郁面婢念佛西昇
여종 욱면이 염불하여 극락으로 가다
景德王代 康州[今晋州 一作剛州 則今順安] 善士數十人 志求西方 於州境創彌陀寺 約萬日爲契.
경덕왕대 강주[금진주 일작강주 즉금순안] 선사수십인 지구서방 어주경창미타사 약만일위계.
경덕왕(景德王) 때 강주(康州)[지금의 진주(晉州)인데 강주(剛州)라고도 하니, 그렇다면 지금의 순안(順安)이다.]의 신자 수십 명이 서방정토(극락, 천국)를 정성껏 구하여 고을 경내에 미타사(彌陁寺)를 세우고 1만 일을 기약하여 계(契)를 만들었다.
時有阿干貴珍家一婢 名郁面 隨其主歸寺 立中庭 隨僧念佛. 主憎其不職 每給穀二碩 一夕舂之. 婢一更舂畢 歸寺念佛[俚言‘己事之忙 大家之舂促.’ 蓋出乎此] 日夕微怠 庭之左右 竪立長橛 以繩穿貫兩掌 繫於橛上合掌 左右遊之激勵焉.
시유아간책진가일비 명욱면 수기주귀사 입중정 수승염불. 주증기불직 매급곡이석 일석용지. 비일경용필 귀사염불[리언‘기사지망 대가지용촉.’ 개출호차] 일석미태 정지좌우 수립장궐 이승청관양장 계어궐상합장 좌우유지격려언.
그때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집에 여자 종이 있었는데 이름이 욱면(郁面)이었다. 욱면은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마당에 서서 승려를 따라 염불하였다. 주인은 그녀가 직분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매양 곡식 두 섬을 주고 하룻밤 동안 다 찧으라고 하였는데, 욱면은 초저녁에 다 찧어 놓고 절에 가서 염불하기를[‘내 일이 바빠서 큰집 방아 서두른다’는 속담이 여기서 나온 듯하다.] 밤낮으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뜰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에 매어 놓고는 합장하고 좌우로 오락가락하며 자신을 스스로 격려하였다.
時有天唱於空 “郁面娘入堂念佛!” 寺衆聞之 勸婢入堂 隨例精進. 未幾天樂從西來 婢湧透屋樑而出. 西行至郊外 捐骸變現眞身 坐蓮臺 放大光明 緩緩而逝 樂聲不徹空中. 其堂至今有透穴處云[已上鄕傳]
시유천창어공 “욱면낭입당염불!” 사중문지 권비입당 수예정진. 미기천악동서래 비용투옥양이출. 서행지교외 연해변현진신 좌연대 방대광명 완완이서 악성불철공중, 기당지금유투혈처운[이상향전]
그때 하늘의 외침이 들려왔다. “욱면랑은 법당에 들어가 염불하라!” 절의 승려들이 이 소리를 듣고 여종에게 권해서 법당에 들어가게 하고 전과 같이 정진하게 하였다. 그러자 얼마 안 되어 하늘의 음악 소리가 서쪽에서 들려오더니, 여종이 솟구쳐 불당의 대들보를 뚫고 나갔다. 욱면은 서쪽 교외에 이르러 형체를 버리고 부처의 몸으로 변하여 연화대에 앉아 큰 빛을 발하면서 천천히 날아가는데, 음악 소리가 하늘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법당에는 지금도 뚫어진 구멍이 남아 있다고 한다.[이상은 향전(鄕傳)에 있다.]
按僧傳 棟梁八珍者 觀音應現也. 結徒有一千 分朋爲二 一勞力 一精修 彼勞力中知事者. 不獲戒 墮畜生道 爲浮石寺牛. 嘗駄經而行 賴經力 轉爲阿干貴珍家婢 名郁面
안승전 동량팔진자 관음을현야. 결도유일천 분붕위이 일노력 일정수 피노력중지사자. 불획계 추축생도 위부석사우. 상태경이행 뢰경력 전위아간귀진가비 명욱면.
『승전(僧傳)』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동량(棟梁) 팔진(八珍)은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다. 무리들을 모으니 천 명이나 되었는데,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힘껏 일을 하고 한 패는 정성껏 수련하였다. 일을 하던 무리 중에 일을 맡아보던 이가 계를 얻지 못하고 축생도(畜生道)에 떨어져서 부석사(浮石寺)의 소가 되었다. 일찍이 그 소가 불경을 등에 싣고 가다가 불경의 힘을 입어 아간 귀진의 집 여종으로 다시 태어났는데, 이름을 욱면이라 하였다.
因事至下柯山 感夢遂發道心. 阿干家距惠宿法師所創彌陀寺不遠 阿干每至其寺念佛 婢隨往 在庭念佛云云. 如是九年 歲在乙未正月二十一日 禮佛撥屋梁而去
인사지하가산 감몽수발도심 라간가거혜숙법사소창미타사불원 아간매지기사염불 비수왕 재정 영불운운. 여시구년 세재을미정월이십일일 예불빌옥량이거.
