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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남화경

則陽


1.

 

則陽游於楚,夷節言之於王,王未之見,夷節歸.

 

칙양이 초나라를 여행하는데, 이절이 왕에게 일렀으나 왕이 만나주지 않았고 이절이 돌아갔더라.

 

彭陽見王果曰:「夫子何不譚我於王?」

 

팽양이 왕과를 만나 묻길:[당신은 어째 내 얘기를 왕에게 아니하오?]

 

王果曰:「我不若公閱休.」

 

왕과 왈:[전 공열휴만 못합니다]

 

彭陽曰:「公閱休奚爲者邪?」

 

팽양 왈:[공열휴는 어떤 분이지요?]

 

曰:「冬則擉鼈於江,夏則休乎山樊. 有過而問者,曰:'此予宅也.' 夫夷節已不能,而況我乎! 吾又不若夷節. 夫夷節之爲人也,无德而有知,不自許,以之神其交,固顚冥乎富貴之地,非相助以德,相助消也. 夫凍者假衣於春,暍者反冬乎冷風. 夫楚王之爲人也,形尊而嚴.,其於罪也,無赦如虎.,非夫佞人正德,其孰能橈焉!

 

답이:[겨울엔 강에서 자라잡고 여름엔 산속에서 쉽니다. 지나는 사람이 있어 물으면 :"이게 내집이요" 합디다. 무릇 이절이 해도 못할 일을 하물며 제가! 난 이절만 못하다오. 대저 이절의 사람됨은 덕은 없지만 지혜는 있지요, 스스로 자기란 걸 허용하지 않아 신명과 교류하니 그에 홀려 그 부요함에 사로잡혀있어 덕을 서로 돋우기보다 덕을 없애는 격이니 추위에 떠는 이가 봄을 기리며, 더위먹은 이가 겨울 찬바람을 돌아보는 격이지요. 대저 초왕의 사람됨이란 형식으로는 존중받기 좋아하고 엄하니 그게 죄라면 호랑이처럼 용서가 없어 무릇 간사한 말도 할 정도 그러나 덕이 바른 이 아니고는 누가 능히 그 뜻을 굽힐까요!

 

-공열휴의 깨달음이란 자기에게 엄해서 굳이 말하면 하나님 편이라 그에 취하여 서로 위로하고 따뜻함을 주기보단 혹독한 절제와 인내를 말하는 사람이라... 이런 깨침도 깨침이지요 덕있고 온후한 것 만이 깨친 이의 모습 아닙니다.

 

초왕의 사람됨이란 엄하고 존중받기 즐기는 자의식 강한 사람으로 이런 이에겐 이절과 같은 이의 깨침이 도움이 된다.

 

「故聖人,其窮也使家人忘其貧,其達也使王公忘爵祿而化卑. 其於物也,與之爲娛矣.,其於人也,樂物之通而保己焉.,故或不言而飮人以和,與人竝立而使人化. 父子之宜,彼其乎歸居,而一閒其所施. 其於人心者,若是其遠也. 故曰待公閱休.」

 

[그러므로 성인이란 그 무궁함을 따르는 자세로 식구들의 빈궁함을 잊게하고, 그 깨달음으로 왕과 귀족에게 그 작위가 비천히 여기도록 합니다. 사물에게는 그들에 어우러져 즐기고, 사람에게는 사물의 즐거움을 깨달아 자기를 지키니 그러므로  혹 말을 않아도 조화롭게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남들과 같이 처함으로 사람으로 뭔가 변하게 하지요. 부자의 의리랄까 저들의 그러함으로 돌아가 머물게 하여, 그저 하는 듯 안하는 듯하는 베풀고 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이래서 그리 심원하다. 그래서 공열휴에게 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깨달은 성인이란 빈천하여 세속사에 매인 사람에게는 궁극의 진리를, 권력에 빠진 왕과 귀족들에겐  그 비천한 욕망을 일깨우게 하며, 사물에 대해서는 사심없이 대하고 사람을 대함엔 사물의 뜻을 알아 자기를 지키기만 하며 차분히 남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우지요 때론 회초리 들고... 마치 父子의 의리랄까? 그런 것을 지닌 사람입니다.

 

嚴父慈母입니다. 사랑은 아비의 사랑 어미의 사랑 다 사랑이지요.


2.

聖人達綢繆,周盡一體矣,而不知其然,性也. 復命搖作而以天爲師,人則從而命之也.

 

성인은 미리미리 빈틈없이 준비하고 두루 한 몸되게 정성을 다하나 그를 의식하지 못하니 이른바 본성이 그러해서다. 제 소명에 따라 뭐에든 임하니 하늘이 스승되어서이라 사람된 도리는 (뭘 함이 아니라)그저 운명에 따름이 길이다.

 

-성인은 그저 저 타고난 성품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다만은 범부와 다름은 그가 마음에 사람을 아끼는 하늘의 성품을 살기 때문이다. 굳이 뭘 알아서 가리고 분변함 아니라 그저 무분별로 사니 하늘 뜻이 깃들어 살게되는 것.

 

憂乎知,而所行恒无幾時,其有止也,若之何! 生而美者,人與之鑑,不告則不知其美於人也. 若知之,若不知之,若聞之,若不聞之,其可喜也終无已,人之好之亦无已,性也. 聖人之愛人也,人與之名,不告則不知其愛人也. 若知之,若不知之,若聞之,若不聞之,其愛人也終无已,人之安之亦无已,性也.

