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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檀古記

太白逸史-三韓管境本紀

三韓管境本紀

 

太白山 北走屹屹然 立於斐西岬之境. 有負水抱山而又回焉之處 乃大日王祭天之所也. 世傳桓雄天王 巡駐於此 佃獵以祭.

태백산 북주흘흘연 입어비서갑지경. 유부수포산이우회언지처 내대일왕제천지소야. 세전환웅천왕 순주어차 전렵이제.

 

태백산(太白山)은 북으로 달려 비서갑(斐西岬) 지역에 장엄하게 우뚝 서 있다. 물이 산을 품어 감돌아 도는 곳에 있으니, 곧 큰 행사 날에는 왕이 하늘님께 제사를 받드는 곳이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 한웅천왕(桓雄天王)께서 순행(巡行)하실 때 머물러 사냥하여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風伯 天符刻鏡而進 雨師 迎鼓環舞 雲師 佰劍陛衛 盖天帝就山之儀仗 若是之盛嚴也. 山名曰 不咸.’ 今亦曰 完達.’ 音近也. 後 熊女君 爲天王所信 世襲爲斐西岬之王儉. 王儉 俗言大監也 管守土境 除暴扶民.

풍백 천부각경이진 우사 영고환무 운사 백검폐위 개천제취산지의장 약시지성엄야. 산명왈 불함금역왈 완달.’ 음근야. 후 웅여군 위천왕소신 세습위비서갑지왕검. 왕검 속언대감야. 관수토경 제폭부민.

 

풍백(風伯)은 천부경(天符經)이 새겨진 거울을 들고 나가게 하고, 우사(雨師)는 북을 치며 둥글게 춤을 추게 하고, 운사(雲師)는 백 사람이 검을 가지고 왕을 지키게 하였으니, 대개 천제(天帝)께서 산에 오르는 의식(儀式)에 쓰는 무기(武器)와 기구(器具)가 이와 같이 성대하고 장엄하였다. 태백산(太白山)의 이름을 불함산(不咸山)이라고도 하였는데, 오늘날은 역시 완달산(完達山)이라고도 하니, 그 음() 이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훗날 웅족(熊族)의 여왕께서 천왕(天王)의 신임을 얻어 왕위를 이어받아, 비서갑(斐西岬)의 왕검(王儉)이 되었다. 왕검(王儉)이란 세속(世俗)의 말로 대감(大監)이며, 대감(大監)이란 땅의 경계(境界)를 지키고 관리하며, 포악함을 제거하고 백성을 도와주는 권한을 가진 자다.

 

以天王諭國人之意 戒之曰 父母可敬也 妻子可保也 兄弟可愛也 老長可隆也 少弱可惠也 庶衆可信也.’

이천왕유국인지의 계지왈 부모가경야 처자가보야 형재가애여 노장가융야 소약가혜야 서중가신야.

 

천왕(天王)으로 하여금 국인(國人:국민)들의 의중을 깨달아 훈계하여야 하는데 부모를 반드시 공경해야 하며, 처와 자식을 반드시 보호해야 하며, 형과 아우를 반드시 사랑해야 하며, 노인과 장년을 반드시 융숭하게 대접해야 하며, 어린이와 약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하며, 서민과 대중을 반드시 믿음으로 대해야 한다.’고 하였다.

 

又制醫藥 工匠 養獸 作農 測候 禮節 文字之法 一境化之 遠近之民 皆不相疑也.

우제의약 공장 양수 작농 측후 예절 문자지법 일경화지 원근지민 개불상의야.

 

또 제도(制度)에 있어서, 의술을 펴고, 약을 지어 주며, 물건을 만들고, 짐승을 기르고, 농사를 짓고, 날씨를 살피고, 예의와 범절을 지키며, 학문과 글자를 법으로 정하여, 하나같이 경내(境內)를 교화(敎化)하니, 가깝고 멀고 간에 백성들이 모두 서로 의심하지 않았다.

 

熊氏之所分曰少典 安夫連桓雄之末 少典以命 監兵于姜水 其子神農 嘗百草制藥. 後徙列山 日中交易 人多便之. 少典之別派 曰 公孫 以不善養獸 流于軒丘 軒轅之屬 皆其後也.

