신은 있다고... 안 본 사람에겐 없나요? 그리 말싸움할 시간이면 진리를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曰:「有. 沈有履,灶有髻. 戶內之煩壤,雷霆處之.,東北方之下者,倍阿鮭龍躍之.,西北方之下者,則泆陽處之. 水有罔象,丘有峷,山有夔,野有彷徨,澤有委蛇.」 

답하길: [있지요 진창에는 리라는 귀신이,부엌엔 계라는 귀신이 집안 어지러운 자리엔 뇌정이란 귀신이 있고, 동북방 아래엔 배아규룡이란 귀신이 뛰놀고, 서북방 아래엔 일양이란 귀신이. 물엔 망상이 언덕엔 신이란 귀신, 산에는 기라는 귀신이,들판엔 방황이란 귀신이,늪지엔 위이라는 귀신이 있지요] 

-귀신이란 실체보다는 그런 것을 보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는거지요. 인류 문화학에선 Taboo라 부르는... 
이런 집단 무의식과 허약한 정신이 빚어내는 것이 귀신입니다. 

가만히 보면 진창에는 "미끄러짐" , 불에 데기 쉬운 부엌엔 조왕신, 먼 나라 동북쪽엔 큰 물고기 형상의 귀신, 내 세상아닌 서북방엔 일양이라는 괴수..라는 위협적인 표현으로 사람을 경계하기 위한 것들이지요. 물에는 그 비치는 그림자로 사람을 아뜩하게하는 망상, 마을 언덕엔 뭔가 모를 짐승들이, 산 속에선 발걸음도 조심해야하지요, 들판에서는 방향을 잡지못해 헤맬 가능성이 많고, 늪지엔 미끄러지듯 다니는 뱀이 많지요. 

마치 옛어른들이 아이들을 경계하기 위해 방아간엔, 폐가엔 귀신이 산다며 다치지 않게 미리 조심시키기 위한 막음질이지요. 그런데 그런 이치를 바로 못보고 귀신이 있다고 믿으니 귀신이 보이는 겁니다. 귀신이란 우리가 빚어낸 허상들이지요 심기가 약하거나 한이 깊으면 이들이 작용하여 헛 것을 보게 하는 겁니다. 물가에선 뱀을 조심하고 산에서나 들판에서는 길을 잃지 않게 조심하라는 의미였을 뿐이지요. 귀신이 있다 없다라는 것아니라... 

公曰:「請問,委蛇之狀何如?」 

환공이:[묻지요 위이의 모양은 어떻지요?] 

-환공은 아직도 제 본 것이 실체인 양 가려보질 못하고 묻지요 

皇子曰:「委蛇,其大如轂,其長如轅,紫衣而朱冠. 其爲物也,惡聞雷車之聲,則捧其首而立. 見之者殆乎覇.」 

황자가 답하길:[위이란 크기가 수레통만하고 길이는 멍에줄만 하고 자줏빛에 붉은 머리를 하고있지요. 그 됨됨이란 수레가 지나는 요란한 소리를 싫어하며 머리를 곧추세우고 있읍니다. 이를 보면 천하의 패자가 된답니다] 

-지혜로운 황자 고오는 환공을 바로 이끌지요... 모습을 형용하며... 못 가에서 본 것이 뱀 형상 아니고 뭘까요? 수레나 인적을 피해 숨어있는 뱀이지요. 그러나 현명한 황자는 그걸 보면 천하를 제패한다 한 마디 더하지요... 마음의 병을 고칠 줄 아는 사람이지요. 

桓公辴然而笑曰:「此寡人之所見者也.」 於是正衣冠與之坐,不終日而不知病之去也. 

환공이 희색하여 웃으며 말하길:[이게 내 본거요] 그러곤 의관을 차려입고 일어나 앉아 그와 얘기하는데 병이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는데 하루도 안되더라. 

-우리는 그럽니다 귀신을 본다는 말은 저 두려워하는 것을 허상으로 보는거지요. 즉, 마음의 병입니다. 그러니 귀신이 있네 없네를 가리려 들지말고 그리 귀신을 보게하는 마음을 다스리면 되는 거지요. 

