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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卷第五 感通 第七 - 憬興遇聖

 

神文王代 大德憬興 姓水氏 熊川州人也. 年十八出家 遊刃三藏 望重一時. 開耀元年 文武王將昇遐 顧命於神文曰 憬興法師 可爲國師 不忘朕命.” 神文卽位 冊爲國老 住三郞寺.

신문왕대 대덕경흥 성수씨 웅천주인야. 년십팔출가 유인삼장 망중일시. 개요원년 문무왕장승하 고명어신문왈 경흥법사 가위국사 불망짐명,” 신문즉위 책위국노 주삼랑사.

 

신문왕(神文王) 때의 경흥대덕(憬興大德)은 성이 수()씨이며 웅천주(熊川州) 사람이다. 18세에 중이 되어 삼장(三藏)에 통달하니 그 시대에 명망이 높았다. 개요(開耀) 원년(서기 681)에 문무왕(文武王)이 세상을 떠나려고 할 때 신문왕에게 유언을 남기었다. “경흥법사는 국사가 될 만하니 짐의 명을 잊지 말라.” 신문왕이 즉위하여 국로(國老)로 삼고 삼랑사(三郎寺)에서 살게 하였다.

 

忽寢疾彌月 有一尼來謁候之 以華嚴經中 善友原病之說 爲言曰 今師之疾 憂勞所致 喜笑可治.”

홀침질미월 유일니래알후지 이화엄경중 선우원병.”지설 위언왈 금사지질 우노소치 희소가치.”

 

경흥이 갑자기 병이 나서 한 달이나 되었는데, 이때 한 비구니가 찾아와서 문안을 드리면서 화엄경(華嚴經)속의 착한 벗이 병을 고쳐준다.”는 이야기를 해주며 말하였다. “지금 스님의 병은 근심으로 생긴 것이니 즐겁게 웃으면 나을 것입니다.”

 

乃作十一樣面貌 各作俳諧之舞 巉巖戍削 變態不可勝言. 皆可脫頤 師之病不覺洒然. 尼遂出門 乃入南巷寺[寺在三郞寺南]而隱 所將杖子 在幀畵十一面圓通像前.

내작십일양면모 각작배해지무 참엄술삭 변태부가승언. 개가탈이 사지병불각쇄연. 니수출문 냐입난항사[사재삼랑사남]이은 소장장자 재정화십일면원통상전.

 

그리고는 열한 가지 모습을 만들어 각각 광대와 같은 춤을 추니, 그 모습은 뾰족하기도 하고 깎은 듯도 하여 변하는 모습이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모두 너무 우스워서 턱이 빠질 지경이었고, 법사의 병도 자신도 모르게 씻은 듯 나았다. 그러자 비구니는 문을 나가 남항사(南巷寺)[삼랑사 남쪽에 있다.]에 들어가 숨었는데, 가지고 있던 지팡이만 십일면원통상(十一面圓通像, 십일면관음보살상) 탱화 앞에 있었다.

 

一日將入王宮. 從者先備於東門之外 鞍騎甚都 靴笠斯陳 行路爲之辟易. 一居士[一云沙門]形儀疎率 手杖背筐 來憩于下馬臺上 視筐中乾魚也. 從者呵之曰 爾着緇 奚負觸物耶?” 僧曰 與其挾生肉於兩股間 背負三市之枯魚 有何所嫌?”

일일장입왕궁. 종자선비어동문지외 안기심도 화립사진 행로위지피이. 일거사[일운사문]형의소솔 수장배광 래게우하마대성 시공중건어야. 종자가지왈 이착치 해부촉물야?” 승왈 여기협생육지영고간 배부삼건지고어 유하소혐?”

 

경흥이 어느 날 대궐에 들어가려 하였다. 시종하는 이들이 동문 밖에서 먼저 채비를 하였는데 말과 안장이 매우 화려하였고, 신발과 갓 또한 제대로 갖추어졌으므로 길 가던 행인들이 모두 길을 비켰다. 그때 거사[혹은 승려라고도 한다.] 한 사람이 남루한 모습으로 지팡이를 짚고 등에는 광주리를 지고 와서 하마대(下馬臺) 위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 광주리 안에 마른 물고기가 보였다. 시종하는 이가 그를 꾸짖었다. “너는 중의 옷을 입고서 어찌 더러운 물건을 짊어지고 있느냐?” 중이 말하였다. “살아 있는 고기를 양 넓적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자도 있는데 시장의 마른 물고기를 등에 지고 있는 것이 어찌 더 혐오스럽단 말이냐?”

 

言訖起去. 興方出門 聞其言 使人追之. 至南山文殊寺之門外 抛筐而隱 杖在文殊像前 枯魚乃松皮也. 使來告 興聞之嘆曰 大聖來戒我騎畜爾 終身不復騎.”

언흘기거. 흥방출문 문기언 사인추지. 지남산문수사지문외 포광이은 장재문수상전 고어내송피야. 사래고 흥문지탄왈 대성래계아기축이 종신불복기.”

 

말을 마치고 그는 일어나 가버렸다. 경흥이 막 문을 나오다가 그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뒤쫓게 하였다. 그는 남산 문수사(文殊寺)의 문 밖에 이르러 광주리를 버리고 숨었는데, 지팡이만 문수보살상 앞에 세워져 있고 마른 물고기는 바로 소나무 껍질이었다. 사자가 돌아와 이 사실을 고하자 경흥은 듣고 탄식하였다. “큰 성현이 오셔서 내가 짐승을 타는 것을 경계하시었구나.” 그리고 경흥은 종신토록 말을 타지 않았다.

 

興之德馨遺味 備載釋玄本所撰三郞寺碑.

흥지덕형유미 비재석현본소천삼렁서비.

 

경흥의 덕행과 남긴 말은 승려 현본(玄本)이 엮은 삼랑사(三郞寺)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다.

 

嘗見普賢章經 彌勒菩薩言 我當來世 生閻浮提 先度釋迦末法弟子. 唯除騎馬比丘 不得見佛.” 可不警哉.

상견보현장경 미륵보살언 아당래세 생염부제 선도석가말법제자 유제기마차구 부득견불.” 가불경재.

 

일찍이 보현장경(普賢章經)을 보니, 미륵보살이 이르기를 나는 내세에는 인간 세상에 나서 먼저 석가의 말법(末法) 제자들을 구제할 것이다. 그러나 다만 말 탄 중만은 제외시켜 그들이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조심하지 않을 것인가?

 

讚曰 昔賢垂範意彌多 胡乃兒孫莫切瑳 背底枯魚猶可事 那堪他日負龍華.

찬왈 석현괴범의미다 호내아손막절차 배저고어유가사 나감타일부용화.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옛 어진 이가 보인 모범 뜻한 바 많았는데 어찌하여 자손들은 갈고 닦지 않는가?

마른 고기 등에 진 것은 그래도 괜찮겠으나 다음날 미륵불을 저버림은 어찌 견디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