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夫餘紀 上
休崖居士 范樟 撰
始祖檀君 解慕漱 在位四十五年
壬戌元年 帝 天姿英勇 神光射人望之 苦天王郞. 年二十三 從天而降 是檀君高列加五十七年 壬戌四月八日也. 依熊心山而起策室蘭濱戴. 烏羽冠佩龍光劍 乘五龍車 與從者五百人 朝則廳事 暮登天至 是郞位.
임술원년 제 천자영용 신광사인망지 고천왕랑. 년이십삼 종천이강 이단근고열가오십필칠년 임술사월팔일야. 의웅심산이기측실난빈대. 오익관패 용광검 승오룡거 여종자오백인 조직청사모등천지 시랑위.
임술원년 단제 하늘처럼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기로 사람들을 바라보니 하늘 사람 같더라. 나이 23세에 天河로 내려오니 때는 47대 단군고열가 57년으로 임술 4월 8일이라. 난빈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 지었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에 명검을 차고 오룡거를 타고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니 이게 그 위상이었다.
癸亥二年 是歲三月十六日 祭天設烟戶法 分置五加之兵 屯田自給 以備不虞.
기해이년 시세삼월십육일 제천설연호법 분치오가지병 둔전자급 이비불우.
계해 2년 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연호법(=民家 인구법)을 제정하고 오가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己巳八年 帝率衆往諭 故都五加遂 撤共和之政. 於是 國人推檀君 是爲北夫餘始組也. 冬十月立公養胎母之法 敎人必自胎訓始.
기사팔년 제솔중왕유 고도오다수 철공화지정. 어시 국인추잔군 시위북부여시조야. 동시월립 공양태모지법 교인필자태훈시.
기사 8년 단제께서 무리들을 가르치시니 옛 도읍의 오가들이 따르니 공화의 정치(5가 연합 정부)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단군으로 추대하니 북부여의 시조가 되었다. 겨울 10월 단군으로 취임하고 공양태모의 법을 세워 태교가 사람 가르치는 근본으로 삼아 반드시 태교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壬申十一年 北漠酋長山只喀隆襲寧州 殺巡使穆遠登 大掠而去.
임신십일년 북막추장산지객룡습영주 살순사목원등 대략이거.
임신 11년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이 영주를 습격하여 순사 목원등을 죽이고 크게 약탈질하고 돌아갔다.
庚辰十九年 丕薨子準襲父封爲番朝鮮王. 遣官監兵尤致力於備燕. 燕遣將秦介侵我西鄙 至滿番汗爲界.
경진십구년 비훙자준습부봉위번조선왕. 견관감병유차력어비연. 연견장진개침아서비 지만번한위계.
경진 19년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였다. 연나라는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辛巳二十年 命祭天于白岳山阿斯達 七月起新闕三百六十六間 名爲天安宮. 癸未二十二年 滄海力士黎洪星與韓人張良 狙擧秦王政于博浪沙 中誤中副車.
신사이십년 명제천우백악산아사달 칠월기신궐삽백육십육간 명위천안궁. 계미이십이년 창해역사여홍성여한인장량 저거진왕정우박사량 중오중부거.
신사 20년 명을 내리사 백악산 아사달서 하늘에 제사 지내도록 하시고, 7월 새로운 궁궐 366칸을 지어 이름하여 천안궁이라 하다. 계미 22년 창해역사 여홍성이 한나라 사람 장량과 함께 진나라왕 정을 박랑사에서 노렸으나 빗나가 따르는 수레를 맞추었다.
壬辰三十一年 陳勝起兵 秦人大亂 燕齊趙民亡歸番朝鮮者數萬口. 分置於上下雲障 遣將監之.
임진삼십일년 진승기병 진인대란 연제조민망귀번조선자수만구. 분치어상하운장 견장감지.
임진 31년 진승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난에 휩싸였다. 이에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귀순하는 자가 수만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운장지역 상하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독하였다.
己亥三十八年 燕盧綰復修遼東故塞 東限浿水 浿水今灤河也.
