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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남화경

知 北 遊

知 北 遊 

1. 

知北遊於元水之上,登隱弅之丘而適遭无爲謂焉. 知謂无爲謂曰:「予欲有問乎若.,何思何慮則知道? 何處何服則安道? 何從何道則得道?」 三問而无爲謂不答也,非不答,不知答也. 

지혜가 북쪽을 유람하다 원수라는 지역에 이르러 隱弅之丘에 올라 무위라 일컬어지는 이와 마주쳤다. 지혜가 무위라는 것에게 묻길:[묻고싶은게 있소. 뭘 생각하고 뭘 고려해야 도를 알까요? 어디에 거하고 뭘 입어야 도를 사는 겁니까? 어찌 따르며 어느 길을 가야 도를 깨치나요?] 3가지를 물어도 무위라는 이가 답이 없더라 답을 안하는 것 아니라 답을 알지 못하더라. 

知北遊란 지혜가 북쪽:玄妙함을 여행한다라는 우화 형식이지요. 지혜란 진리와는 다른 겁니다. 無爲란 장자가 최고 진리로 생각하는 진리를 사는 모습을 형용하는 이름이지요 여기서 원수란 노자가 말하는 모든 덕의 모양 물의 근원이요 은분지구란 그 자리서 그래도 우뚝 선 위치를 말하지요... 즉, 도의 원래모습을 지닌 중 나은 사람들의 자리에서 가장 윗줄인 무위라는 이를 만나다... 

知不得問,反於白水之南,登狐闋之上,而睹狂屈焉. 知以之言也問乎狂屈. 狂屈曰.「唉! 予知之,將語若,中欲言而忘其所欲言.」 

지혜가 그 답을 듣지 못하곤 백수의 남쪽에 이르러 狐闋之上에 올라 광굴을 보게 되었다. 광굴에게 지혜가 말을걸어 물었다. 광굴이 답하길:[아! 알지요... 답을 하려는 순간 답하려던 말을 잊고말았다] 

-진리란 무형의 것이 말이란 유형의 것에 갇히우면 이미 충분한 진리 아니지요. 광굴이란 뭐에든 자기를 꺾어내는 자세를 말하지요. 좋게 말하면 겸손한 이요 익은벼로 비견할 만하지요. 실은 모르고 외양만 있는... 


知不得問,反於帝宮,見黃帝而問焉. 黃帝曰:「无思无慮始知道,无處无服始安道,无從无道始得道.」 
知問黃帝曰:「我與若知之,彼與彼不知也,其孰是邪?」 
黃帝曰:「彼无爲謂眞是也,狂屈似之.,我與汝終不近也. 夫知者不言,言者不知,故聖人行不言之敎. 道不可致,德不可至. 仁可爲也,義可虧也,禮相僞也. 故曰:"失道而後德,失德而後仁,失仁而後義,失義而後禮. 禮者,道之華而亂之首也." 故曰:"爲道者日損,損之又損之以至於无爲,无爲而无不爲也." 今已爲物也,欲復歸根,不亦難乎! 其易也,其唯大人乎! 
「生也死之徒,死也生之始,孰知其紀! 人之生,氣之聚也.,聚則爲生,散則爲死. 若死生爲徒,吾又何患! 故萬物一也,是其所美者爲神奇,其所惡者爲臭腐.,臭腐復化爲神奇,神奇復化爲臭腐. 故曰:"通天下一氣耳." 聖人故貴一.」 

지혜가 답을 듣지 못하고 황궁으로 돌아와 황제를 만나 물으니. 황제 말하길:[아무 생각도 고려도 않음이 도의 시작이요, 뭘 입고 어디 거할지 모름이 도에 머무는 것이며 뭘 따르고 뭔 길을 가지 않음이 깨우침의 시작이지요] 

지혜가 황제에게 묻길:[저도 그리 압니다만 그들은 그걸 모르더군요 누가 옳은건가요?] 

황제왈:[저 무위라는 이가 옳지요 광굴도 그러하구요. 나나 당신을 종내 근처도 못갈겁니다. 대저 진짜 아는 이는 말을 아끼고 말로 하는 자는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성인은 말을 안하고 가르치지요. 도는 말로 이르지 못하며 덕은 말로 극진해지지 않으며 어짊을 꾸며 행하면 의가 어지러지며 예라는 이름으로 서로 속이는 겁니다. 그래서 이르길:"도를 잃으면 덕이 나서고 덕을 잃으면 어짊이 나서며 어짊을 잃으면 의가 나서고 의를 잃으면 예가 나선다 하지요. 예라는 것은 화려하긴하나 모든 분란의 으뜸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또 이르길:[도를 행하는 자는 버리는 것이니 버리고 또 버리면 무위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뭔가를 하지않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미 物화된 지금 근본으로 돌아가자 한들 어려운 일 아니겠소 그걸 쉽게하면 큰 사람이지요! 

-진리를 이게 진리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진리에 대해 욕되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를 대신할 것들을 이미 만들어 가지고 있지요. 

道-德-仁-義-禮 게중 예란 가장 초보적인 진리의 삶이지요 사람들은 아직도 이 예에 매달려 허우적댑니다. 예란 것이 지방마다, 저마다 다 다르기에 미망에서 헤어나질 못하는게지요. 그래서 정의라는 말로 義라는 걸 세웁니다만... 그 나마도 다 저각각이지요. 

그를 다 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仁은 우리가 흔히 자애로움 사랑이라는 말로들 표현하는 그것입니다만... 그건 그저 마음이 넓거나 이도저도 좋다는 자기 기만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랑도 德과 仁으로 나뉩니다. 진리란 그대로 사람들에 선뜻 들어오지 못하기에 이런 모습들로 설명되어지지요. 

과연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마다 스스로의 가치관은 서있으니 의의 단계 정도는 와있다면 어짊을 노력하는 단계 쯤일까요? 아님 그저 모든 것을 감싸안으면서도 하늘 이치대로 생사일여의 이치를 알고 포용하는 덕의 단계??? 

무위란 굳이 말하면 도와 덕의 단계지요. 뭘 하지도 않으며 모든 것을 이뤄가는... 광굴이란 인이라는 등성이를 올라선 사람이고... 지혜란 옳고그름을 가리는 의의 단계 정도일까요? 아니 진리를 살 수있게 하는 좋은 수단이라고나 할까요? 여기에 매이면 칼질놀이에 빠지지요. 정의란 것의 실상이 뭔가요? 

물화되었다라는 말은 이미 주객 도식에 갇히운 걸 말합니다. 즉, 저마다의 판단에 갇혀 말싸움될 소지가 많은 거지요. 

[생이란 죽음과 짝이요 죽음은 생의 시작이요 누가 그 연대기를 알까요? 사람의 삶이란 기의 모듬이요 그런 모듬이 생을 살게하고 흩어지면 죽는 겁니다. 삶과 죽음을 짝으로 본다면 뭐가 걱정일까요? 만물은 하나입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하늘의 기적이라 하고 그 추함을 썩은 냄새라 합니다. 그 썩은냄새도 외려 하늘의 기적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신기도 썩은 냄새될 수도 있는겁니다. 그래서 이르길:"천하란 하나의 기로 통한다"했고 그래서 성인들은 하나로 꿰고 있었던 겁니다] 

-생사일여라는 말이 뭔가요? 사람들은 그저 그리 말하고 삽니다. 생은 좋고 죽음은 나쁘다... 양단간 선택을 하려하지요. 아직도 칼질놀이에 빠져있는겁니다. 

