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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남화경

徐 无 鬼

徐 无 鬼 

1. 

徐无鬼因女商見魏武侯,武侯勞之曰:「先生病矣! 苦語山林之勞,故乃肯見於寡人.」 

서무귀가 여상으로 인해 위 무후를 만났게 됐는데 위나라 무후가 위로하여 말하길:[선생이 병나신 게로군요! 산림에 사는게 힘들다라는 말도 있던데, 그래서 저를 보러 오시게 됐군요] 

徐无鬼曰:「我則勞於君,君有何勞於我! 君將盈耆欲,長好惡,則性命之情病矣.,君將黜耆欲,掔好惡,則耳目病矣. 我將勞君,君有何勞於我!」 武侯超然不對. 

서무귀가 답하여 가로되:[임금님을 위로해야 할 사람은 저인데 임금님이 저를 위로하시다뇨! 임금님은 기호와 욕심을 채우려 하시면 좋고싫음이 분명해야 하시니 본디 타고난 성명지정에 병이 나신겝니다. 임금님이 그 기호와 욕심을 꺾으시고 좋고 싫음을 단단히 지키려면 눈과 귀가 병날겁니다. 제가 임금님을 위로해야지 어찌 임금님이 저를 위로 하십니까!] 무후가 초연한 듯 응대를 않으니라. 

-여기서 말하는 것은 탈속한 사람이 세상에 대해 알기나 하랴? 아니 진리를 한편으로 치우쳐 아는 것 아니냐라는 무후의 우려에 대해 서무귀가 말하지요 "세속에 살며 보고듣는 게 많은 임금님 속이 더 복잡하지 제가 답답할까요..." 

少焉,徐无鬼曰:「嘗語君,吾相狗也. 下之質執飽而止,是狸德也.,中之質若視日,上之質若亡其一. 吾相狗,又不若吾相馬也. 吾相馬,直者中繩,曲者中鉤,方者中矩,圓者中規,是國馬也,而未若天下馬也. 天下馬有成材,若卹若失,若喪其一,若是者,超軼絶塵,不知其所,」武侯大悅而笑. 

잠시 후, 서무귀가 이르길:[제가 한 말씀 드리지요 제가 개를 구별하는 법입니다. 하급으로는 성질이 타고나길 배가 불러야 그치니 이는 승냥이의 덕입니다. 중간급은 마치 해를 바라듯 하는 개요, 상질은 저를 잊고 그저 멍하니 하나된 모습입니다. 내가 개를 구별함은 내가 말을 고르는 것에는 못 미칩니다. 내가 말을 구별할 때는 이가 한 줄로 쭉 골라야하고 굽은 곳은 굽어 곡자 같아야하고 모난 곳은 모나고 둥근 곳은 둥글어야 나라에 쓰이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도 천하제일 명마에는 못미치지요. 천하 명마는 타고난 재능이 있지요 한가하고 잊은듯 마치 죽은듯 합니다. 이런 말은 달리면 먼지를 뚫고달리고 그 족적을 모를 정도지요] 무후가 크게 기뻐 웃더라. 

-서무귀가 얘기합니다. 진리를 산다는 것에 대해 개를 예로들어... 본성을 따라 산다해도 그 품격에는 상중하가 있는데... 그저 욕심만 많아 채우려만 드는 것이 하품이요, 그저 떠나 초연한 듯함이 중간이요, 상질은 자기가 개 인지도 잊은 것 같다... 즉, 본디 본성에는 가장 근본이되는 짐승의 본성 뭔가 가지려하는 것이 보통사람들이요. 그 보다 좀 나은 것이 그를 초연하려는 산림처사들이요. 진짜 진리를 사는 사람은 그 두가지 모습을 다 버린 사람이다라는 말입니다. 

사람됨의 판단에는 그런 본성말고 쓰임을 알아야하는데 이를 말을 품평함에 견주지요. 말을 품평함에는 우선 겉모양을 봅니다. 생김이 바른지... 그렇다고 자로 잰듯 모양을 정할까요? 그저 굽은덴 굽고, 고른 것 고르며 그저 저 가져야 할 것 갖추면 된다는 말이지요 뭐 하나 잘라내고 없애지 말고... 진리를 그릇 따르는 이들이 쉽게저지르는 잘못이 이겁니다. 악은 없애고 선은 격려하고 조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본성론에 매여 본성을 얽매고 조이는 것이 수련인 줄 압니다만 이는 본디 있을 것을 베고 자르고 묶어 불구를 만드는 것과 다름 아니지요. 

다시 천하명마를 예로 듦은 그 준비됨이지요 천하명마란 그저 볼 땐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나 필요한 때 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을 명마라하지요... 그저 생김이 훌륭하고 발걸음이 기품있는 잘 훈련된 말은 훈련된 거기까지 입니다.  

이는 도의 體와 用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道有體用 不可以一端論也, 要在扶之抑之得其宜." 

진리라는 걸 실체로 보자면, 본성을 주의할 것이다. 본성에 주의하면 극기나 수양이 진리를 담지하는 그릇이 되지만 그만으로 안되고 그 작용을 봐야한다. 이는 이론과 실제라는 말로도 쓰인다.  

徐无鬼出,女商曰:「先生獨何以說吾君乎? 吾所以說吾君者,橫說之則以詩書禮樂,從說之則以金板六弢,奉事而大有功者不可爲數,而吾君未嘗啓齒. 今先生何以說吾君,使吾君說若此乎?」 
徐无鬼曰:「吾直告之吾相狗馬耳.」 
女商曰:「若是乎?」 
曰:「子不聞夫越之流人乎? 去國數日,見其所知而喜.,去國旬月,見所嘗見於國中者喜.,及期年也,見似入者而喜矣.,不亦去人滋久,思人滋深乎? 夫逃虛空者,藜藋柱乎鼪鼬之逕,踉位其空,聞人足音跫然而喜矣,又況乎昆弟親戚之謦欬其側者乎! 久矣夫,莫以眞人之言謦欬吾君之側乎!」 

서무귀가 나오자 여상이 묻길:[어찌 임금님을 설득 하였나요? 내 임금을 설득하는 법은 횡으로는 시서예악을 말하고 종으로는 주서의 금판편과 육도편으로... 받듦에 큰 공을 세운 적 허다하지만 임금님이 웃은 적이 없읍니다. 지금 선생은 임금에게 무슨 말을 하셨기에 임금이 그리 말하지요?] 

서무귀 왈:[난 그저 내가 개나 말을 구별하는 법을 말했을 뿐이요] 

여상이 왈:[ 그저 이렇게만요?] 

서무귀 말하길:[당신은 월나라 유민 이야기를 모르오? 나라를 떠난지 수 일에는 지인을 만나면 기뻐했고 여러 달이 지나곤 같은 나라 사람만 봐도 기뻐했고, 몇 년이 지나선 비슷이 만 생겨도 기뻐했답니다. 사람을 떠난 지 오래면 그 그리움도 깊지 않나요? 덩굴우거져 족제비나 다니는 길도 가릴 정도면 발길이 허공에 도니 사람 발자욱 소리만 들려도 기쁜 법이요, 하물며 일가친척의 웃음소리라면 어떨까요! 오래된 겁니다, 임금님은 가까운 측근의 웃음과 참된 사람의 말을 들은지가!] 

-남의 귀에 합하는 소리나 한다고 사람이 기뻐지지 않습니다. 그저 헤어진 제 혈육 만나듯... 나 살아가는 식에 합하는 사람이 혈육이요 그의 소리가 나를 기쁘게 하는 겁니다. 아무리 다듬고 만들어 진 사람도 그 진심에서 끌리지 않으면 기쁨이 아니지요. 

그러니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합하는 사람은 꾸며진 사람이요 외연이나 닦는 뒷 꿍꿍이 있는 사람이지요. 어쩌면 한 사람만이 나와 합하는 법입니다. 

갖춘 사람, 가진 사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 아니라 같은 물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기쁨입니다. 


2. 

徐无鬼見武侯曰:「先生居山林,食茅栗厭葱韭,以賓寡人,久矣夫! 今老邪? 其欲干酒肉之味邪? 其寡人亦有社稷之福邪?」 

서무귀를 만나 무후가 말하길:[선생은 산림에 거하며 도토리와 밤을 먹고 파와 부추를 꺼리며 나와 거리둔 지 오래라! 이젠 늙어서요? 아님 술과 고기 맛을 원하여서요? 아님 내게 조상 신명의 복이 있다 알려주려 온거요?] 