욱면은 일이 있어 하가산(下柯山)에 갔다가 꿈에 감응해서 마침내 불도를 닦을 마음이 생겼다. 아간의 집은 혜숙법사(惠宿法師)가 세운 미타사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에 아간은 늘 그 절에 가서 염불하였는데, 여자종도 따라가서 뜰에서 염불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9년째인 을미년(서기 755) 정월 21일에 부처에게 예불하다가 집의 대들보를 뚫고 날아갔다.
至小伯山 墮一隻履 就其地爲菩提寺 至山下棄其身 卽其地爲二菩提寺 榜其殿曰 ‘勖面登天之殿’ 屋脊穴成十許圍 雖暴雨密雪不霑濕. 後有好事者 範金塔一座 直其穴 安承塵上 以誌其異 今榜塔尙存.
지소백산 추일척리 추ㅢ기지위보리사 지산하기기신 즉기지위이보리사 방기전왈 ‘욱면등천지전.’ 옥척혈성십허위 수폭우밀설불점습. 후유호사자 범금탑일좌 직기혈 안승진상 이지기이 금방탑상존.
소백산(小伯山)에 이르러 신발 한 짝을 떨어뜨렸으므로 그곳에 보리사(菩提寺)를 지었고, 산 아래에 이르러 그 육신을 버렸으므로 그 자리에 이보리사(二菩提寺)를 지었으며, 그 전당에는 욱면등천지전(勖面登天之殿)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그 집 용마루에 뚫린 구멍은 열 아름이나 되었는데, 세찬 비나 함박눈이 내려도 집안이 젖지 않았다. 후에 어떤 호사자가 금탑 1좌를 그 구멍에 맞추어서 승진(承塵:천정) 위에 모시고 그 기이한 일을 기록했는데, 지금도 그 현판과 탑이 그대로 남아있다.
勖面去後 貴珍亦以其家 異人托生之地 捨爲寺曰法王 納田民. 久後廢爲丘墟. 有大師懷鏡 與承宣劉碩小卿李元長 同願重營之 鏡躬事土木 始輸材 夢老父遺麻葛屨各一. 又就古神社 諭以佛理 斫出祠側材木 九五載告畢. 又加臧獲 蔚爲東南名藍. 人以鏡爲貴珍後身.
욱면거후 귀진역이기가 이인탁생지지 사위사왈정법 납전민. 구후폐위구허. 유대사회경 여승선유석소경아원장 동원중영지 경궁사토목 시유재 몽노부유마갈리각일. 우취고신사 유이불리 작출사측재목 구오재고필. 우가장획 위위동남명람. 인이경위귀진후신.
욱면이 떠난 후 귀진도 자신의 집이 신이한 사람이 의탁하여 살던 곳이라 하여 희사하여 절을 만들고 이름을 법왕사(法王寺)라 했으며 밭과 일할 사람들을 바쳤다. 절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허물어져 폐허가 되었다. 후에 대사 희경(懷鏡)이 승선 유석(劉碩)과 소경 이원장(李元長)과 함께 발원하여 절을 중건하였다. 이때 희경이 친히 토목 공사를 맡았는데, 재목을 처음 운반하던 날 희경의 꿈에 한 노인이 삼으로 삼은 신과 칡으로 삼은 신을 각각 한 켤레씩 주었다. 또 희경은 옛 신사(神社)에 가서 불교의 이치로 타이르고 신사 옆의 나무를 베어다가 5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또 노비까지 더해 주어서 이 절은 매우 번창하여 동남 지방의 이름 있는 절이 되었다. 사람들은 희경을 일컬어 귀진의 후신이라 하였다.
議曰 “按鄕中古傳 郁面乃景德王代事也 據徵[徵字疑作珍 下亦同]本傳 則元和三年戊子 哀莊王時也 景德後 歷惠恭宣德元聖昭聖哀莊等五代 共六十餘年也. 徵先面後 與鄕傳乖違. 然兩存之闕疑.”
의왈 “안향중고전 욱면내경덕왕대사여 근징[징자의작진 하역동]본전 즉원화삼년무지 애장왕시야. 경덕후 역혜공선덕원성소성애장등오대 공육십여년야. 징선면루 여향전괴위. 연양존지궐의.”
논하여 평한다. “고을 안의 고전을 살펴보면 욱면의 일은 경덕왕 시대의 일이다. 징(徵)[징(徵)자는 아마도 진(珍)일 것인데, 아래에서도 같다.]의 본전에 따르면 원화(元和) 3년 무자(서기 808) 애장왕(哀莊王) 때의 일이라 하였다. 경덕왕 이후에 혜공(惠恭), 선덕(宣德), 원성(元聖), 소성(昭聖), 애장 등 5대까지는 도합 60여 년이나 된다. 귀징이 먼저요 욱면이 나중이니 그 차례가 향전(鄕傳)과 다르다. 그래서 여기에 이 두 가지를 다 실어 의문을 없앤다.”
讚曰 西隣古寺佛燈明 舂罷歸來夜二更 自許一聲成一佛 掌穿繩子直忘形.
찬왈 서린고사불등명 용차귀래야이경 자러일성성일불 장천승자직망형.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서편 이웃 옛 절에는 불등 밝은데 방아 찧고 절에 오면 밤 깊어 이경(9시~11시)이라네.
한마디 염불마다 부처되길 기약하며 손바닥에 끈을 꿰어 자기 몸을 잊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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