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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卷第五 避隱 第八 - 朗智乘雲, 普賢樹

卷第五 避隱 第八 朗智乘雲 普賢樹

 

歃良州阿曲縣之靈鷲山[歃良今梁州 阿曲一作西. 又云求佛 又屈弗. 今蔚州置屈弗驛 今存其名]有異僧. 庵居累紀 而鄕邑皆不識 師亦不言名氏. 常講法華 仍有通力.

삽량주아곡현지영취산[삽량금양주 아곡일작서. 우운구불 우굴불. 금울주치굴불역 금존기명]유이승. 암거누기 이향읍개불식 사역불언명씨. 상강법화 잉유통력.

 

삽량주(歃良州) 아곡현(阿曲縣)의 영취산(靈鷲山)[삽량은 지금의 양주(梁州)인데 아곡은 서(西)라고도 되어 있다. 구불(求佛) 또는 굴불(屈弗)이라고도 부른다. 지금의 울주(蔚州)에 굴불역을 두었으니 지금까지 그 이름이 남아 있다.]에 이상한 스님이 있었다. 암자에서 수십 년을 살았으나 고을에서는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하였고, 스님도 자기의 성명을 말하지 않았다. 법화경(法華經)을 강론하였는데 신통력이 있었다.

 

龍朔初 有沙彌智通 伊亮公之家奴也. 出家年七歲 時有烏來鳴云 靈鷲去投朗智爲弟子.“ 通聞之 尋訪此山 來憩於洞中樹下 忽見異人出曰 我是普賢大士 欲授汝戒品.

용삭초 유사미지통 이량공지가노야. 출강연칠세 시유오래명운 영취거투낭지위제자 통문지 심방차산 래게어동중수하 홀견이인출왈 아시보현대사 욕수여계품.“

 

용삭(龍朔, 서기 661~663) 초기에 지통(智通)이라는 어린 스님이 있었는데 본래 이량공(伊亮公) 집안의 노비였다. 일곱 살 나이에 스님이 되었는데 그때 까마귀가 날아와 울면서 말하였다. 영취산에 들어가 낭지(朗智)의 제자가 되어라.” 지통은 이 말을 듣고 영취산으로 찾아가서 골짜기의 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 말하였다. “나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인데 너에게 계품(戒品)을 주려고 왔다.”

 

故來爾 因宣戒 訖乃隱 通神心豁爾 智證頓圓. 遂前行 路逢一僧 乃問朗智師何所住 僧曰 奚問朗智乎?” 通具陳神烏之事 僧宛爾而笑曰 我是朗智 今玆堂前亦有烏來報 有聖兒投師將至矣 宜出迎.” 故來迎爾.

고래이 인선계 흘내은 통신심활이 지증돈원. 수전행 노봉일승 내문낭지사하소주. 승왈 해문낭지호?” 통구진신오지사 승완이이소왈 아시낭지 금자당전역유오래보 유성아두사장지의 의출영.” 고래영이.

 

그리고는 계()를 베푼 후 사라져 버렸다. 그때 지통은 마음이 확 넓어지고 진실한 지혜가 열렸다. 그런 후에 다시 길을 가다가 어떤 스님을 만나 낭지스님이 어디 계시는지 물었다. 그러자 스님이 말하였다. “어째서 낭지를 묻느냐?” 지통이 신기한 까마귀의 일을 자세히 말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바로 낭지인데 지금 집 앞에도 까마귀가 날아와, 거룩한 아이가 스님께로 오고 있으니 당연히 나가시어 맞이하라고 하여 이렇게 나와 맞이하는 것이다.”

 

乃執手而嘆曰 靈烏警爾投吾 報予迎汝 是何祥也? 殆山靈之陰助也.” 傳云山主乃辯才天女 通聞之泣謝 投禮於師.

내집수이탄왈 영오경이투오 보여영여 시하상야? 태산영지음조야.” 전운산주내변재천녀 통문지읍사 투예어사.

 

그리고 손을 잡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신령스런 까마귀가 너를 깨우쳐 내게로 오게 했고, 내게 알려 너를 맞이하게 하였으니 이 얼마나 상서로운 일이더냐? 아마 산신령께서 몰래 도움을 주신 것 같구나!” 전해오는 말에 산신령은 변재천녀(辯才天女)라고 한다. 지통이 이 말을 듣고 울먹이며 감사하고 스님에게 예를 올렸다.

