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 无 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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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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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莊子曰:「射者非前期而中,謂之善射,天下皆羿也,可乎?」
장자 왈:[활쏘는 이가 시위를 당기지 않고도 과녁을 맞추면 잘 쏜거라 할까 그럼 세상 사람이 다 명사수겠군요 그런가요?]
-활을 쏘며 우연히 과녁을 맞춘 것 하나로 명사수 운운함은 어리석지요. 너도나도 한 번만 맞추면 다 명사수 인가요?
惠子曰:「可.」
혜자 왈:[그렇죠]
-그럴수 있지요... 인자함인가요? 가치판단 기준을 어디에 두냐의 문제지요. 질문하는 법이 다르면 답도 달라집니다. 혜자의 근거는 "잘 맞추었으니 명사수"
莊子曰:「天下非有公是也,而各是其所是,天下皆堯也,可乎?」
장자 왈:[천하에 이런 일이 다반사 아닌데 각자가 다 그 나름 옳다면 모두 다 요임금이겠구료 맞소?]
-너도나도 작은 것,우연 하나로 덕이 있네 없네하는 것은 아니지 않소...
惠子曰:「可.」
혜자 왈:[그러겠지요]
- 소위의 "이도 좋고 저도 좋다"는 아량넓은 판단을 보여주지요. 어린이들 앞에서는 필요한 넓은 마음입니다만... 진리를 구할 땐 진위를 가리는 최소한의 변별은 해야지요. 이도좋고 저도 좋은거면 뭐하러 진리는 찾읍니까?
莊子曰:「然則儒墨楊秉四,與夫子爲五,果孰是邪? 或者若魯遽者邪? 其弟子曰:"我得夫子之道矣,吾能冬爨鼎而夏造氷矣." 魯遽曰:"是直以陽召陽,以陰召陰,非吾所謂道也. 吾示子乎吾道." 於是爲之調瑟,廢一於堂,廢一於室,故宮宮動,故角角動,音律同矣. 夫或改調一弦,於五音无當也,鼓之,二十五弦皆動,未始異於聲,而音之君已. 車若是者邪?」
장자왈:[그럼 유가,묵가,양주, 공손룡 4에 당신까지 5인데 누가 옳은거요? 혹자가 말하길 노거 같으면 되냐는데? 노거의 제자 말하길:"제가 공자의 도를 깨우쳐 내 능히 솥에 불땔 수 있고 여름에 어름을 얼게합니다"하니 노거 왈:"이건 양의 기운으로 양을 부른 것이요 음의 기운으로 음을 불러낸 것일 뿐 내 말하는 도가 아니다. 내 너에게 내 도를 보여주리" 그리고 비파의 음률을 고르는데 하나는 사당에 하나는 방에 두어, 宮음을 치면 같이 울고 角음을 치면 각음으로 울어 음이 같더라. 혹 일부러 음을 바꾸어 5음에 맞지않는 현을 타니 25개 현이 다 움직이는데 그 음이 나는 소리에 다름 아니었는데 모든 음의 으뜸입디다. 이치가 이런거요?]
-노거의 제자의 도는 道가 아니라 術이지요. 노거의 도란 사람 모두 공명할 수 있는 겁니다. 저 만 할 수 있는 것은 진리 아닙니다.
우리는 그럽니다. 각인각색 저마다 다 다른 생각한다고... 맞지요... 그런 다름이 현실이니 받아들이자 맞죠... 그럼 그런 다른 생각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생각이 있어 그 생각이 으뜸이 되는 것이 옳지 않은가요? 중요한 것은 이런 양자의 구분 아니라 다르되 같고 같되 다른 경지를 이뤄내야지요.