 

안다하니 근심이니 무얼하든 항상 그 정한 때에 안 맞으니 마치 안하는 것 같다 어찌 그럴까! 아름답게 낳았다는 말은 사람이 거울을 봐서이다 누구든 뭐든 말해주지 않으면 사람의 아름다움을 어찌 알겠는가. 알든 모르든 들었든 못들었든 아름답다 함은 기쁨이니 그렇든말든 이미 그런 것, 사람들이 좋아함 역시 이미 그러니 본성이라. 사람들을 아낌을 성인이라 함은 사람들이 그리 부르기 때문. 알든 모르든 들었든 못들었든 그가 사람들을 아낌은 이미 그런 것이요 사람들이 편안히 여김도 그러하니 본성에 따름이라. -오히려 뭔가를 아는 듯하여 행해도 늘 적절하지 못하고 이치에 어긋나니 안함이나 다름없다. 왜냐 사람이 자기 아름다움을 알게 됨은 그를 비추는 거울이 있어서라. 그러나 그럼에도 본디 아름다운 것이지 거울이 아름답게 비추어서일까? 즉, 타고난 본성을 발견함이 중요하고 그 본성을 바로 알아 순명하며 삶이 중요하다. 눈 찌푸린 서시가 아름답다고 그를 흉내내는 것처럼 그저 아름답다라는 말을 듣고 "나는 아름답다"함보다 내 아름다움이 어떤 아름다움인지를 발견함이 깨우침의 첫 단계이다. 성인이란 사람들을 아끼는 본성을 말함이지 성인의 모양이나 처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3.


舊國舊都,望之暢然.,雖使丘陵草木之緡,入之者十九,猶之暢然. 況見見聞聞者也,以十仞之臺縣衆閒者也!


나 태어난 고향땅은 바라만 봐도 즐거운 것, 비록 구릉과 수풀이 무성해도 거기 들어서면 10에 아홉은 기쁨을 느낀다. 하물며 그 영화를 보고있는 자야 어떠하랴 10길 넘는 누대와 사람 가득찬 것을 보는 사람이야 얼마나 기쁘랴! 


-다 허물어진 고향집 터만 봐도 고향을 느끼고 기꺼운데 당장 눈앞에 영화로움이 펼쳐지면 얼마나 기쁘랴? 삶속에 가려진 본성을 봄도 기쁘지만 그 본성대로 당장 살고있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기쁘랴?


冉相氏得其環中以隨成,與物无終无始,无幾无時. 日與物化者,一不化者也,闔嘗舍之! 夫師天而不得師天,與物皆殉,其以爲事也若之何? 夫聖人未始有天,未始有人,未始有始,未始有物,與世偕行而不替,所行之備而不洫,其合之也若之何? 湯得其司御門尹登恒爲之傅之,從師而不囿,得其隨成. <爲之司其名.,之名嬴法,得其兩見. 仲尼之盡慮,爲之傅之.> 容成氏曰:「除日无歲,无內无外.」


염상씨는 그 돌아가는 세상의 이치를 알아 깨우침을 이루었으니 만물은 시작도 끝도 없고 때나 기회가 없는 것. 스스로를 사물의 일부로 보는 사람은 변화의 와중에서 벗어난 사람이니 한 번 맛보시게! 하늘을 스승삼고자 해도 그러지 못함은 만물의 흐름에 치이기 때문 그러니 하는 일도 그런것 아니겠는가? 성인이란 하늘도 사람도 시작도 끝도 만물에 매이지 않아 만물과 함께해도 참람하지 않으니 그 하는 바가 잘 준비된 듯하여 분수에 넘치지 않음이라. 그 합하는 모습이 어떤가? 탕왕은 스승 사어,문윤,등항의 가르침을 입었으나 따르되 붙잡혀있지 않아 그로 깨침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이름을 얻고 법을 펼치도록 임명되었으니 그 둘을 깨친 것. 공자가 그를 극진히 사려하여 남겼으니> 용성씨 이르길:[날을 잊어 시간을 잊고 안을 없애 밖을 없이한다] 했다.


-염상씨는 만물의 이치를 알아 깨우쳤으니 무슨 때가 있고 시작이 있고 끝이란 분별이 있을까? 즉, 당장의 잡사에 치이는 사람들이여 만물의 그 변화함에 치이지 말고 변화함 속에 사시게... 당장의 고통도 기실은 그 변화 중 하나일뿐...벗으려 잊으려 애쓰지 말고 그저 누리시게...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것 좋은 시절을 얘기합니다만... 그는 우리가 좋고나쁨의 이원론에 갖힌 것... 생이란 그저 차고 더움이 번가르듯 생엔 만남과 이별이, 삶과 죽음이, 기쁨과 슬픔이 번가름도 자연의 법칙... 그런 걸 미움을 더한다고 바로잡아지나?

우리는 좋아하고 좋은 걸로만 살고 싶어한다. 좋은 것,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말 들으며... 어찌 인생을 그리만 살 수 있는가?

공연히 사물 그리된다고 미움 심지 말게...내 마음 조차 그리 끌려가지 말게... 그저 사람 아끼는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게...


4. 
魏瑩與田侯牟約,田侯牟背之. 魏瑩怒,將使人刺之. 

위나라 혜왕 영이 제나라 전모후와 약조를 맺었으나 전모후가 약조를 위반하였다. 위나라 영이 분노하여 자객을 시켜 죽이려하였다. 

-약속이란 중합니다. 그를 배신함은 큰 잘못이고... 굳이 벌하고 깨우칠 일 있나요? 저가 이미 다받은 걸... 

犀首公孫衍聞而恥之曰:「君爲萬乘之君也,而以匹夫從讐! 衍請受甲二十萬,爲君攻之,虜其人民,係其牛馬,使其君內熱發於背. 然後拔其國. 忌也出走,然後抶其背,折其脊.」 

서수 공손연이 부끄럽게 여겨 말하길:[임금님은 만승지군 큰 나라 왕입니다 그런데 자객으로 복수하십니까? 제게 기갑병 20만을 주시면 왕을 대신하여 공격하지요. 그 백성을 포로로하고 우마를 끌고와 전나라왕으로 속상하여 등창이 터져나오게 합지요. 그리고 그 나라를 뽑아 없애겠읍니다. 장수 전기를 내빼게 만들고 연후 그 뒷덜미를 쳐서 등골을 꺾어놓지요] 

-공손연이 나서 말합니다. 굳이 왕이 나설일인가요? 제가 나서지요 그리하여 산산조각 내지요. 왕의 입장, 약속의 중요함만 보는 겁니다. 그 나라 장수를 친다한 들 그게 뭔 소용인가요? 약속을 저버린 소인배는 뒷전에 숨었는데... 공연히 그 백성, 그 장수를 괴롭게만 하는 것... 