기해삼십팔년 연노관복수요동고새 동한패수 패수금난하야.
기해 38년 연나라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써 경계를 삼으니 패수는 곧 오늘의 난하이다.
丙午四十五年 燕盧綰叛漢入凶奴 其黨衛滿求亡於 我帝不許. 然帝以病 不能自斷 番朝鮮王箕準多失機 遂拜衛滿爲博士 劃上下雲障 而封之是.
병오사십오년 연노관반한입흉노 기당위만구망어 아제불허. 연재이병 불능자단 번조선왕기준다실기 수배위만위박사 도상하운장 이봉지시.
병오 45년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치 않으셨다. 단제께서는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 하 운장지역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주었다
歲冬帝崩 葬于熊心山東麓 太子慕漱離立.
시동제붕 장우웅심산동록 태자모수리립.
이해 겨울 단제가 붕어하시고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니 태자인 모수리가 즉위하였다.
二世檀君 慕漱離 在位二十五年
丁未元年 番朝鮮王箕準久居 須臾 嘗多樹恩 民皆富饒 後爲流賊所敗 亡入于海而不還. 諸加之衆 奉上將卓 大擧登程 直到月支 立國. 月支 卓之生鄕也 是謂中馬韓. 於是弁辰二韓亦各 以其衆受封 百里立都自號 皆廳用馬韓政令 世世不叛.
정미원년 번조선왕 기준구거 수유 상다식은 민개부요 후위유적소패 망입우행불환. 제가지중 봉상장탁 대거등정 직도월지 입국. 월지 탁지생향야 시위중마한. 어시변진이한역각 이기중 수봉백리입도자호 개응용마한정령 세세불반.
정미원년 번조선 왕 기준은 오랫동안 머물다 잠시 많은 은혜를 끼쳐 백성들을 부요하게 하고난 후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물가로 도망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월지로 가서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 장군의 태어난 고향이고 마한 가운데이다. 이에 변 진한의 두 한도 각각 자기들의 받았던 땅 백리를 가지고 수도도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戊申二年 帝遣上將延陀勃 設城柵於平壤 以備賊滿. 滿赤厭苦 不復侵擾.
무신이년 제견상장연타발 설성책어평양 이비적만. 만적염고 불복침요.
무신 2년 단제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賊滿에 대비케 했다. 이에 滿赤이 고생이 싫었는지 다시는 침범치 않았다.
己酉三年以 海城屬平壤道 使皇弟高辰守之 中夫餘一城悉從糧餉. 冬十月 立京鄕分守之法. 京則天王親總衛戌 鄕則四出分鎭 恰如柶戱觀戰龍圖知變也.
기유삼년이 해성속평양도 사황제고진수지 중부여일성실종양향. 동시월 입경향분수지법. 경즉천왕친총위수 향즉사출분진 흡여사희관전 용도지변야.
기유 3년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는 황제의 동생 고진을 시켜 이를 수비케 하니 중부여 성 하나가 복종하매 잔치하였다. 겨울 10월 경향분수의 법을 세웠으니 서울도성은 곧 천왕이 직접 수비를 총괄하며,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대를 주둔하도록 하니, 마치 윷놀이에서 용도(주역)의 싸움을 보고 그 변화를 아는 것과 같았다.
* 京鄕分守: 이는 소위 井田制의 원형으로 중앙 주변을 네 군데로 나뉘어 순환으로 방위케하는 법... 軍制 확립
辛未二十五年 帝崩 太子高奚斯立.
신미이십오년 제붕 태자고해사립.
신미 25년 단제가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가 즉위하다.
三世檀君 高奚斯 在位四十九年
壬申元年正月 樂浪王崔崇 納穀三百石于海城. 先是崔崇自樂浪山 載積珍寶 而渡海至 馬韓都王儉城 是檀君解慕漱 丙午冬也.
임신원년정월 낙랑왕최숭 납곡삼백석우해성. 선시최숭자낙랑산 재적진보 이도해지 마한도왕검성 시단군해모수 병오동야.