惠子曰:「今夫儒墨楊秉,且方與我以辯,相拂以辭,相鎭以聲,而未始吾非也,則奚若矣?」 莊子曰:「齊人蹢子於宋者,其命閽也不以完,其求銒鍾也以束縛,其求唐子也而未始出域,有遺類矣! 夫楚人寄而蹢閽者.,夜半於無人之時而與舟人鬪,未始離於岑而足以造於怨也.」
혜자 이르길:[지금 4학파가 있어 나와 논변을 하는데 서로 물러서질 않고 소리를 높이며 자기가 그르지 않다는데 어찌 이런가요?] 장자 이르길:[아들을 송에 보낸 제나라 사람이 문지기에 명하여 문을 닫지 말라하고 목이 긴 종을 구하여 묶어두었으되 唐子(현상 사냥꾼)를 구하여 나가 찾아보라 하지 않으니 뭔가를 뒤에 남긴 것이다! 초나라 사람이 머물며 망설이다 인적도 없는 한 밤중 뱃사람과 싸웠다 이로인해 언덕을 떠나기 전에 원한 사고도 남았다]
-정작 해야할 일은 제쳐두고 변죽만 울리는 것은 일을 마무리한 것 아니요. 진리찾는 먼 길 떠나기 전에 제 고집만 피우면 외려 원한만 살 뿐이지요. 뱃전엔 오르기도 전에 싸움이나 하니 배에 오르기나 할 것이며 옳은들 옳게 도착할까요? |
6.
莊子送葬,過惠子之墓,顧謂從者曰:「郢人堊漫其鼻端,若蠅翼,使匠石斲之. 匠石運斤成風,聽而斲之,盡堊而鼻不傷,郢人立不失容. 宋元君聞之,召匠石曰:"嘗試爲寡人爲之." 匠石曰:"臣則嘗能斲之. 雖然,臣之質死久矣." 自夫子之死也,吾无以爲質矣,吾无與言之矣.」
장자가 장례에 참가하고 혜자의 묘를 지나며 돌아보고 따르는 이들에게 말했다:[초나라 서울 영 사람중 흰 흙을 코끝에 파리날개처럼 얇게바르곤 장석에게 이를 깎아내라 시켰다. 장석이 도끼를 휘두르는데 바람이 일 정도였으나 들으면서도 깎도록 버려두었지만 다. 깎고나서 코 끝하나 상하지 않았고 영사람은 그대로 서있더라. 송나라 원군이 듣고 장석을 불러 이르길:"과인을 상대로 한 번 해보시게" 장석 왈:"제가 할 수는 있겠읍니다만 그러면 제 자질이 죽어없어질 겁니다. " 내가 죽으면 자질이라 할 만한 것이 없으니 내 더 할 말이 없읍니다]
-장석의 재주는 신뢰 위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누구나 되는 기술이 아니다. 송 원군과 장석 사이에는 영나라 사람 만치의 깊은 신뢰가 없으니 도끼질에 틈을 두거나 원군이 털끝만치만 움직여도 분명 다치거나 상할 것이 틀림없다. 그리하면 원군은 장석을 사형할 것이고 그리되면 그 재주도 그저 한낱 이야기로 묻히고 말리라.
장자가 혜자를 아쉬워 함은 그저 정이 아니라 신뢰지요. 같은 경지에서 노는 신뢰...의견은 달라도 노는 경지가 같은... 이만한 벗을 얻으려면 오랜 시간 깊은 신뢰를 쌓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여기 얇게 바르는 재주, 그를 깎아내는 재주란 그 재주의 신묘함 아닌 그리 얇은 막을 도끼로 벗겨낼 정도로 세밀한 부분까지의 신뢰를 말하지요.
이런 기이한 일도 서로의 깊은 신뢰가 있을 때 가능한 것... 그저 재주로 하고 되어질 일 아니다.
성경에 보면 옷자락을 만진 여인에게 예수는 말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낫겠나이다"하는 백부장에게도 그리 말합니다 "네 믿음이 소자를 낫게하였다." 이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요 그리된다는 확신과 깊은 신뢰가 이뤄내는 기적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을 타고났기에 생활 속의 기적도 가능합니다. 그 기적을 가능케 하는 것은 깊은 신뢰지요.