-세속을 떠나 사는 사람이 어쩐 일이요? 하는 조금 비난조로 얘기합니다. 진리를 사는 게 어찌 한쪽으로 몰켜 세속을 나 몰라라 하는거냐는 나름의 도전이지요. 이제 세상에 내려옴은 몸이 늙어 고되서요 세상향락이 그리워서요? 아님 도통한 연 구름잡고 사람 혹하는 소리나하며 우쭐하려 하느냐라는 힐난입니다. 
누구나 자기 고민이 가장 큰 줄 압니다. 그래서 이리 말할 따름이지요 무후 역시 진리를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이런 만남하지 않지요. 

徐无鬼曰:「无鬼生於貧賤,未嘗敢飮食君之酒肉,將來勞君也.」 
君曰:「何哉,奚勞寡人?」 
曰:「勞君之神與形.」 
武侯曰:「何謂邪?」 
徐无鬼曰:「天地之養也一,登高不可以爲長,居下不可以爲短. 吾獨爲萬乘之主,以苦一國之民,以養耳目鼻口,夫信者不自許也. 夫神者,好和而惡姦.,夫姦,病也,故勞之. 唯君所病之,何也?」 

서무귀 왈:[전 나길 가난하게 나서 아직 임금의 술과 고기를 맛보지 못했고, 다만 임금님을 위로하기 원할 뿐이지요] 

임금이 말하길:[무엇으로... 어찌 나를 위로하지요?] 

서무귀 왈:[임금님의 정신과 형을 위로하지요] 

무후 왈:[무슨 말 하는거요?] 

서무귀왈:[천지의 양육법은 하나입니다. 높이 오른다고 우두머리되는 것 아니요 아래 거한다고 작은 것 아닙니다. 내 왕이 되어 한 나라 국민을 괴롭게하며 자기 일신을 보존하나 대저 정신은 화합을 좋아하고 간사함을 싫어하는 법이니 대저 간사함이란 병이니 위로해야지요. 임금이 이런 병에 걸림은 왠지 아나요?] 

-다른 마음있나요 그저 세상 사랑하며 올곧게 살려는 사람끼리 얘기나 나누고 서로 위로하기 바래서지요. 

천지가 온 만물을 끌어안음은 누구게나 한가지 그 안에서 높은 자리 낮은 자리 있나요? 어버이 사랑에 차별없듯... 그저 끌어안고 보듬고 가는 것이 천지의 도입니다. 하늘이 싫어하는 것은 단 하나 사사로워 간사한 것이지요. 뱀을 싫어라 함은 당당하지 못하고 음험하고 남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지요. 

武侯曰:「欲見先生久矣. 吾欲愛民而爲義偃兵,其可乎?」 
徐无鬼曰:「不可. 愛民,害民之始也.,爲義偃兵,造兵之本也.,君自此爲之,則殆不成. 凡成美,惡器也.,君雖爲仁義,幾且僞哉! 形固造形,成固有伐,變固外戰. 君亦必无盛鶴列於麗譙之間,无徒驥於錙壇之宮,无藏逆於得,无以巧勝人,无以謀勝人,无以戰勝人. 夫殺人之士民,兼人之士地,以養吾私與吾神者,其戰不知孰善? 勝之惡乎在? 君若勿已矣,修胸中之誠,以應天之情而勿攖. 夫民死已脫矣,吾將惡乎用夫偃兵哉!」 

무후왈:[내 선생을 만나기 원한지 오래요. 내 국민을 사랑하며 의를 위해 병사를 거두려하오 그게 가능하겠소?] 

-세속과 탈속을 아우르며 외려 세속을 감싸안음에 감동하지요. 깨친이가 탈속한 듯 사는 것은 세상을 몰라서도 싫어서도 아닙니다. 다만 엮이기 싫을 따름이지요. 그러나 엮여야 할 자리라면 그저 나 할 일인 줄 운명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무후가 속내를 내 놓지요 "나 역시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쟁을 그만하려합니다"합니다만... 

서무귀 왈:[아니요 안됩니다. 백성을 사랑함이 백성을 상하게하는 시작이요 의를 위해 군을 거둠이 군을 창설함의 근본이요 임금이 이리하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모든 선을 이루겠다는 것이 악한 기틀 입니다 어떤 왕이 인의를 지닌다하지만 그것도 속임수입니다.! 형식이 형식을 만드는 법이요, 그리되면 남을 치게되고 변하여 밖으로 싸움이 됩니다. 왕은 높은 누각에서 병사의 진 이루기를 하지 말아야 하고, 잘 차려진 궁궐앞에 병사를 도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음험함이 감추이지 않으면 얻으니, 잘난 사람되려 재주피우지 말고, 잘난 사람되려고 음모꾸미지 말고 잘난 사람되려고 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저 백성을 죽이고 백성들의 땅을 얻는 것으로 스스로의 사욕과 정신을 보전하려는 자는 그 싸움이 무엇을 위함인지 모르는가요? 악을 이긴 건가요? 임금은 그래선 안됩니다. 그저 마음속의 정성을 수련할 따름입니다. 그리하여 천지의 마음에 응하며 두려워 않으면 대저 국민이 죽을 길을 면하니 굳이 병사를 거두겠다는 생각할 필요 있나요?] 

-서무귀의 말은 전쟁이나 군사가 눈에 보이고 안보이고의 문제 아니라 자기 마음가짐이 어떠냐가 중요하고 세상 것 중 무엇 하나를 제한다고 진리사는 거 아니라는 말 합니다. 결국 그런 모든 것들은 세상에 필요해서 있게된 것들인데 그를 내 임의로 제하면 되나요? 

내가 착하게 산다해서 세상이 선해지는 것 아닙니다 세상이란 그런 사람 오히려 핍박하지요. 다만 실력은 갖추되 우세하지 않는 절제가 필요한 겁니다. 치사함을 몰라서 안하는 것 아니라 그저 안함이 진리사는 삶이지요. 

사람들은 저 마다 출세하려고 합니다 처음엔 그저 남들이 나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도록...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정작 힘을 가지면 그 힘을 휘둘러 보고싶어 합니다. 그리곤 그 마력에 사로잡혀 조그만 힘도 휘두르고, 더 큰 힘을 추구하는 악의 순환에 빠져들고 맙니다. 물론 처음부터 웃자리 잡으려고 온갖 비굴한 웃음흘리곤 그 자리 차지하곤 자존심, 정의 운운하며 승냥이 본성 드러내어 포악해지는 사람도 있지요마는... 

여기서 군왕과의 대화이므로 힘 가진 자가 힘써야 할 것은 그런 순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시라는 것입니다. 

군왕으로 인의니 뭐니를 생각함은 이런 갈등을 모면하고 속여보려는 얕은 꾀일 뿐입니다.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상대적인 것 사이를 오가는 틀을 벗기 힘듭니다. 내가 뭔가를 세우면 누군가가 그 상대로 뭔가를 세우고 대립각을 만들지요... 그러니 새로 뭘 만들지 말고 있는 그것들이 잘 발란스 맞추도록 노력함이 지도자의 도리라는 말입니다. 인의라는 말로 자신을 얽매지도 말고 그저 그 보다 앞선 본질로서 진리를 개치라는 말이지요. 

形固造形이란 말은 "내가 뭘하면 그리 굳어진다"는 말이지요... 그저 지금 있는 것 안정시켜준다는 건 이미 틀에 갖히워 남들과 다툼이 생긴다는 말로 자기를 규정하지 않는 자세가 진리자의 삶입니다. 


3. 

黃帝將見大隗乎具茨之山,方明爲御,昌寓驂乘,張若謵朋前馬,昆閽滑稽後車.,至於襄城之野,七聖皆迷,无所問塗. 

헌원황제가 구자지산의 대위씨를 만나러 가는데 방명이 수레를 몰고, 창우가 시중들고, 장약과 습붕이 길라잡고, 곤혼과 활계가 수레뒤를 따랐다. 양성 벌판에 이르러 일곱성인이 길을 잃었고 물어 볼 데도 없었다. 

-여기서 대위란 대괴의 다른 말로 천지 우주 자연을 의미합니다. 즉 진리의 그릇인 자연을 발견하려는 거지요. 그러나 일곱성인 전부 그 자연의 광대함에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그러지요 자연이 어디 내 손아귀에 내 궁리속에 들어올까요? 마치 새우 한마리가 바닷물을 다 마시겠다는 어리석음이지요.  

適遇牧馬童子,問塗焉,曰:「若知具茨之山乎?」 曰:「然.」 
「若知大隗之所存乎?」 曰:「然.」 
黃帝曰:「異哉小童! 非徒知具茨之山,又知大隗之所存. 請問爲天下.」 
小童曰:「夫爲天下者,亦若此而已矣,又奚事焉! 予少而自遊於六合之內,予適有瞀病,有長者敎予曰:'若乘日之車而遊於襄城之野.' 今予病少痊,予又且復遊於六合之外. 夫爲天下亦若此而已. 予又奚事焉!」 
黃帝曰:「夫爲天下者,則誠非吾子之事. 雖然,請問爲天下.」 小童辭. 
黃帝又問. 小童曰:「夫爲天下者,亦奚以異乎牧馬者哉! 亦去其害馬者而已矣!」 
黃帝再拜稽首,稱天師而退. 