임신 원년 정월 낙랑왕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보물을 산처람 가득히 싣고, 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년의 겨울이었다.
癸丑四十二年 帝躬率步騎一萬 破衛賊於南閭城置吏.
계축사십이년 제궁솔보기일만 파위적어남여성치리.
계축 42년 단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庚申四十九年 一群國遣使獻方物. 是歲九月 帝崩 太子高于婁立.
경신사십구면 일군국견사헌방물. 시세구월 제붕 태자고우루립.
경신 49년 일군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다. 이해 9월 단제가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가 즉위했다.
四世檀君 高于婁(一云解于婁) 在位三十四年
辛酉元年 遣將討右渠 不利. 擢高辰守西鴨綠 增强兵力 多設城柵 能備右渠 有功陞爲 高句麗侯.
신유원년 견강토우거 불리. 탁고진수서압록 증강병력 다설성채 능비우거 유공승위 고구려후.
신유 원년(B.C.120),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한반도의 압록이 아니라 몽고지방 을강을 뜻함.)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중국의 제후국인 고구려후가 아니라 북부여의 제후국인 고구려후임이 확실해졌다.)로 삼았다.
癸亥三年 右渠賊大擧入寇 我軍大敗 海城以北五十里之地 盡爲虜有
계해삼년 우거적대거입구 아군대패 해성이북오십리지지 진위로유
계해3년 우거의 도적떼들이 드니 우리가 크게 이겨 해성 북쪽 50리 지역을 모두 포로로 했다.
甲子四年 帝遣將攻海城 三月而不克.
갑자사년 제견장공해성 삼월이불극
갑자 4년 단제가 장수를 보내 海城을 3개월간 공격하고도 이기지 못했다.
丙寅六年 帝親率精銳五千 襲破海城 追至薩水九黎河以東 悉降
병인육년 제친솔정예오천 습파해성 추지살수구려하이동 실항
병인 6년 단제가 친히 정예병 5000을 끌고 해성을 깨고 살수와 구려하 동쪽까지 추격하니 모두 항복하였다.
丁卯七年 設木柵於坐原 置軍於閭 以備不虞.
정묘칠년 설목책어좌원 치군어여 이비불우.
정묘7년 좌원에 목책을 설치하고 군영과 마을을 설치하여 염려를 없앴다.
癸酉十三年 漢劉徹寇平那滅右渠 仍欲置四郡 盛以兵四侵. 於是高豆莫汗倡義起兵 所至連破漢寇 遺民四應以助戰 軍報大振.
계유십삼년 한유철구평나멸우거 잉욕치사군 성이병사침. 어시고두막한창의기병 소지연파한구유민사응이조전 군보대진.
계유 13년(B.C.108), 한의 유철(무제)이 평나를 노략질하여 우거를 멸망시키고 4군을 설치하고자 하여 병력을 늘려 사방에서 처들어왔다. 그 때 고두막한 창의가 병력을 일으켜 한나라 도적들을 연파하니 이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사적으로 크게 보복하여 떨쳤다
甲午三十四年十月 東明王高豆莫汗 使人來告曰 “我是天帝子 裝欲都之 王其避之帝難之.” 是月帝憂患成疾而崩. 皇弟解夫婁立之 東明王兵䝱之 不己 君臣頗難之. 國相阿蘭弗奏曰 “通河之濱迦葉之原有地 上壤膏腴宜五穀 可都.” 遂勸王移都 是謂迦葉原夫餘 或云 東夫餘.
갑오삼십사년시월 동명왕고두막하누사인래고왈 “아시천제자 장욕도지 왕기피지제난지.” 시월제우환성질이붕. 황제해부루립지 동명왕병협지 불기 군신파난지. 국상아란불주왈 “통하지빈 가섭원유지 상양고유의오곡 가도.” 수권왕이도 시위가섭원부여 혹운 동부여.
