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 北 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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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齧缺問道乎被衣,被衣曰:「若正汝形,一汝視,天和將至.,攝汝知,一汝度,神將來舍. 德將爲汝美,道將爲汝居,汝瞳焉如新生之犢而无求其故!」 설결이 피의에게 도를 물었더니 피의 왈:[네 몸가짐을 바로 하여 네 보임을 하나로 하면 하늘 뜻에 부합하리라. 앎을 자랑말고 네 태도가 하나 되면 신명이 네게 와 머무르리. 덕은 너를 아름답게 할 것이요 도는 너로 살게할 것이니 네 눈은 마치 갓난 송아지 처럼 순박해저 그 연고를 따지지 않게되리] -처신을 하되 일이관지 통일됨이 있어 한결같으면 하늘도 감동하시지요. 지성이면 감천이지요. 조금 안다고 자랑하고 나서면서 경망하게 이리저리 자기 논리 남의 논리 끌어대다 보면 사람들도 떠납니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대할 때 사람도 하늘도 감동하는 법입니다. 뭐든 한가지로 깊이 파면 경지에 오르는 법입니다. 그러나 처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입장이나 말을 바꾸는 사람이 있지요 그걸 지혜인 양... 아니 이미 몸에 배인 사람있읍니다. 그런 이에겐 진리가 오다가도 비켜가는 법입니다. 익어가면서 그런 태를 못 벗으면 되나요? 言未卒,齧缺睡寐. 被衣大說,行歌而去之,曰:「形若槁骸,心若死灰,眞其實知,不以故自持. 媒媒晦晦,无心而不可與謀. 彼何人哉!」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설결이 잠들어 버렸다. 피의가 크게 기뻐하며 노래를 부르며 떠나며 한마디하길:[몸은 마른 해골이요 마음은 죽은 재같으니 실지 알면서도 스스로 특별하다 않고 속을 뵈지 않으니 마음이 없으니 뭘 논하지 못하겠군 저는 어떤 사람인가!] -도=깨우침이 뭐 색다를거라는 생각이 문제...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림이 옳듯... 도를 향한 열정도 사실은 나를 진리로 이끌어주는 도구 일 뿐... 처신이니 마음속의 정의니가 뭐 중요한가요? 처신이나 정의는 그때마다 달라지는 법.. 항구여일함이 중요하지요. 무얼하든 극진히 하면 경지에 이르는 법입니다. |
4.
舜問乎丞曰:「道可得而有乎?」
순임금이 승에게 묻기를:[도를 깨칠수 있는 법이 있읍니가?]
-우리는 진리도 그저 내 안에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내가 알 수 있다라고... 물론 궁리가 있고 생각이 있으니 그러리라 합니다만... 이는 마치 거미줄로 바람을 묶겠다는 것 만치 어리석은 생각이지요. 진리란 내가 몸 담굴 바다와 같은 겁니다 한 바가지 바닷물이 바다는 아니지요.
질문하는 방법이 달라지면 듣는 답도 달라지는 법...
曰:「汝身非汝有也,汝何得有夫道?」
답이:[당신 몸이 당신 것 아닌데 어찌 진리라는 걸 담겠소?]
-스승의 답이 의미하는 바는 그거지요. 뭘 담으려 하든 중요한 것은 남의 그릇에 담으면 그것이 내 것인가요? 우리네 몸이란 건 사실 그저 빌어쓰는 것이지 내 몸 중 무엇 하나를 내 의지로 만든 것 있나요? 그저 입히고 가르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지요 잘 간수할 책임만 우리가 가진겁니다.
"네가 염려한 들 키를 한 자나 자라게 할 수 있느냐?"
舜曰:「吾身非吾有也,孰有之哉?」
순이 말하길:[내 몸이 내것 아니라면 누구 것이란게요?]
-우리는 그럽니다. 내 몸이니까 내 것이라고... 내 손에 있으니 내 거라고... 그 생각 자체를 버려야지요. 우리 몸이란 것도 독약을 먹이면 구토를 하고 살지 못하는 겁니다. 내가 함부로 할 수 있으니 내 것이다라는 생각 위험한 겁니다. 굳이 말하면 몸이 나 아니요 정신이 나입니다. 몸뚱아리란 그저 빌어 사는 자연의 일부지요. 그러니 몸을 잘 간수함이 예의지요. 내 몸뚱이 함부로 굴려 암이라도 걸리면 그 몸뚱이 자연으로 돌려주지 못합니다. 비료로도 쓰지 못하지요. 남에게 빌어쓰는 이가 함부로 물건 상하게 하면 되나요 어디?