말치는 아이를 만나 길을 물으니:[구자산이라는 데를 아느냐?] 답하길:[그렇읍니다] 다시:[대위씨 계신 곳을 아느냐?] 답이:[예 그렇읍니다] 

황제왈:[참 기이한 아이로다! 그의 제자도 아닌데 구자산도 대위씨도 안다니. 천하에 대해 물어보자] 

-일개 목동이 그 자연을 안다니... 

어린 목동이 답하길:[대저 천하를 경영함이란 그저 이 일이나 이미 같지요 뭐 다른 것있나요! 제가 어릴적엔 그저 천지사방을 자유로 다녔지만 제가 눈이 흐려지는 병이 들고 어느 어르신이 왈:'해뜨면 일어나 양성평야를 유람하거라' 하십디다. 이제 병이 나아져서 다시 천지사방을 유람하게 됐지요. 천하를 경영함도 이렇지요 다른 것 없읍니다!] 

-안목이 어두워지는 병이 걸림은 다름아닌 내 욕심, 내 생각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에 정신팔리니 눈앞의 것도 바로보지 못하고 제 상상의 것으로 해석하고 말지요. 乘日之車란 해의 움직임을 따라 즉,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라는 말입니다. 

자연 우주는 내가 아는 것 아니고 합하는 것이요 하나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 큰 것을 무엇으로 감싸고, 그 힘센것을 무엇으로 고삐 쥐나요? 진리는 내가 어쩔 대상아니고 내가 파묻혀 살아야 할 내 자리입니다.  

황제왈:[대저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너나 내 일 아닌 것에 정성을 다함이로구나. 그럼 천하 경영을 물어보자] 아이가 사양하더라. 
황제가 재차 묻자. 아이가 말하길:[대저 천하 경영자는 말을 기르는 자나 다른 것 없읍니다! 말을 해하는 것들을 없애주는 그것이지요!] 
황제가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하늘 스승이십니다하며 물러갔더라. 

-대저 천하를 논함은 "니 것 내 것"이라는 차원의 일이 아니고 그저 정성을 다할 일이구나. 그럼 천하경영이란 뭘까? 묻지요. 답이 천하경영은 말 기르는 것과 같지요. 그저 해하는 것들을 치워 줌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묻지요? 해한다는 것이 뭔가???? 자연스러움을 가로막는 것이지요. 말이 괴롭다고 온 세상 파리를 없애는 것? 그것일까요? 괴롭게 하는 것이 다 해로운 것인가요? 

요즘 사람들은 그저 해로운 것, 이로운 것을 제 감정에 기준함을 봅니다. 결과라는 이름으로 율법주의적으로 판단하지요. 

매란 나쁜 건가요? 좋은 건가요? 때리니 나쁜거다? 폭력이니 행위로 나쁘다? 맞지요. 그러나 팽이에게 때림이란 그 팽이를 돌게 하는 힘이 되는데요? 

내 기분에 상하면 나쁘다? 그럼 이 세상은 맞고소가 판치는 세상일 겁니다. 무슨 일이든 내 기분대로 하겠다는 거지요 이건 잘 잘못의 문제가 아닌 거지요. 

자식이 부모의 매질을 건건이 고소하는 세상, 지금 이 세상이 옳은가요? 부부가 서로 고소하는 세상은? 서로 자기 감정 기분에 천착하여 으르렁거리는 세상이 하나님 원하는 세상인가요? 

그저 좋은 말만 하고 서로 신뢰는 저 멀리 던져두고 가면무도회하듯 하는 세상이 좋은 세상인가요? 

그럼 이 세상 천지에서 해선 안될 말, 해선 안될 일 투성이지요. 아무리 좋은 말도 언젠가는 내 귀를 내 심기를 흩을터이니 그저 말없이 삶이 옳지요. 나를 귀챦게하는 파리는 만고 역적이고... 밤새 짖어대는 옆집 개는 원수고, 밤새 울어대는 개구리는 죽여야 할 적이지요. 문제는 그것입니다 그들을 내기분 내 감정으로 저울질 하는 바로 자기가 문제라는 걸 모르나요? 

밤새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에 시상을 떠올리는 여유가 사라진 사회, 옆집 개짖는 소리에 가장의 귀가를 기다리는 사랑이 죽은 사회, 그 짖음에 옆집 안위를 걱정하는 정이 메마른 사회, 날 파리 한마리로 성질내는 성마른 사회, 이런 사회가 죽은 사회입니다. 자연을 누리고 즐기기 보다 자기 편의를 위해 인위로라도 피하고 고치는 인간들이 흥성하는 사회가 메마른 사회지요. 

정이 죽고, 사랑이 죽고, 여유가 죽은 사회에 장자는 말합니다. 자연의 한 부분으로 돌아가라고...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먹여주는 그 모태와 같은 자연의 모든 것을 감사하고 사랑하라고... 

말라리아 걸리게 하는 모기 잡아죽이고, 병원균 옮기는 파리 잡아죽이면 이 세상에 평화가 오나요? 아마 그 땐 사람이 사람을 서로 죽이게 될 겁니다. 균이란 편견으로 몸속에 유산균 장속에 균들을 깨끗히하면 인간이 건강해질까요? 아마 당장 굶어죽을 겁니다. 

건강한 삶이란 무엇을 없애고 피하는 것 아니라 이겨내고 그들과 공존함입니다. 그릇된 자기사랑을 이겨나야 하는 겁니다. 



4.

 

知士无思慮之變則不樂,辯士无談說之序則不樂,察士无凌誶之事則不樂,皆囿於物者也.

招世之士與朝,中民之士榮官,筋力之士矜難,勇敢之士奮患,兵革之士樂戰,枯槁之士宿名,法律之士廣治,禮敎之士敬容,仁義之士貴際. 農夫无草萊之事則不比,商賈无市井之事則不比. 庶人有旦暮之業則勸,百工有器械之巧則壯. 錢財不積則貪者憂,權勢不尤則夸者悲. 勢物之徒樂變,遭時有所用,不能无爲也. 此皆順比於歲,不易於物者也. 馳其形性,潛之萬物,終身不反,悲夫!

 

뜻을 세운 선비가 자기 생각이 쓰일 기회가 없으면 즐겁지 않으며, 구변에 능한 자가 의견을 낼 기회가 없으면 즐겁지 않으며, 통찰력있는 이가 잘난체 할 일이 없어 즐겁지 않는 법 이 모두는 사물에 매인 자들이라 바깥 평판을 즐기는 자들이다.

 

뛰어난 선비는 나랏일을 함께하고,

백성을 잘 살피는 선비는 지방관을 보필하며,  

근력이 있는 이는 난관을 이겨내며.

용감한 이는 환란을 이겨나며,

군무에 뛰어난 이는 전장에 나서며,

탈속함을 즐기는 이는 명예에 살고,

따지길 잘하는 이는 다스리는 일에 즐기며,

예나 배움을 즐기는 이는 그 용모 가꾸기를 숭상하고,

도리나 사람됨을 따지는 이는 제례를 즐긴다.

 

-사람들은 타고난 재주를 활용함이 으뜸이요,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합니다. 여기 그 사는 모습들을 나열합니다. 그 이유는 오히려 그런 재주있는 자들이 진리의 길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계를 가려 줌이지요.

 

우리는 탈속함이 이 모든 걸 초월하는 것이라 알지만 그렇지 않지요... 

내게 어떤 성향이 있는 지 살펴 그를 조신함이 필요한 줄 압니다.

 

농부가 김 맬 일 없으면 허탈하고, 장사치는 시정 돌아가는 일이 안정되면 허탈하고, 보통사람들은 조석으로 할 일이 있으면 근면하고, 기술자는 공구와 도면이 공교하면 힘이 난다. 

 

-사람들이란 제 재주를 드러낼 기회를 노리지요 그리고 그에 빠져들고 忘我의 경지(자신을 잊었다)에 이르렀다 하며 성취욕을 맛보려 합니다. 망아의 경지는 내 욕심을 잊은 것, 가리는 것 아니라 저를 잘 알고 저 아닌 것을 가려 행함입니다.

 

돈이 모이지 않으면 탐욕한 사람들이 우환이 생기고, 권세가 서지않으면 과시하려는 자가 슬프며, 패 짓고 외물에 따르는 도당들이 변란을 즐긴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모든 것들은 내 마음에 그를 향한 열정(?)을 불살라 보려는 것이지요.  