季子聞而恥之曰:「築十仞之城,城者旣十仞矣,則又壞之,此胥靡之所苦也. 今兵不起七年矣,此王之基也. 衍亂人,不可聽也.」 

계자문이 부끄러워 이르길:[열길높이 성을 쌓아 성이 열길인데 그를 부수면 아랫사람들만 고통받지요. 이제 전쟁없는지 7년인데 (평화치세)이가 왕의 기틀입니다. 공손연은 난삽한 사람이라 들을 것 없읍니다] 

-복수만 생각하는 사람은 난삽하지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전체를 봐야지요. 약속만 중한가요? 사람 사는 삶이 중하지요. 백성이 중한 겁니다. 

華子聞而醜之曰:「善言伐齊者,亂人也.,善言勿伐者,亦亂人也.,謂伐之與不伐亂人也者,又亂人也.」 

화자가 듣고 추하게 여겨 말하길:[제나라를 치자는 말은 아무리 듣기 좋아도 난잡한 이의 말이라, 치지 말자는 말도 또한 난잡한 사람이니 치자는 이나 말자는 이나 둘다 난잡하고 난잡한 이 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이가 있지요. 굳이 치면 뭐하고 안치면 뭐하나요. 약속을 깸으로 이미 그 받을 것 다받았는데... 그런 일에 수고를 끼침이 어리석지요 그냥 저대로 살게두면 됩니다. 저가 이미 심판 받은 것.... 

君曰:「然則若何?」 曰:「君求其道而已矣!」 

임금이 묻길:[그럼 어찌해야하오?] 답이:[그 도를 찾으셔야지요!] 

惠子聞之而見戴晉人. 戴晉人曰:「有所謂蝸者,君知之乎?」 

혜자가 듣고 대진인을 보였다. 대진인 왈:[달팽이란 놈이 있읍니다 왕께선 아시나요?] 

曰:「然.」 

왕이 답하길:[그럼요] 

「有國於蝸之左角者曰觸氏,有國於蝸之右角者曰蠻氏,時相與爭地而戰,伏尸數萬,逐北旬有五日而後反.」 

[달팽이 위에 나라가 있어 좌측 뿔 위에 있는 이가 촉씨요 우측 뿔 위에 있는 이가 만씨라 당시 서로 땅을 다투어 전쟁을 하는데 쓰러져 죽은이가 수만이요 추격하는데 15일이나 지나 돌아왔읍니다] 

-달팽이 두 눈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 뭐 그리 거창할까요? 역설입니다. 큰 눈으로 보자는 얘기지요 그 안에 갇혀있지 말고... 

君曰:「噫! 其虛言與?」 

임금왈:[뭔 헛소리요?] 

曰:「臣請爲君實之. 君以意在四方上下有窮乎?」 

답이:[임금님이 실상을 아시기 원합니다. 임금님은 사방상하(세상이)가 무궁하다 생각하시나요?] 

君曰:「無窮.」 

임금 왈:[무궁하지요] 

曰:「知遊心於無窮,而反在通達之國,若存若亡乎?」 

답이:[마음을 무궁한 경지에서 노니게 하시는 분이 돌이켜 이 세상 나라를 깨우쳐 본다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요?] 

-마음공부 아무리하면 뭐하나요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데... 마음공부했으면 몸을 쳐서 마음공부에 따르도록 해야지요...삶으로 그리 살아내야지요. 

君曰:「然.」 

임금왈:[그럼요] 

曰:[通達之中有魏,魏之中有梁, 於梁中有王,王與蠻氏,有辨乎] 

답하길:[잘보니 그 가운데 위나라가 있고 위나라 가운데 양나라가 있고 양나라에 왕이 있 

어 그 왕의 이름이 만씨입니다 임금님과 만씨가 뭐가 다릅니까?] 

-蠻... 오랑캐라는 말이지요. 불학무도한 짐승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넌즈시 '당신하는 짓도 그나 한가지'라는 말... 

君曰:「無辯.」 

임금이 답하길:[다름없지요] 

客出而君惝然若有亡也. 

대진인이 나가고 임금이 넋을 잃은 듯하더라. 

客出,惠子見. 君曰:.「客,大人也,聖人不足以當之.」 

대진인이 나가고 혜자가 들어왔다. 임금 왈:[손님은 큰 사람이요 성인도 감당 못할 정도로] 

惠子曰:「夫吹筦也,猶有嗃也.,吹劍首者,吷而已矣. 堯舜,人之所譽也.,道堯舜於戴晉人之前,譬猶一吷也.」 

혜자 왈:[피리를 불면 피리소리 납니다 검날을 휘두르면 쉭 소리만 나지요. 요순은 사람들이 높이치는 사람입니다만 요순의 도란 대진인의 앞에선 그저 칼바람 소리 일뿐입니다] 

-더 큰 안목으로 보면 굳이 나서 손쓸 일 아닙니다. "이미 그 지은 죄로 벌받았기 때문에..." 

이는 아량 아니지요. 그저 용서함이 나은거다? 아니요... 이미 저는 저 저신을 소인배로 정하였으니 굳이 그런 소인배에게 한나라 왕에게 하듯 병사를 쓰고 기운 쓸 일 없는 것... 그저 남의 이해와 아량을 구할 정도로 구차한 인간에게 그만한 공들인다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이니 의로 그를 벌한들 그가 그 테를 벗어날까요? 그냥 안타까워만 할 따름이지요. 

하긴 이 즈음은 상대할 가치없어 놔두면 저 잘난 줄 아는 세상이긴 합니다만... 기껏 인을 의를 꾸미다가도 나중에 그 허점을 짚어주면 되돌아 그리 지적함이 속좁다고 욕하는 사특함이 지혜인 줄 알지요만... 

저 하나 부끄러운 줄 알고 자숙하기보다 패지어 힘자랑이나 하는 것이 사람들이죠. 그래서 나온 말이 아예 길아니면 발 들이지마라 라는 말인 모양입니다.  

그러니 옳은말 하기 겁나는 세상이지요. 

무엇을 보던 저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인간이 득세하는 세상...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이지요. 

칼질하기보다 덕으로, 뒷 꿍꿍이보다 앞에 나서는 당당함이 아쉬운 세상을 살지요... 



