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第五 避隱 第八 信忠掛冠
孝成王潛邸時 與賢士信忠 圍碁於宮庭栢樹下 嘗謂曰 “他日若忘卿 有如栢樹.”
효성왕잠저시 여현사신충 위기어궁정백수하 상위왈 “타일약망경 우여백수.”
효성왕(孝成王)이 왕위에 오르기 전,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더불어 대궐 뜰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며 일찍이 이런 말을 하였다. “뒷날에 만약 내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야.”
信忠興拜 隔數月 王卽位 賞功臣 忘忠而不第之 忠怨而作歌 帖於栢樹 樹忽黃悴 王怪使審之 得歌獻之 大驚曰 “萬機鞅掌 幾忘乎角弓.” 乃召之賜爵祿 栢樹乃蘇.
신충흐배 격수월 왕즉위 상공신 망충이불제지 충원이작가 첩어백수 수홀황췌 왕괴사심지 득가헌지 대경왈 “만기앙장 기망호각궁.” 내소지사작록 백수내소.
그러자 신충은 일어나서 절을 하였다. 그 후 몇 달 뒤 효성왕이 즉위하여 공신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깜빡 잊고 명단에 넣지 않았다. 그러자 신충이 원망하는 노래를 지어 이를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갑자기 말라 버렸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게 했더니, 노래를 가져다 바쳤다. 왕은 크게 놀라며 말하였다. “정무가 복잡하고 바빠 하마터면 가깝게 지내던 사람을 잊을 뻔했구나!” 곧바로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었는데 잣나무도 그제야 살아났다.
鞅掌: 바삐 일함
歌曰 物叱好支栢史 秋察尸不冬爾屋支墮米 汝於多支行齊敎因隱 仰頓隱面矣 改衣賜乎隱冬矣也 月羅理影支古理因淵之叱 行尸浪 阿叱沙矣以支如支 貌史沙叱望阿乃 世理都 之叱逸烏隱第也.
가왈 물질호지백사 추찰시부동이옥지수미 여어다시행제교인은 앙돈은면의 개의사호은동의야 월라히영지고리인연지질 행시랑 아질사의이지여지 모사사질망아내 세리도 지질일오은제야.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의미는????)
後句亡 由是寵現於兩朝.
후구망 유시총현어양조.
이렇듯 앞 구절은 있으나 뒤 구절은 없어졌다. 이리하여 신충의 총애는 효성왕(孝成王)과 경덕왕(景德王)의 시대까지 두터웠다.
景德王[王卽孝成之弟也]二十二年癸卯 忠與二友相約 掛冠入南岳. 再徵不就 落髮爲沙門. 爲王創斷俗寺居焉 願終身立壑 以奉福大王 王許之. 留眞在金堂後壁是也.
경덕왕[왕즉효성지제야]이십이년계묘 충여이우상약 괘관입남악. 재징불취 낙발위사문. 위왕창단속사거언. 원종신립학 이봉복대왕 왕허지. 유진재금당후벽시야.
경덕왕(景德王)[왕은 곧 효성왕의 동생이다.] 22년 계묘(서기 763)에 신충은 두 친구와 서로 약속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악(南岳)에 들어갔다. 왕이 두 번을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는 왕을 위하여 단속사(斷俗寺)를 세우고 그곳에서 살면서, 평생을 산 속에 숨어 대왕의 복을 빌기를 원했으므로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임금의 초상화를 모셔 두었는데 금당(金堂) 뒷벽에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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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有村名俗休 今訛云小花里[按三和尙傳 有信忠奉聖寺 與此相混 然計其神文之世 距景德已百餘年. 況神文與信忠 乃宿世之事 則非此信忠明矣. 宜詳之].
남유촌명속휴 금와운소화리.[안삼화상전 유신충봉성사 여차상혼 연계기신문지세 거경덕이백여년. 황신문여신충 내숙세지가 즉비차신충명의. 의상지]
절의 남쪽에 속휴(俗休)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잘못 전해져 소화리(小花里)라 한다.[삼화상전(三和尙傳)을 살펴보면,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가 있는데 이것과 서로 혼동된다. 그러나 계산해 보면 신문왕 때는 경덕왕 때와 100여 년이나 차이가 난다. 하물며 신문왕과 신충의 일은 이전 시대의 일이었으니 여기서 말하는 신충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자세히 살펴야 한다.]
又別記云 景德王代 有直長李俊[高僧傳作李純] 早曾發願 ‘年至知命 須出家創佛寺.’ 天寶七年戊子 年登五十矣 改創槽淵小寺爲大刹 名斷俗寺. 身亦削髮 法名孔宏長老 住寺二十年乃卒. 與前三國史所載不同 兩存之闕疑.
우별기운 경덕왕대 유직장이준[고승전작이순] 조증발원 연지지명 수출가창불사 천보칠년무자 년등오십의 개창조연소사위대찰 명단속사. 신역삭발 법명공굉장노 주사이십년내졸. 여전삼국사소재부동 양존지궐의.
또 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경덕왕 때에 직장(直長) 이준(李俊)[『고승전(高僧傳)』에는 이순(李純)으로 되어 있다.]이 일찍이 소원을 빌어 ‘나이 50이 되면 스님이 되어 절을 짓겠다.’라고 하였다. 천보(天寶) 7년 무자(서기 748)에 50살이 되자, 조연(槽淵)의 작은 절을 큰 사찰로 고쳐 짓고 이름을 단속사(斷俗寺)라고 하였다. 자신도 머리를 깎고 법명을 공굉장로(孔宏長老)라 부르며 절에 거주한 지 20년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는 앞의 삼국사(三國史)에 실린 것과 같지 않으나, 두 가지 설을 실어 그 의심을 밝혀둔다.
讚曰 功名未已鬢先霜 君寵雖多百歲忙 隔岸有山頻入夢 逝將香火祝吾皇
찬왈 공명미이빈선상 군총수다백세망 격안유산빈입몽 서장향화축오황.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공명을 다하지 못했는데 귀밑머리만 먼저 하얘지니 임금의 총애야 많았지만 한 평생 바빴다네.
언덕 저편의 산 꿈속에 자주 들어오니 그곳에 가서 향불 피워 왕의 복을 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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