達 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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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顔淵問仲尼曰:「吾嘗濟乎觴深之淵,津人操舟若神. 吾問焉,曰:'操舟可學邪?' 曰:'可. 善游者數能. 若乃夫沒人,則未嘗見舟而便操之也.' 吾問焉而不吾告,敢問何謂也?」
안연이 공자에게 묻기를:[제가 상심이란 호수를 건너오는데 강사람의 배젓는 솜씨가 가히 신의 경지입디다. 그래 내 묻기를; 배젓기를 배울수 있나? 답이: 그럼요 수영을 하는 사람은 쉽게 배우고, 잠수할 줄 아는 사람은 배를 본 적 없어도 쉽게 저을 수 있지요.' 내 물어 봤으나 내게 알려주지 않습디다, 감히 청합니다 이는 뭐라 설명할 것인가요?]
仲尼曰:「善游者數能,忘水也. 若乃夫沒人之未嘗見舟而便操之也,彼視淵若陵,視舟之覆猶其車却也. 覆却萬方陳乎前而不得入其舍,惡往而不暇! 以瓦注者巧,以鉤注者憚,以黃金注者殙. 其巧一也,而有所矜,則重外也. 凡外重者內拙.」
공자 답하길:[수영을 잘하는 자는 물에의 공포를 잊으니 그런 것. 잠수하는 자가 배를 본 적없어도 배 젓기를 한다 함은 그는 그런 깊은 물을 땅처럼 보기 때문이요 배가 뒤집히는 것을 수레가 그런 것처럼 알기 때문이라. 뒤집히고 뭔 일이 눈앞에 일어나든 개의치 않으니 두려움이 없으니 한가하지 않을까! 질그릇을 내기로 걸고 활을 쏘면 잘 쏠 수 있지만, 띠고리를 내기로 걸고 쏘면 마음이 걸리게 되고, 황금을 내기로 걸고 쏘면 눈이 가물가물하게 된다. 그의 기술은 항상 같지만 아껴야 할 물건이 있게 되면 밖의 물건이 소중하게 여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밖의 물건을 소중히 여기게 되면 자기 속마음은 졸렬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판단함에 있어 어떤 외연적인 행동이나 태도로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사는 세상에서 행동이란 다 거기서 거기... 배젓기를 예로들어도 그저 배를 젓는다는 동작 하나로만 보면 누구나 다 같을 뿐... 다만 배 젓기라는 동작을 볼 것이 아니라 배를 조종하는 것을 봐야 할 것이다. 즉, 그 노젓는 행동 하나로 판단을 내리기 힘든 법... 배를 조종한다는 것은 물을 안다는 것 물을 안다는 것은 노젓기, 배를 안다는 것과 다른 것 물을 안다는 것은 물속의 지형, 때에 따른 흐름의 차이등을 다 볼 줄 안다는 것... 그러나 그저 노젓기만 가지고 본다면 졸렬한 것... 전체를 읽는 눈이 있느냐 없느냐... 최고의 조정 선수가 한탄강 급물살을 잘 타나? 중요한 건 그 모든 것을 성찰할 줄 아는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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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祝宗人玄端以臨牢筴,說彘曰:「汝奚惡死? 吾將三月豢汝,十日戒,三日齊,藉白茅,加汝肩尻乎彫俎之上,則汝爲之乎?」 爲彘謀,曰不如食以糠糟而錯之牢筴之中,自爲謀,則苟生有軒冕之尊,死得於豚楯之上,聚僂之中則爲之. 爲彘謀則去之,自爲謀則取之,所異彘者何也?
제사지내는 사람이 검은 예복을 입고 (제상에 올리려고) 돼지우리에 와 말하길, [너는 어찌 죽음을 싫어하느냐 내가 석 달이나 너를 잘 먹여 길렀으며, 열흘을 삼갔으며, 사흘 동안 몸을 깨끗이 하였고 흰띠풀 자리를 깔아주었고 거기다가 아름답게 차려진 상 위에 네 엉덩이와 어깨를 놓아 줄 것이거늘, 그걸 마다하나?] 하였는데 돼지를 위해 그리까지 한다지만, 차라리 겨나 지게미를 먹으며 돼지우리 속에 방치되는 것만 못하니 사람이 살 때엔 잘먹으며 대접받기를 원하고 죽어서는 잘 꾸며진 상여에 태워져 그 훌륭한 관속에 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러나 돼지의 입장은 몰라라 버려두고 자기입장 만을 도모하니 돼지가 그러는 것과 뭐가 다른가?
-우리는 그리 말합니다. 난 너에게 최선을 다해줬다... 그러나 받는 상대가 모르면 그도 소용없는 짓이요 역으로 최선을 다해줘라하지만 문제는 그 뭐에 최선을 다할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지요.