曰:「是天地之委形也.,生非汝有,是天地之委和也.,姓名非汝有,是天地之委順也.孫子非汝有,是天地之委蛻也. 故行不知所往,處不知所持,食不知所味. 天地之强陽氣也,又胡可得而有邪!」
이르길:[이 몸은 천지가 지어준 게지요. 삶도 그대 것이라 할 수없고 이도 천지의 조화가운데 위임된 겁니다. 이름도 당신 것 아니지요 이도 천지가 따르도록 위임해 준겁니다. 자손들도 당신 것 아닙니다 이도 세상이 덧붙여 맡기신겁니다. 그러니 뭘 의도하고 행하지 마시고 뭘 잡으려고 자리잡지마시고 먹되 맛을 바라고 먹지마시오. 천지란 강한 양기인데 어찌 그를 가질 수있다는 말이요?]
-이 몸이 천지로 부터 위임받은 것이라는 그런 자기사랑 없으면 인간이 비천해집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은 하나님의 귀한 창조의지로 지으심 받은 그의 자녀들입니다 그걸 모르는 자들이 자기를 경시하고 함부로 하지요 아님 반대로 끔찍이 아끼거나... 이름이란 것도 그러지요 내가 나 부르나요 남이 부르지? 남들 위해 이름 있는 겁니다. 내 가족 내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물건 아니지요 물건이라면 금지옥엽 사랑으로 키울까요?
자식도 내 소유물 아니요 기실 내 몸, 내 가정 빌어 잘 양육하라는 책임입니다. 그러기에 매도 들고 꾸중하며 가꾸어가는 거지요. 내 물건이라면 막쓰다가 소용없어지고 맘에 안들면 버리면 되는게 가족이라 생각한다면 참 많이 틀린 생각하는 거지요.
이런 작은 생각의 전환이 진리를 살게하는 기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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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7.
妸荷甘與神農同學於老龍吉. 神農隱几闔戶晝瞑,妸荷甘日中奓戶而入曰:「老龍死矣!」 神農隱几擁杖而起,嚗然放杖而笑,曰:「天知予僻陋慢訑,故棄予而死. 已矣! 夫子无所發予之狂言而死矣夫!」
아하감이 신농씨와 나이많은 용길 산하에서 공부하였다. 신농씨가 잠깐 문짝뒤 평상에 기대어 잠자는데 아하감이 문 열고 들어와 말하길:[스승이 돌아가셨다!] 신농이 평상에서 지팡이를 잡고 일어나려하더니 갑자기 지팡이를 놓고 웃으며 말하길:[하늘이 내가 비루하고,교만하고 방종하는 것을 알고 피하였구나 그래서 버리고 죽었구나. 그렇구나! 내가 발전은 없고 헛소리만 하니 돌아가셨구나]
-여기서 신농의 태도는 지극히 아전인수격이지요 애통해 하는 듯하나 제 판단을 들이대고 있는 겁니다. 죽음이란 진리계에서 보면 생명이나 다름 아니건만 자신 탓으로 죽었다는 논리를 펴는 것은 진리를 아는 사람이 할 도리 아니지요.
弇堈弔聞之曰:「夫體道者,天下之君子所繫焉. 今於道,秋毫之端萬分未得處一焉,而猶知藏其狂言而死,又況夫體道者乎! 視之无形,聽之无聲,於人之論者,謂之冥冥,所以論道,而非道也.」
감강이 조문와 말하길:[무릇 도를 체득함은 천하 군주가 매여야 할 자리이다. 지금의 도의 상태는 실날같은 털끝 만분의 일도 못하면서 오히려 헛소리 때문에 죽었다고 알고있으니 하물며 도를 체득이나 했을까! 무형을 보고 무성을 듣는다며 논하는 사람이 진리를 일컬어 아득한 진리라는데 그건 논리요 말 장난이지 도가 아니다]
-도를 체득할 궁리는 않고 교만하게 자기 중심적인 사고로 스승의 죽음을 말하는 사람이 뭔 도를 알겠는가? 말로는 번지르르한 논리를 읊조려도 그건 말장난이지 진리가 아니다.
진리란 질박하고 소박한 것이지 휘황한 말장난이나 논리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법. 진리가 말장난에 갇히우면 진리일까? 그리 말에 진리를 가두려고 애쓰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요 교만이다.
진리는 내가 몸담궈야 할 큰 물이지 내 말의 그릇에 담을 것 아니다.
8.
이 문장에서 태청,무궁,무위,무시는 의인화법으로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이지요.