갑오 34년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이 사람을 시켜서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 가시오"라하였다. 그 달에 단제가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동생인 해부루가 이에 즉위 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때 국상인 아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기름지고 오곡이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만한 곳입니다"라고 하며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 부여라 하며 또는 동부여라고도 한다.
北夫餘紀 下
休崖居士 范樟 撰
五世檀君 高豆莫(一云豆莫婁) 在位二十二年 在帝位二十七年
癸酉元年 是爲檀君高于婁十三年. 帝爲人豪俊善用兵. 嘗見北夫餘衰 漢寇熾盛 慨然有 濟世之志至是卽位 於卒本 自號東明 或云 高列加之後也.
계유원년 시위단군고우루십삼년. 제위인호준선용병. 상견북부여쇠 한구차성 개연유 제세지지지시즉위 어졸본 자호동명 혹운 고열가지후야.
계유 원년(B.C.108년), 이 해는 단군 고우루13년이다. 제(帝)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찌기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명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卒本:몽고 역사학자의 말에 따르면 지금의 북만주나 동몽고의 땅으로 비정된다.)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乙亥三年 帝自將傳橔所至無敵. 不旬月衆至五千 每與戰漢寇 望風而潰 遂引兵渡 九黎河追至 遼東西安平 乃古藁離國之地.
을해삼년 제자장전돈소지무적 불순월중지오천 매여전한구 망풍이궤 수인병도 구려하추지 요동서안평 내고고리국지지.
을해 3년(B.C.106)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과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西安平:후에 요의 상경 임황부가 되었다.)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藁離國:바이칼호부근에서 몽고내부까지.)의 땅이었다.
甲午二十二年 是爲檀君高于婁三十四年 帝遣將破裵川之漢寇 與遺民幷力 所向連破漢寇 擒其守將拒以有備.
갑오이십이년 시위단군고우루삼십사년 제견장파배천지한구 여유민병력 소향연파한구 금기수장거이유비.
갑오 22년(B.C.86)단군 고우루 34년에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의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 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乙未二十三年 北夫餘奉城邑 降屢哀欲保帝廳之降 封解夫婁爲候 遷之岔陵 帝前導鼓吹 率衆數萬而入都城 仍稱北夫餘. 秋八月 與漢寇屢戰于西鴨綠 可之上大捷.
을미이십삼년 북부여봉성읍 항루쇠욕보재청지항 봉해부루위후 천지차릉 제전도고취 솔중수만이입도성 잉칭북부여. 추팔월 여한구누전우서압록 가지상대첩.
을미 22년(B.C.86)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가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능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가을 8월에 서 압록하의 상류에서 한구와 여러 차례 싸워 크게 이겼다.
壬寅三十年五月五日 高朱蒙誕降于岔陵. 辛酉四十九年 帝崩 以遺命葬于卒本川. 太子高無胥立.
임인삼십년오월오일 고주몽탄강우분능. 신유사십구년 제붕 이유명장우졸본천. 태자고무서립.
임인 30년(B.C.79)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능에서 태어났다. 신유 49년(B.C.60) 제가 붕어하고 유언에 따라 졸본천에 장사 지냈다. 태자 고무서 등극하다.
六世檀君 高無胥 在位二年
壬戌元年 帝卽位于卒本川 與父老會于白岳山 立約祭天頒行事例 內外大悅. 帝生而有神德 能以呪術呼風喚雨 善賑大得民心有 小解慕漱之稱. 時 漢寇騷亂遍于遼左 屢戰得捷.
임술원년 제즉위우졸본천 여부노회우백악산 입약제천반행사례 내외대열. 제생이유신덕 능이주술호풍환유 선진대득민심유 소해무수지칭. 시 한구소란편우요좌 누전득첩.