분명한 것이 좋은 것이라며.. 어디 인생이 무자르듯 되나요? 그래서 혹자는 그러지요 어울렁 더울렁 사는게 좋은거라고... 그러면서도 의의 단계에 갖혀 사랑도 내가하면 사랑이요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이중잣대로 살지요. 

잣대를 버려야 인의 경지에 들어서는겁니다. 그리고 견위수명 모든 것 하나님 주시는 것이라 믿을때 덕의 경지에 들어서구요. 

知謂黃帝曰:「吾問无爲謂,无爲謂不應我,非不我應,不知應我也. 吾問狂屈,狂屈中欲告我而不我告,非不我告,中欲告而忘之也. 今予問乎若,若知之,奚故不近?」 
黃帝曰:「彼其眞是也,以其不知也.,此其似之也,以其忘之也.,予與若終不近也,以其知之也.」 
狂屈問之,以黃帝爲知言. 

지혜가 황제에게 묻길:[내가 무위라는 이에게 물었을때 무위라는 이가 내게 답을 안함은 내 대답을 안한 것 아니라 어찌 답할지를 몰라였군요. 광굴에 물었을때도 그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말하지 못한 것은 내게 답을 안주려한 것 아니라 하고자 했으나 잊은 것이군요. 이제 묻고보니 알것같습니다 근데 어째 근처도 못간다하시지요?] 

황제왈:[무위라는 이는 진짜라서지요 그러니 아예 모르지요. 광굴은 가짜니 잊고살지요 당신과 내가 근처도 못간다는 말은 이를 알기 때문이요.] 광굴이 묻고 황제는 말로 하기 때문이지요. 

-진리를 진짜로 사는 사람은 체득되어 있으니 외려 말로 끄집어 설명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왜 밥을 먹나요라는 질문에 분분한 답을 낸다고 답이 되나요? 마더 테레사에게 당신은 왜 그리 사냐고 묻는다면? 에베레스트를 오른 힐러리 경에게 왜 산을 오르냐고 물으면 그 답이 뭘까요?


2.

 

天地有大美而不言,四時有明法而不議,萬物有成理而不說. 聖人者,原天地之美而達萬物之理,是故至人无爲,大聖不作,觀於天地之謂也.

 

세상은 큰 아름다움이 있으나 말로 되지않고, 사시사철엔 분명한 법칙이 있어 의논거리 아니요 만물은 나름의 이치가 있으나 설명되지 않는다. 성인은 원래 세상의 아름다움이요 만물의 이치이니 이런고로 깨달은 자는 무위를 따른다 큰 성인은 뭘 꾸미고 하려하지 않고 그저 천지 이치가 그리 굴러감을 볼 뿐이다.

 

-세상을 이 작은 머리속에, 마음속에 품어 넣을 수 있는가? 아니 내가 아름답다하는 것이 세상 전체의 아름다움인가 일부인가? 계절의 오감에 예외가 있나 아니 바꾸고 변하게 할 수 있나, 만물이 저 살아가는 법칙이 있으니 그를 한 번에,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나?

 

성인이란 뭘 만들고 꾸미는 자 아니라 그저 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들여다 보는 자이다. 

 

合彼神明至精,與彼百化,物已死生方圓,莫知其根也,扁然而萬物自古以固存. 六合爲巨,未離其內.,秋毫爲小,待之成體. 天下莫不沈浮, 終身不顧.,陰陽四時運行,各得其序. 惛然若亡而存,油然不形而神,萬物畜而不知. 此之謂本根,可以觀於天矣.

 

그 신명의 정수와 화합하여 그와 함께 백가지 변화에 참여하니 만물에 이미 그 살고죽고 모나고 둥근것이 있으니, 그 근원을 알지 못하는 법이다. 고루들어있으니 만물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 우주가 크다해도 그 안을 벗어나지 못하고. 가을 털이 작다하나 모여서 몸을 이루는 것. 천하가 부침을 거듭하며 종생토록 움직이니 음양사시의 운행이 각기 차례가 있다. 혼돈하여 망친듯함도 있고  태평한 모양으로 형체없는 신도 있으나 만물이 그저 모르고 자라난다. 이를 일컬어 근본뿌리라하고 이는 하늘의 이치를 봄으로서 가능하다.

 

-하나님, 하늘의 본질에 부합하여 만가지 변화에 거침이 되지 않으며 그저 그런 모든 모양에 같이하니 굳이 태초니 근본이랄 것이 없다. 모든 만물이 든든히 존재하며 그 큰 우주도 그 안에 든 것이나 마찬가지 그 법을 떠나지 못하고 가장 작은 하챦은 것에도 진리를 숨어있다.

 

동시에 세상은 가만히 정지해있는 것 아니요 움직이니 어떤 때는 혼돈처럼 어떤 때는 초월한 듯도 보이나 결국은 다 한가지라... 진리를 깨침은 무얼 가져서도 알아서도 아니고 세상의 움직임을 잘 들여다 볼 줄 아는 예민함에 있다. 바람소리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들을 줄 아는... 

 

양자물리학에 "빛은 입자면서 파동"이라는 이론이 있다. 우리는 뭐든 가시화하려는 시도를 한다. 난도질하는 걸 즐긴다. 분자도 모자라 원자 단위까지 그러나 그런다고 세상이 규명되나? 세상은 눈에 시각을 통해 들어온다. 그리 난도질하는 이유는 왜? 눈에 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그래서 유교니 뭐니 저마다 진리라는 걸 하나씩 꺼내놓고 그걸 절대시하며 안정을 구한다.

 

그러나 진리란 본디 너무커서, 보이지않아서 때론 혼동의 모습으로 이세상에 섞여 있기에 말이란 것에, 사람들의 말 속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이 장자의 요지이다.

 

즉 여기서 보면 진리란 딱 뭐가 아니라 오늘도 우리가운데서 살아숨쉬는 그 자체를 진리라 한다. 이는 기독교에서 예수에 의해 선포되어진 성령의 역사라는 의미와도 통한다.

 

진리는 손으로 말로 건네지지 않는 무형의 것임을 설명하는 이 장은 굳이 말하면 형이상학이요 철학이다. 허약한 거미줄로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바람을 묶을 수 있다는 사람은 사기꾼인 법이지요.



3.

齧缺問道乎被衣,被衣曰:「若正汝形,一汝視,天和將至.,攝汝知,一汝度,神將來舍. 德將爲汝美,道將爲汝居,汝瞳焉如新生之犢而无求其故!」


설결이 피의에게 도를 물었더니 피의 왈:[네 몸가짐을 바로 하여 네 보임을 하나로 하면 하늘 뜻에 부합하리라. 앎을 자랑말고 네 태도가 하나 되면 신명이 네게 와 머무르리. 덕은 너를 아름답게 할 것이요 도는 너로 살게할 것이니 네 눈은 마치 갓난 송아지 처럼 순박해저 그 연고를 따지지 않게되리]


-처신을 하되 일이관지 통일됨이 있어 한결같으면 하늘도 감동하시지요. 지성이면 감천이지요. 조금 안다고 자랑하고 나서면서 경망하게 이리저리 자기 논리 남의 논리 끌어대다 보면 사람들도 떠납니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대할 때 사람도 하늘도 감동하는 법입니다. 뭐든 한가지로 깊이 파면 경지에 오르는 법입니다.