사랑의 위대함도 깊은 신뢰에서 가능합니다. 신뢰없이 사랑이 계속되나요? 사랑하면 신뢰해야지요. 아비의 매질도 사랑임을 알면 철나는 겁니다. 세상 신고가 나를 향하신 사랑인 줄 알면 진리에 가까워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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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吳王浮於江,登乎狙之山. 衆狙見之,恂然棄而走,逃於深蓁. 有一狙焉,委蛇攫搔,見巧乎王. 王射之,敏給搏捷矢. 王命相者趨射之,狙執死. 王顧謂其友顔不疑曰:「之狙也,伐其巧,恃其便以敖予,以至此殛也! 戒之哉! 嗟乎,无以汝色驕人哉!」 顔不疑歸而師董梧以鋤其色,去樂辭顯,三年而國人稱之.
오나라왕이 강을 내려가 원숭이 산으로 올랐다. 뭇 원숭이들이 보고 놀라 다 버리고 깊은 숲으로 도망하더라. 한 원숭이가 있어 침착하니 이나 잡고있더니 그 재주가 가히 뛰어나더라. 왕이 살을 쏘니 그 살을 잡아채더라. 왕이 사람들에게 명하여 모두 쏘게하니 원숭이가 죽었다.
왕이 친구 안불의를 돌아보며 말하길:[저 원숭이가 그 재주를 떨치며 오만방자하게 굴다가 이런 꼴을 당하였구나! 교훈이로다! 무릇 얼굴을 꾸며 남들에게 교만하지 말라!] 안불의가 돌아와 동오를 스승으로 모신다는 우쭐함과 자랑함을 버리고 드러나길 사양하여 3년이 지나니 모든 백성이 칭송하더라.
-여기서 원숭이의 재주란 한마디로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을 말하지요. 그저 여유를 부린다고 아무리 저가 잘났다고 사람을 이기나요. 살다보면 이 세상엔 나 만한 재주 이상으로 잘난 사람도 많은 법입니다. 그러니 늘 신중해야지요. 겸손함이 아니라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하는겁니다.
뭐 하나 가지면 꾸미고 우쭐하는 것이 천박한 사람들의 행사입니다 역으로 깜냥도 안되며 유유자적 흉내냄도 격에 맞지 않는 겁니다.
유유자적함은 세상 진리를 다 알고 난 연후에나 되는 것... 화살 하나 잡아 챌 재주로 여유부릴 일은 아니지요. 하나를 안다고 전체를 다 아나요? 그저 일부분 참여하는 것 뿐이지요.
좋은 스승 모신다고 깨우친다는 것 의미하진 않습니다. 먼저 저가 바로되야지요. 좋은 행실 익힌다고 깨우치는 것 아닙니다만 정말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알아야지요..
겸손함을 배우려 말고 제 분수를 알면 자연 겸손하여 집니다. 아량의 모양을 배우지 말고 내 비롯됨을 알면 아량이 생기는 법입니다. 예의를 배우려 말고 제 부족함을 알면 예가 생기지요.
그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겸손을 꾸미고 예를 꾸미는 법입니다. 아무리 명품이어도 남의 옷 같음은 그것이 내 안에서 나온 것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엔 어울리는 격이 있는 겁니다. |
9. 南伯子綦隱几而坐,仰天而噓. 顔成子入見曰:「夫子,物之尤也. 形固可使若槁骸,心固可使若死灰乎?」
남백자기가 안석에 앉아 허허롭게 하늘을 보고있었다. 안성자가 들어와 보고는 말하길:[당신은 사물을 넘어섰구료. 처신이 안정되어 고목처럼 할 수도 있고, 마음도 죽은 재처럼 할 수 있구려]
曰:「吾嘗居山穴之中矣. 當是時也,田禾一覩我,而齊國之衆三賀之. 我必先之,彼故知之.,我必賣之,彼故鬻之. 若我而不有之,彼惡得而知之? 若我而不賣之,彼惡得而鬻之? 嗟乎! 我悲人之自喪者,吾又悲夫悲人者,吾又悲夫悲人之悲者,其後而日遠矣.」
답하길:[난 산 속 동굴에 산 적있다. 당시 제 나라 임금 전화씨가 날 보러왔는데 제나라 사람들이 3번을 축하합디다. 내가 우선 그랬으니 그가 알게된 것(내가 빌미를 주었으니), 내가 나를 (물건처럼) 파니 그가 그리 사는 것. 만약 내가 그런 적 없다면 그가 뭔 수로 날 알아채겠는가? 만약 내가 날 팔지 않았으면 그가 어찌 그리 살수 있는가? 아! 난 스스로를 죽여버린 이를 슬퍼하네 또 그저 그를 슬퍼하는 자를 슬퍼하며 또 그리 슬퍼하지 않는자를 슬퍼하네 그후 그런 어리석음을 떠났다고 할 수 있지]
-어떤 일이 일어남은 먼저 내가 그런 빌미를 제공한 것, 그러지 않으면 상대가 그리 할 수 있는가? 다만 자기 본성을 그리 팔아먹은 자를 슬퍼하며 또 그런 걸 슬퍼만 하며 제 본성 찾기를 못하는 이를 슬퍼하며 또한 그를 슬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자를 슬퍼하면서 그런 사물에 매이는 경지를 벗어났다 할 것이네.