 

이는 기회를 만나야 소용있으니 아무것도 않하기 힘든 사람들이라. 이들은 세월의 덧없음을 좇는 자들이요 사물에 매인 자들이라. 그저 달리는 것으로 행색을 삼고 만물에 푹 젖어 죽는 순간까지 돌이킬 줄 모르니 슬픈 일 아니냐!

 

-이들이란 호시탐탐 저 나설 기회만 노리는 승냥이 같으니 저 자신을 알기는 알되 꺾는 법은 모르는 것... 자신을 자연의 하나로 놔두지 못하는 잘못된 자기사랑에 빠진 이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을 이기는 수양이 "탈속 연"함이라 알지만 탈속한 체 하는 그 행동도 결국 남의 입에 오르내리기 바라는 네가티브 욕망이요, 자기를 적극적으로 내놓는 당당함이 없는 치사함이며 결국 그네들 중 하나임을 알아야지요.

 

뭐를 택하고 거기에 젖어드는 것은 아무나 하지만, 안정(?)을 박차고 다시 순례의 길 가는 것은 아무나 못하지요. 움직이지 않는 것은 고인 것이요 고인 것은 아무리 깊어도 썩는 법입니다.

 

진리란 흐르는 물처럼, 무지개를 쫓는 그 발길이 진리지요.



5.

 

莊子曰:「射者非前期而中,謂之善射,天下皆羿也,可乎?」

 

장자 왈:[활쏘는 이가 시위를 당기지 않고도 과녁을 맞추면 잘 쏜거라 할까 그럼 세상 사람이 다 명사수겠군요 그런가요?]

 

-활을 쏘며 우연히 과녁을 맞춘 것 하나로 명사수 운운함은 어리석지요.  너도나도 한 번만 맞추면 다 명사수 인가요? 

 

惠子曰:「可.」

 

혜자 왈:[그렇죠]

 

-그럴수 있지요... 인자함인가요?  가치판단 기준을 어디에 두냐의 문제지요. 질문하는 법이 다르면 답도 달라집니다.  혜자의 근거는 "잘 맞추었으니 명사수"

 

莊子曰:「天下非有公是也,而各是其所是,天下皆堯也,可乎?」

 

장자 왈:[천하에 이런 일이 다반사 아닌데 각자가 다 그 나름 옳다면 모두 다 요임금이겠구료 맞소?]

 

-너도나도 작은 것,우연 하나로 덕이 있네 없네하는 것은 아니지 않소...

 

惠子曰:「可.」

 

혜자 왈:[그러겠지요]

 

- 소위의 "이도 좋고 저도 좋다"는 아량넓은 판단을 보여주지요. 어린이들 앞에서는 필요한 넓은 마음입니다만... 진리를 구할 땐 진위를 가리는 최소한의 변별은 해야지요. 이도좋고 저도 좋은거면 뭐하러 진리는 찾읍니까?

 

莊子曰:「然則儒墨楊秉四,與夫子爲五,果孰是邪? 或者若魯遽者邪? 其弟子曰:"我得夫子之道矣,吾能冬爨鼎而夏造氷矣." 魯遽曰:"是直以陽召陽,以陰召陰,非吾所謂道也. 吾示子乎吾道." 於是爲之調瑟,廢一於堂,廢一於室,故宮宮動,故角角動,音律同矣. 夫或改調一弦,於五音无當也,鼓之,二十五弦皆動,未始異於聲,而音之君已. 車若是者邪?」

 

장자왈:[그럼 유가,묵가,양주, 공손룡 4에 당신까지 5인데 누가 옳은거요? 혹자가 말하길 노거 같으면 되냐는데? 노거의 제자 말하길:"제가 공자의 도를 깨우쳐 내 능히 솥에 불땔 수 있고 여름에 어름을 얼게합니다"하니 노거 왈:"이건 양의 기운으로 양을 부른 것이요 음의 기운으로 음을 불러낸 것일 뿐 내 말하는 도가 아니다. 내 너에게 내 도를 보여주리"  그리고 비파의 음률을 고르는데 하나는 사당에 하나는 방에 두어, 宮음을 치면 같이 울고 角음을 치면 각음으로 울어 음이 같더라. 혹 일부러 음을 바꾸어 5음에 맞지않는 현을 타니 25개 현이 다 움직이는데 그 음이 나는 소리에 다름 아니었는데 모든 음의 으뜸입디다. 이치가 이런거요?]

 

-노거의 제자의 도는 道가 아니라 術이지요. 노거의 도란 사람 모두 공명할 수 있는 겁니다. 저 만 할 수 있는 것은 진리 아닙니다. 

 

우리는 그럽니다. 각인각색 저마다 다 다른 생각한다고... 맞지요... 그런 다름이 현실이니 받아들이자 맞죠... 그럼 그런 다른 생각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생각이 있어 그 생각이 으뜸이 되는 것이 옳지 않은가요? 중요한 것은 이런 양자의 구분 아니라 다르되 같고 같되 다른 경지를 이뤄내야지요.

 

惠子曰:「今夫儒墨楊秉,且方與我以辯,相拂以辭,相鎭以聲,而未始吾非也,則奚若矣?」

莊子曰:「齊人蹢子於宋者,其命閽也不以完,其求銒鍾也以束縛,其求唐子也而未始出域,有遺類矣! 夫楚人寄而蹢閽者.,夜半於無人之時而與舟人鬪,未始離於岑而足以造於怨也.」

 

혜자 이르길:[지금 4학파가 있어 나와 논변을 하는데 서로 물러서질 않고 소리를 높이며 자기가 그르지 않다는데 어찌 이런가요?]

장자 이르길:[아들을 송에 보낸 제나라 사람이 문지기에 명하여 문을 닫지 말라하고 목이 긴 종을 구하여 묶어두었으되 唐子(현상 사냥꾼)를 구하여 나가 찾아보라 하지 않으니 뭔가를 뒤에 남긴 것이다! 초나라 사람이 머물며 망설이다 인적도 없는 한 밤중 뱃사람과 싸웠다 이로인해 언덕을 떠나기 전에 원한 사고도 남았다]

 

-정작 해야할 일은 제쳐두고 변죽만 울리는 것은 일을 마무리한 것 아니요. 진리찾는 먼 길 떠나기 전에 제 고집만 피우면 외려 원한만 살 뿐이지요. 뱃전엔 오르기도 전에 싸움이나 하니 배에 오르기나 할 것이며 옳은들 옳게 도착할까요?


6.

 

莊子送葬,過惠子之墓,顧謂從者曰:「郢人堊漫其鼻端,若蠅翼,使匠石斲之. 匠石運斤成風,聽而斲之,盡堊而鼻不傷,郢人立不失容. 宋元君聞之,召匠石曰:"嘗試爲寡人爲之." 匠石曰:"臣則嘗能斲之. 雖然,臣之質死久矣." 自夫子之死也,吾无以爲質矣,吾无與言之矣.」

 

장자가 장례에 참가하고 혜자의 묘를 지나며 돌아보고 따르는 이들에게 말했다:[초나라 서울 영 사람중 흰 흙을 코끝에 파리날개처럼 얇게바르곤 장석에게 이를 깎아내라 시켰다. 장석이 도끼를 휘두르는데 바람이 일 정도였으나 들으면서도 깎도록 버려두었지만 다. 깎고나서 코 끝하나 상하지 않았고 영사람은 그대로 서있더라. 송나라 원군이 듣고 장석을 불러 이르길:"과인을 상대로 한 번 해보시게" 장석 왈:"제가 할 수는 있겠읍니다만 그러면 제 자질이 죽어없어질 겁니다. " 내가 죽으면 자질이라 할 만한 것이 없으니 내 더 할 말이 없읍니다]

 

-장석의 재주는 신뢰 위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누구나 되는 기술이 아니다. 송 원군과 장석 사이에는 영나라 사람 만치의 깊은 신뢰가 없으니 도끼질에 틈을 두거나 원군이 털끝만치만 움직여도 분명 다치거나 상할 것이 틀림없다. 그리하면 원군은 장석을 사형할 것이고 그리되면 그 재주도 그저 한낱 이야기로 묻히고 말리라.

 

장자가 혜자를 아쉬워 함은 그저 정이 아니라 신뢰지요. 같은 경지에서 노는 신뢰...의견은 달라도 노는 경지가 같은... 이만한 벗을 얻으려면 오랜 시간 깊은 신뢰를 쌓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여기 얇게 바르는 재주, 그를 깎아내는 재주란 그 재주의 신묘함 아닌 그리 얇은 막을 도끼로 벗겨낼 정도로 세밀한 부분까지의 신뢰를 말하지요.

 

이런 기이한 일도 서로의 깊은 신뢰가 있을 때 가능한 것... 그저 재주로 하고 되어질 일 아니다.  