임술 원년(B.C.59) 제가 졸본천에서 즉위하고는 백악산에서 장로들과 함께 모여 사례에 따라 널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시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고무서 제는 태어나면서 부터 신과 같은 덕이 있어 능히 주술로서 바람과 비를 불러 잘 구제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라 불렸다. 이 때에 한나라의 오랑캐들이 요하의 왼쪽(요서)에서 널리 소란을 피웠으니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癸亥二年 帝巡到寧古塔 得白獐. 冬十月 帝崩 高朱蒙以遺命 入承大統. 先是帝無子 見高朱蒙爲非常人 以女妻之至. 是卽位時年二十三. 時下 夫餘人將欲殺之 奉母命與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德友 行至岔陵水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河伯外孫 今日逃走 追者垂及奈何?” 於是魚鼈浮出成橋 始得渡魚鼈乃解.
계햐이년 제순도영고탑 득백장. 동시월 제붕 고주몽이유명 입승대통. 선시제무자 견고주몽위비상인 이여처지지. 시즉위시년이십삼. 시하 부여인장욕살지 봉모명여오이마리협부등삼인위덕우 행지분능수 역도무량 공위추병소박 고수왈 “아시천제자하백외손 금일도주 추바수급내하?” 어시어별부출성교 시득도어별내해.
계해 2년(B.C.58) 제가 영고탑을 순시하다가 흰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 단제가 붕어하고 고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 이보다 앞서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는데 즉위하니 나이가 23세였다. 이 때에 부여인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오이,마리,협보(주몽의 협력자로 뒷날 일본으로 건너가 다파라국을 세웠다.)등 세 사람과는 덕으로써 사귄 친구였던 지라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서 함께 길을 떠나 분능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너고자 하여도 다리가 없었으므로 뒤 쫓아오는 군사들에게 몰릴까 두려워하여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인데 오늘 도주함에 있어 추격병은 다가오고 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하니, 이때에 물고기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놓아주고 주몽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흩어졌다.
迦葉原夫餘紀
休崖居士 范樟 撰
始祖 解夫婁 在位三十九年
乙未元年 王爲北夫餘所制 徙居迦葉原 亦稱岔陵. 宜五穀尤多麥又多虎豹熊狼便於獵.
을미원년 왕위북부여소제 사거가섭원 역칭분능. 의오곡유다맥우다호표웅랑편어렵.
을미 (B.C.86) 원년 왕은 북부여의 제도에 따라 가섭원 혹은 분능(산동성부근)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옮겨서 살았다. 오곡이 다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범. 표범. 곰. 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다.
丁酉三年 命國相阿蘭弗 設賑招撫遠近流民 使及時飽暖 又給田耕作 不數年 國富民殷. 時有時雨滋岔陵 民歌王 正春之謠.
정유삼년 명국상아란불 설진초무원근유민 사급시포난 우급전경작 불수년 국부민은. 시유시우자분능 민가왕 정춘지요.
정유(B.C.84) 3년 국상 아란불(동부여 재상, 많은 문헌에 등장)에게 명하여 원근의 백성들을 널리 잘 먹여주고 따뜻하게 살 곳을 주며 또 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 해 안되어 나라는 풍부해지고 백성들은 풍족해 졌다. 때마다 비가 내려 분능을 기름지게 하는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壬寅八年 先是河伯女柳花出遊爲 夫餘皇孫高慕漱之所誘 强至鴨綠邊室中而私之 仍升天不返 是父母責其無媒 而從之遂謫居邊室. 高慕漱 本名弗離支 或曰高辰之孫. 王異柳花同乘還宮而幽之.是歲五月五日 柳花夫人生一卵 有一男子破殼而出. 是謂高朱蒙 骨表英偉 年甫七歲 自作弓矢 百發百中. 夫餘語善射爲朱蒙 故以名云.
임인팔년 선시하백녀유화출유위 부여황손고모수지소유 강지압록변실중이사지 잉승천불환 시부모책기무모 이종지수적거변실. 고모수 본명불리지 혹왈고진지손. 왕이유화동승환궁이유지. 시세오월오일 유화부인생일난 유일남자파각이풀. 시위고주몽 골표영위 년보칠세 자작궁시 백발백중. 부여어선사위주몽 고이명운.
