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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檀古記

檀君世紀

1世檀君 王儉

 

古記云 王儉父檀雄 母熊氏王女 辛卯(紀元前37)五月二日寅時 生于檀樹下. 有神人之德遠近畏服. 年十四甲辰(紀元前24)熊氏 王聞其神聖 擧爲裨王 攝行大邑國事. 戊辰(元年)唐堯時來自檀國至阿斯達檀木之墟 國人推爲天帝子 混一九桓神化遠. 是謂檀君王儉 在裨王位二十四年 在帝位九十三年 壽一百三十歲.”

고기운 왕검부단웅 모웅씨왕녀 신묘(기원전37)오월이일인시 생우단수하. 유신인지덕원근외복. 연십사갑진(기원전24)웅씨왕 문기신성 거위비왕 섭행대읍국사. 무진(원년)당요시래자단국지아사달단목지허 국인추위천제자 혼일구환신화원. 시위단군왕검 재비왕위이십사년 재제위구십삼년 수일백삼십세.”

 

옛글에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이며 신묘(b.c.2370)52일 인시에 밝달나무(檀木)밑에서 태어났다. 신인의 덕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겁내어 복종했다. 14세 되던 갑진(b.c.2357)년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함을 듣고 그로써 비왕裨王으로 삼고 대읍大邑의 다스림을 대행 하도록 하였다. 무진년(b.c.2333) 제요도당帝堯陶唐=요임금 때에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의 檀木단목의 터에 이르렀다. 온 무리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天帝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구한九桓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의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었다. 이를 단군 왕검이라 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 제위帝位에 있기를 93년이었으며 130세 까지 사셨다.”

 

戊辰元年大始神市之世 四來之民 遍居山谷 草衣跣足. 至開天一千五百六十五年上月三日 有神人王儉者 五加之魁 率徒八百來 御于檀木之墟. 與衆奉祭 于三神其至神之 德兼聖之仁 乃能奉詔繼 天巍蕩惟烈. 九桓之民咸悅誠服 推爲天帝化身而帝之 是爲檀君王儉. 復神市舊規 立都阿斯達 建邦號朝鮮.

무진원년대시신시지세 사해지민 편가산곡 초의선족. 지개천일천오백육십오년상월삼일 유신인왕검자 오가지괴 솔도팔백래 어우단목지허, 여중봉제 우삼신기지신지 덕겸성지인 내능봉조계천외탕유열. 구환지민함열성복 추위천제화신이제지 시위단군왕검. 복신시구규 입도아사달 건방호조선.

 

무진 원년(bc.2333) 바야흐로 신시의 다스림이 시작 되었을 때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산과 골짜기에 두루 퍼져 살며 풀잎으로 옷을 해입고 맨발로 다녔다. 개천 1565년 상월 3일에 이르러 신인 왕검이 오가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잡았다.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님께 제사를 올렸는데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더라. 마침내 능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어 그 다스림이 높고 크고 또 맹렬하였으니 9한의 백성들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따르며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으니 이가 단군왕검이다. 신시의 옛 규칙을 되살리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이름했다.

 

*조선; 조선이라는 국호는 한자가 생기기 전에 이미 있었던 국호이니 조선이란 말은 우리의 고대어로 무었이었을까?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조선의 어원은 숙신(肅愼)이라 하고 "만주원류고"에서는 숙신의 옛이름은 주신珠申이라 하고 주신은 소속 관경管境을 가리키는 만주 말이라 했다. 바로 여기에 조선의 원의源義가 있는 듯하며 숙신은 곧 조선의 고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신이 조선이 되는 것은 한 음의 차이이니 그다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결코 아침은 빛난다 등 한자와는 무관하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하는 morning calming korea 따위의 번역이 옳지않다.

 

詔曰 天節惟一 弗二厥門. 爾惟純誠一 爾心乃朝天. 天範恒一 人心惟同. 推己秉心以及人心 人心惟化亦合天範 乃用御于萬邦. 爾生惟親 親降自天 惟敬爾親 乃克敬天以及于邦國. 是乃忠孝爾. 克體 是道天有崩 必先脫免禽獸. 有雙弊履 有對爾男女 以和無怨 無妬無淫爾.

조왈 천절유일 불이궐문. 이유순성일 이심내조천. 천범항일 신심유동. 추기병심이급인심 인심유화역합천범 내용어우만방. 이생유친 친강자천 유경이친 내극경천이급우방국. 시내충효이 극체 시도천유붕필선탈면금수. 유쌍폐리 유대이남여 이화무원 무척무음이.

 

단군왕검은 가르침을 내리길 하늘의 법칙은 하나일 뿐이니 그 문은 둘이 아니니라. 너희 들은 오로지 순수하게 정성을 다 할 것이니 이로써 너희 마음이 곧 하늘을 보게 되리라. 하늘의 뜻은 언제 어디서니 하나이고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한가지라. 스스로 소아적인 마음 쫒아내고 인심에 이르게 되면 인심이 하늘 도리에 맞아 떨어지고 만방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너희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에 연유하였고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니 다만 너희 부모를 옳게 받들어 모시는 것이 바로 하늘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고, 또 나라에 까지도 그 힘이 미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충성과 효도이니라.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하늘의 도와 벗하자면 먼저 짐승의 경지를 벗어나야 한다. 해진 신발도 짝이 있듯 너희도 사내와 계집이 있으니 서로 화목하여 원망함 없고 질투함도 없고 음란함도 삼갈 것이다.

 

嚼十指痛無大小爾 相愛無胥讒瓦佑 無相殘家國以興爾. 觀牛馬猶分厥爾 瓦讓無胥奪. 共作無相盜國家以殷爾. 觀于虎彊暴不靈 乃作孼爾. 無桀以性無傷人 恒遵天範克愛物爾. 扶傾無陵弱濟恤無侮卑爾. 有越厥則永不得神佑 身家以殞爾 如有衝火于禾田 禾稼將殄滅. 神人以怒爾 雖厚包厥. 香必漏爾 敬持彛性 無懷慝無隱惡無藏禍. 心克敬于天親于民爾 乃福祿無窮爾 五加衆其欽哉.

작십지통무대소이 상애무서참와우 무상잔국가이흥이. 관우마유분궐 이와양무서탈 공작무상도국가이은이. 관우호강초불영 내작얼이 무걸이성무상인 항준천범극애물이 부경무능익제혈 무모비이. 유월궐즉영부득신우 신가이운이 여유충화우화전가장진멸. 신인이노이 수후포궐.향필누이 경지이성 무회닉무은악무장화. 심극경우천친우민이 내복록무궁이 오가중기흠재.

 

열 손가락을 깨물면 크건 작건 가림없이 모두 아프지 않던가? 서로 사랑하고 헐뜯지 않으며 서로 도우면 집안도 나라도 다 크게 일어나리라. 소나 말을 살펴보아도 역할(분깃)이 나뉘어 있어서 서로 물러서며 뺏어먹지 않고 서로 양보하고 서로 도둑질하지 않으니 나라가 융성하는 것이다. 호랑이를 보면 강포하고 신령함이 없어 재앙을 만들어냄을 본다. 강포함이 없는 성품이면 사람을 해치지않으니 항상 하늘 도리를 따라 물욕을 이겨난다. 약자를 억누르지 않고 구제하고 낮은 이를 모욕하지 않는다. 분깃=도에 넘치면 영원히 하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하니 몸과 가족이 죽는 것으로 마치 논에 불지르면 종자가 고갈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인=하늘 사람이 분노하지만 비록 그 분깃을 품어 안는 법이다. 향기가 새어나듯 이 본성을 지니고 있으면 꿍꿍이가 없고 숨겨진 악심이 없고 잠재된 재앙이 없다. 마음이 하늘을 지극히 존경하면 사람들에게도 그리하게 되니 복록이 무궁한 법으로 5가의 무리들이 삼가는 것이다.

 

於是命彭虞闢土地 成造起宮室 臣智造書 契奇省設醫藥 那乙管版籍 羲典卦筮 尤掌兵馬. 納斐西岬河伯女爲后治蠶淳 之治熙洽四表. 丁巳五十年洪水汎濫 民不得息 帝命風伯彭虞治水定高山大川以便民居 牛首州有碑.

어시명팽우벽토지 성조기궁실 신지조서 계기성설의약 나을관판적 희전괘서 우장병마. 납비서갑하백녀위후치잠순 지치희흡사표. 정사오십년홍수범람 민부득식 제명풍백팽우치수정고산대천이편민거 우수주유비.

 

이때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고, 성조成造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高矢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臣智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奇省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那乙에게는 호적을 관리 하도록 하였으며, 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에게는 군대를 관장케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河伯女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 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淳厖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정사 50(b.c2284)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쉴 수가 없었다. 께서는 풍백風伯인 팽우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강을 평정 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으니 우수주牛首州에 그 비석이 있다.

 

* 重熙累洽: 태평 세월이 계속되다

* 四表: 四方

 

戊午五十一年 帝命雲師倍達臣設三郞城于穴口 築祭天壇於摩璃山 今塹城壇是也. 甲戌六十七年 帝遣太子扶婁與虞 司空會于塗山. 太子傳五行治水之法. 勘定國界幽營二州屬我. 定淮岱諸侯置分朝以理之 使虞舜監其事.

무오오십일년 재명운사배달신설삼랑성우혈구 축제천단어마리산 금참성단시야. 갑술율십칠년 제견태자부루여우 사공회우도산. 태자전오행치수지법. 감정국계유영이주속아. 정회대제후치분조이리지 사우신감기사.

 

무오 51(BC 2283) 단제께서 운사인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지명)에 삼랑성(三郞城)을 짓고 제천단(祭天壇)을 마리산(摩璃山)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바로 그것이다. 갑술 67(BC 2267) 단군께서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虞司空)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10)을 전하여 주었고 나라의 경계도 따져서 정했으니, 유주(幽州)와 영주(營州)11)의 두 곳 땅이 우리에게 속 하였다. 또 회대(淮岱)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分朝)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牛首州 ; 중수성中首省 삭주朔州(평안북도)라고도 하며,김사렵의 삼국유사는 춘천春川을 우수주라 했고 옛날의 맥국貊國이라 했으나 반도사관에 입각한 망설이다.단군조선의 강역을 한반도라고 전제한 종래의 사관이 빚은 오류일 뿐이다. 우리의 역사 지명에 우수 곧 "소머리","쇠 머리"라는 말이 있음을 주목해야 하며 그 곳을 함부로 比定비정함은 큰 잘못이다. 다만 소 머리. 쇠 머리가 주목이 되는 것은 슈메르를 소말蘇末,수밀이국須密爾國 등의 역사 지명과 모두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여기 우수주도 당연히 저 대륙의 어떤 지명이지 결코 한반도 안의 지명이 아님을 단언해 둔다. 앞서 말한 일본인 가지마는 우수주를 바빌론의 우르지방이라고 망언 하고 있다. 가지마의 설을 따르다 보면 한국사韓國史가 곧 바빌로니아 역사의 후기사後期史가 되고 만다.

 

庚子九十三年帝在柳闕 土階自成草不除 檀木茂陰 與熊虎遊觀 牛羊茁浚溝. 開田陌勸田 蠶治漁獵 民有餘物 補國用 國中大會 上月祭天 民皆熙自樂. 自此皇化 洽被九域遠 耽浪德敎 漸得偉廣於是. 區劃天下之地分統三韓 三韓皆五加六十四族. 是歲三月十五日 帝崩于蓬亭 葬于郊外十里之地. 萬姓如喪考奉檀 晨夕合坐敬拜常念不忘于懷. 太子扶婁立.

경자구십삼년제제유궐 토계자성초불제 단목무음 여웅호유관 우양줄준구. 개전맥권전 잠치어렵 민유여물 보국용. 국중대회 상월제천 민개희자락. 자차황화읍피구역원 탐랑덕교 점득위광어시. 구획천하지지분통삼한 삼한개오가육십사족, 시세삼월십오일 재붕우봉정 장우교회십리지지. 만성여상고봉단 신석합좌경배상념불망우회. 태자부루립.

