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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券 第四 義解 券五- 關東楓岳鉢淵藪石記

關東楓岳鉢淵藪石記

 

[此記乃寺主瑩岑所撰 承安四年己未立石]

[차기내사주영잠소찬 승안사년기미입석]

 

[이 기록은 바로 절의 주지인 영잠(瑩岑)이 지은 것으로, 승안(承安) 4년 기미(서기 1199)에 돌을 세웠다.]

 

眞表律師 全州碧骨郡都那山村大井里人也. 年至十二 志求出家 父許之. 師往金山藪順濟法師處零染 濟授沙彌戒法傳敎供養次第秘法一卷 占察善惡業報經二卷曰 汝持此戒法 於彌勒地藏兩聖前 懇求懺悔 親受戒法 流傳於世.”

진표율사 전주벽골군도나산촌대정리인야. 연지이십 지구출가 부허지. 사왕금산수순제법사처영염. 제수사마계전교공양차제비법일권 점착선악업보경이권왈 여지차계법 어미륵지장양성전간구참뢰 친수계법 유전어세.”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전주(全州)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출가할 뜻을 가지자 아버지가 허락하였다. 율사는 금산수(金山藪) 순제법사(順濟法師)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순제법사는 사미계법을 전해주고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2권을 전해주면서 말하였다.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과 지장 두 보살 앞에서 간절히 법을 구하고 참회하여서 친히 계를 받아 세상에 널리 펼치도록 하여라.”

 

師奉敎辭退 遍歷名山. 年已二十七歲 於上元元年庚子 蒸二十斗米 乃乾爲粮 詣保安縣 入邊山不思議房. 以五合米 爲一日費 除一合米養鼠.

사봉교사퇴 편력명산. 년기이십칠세 어상원원년경자 증이십구미 내건위량 지보안현 입볍산불사의방. 이오십미 위일일비 제일합미양서.

 

율사는 가르침을 받들고 작별하고 물러나와 명산을 두루 다녔다. 나이가 27세였던 상원(上元) 원년 경자(서기 760)에 쌀 20말을 쪄 말려 양식을 만들어서 보안현(保安縣)에 가서 변산에 있는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갔다. 쌀 다섯 홉을 하루 양식으로 삼았는데, 그중 한 홉은 덜어서 쥐를 길렀다.

 

師勤求戒法於彌勒像前 三年而未得授記. 發憤捨身嵓下 忽有靑衣童 手捧而置石上.

사근구계법어미륵상전 삼년이미득수기. 발분사신암하 홀유청의동 수봉이치석상.

 

율사는 미륵상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했지만, 3년이 되어도 수기(授記, 부처가 될 것을 미리 알려주는 것)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발분하여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는데 갑자기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손으로 받들어 바위 위로 올려놓았다.

 

師更發志願 約三七日 日夜勤修. 扣石懺悔 至三日手臂折落. 至七日夜 地藏菩薩 手搖金錫 來爲加持 手臂如舊. 菩薩遂與袈裟及鉢 師感其靈應 倍加精進.

사경발지원 약삼칠일 일야근수. 구석참회 지삼일수비절락. 지칠일야 지장보살 수요금석 래위가지 수비여구. 보살수여가사급발 사감기영응 배가정진.

 

율사는 다시 분발하여 21일을 기한으로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도하였다. 돌에 몸을 부딪히며 참회했더니 3일 만에 손과 팔이 부러져 땅에 떨어졌다. 7일째 되는 날 밤, 지장보살이 손에 쇠로 된 지팡이를 흔들면서 와서 보호해주자 손과 팔이 예전처럼 되었다. 보살이 마침내 가사와 바리때를 주자, 율사는 그 영험에 감동하여 더욱더 정진하였다.

 

滿三七日 卽得天眼 見兜率天衆來儀之相. 於是地藏慈氏現前 慈氏摩師頂曰 善哉 大丈夫 求戒如是 不惜身命 懇求懺悔!”

만삼칠일 즉득천안 견도솔천중래의지상. 어시지장자씨현전 자씨마사정왈 선재 대장부 구계여시 불석신명 간구참회!”