임인 8년(B.C.79) 앞서 하백의 딸 유화가 나들이를 나갔는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사통하곤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의 궁리 없음을 책망하여 마침내 구석 방에 딸을 가두어 버렸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이며 혹은 고진의 손자라고도 한다. 왕께서는 유화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다. 그해 5월 5일 유화부인은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 아이가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름은 고주몽이라 불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잘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렀다.
* 仍升天不返: 다른 책(삼국사기)에는 即徃不返으로 나온다.
甲辰十年 王老無子一日祭山川求嗣 所乘馬至鯤淵見大石相對俠淚. 王怪之 使人轉其 石有小兒金色蛙形.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名曰 ‘金蛙’ 及其長立爲太子.
갑진십년왕노무자일일제산천구사소승마지곤연견대석상대협루 왕괴지사인전기석유소아금색와형. 왕희왈 “차내천뢰아영윤호.” 내수이양지명왈 ‘금와.’ 급기장립위태자.
갑진 10년(B.C.77)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날 산천에 제사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고 말을 타고 곤연에 이르자 큰 돌을 마주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들을 시켜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더라. 왕은 몹시 기뻐하며 "이 아이야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리신 아기로다."라고 하시며 곧거두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라 하고 장성케하매 태자로 책봉하였다.
壬戌二十八年 國人以高朱蒙爲不利於國 欲殺之. 高朱蒙奉母 柳花夫人 命東南走渡淹離大水 到卒本川. 明年開新國 是爲高句麗始組也.
임술이십팔년 국인이고주몽위불리어국 욕살지. 고주몽봉모 유화부인 명동남주도 엄리대수도졸본천 명년개신국 시위고구려시조야.
임술 28년(B.C.59) 나라 백성들이 고주몽이 나라에 보탬이 되지않는 인물이라 하여 죽이려 했다. 고주몽이 어머니로 모시는 유화부인이 동남쪽으로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천으로 가라 명하시니 이듬해 새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癸酉三十九年王薨 太子金蛙立.
계유삼십구년왕훙 태자금와립.
계유 39년(B.C.48) 왕이 죽고 태자 금와가 즉위하다.
二世 金蛙 在位四十一年
甲戌元年 王遣使高句麗獻方物. 丁酉二十四年柳花夫人薨. 高句麗以衛兵數萬返葬于卒本 命以皇太后禮 遷就山陵建廟祠于其側. 甲寅四十一年 王薨 太子帶素立.
갑술원년 왕견사고구려헌방물. 정유이십사년유화부인훙. 고구려이위병수만반장우졸본 명이황태후례 천취산능건묘사우기측. 갑인사십일년 왕훙 태자대소립.
갑술 원년(B.C.47)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특산물을 바쳤다. 정유 24년(B.C.24)유화 부인이 돌아 가셨다.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졸본으로 모셔와 장사지냈는데 황태후의 예로써 취산으로 옮겨 그 곁에 묘사를 짓게 하였다. 갑인 41년(B.C.7년)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 대소가 즉위 하였다.
三世 帶素 在位二十八年
乙酉元年春正月 王遣使高句麗請交質子. 高句麗烈帝 以太子都切爲質. 都切不行 王恚之. 冬十月以兵五萬 往侵卒本城 大雪多凍死乃退.
을유원년춘정월 왕견사고구려청교질자. 고구려열제 이태자도절위질. 도절불행 왕에지. 동시월이병오만 왕침졸본성 대설다동사내퇴.
을묘 원년 (B.C.6) 봄 정월에 왕은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국교를 청하고자 왕자를 인질로 삼고자 하였다. 고구려의 열제가 태자 도절로써 인질을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매 왕이 그를 꾸짖었다. 겨울 10월 병력 5만을 이끌고 가서 졸본성을 침략하였으나 큰 눈이 와서 많은 동사자만 내고는 퇴각하였다.
癸酉十九年 王侵攻高句麗 至鶴盤嶺下 遇伏兵大敗.