진리란 "귀신이 없다"라는 말 아니라 상한 정신을 "바로 세워야 한다"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辛苦를 얘기하고 아파합니다. 인생에 고통이 없다 있다를 얘기하는 것은 아직도 진리의 깊이에는 이르지 못한 천박한 안목입니다. 중요한 건 똑같은 일도 고통으로 알게하는 허약한 정신을 곧추세워야 하는 것이지요.


8.

紀渻子爲王養鬪鷄.


기성자는 주 나라 선왕을 위해 투계를 길렀다.


十日而問:「鷄可鬪已乎?」 曰:「未也,方虛憍而恃氣.」


10일이 지나고 : [닭이 이제 싸울 준비 됐나요?] 답이:[아직이요 헛된 교만만 가득차있네요]


十日又問,曰:「未也. 猶應嚮景.」


10일이 또 지나고 물으니 답이:[아직이요. 눈에 뵈는 것에 사로잡혀 있네요]


十日又問,曰:「未也. 猶疾視而盛氣.」


10일이 또 지나 물으니 답이:[아직이요. 다른 닭을 시기하는 맘이 가득하네요]


十日又問,曰:「幾矣.鷄雖有鳴者,已无變矣,望之似木鷄矣,其德全矣,異鷄无敢應,見者反走矣.」


또 10일이 지나 물으니 답이:[됐네요. 다른 닭이 울어도 변화가 없고 먼데만 바라는 것이 나무로 만든 닭 같네요 쌈닭의 덕이 온전하니 다른 닭이 감히 덤비지 못할 터요 보면 도망할 겁니다.]


-투계에 빚대어 진정 경지에 이른 자를 형용합니다. 


1, 자기도 남도 모르는 채 자기의 끓어오르는 것을 주체 못하는 천박한 경지를 말하지요. 이런 하류의 특징은 자기 주제는 커녕 세상이치 조차도 모르고 저 가진 재주, 힘만 믿고 설치는 천둥벌거숭이지요.


2, 남들을 깐보는 단계지요. 어딘가에 저보다 강한, 더 잘아는 이가 있다는 걸 모르고 그저 제 아는 淺見薄識으로 남을 저울질하고 저를 고집하는 어리석음이지요. 저가 다알고 저가 다한다는 치기어린 단계지요


3, 이제 굳이 말하면 공자의 耳順하는 경지에 든 거지요. 다른 닭이 울어도 싸우자고 우는 소리인지 그저 기세롭게 우는 소리인지 밝히알고 그저 일일이 나서지않고, 작은 것은 떠난 경지를 말합니다.


木鷄란 말 그대로 나무로 깎아놓은 듯 외부환경에 무심한 상태를 말합니다. 

어쩔 줄 몰라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것과는 다르지요.

곰도 죽은 시체는 건들지 않는다는데 죽은 시늉하면 목계가 된 건가요? 

아니 무언가로부터의 공격이 있다면 즉각 대응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를 빚대어 말하는 것이 목계입니다.

그저 반응할 줄도 모르는 것이 목계아니지요 송장입니다.


적어도 투계급이요 왕의 투계라면 강자중 강자들을 상대할 재원이지요. 즉, 소소한 지방 대회를 치르는 데야 힘센 놈이, 목청 큰 넘이 상대의 기를 꺾지만... 왕중왕에 나설 정도면 기가 갖춰져야하지요. 아니 싸울 자리에서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 실력을 갖춘 자 그게 깨달은 자입니다. 


죽어넘어간 박제 닭이 투계하나요? 

안 싸우는 것과 못 싸우는 것은 다르지요. 


천하의 사랑이라는 예수도 싸울 자리에선 싸웁니다. 

시시한 부류는 상대도 않고, 상처받은 이들은 그저 사랑으로 감싸안아도... 


죽은 닭이 도를 깨우친 것 아닙니다. 그냥 고기 덩어리일 뿐이지요.

목계와 죽은 닭을 마주세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9.

 

孔子觀於呂梁,縣水三十仞,流沫四十里,黿鼉魚鱉之所不能游也.

 

공자가 여양땅을 관광하는데 그 지역 강물 깊이가 30길이요 길이가 40여리로 험한지라  자라 악어 물고기 거북이가 감히 살지 못하더라. 

 

-우리는 뭔가 다른 걸 보면 우선 눈에 뵈는 것으로 판단내리게 됩니다. 왜? 그런 눈에 보이는 "현상"이 있기 때문에...