 

경자 93(b.c.2241) 단군께서 버들 궁궐에 계셨는데 흙 계단이 절로 생겼고 풀숲은 없애지 않으니 단목檀木이 무성한 그늘에서 곰. 호랑이가 노닐며 소와 양이 크는 것을 보셨다. 밭을 일궈 농업을 권면하며 누에치기와 고기잡이를 권하니 백성들은 남은 물건을 나라 살림에 보태었다. 나라 안에는 큰 모임이 있었으니 10월 상달이면 하늘에 제사 지내고 백성들 모두 기쁨에 넘쳐서 환호하며 스스로 즐겼다. 이런 기회로 황화(임금의 가르침)9구역 멀리까지 미쳐 덕와 가르침을 기뻐하여 점차로 이리 널리 퍼진 것이다. 이에 천하를 3으로 나눠 3한으로 정리하니 삼한은 모두 564족이었다. 이 해 315일 단군께선 봉정蓬亭에서 붕어하시니 교외로 10리쯤 떨어진 곳에 장사지냈다. 이에 백성들은 마치 부모님 돌아가신 듯 단목-박달나무를 받들어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함께 앉아 경배하며 생각하여 마음 속에서 잊지 못하더라. 이에 태자 부루가 새로 단군이 되었다.

 

二世 檀君 扶婁 在位五十八年

 

辛丑元年(紀元前94)帝賢而多福 居財大富 與民 共治産業 無一民飢寒. 每當春秋 巡省國中 祭天如禮. 察諸汗善惡 克愼賞罰. 浚渠勸農桑 設寮興學 文化大進 聲聞日彰.

산축원년(기원전94)제현이다복 거재대부여민 공치산업 무일민기한 매당춘추 순성국중 재천여례 찰제한선악 극신상벌. 준거권농상 설료흥학 문화대진 성문일창.

 

신축 원년(b.c2240) 단제께서는 어질면서 다복하셔서 재물을 저장하니 크게 풍부하였으며, 백성과 더불어 함께 산업을 다스리시니 한 사람도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는 자 없었다. 봄 가을로 나라 안을 두루 살펴 보시고는 예를 갖추어 하늘에 제를 올렸다. 여러 지도자들의 잘잘못을 살피시고 상벌을 신중히 하였다. 도랑을 파서 농사짓고 뽕나무 심는 것을 권장하였다. 또 학당을 설치하여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는 크게 진보하여 그 명성이 날로 떨쳐졌다.

 

初虞舜置幽營二州於藍國之隣 帝遣兵征之盡逐其君 封東武道羅等以表 .

초우순치유용아주어람국지인 제견병정지진축기군 봉동무도라등이표.

 

제순유우帝舜有虞의 유주, 영주 두 가 남국藍國(南夷)와 이웃하기 때문에 단제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여 그 왕을 모두 다 쫓아내시고, 동무東武와 도라道羅등을 그 곳의 제후로 봉하여 그 공을 표창하였다.

 

*제순유우;중국 삼황오제의 한 사람, 앞의 제순은 황제의 이름, 뒤의 유우는 나라이름, 유는 우의 발음을 유도 핟기 위하여 쓰인 글자이며 나라 이름은 우국虞國이다. 동작빈의 년표에 의하면 순은 b.c2233~2183년의 제왕이다

 

*남국; 흔히 연나라라고 하나 구이九夷 가운데 남이藍夷도 있다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동이전에서의 남이 기사는 다음과 같다."하나라 걸왕이 포악한지라 뭇이들이 내침하매. 은나라 탕왕(b.c1751~1738)이 혁명을 일으켜 이를 정벌했는데, 중정仲丁(b.c1568~1558)때에 이르러서는 남이가 반란하였다"라는 기사가있다. 그러므로 남국을 남이로 볼 수 있고 또 그래야 할 것으로 본다. 참고로 연나라의 연대는 b.c?~222년이다.

 

其功神市以來 每當祭天國中大會 齊唱讚德 諧和於阿爲樂 感謝爲本神人 以和四方爲式 是爲參佺戒.

기공신시이래 먀당제천국중대회 제창찬덕 해화어아위악 감사위본신인 이화사방위식 시위참전계.

 

신시 이래로 하늘에 제사 지낼 때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다 모여 함께 노래 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며 어아가於阿歌를 부르며 신인神人에게 감사하며 사방을 다 화합하는 방식으로 삼으니 이게 參佺戒.

 

 

其詞曰 於阿於阿 我等大祖神大恩德 倍達國我等 皆百百千千勿忘. 於阿於阿 善心大弓成 惡心矢的成. 我等百百千千人 皆大弓絃同善心 直矢一心同. 於阿於阿 我等百百千千人皆大弓 一衆多矢的貫破 沸湯同善心中 一塊雪惡心. 於阿於阿 我等百百千千人 皆大弓堅勁同心 倍達國光榮. 百百千千年大恩德 我等大祖神 我等大祖神.

기사왈 어아어아 아등대조신대은덕 배달국아등 개백백천천물망. 어아어아 선심대궁성악심시적성. 아등백백천천인 개대궁현동선심 직시일심동. 어아어아 아등백백천천인개대궁 일중다시적관파 비탕동선심중 일괴설악심. 어아어아아 등백백천천인 개대궁견경동심 배달국광영. 백백천천년대은덕 아등대조신 아등대조신.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아어아. 우리들 조상님네 크신 은혜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 마세. 어아어아, 착한 마음은 큰 활로 악한 마음은 화살 삼아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 줄처럼 착한 마음을 품어 곧은 화살 같은 마음되자. 어아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 되어 무리로 살을 쏘면 부서지리니 펄펄 끓는 착한 마음으로 한 덩이 악심을 녹여내라. 어아어아, 우리들 모두 한 마음으로 활줄처럼 긴장하여 배달국을 영광스럽게 하세 천년만년 크신 은덕, 우리 큰 신이시여 우리 큰 신이시여.

 

*참전계;고구려 제상 을파소(?203)가 지은 "참전계경"이 현존한다.

 

壬寅二年帝召少連大連問治道. 先是少連大連善居喪三日不怠三月不懈朞年悲哀三年憂. 自是擧俗停喪五月以久爲榮. 此非天下之大聖其能德化之流行 如是傳郵之速者乎? 二連以孝聞亦見稱於孔子. 夫孝者愛人益世之本 放諸四海而準焉.

임인이년제소소연대연문치도. 선시소연대연선거상삼일불태삼월불해기년상비애삼년우. 자시거속정상오링이구위영. 차비천하지대성기능덕화지유행 여시전우지속자호? 이연이효문역견칭어공자. 부효자애인익세지본 방제사해이준언.

 

임인2(b.c2239), 단제께서는 소연, 대연을 불러 다스림의 길을 물으셨다. 이보다 앞서 소련과 대련은 상을 잘 치루 었으니, 사흘동안을 게을리 하지않고, 석 달 동안을 느슨하지 않았고, 한 해가 지났을 때까지 슬퍼 애통해 하였으며 삼 년 동안 슬픔에 젖어 있었다. 이 때부터 장례를 다섯 달 이상 상 치루는게 유행이 되었다. 이 어찌 천하 대성인이 아니라면 덕화가 아니라면 어찌 역참 말처럼 빠르게 유행되겠는가? 대연과 소연은 이렇듯 효를 실천함으로 무릇 공자도 이를 칭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릇 부모에게 효도함은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이익 되게 하는 근본이니, 온 세상에 두루 알려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소연,대연; 동양고전상에는 단순히 이름으로만 전하고 "예기"에서는: 少連大連善居喪"이라고 있을 뿐이다.즉 소연.대연은 상을 잘 치룬 효자임을 말하였다. 그러나 "三日不怠 三月懈朞年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 삼일불태 삼월해기년비애 삼년우 동이지자야"라고 주해를 달았다. 하늘이 낸 효자, (天從之孝천종지효)라고 효의 대표요 상징처럼 취급하는 인물들이다. 효를 모든 행동의 근본이라 하는 유교 교리에서 볼 때 소연.대연의 효는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癸酉三年九月下詔使民編髮盖首服靑衣. 斗衡諸器悉準於官 布苧市價無處有二 民不自欺 遠近便之. 庚戌十年四月劃邱井爲田結 使民自無私利. 壬子十二年 神誌貴己製獻七回曆邱井圖.

계유삼년구월하조사민변발개수복청의. 두형제기실준어관 포저시가무처유이 민불자사 원근편지. 경술십년사월획구정위전결 사민자무사리. 임자십이년 신지귀기제헌칠회력구정도.

 

계유(b.c2238)9,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변발하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쌀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하도록 관에서 정하였고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했다. 경술10(bc2231)4월 밭을 나누고 밭 문서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한였다. 임자12(bc2229)신지神誌:史官인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戊戌五十八年帝崩 是日日蝕. 山獸作隊亂叫山上 萬姓慟之甚 後國人設祭家內 擇地設壇 而土器盛禾穀置壇上 稱爲扶婁壇地 是爲業神又稱佺戒 以全人受戒爲業主嘉利 人與業俱全之義也 太子嘉勒立.

무오오십팔년제붕 시일일식. 산수작대한규산상 만성통지심 후국인설제가내 택지설단 이토기성화곡치단상 칭위부루단지. 시위업신우칭전계 이전인숙메위업주가리 인여업구전지의야. 태자가륵립.

 

무술5(bc2183)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이 날 일식日蝕이 있었다. 산 짐승도 무리를 지어 미친 듯 산위에서 소리지르고 백성들은 심하게 통곡하였다. 뒤에 백성들은 집안에 제단을 자리를 골라 단을 설치하고 흙 그릇에 쌀과 곡식을 가득 담아 단 위에 올려 놓았다. 이를 부루단지라고 부르고 업신業身으로 삼았으며, 또 완전한 사람이 지킬 계명이라고 하여 전계佺戒라고도 불렀고, 업주가리業主嘉利라 하였으니 바로 사람과 업이 함께 완전하다는 뜻이다. 태자 가륵嘉勒이 새로 즉위했다.

 

* 邱井: 옛날의 전리田里의 구획. 16. 정은 900. 6척사방六尺四方을 보라 하고 보백步百을 무라 하더니 진나라 이후 240보를 1무라 한다.

 

*구정도;邱井구정을 구획한 도면

 

*전계;: 신선이름이니, 신선의 계명을 뜻한다

 

*업주가리;오늘날 민속으로도 울타리 안에 업주가리 라 하는 볏짚 무더기가 있어 제물을 바치며 치성을 드린다.

 

三世檀君 嘉勒 在位四十五年

 

己亥元年五月帝召三郞乙普勒問神王倧佺之道. 普勒交拇加右手行三六大禮而進言曰 神者 能引出萬物 各全其性 神之所妙 民皆依恃也. 王者能德義理世 各安其命 王之所宣民 皆承服也. 倧者國之所選也 佺者民之所擧也.

기해원년오월제소삼랑을보륵문신왕종전지도. 보륵교무가우수행삼육대례이진언왈 신자 능인출만물 각전기성 신지소묘 민개의시야. 왕자능덕의리세 각안기명 왕지소선민 개승복야. 종자국지소선야 전자민지소거야.

 

기해 원년(BC 2182) 5, 단제께서 삼랑 을보륵을 불러 신왕종전(하늘 사람으로서)의 도를 물으셨다. 을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손을 올려놓아 삼육대례를 행한 다음에 나아가서 말씀드렸다. ”()은 능히 만물을 생겨나게 하여 각자 제 성품을 다하게 하심에 신의 깊은 뜻이 있어 백성들은 모두 의지하고 빕니다. 왕은 그 덕과 의로써 세상을 다스려 각각 그 삶을 편안하게 함에 왕의 바른 다스림이 있으니 백성들 모두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다스림은 나라가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함은 백성이 바라는 것입니다.

 

* 三六大禮: 손 모양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큰 절을 올릴 때 손 모으는 걸로 보인다.

 

盖其道也 欲爲父者斯父矣 欲爲君者斯君矣 欲爲師者斯師矣 爲子爲臣爲徒者亦斯子斯臣斯徒矣.

개기도야 욕위부자사부의 욕위군자사군의 욕위사자사사의 위자위신위도자역사자사신사도의.

 

대저 神王倧佺之道는 아비 되려 하는 자는 곧 아비답게 하고, 임금 노릇하고자 하는 이는 임금답게 하며, 스승이 되고자 하는 이는 곧 스승답게 하고, 아들되고자 하고 신하되고자 하며 제자되고자 하는 이도 역시 아름답고 신하답고 제자답게 해야 합니다.