5.

孔子之楚,舍於蟻丘之漿. 其隣有夫妻臣妾登極者,子路曰:「是稯稯何爲者邪?」

仲尼曰:「是聖人僕也. 是自埋於民,自藏於畔. 其聲銷,其志無窮,其口雖言,其心未嘗言,方且與世違而心不屑與之俱. 是陸沈者也,是其市南宜僚邪?」

 

공자가 초나라에서 의구 장이란데 머물렀다. 이웃에 하인 부부가 있어 지붕에 올라있더라, 자로가 묻길:[이 사람들이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공자왈:[이는 성인의 종노릇함이라. 스스로를 백성사이에 파묻고,자기를 밭두렁에 숨겨둔 것. 그들이 한마디 안해도 그 의지는 무궁하여 말은 하지만 그 마음은 말은 않으며 굳이 세상을 멀리하여 같이함을 달가워 않는다. 마치 땅에 묻힌듯...아마 시남의료가 아닐까?] 

 

子路請往召之.

孔子曰:「已矣! 彼知丘之著於己也,知丘之適楚也,以丘爲必使楚王之召己也,彼且以丘爲佞人也. 夫若然者,其於佞人也羞聞其言,而況親見其身乎! 而何以爲存?」

子路往視之,其室虛矣.

 

자로가  가서 불러오겠다 하더라.

 

공자왈:[됐다! 저가 내 그를 알아 본것을 알고 내가 초나라에 있는 줄 아니 내가 초왕으로 그를 부르도록 천거 할 것을 이미 아니, 저가 내가 말이 매끄러운 사람임을 알고있을 터. 대저 저런 이는 말이 매끄러운 이를 듣는 것을 수치로 여기니 하물며 직접대면함이야! 어찌 그대로 있겠나?]

 

자로가 가보니 그 방이 비었더라.

 

-진짜 깨친이는 세상 명리를 떠나산다. 다만 백성들 삶이 상하고 천기가 무너질 때야 나서는 법. 평시에 가벼이 저 아는 것 팔아 사는 삶은 지극한 것 아니다.

 

역으로 말 아끼며 도통한 연 하다가 외려 칼질하는 것도 도통한 것 아니고... 사람은 그저 부대끼며 살다가는 것 그저 그 순간 최선 다하고 그게 지나고나면 깨끗히 잊는 것...  뒤돌아 헨들 그 자리 돌아가나? 그저 그 순간순간 마다 최선 다 할 뿐...

 

여기 공자 말하는 "자기인식"이란 저 스스로 한계를 알아 들고 남을 가릴뿐... 공자가 장자 보기엔 인의나 따지는 소인배나 기실은 저 맡은 소임 다할 정도의 깨친 이라... 굳이 비교의 대상일 뿐... 저가 명리에 목숨걸었다면 이미 잊혀졌을터....

 

깨침도 수많은 단계가 있어.. 예수처럼 이 땅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가장 처절히 살다감도 있는 법... 깨친 이라고 다 세속에 오불관 도통한 연 할까?


6.

 

長梧封人問子牢曰:「君爲政焉勿鹵莽,治民焉勿滅裂. 昔予爲禾,耕而鹵莽之,則其實亦鹵莽而報予.,芸而滅裂之,其實亦滅裂而報予. 予來年變齊,深其耕而孰耰之,其禾蘩以滋,予終年厭飧.」

 

장오에 책봉된 이가 자뢰에게 말하되:[군주된 자는 정치에서 단순하고 경솔하면 안되고 백성을 다스림에 가르고 나눠선 안되더군요. 제가 전에 벼를 심을때 밭갈기를 대충대충하였더니 그 소출역시 대충대충으로 나고 김매기도 산만히 하였더니 그 소출도 그러하더이다. 다음 해에 방식을 바꾸어 흙을 깊이 갈고 잘 부수어주니 벼가 무성히 자라 다음해에 물리도록 먹을수 있었지요]

 

-진리를 찾는 일이나 사람만나고 다루는 일이나 농사 짓는 일이 다 한가지입니다. 그저 설렁설렁 대충 거칠게 하면 그 결과도 그러한 것... 사람은 그저 매사에 정성을 다할 일입니다. 사람 하나를 만나도 그 사람 아니면 큰 일 날듯... 정성으로... 꽃을 키워도 그 꽃이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꽃으로 대해야 하는 법... 

 

만약 되어진 결과가 이러하다면 내가 그리 대충대충 한 탓이지요. 콩심은 데 콩나는 법이듯... 뭔가가 잘못된 결과를 낸다면 그건 내가 그리해서 입니다. "사람이 허물없는 사람 어디있냐?" 라는 말은 남의 허물을 덮어줄 때 쓰는 말이고, 제 스스로 건성건성 띄엄띄엄 사는 자는 남들도 그리 대하는 법입니다.

 

莊子聞之曰:「今人之治其形,理其心,多有似封人之所謂,遁其天,離其性,滅其情,亡其神,以衆爲. 故鹵莽其性者,欲惡之孼,爲性 萑葦蒹葭,始萌以扶吾形,尋擢吾性.,竝潰漏發,不擇所出,漂疽疥癰,內熱溲膏是也.」

 

장자가 듣고 이르길:[오늘날 사람들은 제 한 몸 건사하고 마음 다스림에 이 사람 말하듯하는 사람이 많아서 하늘도리를 피하고, 제 본성을 떠나, 제 정기를 말리고, 그 정신을 망가뜨리는 사람이 많다. 고로 제 본성에 대해 경솔하고 거친 사람은 업보가 나빠져서 본성이 되고 갈대처럼 무성하고 산만하면 싹틀 땐 내 몸가짐에 도움줄 것 같아도 내 본성을 뽑아내어 고루 무너지고 새어나가 줄줄이 나갈뿐 그래서 온갖 더러운 것이 드러나고 마음의 열이 밖으로 나오는 것 조차 말라 비틀어지게 한다]

 

-뭇 대중들이란 그저 건성건성 서로 눙치고 눈감고 어울렁더울렁 살아가기에 큰 열매를 얻지 못한다. 자기에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함 보다 남에게 관대하고 자기에 엄한 사람이 되어야 할 터...