 

見一丈夫游之, 以爲有苦而欲死也, 使弟子竝流而拯之. 數百步而出,被髮行歌而游於塘下.

 

한 남자가 헤엄치는 걸 보았는데 마치 물에 빠져죽으려는 듯 보이더라, 하여 제자로 따라가 건져주라 일렀다. 수백보를 헤엄치고 나와 연못가 모래밭을 걸으며 노래하며 가더라.

 

-그런 험한 강을 건너는 사람이 있는데 내 눈에 위태위태하지요 내 판단이 서있으니까... 그러나 그 사람은 그저 유유히 노래나 부르며 거닐 뿐...

 

孔子從而問焉,曰:「吾以子爲鬼,察子則人也. 請問,蹈水有道乎?」

 

공자가 쫓아가 묻길:[내 당신이 귀신인 줄 알았소만 자세히 보니 사람이로세. 묻겠소 강을건너는 뭔 비법이 있소?]

 

-내 판단에 전혀 불가한 일을 하는 걸 보니 귀신이 아니고서야 가능할까 싶더니...

 

曰:「亡,吾无道. 吾始乎故,長乎性,成乎命. 與齊俱入,與汨偕出,從水之道而不爲私焉. 此吾所以蹈之也.」

 

답하길:[헛소리. 내 무슨 방도가 있겠소 그냥 일찍부터 그리해 와 그런거지요, 그러며 자라니 性이되고 이뤄지니 命이 된게지요. 소용돌이를 따라 들어갔다 솟구치면 같이 오를뿐 물의 가는 도리를 따를 뿐 내 사사로이 뭘 하지 않지요. 이게 내 헤엄치는 법이라오]

 

-우리는 뭐 낯선 것을 보면 특별한 것이 있을거라 믿지요. 그러나 그리 살아온 사람에겐 전혀 기이한 일 아니지요. 여기서 故,性,命을 설명하면 공자가 묻는 그런 질문의 연유가 바로 故요 인과론이라는 사고지요... 性이란 그의 특성이라 할 것이지요 그리 살다보면 그게 내 독특한 특성이 되는 겁니다. 命이란 뭍이나 물이나 구별치않고 그저 심상하게 살 경지에 이르면 그게 내 "사는 방식"인 운명이되는 겁니다.

 

孔子曰:「何謂始乎故,長乎性,成乎命?」

 

공자 묻길:[생각의 시작이 까닭이요, 살아가다보면 성품이되고, 경지에 이르러 명이 됐다는 말이 뭐요?]

 

曰:「吾生於陵而安於陵,故也.,長於水而安於水,性也.,不知吾所以然而然,命也.」

 

답하길:[내 본디 뭍에서 낳았으니 뭍이 편하오 그러니 그게 故요(당연히 뭍에서 났으니 뭍이 편하지요 그러니 나 보고 그리 묻지요), 물가에서 자라 물에 익숙하게 됐지요 그게 내 특성이 된거요, 내 있는 자리가 그런지 저런지를 모르니 命이란겁니다.]

 

-선입견이 무서운 이유가 이거지요. 아니 사람들이란 그저 저 아는만큼 보게 마련입니다. 그런 선입견이 하나의 논리로 자리잡으면 그게 가치관이지요. 뭍에서 사는 사람이 물속에서도 자유자재 놀면 기이한 일이지요.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론으로 보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져야 하지만 진리란 그리 딱딱 맞아 떨어지는 인과론으로 설명할 것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고 살아내면 되는 것 그리고 종내 인과론과 부지불식중에 터득한 삶이 하나로 조화가 되면 그것이 내 "살아야할 길"인겁니다. 

 

진리를 깨닫는 방법은 논리가 아니라 말그대로 체득하는 겁니다. "지구는 둥글다" 라는 말을 배우고 안다해도 그건 지식이지 지혜가 아니지요. 지식으로 지혜를 이기지 못합니다. 지혜란 나 아닌 다른 것들을 잘 분변함에서 오지요.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과 "아는게 힘이다"라는 말을 잘 가려 살 줄 알면 지혜로운 자요. 굳이 그 구별의 경계를 벗어나 저 할 것 하는데 막힘이 없는 것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리 이해해도 될까요? 운명이란 바꿀 수 있는겁니다. 시시콜콜 따지지 말고 자기 잘하는 것에서 나름대로 경지에 이르면 되지요. 굳이 희한한 것 배우려 하지말고... 진리를 닦는다며 공연한 눈속임에 자기 먼저 속지 말 일입니다. 그저 진리란 자기의 부족함을 메워가는 과정 중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10.