 

故神市開天之道亦以神施敎 知我求獨空我存物能爲福於人世 而已代天神而王 天下弘道益衆無一人失性 代萬王而主人間去病解怨 無一物害命使國中之人知 改妄卽眞

고신시개천지도역이신시교 지아구독공아존물능위복어인새이이대천신이왕천하홍도익중무일인실성 대만왕이주인간거병해원 무일물해명사국중지인 개망즉진.”

 

그러므로 신시개천의 도는 역시 신으로 가르침을 베푼 것이니 나를 알고 홀로 있기를 구하며 나를 비게 한 다음 물건이 있게 함으로써 능히 복을 세상에 미치게 할 뿐이다. 천신을 대신하여 세상에서 왕이 되어 도를 넓혀 무리를 이롭게 하고 한사람이라도 본성을 잃는 일 없게 하고 만왕을 대신하여 인간을 주관하며 병을 제거하고 원망을 풀며 물건 하나라도 그 생겨난 바를 해치는 일 없게 하고, 나라 안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됨을 고치는 것이 참이란 걸 알게 하는 것입니다.”

 

而三七計日會全人執戒 自是朝有倧訓野有佺戒 宇宙精氣粹鍾日域 三光五精凝結腦海 玄妙自得光明共濟. 是爲居發桓也 施之九桓 九桓之民咸率歸一于化.

이삼칠계일회전인집계 자시조유종훈야유전계 우주정기수종일역 삼광오정응결뇌해 현묘자득광명공제. 시위거발한야. 시지구환 구환지민함솔귀일우화.

 

이리하여 3 , 7 일제(3일 수도하고 7일 강론받는)를 기한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 계를 지켰다. 이로부터 조정엔 종훈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전계가 있었나니 우주의 정기는 순수하게 온 누리에 내리고, 삼광오정은 사람의 생각에 뭉쳐서 깊고 묘한것을 얻게 되니 저절로 서로 돕는 것이라. 이를 거발한이라 하며 9한에 두루 베풀어지니 9한의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며 교화되어 하나 같이 되었다.

 

庚子二年 時俗尙不一 方言相殊 雖有象形表意之眞書 十家之邑語多不通 百里之國字難相解 於是命三郞乙普勒 正音三十八字是爲加臨土 其文曰.

경자이년 시속상불일방언상수수유상형표의지진서십가지읍어다불통백리지국자난상해 어시명삼랑을보륵 정음삼십팔자시위가림토. 기문왈

 

경자 2년 아직 풍속이 하나같지 않고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이 있다해도 열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거리 무리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지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니 그글자들은 다음과 같았다. (가림토 글자 사진)

 

辛丑三年 命神誌高契編修倍達留記. 甲辰六年命列陽褥薩索靖 遷于弱水終身棘置. 後赦之仍封 其地 是爲匈奴之祖. 丙午八年康居叛. 帝討之於支伯特. 夏四月帝登不咸山望民家炊煙小起 命滅租稅有差. 戊申十年豆只州濊邑叛 命余守己斬其酋素尸毛犁. 自是稱其地曰素尸毛犁 今轉音爲牛首國也. 其後孫有陜野奴者 逃於海上据三島僭稱天王. 癸未四十五年九月帝崩 太子烏斯丘立.

신축삼년 명신지고글편수배달유기. 갑진육년명열양욕살색정 천우약수종신극치. 후사지잉봉기지 시위흉노지조, 병오팔년강거반. 제토지어지백특. 하사월제등불함산망민가취연소기 명멸조세유차. 무신십년두지주예읍반 명여수기참기추소시모리. 자시칭기지왈소시모리 금전음위우수국야. 기후손유협야노자 도어해상거삼도참칭천왕, 계미사십오년구월제붕 태자오사구립.

 

신축 3년 신지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 培達留記를 편수케 하였다. 갑진 6년 열양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약수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사면하고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 병오 8년 강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단제가 지백특에서 정벌하였다. 초여름 4월이 되자 단제께서는 불함산에 올라 민가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시고는 연기가 일어나는 것이 적은 집은 조세를 줄이도록 명령하시어 조세의 차이가 있게 하였다. 무신 10년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이 되었다. 그 후손에 협야노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칭했다. 계미 459월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오사구가 즉위했다.

四世 檀君 烏斯丘 在位三十八年

 

甲申元年 封皇弟烏斯達爲蒙古里汗. 或曰今蒙古族爲基後云. 冬十月北巡而回到太白山 祭三神得靈草是謂人蔘又稱仙藥. 自後神仙不死之說 與採蔘保精密有關. 聯間有採得家所傳 神異顯靈頗多奇驗云.’

갑신원년 봉황제오사달위몽고리한. 혹왈금몽고족위기후운. 동시월북순이회도태백산 제삼신득영초시위인삼우칭선약. 자후신선불사지설 여채삼보정밀유관, 연간유채득사소전 신이현영파다기험운.’

 

갑신 원년(BC 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으로 봉하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겨울 10월에는 북쪽을 순시하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삼신님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를 얻으니 인삼이라고도 하고 선약이라고도 한다. 이후 신선불사의 설은 삼을 채집하여 정기를 보호하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간혹 이를 얻은 이들이 하는 말이 있으니 '이상스럽고 영험스러워서 매우 기적 같은 경험이 많다'고 했다.

 

戊子五年鑄圓孔貝錢. 秋八月夏人來獻方物求神書而去 十月朝野別記書于石以公于民. 庚寅七年 設造船于薩水之上. 壬寅十九年夏主相失德 帝命息達率藍眞弁三部之兵往征之 天下聞之乃服. 辛酉三十八年六月帝崩 羊加丘乙立.

무자오년주원공패전. 추팔월하인래헌방물구신서이거 시월조야별기서우석이공우민. 경인칠년설조선우살수지상. 임인십수년하주상실덕 제명식달솔남진변삼부지병왕정지 천하문지내복 신유삽십팔년유월제붕 영가구을립.

 

무자 5년 구멍 뚫린 조개모양의 돈을 만들었다. 가을 8월에는 하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를 구해갔으며 10월엔 조정과 백성의 구별을 돌에 새겨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경인 7년 배 만드는 곳을 살수의 상류에 설치했다. 임인 19년 하나라 왕 상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단제께서는 식달에게 명하여 람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신유 386월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양가 구을이 즉위하였다.

 

五世 檀君 丘乙 在位十六年

 

壬戌元年命築壇于太白山遣使致祭 癸亥二年五月蝗大作遍滿田野. 帝親巡田野呑蝗而告三神使滅之數日盡滅. 乙丑四年始用甲子作曆 己巳八年身毒人流漂到東海濱. 丁丑十六年親幸藏唐京封築三神壇多植桓花. 七月帝南巡歷風流江到松壤 得疾尋崩葬于大博山. 牛加達門被選於衆入承大統.

임술원년명축단우태백산견사치제. 계해이년오월황대작편만전야. 제친순전야탄황이고삼신사멸지수일진멸. 을축사년시용갑자작력 을사팔년신독인유표도동해빈. 정축육년친행장당경봉축삼신단다식환화. 칠월제남순역풍류강도송양 득질심붕장우대박산 우가달문피선어중인승대통.

 

 

임술 원년(BC 2099) 명을 내려 태백산에 단을 쌓고 사자를 보내 제를 올리게 하다. 계해 25월 황충의 떼가 크게 일어나 온통 밭과 들에 가득 찼다. 단제께서 친히 황충이 휩쓸고 간 밭과 들을 둘러보시고는 삼신에게 고하여 이를 없애주기를 비니, 며칠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을축 4년 처음으로 60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다. 기사 8년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하다.정축 16년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셔서 삼신의 단을 봉축하고 많은 환화를 심다. 7월 단제께서 남쪽을 순수하사 풍류강을 건너 송양에 이르러 병을 얻으시니 곧 붕어하시어 대박산에 묻혔다. 우가인 달문이 뭇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계승하였다.

 

* 桓花: 무궁화??? 무궁화 자생지는 중국 남부지역이다. 만약 고조선의 발원이 흔히 말하는 북부지역이라면???

 

六世 檀君 達門 在位三十六年

 

戊寅元年壬子三十五年會諸汗于常春祭三神于九月山. 使神誌發理作誓效詞 其詞曰 朝光先受地三神赫世臨. 桓因出象先樹德宏且深 諸神議遣雄 承詔始開天. 蚩尤起靑邱 萬古振武聲 淮岱皆歸王. 天下莫能侵 王儉受大命 聲動九桓.

무인원년임자삼십오년회제한우상춘게삼신우구월산. 사신지발리작서효사 기사왈 조광선수지삼신혁세임환인 출상수덕굉차심 제신의견웅 승조시개천. 치우기청구 만고진무성 회대개귀왕 천하막능침 왕검수대명 성동구환.

 

무인원년임자삼십오년 모든 =지도자들을 구월산 3신에게 드리는 제사 상춘제에 모이게 하였다. 신지인 발리로 하여금 서요사를 짓게 하였는데 내용은 아침해를 먼저 받는 땅에 삼신께서 새로운 세상을 위해 임하셨네. 환인께서 먼저 모습을 드러내시고 덕을 심으시니 넓고 깊도다. 뭇 신명들이 의논하여 환웅을 파송하는 조서를 주어 처음으로 새 세상을 열었네. 치우는 청구에서 일어나 만고에 무력으로 명성을 떨치니, 회대지방이 치우천왕에게 귀속되었고 천하는 능히 넘볼수 없었더라. 왕검은 대명을 받았으니 그 명성은 구한을 움직이더라.

 

魚水 民其蘇草 風德化新. 怨者先解 怨病者先去病 一心存仁孝 四海盡光明. 眞韓鎭國中治道 咸維新慕韓. 保其左番韓 控其南岩圍四壁.

어수 민기소초 풍덕화신 원자선해 원병자선거병 일심존인효 사해진광명. 진한진국중치도함유신모한 보기좌번한 공기남암위사벽.

 

물과 고기같이 백성과 素草의 관계처럼 덕으로 새롭게 하시니 원망을 먼저 풀고 병을 먼저 재거하여 오직 어짊과 효의 한 마음으로 사해 모두를 밝히셨다. 진한은 나라 안을 (단군)을 사모하는 마음을 합쳐 새롭게 다스렸다. 번한이 그를 남쪽을 바위로 벽을 두르듯 보좌했다.

 

聖主幸新京 如秤錘極器 極器白牙岡秤蘇密郞錘者安德鄕 首尾均平位賴. 德護神精興邦保太平朝 降七十國 永保三韓義 王業有興隆興廢 莫爲說誠 在事天神.”

성주행신경여칭추극기 극기백아강 칭소밀랑 추자안덕향. 수미균평위뢰덕호신정흥방보태평조강 칠십국영보삼한의 왕업유흥륭흥폐 막위설성 재사천신.”

 

성스러운 단군님께서 새 수도를 순행하실 때 마치 저울과 저울추와 저울 접시같이 하시니 접시는 백아강이요 저울은 소밀랑이요 추는 안덕향이라 앞뒤가 신뢰할 만하게 균형이 잡히고 덕은 신명의 깨끗함으로 나라를 발전시키고 조정이 평안하게 되었다. 투항해온 70국이 3한의 정의를 지키니 왕업의 흥폐는 말과 정성에 달린게 아니라 오직 하늘님을 섬김에 있다.”

 

乃與諸汗立約束曰 凡我同約之人 以桓國五訓神市五事爲永久遵守之案. 祭天之儀以人爲本爲邦之道 以食爲先 農者萬事之本 祭者五敎之源 宜與國人共治爲産.”

내여제한립약속왈 범아동약지인 이환국오순신시오사위영구준수지안. 제천지의이인위본위방지도

 

마침내 뭇 한들과 약속을 세우시사 말씀하시기를 '무릇 우리는 약속의 사람들이니 한국의 오훈, 신시의 오사를 영원히 지켜나갈 법으로 삼는다.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은 사람과 무리들의 근본 도리요 먹고살자면 농사가 만사의 근본이며 제사는 5가르침의 근원이니 마땅히 국인 모두 산업을 함께해야 한다(교역).

 

先講重族次宥囚 竝除死刑 責禍保境 和白爲公專 以一施共和之 心謙卑自養以爲仁 政之始也. 時執盟貢幣者 大國二 小國二 十墟落三千六百二十四. 癸丑三十六年帝崩 羊加翰栗立.