그저 잘먹고 종생함이 행복이라면 그리 대해주면 될 일인가요? 젯상에 올릴 돼지라 그야말로 지극정성으로 대접해도 변치 않는 것은 젯상에 올려진다는 사실은 변치않고... 진정 돼지를 위한다면 뭔가 목적이 있어 대접함이 아니라 그저 본성대로 살도록 둠이 옳은 것... 의미란 것을 두어 속이고, 속는들... 뭐가 달라질까?
그리 의미부여를 하는 사람들의 인위를 조심할 일이다. 생명가진 이들의 본성은 딱하나 그 생명이 상하지 않고 천수를 누림이니... 짐승인 돼지란 그런 젯상 꾸밈 정도의 본성을 지닌다고 사람도 그래야 할까? 사람의 본성이란 돼지와는 같지않을 터... 세상을 그저 끌려사는 것 아니라 세상 이치를 꿰뚫어 보려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 아닐까?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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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孔子觀於呂梁,縣水三十仞,流沫四十里,黿鼉魚鱉之所不能游也.
공자가 여양땅을 관광하는데 그 지역 강물 깊이가 30길이요 길이가 40여리로 험한지라 자라 악어 물고기 거북이가 감히 살지 못하더라.
-우리는 뭔가 다른 걸 보면 우선 눈에 뵈는 것으로 판단내리게 됩니다. 왜? 그런 눈에 보이는 "현상"이 있기 때문에...
見一丈夫游之, 以爲有苦而欲死也, 使弟子竝流而拯之. 數百步而出,被髮行歌而游於塘下.
한 남자가 헤엄치는 걸 보았는데 마치 물에 빠져죽으려는 듯 보이더라, 하여 제자로 따라가 건져주라 일렀다. 수백보를 헤엄치고 나와 연못가 모래밭을 걸으며 노래하며 가더라.
-그런 험한 강을 건너는 사람이 있는데 내 눈에 위태위태하지요 내 판단이 서있으니까... 그러나 그 사람은 그저 유유히 노래나 부르며 거닐 뿐...
孔子從而問焉,曰:「吾以子爲鬼,察子則人也. 請問,蹈水有道乎?」
공자가 쫓아가 묻길:[내 당신이 귀신인 줄 알았소만 자세히 보니 사람이로세. 묻겠소 강을건너는 뭔 비법이 있소?]
-내 판단에 전혀 불가한 일을 하는 걸 보니 귀신이 아니고서야 가능할까 싶더니...
曰:「亡,吾无道. 吾始乎故,長乎性,成乎命. 與齊俱入,與汨偕出,從水之道而不爲私焉. 此吾所以蹈之也.」
답하길:[헛소리. 내 무슨 방도가 있겠소 그냥 일찍부터 그리해 와 그런거지요, 그러며 자라니 性이되고 이뤄지니 命이 된게지요. 소용돌이를 따라 들어갔다 솟구치면 같이 오를뿐 물의 가는 도리를 따를 뿐 내 사사로이 뭘 하지 않지요. 이게 내 헤엄치는 법이라오]
-우리는 뭐 낯선 것을 보면 특별한 것이 있을거라 믿지요. 그러나 그리 살아온 사람에겐 전혀 기이한 일 아니지요. 여기서 故,性,命을 설명하면 공자가 묻는 그런 질문의 연유가 바로 故요 인과론이라는 사고지요... 性이란 그의 특성이라 할 것이지요 그리 살다보면 그게 내 독특한 특성이 되는 겁니다. 命이란 뭍이나 물이나 구별치않고 그저 심상하게 살 경지에 이르면 그게 내 "사는 방식"인 운명이되는 겁니다.
孔子曰:「何謂始乎故,長乎性,成乎命?」
공자 묻길:[생각의 시작이 까닭이요, 살아가다보면 성품이되고, 경지에 이르러 명이 됐다는 말이 뭐요?]
曰:「吾生於陵而安於陵,故也.,長於水而安於水,性也.,不知吾所以然而然,命也.」
답하길:[내 본디 뭍에서 낳았으니 뭍이 편하오 그러니 그게 故요(당연히 뭍에서 났으니 뭍이 편하지요 그러니 나 보고 그리 묻지요), 물가에서 자라 물에 익숙하게 됐지요 그게 내 특성이 된거요, 내 있는 자리가 그런지 저런지를 모르니 命이란겁니다.]
-선입견이 무서운 이유가 이거지요. 아니 사람들이란 그저 저 아는만큼 보게 마련입니다. 그런 선입견이 하나의 논리로 자리잡으면 그게 가치관이지요. 뭍에서 사는 사람이 물속에서도 자유자재 놀면 기이한 일이지요.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론으로 보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져야 하지만 진리란 그리 딱딱 맞아 떨어지는 인과론으로 설명할 것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고 살아내면 되는 것 그리고 종내 인과론과 부지불식중에 터득한 삶이 하나로 조화가 되면 그것이 내 "살아야할 길"인겁니다.