그러나 처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입장이나 말을 바꾸는 사람이 있지요 그걸 지혜인 양... 아니 이미 몸에 배인 사람있읍니다. 그런 이에겐 진리가 오다가도 비켜가는 법입니다. 익어가면서 그런 태를 못 벗으면 되나요?


言未卒,齧缺睡寐. 被衣大說,行歌而去之,曰:「形若槁骸,心若死灰,眞其實知,不以故自持. 媒媒晦晦,无心而不可與謀. 彼何人哉!」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설결이 잠들어 버렸다. 피의가 크게 기뻐하며 노래를 부르며 떠나며 한마디하길:[몸은 마른 해골이요 마음은 죽은 재같으니 실지 알면서도 스스로 특별하다 않고 속을 뵈지 않으니 마음이 없으니 뭘 논하지 못하겠군 저는 어떤 사람인가!]


-도=깨우침이 뭐 색다를거라는 생각이 문제...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림이 옳듯... 도를 향한 열정도 사실은 나를 진리로 이끌어주는 도구 일 뿐... 

처신이니 마음속의 정의니가 뭐 중요한가요? 처신이나 정의는 그때마다 달라지는 법.. 항구여일함이 중요하지요.

무얼하든 극진히 하면 경지에 이르는 법입니다.


4.

 

舜問乎丞曰:「道可得而有乎?」

 

순임금이 승에게 묻기를:[도를 깨칠수 있는 법이 있읍니가?]

 

-우리는 진리도 그저 내 안에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내가 알 수 있다라고... 물론 궁리가 있고 생각이 있으니 그러리라 합니다만... 이는 마치 거미줄로 바람을 묶겠다는 것 만치 어리석은 생각이지요. 진리란 내가 몸 담굴 바다와 같은 겁니다 한 바가지 바닷물이 바다는 아니지요.

 

질문하는 방법이 달라지면 듣는 답도 달라지는 법...

 

曰:「汝身非汝有也,汝何得有夫道?」

 

답이:[당신 몸이 당신 것 아닌데 어찌 진리라는 걸 담겠소?]

 

-스승의 답이 의미하는 바는 그거지요. 뭘 담으려 하든 중요한 것은 남의 그릇에 담으면 그것이 내 것인가요? 우리네 몸이란 건 사실 그저 빌어쓰는 것이지 내 몸 중 무엇 하나를 내 의지로 만든 것 있나요? 그저 입히고 가르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지요 잘 간수할 책임만 우리가 가진겁니다.

 

"네가 염려한 들 키를 한 자나 자라게 할 수 있느냐?"

 

舜曰:「吾身非吾有也,孰有之哉?」

 

순이 말하길:[내 몸이 내것 아니라면 누구 것이란게요?]

 

-우리는 그럽니다. 내 몸이니까 내 것이라고... 내 손에 있으니 내 거라고... 그 생각 자체를 버려야지요. 우리 몸이란 것도 독약을 먹이면 구토를 하고 살지 못하는 겁니다. 내가 함부로 할 수 있으니 내 것이다라는 생각 위험한 겁니다. 굳이 말하면 몸이 나 아니요 정신이 나입니다. 몸뚱아리란 그저 빌어 사는 자연의 일부지요. 그러니 몸을 잘 간수함이 예의지요. 내 몸뚱이 함부로 굴려 암이라도 걸리면 그 몸뚱이 자연으로 돌려주지 못합니다. 비료로도 쓰지 못하지요. 남에게 빌어쓰는 이가 함부로 물건 상하게 하면 되나요 어디?

 

曰:「是天地之委形也.,生非汝有,是天地之委和也.,姓名非汝有,是天地之委順也.孫子非汝有,是天地之委蛻也. 故行不知所往,處不知所持,食不知所味. 天地之强陽氣也,又胡可得而有邪!」

 

이르길:[이 몸은 천지가 지어준 게지요. 삶도 그대 것이라 할 수없고 이도 천지의 조화가운데 위임된 겁니다. 이름도 당신 것 아니지요 이도 천지가 따르도록 위임해 준겁니다. 자손들도 당신 것 아닙니다 이도 세상이 덧붙여 맡기신겁니다. 그러니 뭘 의도하고 행하지 마시고 뭘 잡으려고 자리잡지마시고 먹되 맛을 바라고 먹지마시오. 천지란 강한 양기인데 어찌 그를 가질 수있다는 말이요?]

 

-이 몸이 천지로 부터 위임받은 것이라는 그런 자기사랑 없으면 인간이 비천해집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은 하나님의 귀한 창조의지로 지으심 받은 그의 자녀들입니다 그걸 모르는 자들이 자기를 경시하고 함부로 하지요 아님 반대로 끔찍이 아끼거나... 이름이란 것도 그러지요 내가 나 부르나요 남이 부르지? 남들 위해 이름 있는 겁니다. 내 가족 내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물건 아니지요 물건이라면 금지옥엽 사랑으로 키울까요? 

 

자식도 내 소유물 아니요 기실 내 몸, 내 가정 빌어 잘 양육하라는 책임입니다. 그러기에 매도 들고 꾸중하며 가꾸어가는 거지요.  내 물건이라면 막쓰다가 소용없어지고 맘에 안들면 버리면 되는게 가족이라 생각한다면 참 많이 틀린 생각하는 거지요.

 

이런 작은 생각의 전환이 진리를 살게하는 기본이 됩니다.


5. 

孔子問於老聃曰:「今日晏閒,敢問至道.」 

공자가 노자에게 묻기를:[오늘 평안하고 한가하시니 감히 지극한 도에 대해 여쭙니다] 

老聃曰:「汝齊戒,疏淪而心,澡雪而精神,掊擊而知! 夫道,窅然難言哉! 將爲汝言其崖略. 

노자왈:[재계하여 마음을 깨끗이하고 정신을 눈같이 희게하여 네 판단을 배격하라! 대저 도란 아득하여 말로하기 어려우니라! 다만 너를 위해 말로 맛만 보여주리.] 

-일단 뭐든 판단에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저 아는 것과 대비하여 새로운 정보를 입력하기에... 그러나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깨끗이하라 합니다. 그 말은 table rassa(백지상태) 마음을 열어 놓으라는 뜻이지요. 

불가지의.... 그러나 이미 우리 곁에 있는 진리이기에 다른 것과 쉽사리 혼동하며 경솔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우린 잘 아는 것에 속기 마련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흡사하지요 그를 그되게 하는 이데아(원형)와 그의 가시적인 세계로 표현되는 현상계 그를 연결하고 원형으로 인도하는 열정으로서의 에로스... 