선강중족차유수 병제사형 책화보경 화백위공전 이일시공화지 심겸비자양이위인 정지시야. 시집맹공폐자 대국이 소국이 십허락삼천육백이십사. 계축삼십육년제붕 양가한율립.

 

먼저 겨레가 소중함을 가르치시고는 다음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아울러 사형제도를 없애시고 책화법으로 경계를 보호하시고 화백의 결정을 전파하여 서로 화합하고 마음은 겸허히 낮추며 자신을 길러 어짊에 이르는 것이 정치의 시작이다. 이 때에 동맹을 맺어 공물을 바쳤던 곳은 대국이 둘이요 소국이 스물이요 부락이 3624곳이었다. 계축 36년 단제께서 돌아가시니 양가인 한율이 즉위하였다.

 

七世 檀君 翰栗 在位五十四年

 

甲寅元年丁未五十四年帝崩于西翰立.

갑인원년정미오십사년제붕우서한립.

 

갑인 원년(BC 2047) 정미 54년 단제가 붕어하시고 우서한이 즉위하다.

 

八世 檀君 于西翰(或曰烏斯含) 在位八年

 

戊申元年定二十稅一之法 廣通有無以補不足 己酉二年是歲豊登有一莖八穗.

무신원년정이십세일지법 광총유무이보부족 기유이년시세풍등유일경팔수.

 

무신 원년(BC 1993) 이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서로 보충하도록 하였다. 기유 2년 이 해는 풍년이 들어 벼 한 포기에 여덟개의 이삭이 맺혔다.

 

辛亥四年 帝以微服潛出國境 視察夏情而還 大改官制. 甲寅七年三足烏飛入苑 中其翼廣三尺. 乙卯八年帝崩太子阿術 述立.

신해사년 제이미복잠출국경 시찰하정이환 대개관제. 갑인칠년삼족오비입원 중기익광삼척. 을묘팔년 제붕태자아술술립.

 

신해 4년 단제께서 옷을 바꿔 입으시고 몰래 궁궐을 나서서 하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돌아와 관제를 크게 고쳤다. 갑인 7년 세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을묘 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인 아슬이 즉위했다.

 

九世 檀君 阿述 在位三十五年

 

丙辰元年 帝有仁德 民有犯禁者. 必曰 糞地雖汚降雨露有時置而不論犯禁者 乃化其德淳. 之化大行 是日兩日竝出觀者如堵. 丁巳二年靑海褥薩于捉擧兵犯闕 帝避于常春創新宮于九月山南麓 命遣于支于栗等討誅之 後三年還都. 庚寅三十五年帝崩牛 加魯乙立.

병진원년 제유인덕 민유범금자. 필왈 분지수오항우로유시치이불론범금자 내화기덕순. 지화대행 시일양일병출관자여도. 정사이년청해욕살우착거병범궐 제피우상춘창신궁우 구월산남록 명견우지우율등토주지 후삼년환도. 경인삼십오년제붕 우가노을립.

 

병진 원년(BC 1985) 단제께서는 어진 덕이 있으시사 백성이 금지하는 법을 위반하는 자가 있어도 반드시 말씀하시길 '똥 눈 땅이 비록 더럽다고 해도 비나 이슬이 내릴때도 있는 법이다.'하시며 그 죄진자를 그냥 놔 두시고는 벌하지 않으셨으니, 죄를 졌던 사람도 마침내 그 덕에 감화되어 버렸다. 이에 잘 조화된 교화가 크게 떨쳐졌다. 이날 두개의 태양이 나란히 나와 이를 보는 자 마치 담벼락처럼 많았다. 정사 2년 청해의 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니 단제께선 구월산의 남쪽기슭에 지은 상춘궁으로 몸을 피하신후, 우지와 우율등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벌하시도록 하시고는 삼년 뒤에야 서울로 되돌아 오셨다. 경인 35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 노을이 즉위하였다.

 

十世 檀君 魯乙 在位五十九年

 

辛卯元年 始作大囿 養畜外之獸. 任辰二年 親臨墟落存問 駕停野外 賢者多歸之. 乙未五年 宮門外 設伸寃木 以聽民情 中外大悅.

신묘원년 시작대유 양축외지수. 임진이년 친임허락존문 가정야외 현자다귀지. 을미오년 궁문외 설신원목 이청민정 중외대열.

 

신묘 원년(BC 1950) 처음으로 큰 동물우리를 만들어 가축 이외의 짐승들을 길렀다. 임진 2년 몸소 마을로 행차하셔서 안부를 물으셨는데, 어가가 야외에 머무르니 현자들이 많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을미 5년 궁문 밖에 신원목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으시니 모든 이들까지 크게 기뻐했다.

 

丙午十六年東門外十里陸地生蓮不咸 臥石自起. 天河神龜負圖而現 圖如柶板. 渤海沿岸 金塊露出 數量十有三石. 乙丑三十五年 始置監星. 己丑五十九年 帝崩太子道奚立.

병오십육년동문외십리육지생연불함 와석자기. 천하신구부도이현 도여사판. 발해연안 금괴노출 수량십유삼석, 을축삼십오년 시치감성, 을축오십구년 제붕태자도해립.

 

병오 16년 동문밖 십리의 (못이 아닌)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 줄 모르고, 누워있던 돌들이 저절로 일어섰다. 천하(天河또눈 天海)에서 거북이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윷판과 같은 것이었다. 발해 연안에서 금덩이가 나왔는데 수량이 13섬이었다. 을축 35년 처음으로 감성(별 관측소)을 두었다. 기축 59년 단제가 붕어하시고 태자 도해가 즉위하였다.

 

十一世 檀君 道奚 在位五十七年

 

庚寅元年 帝命五加擇十二名山之最勝處 設國仙蘇塗. 多環稙檀樹 擇最大樹 封爲桓雄像 而祭之名雄常 國子師傳有爲子獻策曰 惟我神市 實自桓雄開天 納衆以佺設戒而化之.

경인원년 제명오가 택십이명산지최승처 설국선소도. 다환식잔수 택최대수위환웅상 이제지명웅상. 국자사부유위자헌책왈 유아신시 실자환웅개천 납중이전 설계이화지.

 

경인 원년(BC 1891) 단제께서는 오가에게 명을 내려 열두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셨다. 많은 박달나무를 둘러 심은 후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지내며 웅상이라 이름했다. 이 때 국자랑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가 계책을 올려 말하길, “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신시는 실로 환웅천왕께옵서 개천하시고 무리를 거두심에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세워서 백성들을 교화하셨습니다.

 

天經神誥詔述於 上衣冠帶 樂效於下民 無犯而同治野 無盜而自安擧世之 人無疾而自壽 無而自裕. 登山而歌迎月而舞 無遠不至 無處不興 德敎加於萬民 頌聲溢於四海.” 有是請.

천경신고조술어상의관대악효어하민 무범이동치야 무도이자안거세지 인무질이자수무이자유. 등산이가영월이무 무원부지 무처불흥 적화가어만민 송성일어사해.” 유시청.

 

천경신고에 보면 상의관대에 대해 조칙을 내렸고 음악이 백성들에게 효험있으니 음악이 있으면 범죄가 없어지고 야만인들도 다스려지고, 도둑이 없어져 세상이 편안해지니 사람들은 무병하고 장수하게 되고 자기의 부요함이 없어지니 산에 올라 노래로 달을 맞아 춤추는 것이 멀리 퍼지고 흥하지 않는 곳 없게 됩니다. 덕이 넘치는 가르침이 만백성에게 주어지면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에 넘치게 됩니다.” 이를 청합니다.

 

冬十月命建大始殿極壯麗 奉天帝桓雄遺象. 而安之頭上 光彩閃閃如 大日有圓 光照耀宇宙. 坐於檀樹之下 桓花之上 如一眞神有圓心. 持天符印 標揭大圓一之. 圖於樓殿立 號居發桓 三日而戒七日而講 風動四海.

동시월명건대시전극장려 봉천제환웅유상. 이안지두상 광채섬섬여 대일유원 관조요우주. 좌어단수지하 환화지상 여일진신유원심. 지천부인 표게대원일지. 도어누전립 호거발한 삼일이계칠일이강 풍동사해.

 

겨울 10월에 대시전을 장려하게 세우라하고 천제환웅의 모습을 받들도록 하였는데 머리 위에 광채가 빛나도록 하였는데 태양이 둥글고 광채가 빛나 우주를 밝히시는 모양을 묘사한 것이요. 단수 아래 환화 위에 앉은 모양으로 진신=환웅이 둥근 마음을 가지시고 천부인으로 큰 너그러움을 설법하는 걸 표하게 했다. 대시전을 지은 의도는 말하자면 환에 거하며 환을 드러내라는 뜻이니 3일간 계(수도:참선)하고 7일간 설법하는 것인데 이런 방식이 사해(세상)에 유행처럼 번졌다.

 

其念標之文曰 天以玄默爲大 其道也普圓 其事也眞一. 地以蓄藏爲大 其道也效圓 其事也勤一. 人以知能爲大 其道也擇圓 其事也協一 故一神降衷 性通光明 在世理化 弘益人間.’ 仍刻之于石.

기념표지문왈 천이현묵위대 기도야보원 기사야진일. 지이축장위대 기도야효원 기사야근일 인이지능위대 기도야택원 기사야협일 고일신강층. 성통광명 재세이화 홍익인간. 잉각지우석.

 

염표문(憲章: 공동 선언)

 

하늘은 크고 의연하니 위대하니 그 도리는 원만하고 보편적이며 기 섬기는 바는 참된 하나이다.

땅은 모든 걸 저장하고 기르시니 위대하시니 그 도리는 효율적인 너그러움이니 그 섬김은 오직 힘씀이다.

인간의 지능은 위대하니 그 도리는 원만한 선택으로 협력하여 하나됨이니 하나님이 올바로 강림하신 것이요

하나님의 본성은 빛=지혜로 통하고 세상에 임재하여 다스리고 변화시키시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게된다.‘ 따라서 이를 돌에 새겨둔다.

 

丁巳二十八年設所 而聚方物 以閱珍奇 天下之民 爭獻陳設如山. 丁卯三十八年 徵民丁 皆爲兵送 選士二十人于夏都 始傳國訓 以示威聲.

정사이십팔년설소 이취방물 이열진기 천하지민 쟁헌진설여산. 정묘삼십팔년 징민정 개위병송 선사이십인우하도 시전국훈 이시위성.

 

정사 28년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의 물건들을 모으사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방물을)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 정묘 38년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용사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國勳=염표문)을 전파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乙亥四十六年 設作廳于松花江岸 舟楫器物 大行于世. 三月 祭三神于山南 供酒備膳致詞而醮之.

을해사십팔년 설작청우송화강안 주즙기물 대행우세. 삼월 제삼신우산남 공주비선치사이초지.

 

을해 46년 송화강가에 관아를 세워 배와 노등 여러가지 물건을 만드니 세상에 퍼졌다. 3월에 삼신의 단을 산의 남쪽에서 제사지냈으니 술과 음식을 갖추어 제를 올리고 서로 격려하는 재를 올렸다.

 

是夜 特賜宣醞 與國人環飮觀百戱. 罷臟樓殿 論經演誥 顧謂五加曰 自今以後 禁殺放生 釋獄飯丐 竝除死刑.” 內外聞之 大悅. 丙戊五十七年 帝崩 萬姓慟之如考 喪三年憂 四海停聲樂. 牛加阿漢立.

시야 특사선온 여국인환음관백희. 파장루전 논경연고 고위오가왈 자금이래 금살방생 석옥반개 병제사형.” 내외문지 대열. 병술오십칠년 제붕 만성통지여고 상삼년우 사해정성악. 우사아한립.

 

그날 밤 특별히 널리 술을 하사하시어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술잔을 돌려가며 술을 마시면서, 여러가지 재주를 관람하시었다. 이 자리가 끝나자 마침내 누각에 오르셔서 천부경에 대하서 논하시고 삼일신고를 강연하시더니 오가를 돌아보시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며 죄수를 사면하고 거렁뱅이에게 밥을 주어 살 수 있도록 하며 더불어 사형제도를 없애노라.” 이에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병술 57년 단제가 붕어하시니 만백성이 이를 슬프게 여김이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함과 같아서, 삼년동안 근신하며 온 누리에 음악, 노래소리가 끊겼다. 뒤를 이어 牛加 아한이 즉위하다.