 

성경에 보면 옷자락을 만진 여인에게 예수는 말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낫겠나이다"하는 백부장에게도 그리 말합니다 "네 믿음이 소자를 낫게하였다." 이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요 그리된다는 확신과 깊은 신뢰가 이뤄내는 기적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을 타고났기에 생활 속의 기적도 가능합니다. 그 기적을 가능케 하는 것은 깊은 신뢰지요.

 

사랑의 위대함도 깊은 신뢰에서 가능합니다. 신뢰없이 사랑이 계속되나요? 사랑하면 신뢰해야지요. 아비의 매질도 사랑임을 알면 철나는 겁니다. 세상 신고가 나를 향하신 사랑인 줄 알면 진리에 가까워진 겁니다.



7.

管仲有病,桓公問之曰:「仲父之病病矣,可不諱云! 至於大病,則寡人惡乎屬國而可?」


관중이 병이 들었다. 환공이 그에게 묻기를, 중부(경칭:작은 아버지라는 뜻)의 병이 깊으니, 내키지는 않으나 말하지 않을 수 없소! 그대의 병이 깊어지면 내가 누구에게 나랏일을 맡기면 좋겠소?


管仲曰:「公誰欲與?」


관중이 말하기를:[공께서는 누구에게 맡기고자 하십니까? ]


公曰:「鮑叔牙.」


환공이 말하기를:[포숙아를 생각하고 있소.]


曰:「不可. 其爲入,潔廉善士也,其於不己若者不比之,又一聞人之過,終身不忘. 使之治國,上且鉤乎君,下且逆乎民. 其得罪於君也,將弗久矣!」


관중이 말하기를:[안 됩니다. [그는] 그 사람됨이 깨끗하고 청렴한 선비입니다. 그래서 자신만 못한 사람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또 한 번 남의 허물을 듣게 되면, 평생 잊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나랏일을 맡기게 되면, 위로는 임금에게 걸림돌이 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거슬림이 됩니다. 그것은 임금에게 죄가 되어 장차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관포지교(管鮑之交)의 두 사람이 나옵니다. 관중은 포숙아의 천거와 보필로 이름을 날리지요. 그러나 관중은 그를 그리 도운 포숙아 보다 습붕을 천거합니다. 은혜도 모르고 친구의 의리도 없어서인가요? 아니 포숙아를 너무 잘 아는 것입니다. 눈에 뵈기로야 관중은 의리를 저버린 사람일지 모르나 진정 친구를 위하는 뜻이 잇는겁니다. 친구라고 합당치 않은 자리에 세우는 것은 외려 그를 죽이는 결과를 낳지요. 포숙아는 사지서 도망칠 정도의 사람 아니라 깨끗한 사람이지요. 


公曰:「然則孰可?」

對曰:「勿已,則隰朋可. 其爲人也,上忘而下不畔,愧不若黃帝而哀不己若者. 以德分人謂之聖,以財分人謂之賢. 以賢臨人,未有得人者也.,以賢下人,未有得人者也. 其於國有不聞也,其於家有不見也. 勿已,則隰朋可.」


환공이 말하기를:[그렇다면 누가 적임이란 말이오?]

[관중이] 대답해 말하기를:[외람된 말씀이오나, 습붕이란 자가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람됨이 임금은 잊어버리고 아랫사람들과 더불어 하며, 자신이 黃帝만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신만 못한 사람들을 보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덕을 나누어 사람들을 구하는 자를 성인이라 하고, 재물을 나누어 사람들을 구하는 자를 현인이라 합니다. 어질다고 사람들에게 군림하면 사람들을 얻을 수가 없고, 어짊으로써 사람들의 아래에 처하면 반드시 사람들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나랏일에서는 구구한 일은 듣지도 않고, 집안 일에서 하찮은 일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굳이 말씀드리자면, 습붕이 좋겠습니다.]


-습붕은 관중과 여러번 공을 세운 사람이지요. 사람됨은 늘 스스로 부족함을 알고 채우려 노력하며 저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애석한 마음으로 도우려는 사람 됨입니다. 이런 마음이 사람을 구하지요. 포숙아는 진리를 위해 칼맞음을 겁내지 않고, 너무 곧아 틀린 꼴을 보아넘기지 못하는 사람이라 허물많은 뭇 백성을 그저 넘어가고 이해해주긴 하나 사람들로 깨우치고 다스리기 어렵지요. 왕이라도 직언하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사는 모습은 두 가지, 자기의 의를 위해살거나, 사람들을 위해 살거나 입니다. 즉, 안으로 자기에게 엄격하고 밖으로 사람들을 독려하고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둘에 하나만 갖추면 완전한 것 아니지요.



8.

吳王浮於江,登乎狙之山. 衆狙見之,恂然棄而走,逃於深蓁. 有一狙焉,委蛇攫搔,見巧乎王. 王射之,敏給搏捷矢. 王命相者趨射之,狙執死.

王顧謂其友顔不疑曰:「之狙也,伐其巧,恃其便以敖予,以至此殛也! 戒之哉! 嗟乎,无以汝色驕人哉!」 顔不疑歸而師董梧以鋤其色,去樂辭顯,三年而國人稱之.

 

오나라왕이 강을 내려가 원숭이 산으로 올랐다. 뭇 원숭이들이 보고 놀라 다 버리고 깊은 숲으로 도망하더라. 한 원숭이가 있어 침착하니 이나 잡고있더니 그 재주가 가히 뛰어나더라. 왕이 살을 쏘니 그 살을 잡아채더라. 왕이 사람들에게 명하여 모두 쏘게하니 원숭이가 죽었다.

 

왕이 친구 안불의를 돌아보며 말하길:[저 원숭이가 그 재주를 떨치며 오만방자하게 굴다가 이런 꼴을 당하였구나! 교훈이로다! 무릇 얼굴을 꾸며 남들에게 교만하지 말라!] 안불의가 돌아와 동오를 스승으로 모신다는 우쭐함과 자랑함을 버리고 드러나길 사양하여 3년이 지나니 모든 백성이 칭송하더라.

 

-여기서 원숭이의 재주란 한마디로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을 말하지요. 그저 여유를 부린다고 아무리 저가 잘났다고 사람을 이기나요. 살다보면 이 세상엔 나 만한 재주 이상으로 잘난 사람도 많은 법입니다. 그러니 늘 신중해야지요. 겸손함이 아니라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하는겁니다. 

 

뭐 하나 가지면 꾸미고 우쭐하는 것이 천박한 사람들의 행사입니다 역으로 깜냥도 안되며 유유자적 흉내냄도 격에 맞지 않는 겁니다.

 

유유자적함은 세상 진리를 다 알고 난 연후에나 되는 것... 화살 하나 잡아 챌 재주로 여유부릴 일은 아니지요. 하나를 안다고 전체를 다 아나요?  그저 일부분 참여하는 것 뿐이지요.

 

좋은 스승 모신다고 깨우친다는 것 의미하진 않습니다. 먼저 저가 바로되야지요. 좋은 행실 익힌다고 깨우치는 것 아닙니다만 정말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알아야지요..  

 

겸손함을 배우려 말고 제 분수를 알면 자연 겸손하여 집니다. 아량의 모양을 배우지 말고 내 비롯됨을 알면 아량이 생기는 법입니다. 예의를 배우려 말고 제 부족함을 알면 예가 생기지요.

 

그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겸손을 꾸미고 예를 꾸미는 법입니다. 아무리 명품이어도 남의 옷 같음은 그것이 내 안에서 나온 것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엔 어울리는 격이 있는 겁니다.    


9.

南伯子綦隱几而坐,仰天而噓. 顔成子入見曰:「夫子,物之尤也. 形固可使若槁骸,心固可使若死灰乎?」

 

남백자기가 안석에 앉아 허허롭게 하늘을 보고있었다. 안성자가 들어와 보고는 말하길:[당신은 사물을 넘어섰구료. 처신이 안정되어 고목처럼 할 수도 있고, 마음도 죽은 재처럼 할 수 있구려]

 

曰:「吾嘗居山穴之中矣. 當是時也,田禾一覩我,而齊國之衆三賀之. 我必先之,彼故知之.,我必賣之,彼故鬻之. 若我而不有之,彼惡得而知之? 若我而不賣之,彼惡得而鬻之? 嗟乎! 我悲人之自喪者,吾又悲夫悲人者,吾又悲夫悲人之悲者,其後而日遠矣.」

 

답하길:[난 산 속 동굴에 산 적있다. 당시 제 나라 임금 전화씨가 날 보러왔는데 제나라 사람들이 3번을 축하합디다. 내가 우선 그랬으니 그가 알게된 것(내가 빌미를 주었으니), 내가 나를 (물건처럼) 파니 그가 그리 사는 것. 만약 내가 그런 적 없다면 그가 뭔 수로 날 알아채겠는가?  만약 내가 날 팔지 않았으면 그가 어찌 그리 살수 있는가? 아! 난 스스로를 죽여버린 이를 슬퍼하네 또 그저 그를 슬퍼하는 자를 슬퍼하며 또 그리 슬퍼하지 않는자를 슬퍼하네 그후 그런 어리석음을 떠났다고 할 수 있지]

 

-어떤 일이 일어남은 먼저 내가 그런 빌미를 제공한 것, 그러지 않으면 상대가 그리 할 수 있는가? 다만 자기 본성을 그리 팔아먹은 자를 슬퍼하며 또 그런 걸 슬퍼만 하며 제 본성 찾기를 못하는 이를 슬퍼하며 또한 그를 슬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자를 슬퍼하면서 그런 사물에 매이는 경지를 벗어났다 할 것이네.