「夫昭昭生於冥冥,有倫生於无形,精神生於道,形本生於精,而萬物以形相生,故九竅者胎生,八竅者卵生. 其來无迹,其往无崖,无門无旁,四達之皇皇也. 邀於此者,四肢强,思慮恂達,耳目聰明,其用心不勞,其應物无方. 天不得不高,地不得不廣,日月不得不行,萬物不得不昌,此其道與! 

대저 밝히 드러나는 모양들은 흐릿한 곳에서 나고, 할 도리란 것은 몸가짐에서 나며 정신은 본디 도에서 나오고 몸 가짐이란 근본 정신에서나니 만물이 서로 형체를 갖추어 살아가는 것 그래서 9구멍을 가진 짐승은 태를 빌어나고 8구멍의 새들은 알에서 나지.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고 그 가는 곳도 몰라 방향이나 의지가지를 알 수 없어 사방 어디로든지 이르지. 이를 체득한 사람은 사지가 굳건하고 생각이 넓고 신실하여 보고 들음에 분명하고 그 마음씀이 애써 뭘 하지 않고 만물에 대함에 모남이 없지. 하늘이 이를 모르면 높을 수 없고 땅이 이를 모르면 넓지 못하며 별과 달과 해가 이를 모르면 운행이 안되고 만물이 이를 모르면 흥성하지 못하니 이것이 그 도의 가진 것일세!] 

-내 기준이 밝은데 있으면 어두운 면을 놓치기 쉽고 어두운 면이 기준이면 밝음을 배척하기 쉽지요. 어느 편에 서느냐가 아니라 아우르는 겁니다. 마치 시계추처럼 움직이는 것이 인간이지요. 그 움직임에 능한 이가 꾀많고 현명한 듯합니다만 깨달음을 얻은 이는 그 이치를 잘 보존할 뿐 제 이익을 위해 이용하지 않지요. 

이데아든, 현상계든 따로 떨어트려 생각할 것아니라 하나로 연관지어 생각할 때 眞像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읍니다. 그것이 바로 에로스라는 열정이라 진리를 따르는 이의 갖춰야할 것은 분변이 아니라 열정... 집착이 아니라 집중... 

「且夫博之不必知,辯之不必慧,聖人以斷之矣. 若夫益之而不加益,損之而不加損者,聖人之所保也. 淵淵乎其若海,巍巍乎其若山,終則復始也,運量萬物而不匱. 則君子之道,彼其外與! 萬物皆往資焉而不匱,此其道與! 

넓게 알 필요도 없고 지혜로 꾸며 말할 것도 없으니 성인들은 이런 것을 끊어버리지. 뭘 더한다고 더해지지도 않고 감한다고 감해지지도 않으니 성인이란 그저 잘 보존만할 따름. 깊고 깊기가 바다같고 높고높기가 산과 같으니 끝인가 싶으면 다시 시작이요 만물을 움직임에 모자람이 없지. 즉, 군자의 도가 그 밖에 있나! 만물의 가는 것에 모자람 없으니 이게 도 가진 것일세!] 

-박학하고 꾀많은 이는 이 이치를 제 사욕에 이용하려 듭니다. 그건 하늘을 시험하는 짓이지요. 그런 마음을 버리고 진리를 향하도록 정향되어있는 자신에게 성실해야지요. 

「中國有人焉,非陰非陽,處於天地之間,直且爲人,將反於宗. 自本觀之,生者,喑醋物也. 雖有壽夭,相去幾何? 須臾之說也. 奚足以爲堯桀之是非! 果蓏有理,人倫雖難,所以相齒. 聖人遭之而不違,過之而不守. 調而應之,德也.,偶而應之,道也.,帝之所興,王之所起也. 

천지 중간에 나라가 있어 사람들이 있는데 음도 양도 아니니 그 사이에 사는 것이요 당장은 사람이지만 장차 근본으로 돌아갈 것이라. 자기 본디 자리를 알면 살아있는 자란 그저 암중 돌아가는 것에 불과하지요. 누군 장수하고 누군 요절하는데 그 차이가 얼마나 되겠소? 그저 잠깐이라 말할 것. 요걸중 누가 옳다 그르다 어찌 말할 것인가! 열매를 맺는데도 이치에 따르고 사람의 도리란 비록 복잡하긴 해도 서로 맞물려가는 거지요. 따라서 성인은 그를 보면 어긋 서지 않고 지나가도 붙잡지 않지요. 그저 고르게 맞이하고 대할 뿐, 덕이란 그의 짝으로 반응하니 진리이지요. 큰 임금은 그를 지녀야 되고 왕도 거기서 일어나게 되지요] 

-그래서 나오는 말이 덕입니다. 덕이란 흔들림 많은 갈대밭에 선 떡갈나무 같은 것을 말합니다. 온갖 새와 벌레와 짐승들이 그 그늘에서 볕을 피하고 바람을 긋지요. 그러나 그런 강함도 더 강한 바람엔 이기지 못함을 알아야지요. 

「人生天地之間,若白駒之過郤,忽然而已. 注然勃然,莫不出焉.,油然漻然,莫不入焉. 已化而生,又化而死,生物哀之,人類悲之. 解其天弢,墮其天袟,紛乎宛乎,魂魄將往,乃身從之,乃大歸乎! 不形之形,形之不形,是人之所同知也,非將至之所務也,此衆人之所同論也 

천지지간에 사는 인간의 삶이란 마치 흰 말이 도랑을 건너 지나는 것 같으니 금방이지요. 그저 거기 매여 아등바등하나 갖혀 있는 것 아니요, 태평하니 있어도 몰입된 것 아니지요. 조화를 얻으니 살아가는 것이요 또 변화하니 죽는 것 생물들은 그를 애도하고 사람들은 그를 비통해 하지요. 그 하늘 주머니를 풀고 닫음인데 원망이 되나 혼백이 가는 곳에 몸도 따라 감이 마지막 돌아감이지요 없음이 있음이요 있음이 없음이니 이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지만 깨달음을 얻으려는 이가 힘써 알려할 것은 아니요 이는 그저 뭇 사람들이 모여 떠드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시계추 같은 인생사를 갖고 이 편이 옳다 저 편이 옳다 심지어 가운데의 잔떨림이 옳다를 떠드나 중요한 것은 그리 움직인다는 것이 사실이지 방향도, 그 진폭도 정하기 힘들지요. 앞서 예단할 일도 아니요 포기할 일도 아닙니다. 


냉탕 온탕 드나들며 냉탕이 좋으네 온탕이 좋으네 판단질하는 자체가 본질을 잃은 것.... 그리 냉온욕함은 건강을 위함이지 냉온탕 판단질하라는 것 아닌데... 


6. 

東郭子問於莊子曰: 所謂道,惡乎在?

어느 날, 동곽자(東郭子)가 장자에게 물었다:[도(道)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쁜데에도 존재하나요?] 

-우리는 진리란 순수하고 깨끗한 무엇이라고 상상한다. 

莊子曰: 無所不在. 

장자가 대답하길:[도라는 것은 어디에나 있지요.] 

-진리란 그 깨끗함도 더러움도 다 아우르는 겁니다. 

東郭子曰:「期而後可.」 

동곽자가 다시 묻길:[그럼 서로 기한이 차면 교대로 그리되나요.] 