 

* 念標文,

* 大始展(환웅을 모신 전=대웅전: 말 그대로 桓雄)

삼국 유사에 前佛시대란 말이 자주 보이는데... 이는 이런 大始展과 그 桓雄象의 모습이 佛象과 비슷한 데서 나온듯... 光背桓花座.....

다만 오늘날은 환화좌가 어닌 연화좌란 차이는 있다.

더구나 오늘날 개천절에 단군 상을 거는 것은 본 의미상 환웅상으로 바꿔야 옳을 듯....

 

十二世 檀君 阿漢 在位五十二年

 

丁亥元年戊子二年夏四月 一角獸見於松花江北邊. 秋八月 帝巡國中至遼河之左. 立巡狩管境碑 刻歷代帝王名號而傳之. 是金石之最也 後滄海力士黎洪星過此 題一詩曰:

정해원년무자이년하사월 일각수현어송와강북변. 추팔월 제순국중지요하지좌. 입순수관경비 각역대제왕명호이전지. 시금석지최야 후창해역사여롱성과차 제일시왈:

 

정해 원년(BC 1834) 무자 2년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가을 8월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였는데 요하의 동쪽에 이르러 순수관경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금석문의 가장 백미라, 뒤에 창해역사 여홍성은 이 비석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村郊稱弁韓 別有殊常石臺 荒紅字沒 苔碧生於剖 判初立了 興亡夕文 獻俱無徵 此非檀氏跡

촌교칭변한 별유수상석대 황홍자몰 태벽생어부 판초립료 흥망석문 헌구무징 차비단씨적.

 

마을 밖 변한이라 이르는 곳에 유별한 석대가 있는데 거칠고 붉게 변해 글자는 보이지 않고 갈라진 틈새로 이끼만 푸르르니

처음 세워졌다 무너지고 글자는 저물어 없어져 아무런 징조도 없으니 이 어찌 단군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乙卯二十九年 命菁莪褥薩丕信 西沃沮褥薩高士 琛貊城褥薩突盖 封爲列汗. 戊寅五十二年 帝崩 牛加屹達立.

을묘십구년 명청아욕살비신 서옥저욕살고사 침맥성욕살돌개 봉위열한. 무인오십이년 제붕 우가흘달립.

 

을묘 29년 청아의 욕살 비신과 서옥저의 욕살인 고사침과 맥성의 욕살 돌개를 봉하여 왕으로 삼으셨다. 무인 52년 단제가 붕어하고 우가 홀달을 세웠다.

 

十三世 檀君 屹達(一云代音達) 在位六十一年

 

己卯元年 甲午十六年 定州縣立分職之制. 官無兼權 政無越則 民無離鄕 自安所事 絃歌溢域. 是歲冬 殷人伐夏 其主桀請援. 帝以邑借末良率九桓之師 以助戰事 湯遣使謝罪. 乃命引還 桀違之遣兵 遮路欲敗. 禁盟遂與殷人伐桀 密遣臣智于亮 率軍合與樂浪 進據關中 岐之地而 居之設官制.

기묘원년 갑오십육년 정주현립분직지제. 관무겸권정 무월즉 민무이향 자안소사 현가일역. 시세동 은인벌하 기주걸청원 제이읍차말량솔구환지사 이조전사 탕견사사죄. 내명인환 걸위지견병 차로욕패. 금맹수여은인벌걸 밀견신지우량 솔군합여낙랑 진거관중 기지지이 거지설관제.

 

기묘 원년(BC 1782)갑오 16년 주와 현의 경계를 정하고 직책의 한계를 정하였다.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 없고 정사에 월권하지 않으니 백성은 고향을 떠나는 일 없이 제 자리에서 편안하여,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넘쳤다. 이 해 겨울에 은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홀달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한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의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낙랑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땅에 들어서서 진치고 길을 막아 관청을 설치하였다.

 

戊戌二十年 多設蘇塗植天指花. 使未婚子弟讀書習射 號爲國子郞. 國子郞 出行頭揷天指花 故時人稱爲天指花郞. 戊辰五十年 五星聚婁 黃鶴來棲苑松. 己卯六十一年 帝崩 萬姓絶食而哭不絶. 仍命釋囚禁殺放生 過歲而葬之 牛加古弗立.

무술이십년 다설소도식천지화. 사미혼자제독서습사 호위국자랑. 국자랑 출행두삽천지화 고시인칭위천지화랑. 무진오십년 오성취루 황학래서원송. 기묘육십일년 제붕 만성정식이곡부절. 잉명석수금살방생 과세이장지 우가고불립.

 

무술 20년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 무진 505(태양계 5)婁星(양자리)에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기묘 61년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백성들은 모두 밥도 먹지 않았으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명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하고 산 것을 죽이지 않으며 널리 놓아주도록 하였다. 해를 넘겨 장사지낸 후 우가 고불이 즉위하였다.

 

十四世 檀君 古弗 在位六十年

 

庚辰元年 乙酉六年 是歲大旱. 帝親禱天祈雨 誓告于天曰 天雖大 無民何施 雨雖膏無穀何貴? 民所天者穀 天所心者人也 天人一體 天何棄民? 乃雨滋穀濟化.” 以時言訖 大雨立降數千里.

경진원년 을유육년 시세대한. 제친도천기우 서고우천왈 천수대 무민하시 우수고무곡하귀? 민소천자곡 천소심자인야. 천인일체 천하기민? 내우자곡제화" 이시언흘 대우립간수천리.

 

경진 원년(BC 1721)을유 6년 이해에 큰 가뭄이 있었다. 단제께서 몸소 하늘에 기도하여 비오기를 빌며 말씀하시길, “하늘이 위대하지만 백성이 없으면 무엇에게 베풀 것이며 비는 기름지다 하나 곡식이 없으면 어찌 귀하리오.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중심으로 여기는 것은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은 일체일진대 하늘은 어찌하여 백성을 버리시는가? 이제 비를 내려 곡식을 기름지게 하여 제민하소서라고 말을 마치자 큰 비가 수천리에 장대처럼 내렸다.

 

辛酉四十二年九月 枯木生芽 五色大鷄生於城東子村家 見者誤指爲鳳. 乙亥五十六年 遣官四方 査計戶口 總一億八千萬口. 己卯六十年 帝崩代音立.

신유사십이년구월 고목생아 오색대계생어 성동자가 견자오지위봉. 을해오십육년 견관사방 사계호구 총일억팔천만구. 기묘육십년 제붕 대음립.

 

신유 429월 말라 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 닭이 성의 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 을해 56년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게 하니 총계 18천만명이었다. 기묘 60년 단제가 붕어하시고 대음이 즉위하였다.

 

十五世 檀君 代音(一云後屹達) 在位五十一年

 

庚辰元年 殷主小甲 遣使求和 是歲改八十稅一之制. 辛巳二年 洪水大漲 民家多被害 帝甚憐恤移其栗於蒼海蛇水之地 均給于民. 冬十月 養雲須密爾二國人來獻方物. 己丑十年 帝西幸弱水 命臣智禹栗採金鐵及膏油. 秋七月 虞婁人二十家來投 命定着于鹽水近地. 丁未二十八年 帝登太白山立碑 刻列聖群汗之功. 己未四十年 封皇弟代心 爲南鮮卑大人. 庚午五十一年 帝崩 牛加尉那立.

경진원년 은주소갑 견사구화. 시세개팔십세일지제. 신사이년 홍수대창 민가다피해. 제심인휼 이기속어창해사수지지 균급우민. 동시월 양운수밀이이국인래헌방물. 을축십년 제서행약수 명지신우속채금철급고유. 추칠월 우루인이십가래투 명정착우염수근지. 정미이십팔년 제등태백산립비 각열성군한지공. 기미사십년 봉황제대심 위남선비대인. 경오오십일년 제붕 우가위나립.

 

경진 원년(BC 1661) 은나라 왕 소갑이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구했다. 이 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신사 2년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다. 이에 단제께서는 매우 불쌍하게 여기셔서 곡식을 창해사수(지명이라기 보다 물이 가득차고 뱀처럼 흐르는 상황 묘사로 봄이 옳다)의 땅으로 옮겨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셨다. 겨울 10월 양운국과 수밀이국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기축 10년 단제께서는 서쪽으로 약수로 순행하여 신지 우속에게 명하여 금철 및 고유(등잔기름)를 채취하도록 했다. 가을 7월 우루국 사람 20인이 투항해 오니 염수(소금물=사해? 보다는 염수로 불리는 작은 강) 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명하였다. 정미 28년 단제께서는 태백산에 오르사 비석을 세워 역대 들의 이름과 공적을 새겼다. 기미 40년 단제의 동생 대심을 남선비의 대인으로 봉하였다. 경오 51년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우가 위나가 즉위하였다.

 

十六世 檀君 尉那 在位五十八年

 

辛未元年 戊戌二十八年 會九桓諸汗于寧古塔 祭三神上. 帝配桓因桓雄蚩尤及檀君王儉 而亨之五日 大宴興衆 明燈守夜唱經踏庭 一邊列炬 一邊瓊舞 濟

唱愛桓歌.

신미원년 무술이십팔년 회구환제한우영고탑제삼신상. 제베환인환웅치우급간군왕검 이향지오일 대연흥중 명증수야창경답정 일변열거 일병경무 제창애한가.

 

신미 원년(BC 1610)무술 28년 구한=9의 여러 한=지도자들을 영고탑에 모아 삼신과 상제에게 제사지냈다. 왕이 환인 환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배치하고 닷새 동안 크게 백성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혀 밤을 지새며 경을 외우고 마당밟기를 하였다. 한쪽은 횃불을 들고 또 한 쪽은 아름다운 춤을 추며 애한의 노래를 불렀다.

 

愛桓卽古神歌之類也. 先人指桓花而不名直曰 花愛桓之歌有云 山有花山有花 去年種萬樹 今年種萬樹 春來不咸花萬紅 有事天神 樂太平.”

애한즉고신가지유야. 선인지환화이불명식왈 화애환지.” 가유운 산유화산유화 거년종만수 금년종만수 춘래불함화만홍 유사천신 요태평.”

 

애한이란 옛날 신에게 올리는 노래의 종류를 말함이다. 선인들은 환화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다만 꽃은 환을 사랑한다.”라고만 하였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고 온 산엔 붉은 빛으로 물들면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戊辰五十八年 帝崩 太子余乙立,

무진오십팔년 제붕 태자여을립.

 

무신 58년 단제가 붕어하시고 태자 여을이 즉위하였다.

 

十七世 檀君 余乙 在位六十八年

 

己巳元年 庚申五十二年 帝與五加歷巡國中至蓋斯城之境有靑袍老人獻賀曰 長生仙人之國 樂爲仙人之氓 帝德無愆 王道無偏 民兮隣兮 不見愁苦 責禍以信 管境以恩 城兮國兮 不見戰伐. 帝曰 嘉納嘉納 朕之修德日淺 恐無以報民之與望.” 丙子六十八年 帝崩 太子冬奄立.

기사원년 경신오십이년 제여오가역순국중지개사성지경 우청포노인헌하왈 장생선인지국 낙위선인지맹 제덕무연 왕도무쳔민혜인혜 불견수고 책화이신 관경이은 성혜숫혜 불견전벌. 제왈 가납가납 짐지수덕일천 공무이보민지여망. 병자육십팔년 제붕 태자동암립.

 

기사 원년(BC 1552)갑신 52년 단제께서는 5가와 함께 나라를 돌아보셨는데, 개사성의 근처에 이르니 푸른 도포를 입은 노인이 있어 하례를 드려 말했다. “오래 선인의 나라에 살며 선인의 백성이 되어 살고 있지만 단제의 덕은 두루 미쳐 그르침 없고 왕의 다스림은 편벽되지 않고 백성들은 이웃에서 수심 고통을 보지 못했고 신뢰할 만한 책화법과 경계를 지키는 은혜로 성과 무리가 전쟁을 겪지 않았습니다.” 이에 단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기쁘게 받아들입니다만 짐이 덕을 닦은지 오래지 못해 백성들의 바람에 답하지 못할까 두렵게 여기노라.” 병자 68년 붕어하시고 태자 동엄이 즉위하였다.