태청:고아한 인격
무궁:가이없는 어짊
무위:신중하게 사는 깨달은 이
무시:주의깊어 아무 일도 벌리지 않음, 속이 깊은 이라 볼 것이지요
於是泰淸問乎无窮曰:「子知道乎?」
이때 태청이 무궁에게 묻기를:[당신은 진리에 대해 아시나요?]
-태청은 순박한 이요 진리를 닦는 선비를 말하지요
无窮曰:「吾不知.」
무궁이 답하길:[난 모릅니다]
-무궁은 순박한 태청에게 말합니다 진리를 모른다고.. 마음이 따뜻한 거지요 사랑입니다.
又問乎无爲. 無爲曰:「吾知道.」
다시 무위에게 물으니 무위 말하길:[압니다]
-무위는 잘 가려 행하는 깨달은 자입니다.
曰:「子之知道,亦有數乎?」
[아신다니 뭐 특별한 것 있읍니까?]
曰:「有.」
[있지요]
无爲曰:「吾知道之可以貴,可以賤,可以約,可以散,此吾所以知道之數也.」
무위 말하길:[내가 진리와 함께하니 귀하게 될 수도 있고 천하게 될 수도 있고, 모여들 수도 있고 흩어질 수도 있지요 이게 내 아는 진리의 특별함입니다]
-진리란 맑은 수정 같은 유형의 것 아니지요 굳이 말하면 이 모든 것의 움직임 그자체가 진리지요. 그러니 진리란 어느 특정한 사람이나 행동이 가질 수 있는 것 아닙니다. 그러니 인위를 배제하고 진리가 저 갈 길 잘 가도록 놔둬야지요.
泰淸以之言也問乎无始曰:「若是,則无窮之弗知與无爲之知,孰是而孰非乎?」
태청이 무시에게 묻기를:[무궁은 진리를 모른다하고 무위는 안다하는데 누가 맞고 누가 틀린겁니까?]
-무시란 말그대로 시작함이 없는 것... 장자의 진리관에서 세상이란 서로 얽히고 설킴이기에 이런 시작이 없음이 알고도 모르는 듯 사는 진중한 태도라 봅니다.
无始曰:「不知深矣,知之淺矣.,弗知內矣,知之外矣.」
무시 이르길:[모름은 깊고 안다는 건 얕지요 알지 못함은 안이요 안다함은 밖이지요]
-일단 말로 꺼내놓기 시작하면 온갖 분란이 생김을 말합니다. 그러니 구태여 그런 분란을 피하지요.
於是泰淸中而歎曰:「弗知乃知乎! 知乃不知乎! 孰知不知之知?」
태청이 탄식하는 중에 말하길:[모름이 앎이요 앎이 모름이니 누가 아는 걸 모름이 낫다는 것을 알까요?]
-즉, 안다고 느낀 순간 분란의 씨앗이 뿌려지니 그를 모름이 낫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나요?
无始曰:「道不可聞,聞而非也.,道不可見,見而非也.,道不可言,言而非也. 知形形之不形乎! 道不當名.」
무시 왈:[진리란 들리지 않으니 만약 들리면 아닌겁니다, 진리란 뵈지않으니 뵈면 아닙니다, 진리란 말로 되지 않으니 말이 되면 틀린 겁니다. 모습이 없는 것의 모습을 모양으로 아는 겁니다! 진리란 이름지워지지 않지요]
-이는 그저 不可知論과는 다른 겁니다. 알수있으나 그걸 말로 가두지 말자는 얘기지요
无始曰:「有問道而應之者,不知道也. 雖問道者,亦未聞道. 道无問,問无應. 无問問之,是問窮也.,无應應之,是无內也. 以无內待問窮,若是者,外不觀乎宇宙,內不知乎大初,是以不過乎崑崙,不遊乎太虛.」
무시가 이르길:[진리에 대한 물음에 말로 대답하는 이는 정작은 모르는 자입니다. 물어보는 사람도 아직 진리에 대해 들은 적 없는 자이지요. 진리란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습니다. 묻지 않으면서 묻는 것 이것이 묻는 법의 궁극적인 모습이요 대답하지 않으며 대답함이 속내가 없음입니다. 속내없이 궁극적인 질문을 기다리는 사람은 밖으로 우주만물을 생각지 않고 안으로 큰 시초를 모르는 자입니다 이런 이는 곤륜을 가보지도 못하고 태허의 경지를 노니지도 못한 자입니다]
-뭔가를 안다고 나섬은 가뜩이나 어지러운 세상을 더 어지럽히는 행동이지요 진리란 그저 통하고 느끼는 겁니다. 질문한다는 자체가 이미 진리를 제 자리에서 끌어내는 것이고 대답한다는 자체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겁니다. 뭔가 대답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자는 아직 진리를 깊이 느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진리를 가두고 있는 사람이지요.