 

梓慶削木爲鐻,鐻成,見者驚猶鬼神.

 

재경이 나무를 깎아서 거(鐻)라는 악기를 만들었다. 거가 완성되자 보는 이를 본 사람들은 귀신이 조화를 부리지나 않았나 하고 놀라워했다.

 

魯侯見而問焉,曰:「子何術以爲焉?」

 

노나라의 임금이 거를 보고나서 “당신은 무슨 도술(道術)로 이리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對曰:「臣工人,何術之有! 雖然,有一焉. 臣將爲鐻,未嘗敢以耗氣也,必齊以靜心.

 

이에 재경은 “소인은 한낱 장인이온데 무슨 도술이 있겠읍니까! 그래도 한 가지 있다면 있지요. 거를 만들 때면 기(氣)를 써서 하려 않고 심재(心齋) 마음 닦기를 하여 마음을 조용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뭔 일을 하면 책임감이든 뭐든 자신을 몰아부쳐갑니다... 쥐어짜내지요... 그럼 일이 마무리는 될 지언정 산뜻하지 못합니다.

 

齊三日,而不敢懷慶賞爵祿.,齊五日,不敢懷非譽巧拙.,齊七日,輒然忘吾有四枝形體也.

 

사흘 동안 재계를 하면 남들로부터 칭찬이나 상을 받거나 작위나 봉록을 받을 생각을 품지 않게 되고, 닷새 동안 재계를 하면 남들로부터 잘 만들었다 못 만들었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초연해지게 되며, 이레 동안 재계를 하면 갑자기 소인한테 사지와 형체가 있다는 것마저 잊게 됩니다.

 

-우리는 뭔 일을 하면 그로부터 받을 상급부터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이 마음을 급하고 재주를 부리게 만들지요. 아님 남의 평판을 구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남의 칭찬을 구한다는 말이지요 그럼 저 할 도리 못하지요. 아니면 그저 우쭐한 마음으로 내 재주를 믿고 "내가 한다"라는 마음이 생각을 지배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내 욕심과 생각을 투사하기에 하늘이 낸 것 아닌 재주자랑에 불과하게 만들지요.

 

當是時也,无公朝,其巧專而而滑消.,然後入山林,觀天性.,形軀至矣,然後成見鐻,然後加手焉.,不然則已. 則以天合天,器之所以疑神者,其由是與!」

 

 이 정도가 되면  공적으로 해야 할 일을 잊게 되고 거를 만듦에만 전념하게 되고 외골(外骨:바깥 모양)은 사라져 버리고 말지요. 그 후에 산속에 들어가서 하늘 이치를 보지요. 그럼 내 이성이 지극해지고 그 다음에 마음속에 거의 모양이 또렷하게 떠오르게 되면 손을 대기 시작하지요. 마음속에 거의 모양이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으면 그만두고... 즉, 하늘이치에 합하되 내 재주 내 생각아닌 하늘 이치로 하니 내 만든 것이 하늘이 조화를 부린 것처럼 뵈지요 당신이 그리 말하는 연유가 이겁니다.]

 

-뭘 만들거나 누굴 만나든 이게 하나님 원하시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명작을 만들겠다거나 이름을 날리겠다거나 좋은 기억을 주겠다느니라는 생각보다는 하늘이 바라는 그것을 그대로 행하는 말 그대로 도구가 되어야지요. 

 

끌이 망치가 작품을 만드는 것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내 몸뚱아리 내 생각도 하늘 바라시는 도구일 뿐이라는 마음으로 임해야 할 겁니다. 그러면 내 인생이 아름다운 작품이 되지 않을까요?  

 

신묘하다라는 말은 사람의 재주가 아니라 하늘이 그대로 투영됨을 말하지요. 

 

신묘하다고 귀신의 장난이네 뭐네 하는 사람도 있지요.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입니다. 잘 된 것은 잘됐다 함이 옳지요. 틀린 것을 틀렸다 하듯... 제 마음에 합하지 않는다고 소위 보통 사람들의 경지를 넘는다고 경원시하면 안되지요.

 

하늘 진리를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서의 부족함을 부끄러워 해야할 일...


11.