 

사람들이 각박해짐은 제 속의 열을 내뱉어 식히지 못하여서라... 잘 먹고 잘 싸는 것만치 자연스러운 것 있으랴? 세상을 잘 살기위해 진리를 깨닫기 원한다면 먼저 저 지어진 본성, 즉 자신을 잘 알아야 하리... 저가 저를 모르며 정의를, 도덕을, 사랑을 알면 뭐한단 말인가?

빈집에 남이 들어와 주인행세하는 격이니 정작 저자신은 그런 생각들에 종노릇 밖에 더하나? 감당못하는 양심으로 저 자신 볶으며 사는 것이 과연 진리를 사는 삶인가? 자유한 삶인가? 되지도 않을 몇마디 주워들은 지식으로 남은 물론 저도 볶는 그런 짓 않아야 진리를 산다고 할 수 있다.  



7.

 

柏矩學於老聃,曰:「請之天下遊.」

 

백구가 노자에게 공부할 때 말하길:[세상을 돌아 볼까 합니다]

 

-이론으로 배운 것, 현실에도 맞는가 보려는 마음이지요.

 

老聃曰:「已矣! 天下猶是也.」

 

노자 말하길:[됐다! 천하가 별거냐 여기도 천하다]

 

又請之,老聃曰:「汝將何始?」

 

다시 청하니, 노자왈:[어디서부터 시작할 건데?]

 

曰:「始於齊.」

 

답이 :[제나라부터요]

 

至齊,見辜人焉,推而强之,解朝服而幕之,號天而哭之曰:「子乎子乎! 天下有大菑,子獨先離之,曰莫爲盜! 莫爲殺人! 榮辱立,然後覩所病.,貨財聚,然後覩所爭. 今立人之所病,聚人之所爭,窮困人之身使无休時,欲无至此,得乎!

 

제 나라에 이르러 처형된 시체를 보고 제 예복을 벗어 덮어주고 하늘에 곡하며 말하길:[이보시게 이보시게! 천하에 험한 꼴 많은데 당신 먼저 떠났구료 말하자면 도둑질했소! 살인했소! 영예와 치욕을 겪어야 병이 나고, 재물을 긁어야 다툼이 생기는 법. 제 몸 세우는 이가 병든 것이요, 사람 모으는 자가 싸움질하고, 끝없는 못 이룬 것에 대한 갈증이 사람의 몸으로 쉬질 못하게 하는데 이꼴을 당하지 않으려 한다고 그리될까?]

 

-죽은 이에 대한 애도 아닙니다. 그리 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사에 대한 회억이지요. 어차피 사람이란 사는 동안 그런 영욕에, 재물에, 저 하나 잘나려는 욕심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법.

 

「古之君人者,以得爲在民,以失爲在己.,以正爲在民,以枉爲在己.,故一形有失其形者,退而自責. 今則不然. 匿爲物而過不識,大爲難而罪不敢,重爲任而罰不勝,遠其塗而誅不至. 民知力竭,則以僞繼之,日出多僞,士民安取不僞! 夫力不足則僞,知不足則欺,財不足則盜. 盜竊之行,於誰責而可乎?」

 

[옛날 임금된 자란 그 얻음을 백성들에게 두고, 잃음을 자기 탓으로, 바름을 백성들 덕으로 삐뚤어짐은 저 탓으로 했다. 그래서 하나라도 저가 제 본디 처신을 못하면 물러서 자기를 자책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러지 못하고  뒷전으로 도모하고 모르는 사람을 깐보며, 크게 어렵게 하고는 담당하지 못하는 자에게 죄를 묻고, 과중한 책임을 주곤 그를 이기지 못하는 이를 벌하고, 닿지못할 것을 못 닿았다고 험담한다. 사람들의 지혜가 다하게 되면 사사로운 계교를 들이대며, 날마다 거짓이 많아지면 세상사람들이 그런 허위에 속아가리! 감당 못하면 속이려들고,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일은 기만이요 재물이 여의치 않으니 도적질이라. 이런 도둑질이 행해짐을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까?]

 

-옛 임금들은 그저 세상 허물 저가 안고 가려했건만... 이 즈음 권세있는 자들은 뒷꿍꿍이가 정치인 양 비밀스레 굴길 좋아하고 그에 동참치 않은 자를 업수이 여긴다. 저도 감당 못할 일을 남에게 구하곤 그를 빌미로 남을 깎아내는 짓거리가 횡행하고, 모자란 저가 계교를 들이대곤 하니 이런 것이 반복되면 너도나도 다 속아넘어가 종내 진리가 왜곡될 것... 그리되면 누굴 탓하리...

 

어느 하나라도 나서서 "아닌 걸 아니라" 얘기해야함에도 그런 험한 꼴 싫어 뒤로 빠지니.. 안타깝다. 앞으로 어찌 될 것인지... 사람이 사람 잡아먹는 세상 될 것이니...


8.

蘧伯玉行年六十而六十化,未嘗不始於是之而卒泏之以非也,未知今之所謂是之非五十九非也. 萬物有乎生而莫見其根,有乎出而莫見其門. 人皆尊其知之所知而莫知恃其知之所不知而後知,可不謂大疑乎! 已乎已乎! 且无所逃. 此所謂然與,然乎?

 

거백옥은 60을 살면서 60번 변하였는데, 처음 옳다한 일은 끝까지 옳지않다 하질 않았는데 지금은 옳다하는 잘못이 59번 틀린 것임을 모른다. 만물이 존재한다고 하나 그 근본을 알 수 없고 그리 되는 (이치)문이 뭔지 알 길 없다. 사람들이란 저가 뭔가 알고있는 것을 지혜로 귀히치며 저가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더 큰 지혜를 갖게됨을 모른다. (그리 믿고 행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큰 의심병아니냐! (세태가)이미 그런걸! 어디로 이런 틀을 (탈피해)나갈 수 있겠나. 소위 이 세상이 그렇다하니 (그런 법을) 터득할 것인가?