이 가공의 인물들은 굳이 말하면 깨친이의 모습들입니다. 그중 어떤 모습이 나을까요라는 말은 의미없지만... 무시란 진리를 자리에서 끌어내지 말자는 뜻입니다 진리란 복잡하니 아무것도 말자가 아니라 꼭해야 할 것은 칼 들어와도 하자는 겁니다. 그저 도통한 연 아무것도 안하는 게으름을, 무지를 이 말에 갖다 붙이면 안되지요.
깨친 이는 이 모습들을 고루 갖추고 있어야지요. 그 중 하나만 고름 역시 진리를 욕되게 하는 겁니다.
9.
여기서 광요란: 지혜로 남에게 빛을 비춰주지만 자기는 드러내지 않는 덕있는 자를 의미하지요. 무유란 유가 없음... 없음과 있음이란 말이 반대말로 알려져있지만 있음의 반대말이 '있지 않음'이라면 그게 없음=무일까?
光曜問乎无有曰:「夫子有乎? 其无有乎? 无有弗應也. 光曜不得問,而孰視其狀貌,窅然空然,終日視之而不見,聽之而不聞,博之而不得也. 光曜曰:「至矣! 其孰能至此乎! 予能有无矣,而未能无无也.,及爲无有矣,何從至此哉!」
광요가 무유에게 물어 가로되:[당신은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까? 무유가 반응이 없더라. 물음에 답이 없자 그 모양을 살피는데 허허로워 공허해보이고 온 종일 보아도 뭐 뵈는 것이 없으며 들으려해도 소리도 없고 시험해봐도 얻을게 없었다. 광요 왈: 지극하도다! 누구가 이리까지 지극할까! 이런 없음이 있을까 무라라는 것 조차 없애어 유라는 것을 없게하니 누가 이 경지를 알랴]
-우리는 유 무라는 말로 뭔가를 정의하고 그 상태만이 무요 유니 한다. 그러나 무란 있음이란게 아닌 무엇인가 없는 것인가? 무와 유의 상대적인 판단을 떠난 진짜 없음이 무요 공이란 단어를 대입함이지 있음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무란 단어를 쓰는 것 아니다.
무유란 우리가 무라고 아는 그것이지요. 유무란 그런 상대성 조차를 뛰어넘은 것이 무유이지요.
10. 여기서 대마란 무엇일까요? 큰 말? 아니지요 크게 쓰이는 쓰임을 말하지요 그러니 권세자도 왕도 될 수 있지요. 대마와 타구를 견주는 이유는 하나지요 크게 쓰임받는다고 진리나 도를 깨우친 것 아니라는 역설입니다 파라독스지요. 율법학자가 제사장이 레위인이 진리를 담고있는 것 아닙니다. 진리란 그리 담아지는 물건 아니지요. 大馬之捶鉤者,年八十矣,而不失豪芒. 大馬曰:「子巧與? 有道與?」 대마를 위해 띠고리만드는 자가 있어 나이가 80살인데 작은 삐침도 실수하지 않았다. 대마가 묻기를:[당신은 재주가 좋은 거요? 도를 깨우친 거요?] 曰:「臣有守也. 臣之年二十而好捶鉤,於物无視也,非鉤无察也. 是用之者,假不用者也以長得其用,而況乎无不用者乎! 物孰不資焉!」 답이:[전 수칙이 하나 있읍니다. 제가 나이 20에 띠고리 만드는 것을 좋아하게 됐는데 다른 건 보지않고 고리아니면 살피지도 않았읍니다. 이리하니 이를테면 무지한 저도 나이가 들어 그게 뭔지를 알게됐지요 하물며 뭔가 아는 사람이라면야! 만물이 다 도통할 자질이 있는 것 아닌가요!] -뭔가를 뜻을 품었으면 그것말고 다른 건 보지 말아야지요. 왜? 삿된 생각이 틈타기에.. 쓸모없는 무지랭이도 지극 정성으로 하나에 집중하면 이리되는데 자질을 타고 난 사람이라면 안될 이유가 없지요. 사람을 보면 다 저마다의 특징 재주가 있기 마련이지요. 어떤 이는 좋은 자질을 타고나서도 닦지않아 썩히는가 하면, 좀 모자라도 전심전력하여 일가를 이루는 이도 있지요. 반면에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영재를 보면 안타깝지요 다른데 정신 팔려 제 것은 잊고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 받은 것=진리를 실현할 재능을 그저 시장통 길바닥에 버리는 사람 있읍니다. 자신을 모르고 게으른 탓이지요. 재주많으면 굶어죽는다는 말이 있읍니다. 