 

旣而將與授戒 通曰 予於洞口樹下 已蒙普賢大士 乃授正戒 智嘆曰 善哉! 汝已親稟大士滿分之戒. 我自生年來 夕惕慇懃 念遇至聖 而猶未能昭格 今汝已受 吾不及汝遠矣!”

기이장여수계 통왈 여어동구수하 이몽보현대사 내수정계.” 지탄왈 선재! 여기친품대사만분지계. 아자생연래 석척은근 영우지성 이유미능소격 금여이수 오불급여원의!”

 

이윽고 계를 주려 하니 지통이 말하였다. “저는 동구 밖 나무 밑에서 보현보살에게 이미 정계(正戒)를 받았습니다.” 낭지가 감탄하며 말하였다. “잘했구나! 너는 이미 보살의 만분지계(滿分之戒)를 친히 받았구나. 나는 태어난 후 아침저녁으로 조심하고 은근히 보현보살을 만나기를 염원했지만 오히려 정성이 감동시키지 못했는데, 이제 너는 벌써 계를 받았으니 내가 네게 아득히 미치지 못하겠구나!”

 

反禮智通. 因名其樹曰普賢. 通曰 法師住此其已久.” 智曰 法興王丁未之歲 始寓足焉 不知今幾何.” 通到山之時 乃文武王卽位元年辛酉歲也 計已一百三十五年矣. 通後詣義湘之室 升堂覩奧 頗資玄化 寔爲錐洞記主也.

반예지통. 인명기수왈보현. 통왈 법사주차기이구.” 지왈 법흥왕정미지세 시우족언 부지금기하.” 통도산지시 내문무왕즉위원년신유세야 계이일백삼십오년의. 통후지의상지실 승당도오 파자현화 식위추동기주야.

 

그리고는 지통에게 예를 올렸다. 이로 인해 그 나무를 보현수라 하였다. 지통이 말하였다.

법사께서 이 절에 계신 지가 오래 된 듯합니다.” 낭지가 대답하였다. “법흥왕 정미년(서기 527)에 처음으로 여기 와서 살았는데 지금은 얼마나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지통이 이 산에 온 것이 문무왕 즉위 원년, 신유(서기 661)이니 계산해 보면 135년이나 된다. 지통은 후에 의상의 처소에 가서 높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불교의 교화에 이바지하고 추동기(錐洞記)를 지었다.

 

元曉住磻高寺時 常往謁智 令著初章觀文及安身事心論. 曉撰訖 使隱士文善 奉書馳達 其篇尾述偈云.

원효주반고사시 상주알지 영저초장관문급안신사심론. 효찬흘 사은사문선 봉서치달 기편미술게운.

 

원효(元曉)가 반고사(磻高寺)에서 있을 때 자주 낭지를 찾아가 만났는데, 초장관문(初章觀文)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짓게 하였다. 원효가 다 짓고 나자 은사(隱士)인 문선(文善)을 시켜 책을 받들어 보내면서 그 편의 끝에 게를 적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西谷沙彌稽首禮 東岳上德高巖前[磻高在靈鷲之西北 故西谷沙彌 乃自謂也] 吹以細塵補鷲岳 飛以微滴投龍淵[云云].

서곡사미계수예 동악상덕고암전[반고재영취지서북 고서곡사미 내자위야] 취이세록보취악 기이미적투용연[운운]

 

서쪽 골짜기 사미승은 공손히 동쪽 봉우리 상덕(上德) 고암(高巖) 앞에 예를 갖추나이다.[반고사는 영취사의 서북쪽에 있기 때문에 서쪽 골짜기의 사미승은 자신을 일컫는 말이다.] 작은 티끌 불어 보내어 영취산에 더하고 작은 물방울 날려 용연(龍淵)에 던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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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之東有太和江 乃爲中國太和池龍植福所創 故云龍淵. 通與曉皆大聖也 二聖而摳衣師之 道邁可知.

산지동유태화강 내위중국태롸지용식복소창 고운용연. 통여효개댜성야 이성이구의사지 도매가지.