 

-거백옥은 그 때마다 하는 일이 옳다라 믿고 행하였다... 그러나 늘 옳았을까? 외려 저 스스로 제 한 짓을 뒤집는 일이 없었을까? 늘 옳은 일만 한다하는 사람이 지난 번 것을 돌아보아 잘잘못을 배우지 못하고 늘 저만 옳다는 사람은 더 큰 지혜를 배우지 못하는 법.

 

늘 모를 수 있고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으로 자기를 경계치 않으면 정작 옳게 살기 힘들다.  그러나 사람들이란 그저 옳음이란 말에 부나비처럼 끌려다니는 게 다니... 

 

저번도 옳고 이번도 옳은 일이 있을까? 옳은 길이라고 다닌다고 다 옳을까? 하나를 지나면 하나를 배워야하는 법 뵈는 것 이면의 뵈지 않던 것을 배워야 그게 깨달음...  



9. 
仲尼問於大史大弢,伯常騫,狶韋曰:「夫衛靈公飮酒湛樂,不聽國家之政.,全獵畢弋,不應諸侯之際.,其所以爲靈公者何邪?」 

공자가 역사의 감추임, 방백들의 이지러진 면에 대해 희위씨에 묻길:[위나라 영공이 술마시고 노는 재미에 빠져 나라 정치에는 돌보지 않고, 사냥을 하고도 제후들과 함께 잔치에 참예않는데 영공이라 불리는 이유가 뭔가요?]


-무도한 왕인 영공이 靈公으로 불림은 뭘까요? 인물이 좋아서? 사람이 후해서? 뜻이 곧아서? 보면 술마시고 사람사귀기 좋아하고, 사냥후 제후들과 우쭐하여 뒷 담론하기 즐기지 않아 정치적이지도 못한데도 신령한 靈公으로 불림은 무슨 연유요. 

사람만나기 즐기니 진득히 진리 공부한 것도 아니요, 정치적으로 노는 것도 아닌데... 

공자는 깨달은 이라 역사란 것이 한쪽에 유리하게 쓰임을 알고, 왕된 이들의 허물을 알아 하늘과 땅의 이치를 꿰뚫는 희위씨에게 묻습니다. 실제 희위씨는 삼황 중 하나이니 얼굴을 마주한 것 아니지만... 하늘의 도리를 묻는다는 의미지요.


大弢曰:「是因是也.」 
伯常騫曰:「夫靈公有妻三人,同濫而浴. 史鰌奉御而進所,搏幣而扶翼. 其慢若彼之甚也,見賢人若此其肅也,是其所以爲靈公也.」 
狶韋曰:「夫靈公也死,卜葬於故墓不吉,卜葬於沙丘而吉. 掘之數仞,得石槨焉,洗而視之,有銘焉,曰:"不馮其子,靈公奪而里之." 夫靈公之爲靈也久矣,之二人何足以識之!」

대도 왈:[이래서 입니다] 
백상건 말하길:[영공에겐 3명의 부인이 있어 같은 탕에 들어 목욕했지요. 신하인 사추를 받들어 그가 나아올 땐 마중하여 부축하였읍니다. 그 방자함이 부인 3과 목욕할 정도로 심했으나 깨우친 이를 보면 신하여도 정중하기가 그지없고 그 직언을 들을 줄 아는 그것 때문에 영공이라 불리지요] 

-일견 들리는 소리로만 보면 음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쪽으로만 치우친 것 아니라 늘 진리를 깨침을 동경하고 머리 숙일 줄 알지요. 권세자가 하지 못하는 일이 남에게 머리 숙이는 일입니다. 자신에 당당하되 늘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열어놓은 사람이면 됩니다. 의관이 그를 꾸미긴 해도 의관이 그 사람 아니지요. 

희위씨 왈:[영공이 죽었을 때 지관이 그 묻힐 옛 묘터가 불길하고 모래언덕이 길하다 했지요. 몇 길을 파내려가 돌 관을 발견하고 닦아보니 비문이 있는데, 씌여있길: "그를 업수이 여기지 마라, 영공이 죽어 묻히리" 하였답니다. 영공의 신령함이 오랜 것이니 지관이나 영공이 그리 될 것을 알기나 했을까요!] 

-깊이 파들어가 보면 뭔가 실이 있는 겁니다. 영공이 영공으로 불림은 뭘 해서 아니라 그의 깊은 깊이가 이미 그로 영공되도록 한 것... 지도자 됨은 그 백성을 살리는 일만 잘하면 되는겁니다. 

도덕을 논한다며 남녀 부부지간의 일을 꼬집는 것은 온당치 않은 겁니다. 저는 깨끗한가요? 속속들이 파헤치면 인간인 바에야 허물 투성이입니다. 다루지 말 것은 덮고 다뤄야 할 일 만 다루면 됩니다. "정치란 이래야 한다"는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史鰌는 衛靈公의 신하였다. 그는 병이 들어 죽을 무렵 그의 아들에게 당부하기를,“내가 벼슬하면서 거백옥을 등용시키지 못하고 미자하를 그대로 두었으니 이는 내가 남의 신하가 되어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못한 죄다. 내가 죽거든 시체를 창 밑에 그냥 두어라.”하였다. 

아들은 아버지가 죽고 그 말을 쫓았다. 영공은 사추의 문상을 와서 그 장면을 
목격하고 아들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의 아들은 죽기 전 아버지의 당부를 그대로 
영공에게 들려주었다. 영공은 그말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이는 과인의 잘못이다.” 
하고 즉시 빈소를 예에 맞춰 꾸미게 하고 거백옥을 등용한 뒤 미자하를 물리쳤다.
공자는 이 사실을 소문으로 전해 듣고 이렇게 말했다. 
“옛날 신하는 바로 곁에서 모시는 直臣조차 죽으면 그만인데 자어(史鰌의 자)는 
죽어서도 임금의 마음을 감동케 했으니 그야말로 직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자는 평하기를, “위령공 같이 무도한 이로서도 오히려 사람을 쓰는 데에 꼭 그 재주대로 알맞게 하니, 이것만으로도 그의 나라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실제 당시의 어지러운 시대 상황에도 불구하고 
위나라에서는 오히려 앞의 사추와 같은 어진 신하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무리들로는 柳莊 蘧瑗 公叔發 등을 생각할 수 있다. 