진리를 깨닫는 방법은 논리가 아니라 말그대로 체득하는 겁니다. "지구는 둥글다" 라는 말을 배우고 안다해도 그건 지식이지 지혜가 아니지요. 지식으로 지혜를 이기지 못합니다. 지혜란 나 아닌 다른 것들을 잘 분변함에서 오지요.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과 "아는게 힘이다"라는 말을 잘 가려 살 줄 알면 지혜로운 자요. 굳이 그 구별의 경계를 벗어나 저 할 것 하는데 막힘이 없는 것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리 이해해도 될까요? 운명이란 바꿀 수 있는겁니다. 시시콜콜 따지지 말고 자기 잘하는 것에서 나름대로 경지에 이르면 되지요. 굳이 희한한 것 배우려 하지말고... 진리를 닦는다며 공연한 눈속임에 자기 먼저 속지 말 일입니다. 그저 진리란 자기의 부족함을 메워가는 과정 중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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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東野稷以御見莊公,進退中繩,左右旋中規. 莊公以爲文弗過也,使之鉤百而反.
동야직이 장공을 만났다 그나아가고 물러섬이 곧았고 좌우로 도는데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장공이 그저 흉내에 그치는 걸로 알고 백가지 계략으로 내쳤다.
顔闔遇之,入見曰:「稷之馬將敗.」 公密而不應.
안함이 이를 보고 들어와 이르길:[동야직은 이미 최선을 다한 상태라 실패합니다] 하나 공은 그저 비밀스레 대꾸도 않았다.
-여기서 馬라는 단어를 말로만 볼 것 아니라 최선을 다한 상태로 보면 어떨까요?
少焉,果敗而反. 公曰:「子何以知之?」
얼마지 않아 과연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공이 말하길:[넌 어찌 이를 알았나?]
曰:「其馬力竭矣. 而猶求焉,故曰敗.」
답하길: [그의 힘이 이미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딱 맞추려고만 하니 그래 실패한다는 게지요]
마력:이는 최선의 힘을 말하지고 최대 능력이라고나 할까요?
-그저 기준에 맞도록 처신함은 더 이상의 창조성을 보기 힘들고 그저 인간의 머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하늘 진리의 틀에 맞아야하는데 인간이 형용한 틀과 기준에만 맞추려고 하니 그저 쓰임이 한계가 있읍니다.
12.
工倕旋而蓋規矩,指與物化而不以心稽,故其靈壹一而不桎.
공수(노나라때 무기 제작자)가 선을 그림에 규구가 따로 필요치 않았다 손이 바로 그 규구(원 그리는 도구:곡자)자체라 마음먹은 바대로 였다. 그 영이 하나로 통일되어 막히지 않은 것이다.
忘足,屨之適也.,忘要,帶之適也.,忘是非,心之適也.,不內變,不外從,事會之適也. 始乎適而未嘗不適者,忘適之適也.
발을 잊음은 신발이 딱 맞기 때문이요, 허리를 신경쓰지 않음은 허리띠가 잡아주는 탓이요, 시비를 잊음은 마음이 합하기 때문이요, 마음에 변화가 없고 바깥 물건에 흔들리지 않음은 일이 다 제자리에서 적절하기 때문이다. 뭔가 적절하게 한다는 것은 이미 적절치 못하니 적절함이란 말자체를 잊으시게.
-우리는 뭐든 딱 맞아떨어져야 좋은 줄 안다. 그러나 진짜 신묘한 사람은 심신일체로 뭔 일이든 하니 굽거나 틀림이 없는 법. 뭔가로 기준을 세워두면 그 기준에 맞추려다 외려 일을 그르치는 법이다. 본디 지어진 그릇을 살아내야 거침이 없다.
* 공수란 이는 날으는 배를 만들었다는 신묘한 기술자
13.
<有孫休者,踵門而詫子扁慶子曰:「休居鄕不見謂不修,臨難不見謂不用.,然而田原不遇歲,事君不遇世,賓於鄕里,逐於州部,則胡罪乎天哉? 休惡遇此命也?」
손휴가 편경자의 집을 찾아가서 말했다:[제가 고향에서 살면서 수양이 되지 않았다는 말을 듣지 않았고, 난국에 무용한 사람이란 말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밭과 들판에서 농사를 지어도 풍년을 만나보지 못하고, 임금을 섬김에도 좋은 때를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향리로부터는 배척을 받고 고을로부터는 쫓겨나게 된 처지인데 무슨 죄 때문입니까? 천명일까요? 저는 어째서 이런 운명을 당해야 됩니까?]