깨침에 이를 땐 우선 1, 세상의 잘못된 것들을 가려 볼 줄 알아야하고 2, 그를 가려보며 안타까워 할 줄 알아야지요. 그러나 그저 그런 현실을 개탄만 한다고 깨침에 이른 것은 아니지요. 외려 그런 현실을 직시하고 3, 그 안에서 본성을 찾아가야만 외물을 벗어나 참된 자아로 살게되고 그것이 깨친 삶이지요.
세상에 대해 비판치 못함은 못 깨우쳐서 아니요 그에 함몰되어 있어서요. 비판하고 아파함은 세상 진리를 바로 보았기 때문이라 이를 흔히 우리는 분변이요, 인이란 단어로 표현하고 한 단계 나아간 경지로 일컫는다. 그런 현실을 공감하고 아파함은 분명 현실을 직시함에서 생긴 것은 분명하긴하나 직시함으로 그치면 깨침은 아니다. 깨침이란 초연함, 탈속함으로 보이기는 하나 그로 자기를 발견하고 본성으로 실생활을 사는 것이 진정 깨친 이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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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子綦有八子,陳諸前,召九方歅曰:「爲我相吾子,孰爲祥?」
자기에게 8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들을 세워놓고 구방인을 불러 말하길:[날 위해 내 자식들의 상을 봐주시오 누가 상서롭소?]
-구방인은 말의 상을 잘 보던 사람....
九方歅曰:「梱也爲祥.」
구방인 왈:[곤이 상서롭네요]
子綦瞿然喜曰:「奚若?」 曰:「梱也將與國君同食以終其身.」
자기가 기뻐 말하길:[어떤가요?] 답이:[곤은 장차 국왕과 더불어 식사하며 종생하겠네요]
子綦索然出涕曰:「吾子何爲以至於是極也!」
자기가 기막혀하다 눈물을 흘리며 말하길 :[내 자식이 어찌 이러한 막장에 이른 걸까요!]
九方垔曰:「夫與國君同食,澤及三族,而況父母乎! 今夫子聞之而泣,是禦福也. 子則祥矣,父則不祥.」
구방인 왈:[국왕과 같이 상을 받음은 은택이 3족에 이르니 하물며 부모에게야! 지금 당신이 그를 듣고 우는 것은 복을 막는겁니다. 아들은 상서로운데 아비는 상서롭지 못하네요]
-우리는 뭔가 출세하고 잘난 것을 바라지요. 나 아니면 자식이라도... 그게 사람사는 모습입니다. 저와 자식은 별개의 존재란 걸 인정하지 못하지요.
그러나 자식이 출세간하는 것이 과연 좋은 걸까요? "난 그저 내 아이가 그저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고 저 하나 편안하기 원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아나요? 그저 하늘 정하신 삶에 맞아 드러나지도 모자라지도 않으면 그것이 가장 잘 사는 삶 아닌가요? 하늘 주신 그대로를 살았으니?