 

東野稷以御見莊公,進退中繩,左右旋中規. 莊公以爲文弗過也,使之鉤百而反.

 

동야직이 장공을 만났다 그나아가고 물러섬이 곧았고 좌우로 도는데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장공이 그저 흉내에 그치는 걸로 알고 백가지 계략으로 내쳤다.

 

顔闔遇之,入見曰:「稷之馬將敗.」 公密而不應.

 

안함이 이를 보고 들어와 이르길:[동야직은 이미 최선을 다한 상태라 실패합니다] 하나 공은 그저 비밀스레 대꾸도 않았다.

 

-여기서 馬라는 단어를 말로만 볼 것 아니라 최선을 다한 상태로 보면 어떨까요?

 

少焉,果敗而反. 公曰:「子何以知之?」

 

얼마지 않아 과연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공이 말하길:[넌 어찌 이를 알았나?]

 

曰:「其馬力竭矣. 而猶求焉,故曰敗.」

 

답하길: [그의 힘이 이미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딱 맞추려고만 하니 그래 실패한다는 게지요]

 

 마력:이는 최선의 힘을 말하지고 최대 능력이라고나 할까요?

 

-그저 기준에 맞도록 처신함은 더 이상의 창조성을 보기 힘들고 그저 인간의 머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하늘 진리의 틀에 맞아야하는데 인간이 형용한 틀과 기준에만 맞추려고 하니 그저 쓰임이 한계가 있읍니다.

 

 

12.

 

工倕旋而蓋規矩,指與物化而不以心稽,故其靈壹一而不桎.

 

공수(노나라때 무기 제작자)가 선을 그림에 규구가 따로 필요치 않았다 손이 바로 그 규구(원 그리는 도구:곡자)자체라 마음먹은 바대로 였다. 그 영이 하나로 통일되어 막히지 않은 것이다.

 

忘足,屨之適也.,忘要,帶之適也.,忘是非,心之適也.,不內變,不外從,事會之適也. 始乎適而未嘗不適者,忘適之適也.

 

발을 잊음은 신발이 딱 맞기 때문이요, 허리를 신경쓰지 않음은 허리띠가 잡아주는 탓이요, 시비를 잊음은 마음이 합하기 때문이요, 마음에 변화가 없고 바깥 물건에 흔들리지 않음은 일이 다 제자리에서 적절하기 때문이다. 뭔가 적절하게 한다는 것은 이미 적절치 못하니 적절함이란 말자체를 잊으시게.

 

-우리는 뭐든 딱 맞아떨어져야 좋은 줄 안다. 그러나 진짜 신묘한 사람은 심신일체로 뭔 일이든 하니 굽거나 틀림이 없는 법. 뭔가로 기준을 세워두면 그 기준에 맞추려다 외려 일을 그르치는 법이다. 본디 지어진 그릇을 살아내야 거침이 없다. 

 

* 공수란 이는 날으는 배를 만들었다는 신묘한 기술자



13.

 

<有孫休者,踵門而詫子扁慶子曰:「休居鄕不見謂不修,臨難不見謂不用.,然而田原不遇歲,事君不遇世,賓於鄕里,逐於州部,則胡罪乎天哉? 休惡遇此命也?」

 

손휴가 편경자의 집을 찾아가서 말했다:[제가 고향에서 살면서 수양이 되지 않았다는 말을 듣지 않았고, 난국에 무용한 사람이란 말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밭과 들판에서 농사를 지어도 풍년을 만나보지 못하고, 임금을 섬김에도 좋은 때를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향리로부터는 배척을 받고 고을로부터는 쫓겨나게 된 처지인데 무슨 죄 때문입니까? 천명일까요? 저는 어째서 이런 운명을 당해야 됩니까?]

 

-우리는 그리 말합니다. 행동거지 바르고 처신 온전하면 된다고... 그러나 그 만으로도 되지않는 게 있지요. 자기라는 자의식을 버려야죠.

 

扁子曰:「子獨不聞夫至人之自行邪? 忘其肝膽,遺其耳目,芒然彷徨乎塵垢之外,逍遙乎无事之業,是謂爲而不恃,長而不宰. 今汝飾知以驚愚,修身以明汚,昭昭乎若揭日月而行也. 汝得全而形軀,具而九竅,无中道夭於聲盲跛蹇而比於人數,亦幸矣,又何暇乎天之怨哉! 子往矣!」

孫子出.

