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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檀古記

太白逸史- 神市本紀

神市本紀

 

震域留記 神市紀 云 桓雄天皇 見人居已完 萬物各得其所 乃使高矢禮 專掌鳴養之務 是爲主穀.

진역유기 신시기 운 환웅천황 견인거이완 만물각득기소 내사고시례 전장명양지무 시위주곡.

 

진역유기(震域留記)의 신시기(神市紀)에 이르기를, 한웅천왕(桓雄天王)께서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성되고, 만물이 각기 그 자리를 잡은 것을 보시고, 곧 고시례(高矢禮)로 하여금 백성들의 먹고 사는 업무를 전적으로 맡도록 하였다. 이를 주곡(主穀)이라 한다.

 

而時稼穡之道不備 又無火種爲憂 一日 偶入深山 只看喬木荒落. 但遺骨骸 老幹枯枝 交織亂叉 立住多時 沈吟無語 忽然大風吹林 萬竅怒號 老幹相逼 擦起火光 閃閃脇脇 乍起旋消 乃猛然惺悟 曰 是哉是哉 是乃取火之法也.’ 歸取老槐枝 擦而爲火 功猶不完. 明日 復至喬林處 徘徊尋思 忽然一個條紋虎 咆哮躍來 高矢氏 大叱一聲 飛石猛打. 誤中岩角 炳然生火. 乃大喜而歸 復擊石取火 從此 民得火食 鑄冶之術始興 而制作之功 亦漸進矣.

이시가색지도불비 우무화종위우 일일 우입심산 지간교목황락 단유골해 노간고지 교직난차입주다시 침음무어 홀연대풍취림 만규노호 노간상핍 찰기화광 섬섬협협 사기선고 내맹연성오왈 시재시재 시내취화지법야 귀취노괴지 찰리위화 공유불완. 명일 복지교림처 배회심사 홀연일개조문호 포효약래 고시씨 대질일성 비석맹타. 오중암각 병연생화. 내대희귀 복격석취화. 종차 만득화식 주야지술시흥 이제작지공 역점진의.

 

그러나 이때는 아직 농사짓는 방법이나 도구가 준비되지 못하고, 또 불씨가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고시(高矢)씨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굽은 나뭇가지들이 거칠게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어지럽게 교차되어 있는 것을, 오래도록 말없이 침묵하며 바라보고 서 있는데, 홀연히 큰 바람이 숲에 불어 닥치자 오래된 나뭇가지에서 굉장한 소리가 나면서 서로 부딪쳐 비벼대자, 번쩍 번쩍하며 불꽃을 일으키며, 불이 났다가 꺼지는 것을 보자, 이에 홀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으니,이것이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바로 불을 얻는 방법이로다.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오래된 홰나무 가지를 모아다가 서로 비벼 불을 만들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음날 다시 굽어진 나무들이 있는 숲을 찾아 이리 저리 배회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는데, 갑자기 한 마리 줄무늬의 호랑이가 크게 울부짖으며 달려 나오니, 고시(高矢)씨도 큰 소리로 외치면서 돌을 집어 맹타하였다. 바위를 맞추니 번쩍하고 불이 일어났다. 이를 보고 마침내 크게 기뻐하며 돌아와, 다시 돌을 쳐서 불씨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쇠를 녹이고 다루는 기술이 처음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물건을 만드는 기술도 점차 발달 되었다.

 

桓雄天皇 又復命神誌赫德 作書契 蓋神誌氏世掌主命之職 專掌出納獻替之務 而只憑喉舌曾無文字記存之法 一日 出衆狩獵 忽見驚起一隻牝鹿 彎弓欲射 旋失其懿 乃四處搜探 遍過山野 至平沙處 始見足印亂鎖 向方自明.

환웅천황 우복명신지혁덕 작서계 개신지씨세장주명지직 전장출남헌체지무 이지빙후설증무문자기존지법. 일일 출중수렵 홀견경기일척빈록 만궁욕사 선실기의 내사처수색 편과산야 지평사처 시견족인난쇄 향방자명.

 

한웅천왕(桓雄天王)은 또다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령(命令)하여 글을 만들게 하였다. 대개 신지(神誌)씨는 대대로 법과 명령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고, 물건의 출납(出納)과 임금을 보좌하는 임무를 전담하고 있었으나, 다만 목소리에 의존했을 뿐, 일찍이 글로 기록하여 남기는 방법은 없었다. 신지(神誌)씨가 어느 날 무리와 더불어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튀어 나오는 한 마리의 암사슴을 보고 활을 당기려 했으나, 그 순간 암사슴을 놓쳐 버렸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면서 산과 들을 지나 평평한 모래땅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사슴 발자국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것을 보고, 사슴이 도망간 방향을 알 수 있었다.

 

乃俯首沈吟 旋復猛惺 曰 記存之法 惟如斯而已夫 惟如斯而已夫.’ 是日 罷獵而歸 反復審思 廣察萬象 不多日 悟得創成文字 是爲太古文字之始矣 但後世 年代邈遠 而太古文字 沒泯不存.

내부수침음 선복맹성 왈 기존지법 유여사이이부 유여사이이부.’ 시일 파렵이귀 반복심사광찰만상 불다일 오득창성문자 시위태고문자지시의 단후세 연대막원 이태고문자 몰민부존.