한편 衛文公은 大帛으로 만든 갓을 大布로 만든 옷을 입고 절약과 검소함으로 나라를 중흥시켰다. 또 덕이 있는 신하들 앞에서는 자기 몸을 한껏 낮추어 어질고 덕 있는 선비를 찾아 등용하고자 애썼다. 詩經 干旄는 바로 이런 당시의 정황을 한편의 시로써 소상하게 읊어 보여주고 있다.


10.


少知問於大公調曰:「何謂丘里之言?」


소지가 대공조에게 따져 묻길:[떠도는 말이란 뭔가요?]


-'작은 지식'이 '크게 고른 이'에게 묻습니다. 온갖 말들이 떠돌고 그 말마다 옳은 듯 한까닭에... 이 모두가 진리 아닌가 싶어 뭐하나 버릴 것 없을 듯 하여...


大公調曰:「丘里者,合十姓百名而以爲風俗也,合異以爲同,散同以爲異. 今指馬之百體而不得馬,而馬係於前者,立其百體而謂之馬也. 是故丘山積卑而爲高,江河合小而爲大,大人合幷而爲公. 是以自外入者,有主而不執.,由中出者,有正而不距. 四時殊氣,天不賜,故歲成.,五官殊職,君不私,故國治.,文武殊能,大人不賜,故德備.,萬物殊理,道不私,故无名. 无名故无爲,無爲而无不爲. 時有終始,世有變化. 禍福淳淳,至有所拂者而有所宜.,自殉殊面,有所正者有所差. 比於大澤,百材皆度.,觀於大山,木石同壇. 此之謂丘里之言.」


대공조 이르길:[마을이란 열가지 다른 성씨사람들이 모여 나름의 풍속을 이루니 서로 다름이 합하여 하나되고 같음이 흩어져 다름되는 것. 말을 백조각으로 나누고 말이라 하지 않듯 말이 전에 하나로 엮여있었으니 그를 연결하여 보며 백조각을 말이라 부르는 거요. 그러니 언덕이나 산이란 흙이 쌓여 높이 된 것이요 강이란 작은 시내들이 모여 큰 강 이룬것... 사람됨이 큰 것이 모여 공이 되는겁니다. 그러니 밖에서 들어 온 것은 이미 주인 됨이 있으니 고집할 일 아니며, 진심에서 난 것은 바름이 있으니 잣대 들이댈 일 아니지요. 사시사철 다름은 하늘 뜻이 치우치지 않음이니 세월이 쌓이는 것, 오관이 직책이 서로 다르지만 임금이 사사롭지 않아야 나라가 다스려지는 것, 문무가 그 할 일이 다르니 (문무를 겸비한)큰 사람은 치우치지 않아 덕을 갖추고, 만물의 이치가 저각각 달라도 진리가 사사롭지 않으니 뭐라 이름짓고 따지질 않는 것. 그런 가림이 없으니 딱히 뭘 할 것도 없고 안할 것도 없는 것. 시간이란 것이 시작과 끝을 두니 세상에 변화란 것이 생기는 법. 화와 복은 그만큼 씩이나 더바라고 덜바람이 있어 선을 긋게 되는 것, 스스로 그런 차이를 잘 알고 따르면 바르고도 차이를 알게 되는 것. 큰 못가에 비교하면 온갖 식물이 저마다 도수를 갖추고, 큰 산에 비유하면 나무와 바위가 같은 토대에 있는 것. 이를 떠도는 말이라한다!]


-열가지 성씨란 다 배경도 본성도 다름을 말하지요, 그런 다른 사람들이 한 마을을 이룸은 뭔가 서로 하나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서로 기대어 살게끔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살아가며 저 각각 생각이 상황이 달라 추구하는 것도 달라지고 그리하여 의견이 분분해지기 마련... 그러나 뭐에든 치우치지 않아서 저 각각 제 자리를 잘 균형맞춰 살아야지요. 사람들에겐 화와 복이 정확히 똑같이 공평하게 나누어져 있읍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복은 더 받으려하고 화는 피하려하니 조정이 필요한 것...


큰 못가의 식생을 살펴보면 양지식물 음지식물 다 저마다 서로서로 조화롭게 사는 것... 높은 산이란 것도 그저 바위로만 된 것 아니요 나무도 같이 어우러져 사는 것... 저 마다 저만 생각하며 떠드니 떠도는 말이 말을 만들어 그럴싸한 설을 만드는 법.


少知曰:「然則謂之道,足乎?」

大公調曰:「不然. 今計物之數,不止於萬,而期曰萬物者,以數之多者號而讀之也. 是故天地者,形之大者也.,陰陽者,氣之大者也.,道者爲之公. 因其大而號以讀之,則可也,已有之矣,乃將得比哉? 則若以斯辯,譬猶狗馬,其不及遠矣!」


소지 왈:[그럼 그걸 진리라 해도 맞는가요?]

대공조왈:[아니. 지금 만물의 수리를 다지면 만으로 그치지 않고 그리 만물이라 말함은 그 수리가 많음을 불러 알기 쉽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천지란 그 형용함보다 더 크고, 음양이란 그 기운보다 더 크며 도란 그 공을 이루는 것이다. 그 큼을 불러 알기 쉽게 해서 알아 듣게 되는 것, 이미 있는 것 장차 견주어만 말할까? 즉 이리 분변하고 개와 말을 비유하면 그 진상을 알지 못하게 된다]


-어쨌든 그 모두가 중요하다면 다 진리 아닌가요? 아니 그렇지 않다 만물이니 진리니 하는 형용은 그저 이름붙이기 어려운 것을 쉽게 가려보라고 이름지은 것 뿐... 눈에 안뵈는 만물의 작용이 얼마나 많은데... 나중에 이리 견주어 말하다 보면 결국 견백동이, 지록위마의 궤변이 나오게 되는 법... 때마다 다시 들여다 보고 그런 견줌을 벗어나야 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진리라 오해하면 달은 안중에 없어지듯... 우리가 부러 붙인 이름들을 가타부타 따지는 논리는 무의미하다... 다만 도라 부르든 덕이라 부르든 그 가리키는 실제를 봐야 한다.