 

十八世 檀君 冬奄 在位四十九年

 

丁丑元年 丙申二十年 支伯特人來獻方物 乙丑四十九年 帝崩 太子緱牟蘇立.

정축원년 병신이십년 지백특인래헌방물 을축사십구년 제붕 태자구모소립.

 

정축 원년(BC 1484) 병신 20년 지백특 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을축 49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구모소가 즉위하였다.

 

十九世 檀君  牟蘇 在位五十五年

 

丙寅元年 己丑二十四年 南裳人入朝. 己未五十四年 支離叔作周天曆八卦相重論. 庚申五十五年 帝崩牛加固忽立.

병인원년 을축이십사년 남상인입조. 기미오십사년 지리숙작주천역팔괘상중론. 경신오십오년 제붕 우가고홀립.

 

병인 원년(BC 1435) 기축 24년 남상인이 벼슬을 얻어 조정에 들어 왔다. 기미 54년 지리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 을 지었다. 경신 55년 단제가 붕어하시고 우가 고흘이 즉위하였다.

 

二十世 檀君 固忽 在位四十三年

 

辛酉元年 辛未十一年 秋 白日貫虹. 丙申三十六年 修築寧古塔作離宮 庚子四十年 共工工忽製獻九桓地圖. 癸卯四十三年 四海未寧而帝崩太子蘇台立. 신유원년 신미십일년 추백일관홍. 병신삼십육년 수축영고탑 작이궁. 경자사십년 공공공홀제헌구한지도. 계묘사십삼년 사해미녕이제붕 태자소태립.

 

신유 원년(BC 1380) 신미 11년 가을 하얀 태양이 무지개를 뚫었다. 병신 36년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 경자 40년 공공인 공흘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계묘 43년 세상이 아직 평화롭지 못한데 단제가 붕어하시니 태자 소태가 즉위하였다.

 

二十一世 檀君 蘇台 在位五十二年

 

甲辰元年 殷主小乙遣使入貢. 庚寅四十七年 殷主武丁旣勝鬼方 又引大軍 侵攻索度令支等國 爲我大敗 請和入貢. 壬辰四十九年 蓋斯原褥薩高登 潛師襲鬼方減之 一群養雲二國遣使朝貢. 於是高登手握重兵 經略西北地 勢甚强盛. 遣人請爲右賢王. 帝憚之不允 屢請乃許 號爲豆莫婁.

갑진원년 은주소을견사입공. 경인사십칠년 은주무정지승귀방 우인대군 침공색도영지등국 위아대패 청화입공. 임진사십구년 개사원욕살고등 참사습귀방멸지 일군영운이국견사조공. 어시고등수악중병 경략서북지 세심강성. 견인청위우현왕. 제탄지불윤 누청내허 호위두막루.

 

갑진 원년(BC 1337) 은나라왕 소을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경인 47년 은나라왕 무정이 귀방(동북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영지등의 무리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임진 4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 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단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치 않으려 했는데 거듭하여 이를 청하매 허락하여 두막루라 부르도록 하였다.

 

乙未五十二年 右賢王高登薨 基孫索弗婁襲爲右賢王. 帝巡狩國中南至海城 大會父老祭天歌舞. 仍召五加與之議傳位. 自謂老倦于勤欲委政於徐于餘. 環薩水百里而封之命爲攝主 號曰奇首. 右賢王聞之遣人勸帝止之 帝綜不聽. 於是右賢王率左右及獵戶數千遂卽位于夫餘新宮. 帝不得已傳玉冊國寶 廢徐于餘爲庶人. 帝隱於阿斯達以終. 是歲伯夷叔齊亦以孤竹君之子 遜國而逃居東海濱力田自給.

을미오십이년 우현왕고등훙 기손색불루습위우현왕. 제순수국중남지해성 대회부노재천가무. 잉소오가여지의전위. 자위노권우근욕위정어서우여. 환살수백리이봉지명위섭주 호왈기수. 우현왕문지견인권제지지 제종불청. 어시우현왕솔좌우급렵호수천수즉위우부여신궁. 제부득이전옥책국보 폐서우여위서인. 제은어아사달이종. 시세백이숙제역이고죽군지자 손국이도거동해빈역전자급.

 

을미 52년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단제께서 나라안을 돌아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에 이르러 부로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리고는 오가를 불러 이들과 더불어 제위를 물려줄 것을 의논하셨는데 스스로는 늙어서 제위를 지키기 어렵다하시며 정치를 서우여에게 맞기고 싶어 하셨다. 이에 살수의 땅 백리를 에워싸서 이를 그에게 봉하시사 명을 내려 섭주(:대리 왕)로 하여 기수(奇首)라 부르게 하였다. 우현왕은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단제에게 권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으나 단제는 종래 이를 듣지 않으셨다. 이에 우현왕은 주변의 여러 사람들과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하였다. 단제도 어쩔수 없이 옥책 국보를 전하고 아사달에 은퇴하여 마침내 붕어하셨다. 이 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의 자손들로서 나라를 버리고 동해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아갔다.

 

二十二世 檀君 索弗婁 在位四十八年

 

丙申元年 帝命修築鹿山改官制. 秋九月親幸藏唐京立廟祀高登王. 十一月 親率九桓之師屢戰破殷都尋和又得大戰破之. 明年二月追至河上而受捷賀遷弁民于淮垈之地使之畜農國威大振.

병신원년 제명수축녹산개관제 추구월친행장당경입묘사 고등왕십일월 친솔구환지사누전파은도 심화우득대전파지 명년이월추하상이수첩하천변민우회대지지사지축농국위대진.

 

병신 원년(BC 1285) 단제 명하사 녹산을 개축시키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가을 9월엔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시어 묘를 세우고 고등왕을 제사지냈다. 11월 몸소 9한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차례 싸워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번한의 백성들을 회대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申丑六年 臣智陸右奏曰 阿斯達千年帝業之地 大運已盡 寧古塔王氣濃厚以勝於白岳山 請築城移之.” 帝不許曰 新都已宅更何他往?”

진축육년 신지육유주왈 "아사달천년제업지지 대운이진 영고탑왕기농후이승어백악산 청축성이지." 제불허왈 신도이댁셩하타왕?"

 

신축 6년 신지인 육우는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이 이미 다했으며 영고탑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 합니다. 청컨대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시옵소서'라고 상주하였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신도에 이미 집이 있는데 다시 어째서 옮길 것인가?'라고 하셨다.

 

乙卯二十年 至是藍國頗强與孤竹君逐諸賊南遷至 俺瀆忽居之近於殷境. 使黎巴達頒兵進據岐 與其遺民相結立國稱黎 與西戎雜處於殷家諸侯之間. 藍氏威勢甚盛皇化遠及恒山以南之地. 辛未三十六年 邊將申督因兵作亂. 帝暫避于寧古塔民多從之. 癸未四十八年 帝崩 太子阿忽立.

을묘이십년 지시남국파강여고죽군축제적남천지 암독홀거지근어은경. 시여파달반병진거기여기유신상결입국칭려 여서융잡처어은가제후지간. 남씨위세심성 황화원급항산이남지지. 신미삼십육년 변장신독인병작란. 제잠피우영고탑민다종지. 계미사십팔년 제붕 태자아홀립.

 

을묘 20년 이 때에 남국=藍夷가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이겨내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홀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기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남씨=藍夷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의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신미 36년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이끌고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단제가 한동안 영고탑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이 이에 따랐다. 계미 4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아흘이 즉위하였다.

 

二十三世 檀君 阿忽 在位七十六年

 

甲申元年 命皇叔固弗加治樂浪忽 遣熊乫孫與藍國君 觀南征之 兵置六邑於殷地 殷人相爭不決 乃進兵攻 破之. 秋七月誅申督還都命釋囚浮. 乙酉二年 藍國君今達與靑邱君句麗君會于周愷 合蒙古里之兵 所到破殷城柵深入奧地 定淮岱之地 分封蒲古氏於淹 盈古氏於徐邦 古氏於淮 殷人望風 煌怯莫敢近之. 戊子五年 召二韓及五加議停寧古塔移都事. 己亥七十六年 帝崩 太子延那立.

갑신원년 명황숙고불가치낙랑홀 견웅갈손여남국군 관남정지. 병치육읍어은지 은인상쟁불결내진병공파지. 추칠월주신독환도명석수부. 을유이년 남국군금달여청구군구려군뢰우주개합몽고리지병소도파은성책십입오지 정회대지지 분봉포고씨어엄 영고씨어제서방 고씨어회 은인망풍 황겁 막감근지. 무자오년 소이한급오가의 정영고탑이도사. 기해칠십년 제붕 태자연나립.

 

갑신 원년(BC 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홀을 통치하도록 하고,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 정벌을 관장하게 하고 은나라 땅에 여섯읍에 병영을 설치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흩었다. 가을 7월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을유 2년 남국의 임금 금달과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하고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땅에 방고씨를 회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두려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무자 5二韓五加를 불러 영고탑으로 천도하는 논의를 중지하도록 하였다. 기해 76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연나가 즉위하였다.

 

二十四世 檀君 延那 在位十一年

 

庚子元年 命皇叔固弗加爲攝政 辛丑二年 諸汗奉詔 增設蘇塗祭天 國家有大事異災則輒禱之 定民志于一. 庚戌十一年 帝崩 太子率那立.

경자원년 명황숙고불가위섭정. 신축이년 제한봉조증설소도재천 국가위대사이재즉첩도지 정민지우일. 경술십일년 제붕 태자솔나립.

 

경자 원년(BC 1161) 황숙 고불가를 섭정으로 삼다. 신축 2년 여러 들이 임금의 영을 받들어 소도를 증설하여 하늘에 제사지냈으며, 나라에 큰일이나 이변이 있으면 오로지 기도하여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 경술 11년 단제가 붕어하시고 태자 솔나가 즉위하였다.

 

二十五世 檀君 率那 在位八十八年

 

辛亥元年 丁亥三十七年 箕徙居西華 謝絶人事. 丁酉四十七年 帝在上蘇塗講古禮因間 臣直臣之分. 三郞洪雲性進對曰 執理不屈者直臣也 畏威曲從者臣也.” 君源臣流源旣濁矣 流其求淸是爲不可 故君聖然後臣直. 帝曰 善哉. 己酉五十九年 田穀豊登 有一莖五穗之栗. 戊寅八十八年 帝崩太子鄒魯立. 신해원년 정해삼십칠년 기사거서화 사절인사. 정유사십칠년 제재상소도강소예인문 신즉신지분.” 삼랑홍운성진대왈 집리불굴자직신야 외위곡종자신야 군원신유원기독의. 유기구청시위불가 고군성연후신직.” 제왈 선재.” 기유오십구년 전곡풍등 유일경오혜지속 . 무인팔십팔년 제붕 태자추노립.

 

신해 원년(BC 1150) 정해 37년 기자(箕子)가 서화(西華)로 옮겨가면서 정치는 하지 않았다. 정유 47년 단제께서 상소도에 계시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의례를 강론하시다가 일반 신하와 직언하는 직신의 구분을 물으셨다. 이에 三郎 홍윤성이 나서서 대답했다. “이치를 지켜 굽히지 않는 자는 직신이옵고 위세를 두려워하여 굽혀 복종하는 자는 그냥 신하이오며 임금은 근원이요 신하는 흘러가는 물입니다. 근원이 이미 흐렸으면 그 흐름이 맑기를 구하여도 이것이 될 수 없는 일이니, 때문에 임금이 성인의 지혜를 지녀야 신하가 바른 법입니다.” 단제 가로되 옳다.”라 하였다. 기유 59년 밭 곡식에 풍년이 들어 한 줄기에 다섯개 이삭의 조가 있었다. 무인 8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추로가 즉위하였다.

 

二十六世 檀君 鄒魯 在位六十五年

 

己卯元年 秋七月 白岳山溪谷 白鹿二百作隊而來遊. 癸末六十五年 帝崩 太子豆密立.

기묘원년 추칠월 백악산계곡 백록이백작대이래유. 계미육십오년 제붕 태자두밀립.

 

기묘 원년(BC 1062) 가을 7월 백악산의 계곡에 흰사슴 200마리가 무리지어 와서 뛰놀았다. 계미 65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두밀이 즉위하였다.