 

편경자가 말했다. :[당신은 깨달은 자의 행동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자신의 간과 쓸개조차도 잊고 자기의 눈과 귀조차도 잊어버린 채, 망연히 속세 밖에 노닐며 업으로 삼는 일 없이 지내는 것 이것을 뭔가를 하되 기대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요 크되 다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 당신은 지식을 꾸며대어 어리석은 사람을 놀라게 하며, 몸을 닦아 남의 더러움을 밝히면서, 밝히보고 산다면서 해와 달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런 당신이 육체를 온전히 지니고 이목구비를 다 갖추고서, 중도에 일찍이 귀머거리나 장님이나 절름발이가 되지 않고, 보통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는 것 만으로도 다행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하늘을 원망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어서 가보시오.]

 

-간담을 버린다는 것 말 그대로 나라는 것 내 생각을 잊는것이고 이목을 닫는다는 건 외부에 대해 잊는다는 것이요 그저 저 할 도리만 하는 걸 의미하죠. 공부한다는 것은 남앞에 자랑하기위해서도 아니요 남들을 판단하려하는거 아닙니다. 남들 의식하고하는 것 아니지요

 

扁子入,坐有間,仰天而歎. 弟子問曰:「先生何爲歎乎?」

 

손휴가 나가자 편경자는 방으로 들어와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는 하늘을 보며 탄식을 했다. 그러자 제자가 물었다:[무엇 때문에 탄식을 하십니까?]

 

扁子曰:「向者休來,吾告之以至人之德,吾恐其驚而遂至於惑也.」

 수

편경자가 말했다:[조금 전에 손휴가 왔을 때 나는 그에게 깨친이의 덕을 얘기해 주었다. 나는 그가 놀라서 마침내는 미혹되게 될까봐 겁이 나는 것이다.]

 

-그냥 그릇만큼 살게 둬야지요...

 

弟子曰:「不然. 孫子之所言是邪? 先生之所言非邪? 非固不能惑是. 孫子所言非邪? 先生所言是邪? 彼固惑而來矣,又奚罪焉!」

 

제자가 말했다:[그렇지 않습니다. 손휴의 주장이 옳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이 틀렸다면, 그른 것이 옳은 것을 미혹하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손휴의 주장이 틀렸고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다면, 그는 본시 미혹한 상태로 왔던 것이니 어찌 선생님의 잘못이 되겠습니까?]

 

扁子曰:「不然. 昔者有鳥止於魯郊,魯君說之,爲具太牢而饗之,奏九韶以樂之,鳥乃始憂悲眩視,不敢飮食. 此之謂以己養養鳥也. 若夫以鳥養養鳥者,宜棲之深林,浮之江湖,食之以委蛇,委蛇而處,則安平陸而已矣. 今休,款啓寡聞之民也,吾告以至人之德,譬之若載鼷以車馬,樂鴳以鐘鼓也. 彼又惡能无驚乎哉!」>

 

편경자가 말했다:[그렇지 않다. 옛날에 한 마리의 새가 날아와 노나라 교외에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그 새를 좋아해서 나라 제사에나 쓰이는 소를 잡아 그 새에게 먹이고, 구소의 음악을 연주하여 그 새를 즐겁게 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새는 처음부터 근심하고 슬퍼하면서 눈이 어지러워져서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못했다. 이것은 자기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길렀기 때문이다. 만약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려면 마땅히 깊은 숲 속에 살게 하고, 강물과 호수 위에 떠다니게 하고, 진흙 속의 미꾸라지를 잡아먹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처럼 넓은 땅에 편안히 지내게 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 손휴는 멍청하고 견문이 적은 사람인데도 내가 그에게 지인의 덕을 얘기 해준 것은 마치 생쥐를 수레나 말에 태워주고 작은 메추라기를 아악으로써 즐겁게 해주려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가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그저 저 나름 그릇대로 살게둬라..다만 서로 어울리기 힘드니 그저 깨친자가 떠나면 될 일 부러 알려주어 병 만들 일 없는 것... 속진의 일은 속인들에게..




'장자 남화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田子方  (0) 2014.12.04
山 木  (0) 2014.12.04
至 樂   (0) 2014.12.04
秋 水 전 문  (0) 2014.12.04
繕 性   (0) 2014.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