그게 쓰임이 많은 듯하지만 나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그저 재주꾼으로 조롱속 원숭이처럼 최후를 맞는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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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顔淵問乎仲尼曰:「回嘗聞諸夫子曰:'无有所將,无有所迎.' 回敢問其遊.」 안연이 공자에게 묻길:[스승이 말한 것이 기억나는데 '오는 일에나 가는 것에 맘두지마라'하셨는데 그 경지가 뭔지요?] 仲尼曰:「古之人, 外化安不化, 安與之相靡, 必與之莫多. 豨韋氏之囿,黃帝之圃,有虞氏之宮,湯武之室. 君子之人,若儒墨者師,故以是非相齏也,而況今之人乎! 聖人虛物不傷物. 不傷物者,物亦不能傷也. 唯无所傷者,爲能與人相將迎. 山林與! 皐壤與! 使我欣欣然而樂與! 樂未畢也,哀又繼之. 哀樂之來,吾不能禦,其去弗能止. 悲夫,世人直爲物逆旅耳! 夫知遇而不知所不遇,能能而不能所不能. 无知无能者,固人之所不免也. 夫務免乎人之所不免者,豈不亦悲哉! 至言去言,至爲去爲. 齊知之所知,則淺矣.」 공자가 답하길:[옛사람은 바깥 변화에 편안하여 그에 휘둘리지 않고 그들과 섞이어 편안하니 그런 자세가 아주 많이 필요하다. 희위씨는 동산에서 황제씨는 전답에서, 순임금(유우)은 궁에서 탕왕과 무왕은 방에서 노닐었다. 소위 군자라는 사람들 유묵자의 스승들인데 시비를 따지느라 서로 견디질 못했으니 하물며 지금 사람들이야! 성인은 사물에 집착하지 않으니 사물을 상하지 않았고 이리 사물을 상하지 않으니 사물도 그를 상치 못했다. 이리 상함없는 사람들은 사람들과 더불어 만남과 헤어짐을 잘하며 (將迎)잘 섞여지낼 수 있다. 산림에서, 물가에서 자기를 기쁘게 하여야만 즐길줄 아는것! 즐김이 끝나기도 전에 슬픔이 이어지는 법. 슬픔과 기쁨이 오는 것을 내 능히 제어하지 못하니 그 가는 것도 멈추지 못한다. 슬프도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외물에 거슬러 살 뿐이네! 그런 만남법을 알지못하니 피할 자리도 알지 못하며, 만나긴해도 안 만남을 피하지 못하는 법. 모르고 하지 못함은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것. 대저 이를 면하려 애쓰는 이가 있으니 또한 슬픈 일 아니냐! 깨달은 말도 쓸모없고 깨달은 행위도 쓸모없다. 앎(지식)으로 지혜를 구하는 것은 천박함이다(淺見薄識)] -옛사람이란 중국인들 사고 중 옛날이 완전했고 점점더 복잡해지며 순수함을 잃어간다는 사고로 보면 완전한 사람을 의미하죠. 희위씨는 온 산천을, 황제는 경작지를 품어안고 살았으나 탕왕이나 무왕은 고작 밀실에 갖혀 놀았다. 유묵자들이 하는 일이란 서로 한 사물을 놓고 옳으네 그르네를 따지는 것으로 소일하는 사람들이니 굳이 그 사물을 끌어내어 장식하고 꾸민들 그 사물이 변하나? 그런 내 논리가 없는 사람은 사람들과 잘 섞여사는 법... 굳이 내 線을 세운다고 세우는 것은 徒勞 아니냐? 많이 안다고 바로 아느냐? 그리 이리저리 윤리니 정의니 줄긋기 하다보면 정작 운신할 폭이 좁아지니 그저 선없이 살자는 것인가요? 아니요 내가 긋는 선을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겁니다. 하나님 주시는 경계를 살라는 말이지요 막 살자라는 말 아닙니다. 오히려 그 얕은 앎이 나를 잡아먹으니 모름만 못하다는 말 아니지요. 알지 말고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깨닫기 원하면 끝까지 아니 그 너머까지 가봐야지요 그래야 어디서 멈춰설 지 알게 되고 그게 지혜로 남는 겁니다. 거기까지 가지도 않고 지레 멈춰서서 따라오지 않는 사람 게으르다고 탓하고 지나쳐 가는 사람 무식하다 할 일 아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