 

二十七世 檀君 豆密 在位二十六年

 

甲申元年 天海水溢斯阿蘭山崩. 是歲須密爾國養雲國句茶川國 皆遣使獻方物. 辛卯八年 太旱之 餘大雨注下 民無收穫 帝命發倉周給. 己酉二十六年 帝崩 奚牟立.

갑신원년 천해수일사아란산붕. 시세수밀이국양운국구다천국 개견사헌방물. 신묘팔년 태한지여 대우주하 민무수확 제명발창주급. 기유이십육년 제붕 해모립.

 

갑신 원년(BC 997) 천해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해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신묘 8년 큰 가뭄 뒷끝에 큰 비가 쏟아지듯 내려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매, 단제가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기유 26년 단제 붕어하시니 해모가 즉위하였다.

 

二十八世 檀君 奚牟 在位二十八年

 

庚戌元年 帝有疾 使白衣童子禱天尋. 庚申十一年 夏四月 旋風大起暴雨注下 陸上魚類亂墜. 丁卯十八年 氷海諸汗遣使入貢. 丁丑二十八年 帝崩 摩休立.

경술원년 제유질 사백의동자도천심. 경신십일년 하사월 선풍대기폭우주하 육상어류난추. 정묘십팔년 빙해제한견사입공. 정축이십팔년 제붕 마휴립.

 

경술 원년(BC 971) 단제가 앓으시니 백의동자로 하여금 하늘에 기도하였다. 경신 11년 여름 4월 태풍이 크게 불고 폭우가 쏟아지는데 땅 위에 물고기가 쏟아져 내렸다. 정묘 18氷海의 뭇 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정축 28년 단제 붕어하시니 마휴가 즉위하였다.

 

二十九世 檀君 摩休 在位三十四年

 

戊寅元年 周人入貢. 乙酉八年 夏地震. 丙戌九年 南海潮水退三尺. 辛亥三十四年 帝崩 太子奈休立.

무인원년 주인입공. 을유파련 하지진. 병술구년 남해조수퇴삼척. 신해삼십사년 제붕 태자내휴립.

 

무인 원년(BC 943)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을유 8년 여름 지진이 있었다. 병술 9년 남해의 潮水3척이나 물러갔다. 신해 34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내휴가 즉위하였다.

 

三十世 檀君 奈休 在位三十五年

 

壬子元年 帝南巡 觀靑邱之政 刻石蚩尤天王功德. 西至奄瀆忽會分朝 諸汗閱兵祭天 與周人修好. 丙辰五年 凶奴入貢. 丙戌三十五年 帝崩 太子登兀立.

임자원년 제남순 관청구지정 각석치우천왕공덕. 서지암독홀회분조 제한열병제천 여주인수호. 병진오냔 흉노입공. 병술삼십오년 제붕 태자등올립.

 

임자원년 단제가 남이=청구의 정치를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는 엄독홀에 이르러 분조(임시 정부: 직속 정부)들과 회합하고 여러 제후=한들과 만나 열병하고 제천의식을 치루고 주나라 사람들과도 수교를 맺었다. 병진 5년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병술 35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등올이 즉위하였다.

 

三十一世 檀君 登兀 在位二十五年

 

丁亥元年 壬寅十六年 鳳鳴白岳麒麟來遊上苑. 辛亥二十五年 帝崩 子鄒密立.

정해원년 임인십육년 봉명백악기린래유상원. 신해이십오년 제붕 자추밀립.

 

정해 원년(BC 874) 임인 16년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상원=왕궁 정원에서 노닐었다. 신25년 단제가 붕어하시고 아들 추밀이 즉위하였다.

 

三十二世 檀君 鄒密 在位三十年

 

壬子元年 甲寅三年 鮮卑山酋長 們古入貢. 癸亥十二年 楚大夫李文起入朝. 甲子十三年三月 日蝕. 丙寅十五年 農作大饑. 辛巳三十年 帝崩 太子甘勿立.

임자원년 갑인삼년 선비산추장 문고입공. 계해십이년 초대부이문기입조. 갑자십삼년삼월 일식. 병인십오년 농작대기. 신사삼십년 제붕 태자 감물립.

 

임자 원년(BC 849) 갑인 3년 선비산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계해 12년 초나라 대부 이문기가 조정 회의에 참여했다. 갑자 133월에 일식이 있었다. 병인 15년 농사가 크게 흉작이었다. 신사 43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감물이 즉위하다.

 

三十三世 檀君 甘勿 在位二十四年

 

壬午元年 癸未二年 周人來獻虎象之皮. 戊子七年 寧古塔西門外甘勿山之下 建三聖祠 親祭有誓告文曰 三聖之尊 與神齊功 三神之德 因聖益大. 虛粗同體 個全一如. 智生雙修 形魂俱衍 眞敎乃立 信久自明. 乘勢以尊 回光反躬 截彼.

임진원년 계미이년 주인래런호상지피. 무자칠년 영고탑서문외감물산지라 건삼성사 친제유서고문왈 삼성지존 여신제공 삼신지덕 인성익대. 허조동체 개전일여. 지생쌍수 형혼구연 진교내립 신구자명 승세이존 회광반도궁 절피.

 

임오 원년(BC 819) 계미 2년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 무자 7년 영고탑 서문밖 감물산 밑에 삼성사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리며 맹세하며 “3(=환인 환웅 단군)의 존쉬함은 신의 공력이며 3신의 덕은 성인들로 인해 더욱 커진다. 비임과 빡빡함이 한 몸이니 모두 같은 것이다. 지혜와 삶이 하나로 수양되면 몸과 영혼의 지혜가 넘치나니 참된 가르침이 되고 믿음이 오래되면 스스로 밝아진다. 그 기세로 귀해지고 스스로를 돌아보아 다른 외부 것들을 다스리게 된다.

 

白岳萬古一蒼 列聖繼作 文興禮樂 規模斯大 道術淵宏. 執一含三 會三歸一 大演天戒 永世爲法. 乙巳二十四年 帝崩 太子奧婁門立.

백악만고일창 열성계작문흥례악 규모사대도술 연굉집일 함삼회삼귀일 대연천계영세위법. 을사이십사년 제붕 태자오루문립.

 

백악은 영원히 창대하듯 여러 성인들이 작업하여 지식이 예악을 흥하게 하고 규모가 이리 커지리니. 도술은 넒고 깊어진다. 3을 하나로 붙잡고 3을 하나로 집중하면 하늘계명을 크게 이루는 것이요 영원한 세상의 법이 되는 것이다. 을사 14년 단제가 붕어하고 태자 오루문이 즉위했다.

 

三十四世 檀君 奧婁門 在位二十三年

 

丙午元年 是歲五穀豊熟 萬姓歡康 作兜里之歌 其歌曰 天有朝暾 明光熙耀 國有聖人 德敎廣被 大邑國. 我倍達聖朝多 多人不見苛政 熙皞歌之長太平.

병오원년 시세오곡풍숙 만성환강 작도리지가 기가왈 천유조돈 명광희요 국유성인 덕교광피대읍국. 아배달성조다 다인불견가정 희호가지장태평.

 

병오 원년(BC 795) 이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백성들 모두 기뻐하며 도리가를 지어 부르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늘엔 아침 해가 밝게 비추고 무리에는 성인이 있어 닥과 가르침이 큰 도읍들에 널리 퍼지니 맑은 빛 내려 비추고 나라엔 어진이 큰 가르침 널리 내려와

우리 배달국엔 성인들의 정부가 많고 많아 사람들이 가혹한 다스림을 겪지 않았고 오랜 태평가를 부르네.

 

乙卯十年 兩日竝出 仍黃霧四塞. 戊辰二十三年 帝崩太子沙伐立.

을묘십년 양일병출 잉황무사색. 무진이십삼년 제붕 태자사벌립.

 

을묘 10년 두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무진 23년 단제가 붕어하시고 태자 사벌이 즉위하다.

 

三十五世 檀君 沙伐 在位六十八年

 

己巳元年(紀元1562) 甲戌六年(1567)是歲有蝗蟲大水壬午十四年(1575)虎入宮殿. 壬辰二十四年(1585)有大水山崩壞谷充塡. 戊午五十年(1611)帝 遣將彦波弗哈 平海上熊襲. 甲戌六十六年(1627)帝遣祖乙直穿燕都 與齊兵戰于臨淄之南郊告捷. 丙子六十八年(1629)帝崩太子賣勒立.

기사원녀 감술육년 시세유황충대수. 임오십사년 호입궁전. 임진이십사년 유대수산붕괴곡충전. 무오오십년 재견장언파불합 평해상웅습. 갑술육십육년 재견조을직천연도 여재병전우임치지남교고첩. 병자육십팔년 제붕 탸자매륵립.

 

기사 원년(BC 772) 갑술 6(개국 1567: 下同) 이 해에 황충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 임오 14년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 임진 24년 큰 비로 산이 무너져 골짜기를 메웠다. 무오 50년 단제께서 언파불합을 파견하여 물가 웅습족을 잠잠케하였다. 갑술66년 단제가 조을을 파견하여 연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병자 6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매륵이 즉위했다.

 

三十六世 檀君 賣勒 在位五十八年

 

丁丑元年(紀元1630) 甲辰二十八年(1657)有地震海溢. 戊申三十二年(1661)西村民家牛生八足犢. 辛亥三十五年(1664)龍馬出於天河 背有星文. 甲寅三十八年(1667)遣陜野侯裵幋命 往討海上. 十二月三道悉平. 戊辰五十二年(1681)帝遣兵與須臾兵伐燕. 燕人告急於齊 齊人大擧 入孤竹遇我伏兵 戰不利乞和而去. 甲戌五十八年(1687)帝崩太子麻勿立

정축 원년(BC 704) 갑진이십팔년 유지진해일. 무신삼십이년 서촌민가우생팔족독. 신해삼십오년 용마출어천하 배우성문. 갑인삼십팔년 견협야후배반명 왕토해상. 십이월삼도슬평. 무진오십이년 제견병여수유병벌연. 연인고급어제 제인대거 입고죽우아복병 전불리걸화이거. 갑술오십팔년 재붕 태자마물립.

 

갑진 28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무신 32년 서촌의 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신해 35년 용마가 천하가에 출현했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더라. 갑인 38년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물가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에는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무진 52년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을 만나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청하고는 물러갔다. 갑술 5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마물이 즉위하다.

 

三十七世 檀君 麻勿 在位五十六年

 

乙亥元年(紀元1688) 庚午五十六年(1743)帝南巡至淇水 崩太子多勿立.

을해원년 경오오십육년 재남순지기수 붕태자다물립.

 

을해 원년(BC 646) 경오 56년 단제께서는 남쪽을 돌아보시다가 기수에 이르러 붕어하시니 태자 다물이 즉위하다.

 

三十八世 檀君 多勿 在位四十五年

 

辛未元年(1744) 乙卯四十五年(1788)帝崩太子豆忽立.

신미원년 을묘사십오년 제붕 태자두홀립.

 

신미 원년(BC 590) 을묘 45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두홀이 즉위하다

 

三十九世 檀君 豆忽 在位三十六年

 

丙辰元年(1789) 辛卯三十六年(1824)帝崩太子達音立.

병진원년 신묘삼십육년 제붕 태자달음립.

 

병진 원년(BC 545) 신묘 36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달음이 즉위하다.

 

 

四十世 檀君 達音 在位十八年

 

壬辰元年(1825) 己酉十八年(1842)帝崩 太子音次立.

임진원년 기유십팔년 제붕 태자음차립.

 

임진 원년(BC 509) 기유 18년 단제가 붕어하시고 태자 음차 즉위하다.

 

四十一世 檀君 音次 在位二十年

 

庚戌元年(1843) 己巳二十年(1862)帝崩太子乙于支立.

경술원년 기사이십년 제붕 태자을우지립.

 

경술 원년(BC491) 기사 20년 단제가 붕어하시고 태자 을우지 즉위하다.

 

四十二世 檀君 乙于支 在位十年

 

庚午元年(1863) 己卯十年(1872)帝崩 太子勿理立.

경오원년 기묘십년 제붕 태자물리립.

 

경오 원년(BC 471) 기묘 10년 단제가 붕어하시고 태자 물리를 세웠다.