-무시무종이란 말을 그릇 오해하는 것이지요. 

莊子曰: 在螻蟻. 

장자 이르길:[땅강아지나 개미에게도 있소.] 

曰: 何其下邪? 

[도가 어떻게 그렇게 낮은 것들에게 있습니까?] 

-깨달은 자의 모습이 흰 수염에 구름타고 다니는 것을 말하는가? 

曰: 在稊稗. 

[돌피 열매나 피에도 있소] 

-가장 흔한 거기에 진리 있지요. 

曰:何其愈下邪? 

[어째서 그렇게 점점 낮아집니까?] 

曰:在瓦甓.

[기와나 벽돌에도 있소] 

曰:何其愈甚邪? 

[어째서 그렇게 더 심하게 내려가십니까?] 

曰:在屎溺.

[똥이나 오줌에도 있소] 

東郭子不應. 莊子曰:「夫子之問也,固不及質. 正獲之問於監市履狶也,每下愈況. 汝唯莫必,无乎逃物. 至道若是,大言亦然. 周遍咸三者,異名同實,其指一也. 

嘗相與游乎无何有之宮,同合而論,无所終窮乎! 嘗相與无爲乎! 澹而靜乎! 漠而淸乎! 調而閒乎! 寥已吾志,无往焉而不知其所至,去而來而不知其所止,吾已往來焉而不知其所終.,彷徨乎馮閎,大知入焉而不知其所窮. 物物者與物无際,而物有際者,所謂物際者也.,不際之際,際之不際者也. 謂盈虛衰殺,彼爲盈虛非盈虛,彼爲衰殺非衰殺,彼爲本末非本末,彼爲積散非積散也.

동곽자는 장자의 대답이 갈수록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고 생각하여 대꾸를 하지 않자, 장자가 말을 시작하였다. 그대의 질문은 본질에 미치지 못했소. 이제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소. (옛날 장터를 관장하는 획(獲)이라는 사람이 있었소. 그는 장터의 관리인이 돼지의 살찐 정도를 검사할 때, 항상 돼지 몸의 위에서 아래로 밟아 내려가는걸 보았는데,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소. 그런데 그 관리인의 말을 듣고 곧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고 하오. 본시 돼지의 다리 부분은 비계가 생기기 어려운 부분인데, 만약 여기에 비계가 생겼다면, 그 돼지는 분명히 몹시 비계가 많은 돼지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알게 되듯, 내려가면 갈수록 잘 알 수 있는 것이오.) 그러므로 그대는 도가 어디에 있다고 한정해서는 아니되오. 또한 진리가 사물을 초월한 것이라 여겨서는 아니 되오. 지극한 도라는 것도 이와 같으며, 위대한 교훈 역시 마찬가지이오 이 세가지는 같은 것으로 이름만 다르지 본디는 한 본질이요, 하나를 가르키는 말이요. 

-장자가 똥오줌에도 진리가 있다니 놀리나 싶어 더 묻질 않지요. 장자가 말하려는 것은 진리와 속세, 선과 악으로 나누는 그런 이분법을 피하라는 말이지요. 초월이란 성속의 구분조차를 넘어서는 것이지 속에서 성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지요. 큰 가르침이란 말도 큰 진리 작은 진리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지 말라는 겁니다. 

[시험삼아 하려함이 없음(無何爲)이라는 경지를 돌아봅시다 뜻이 맞아 뭘 하고 안할지를 논구하면 끝이 없을거외다! 無爲하면 마음이 청정해지고 조용해지며 고르게되어 한가할 뿐이오. 내 의지를 비우고 어디로 가지 않으면 그 끝이 어딘지 모르며 오고감을 그칠 자리도 모르며 이미 내가 오갔으니 그 끝이 어딘지 알까요? 그런 큰 비임을 다니면 큰 지혜가 들어와 그 한계를 모르게 되지요. 만물의 구별을 하는 자가 구별없는 물건과 함께하니 구별이 생기는 것이요 구별이 있음은 소위 구별된 물건이 되지요. 그리 구별을 두지않으며 구별을 알고 구별이 있어도 구별하지 말아야죠. 차고 비고 슬프고 죽이는 것이란 저가 채우고 비우나 차고 비움아니요 저가 슬퍼하고 죽이나 슬프고 죽임 아니요 저가 본말을 가리나 본말이 아니요 저가 쌓고 흩는다지만 쌓고 흩음도 없소] 

-한다와 안한다의 구분으로 무위를 오해하지 말아야지요. 삶이 괴롭다고 죽으면 해결인가요? 무위란 삶을 삶답게 살아내자는 뜻입니다. 쓸모없는 짓에 정신을 뺏기지 말고 진짜에 정성 다하며... 

이미 인생과 세상이란게 처음도 끝도 알기 어려울 정도로 살아왔기에 순수한 인생을 규정하기 힘들고 그러니 그게 어디로 돌아가야하는 지도 정하기 힘들지요 그렇다고 그저 운명으로 알고 살다가라는 것 아닙니다. 

그러니 인생은 뭐다 한마디로 규정하려들지 말라는 겁니다. 다만 그리 구별하려는 마음에서 선을 긋게되니 잘못 그어지면 사단이 나는 거지요. 본디 경계없는 것을 줄그어 놓으면 다툼이 없을까요? 

밥을 물과 쌀이라고 나눠 놓으면 밥이되나요? 김치를 배추 마늘 고추 생강 젓갈 죽 나열하면 김치 되나요? 뭐가 그것의 본이고 말입니까? 



7.

 

妸荷甘與神農同學於老龍吉. 神農隱几闔戶晝瞑,妸荷甘日中奓戶而入曰:「老龍死矣!」 神農隱几擁杖而起,嚗然放杖而笑,曰:「天知予僻陋慢訑,故棄予而死. 已矣! 夫子无所發予之狂言而死矣夫!」

 

아하감이 신농씨와 나이많은 용길 산하에서 공부하였다. 신농씨가 잠깐 문짝뒤 평상에 기대어 잠자는데 아하감이 문 열고 들어와 말하길:[스승이 돌아가셨다!] 신농이 평상에서 지팡이를 잡고 일어나려하더니 갑자기 지팡이를 놓고 웃으며 말하길:[하늘이 내가 비루하고,교만하고 방종하는 것을 알고 피하였구나 그래서 버리고 죽었구나. 그렇구나! 내가 발전은 없고 헛소리만 하니 돌아가셨구나]

 

-여기서 신농의  태도는 지극히 아전인수격이지요 애통해 하는 듯하나 제 판단을 들이대고 있는 겁니다. 죽음이란 진리계에서 보면 생명이나 다름 아니건만 자신 탓으로 죽었다는 논리를 펴는 것은 진리를 아는 사람이 할 도리 아니지요.