 

산의 동쪽에 태화강(太和江)이 있는데 이는 곧 중국 태화지(太和池)에 있는 용의 복을 심기 위해 만든 것이므로 용연(龍淵)이라 하였다. 지통과 원효는 모두 큰 성인인데 두 성인이 스승으로 받들어 섬겼으니 낭지 법사의 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師嘗乘雲往中國之淸凉山 隨衆聽講 俄頃卽還 彼中僧謂是隣居者 然罔知攸止. 一日令於衆曰 除常住外 別院來僧 各持所居名花異植 來獻道場!”

상지승운쥬즁귝지청량산 수중청강 아경즉환 피중승위시인거자 연망지유지. 일일영어중왈 제상주외 별원래승 각지소거명화리식 래헌도장!”

 

법사는 일찍이 구름을 타고 중국의 청량산(淸凉山)에 가서 신도들과 함께 강의를 듣고는 잠시 후 곧 돌아왔는데, 그곳 중들은 아무도 그가 사는 곳을 모르면서도 이웃에 사는 사람이라고만 여겼다. 청량산 절에서 하루는 여러 중들에게 명하였다. “항상 이 절에 머무는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절에서 온 스님은 각기 사는 곳의 이름난 꽃과 진귀한 식물을 가져다 도량(道場)에 바치시오!”

 

智明日折山中異木一枝 歸呈之. 彼僧見之 乃曰 此木梵號怛提伽 此云赫 唯西竺海東二靈鷲山有之. 彼二山皆第十法雲地菩薩所居 斯必聖者也.”

지명일적산중이본일지 귀정지. 피승견지 내왈 차목법호달제가 차운혁 유서축해동이영취산유지. 피이산개제십법운지보살소거 사필성자야.

 

낭지는 이튿날 산 속의 이상한 나무 한 가지를 꺾어다 바쳤다. 그곳의 스님이 이를 보고 말하였다. “이 나무는 범어로 달제가(怛提伽)라 하고 여기서는 혁()이라 하는데, 오직 서천축(西天竺)과 해동의 두 영취산에만 있다. 이 두 산은 모두 제10법운지(第十法雲地)로써 보살이 사는 곳이니 이 사람은 반드시 성스러운 사람일 것이다.”

 

遂察其行色 乃知住海東靈鷲也. 因此改觀 名著中外. 鄕人乃號其庵曰赫木. 今赫木寺之北崗有古基 乃其遺趾.

수찰기행색 내지주해동영취야. 인차개관 명저중외. 향인내호기암왈혁목. 금햑목사지북강유고기내기유지.

 

마침내 그 행색을 살펴보고는 해동 영취산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스님을 다시 보게 되었고 그 이름이 나라 안팎으로 드러났다. 나라 사람들이 그 암자를 혁목암(赫木庵)이라 불렀다. 지금 혁목사(赫木寺)의 북쪽 산등성이에 옛 절터가 있는데 그 곳이 그 절이 있던 자리다.

 

靈鷲寺記云 朗智嘗云此庵址乃迦葉佛時寺基也 堀地得燈缸二隔. 元聖王代 有大德緣會來居山中 撰師之傳 行于世.

영취사기운 낭지상우나암지내가섭불시사기야 굴지득등항이격. 원성왕대 유대덕연회래거산중찬사지전 행우세.

 

영취사기(靈鷲寺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낭지가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암자 자리는 가섭불(迦葉佛) 당시의 절터였다.’라고 하고는 땅을 파서 등잔 기름병 두 병을 얻었다. 원성왕(元聖王) 때에는 대덕(大德) 연회(緣會)가 이 산 속에 와 살면서 낭지법사의 전기를 지었는데, 이것이 세상에 퍼졌다.”

 

按華嚴經 第十名法雲地 今師之馭雲 蓋佛陀屈三指 元曉分百身之類也歟.

안화엄경 제십명법운지 금사지어운 개불타굴삼지 원효분백신지유야여.

 

화엄경(華嚴經)을 살펴보면, 10은 법운지라 했으니 지금 스님이 구름을 탄 것은 대개 부처가 세 손가락을 구부리고 원효가 백 개로 몸을 나누는 것 같은 것이다.

 

讚曰 想料嵓藏百歲間 高名曾未落人寰 不禁山鳥閑饒舌 雲馭無端洩往還

찬왈 상료암장백세간 고명승미낙인환 불금산오한요설 운어무단설왕환.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생각컨대 바위산에 백년 동안 숨어 살면서 높은 이름 일찍이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다네.

산새들의 한가로운 지저귐 금할 길 없어 구름 타고 오가는 것 속절없이 새어 나갔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