 

깨침에 이를 땐 우선 

1, 세상의 잘못된 것들을 가려 볼 줄 알아야하고 

2, 그를 가려보며 안타까워 할 줄 알아야지요. 그러나 그저 그런 현실을 개탄만 한다고 깨침에 이른 것은 아니지요. 외려 그런 현실을 직시하고 

3, 그 안에서 본성을 찾아가야만 외물을 벗어나 참된 자아로 살게되고 그것이 깨친 삶이지요.

 

세상에 대해 비판치 못함은 못 깨우쳐서 아니요 그에 함몰되어 있어서요.

비판하고 아파함은 세상 진리를 바로 보았기 때문이라 이를 흔히 우리는 분변이요, 인이란 단어로 표현하고 한 단계 나아간 경지로 일컫는다. 그런 현실을 공감하고 아파함은 분명 현실을 직시함에서 생긴 것은 분명하긴하나 직시함으로 그치면 깨침은 아니다.

깨침이란 초연함, 탈속함으로 보이기는 하나 그로 자기를 발견하고 본성으로 실생활을 사는 것이 진정 깨친 이의 삶이다.  


10.

 

仲尼之楚,楚王觴之,孫叔敖執爵而立,市南宜僚受酒而祭曰:「古之人乎! 於此言已.」

曰:「丘也聞不言之言矣,未之嘗言,於此乎言之. 市南宜僚弄丸而兩家之難解,孫叔敖甘寢秉羽而郢人投兵. 丘願有喙三尺!」

 

공자가 초나라에 갔을때 초나라 왕이 공자를 위해 술을 따랐다. 손숙오가 잔을 들고 섰고 시남의료가 잔을 받아들고 축사하길:[옛사람들이여! 여기 한마디 합니다] 왈:[공자가 말아닌 소리를 들었다는데 그 말을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을 여기서 말하기 바랍니다. 시남의료가 구슬놀이로 송과 초의 난을 해결하고, 손숙오가 부채를 잡고 쉬며 영땅 사람이 병사되게했다니 공자가 입이 석자나 삐졌답니다]

 

-시남의료가 은근히 술잔을 빌어 놀리지요. 공자는 말로 되지 않을 것을 분변한다고 설치고 시남의료 자신이나 손숙오는 진리를 알아 무위의 위를 했노라...

 

彼之謂不道之道,此之謂不言之辯,故德總乎道之所一. 而言休乎知之所不知,至矣. 道之所一者,德不能同也.,知之所不能知者,辯不能擧也.,名若儒墨而凶矣. 故海不辭東流,大之至也.,聖人幷包天地,澤及天下,而不知其誰氏. 是故生无爵,死无諡,實不聚,名不立,此之謂大人. 狗不以善吠爲良,人不以善言爲賢,而況爲大乎! 夫爲大不足以爲大,而況爲德乎! 夫大莫若天地,然奚求焉而大備矣. 知大備者,无求,无失,无棄,不以物易己也. 反己而不窮,循古而不摩,大人之誠.

 

저들이 이르길 도아닌 것을 도라 이르고, 이제 말 아닌 것으로 분변하려하네... 덕이라도 모두어 합하면 도가 산만함을 벗어 하나 되는 것이다.  말을 잠시 쉬고 돌아보면 알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게되니 깨달음이라. 진리란 원래 하나니 덕이 쌓여도 똑같이 되지 못하리. 알수없다는 것을 깨닫게되면 변별이 생기지 않으며, 유묵이니 뭐니로 이름내려 함은 흉한것. 그래서 바다는 동쪽으로 흐름을 사양치 않으니 크고 지극하다. 성인은 하늘과 땅을 동시에 품으니 천하를 다 아우르고 뭐라 이름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살아서 직위를 탐하지 않고 죽어 시호를 갖지 않고, 실리를 쌓지 않으며, 이름을 세우지 않으니 이를 큰 사람이라 한다. 개가 선량한 사람에게 짖어도 그 소리가 선하지 않고, 사람들이란 현인을 좋게 말하지 않는다 이 어찌 크다 할 것인가? 크고자하면 족함을 몰라야 큰 것 이를 덕이라 부른다! 대저 막막함이 천지같으니 그러니 뭘 구해야 준비 잘된것인가. 잘 준비하는 것이란 구하지 않음이요 잃지않음이요 버리지 않음이요 그러지 않으므로 사물이 자기를 변케하지 않음이라. 자기 본성에 거스름은 궁극이 아니니, 옛 것을 알긴 알아도 연마하지 않으니  큰 사람의 정성됨이라.

 

-저들이 하는 짓이란 공연한 짓이라... 진리 모두를 알수없다는 것을 알면 뭔 변별을 하리? 소크라테스의 Gnothi Seauton이지요.  바다가 동으로 흐름을 거스르지 않음은 모든 세상 만물은 저 가는 길이 있는것 그를 거스르지 말고 따르고 품으라.  

 

이름내고 출세함을 따르지 않는 이가 큰 사람이요. 개가 도둑이든 선량한 사람이든 짖어대듯 사람들이란 말하기 좋아한다. 개란 뜻을 펴도 그야말로 개소리일뿐... 그러니 늘 다른 이들에 휘둘리지않고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닦아가는 사람이 덕있는 사람이요 깨달음을 살 사람이다.

 

세상에 대해 잘 대비한다지만 무엇으로 그리할까? 과거에 옳았다는 것이 지금도 옳을까? 그저 현실을 맞닥뜨려 살아냄이 귀한 것, 내가 먼저 사물을 정의하는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제 본성을 왜곡하는 것... 이거다 저거다 하는 소리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진정 큰 사람이 살 도리이다.


11.

 

子綦有八子,陳諸前,召九方歅曰:「爲我相吾子,孰爲祥?」

 

자기에게 8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들을 세워놓고 구방인을 불러 말하길:[날 위해 내 자식들의 상을 봐주시오 누가 상서롭소?] 

 

-구방인은 말의 상을 잘 보던 사람....

 

九方歅曰:「梱也爲祥.」

 

구방인 왈:[곤이 상서롭네요]

 

子綦瞿然喜曰:「奚若?」 曰:「梱也將與國君同食以終其身.」

 

자기가 기뻐 말하길:[어떤가요?]

답이:[곤은 장차 국왕과 더불어 식사하며 종생하겠네요]

 

子綦索然出涕曰:「吾子何爲以至於是極也!」

 

자기가 기막혀하다 눈물을 흘리며 말하길 :[내 자식이 어찌 이러한 막장에 이른 걸까요!]

 

九方垔曰:「夫與國君同食,澤及三族,而況父母乎! 今夫子聞之而泣,是禦福也. 子則祥矣,父則不祥.」

 

구방인 왈:[국왕과 같이 상을 받음은 은택이 3족에 이르니 하물며 부모에게야! 지금 당신이 그를 듣고 우는 것은 복을 막는겁니다. 아들은 상서로운데 아비는 상서롭지 못하네요]

 

-우리는 뭔가 출세하고 잘난 것을 바라지요. 나 아니면 자식이라도... 그게 사람사는 모습입니다. 저와 자식은 별개의 존재란 걸 인정하지 못하지요.

 

그러나 자식이 출세간하는 것이 과연 좋은 걸까요? "난 그저 내 아이가 그저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고 저 하나 편안하기 원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아나요? 그저 하늘 정하신 삶에 맞아 드러나지도 모자라지도 않으면 그것이 가장 잘 사는 삶 아닌가요? 하늘 주신 그대로를 살았으니?   