子綦曰:「歅,汝何足以識之,而梱祥邪? 盡於酒肉入於鼻口矣,而何足以知其所自來? 吾未嘗爲牧想牂生於奧,未嘗好田而鶉生於宎,若勿怪,何邪? 吾所與吾子遊者,遊於天地. 吾與之邀樂於天,吾與之邀食於地.,吾不與之爲事,不與之爲謀,不與之爲怪.,吾與之乘天地之誠而不以物與之相攖,吾與之一委蛇而不與之爲事所宜. 今也然有世俗之償焉! 凡有怪徵者,必有怪行,殆乎,非我與吾子之罪,幾天與之也! 吾是以泣也.」
자기가 말하길:[웃기는군요, 당신은 어찌 당신 아는 것에 만족하시오 곤이 상서롭다니? 술과 고기가 다하면 코와 입이 들어오니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 압니까? 난 일찌기 양을 친 적이 없으나 암양이 깊은 의미를 갖고, 밭을 가져 본 적 없으나 메추리가 구석에 나옴을 기이히 여기지 않소 뭔 까닭인지 아오? 난 내 아이들과 유유자적 함을 바라오 천지를 노닐며...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땅이 주는 것을 먹으며, 어떤 일에 매이지 않고 어떤 꾸밈에도 어떤 기이함에도 끼이지 않고, 난 세상의 정성스러움에 싸여 사물에 매이지 않으며, 난 그저 침착하여 사물이 옳다는 것에 매이지 않으며 말이오. 지금 이것은 세속의 보상이요! 무릇 괴이한 기미란 기행에 따르는 법 죽음이나 마찬가지요 나와 내 아이들의 죄는 아니라면 하늘이 그리하시는 것! 난 그래서 우는거요]
-남의 눈에 드러남이 복이라 믿는가? 남의 이목을 받으며 속 볶느니 그저 한구석 맘편히 살다감이 나은 줄 모르나?
无幾何而使梱之於燕,盜得之於道,全而鬻之則難,不若刖之則易,於是乎刖而鬻之於齊,適當渠公之街,然身食肉而終.
얼마지 않아 어떤 연유에선지 곤이 연나라를 향하게 됐는데 그 길에 강도가 들어 온전하면 어려움이 있으리라 하여 발꿈치를 벰이 용이하다 하여 발꿈치를 베어 제나라에 팔리웠는데 마침 유명한 대가집에 팔려 몸은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한다.]
-육신은 호의호식하나 마음은 남의 집 종살이라... |
12. 齧缺遇許由,曰:「子將奚之?」 설결이 허유를 만나 물었다:[자네 장차 어쩔건가?] 曰:「將逃堯.」 답이:[요왕에게서 도망할랍니다] 曰:「奚謂邪?」 왈: [뭔소리인지?] 曰:「夫堯畜畜然仁,吾恐其爲天下笑. 後世其人與人相食與! 夫民,不難聚也.,愛之則親,利之則至,譽之則勸,致其所惡則散. 愛利出乎仁義,損仁義者寡,利仁義者衆. 夫仁義之行,唯且无誠,且假夫禽貪者器. 是以一人之斷制利天下,譬之猶一覕也. 夫堯知賢人之利天下也,而不知其賊天下也,夫唯外乎賢者知之矣!」 요는 아낍니다 아끼기에 어질지요 난 그게 세상의 웃음거리될까 두렵습니다. 훗날 세상에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겁니다! 대저 백성이란 갖춰지기 어렵지요 사랑하기에 친해지며 이득을 생각하기에 극진하고 명예를 노리기에 권력을 추구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일을 하면 흩어집니다. 사람들에의 애정과 이득은 인의에서 나오나 인의라는 말을 떠나 사랑하는 이는 적고 인의로 이를 취하는 것이 대중입니다. 인의를 행한다 함은 정성을 다하지 않는거요 또 탐욕스런 이들의 도구일 뿐입니다. 이렇듯 한 사람의 결단과 제도가 천하를 이롭게 한다는 건 그저 흘깃보고는것을 비유하는 겁니다. 요가 현인으로 세상을 이롭게 한다지만 그가 천하를 노략질하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 현인이란 말, 그 경지를 떠난 사람만이 그 현인의 경지를 아는 것!] -요임금에 대한 다른 관점이지요. 요는 성군으로 추앙받으나 결국 요를 허물하는 것 아니라 사람들의 사람됨을 인의라는 도덕관념으로 옭아맴은 그 인간 본성에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의란 말은 도덕의 경지를 향한 하나의 발판 일뿐... 그를 딛고 넘어서야 할 도약대이지요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닌... 인의예지를 입에 달고 사는 이가 인의예지를 아나요? 그를 진정 아는 이는 그를 훌훌 떠날 줄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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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藥也,其實菫也,桔梗也,鷄廱也,豕零也,是時爲帝者也,何可勝言!