-우리는 그리 말합니다. 행동거지 바르고 처신 온전하면 된다고... 그러나 그 만으로도 되지않는 게 있지요. 자기라는 자의식을 버려야죠.
扁子曰:「子獨不聞夫至人之自行邪? 忘其肝膽,遺其耳目,芒然彷徨乎塵垢之外,逍遙乎无事之業,是謂爲而不恃,長而不宰. 今汝飾知以驚愚,修身以明汚,昭昭乎若揭日月而行也. 汝得全而形軀,具而九竅,无中道夭於聲盲跛蹇而比於人數,亦幸矣,又何暇乎天之怨哉! 子往矣!」 孫子出.
편경자가 말했다. :[당신은 깨달은 자의 행동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자신의 간과 쓸개조차도 잊고 자기의 눈과 귀조차도 잊어버린 채, 망연히 속세 밖에 노닐며 업으로 삼는 일 없이 지내는 것 이것을 뭔가를 하되 기대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요 크되 다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 당신은 지식을 꾸며대어 어리석은 사람을 놀라게 하며, 몸을 닦아 남의 더러움을 밝히면서, 밝히보고 산다면서 해와 달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런 당신이 육체를 온전히 지니고 이목구비를 다 갖추고서, 중도에 일찍이 귀머거리나 장님이나 절름발이가 되지 않고, 보통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는 것 만으로도 다행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하늘을 원망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어서 가보시오.]
-간담을 버린다는 것 말 그대로 나라는 것 내 생각을 잊는것이고 이목을 닫는다는 건 외부에 대해 잊는다는 것이요 그저 저 할 도리만 하는 걸 의미하죠. 공부한다는 것은 남앞에 자랑하기위해서도 아니요 남들을 판단하려하는거 아닙니다. 남들 의식하고하는 것 아니지요
扁子入,坐有間,仰天而歎. 弟子問曰:「先生何爲歎乎?」
손휴가 나가자 편경자는 방으로 들어와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는 하늘을 보며 탄식을 했다. 그러자 제자가 물었다:[무엇 때문에 탄식을 하십니까?]
扁子曰:「向者休來,吾告之以至人之德,吾恐其驚而遂至於惑也.」 수 편경자가 말했다:[조금 전에 손휴가 왔을 때 나는 그에게 깨친이의 덕을 얘기해 주었다. 나는 그가 놀라서 마침내는 미혹되게 될까봐 겁이 나는 것이다.]
-그냥 그릇만큼 살게 둬야지요...
弟子曰:「不然. 孫子之所言是邪? 先生之所言非邪? 非固不能惑是. 孫子所言非邪? 先生所言是邪? 彼固惑而來矣,又奚罪焉!」
제자가 말했다:[그렇지 않습니다. 손휴의 주장이 옳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이 틀렸다면, 그른 것이 옳은 것을 미혹하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손휴의 주장이 틀렸고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다면, 그는 본시 미혹한 상태로 왔던 것이니 어찌 선생님의 잘못이 되겠습니까?]
扁子曰:「不然. 昔者有鳥止於魯郊,魯君說之,爲具太牢而饗之,奏九韶以樂之,鳥乃始憂悲眩視,不敢飮食. 此之謂以己養養鳥也. 若夫以鳥養養鳥者,宜棲之深林,浮之江湖,食之以委蛇,委蛇而處,則安平陸而已矣. 今休,款啓寡聞之民也,吾告以至人之德,譬之若載鼷以車馬,樂鴳以鐘鼓也. 彼又惡能无驚乎哉!」>
편경자가 말했다:[그렇지 않다. 옛날에 한 마리의 새가 날아와 노나라 교외에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그 새를 좋아해서 나라 제사에나 쓰이는 소를 잡아 그 새에게 먹이고, 구소의 음악을 연주하여 그 새를 즐겁게 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새는 처음부터 근심하고 슬퍼하면서 눈이 어지러워져서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못했다. 이것은 자기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길렀기 때문이다. 만약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려면 마땅히 깊은 숲 속에 살게 하고, 강물과 호수 위에 떠다니게 하고, 진흙 속의 미꾸라지를 잡아먹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처럼 넓은 땅에 편안히 지내게 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 손휴는 멍청하고 견문이 적은 사람인데도 내가 그에게 지인의 덕을 얘기 해준 것은 마치 생쥐를 수레나 말에 태워주고 작은 메추라기를 아악으로써 즐겁게 해주려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가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그저 저 나름 그릇대로 살게둬라..다만 서로 어울리기 힘드니 그저 깨친자가 떠나면 될 일 부러 알려주어 병 만들 일 없는 것... 속진의 일은 속인들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