 

머리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신지(神誌)는 갑자기 깨닫는 바가 있어,기록하는 방법은 오직 이 같은 방법 뿐 이구나, 기록으로 남기는 방법은 다만 이것 뿐 이로구나하면서, 그날의 사냥을 끝내고 돌아와, 되풀이 하여 다시 깊이 생각하고, 만물의 모양을 널리 살핀 끝에,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처음으로 글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태고 문자(文字)의 시초였다. 그러나 후세로 오면서 연대(年代)가 아득하고 멀어져서, 태고(太古)의 글자는 다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다.

 

抑亦其組成也 猶有不便而然歟 亦嘗聞南海島郞河里之溪谷 及鏡珀湖先春嶺 與夫烏蘇里 以外岩石之間 時或有發見彫刻 非梵非篆 人莫能曉 此非神誌氏之所作古字歟. 於是 而更恨吾國之未振 吾族之不强也.

억역기조성야 유유불편연여 역상문남해도랑하리지계곡 급경박호선춘령 여부오소라 이외암석지간 시혹유발견조각 비범비전 인막능효 차비신지씨지소작고자여. 어시 이경한오국지미진 오족지불강야.

 

그것은 아마도 만들어 놓은 글자가 아직 편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찍이 남해도(南海島) 낭하리(郎河里)의 계곡 및 경박호(鏡珀湖)의 선춘령(先春嶺)과 부오소리(夫烏蘇里), 그 외의 암석 사이에서 새겨진, 즉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닌 것이 발견되는데,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이것이 신지(神誌)씨가 만든 옛 글자가 아니라고들 한다. (발견) 당시 우리나라의 미진함과 우리 민족의 강하지 못함을 새삼 한탄한다.

 

桓雄天皇 使風伯釋提羅 雖除鳥獸蟲魚之害 而人民猶在洞窟土穴之中 下濕外風之氣 逼人成疾. 且禽獸蟲魚之屬 一經窘逐 漸自退避藏匿 不便於屠殺供饋.

환웅천황 사풍백석재라 수여조수충어지해 이인민유쟈동굴토혈지중 하습와풍지기 핍인성질. 차금수충어지속 일경군축 점자퇴피장닉 불편어도살공궤.

 

한웅천왕께서 풍백(風伯) 석제라(釋堤羅)를 시켜 새와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피해를 제거하도록 하였지만, 백성들은 아직도 동굴이나 토굴에서 살았기 때문에, 밑에선 습기가 올라오고, 밖에선 바람이 불어 와서 사람들에게 질병을 일으켰다. 또한 새나 짐승이나 물고기 등을 급하게 쫓아내니 점차로 도망가서 숨어버리니, 잡아 먹는데도 불편하였다.

 

於是 使雨師王錦營造人居 主致牛馬狗豚雕虎之獸 而牧畜利用. 使雲師陸若飛 定男女婚娶之法焉. 而治尤則世掌兵馬盜賊之職焉. 自此 治尤高矢神誌之苗裔 繁衍最盛.

어시 사우사왕면영조인거 주치우마구저조후지수 이목축이용. 사운사육약비 정남녀혼취지법언. 이치우즉세장병마도적지직언. 자차 치우고시신지지묘예 번연최성.

 

이에 우사(雨師) 왕금영(王錦營)으로 하여금 사람의 살 곳을 만들게 하고, , , , 돼지, 독수리, 호랑이 등의 짐승을 모아 목축하여 이용함을 관장케 하고, 운사(雲師) 육약비(陸若飛)로 하여금 남녀의 혼례법(婚禮法)을 정하게 하고, 치우(治尤)는 곧 세세토록 병마(兵馬)와 도적(盜賊) 막는 일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치우(治尤), 고시(高矢), 신지(神誌)의 후손들이 가장 번영하였다.

 

及至治尤天王登極 造九治以採銅鐵 鍊鐵 以作刀戟大弩 以狩獵征戰. 賴以爲神 遠外諸族. 甚畏大弓之威 聞風膽寒者 久矣. 故 彼謂我族爲夸.

급지치우천왕등극 조구치이채동철 연철 이작도극대노 이수렵정전. 뢰인위신원외재족. 심외대궁지위 문풍단한자 구의. 고 피위아족위과.

 

치우천왕(治尤天王)의 등극에 이르러 아홉 곳의 야금소(冶金所)를 만들어 동()과 철()을 채취하여, ()을 단련하여 칼과 창을, 그리고 대노(大弩)를 만들고, 사냥과 정벌, 전쟁의 무기로 삼았으니, 먼 곳의 외족(外族)들은 치우천왕을 신()으로 알고 심히 두려워하였다. 오래 전부터 대궁(大弓)에 대한 위력을 풍문에 듣고 간담이 서늘해진 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우리겨레를 일러 이()라고 하였다.

 

說文所謂夸人人大人人弓 爲東方人者 是也. 乃至孔丘氏春秋之作 而夸之名 遂與戎狄 幷爲腥宥之稱 惜哉.

설무소위과인인대인인궁 위동방인자 시위. 내지공구씨춘추지작 이과지명 수여융적 병위성유지칭 석재.

 

설문(說文)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는 동방인으로서 큰 사람이요 활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춘추(春秋)에 이르러, ()의 이름을 융(), ()과 나란히 오랑캐의 호칭이라 했는데 이는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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