약이란 기실 때에 따름이 제일이니 길경이니 계옹이니 시령이니 좋은 약이라는데 이는 때에 따라 듣는데 어떤 약이 제일이라 할 것인가?
-약이란 증상에 맞게 써야하는 법, 무슨 약재가 만병통치약일까?
句踐也以甲楯三千棲於會稽. 唯種也能知亡之所以存,唯種也不知其身之所以愁. 故曰,鴟目有所適,鶴脛有所節,解之也悲.
월나라 구천이 3천의 군사를 이끌고 회계에서 머물렀다. 오직 種만이 망할 경지에서 살아남을 것을 알았으나 종은 제 몸에 근심이 서릴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르길 올빼미 눈에 쓰임이 있고 학다리가 마디가 있는데 이런 쓰임을 없애면 슬픈 일이요.
-돌아가는 이치를 알 수 있어도 때에 따른 변화는 알아채기 힘드니... 올빼미 눈은 밤에, 학의 긴 다리는 물 속을 노니는데 쓰이는 것 그것을 내 판단으로 잘라내고 없앰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故曰,風之過河也有損焉,日之過河也有損焉. 請只風與日相與守河,而河以爲未始其攖也,恃源而往者也. 故水之守土也審,影之守人也審,物之守物也審.
그래서 이르길 강위를 부는 바람에도 손실이 있을수 있고 강위의 햇빛에도 손실이 있는것. 바람과 해에게 같이 강을 지키라해도 강이 그 상호작용을 시작하지 않으니, 근원에 의지하여 흐르기때문이다. 그러니 흙을 넘보지않는 물도 서로 잇닿아 흐르고, 사람을 지키는 그림자도 같이 다니니 만물을 만물되게 하는 사물도 그리한다
-강위에 바람이 불고 해가 비춘다 해도 모두 이롭기만 한 것 아닌 법, 이롭다고 바람과 햇빛이 강위에 머문다고 강물에 영향을 줄까? 강물이란 저 나름의 근원과 가는 길이 있는데? 그러나 물과 뭍이 잇닿아 흐르고 그림자가 사람과 붙어 다님 처럼 사물간에도 이리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故目之於明也殆,耳之於聰也殆. 心之於殉也殆. 凡能其於府也殆,殆之成也不給改. 禍之長也玆萃,其反也緣功,其果也待久. 而人以爲己寶,不亦悲乎! 故有亡國戮民无已,不知問是也.
고로 밝을때 보는 것은 안정된 것 아니고, 들리는 것에 매인 귀도 그러하다. 추구하는 마음도 안정된 것 아니다. 대개 능력이란 있다해도 믿을 수 없는 것 그런 불안정함이 이룸이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나이먹음이 불행함은 경험의 집적이요, 이런 경험치를 이기는 법은 인연에 따름이요, 나이먹어 쌓인 경험치는 오래가는 법. 사람들이 이를 보배로 여기니 이 또한 슬픈 일 아닌가! 그래서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죽이는 일은 끝이없는데도 그 원인을 모르네.
-밝은데서 밝히 보인다고, 귀에 들린다고, 마음이 간다고 하는 것도 그리 믿을 만한 것 아니다. 또한 내게 능력으로 주어진 것이라도 불완전한 것... 이런 불완전 자체가 세상이요 이를 다른 뭘로 대체할 수 없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감은 이런저런 경험치가 쌓이는 것이요. 이런 경험치들이 외려 자연과 합일한 생각을 막는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인연을 따르는 것... 그런 경험치는 고치기도 어렵고 오래간다. 이런 것들이 나라를 망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빈번한데도 그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자기의 경험, 그리고 상식이란 말로 저도 모르게 쌓인 정보에 의지한다. 그러나 그런 것 조차도 오랜 경험에 따른 편견일 수 있다. 수천년을 지탱해온 천동설도 기실은 우리의 아주 주관적인 편견이었듯...