 

四十三世 檀君 勿理 在位三十六年

 

庚辰元年(紀元1873) 乙卯三十六年(1908) 隆安獵戶于和沖 自稱將軍聚衆數萬 陷西北三十六郡 帝遣兵不克. 冬賊圍都城急攻 帝與左右宮人 奉廟社主 浮舟而下之海頭尋崩 是歲 白民城褥薩丘勿 以命起兵 先據藏唐京 九地師從之 東西鴨綠十八城 皆遣兵來援.

경진원년 을묘삼십육년 융안렵호우화충 자칭장군취중수만 함서북삼십육군 제견병불극 동적위도성급공 제여좌우궁인 봉묘사주 부주이하지해두 심붕. 시세 백민성욕살 구물이명기병 선거장당경 구지사종지 동서압록십팔성 개견병원.

 

경진 원년(BC 461) 을묘 36년 융안의 사냥꾼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했다. 단제께서는 좌우의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어 모시고 배를 타고 피난하여 해두로 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붕어했다. 이 해에 백민성 욕살 구물이 어명을 받아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을 점령하니 九地의 군사들이 이에 따라서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四十四世 檀君 丘勿 在位二十九年

 

丙辰元年(紀元1909)三月 大水浸都城 賊大亂. 丘勿率兵一萬往討之賊 不戰自潰 遂斬于和沖. 於是丘勿爲諸將所推乃 於三月十六日築壇祭天 遂卽位于藏唐京. 改國號爲大夫餘 改三韓爲三朝鮮. 自是三朝鮮雖奉檀君爲一尊 臨理之制而惟和戰之. 權不在一尊也. 七月命改築海城爲平壤 作離宮.

병진원년삼월 대수침도성 적대란. 구물솔병일만왕주지 부전자궤 수참우화충. 어시구물위제장소추내. 어삼월심육일축단제천 수즉위우장당경. 개국호위대부여 개삼한위삼조선. 자시삼조선구봉단군위일존 임리지제이유화전지. 권부재일존. 칠월명개축해성위평양 작이궁.

 

병진 원년(BC 425) 3월 도성에 홍수가 나니 적병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구물 단제께서는 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정벌하려하니 적군이 스스로 저절로 궤멸하니 마침내 우화충을 죽여버렸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들의 추앙을 받는바 되어, 마침내 316일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나라이름을 대부여라고 고치고 삼한은 삼조선이라고 바꿔 불렀다. 이 때부터 삼조선은 단군을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으며 외교권을 가지기는 했지만 권한은 단제 한 분에게만 맡겨 두지는 않게 되었다. 7월에는 해성을 개축하도록 하여 평양이라고 부르도록 하시고, 이궁으로 삼았다.

 

丁巳二年(1910)禮官 請行三神迎鼓祭 乃三月十六日也. 帝親幸敬拜 初拜三叩 再拜六叩 三拜九叩禮也. 從衆特爲十叩 是爲三六大禮也.

정사이년 예관 청행삼신영고제 내삼월십육일야. 제친행경배 초배삼고 재배육고 삼배구고예야. 종중특위십고 시위삼육대례야.

 

정사 2년 예관이 청하여 삼신영고의 제사를 지냈다. 316일이었는데 단제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첫번째 절하고 세번 머리를 조아리고 두번째 절에 여섯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번째절에 아홉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데, 따르는 무리들은 특별히 열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를 삼육의 대례라고 한다.

 

壬申十七年(1925)遣監察官于州郡 糾察吏民 擧孝廉. 戊寅二十三年(1931) 燕遣使賀正. 甲申二十九年(1937) 帝崩 太子余婁立.

임신십칠년 견감찰관우주군 규찰사민 거효렴. 무인이십삼년 연견사하정. 갑신이십구년 제붕 태자여루립.

 

임신 17년 감찰관을 각 주와 군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살펴보아 효도를 잘하는 자와 청렴결백한 관리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무인 23년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 갑신 29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루가 즉위하였다.

 

四十五世 檀君 余婁 在位五十五年

 

乙酉元年(紀元1938)築城長嶺狼山. 辛丑十七年(1954)燕人侵邊郡 守將苗長春擊敗之. 丙辰三十二年(1969) 燕人倍道入寇 陷遼西逼雲障. 番朝鮮命上將于文言禦之 眞莫二朝鮮 赤派兵來救設伏來攻 破燕齊之兵 於五道河 遼西諸城悉復.

을유원녀누축성장령랑산. 신축십칠년 연인침변군 수장묘장춘격패지. 병진심삼십이년 연인배도입구 함요서박운장. 번조선명상장우문언어지 진막이조선 적파병래구 설복래공 파연제지병 어오도하 요서제성실복.

 

을유 원년(BC 396)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다. 신축 17년 연나라 사람이 변두리의 군을 침범하매 수비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부수었다. 병진 32년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요서를 함락시키고 운장까지 육박해왔다. 이에 번조선이 대장군 우문언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하고 진조선 막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으로 연나라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丁巳三十三年(1970)燕人敗屯連雲島 造船將來襲 于文言追擊 大破射殺其將. 辛未四十七年(1984)北漠酋長厄尼車吉來朝 獻馬二百匹 請共伐燕. 乃以 番朝鮮少將申不私率兵一萬 合攻燕上谷 援之置城邑.

정사삼십삼년 연인배둔연운도 조선장래습 우문언추격대파 사살기장. 신미사십칠년 북막추장액니거길래조 헌마이백필 청공벌연. 내이 번조선소장신불사솔병일만 합공연상곡 원지치성읍.

 

정사 33년 연나라 사람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에 주둔하며 배를 만들고 장차 쳐들어올 기세였으므로 우문언이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 신미 47년 북막의 추장 액니거길이 조정에 찾아와서 말 200필을 바치고 함께 연나라를 칠 것을 청했다. 마침내 번조선의 젊은 장수 신불사로 하여금 병력 만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나라의 상곡을 공격하게하고 성읍을 만드는데 도왔다.

 

戊寅五十四年(1991) 自上谷役後 燕連年來侵至. 是遣使請和許之 復以造陽以西爲界. 己卯五十五年(1992) 夏大旱. 慮有冤獄大赦 親幸祈雨. 九月帝崩 太子普乙立.

무인오십사년 사상곡역후 연연년래침지 시견사청화허지 복이조양이서위계. 을묘오십오년 하대한 여유원옥대사 친행기우. 구월제붕 태자보을립.

 

무인 54년 상곡의 싸움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또 조양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았다. 기묘 55년 여름 크게 가물었다. 죄 없이 옥에 갖힌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크게 사면하고 몸소 나아가서 기우제를 드렸다. 9월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보을이 즉위하였다.

 

四十六世 檀君 普乙 在位四十六年

 

庚辰元年(紀元1993)十二月 番朝鮮王解仁 爲燕所遣刺客所害 五加爭立. 戊戌十九年(2011) 正月 邑借箕詡以兵入宮 自以番朝鮮王 遣人請允 帝許之 使堅備燕. 丁巳三十八年(2030) 都城大火盡燒 避御于海城離宮.

경진원년십이월 번조선왕해인 위연소견자객소해 오가쟁립. 무술십구년정월 읍차기후이병입궁 자이번조선왕 견인청윤 제허지 사견비연. 정사삼십팔년 도성대화진소 피어우해성이궁.

 

경진 원년(BC 341) 12월 번조선왕 해인이 연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당하니 5가가 자리을 다투었다. 무술 19년 정월 읍차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자칭하여 번조선 왕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 윤허를 구하매 이를 허락하시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다. 정사 38년 도성에 큰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리고 단제께서는 해성의 이궁=별궁으로 피난하였다.

 

癸亥四十四年(2036) 北漠酋長尼舍獻樂 乃受而厚賞. 乙丑四十六年(2038) 韓介率須臾兵犯闕 自立上將 高列加起義擊破之. 帝還都大赦 自此國勢甚微 國用不敷尋. 帝崩無嗣 高列加以檀君 勿理之玄孫爲衆愛戴且有功遂卽位.

계햐사십사년 북막추장이사헌악 내수이후상. 을축사십육년 한 개솔수유병범궐 자립상장 고열가기의격파지. 제환도대사 자차국세심미 국용불부심. 제붕무사 고열가이단군물리지현손 .위중애대 차유공수즉위.

 

계해 44년 북막의 추장 이사가 음악을 바치니 이를 받으시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을축 46년 한개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하니 대장군 고열가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 단제께서는 서울로 돌아오셔서 대사령을 내리셨는데 이 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약해져서 나라의 비용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후사가 없으매, 고열가가 단군 물리의 현손으로서 무리들의 사랑으로 추대되었고 또 공도 있었던터라 마침내 즉위하였다.

 

四十七世 檀君 古列加 在位五十八年

 

丙寅元年(紀元2039) 己卯十四年(2052)立檀君王儉廟于白岳山 令有司四時祭之 帝歲一親祭己酉四十四年(2082)燕遣使賀正. 癸丑四十八年(2086)十月朔日蝕. 是歲冬北漠酋長阿里當夫請出師伐燕 帝不從 自是怨不朝貢. 壬戌五十七年(2095)四月八日 解慕漱降于熊心山起兵 其先藁離國人也.

병인원년 기묘십사년립단군왕검묘오백악산 영유사사시제지 세일친제. 기유사십사년 연견사하정. 계축사십팔년시월살일식. 시세동북막추장아리당부청출사벌연. 제불종 자시원불조공. 임술오십칠년사월팔일 해모수강우웅심산기병 기선고리국인야.

 

병진 원년(BC 295)기묘 14년 단군왕검의 묘를 백악산에 세우고 유사에게 명을 내려 사철 이에 제를 올리게 하고 1년에 한번 친히 제사를 지냈다. 기유 44년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인사를 올려왔다. 이해 북막의 추장 아리당부가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했으나 단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 때부터 원망하며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임술 57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사람이었다.

 

癸亥五十八年(2096) 帝仁柔不斷 令多不行 諸將恃勇 禍亂頻起 國用不敷 民氣益哀. 三月祭天之夕 乃與五加議曰 昔我列聖肇極 垂統種德 宏遠永世爲法 今王道哀微 諸汗爭强. 惟朕涼德懦不能理 無策招撫百姓離散 惟爾 五加擇賢以薦.” 大開獄門 放還死囚以下 諸俘虜.

계해오십팔년 제인유부단 영다불행제장시용화란번기. 국용불부 민기익쇠. 삼월제천지석내여오가의왈 석아열성조극수통종덕굉원영세위법 금왕도쇠미 제한쟁강. 유짐양덕유불능리 무책초무백성이산 유이오가택현이천.” 대개옥문방환사수이하 제부로.

 

계해 58년 단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하늘에 제사지내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들과 의논하여 가로되 옛 우리 선조 열성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가실 때에는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동안 잘 다스려졌거늘 이제 왕도는 쇠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 없고 겁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 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컨대 그대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고 하시고 옥문을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들을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翌日遂棄位 入山修道登仙 於是五加共治國事六年. 先是宗室大解慕漱 密與須臾約襲據故都白岳山 稱爲天王郞. 四境之內 皆爲聽命 於是封諸將陞. 須臾侯箕丕爲番朝鮮王. 往守上下雲障 蓋北夫餘之興 始此而高句麗 乃解慕漱之生鄕也. 故亦稱高句麗也.

익일수기위 입산수도등선 어시오가공치국사육년. 선시종실대해모수 밀여수유약습거고도백악산 칭위천왕랑. 사경지내 개위청명 어시봉제장승. 수유후기비위번조선왕. 왕수상하운장 개북부여지흥 시차이고구려 내해모수지생향야. 고역칭고구려야.

 

이틑날 마침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가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하였다. 이 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 국민 모두가 받아들이니 그때 모든 장군들을 봉하였다. 수유 제후 기비를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였다.

 

自檀君紀元 元年戊辰 至今上踐祚後十二年癸卯 凡三千六百十六年也是歲十月三日 紅杏村臾 書 于江都之海雲堂.

자단군기원 원년무진 지금상천조후십이년계묘 범삼천육백육십육년야. 시세십이월삼일 홍행촌유 서우강도지해운당.

 

단군기원 원년 무진부터 현재 해모수가 위를 이어받은 12년 계묘에 이르기까지 약 3696년이라. 이해 103일 홍행촌의 늙은이가 강화도의 해운당에서 쓰다.

 

 

단군 조선은 단군기원 원년 무진부터 계해 58(B.C 238) 고열가 단제의 조선 폐관까지 2,096년간 지속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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