 

子綦曰:「歅,汝何足以識之,而梱祥邪? 盡於酒肉入於鼻口矣,而何足以知其所自來? 吾未嘗爲牧想牂生於奧,未嘗好田而鶉生於宎,若勿怪,何邪? 吾所與吾子遊者,遊於天地. 吾與之邀樂於天,吾與之邀食於地.,吾不與之爲事,不與之爲謀,不與之爲怪.,吾與之乘天地之誠而不以物與之相攖,吾與之一委蛇而不與之爲事所宜. 今也然有世俗之償焉! 凡有怪徵者,必有怪行,殆乎,非我與吾子之罪,幾天與之也! 吾是以泣也.」

 

자기가 말하길:[웃기는군요, 당신은 어찌 당신 아는 것에 만족하시오 곤이 상서롭다니? 술과 고기가 다하면 코와 입이 들어오니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 압니까? 난 일찌기 양을 친 적이 없으나 암양이 깊은 의미를 갖고, 밭을 가져 본 적 없으나 메추리가 구석에 나옴을 기이히 여기지 않소 뭔 까닭인지 아오? 난 내 아이들과 유유자적 함을 바라오 천지를 노닐며...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땅이 주는 것을 먹으며, 어떤 일에 매이지 않고 어떤 꾸밈에도 어떤 기이함에도 끼이지 않고,  난 세상의 정성스러움에 싸여 사물에 매이지 않으며, 난 그저 침착하여 사물이 옳다는 것에 매이지 않으며 말이오. 지금 이것은 세속의 보상이요! 무릇 괴이한 기미란 기행에 따르는 법 죽음이나 마찬가지요 나와 내 아이들의 죄는 아니라면 하늘이 그리하시는 것! 난 그래서 우는거요]

 

-남의 눈에 드러남이 복이라 믿는가? 남의 이목을 받으며 속 볶느니 그저 한구석 맘편히 살다감이 나은 줄 모르나?

 

无幾何而使梱之於燕,盜得之於道,全而鬻之則難,不若刖之則易,於是乎刖而鬻之於齊,適當渠公之街,然身食肉而終.

 

얼마지 않아 어떤 연유에선지 곤이 연나라를 향하게 됐는데 그 길에 강도가 들어 온전하면 어려움이 있으리라 하여 발꿈치를 벰이 용이하다 하여 발꿈치를 베어 제나라에 팔리웠는데 마침 유명한 대가집에 팔려 몸은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한다.]

 

-육신은 호의호식하나 마음은 남의 집 종살이라...  


12.


齧缺遇許由,曰:「子將奚之?」


설결이 허유를 만나 물었다:[자네 장차 어쩔건가?]


曰:「將逃堯.」


답이:[요왕에게서 도망할랍니다]


曰:「奚謂邪?」


왈: [뭔소리인지?]


曰:「夫堯畜畜然仁,吾恐其爲天下笑. 後世其人與人相食與! 夫民,不難聚也.,愛之則親,利之則至,譽之則勸,致其所惡則散. 愛利出乎仁義,損仁義者寡,利仁義者衆. 夫仁義之行,唯且无誠,且假夫禽貪者器. 是以一人之斷制利天下,譬之猶一覕也. 夫堯知賢人之利天下也,而不知其賊天下也,夫唯外乎賢者知之矣!」


요는 아낍니다 아끼기에 어질지요 난 그게 세상의 웃음거리될까 두렵습니다. 훗날 세상에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겁니다! 대저 백성이란 갖춰지기 어렵지요 사랑하기에 친해지며 이득을 생각하기에 극진하고 명예를 노리기에 권력을 추구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일을 하면 흩어집니다. 사람들에의 애정과 이득은 인의에서 나오나 인의라는 말을 떠나 사랑하는 이는 적고 인의로 이를 취하는 것이 대중입니다. 인의를 행한다 함은 정성을 다하지 않는거요 또 탐욕스런 이들의 도구일 뿐입니다. 이렇듯 한 사람의 결단과 제도가 천하를 이롭게 한다는 건 그저 흘깃보고는것을 비유하는 겁니다. 요가 현인으로 세상을 이롭게 한다지만 그가 천하를 노략질하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 현인이란 말, 그 경지를 떠난 사람만이 그 현인의 경지를 아는 것!]


-요임금에 대한 다른 관점이지요. 요는 성군으로 추앙받으나 결국 요를 허물하는 것 아니라 사람들의 사람됨을 인의라는 도덕관념으로 옭아맴은 그 인간 본성에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의란 말은 도덕의 경지를 향한 하나의 발판 일뿐... 그를 딛고 넘어서야 할 도약대이지요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닌... 인의예지를 입에 달고 사는 이가 인의예지를 아나요? 그를 진정 아는 이는 그를 훌훌 떠날 줄도 압니다.



13.

有暖姝者,有濡需者,有卷婁者,.


훤주에 속한자, 유수에 속한 자, 권루에 속한자들이 있다.


所謂暖姝者,學一先生之言,則暖暖姝姝而私自說也,自以爲足矣,而未知未始有物也,是以謂暖姝者也.


소위 훤주자란 스승의 말을 공부하여 유순하고 순종하여 그걸 자기 것으로 삼는 이요 그를 만족하여 만물의 분변 이전의 경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이를 훤주자라 일컫는다.


-이런 이들은 자신을 도야하여 경지에 이르기 보다 그저 자기 도그마에 빠져 말들에 저를 맞추어 그로 만족하며 산다. 이런 이들의 특징은 다양한 남들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못하고 남들과 분쟁을 일삼는다. 소위 율법적 사고를 하는 이들이 그 대표다. 이슬람이 골수 예수쟁이들이 저지르는 행태가 그 예다. "나 아니면 그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사랑할 만한 것들이지요.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 없다고...


濡需者,豕蝨是也,擇疏鬣者以爲廣宮大囿,奎蹏曲隈,乳間股脚,此以爲安室利處,不知屠者之一旦鼓臂布草操煙火,而己與豕俱焦也. 此以域進,此以域退,此其所謂濡需者也.


유수자란 남의 그늘에 젖어 나아가지 못하는 자로 돼지 몸의 이와 같아, 터럭사이를 큰 궁전과 정원으로 알고, 발굽과 사타구니 사이, 또는 젖과 겨드랑이 사이를 편안한 곳이라 여겨 머물다가 돼지잡는 이가 돼지를 잡고 불태우면 자신도 불타버릴 것을 모른다. 이는 그 범주 안에서 잠깐의 안주를 꾀하는 유수자라 한다.


-이런 이들 역시 그저 저 처한 자리서 만족하고 살며 그 나마의 자리를 집착하려 하는 자로 안정추구자요 일견 평화주의자로 보인다. "내게 해끼치지 않으면 오불관하리"라는 자세로... 그러나 소위 벽쌓기 잘하는 사람이요 남이 그 영역을 침범하면 표독하기 그지 없지요.


卷婁者,舜也. 羊肉不慕蟻,蟻慕羊肉,羊肉羶也. 舜有羶行,百姓悅之,故三徙成都,至鄧之虛而十有萬家. 堯聞舜之賢,擧之童土之地,曰冀得其來之澤. 舜擧乎童土之地,年齒長矣,聰明衰矣,而不得休歸,所謂卷婁者也.


권루자란 순임금과 같은 자. 양고기가 개미를 좋아라 않아도 개미는 양고기를 좋아하는데 양고기가 누린내 나기 때문이다. 순임금은 그런 누린내나는 행동으로 백성들이 기뻐하게 하는데 그러므로 순이 3번을 이사해도 큰 읍을 이뤄 등이라는 지역에 십만여호의 도시를 이뤘다. 요는 순임금 이야기를 듣고 그를 종토라는 지역을 주어 말하길 바라건데 은택을 이루라 했다. 순이 종토 땅을 받아 나이들고 총명이 사그러저도 돌아가 쉬질 못했으니 이를 등골 휘도록 일한다 해서 권루자라 합니다.


-저를 꾸며 사람들의 이목받기를 즐기는 자로 평생을 곤고하게 애써도 정작 자기 마음 속엔 평안함이 없는 사람


是以神人惡衆至,衆至則不比,不比則不利也. 故无所甚親,无所甚疏,拘德煬和以順天下,此謂眞人. 於魚棄知,於魚得計,於羊棄意.


이러므로 신인은 무리가 꼬이는 것을 싫어하니 무리가 모여들어도 견주지 않고 견주지 않음으로 이득을 챙기지 않지요. 그러니 딱히 깊이 친할 일도, 딱히 소원할 일도없이 덕을 붙잡고 조화를 기르며 천하에 따르지요 이를 일컬어 진인이라 합니다. 물고기처럼의 지혜를 버리고, 물고기 같은 계책을 버리며 양과 같은 의지를 버리지요.


-사람과 가까이 하기 보다 진리를 가까이 사는 사람은 뭐 하나에 매임을 버려 살긴 살되 얽히지 않고 살아갑니다.


以目視目,以耳聽耳,以心復心. 若然者,其平也繩,其變也循. 古之眞人,以天待人,不以人入天. 古之眞人,得之也生,失之也死.,得之也死,失之也生.