웅씨지소분왈소전 안부련환웅지말 소전이명 감병우강수 기자신농 상백초제약. 후사열산 일중교역 인다편지. 소전지별파 왈 공손 이불선양수 유우헌구 헌원지속 개지후야.

 

웅씨족(熊氏族)에서 갈라져 나간 자 중에 소전(少典)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안부련(安夫連)한웅 말기에 소전(少典)은 명령을 받아 강수(姜水)에서 병사들을 감독하였는데, 그의 아들 신농(神農)이 수많은 풀들을 시험하여 약을 만들었다. 후에 열산(烈山)으로 이사하였는데, 낮에는 약을 팔아 사람들에게 많은 편의를 주었다. 소전(少典)과 헤어진 아들을 공손(公孫)이라 하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한다 하여 헌구(軒丘)에 유배 시켰다. 헌원(軒轅)의 족속(族屬)은 모두 그의 후손이다.

 

斯瓦羅桓雄之初 熊女君之後 曰 始得封於檀墟爲王儉. 樹德愛民 土境漸大 諸土境王儉 來獻方物 以歸化者 千餘數.

사와라환웅지초 웅여군지후 왈 시득봉어단허위왕검. 수덕애민 토경점대 제토경왕검 래헌방물 이귀화자 천여수.

 

사와라(斯瓦羅)한웅 초기의 일이다. 웅족(熊族)여왕의 후손 여()가 처음으로 단허(檀墟)에서 책봉을 받아 왕검(王儉)이 되었다. ()을 심고 백성을 사랑하여, 영토가 점점 확대되니, 여러 곳의 왕검(王儉)들이 찾아와 방물(方物)을 바치고, 귀화(歸化)하는 자가 수천(數千)이였다.

 

後四百六十年 有神人王儉者 大得民望 陞爲裨王 居攝二十四年 熊氏王崩於戰 王儉 遂代其位 統九桓爲一 是爲檀君王儉也.

후사백육십년 유신인왕검자 대득민망 승위비왕 거섭이십사년 웅씨왕붕어전 왕검 수대기위통구환위일 시위단군왕검야.

 

460년 후에 신인(神人: 신과 같은 사람) 왕검(王儉)이 백성의 신망을 크게 얻어 비왕(裨王: 버금 왕)에 올라 섭정을 한지 24년만에 웅씨(熊氏)의 왕이 싸움에서 죽자, 왕검(王儉)이 마침내 대()를 이어 왕위에 올라, 구한(九桓: 九夷)을 하나로 통일하니, 이분이 단군왕검(檀君王儉)이시다.

 

乃召國人 立約曰 自今以後 聽民爲公法 是謂天符也. 夫天符者 萬世之綱典 至尊所在 不可犯也.’

내소국인 입약왈 자금이후 청민위공법 시위천부야. 부천부자 만세지강전 지존소재 불가범야

 

국인(國人;백성)들을 불러모아 약속을 세우고 말하기를, ‘지금으로부터 백성의 소리를 듣는 것이 공공의 법이다 이것이 하늘의 모범이다. 대저 天府는 모든 세기를 통해 지켜야할 벼리요 규범이니(萬世法典), 지극히 존귀함이 있으니 감히 어길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다.

 

遂與三韓 分土而治 辰韓 天王自爲也 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是爲 一世檀君.

수여삼한 분토이치 진한 천왕자위야 입도아사달 개국호조선 시위 일세단군.

 

마침내 삼한(三韓)으로 땅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진한(辰韓)은 황제가 스스로 다스렸다. 아사달(阿斯達)을 도읍지로 정하고, 나라를 여시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이분이 1세 단군(檀君)이시다.

 

阿斯達 三神所祭之地 後人 稱王儉城 以王儉舊宅 尙存故也.

아사달 삼신소제지지 후인 칭왕검성 이왕검구택 상존고야.

 

아사달(阿斯達)은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후세 사람들이 왕검(王儉)의 옛집이고 아직 있으므로, 아사달을 왕검성(王儉城)이라고도 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