계유십구년 왕침공고구려 지학반령하 우복병대패.
계유 19년(A.D.13)왕께서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학반령 아래에 이르러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壬午二十八年二月 高句麗擧國來侵 王自率衆出戰 遇泥淖 王御馬陷 不得出 高句麗上將怪由直前殺之. 我軍猶不屈圍數重 適大霧七日 高句麗烈帝潛師夜脫從間道而遁去. 夏四月 王弟與從者數百人奔至鴨綠谷 見海頭王出獵遂殺之 而取其民 走以曷思水賓 立國稱王是爲曷思. 至太祖武烈帝隆武十六年八月 都頭王見高句麗日强 遂擧國自降 凡三世歷四十七年 而國絶 命都頭爲于台賜第宅 以琿春爲食邑 仍封爲東夫餘候.
임오이십팔년이월 고구려거국내침 왕자솔중출전 우니뇨 왕어마함 부득출 고구려상장괴유직전살지. 아군유불굴위수중 적대무칠일 고구려열제잠사야창종간도이둔거. 하사월 왕제여종자수백인분지압록곡 견해두왕출렵수살지 이취기민 주이갈사수빈 입국칭왕시위갈사. 지태조무열제 융무십육년팔월 도두왕견고구려일강 수거국자항 범삼세역사십칠년 이국절 명도두위우태사제택 이훈춘위식읍 잉봉위동부여후.
임오 28년(A.D.22) 2월 고구려가 나라의 힘을 다시 모아서 침범해오니 왕은 몸소 무리를 이끌고 출전하였는데, 진흙탕을 만나 왕의 말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에 고구려 대장군 괴유가 바로 앞에서 있다가 살해하였다. 그래도 부여군은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 하였는데 큰 안개가 7일 동안이나 계속되니 고구려 열제는 몰래 병사를 이끌고 밤에 탈출하여 사잇길을 따라 도망쳐 달아나 버렸다. 여름 4월 왕의 동생은 따르는 무리 수백인을 데리고 길을 떠났는데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왕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는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취하였고, 그 길로 갈사수 근방에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니 이를 갈사(길림성 부근)라 한다. 갈사는 태조 무열제의 융무 16년 8월, 도두왕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짐을 보고 마침내 전 무리와 함께 항복하니, 대저 3세 47년 만에 나라가 망했다. 고구려는 도두를 우대라고 부르도록 하고 저택을 하사하고 혼춘을 식읍으로 삼게 하여 동부여후로 봉하였다.
秋七月 王從弟謂國人曰 “先王身弑國亡 人民無所依 曷思偏安不能自國 吾亦才智魯下 無望與復寧 降以圖存以.” 故都人民萬餘口投高句麗 高句麗封爲王 安置椽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後稍自立自開原 西北徙到白狼谷又近燕之地至. 文咨烈帝明治甲戌以其國折入于高句麗椽那部 絡氏遂不祀.
가을 7월 왕의 친척 동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선왕께서는 시해 당하시고 나라는 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고 갈사는 큰 무리가 되기 어렵다. 나 또한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안정시킬 수 없으니 차라리 항복함으로써 살기를 도모하리라" 하고 옛 도읍의 백성 만 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는 그를 왕으로 삼고 연나무에 안치하였다. 그의 등에 그물같은 무늬가 있었던 까닭에 낙씨의 성을 하사하였는데 뒤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에 이르니 바로 연 나라의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문자열제의 명치갑술(A.D.494)에 이르러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조차 끊겼다.
* 西北徙到白狼谷又近燕之地: 서북쪽으로 옮겨 백랑곡에 이르렀는데 연나라땅 근처다.... 반대로 동남쪽이 고구려 연나부라는 뜻이라면????? 연나라 강역 동남쪽이 어딘가?????
* 또한 여기서 왕의 호칭을 보면 고구려가 강성해지자 호칭이 帝로 바뀌고 부여 지도자는 王으로 불린다. 북막의 지도자는 酋長이고....
혹간 皇은 帝와 동급으로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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