보이는 그 대로를 보고 들리는 그 대로를 듣고 마음 가는대로 따르지요. 그리하면 그 고르기가 먹줄 친 듯하고 변화무쌍하지요. 옛사람들은 하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사람의 뜻을 하늘 뜻에 대입하지 않지요. 옛날 참 사람들은 생을 깨달아 죽음을 잊고, 죽음의 의미를 깨달아 생의 집착을 잊는다.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듣는다라는 말은 일체의 선입견이나 편견없이 사는 것을 말하며 준승같으나 변화 무쌍하다함은 자유함을 말하지요. 저들 모르는 하늘 뜻으로 사니 사람들 눈에야 측량불가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생이란 그런 것임을 알아 죽음을 두려워 않으며 죽음의 허망함을 알아 생의 번다함을 잊으며 사는 것이 참 사람의 도리이지요.


14.

 

藥也,其實菫也,桔梗也,鷄廱也,豕零也,是時爲帝者也,何可勝言!

 

약이란 기실 때에 따름이 제일이니 길경이니 계옹이니 시령이니 좋은 약이라는데 이는 때에 따라 듣는데 어떤 약이 제일이라 할 것인가?

 

-약이란 증상에 맞게 써야하는 법, 무슨 약재가 만병통치약일까?

 

句踐也以甲楯三千棲於會稽. 唯種也能知亡之所以存,唯種也不知其身之所以愁. 故曰,鴟目有所適,鶴脛有所節,解之也悲.

 

월나라 구천이 3천의 군사를 이끌고 회계에서 머물렀다. 오직 種만이 망할 경지에서 살아남을 것을 알았으나 종은 제 몸에 근심이 서릴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르길 올빼미 눈에 쓰임이 있고 학다리가 마디가 있는데 이런 쓰임을 없애면 슬픈 일이요.

 

-돌아가는 이치를 알 수 있어도 때에 따른 변화는 알아채기 힘드니... 올빼미 눈은 밤에, 학의 긴 다리는 물 속을 노니는데 쓰이는 것 그것을 내 판단으로 잘라내고 없앰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故曰,風之過河也有損焉,日之過河也有損焉. 請只風與日相與守河,而河以爲未始其攖也,恃源而往者也. 故水之守土也審,影之守人也審,物之守物也審.

 

그래서 이르길 강위를 부는 바람에도 손실이 있을수 있고 강위의 햇빛에도 손실이 있는것. 바람과 해에게 같이 강을 지키라해도 강이 그 상호작용을 시작하지 않으니, 근원에 의지하여 흐르기때문이다. 그러니 흙을 넘보지않는 물도 서로 잇닿아 흐르고, 사람을 지키는 그림자도 같이 다니니 만물을 만물되게 하는 사물도 그리한다 

 

-강위에 바람이 불고 해가 비춘다 해도 모두 이롭기만 한 것 아닌 법, 이롭다고 바람과 햇빛이 강위에 머문다고 강물에 영향을 줄까? 강물이란 저 나름의 근원과 가는 길이 있는데? 그러나 물과 뭍이 잇닿아 흐르고 그림자가 사람과 붙어 다님 처럼 사물간에도 이리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故目之於明也殆,耳之於聰也殆. 心之於殉也殆. 凡能其於府也殆,殆之成也不給改. 禍之長也玆萃,其反也緣功,其果也待久. 而人以爲己寶,不亦悲乎! 故有亡國戮民无已,不知問是也.

 

고로 밝을때 보는 것은 안정된 것 아니고,  들리는 것에 매인 귀도 그러하다. 추구하는 마음도 안정된 것 아니다. 대개 능력이란 있다해도 믿을 수 없는 것 그런 불안정함이 이룸이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나이먹음이 불행함은 경험의 집적이요, 이런 경험치를 이기는 법은 인연에 따름이요, 나이먹어 쌓인 경험치는 오래가는 법. 사람들이 이를 보배로 여기니 이 또한 슬픈 일 아닌가! 그래서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죽이는 일은 끝이없는데도 그 원인을 모르네.

 

-밝은데서 밝히 보인다고, 귀에 들린다고, 마음이 간다고 하는 것도 그리 믿을 만한 것 아니다. 또한 내게 능력으로 주어진 것이라도 불완전한 것... 이런 불완전 자체가 세상이요 이를 다른 뭘로 대체할 수 없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감은 이런저런 경험치가 쌓이는 것이요. 이런 경험치들이 외려 자연과 합일한 생각을 막는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인연을 따르는 것... 그런 경험치는 고치기도 어렵고 오래간다. 이런 것들이 나라를 망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빈번한데도 그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자기의 경험, 그리고 상식이란 말로 저도 모르게 쌓인 정보에 의지한다. 그러나 그런 것 조차도 오랜 경험에 따른 편견일 수 있다. 수천년을 지탱해온 천동설도 기실은 우리의 아주 주관적인 편견이었듯... 

 

이런 보편적인 정보가 절대 진리를 보증하지 못하는 법...  이런 생각이 외려 진리에 다가설 기회를 해친다. 


15.

 

故足之於地也踐,雖踐,恃其所不蹍而後善博也.,人之於知也少,雖少,恃其所不知而後知天之所謂也. 知大一,知大陰,知大目,知大均,知大方,知大信,知大定,至矣. 大一通之,大陰解之,大目視之,大均緣之,大方體之,大信稽之,大定持之.

 

발이 땅에 닿음이 발걸음... 어떤 발걸음이라도 넘어지지 않을 것을 믿고야 보폭을 넓게하는 법. 사람의 지식이란 건 작다 지식이 작고 모르는 것이 있음을 깨닫고서야 소위 하늘이란 걸 알게 된다. 세상 만물이 하나라는 큰 하나 됨을 알고, 들끓는 세상에 고요함이라는 큰 소리를 알고, 만물을 그대로 볼 줄 아는 큰 눈을 알고, 큰 고름, 큰 바름, 큰 믿음, 큰 정해짐을 알면 깨달은 것이요. 그런 큰 하나는 깨달음을, 큰 고요함은 화해를, 큰 안목은 제대로 보게하고, 큰 고름은 인연을 알게, 큰 바름은 몸을, 큰 믿음은 헤아림을, 큰 정해짐은 지탱이 된다.

 

-우리 아는 것이란 것이 기실은 아주 작은 것이니 내가 가진 것, 아는 것에 의존하는 것 아니다. 상대적 원리로 앎이란 것도 모름이 있다는 것에 비추어야 알게 되는 것. 이런 상대적인 세상 이치를 넘어선 둘의 반대인 하나가 아닌 하나를 알아야지요. 

 

우리 좁은 생각에 이 천하 모든 것을 꿰뚫을 수는 없읍니다. 다만 작은 앎이어도 그 아는 것이 다 아니라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아는 그것으로 우리는 천하를 읽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되어야 나 아는 세상이 세상이라는 좁은 생각을 벗어나 세상의 모습들이 하나임을 알게되고 그제서야 공부가 시작되는 겁니다. 번잡함에서 고요함을 살아 화해를, 안목을 키워 바로보고, 모순된 듯 공평함을 알아 인연의 법칙을, 세상의 모순적인 올바름을 알아 내 한 몸 추스리고, 상대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그들을 헤아리고, 정한 이치를 깨달아 굳건히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盡有天循有照,冥雨樞,始有彼. 則其解之也似不解之者,其知之也似不知之也,不知而後知之. 其問之也,不可以有崖,而不可以无崖. 頡滑有實,古今不代,而不可以虧,則可不謂有大揚搉乎! 闔不亦問是已.奚惑然爲! 以不惑解惑,復於不惑,是尙大不惑.

 

극진해지면 하늘의 모호함을 알고 밝히 비춰보이며 앞이 안뵈도록 내리는 빗 속이 본질 임을 알게되고 모든 것의 시작이 그에 있음을 알게 되지요. 즉 그 해결은 해결 아님과 같아서 그 앎이란 모름과 같아지며 모름을 알아야 알게되는 법. 그를 연구하면 장애가 있을 수 없고 장애가 없을 수도 없다.  날아오르고 미끌어 떨어짐도 실체가 있고 예와 지금이 구분없고 섞임도 없으니 즉, 큰 다스림의 도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어찌 이를 묻지를 않는가. 왜 혹하여 있는가! 혹함의 해결에 혹하지 않음으로 혹하지 않음에 이르면 이것이 큰 혹하지 않음이다.

 

-그런 모호함 자체가 진리 임을 알게된다. 그러니 선악 선택 구조를 떠나, 선악의 상호작용을 잘 이해하고, 아니 있는 그대로를 누려감이 진리를 사는 모습이다.

 

맑은 날이 날씨의 전부인가? 다만 내가 좋아라 할 뿐... 어쩌면 모진 빗속에 뵈는 그것이 이 세상의 본 모습인 것... 그러니 상대적으로 맑음이니 밝음이니 하는 말들이 깨침이 아니라 그런 밝음과 맑음으로 어두움을 가려 보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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