 

弇堈弔聞之曰:「夫體道者,天下之君子所繫焉. 今於道,秋毫之端萬分未得處一焉,而猶知藏其狂言而死,又況夫體道者乎! 視之无形,聽之无聲,於人之論者,謂之冥冥,所以論道,而非道也.」

 

감강이 조문와 말하길:[무릇 도를 체득함은 천하 군주가 매여야 할 자리이다. 지금의 도의 상태는 실날같은 털끝 만분의 일도 못하면서 오히려 헛소리 때문에 죽었다고 알고있으니 하물며 도를 체득이나 했을까!  무형을 보고 무성을 듣는다며 논하는 사람이 진리를 일컬어 아득한 진리라는데 그건 논리요 말 장난이지 도가 아니다]

 

-도를 체득할 궁리는 않고 교만하게 자기 중심적인 사고로 스승의 죽음을 말하는 사람이 뭔 도를 알겠는가? 말로는 번지르르한 논리를 읊조려도 그건 말장난이지 진리가 아니다.

 

진리란 질박하고 소박한 것이지 휘황한 말장난이나 논리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법. 진리가 말장난에 갇히우면 진리일까? 그리 말에 진리를 가두려고 애쓰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요 교만이다.  

진리는 내가 몸담궈야 할 큰 물이지 내 말의 그릇에 담을 것 아니다.


8.

 

이 문장에서 태청,무궁,무위,무시는 의인화법으로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이지요.

 

태청:고아한 인격

무궁:가이없는 어짊

무위:신중하게 사는 깨달은 이

무시:주의깊어 아무 일도 벌리지 않음, 속이 깊은 이라 볼 것이지요

 

於是泰淸問乎无窮曰:「子知道乎?」

 

이때 태청이 무궁에게 묻기를:[당신은 진리에 대해 아시나요?]

 

-태청은 순박한 이요 진리를 닦는 선비를 말하지요

 

无窮曰:「吾不知.」

 

무궁이 답하길:[난 모릅니다]

 

-무궁은 순박한 태청에게 말합니다 진리를 모른다고.. 마음이 따뜻한 거지요 사랑입니다.

 

又問乎无爲. 無爲曰:「吾知道.」

 

다시 무위에게 물으니 무위 말하길:[압니다]

 

-무위는 잘 가려 행하는 깨달은 자입니다.

 

曰:「子之知道,亦有數乎?」

 

[아신다니 뭐 특별한 것 있읍니까?]

 

曰:「有.」

 

[있지요]

 

无爲曰:「吾知道之可以貴,可以賤,可以約,可以散,此吾所以知道之數也.」

 

무위 말하길:[내가 진리와 함께하니 귀하게 될 수도 있고 천하게 될 수도 있고, 모여들 수도 있고 흩어질 수도 있지요 이게 내 아는 진리의 특별함입니다]

 

-진리란 맑은 수정 같은 유형의 것 아니지요 굳이 말하면 이 모든 것의 움직임 그자체가 진리지요. 그러니 진리란 어느 특정한 사람이나 행동이 가질 수 있는 것 아닙니다. 그러니 인위를 배제하고 진리가 저 갈 길 잘 가도록 놔둬야지요.

 

泰淸以之言也問乎无始曰:「若是,則无窮之弗知與无爲之知,孰是而孰非乎?」

 

태청이 무시에게 묻기를:[무궁은 진리를 모른다하고 무위는 안다하는데 누가 맞고 누가 틀린겁니까?]

 

-무시란 말그대로 시작함이 없는 것... 장자의 진리관에서 세상이란 서로 얽히고 설킴이기에 이런 시작이 없음이 알고도 모르는 듯 사는 진중한 태도라 봅니다.

 

无始曰:「不知深矣,知之淺矣.,弗知內矣,知之外矣.」

 

무시 이르길:[모름은 깊고 안다는 건 얕지요 알지 못함은 안이요 안다함은 밖이지요]

 

-일단 말로 꺼내놓기 시작하면 온갖 분란이 생김을 말합니다. 그러니 구태여 그런 분란을 피하지요.

 

於是泰淸中而歎曰:「弗知乃知乎! 知乃不知乎! 孰知不知之知?」

 

태청이 탄식하는 중에 말하길:[모름이 앎이요 앎이 모름이니 누가 아는 걸 모름이 낫다는 것을 알까요?]

 

-즉, 안다고 느낀 순간 분란의 씨앗이 뿌려지니 그를 모름이 낫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나요?

 

无始曰:「道不可聞,聞而非也.,道不可見,見而非也.,道不可言,言而非也. 知形形之不形乎!  道不當名.」

 

무시 왈:[진리란 들리지 않으니 만약 들리면 아닌겁니다, 진리란 뵈지않으니 뵈면 아닙니다, 진리란 말로 되지 않으니 말이 되면 틀린 겁니다. 모습이 없는 것의 모습을 모양으로 아는 겁니다! 진리란 이름지워지지 않지요]  

 

-이는 그저 不可知論과는 다른 겁니다. 알수있으나 그걸 말로 가두지 말자는 얘기지요

 

无始曰:「有問道而應之者,不知道也. 雖問道者,亦未聞道. 道无問,問无應. 无問問之,是問窮也.,无應應之,是无內也. 以无內待問窮,若是者,外不觀乎宇宙,內不知乎大初,是以不過乎崑崙,不遊乎太虛.」

 

무시가 이르길:[진리에 대한 물음에 말로 대답하는 이는 정작은 모르는 자입니다. 물어보는 사람도 아직 진리에 대해 들은 적 없는 자이지요. 진리란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습니다. 묻지 않으면서 묻는 것 이것이 묻는 법의 궁극적인 모습이요 대답하지 않으며 대답함이 속내가 없음입니다.  속내없이 궁극적인 질문을 기다리는 사람은 밖으로 우주만물을 생각지 않고 안으로 큰 시초를 모르는 자입니다 이런 이는 곤륜을 가보지도 못하고 태허의 경지를 노니지도 못한 자입니다]

 

-뭔가를 안다고 나섬은 가뜩이나 어지러운 세상을 더 어지럽히는 행동이지요 진리란 그저 통하고 느끼는 겁니다. 질문한다는 자체가 이미 진리를 제 자리에서 끌어내는 것이고 대답한다는 자체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겁니다. 뭔가 대답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자는 아직 진리를 깊이 느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진리를 가두고 있는 사람이지요.

 

이 가공의 인물들은 굳이 말하면 깨친이의 모습들입니다. 그중 어떤 모습이 나을까요라는 말은 의미없지만... 무시란 진리를 자리에서 끌어내지 말자는 뜻입니다 진리란 복잡하니 아무것도 말자가 아니라 꼭해야 할 것은 칼 들어와도 하자는 겁니다. 그저 도통한 연 아무것도 안하는 게으름을, 무지를 이 말에 갖다 붙이면 안되지요.

 

깨친 이는 이 모습들을 고루 갖추고 있어야지요. 그 중 하나만 고름 역시 진리를 욕되게 하는 겁니다.


9.

 

여기서 광요란: 지혜로 남에게 빛을 비춰주지만 자기는 드러내지 않는 덕있는 자를 의미하지요. 무유란 유가 없음... 없음과 있음이란 말이 반대말로 알려져있지만 있음의 반대말이 '있지 않음'이라면 그게 없음=무일까?