이런 보편적인 정보가 절대 진리를 보증하지 못하는 법... 이런 생각이 외려 진리에 다가설 기회를 해친다. |
15.
故足之於地也踐,雖踐,恃其所不蹍而後善博也.,人之於知也少,雖少,恃其所不知而後知天之所謂也. 知大一,知大陰,知大目,知大均,知大方,知大信,知大定,至矣. 大一通之,大陰解之,大目視之,大均緣之,大方體之,大信稽之,大定持之.
발이 땅에 닿음이 발걸음... 어떤 발걸음이라도 넘어지지 않을 것을 믿고야 보폭을 넓게하는 법. 사람의 지식이란 건 작다 지식이 작고 모르는 것이 있음을 깨닫고서야 소위 하늘이란 걸 알게 된다. 세상 만물이 하나라는 큰 하나 됨을 알고, 들끓는 세상에 고요함이라는 큰 소리를 알고, 만물을 그대로 볼 줄 아는 큰 눈을 알고, 큰 고름, 큰 바름, 큰 믿음, 큰 정해짐을 알면 깨달은 것이요. 그런 큰 하나는 깨달음을, 큰 고요함은 화해를, 큰 안목은 제대로 보게하고, 큰 고름은 인연을 알게, 큰 바름은 몸을, 큰 믿음은 헤아림을, 큰 정해짐은 지탱이 된다.
-우리 아는 것이란 것이 기실은 아주 작은 것이니 내가 가진 것, 아는 것에 의존하는 것 아니다. 상대적 원리로 앎이란 것도 모름이 있다는 것에 비추어야 알게 되는 것. 이런 상대적인 세상 이치를 넘어선 둘의 반대인 하나가 아닌 하나를 알아야지요.
우리 좁은 생각에 이 천하 모든 것을 꿰뚫을 수는 없읍니다. 다만 작은 앎이어도 그 아는 것이 다 아니라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아는 그것으로 우리는 천하를 읽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되어야 나 아는 세상이 세상이라는 좁은 생각을 벗어나 세상의 모습들이 하나임을 알게되고 그제서야 공부가 시작되는 겁니다. 번잡함에서 고요함을 살아 화해를, 안목을 키워 바로보고, 모순된 듯 공평함을 알아 인연의 법칙을, 세상의 모순적인 올바름을 알아 내 한 몸 추스리고, 상대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그들을 헤아리고, 정한 이치를 깨달아 굳건히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盡有天循有照,冥雨樞,始有彼. 則其解之也似不解之者,其知之也似不知之也,不知而後知之. 其問之也,不可以有崖,而不可以无崖. 頡滑有實,古今不代,而不可以虧,則可不謂有大揚搉乎! 闔不亦問是已.奚惑然爲! 以不惑解惑,復於不惑,是尙大不惑.
극진해지면 하늘의 모호함을 알고 밝히 비춰보이며 앞이 안뵈도록 내리는 빗 속이 본질 임을 알게되고 모든 것의 시작이 그에 있음을 알게 되지요. 즉 그 해결은 해결 아님과 같아서 그 앎이란 모름과 같아지며 모름을 알아야 알게되는 법. 그를 연구하면 장애가 있을 수 없고 장애가 없을 수도 없다. 날아오르고 미끌어 떨어짐도 실체가 있고 예와 지금이 구분없고 섞임도 없으니 즉, 큰 다스림의 도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어찌 이를 묻지를 않는가. 왜 혹하여 있는가! 혹함의 해결에 혹하지 않음으로 혹하지 않음에 이르면 이것이 큰 혹하지 않음이다.
-그런 모호함 자체가 진리 임을 알게된다. 그러니 선악 선택 구조를 떠나, 선악의 상호작용을 잘 이해하고, 아니 있는 그대로를 누려감이 진리를 사는 모습이다.
맑은 날이 날씨의 전부인가? 다만 내가 좋아라 할 뿐... 어쩌면 모진 빗속에 뵈는 그것이 이 세상의 본 모습인 것... 그러니 상대적으로 맑음이니 밝음이니 하는 말들이 깨침이 아니라 그런 밝음과 맑음으로 어두움을 가려 보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