11. 


少知曰:'四方之內,六合之裏,萬物之所生惡起?' 大公調曰:「陰陽相照,相蓋相治.,四時相代,相生相殺. 欲惡去就, 於是橋起.,雌雄片合,於是庸有. 安危相易,禍福相生,緩急相摩, 聚散以成. 此名實之可紀,精微之可志也. 隨序之相理,橋運之相使,窮則反,終則始.,此物之所有. 言之所盡,知之所至,極物而已. 覩道之人,不隨其所廢,不原其所起,此議之所止. 

소지 왈:[이세상 천지안에 만물이 생겨나는 근거가 뭔가요?] 
대공조왈:[음양이 서로 밝히 비추니 서로 허물 덮고 서로 다스린다, 사시가 다 서로 맞서는 듯 보이나? 서로 살리고 서로 죽이는 것. 그런 것이 악하다 생각하나, 그게 서로 다리 역할 하는 것인 걸, 암수 결합하여 뭔가 쓰임이 생기는 것... 편안함과 위급함이 교차하고 화복이 서로 생겨나고, 아니 서로 급하고 늦고 차이일뿐이지, 모이고 흩어지는 그것이 깨달음이니. 이름 지은들 그게 다 줄줄이 엮일 뿐 그 순전한고 자세한 그것이 의지라. 모든 것 순서에 따라 서로 도우며 그런 연결고리가 서로에게 작용하며 끝으로 가면 되돌아오고 끝나면 시작이라 이게 만물 돌아가는 이치일세. 말로 형용함이 다한 자리에서야 그 지극함을 알게되는데 만물의 지극함은 이미 있었다. 도를 분변하는 사람은 만물이 폐하는 자리도 그 시작의 근원도 따지지 않는다 이런 논의란 쓸모없는 것] 

-우리는 소위의 "원인-결과"도식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그러나 장자의 세계관은 여기 내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의 "있음"에서 사유를 시작하고 그 "있음"이란 말이 바로 우리의 사고의 장난임을 짚어내고 그런 사고의 장난을 그만두라는 "無爲"를 주장하는 것이다. 
음양, 자웅의 상관작용으로 세상이 이뤄지고, 모든 상대적으로 표현된 것들이 인생사를 복잡다단하게 함을 밝히보고 그저 "있는 그대로 상호연관 작용을 보라"는 것... 

少知曰:'季眞之莫爲,接子之或使,二家之議,孰正於其情,孰徧於其理?' 大公調曰:'鷄鳴狗吠,是人之所知.,雖有大知,不能以言讀其所自化,又不能以意測其所將爲. 斯而析之,精至於无倫,大至於不可圍,或之使,莫之爲,未免於物,而終以爲過. 或使則實, 莫爲則虛. 有名有實,是物之居,无名无實,在物之虛. 可言可意, 言而愈疏. 未生不可忌,已死不可徂. 死生非遠也,理不可覩. 或之使,莫之爲,疑之所假. 吾觀之本,其往无窮.,吾求之末,其來无止. 无窮无止,言之无也,與物同理.,或使莫爲,言之本也,與物終始. 道不可有,有不可无. 道之爲名,所假而行. 或使莫爲,在物一曲,夫胡爲於大方? 言而足,則終日言而盡道.,言而不足,則終日言而盡物. 道物之極,言黙不足以載.,非言非黙,議有所極.'


소지 묻길:[계진은 뭔가 함을 없애고, 접자는 시켜야한다는데 이 둘의 논의중 누가 본디에 맞고 뭐가 논리에 매인 것입니까?] 
대공조 왈:[닭과 개가 짖으니 사람들이 알게되는 것 비록 큰 깨달음이 있다해도 말로 그 변화를 하기전에 알 도리있나 그리고 향차 어찌 될지도 추리할 길 없는 것일세. 가리고 분석해보자면 순정하게 되니 인륜이니 뭐니 없고, 큰 깨달음은 울타리가 없네, 둘의 이론은 아직도 만물에 매여있어 결국 허물로 끝나게 된다. 접자를 따르면 실상이란게 보이고 계진을 따르면 모든 게 비임이다. 이름이 있어 실제 현상이 있다함은 만물이 존재하는 근거요 이름도 없고 실재가 없다함은 만물의 근거가 없다라는 뜻이다. 그리 말하고 그리 생각함이 가능하지만, 말이란 소통의 도구일 뿐.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을 질투하고 이미 죽은 것을 집중하지 못하는 법. 생사의 문제는 우리 곁에 있지만 그 이치를 깨닫기 힘드네. 그러니 둘의 이론은 있지도 않은 것을 얘기함이지. 내가 근본을 살펴보니 그 움직임이 무궁하여 내 그 끝이 어딘가 알기원하나 그 오는 것을 막지 못하네. 무궁하고 멈출수 없으니 말이란 의미없고 만물도 그런 이치일세 두 이론은 그저 만물의 시작과 끝을 얘기하는 말일 뿐, 진리란 있다고도 없다고도 못하는 것. 진리란 이름이 없어 행할 바도 없다. 두 이론은 사물에 매인 것이니 틀린 것 그러니 그리 안달함이 큰 세계일까? 말재간이 충분하면 온종일 진리를 말할 수 있고 말재간이 부족하다면 온 종일 사물만 얘기하다 그칠 것. 진리와 사물의 극진함은 말로도 침묵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우니 말도 말고 침묵도 말고 극진함이나 논의하시게] 

-만유의 주재가 있든 없든 그런 형이상학을 논한다고 진리의 손톱만한 조각이라도 잡는가? 그야말로 말싸움이고 말 장난이지... 그런다고 말을 안하는 것도 말로 설명하는 것도 진리를 사는 자세인가? 그저 저 하나 보신하는 것 뿐... 
다만 그 극진함으로 모든 생각과 말의 끝이 어딘지를 살피는 것이 진리를 파악하는 유일한 길이다. 우물 속에서도 세계를 논할 수도 있지만, 높은 산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을 알 수도 있는것... 장님 코끼리 본 얘기도 나름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지만 실지 맞닥뜨려 보면 더 생생하게 알게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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