 

光曜問乎无有曰:「夫子有乎? 其无有乎? 无有弗應也. 光曜不得問,而孰視其狀貌,窅然空然,終日視之而不見,聽之而不聞,博之而不得也. 光曜曰:「至矣! 其孰能至此乎! 予能有无矣,而未能无无也.,及爲无有矣,何從至此哉!」

 

광요가 무유에게 물어 가로되:[당신은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까? 무유가 반응이 없더라. 물음에 답이 없자 그 모양을 살피는데 허허로워 공허해보이고 온 종일 보아도 뭐 뵈는 것이 없으며 들으려해도 소리도 없고 시험해봐도 얻을게 없었다. 광요 왈: 지극하도다! 누구가 이리까지 지극할까! 이런 없음이 있을까 무라라는 것 조차 없애어 유라는 것을 없게하니 누가 이 경지를 알랴]

 

-우리는 유 무라는 말로 뭔가를 정의하고 그 상태만이 무요 유니 한다. 그러나 무란 있음이란게 아닌 무엇인가 없는 것인가? 무와 유의 상대적인 판단을 떠난 진짜 없음이 무요 공이란 단어를 대입함이지 있음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무란 단어를 쓰는 것 아니다.

 

무유란 우리가 무라고 아는 그것이지요. 유무란 그런 상대성 조차를 뛰어넘은 것이 무유이지요.


10.

여기서 대마란 무엇일까요? 큰 말? 아니지요 크게 쓰이는 쓰임을 말하지요 그러니 권세자도 왕도 될 수 있지요. 대마와 타구를 견주는 이유는 하나지요 크게 쓰임받는다고 진리나 도를 깨우친 것 아니라는 역설입니다 파라독스지요. 율법학자가 제사장이 레위인이 진리를 담고있는 것 아닙니다. 진리란 그리 담아지는 물건 아니지요.


大馬之捶鉤者,年八十矣,而不失豪芒. 大馬曰:「子巧與? 有道與?」


대마를 위해 띠고리만드는 자가 있어 나이가 80살인데 작은 삐침도 실수하지 않았다. 대마가 묻기를:[당신은 재주가 좋은 거요? 도를 깨우친 거요?]


曰:「臣有守也. 臣之年二十而好捶鉤,於物无視也,非鉤无察也. 是用之者,假不用者也以長得其用,而況乎无不用者乎! 物孰不資焉!」


답이:[전 수칙이 하나 있읍니다. 제가 나이 20에 띠고리 만드는 것을 좋아하게 됐는데 다른 건 보지않고 고리아니면 살피지도 않았읍니다. 이리하니 이를테면 무지한 저도 나이가 들어 그게 뭔지를 알게됐지요 하물며 뭔가 아는 사람이라면야! 만물이 다 도통할 자질이 있는 것 아닌가요!]


-뭔가를 뜻을 품었으면 그것말고 다른 건 보지 말아야지요. 왜? 삿된 생각이 틈타기에.. 쓸모없는 무지랭이도 지극 정성으로 하나에 집중하면 이리되는데 자질을 타고 난 사람이라면 안될 이유가 없지요.

사람을 보면 다 저마다의 특징 재주가 있기 마련이지요. 어떤 이는 좋은 자질을 타고나서도 닦지않아 썩히는가 하면, 좀 모자라도 전심전력하여 일가를 이루는 이도 있지요. 

반면에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영재를 보면 안타깝지요 다른데 정신 팔려 제 것은 잊고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 받은 것=진리를 실현할 재능을 그저 시장통 길바닥에 버리는 사람 있읍니다. 자신을 모르고 게으른 탓이지요. 


재주많으면 굶어죽는다는 말이 있읍니다.

그게 쓰임이 많은 듯하지만 나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그저 재주꾼으로 조롱속 원숭이처럼 최후를 맞는 법이지요.


11. 

지북유 장에 나오는 이름들은 기실 다 의인화된 우리의 자세들입니다. 여기의 염구란 말 그대로 진리를 찾는 순례자를 말하지요. 

冉求問於仲尼曰:「未有天地可知邪?」 

염구가 공자에게 묻기를:[천지의 시작 이전을 알 수 있나요?] 

-우리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초월적 원리가 있을 걸로 알지요. 기독교에서 그를 창조주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의인화입니다. 언뜻보면 장자가 그런 초월자 하나님과 반대되듯 보입니다만... 장자의말을 기독교 버젼으로 하면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기독교의 세계관은 시작과 끝, 알파요 오메가라는 직선史觀을 갖는다지만 그러나 깊이 보면 실지는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부딪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사역을 강조하는 겁니다. 예수가 선포한 성령의 의미가 그거구요. 절대 권위이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이 자리에서 사랑하시고 함께하심의 선포지요. 그 권위가 이데아로 그저 저 멀리 하늘에 계시지 않고 늘 우리와 함께하심을 깨닫고 감사하자는것이 기독교의 임마누엘의 가르침이지요. 

仲尼曰:「可. 古猶今也.」 

공자의 답이:[그럼요 예나 지금이나 같았죠] 

-진화론자라면 수긍못하는 발언 일까요? 현실주의자의 눈에 틀린 말일까요? 어찌 어제와 오늘도 다른데 창세이전과 오늘이 같은가요? 라는 의문에 반하나요? 아니지요 예나 지금이나 세상을 움직이는 진리는 같죠.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지금도 이 자리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살펴보고 계십니다. 

冉九失問而退,明日復見,曰:「昔者吾問 '未有天地可知乎?' 부자曰:'可. 古猶今也.' 昔日吾昭然,今日吾昧然,敢問何謂也?」 

염구가 더 묻지 못하고 물러나갔다 다음날 다시와 물었다:[어제 제 묻길 '천지 시작 전을 알 수 있나요'물으니 '그럼요 예나 지금이나 같다'했읍니다. 어제는 내가 알겠더니만 오늘은 헷갈립니다 어째그럴까요?] 

-어제는 그저 마음으로 받았으니 그렇고 오늘은 그걸 나 나름의 논리에 꿰어 맞추려니 의심이 드는겁니다. 

仲尼曰:「昔之昭然也,神者先受之.,今之昧然也,且又爲不神者求邪! 无古无今,无始无終. 未有子孫而有子孫,可乎?」 

공자 말하길:[어제 알겠던 것은 마음이 먼저 받아들여서요. 지금 헷갈림은 마음아닌 것이 그 답을 구하니 그러지요! 예나 지금이란 차이가 뭔가요 시작과 끝이 있나요. 자식이 있기 이전에 자식을 논함이 그게 가한가요?] 

-성령으로 받으면 알기 전에 믿을 수 있으나, 믿기위해 알려하면 잡다한 설들에 치이는 법이지요. 논함이란 뭔가가 눈 앞에 서니 시작되는 것, 시작점을 정하면 끝을 그릴 수 있지요만 그러나 뭘 시작으로 정한답니까? 어디가 시작인가요? 있지도 않은 자손을 남자니 여자니 논함이 가한가요? 

冉九未對. 仲尼曰:「已矣,未應矣! 不以生生死,不以死死生. 死生有待邪? 皆有所一體. 有先天地生者物邪? 物物者非物. 物出不得先物也,猶其有物也. 猶其有物也,无已. 聖人之愛人也終无已者,亦乃取於是者也.」 

염구가 대꾸도 하기 전에 공자 말하길;[됐다 아직 뭐라 말하지마라! 생이란 말로 죽음을 살지말고 죽음이란 말로 생을 죽음으로 만들지마라. 죽어사는 것이 제대로냐! 모든 것은 하나인데. 천지이전에 있던 것이 무엇인가? 무엇 무엇이라 얘기하는 것은 정작 그 본질 아니다. 어떤 것이 어떤 다른 것에서 나오나 그저 있는 것 그게 그거지 구분없음이 먼저 있었다. 성인들이 사람을 아낌에 끝이란 이미 없으니 이런 도리를 아는 탓이다] 

-공연히 생이 이러네 저러네 해서 마음 볶지마라 그런 규정함이 너를 붙잡으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고 죽어도 죽는 것 아니다. 천지 이전에 있던 것이 뭐냐한들 그거야 네 머리속 생각이 빚어 놓은 것... 그저 세상사람들을 사랑하는 성인의 마음이란 그런 구분 이전을 살기 때문이다. 

장자 전체를 통해 흐르는 생각은 춘추전국시대 百家爭明(하많은 무리들이 나서서 제 옳다고 떠들던)시대를 전제로 합니다. 저마다 나서서 진리는 이거다, 나아가 세상을 사는 처세술을 考究하는 무리까지 출현하는 판에 그런 혼란상을 만들지 맙시다라는 신중함을 강조하는 거지요. 

우리는 노장사상을 계승한 것이 道敎라 말합니다만... 도교란 노장사상 중 '헛되고 헛되도다'만 따르며 저 하나 제 몸뚱아리 하나 보전하려는 道引術로 변한 것이지요. 즉, 본이 아닌 지엽을 안고가는 거지요. 혼탁한 세상에 진리에 눈떠 제대로 잘 살아보자는 장자의 의도를 '세상은 악하고 헛되다'로 결론지은 염세주의 아닌가 합니다. 

본디의 창조를 깨달으면 이 모든 세상 만물이 다 하나임을 알게 되지요. 다만 조심할 것은 혹세무민하는 잘난 사람들이요. 예수가 독사의 자식이라는 일갈을 함도 이런 곡학아세하는 무리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아마 사랑 지상주의, 목사의 혓바닥에 놀아나는 것일 겁니다. 

장자의 사상은 마치 예수의 성령, 루터의 만인 제사장, 웨슬리의 선행은총의 의미와 통하지요. 사람들의 잡설에 끌리지 말고 네 스스로 주신 하나님의 영을 믿고 그에 반응하며 사는 주체자가 되라는 겁니다. 

사람들의 저 마다의 說에 끌려가지말고...


숲속에 들었으면 그 숲속 삶에 열중해야지 

숲의 끝은 보겠다 산의 꼭대기를 오르겠다라는 생각 자체가 온전한 삶을 방해하는 겁니다. 

바닷가 삶은 그 바다와 혼연일체로 사는 것이지 저 바다의 끝을 보겠다는 것 아닙니다. 

우주의 끝과 시작을 고구하는 것이 인간만의 특권일수 있읍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을 제대로 엮어가지 못하면???? 

그건 스티븐 호킹에게 맡겨진 그의 일... 


12.

顔淵問乎仲尼曰:「回嘗聞諸夫子曰:'无有所將,无有所迎.' 回敢問其遊.」


안연이 공자에게 묻길:[스승이 말한 것이 기억나는데 '오는 일에나 가는 것에 맘두지마라'하셨는데 그 경지가 뭔지요?]


仲尼曰:「古之人, 外化安不化, 安與之相靡, 必與之莫多. 豨韋氏之囿,黃帝之圃,有虞氏之宮,湯武之室. 君子之人,若儒墨者師,故以是非相齏也,而況今之人乎! 聖人虛物不傷物. 不傷物者,物亦不能傷也. 唯无所傷者,爲能與人相將迎. 山林與! 皐壤與! 使我欣欣然而樂與! 樂未畢也,哀又繼之. 哀樂之來,吾不能禦,其去弗能止. 悲夫,世人直爲物逆旅耳! 夫知遇而不知所不遇,能能而不能所不能. 无知无能者,固人之所不免也. 夫務免乎人之所不免者,豈不亦悲哉! 至言去言,至爲去爲. 齊知之所知,則淺矣.」


공자가 답하길:[옛사람은 바깥 변화에 편안하여 그에 휘둘리지 않고 그들과 섞이어 편안하니 그런 자세가 아주 많이 필요하다. 희위씨는 동산에서 황제씨는 전답에서, 순임금(유우)은 궁에서 탕왕과 무왕은 방에서 노닐었다. 소위 군자라는 사람들 유묵자의 스승들인데 시비를 따지느라 서로 견디질 못했으니 하물며 지금 사람들이야! 성인은 사물에 집착하지 않으니 사물을 상하지 않았고 이리 사물을 상하지 않으니 사물도 그를 상치 못했다. 이리 상함없는 사람들은 사람들과 더불어 만남과 헤어짐을 잘하며 (將迎)잘 섞여지낼 수 있다. 산림에서, 물가에서 자기를 기쁘게 하여야만 즐길줄 아는것! 즐김이 끝나기도 전에 슬픔이 이어지는 법. 슬픔과 기쁨이 오는 것을 내 능히 제어하지 못하니 그 가는 것도 멈추지 못한다. 슬프도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외물에 거슬러 살 뿐이네! 그런 만남법을 알지못하니 피할 자리도 알지 못하며, 만나긴해도 안 만남을 피하지 못하는 법. 모르고 하지 못함은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것. 대저 이를 면하려 애쓰는 이가 있으니 또한 슬픈 일 아니냐! 깨달은 말도 쓸모없고 깨달은 행위도 쓸모없다. 앎(지식)으로 지혜를 구하는 것은 천박함이다(淺見薄識)]


-옛사람이란 중국인들 사고 중 옛날이 완전했고 점점더 복잡해지며 순수함을 잃어간다는 사고로 보면 완전한 사람을 의미하죠. 희위씨는 온 산천을, 황제는 경작지를 품어안고 살았으나 탕왕이나 무왕은 고작 밀실에 갖혀 놀았다.

유묵자들이 하는 일이란 서로 한 사물을 놓고 옳으네 그르네를 따지는 것으로 소일하는 사람들이니 굳이 그 사물을 끌어내어 장식하고 꾸민들 그 사물이 변하나? 그런 내 논리가 없는 사람은 사람들과 잘 섞여사는 법... 


굳이 내 線을 세운다고 세우는 것은 徒勞 아니냐? 많이 안다고 바로 아느냐?

그리 이리저리 윤리니 정의니 줄긋기 하다보면 정작 운신할 폭이 좁아지니 그저 선없이 살자는 것인가요? 아니요 내가 긋는 선을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겁니다. 하나님 주시는 경계를 살라는 말이지요 막 살자라는 말 아닙니다.


오히려 그 얕은 앎이 나를 잡아먹으니 모름만 못하다는 말 아니지요. 알지 말고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깨닫기 원하면 끝까지 아니 그 너머까지 가봐야지요 그래야 어디서 멈춰설 지 알게 되고 그게 지혜로 남는 겁니다. 거기까지 가지도 않고 지레 멈춰서서 따라오지 않는 사람 게으르다고 탓하고 지나쳐 가는 사람 무식하다 할 일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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