 

21일이 다 되자,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미리 알 수 있는 천안(天眼)을 얻었고 도솔천중(兜率天衆)들이 오는 형상을 보았다. 이때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앞에 나타났는데, 미륵보살이 율사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좋구나, 대장부처럼 계를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간절히 참회하는구나!”

 

地藏授與戒本 慈氏復與二栍 一題曰九者 一題八者. 告師曰 此二簡子者 是吾手指骨. 此喩始本二覺. 又九者法爾. 八者新熏成佛種子. 以此當知果報. 汝捨此身 受大國王身 後生於兜率.”

지장수여계본 자씨부여이상 일제왈구자 일제팔자. 고사왈 차이간자자 시오수지골 차유시본이각 우구자법이 팔자신훈성불종자 이차당지과보 여사차신 수대국왕신 후생어도솔.”

 

지장보살은 계본(戒本)을 주었다. 미륵보살은 다시 간자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9, 다른 하나는 8이라고 쓰여 있었다. 미륵보살이 율사에게 말하였다. “이 두 간자는 바로 내 손가락 뼈이다. 이것은 시각(視覺)과 본각(本覺) 두 각()을 비유한 것이다. 또 제9간자는 법이고, 8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鍾子)이다. 이것으로 응당 인과응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서 후에 도솔천에서 태어날 것이다.”

 

如是語已 兩聖卽隱 時壬寅四月二十七日也.

여시어기 양성즉은 시임인사월이십칠일야.

 

이와 같이 말을 한 후 두 보살은 곧 사라졌으니, 때는 임인년(서기 762) 427일이었다.

 

師受敎法已 欲創金山寺 下山而來. 至大淵津 忽有龍王 出獻玉袈裟 將八萬眷屬 侍往金山藪 四方子來 不日成之.

사수교법기 욕창금산사 하산이래. 지대연진 홀유용왕 출헌옥가사 장팔만권속 시왕금산수 사방자래 불일성지.

 

율사는 교법을 받은 이후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하려고 산에서 내려왔다.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용왕이 나오더니 옥가사를 바치고 8만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금산수로 모시고 가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 만에 절을 완성하였다.

 

復感慈氏 從兜率駕雲而下 與師受戒法. 師勸檀緣 鑄成彌勒丈六像 復畵下降受戒威儀之相於金堂南壁. 像於甲辰六月九日鑄成 丙午五月一日 安置金堂 是歲大曆元年也.

복감자씨 종도솔가운이하 여사수계법. 사근단연 주성미륵장육상 복화하강수계위의지상어금당남벽. 상어갑진유월구일주성 병오오월일일 안치금당 시세대력원년야.

 

다시 미륵보살이 감응하여 도솔천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율사에게 계법을 주었다. 율사는 시주에게 권하여 미륵장륙상을 쇳물을 부어 만들고 미륵보살이 내려와 계법을 주는 모습을 금당(金堂) 남쪽 벽에 그렸다. 불상은 갑진년(서기 764) 69일에 완성하여 병오년(서기 766) 51일에 금당에 모셨는데, 이 해가 대력(大曆) 원년이었다.

 

師出金山 向俗離山 路逢駕牛乘車者 其牛等向師前 跪膝而泣 乘車人下問 何故此牛等 見和尙泣耶? 和尙從何而來?” 師曰 我是金山藪眞表僧. 予曾入邊山不思議房 於彌勒地藏兩聖前 親受戒法眞栍 欲覓創寺鎭長修道之處 故來爾. 此牛等外愚內明 知我受戒法 爲重法故 跪膝而泣.”

사출금산 향속리산 노봉가우승거자 지구등향사전 궤슬이읍. 승거인하문 하고차우등 견화상읍야? 화상종하이래?” 사왈 아시금산구진표승 여회입변산불사의방 어미륵지장양성전 친수계법진생 욕멱창사진장수도지처 고래이. 차우등외우내명 지아수계법 위중법고 궤슬이읍.”

 

율사가 금산을 나와 속리산(俗離山)을 향하다가 길에서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그 소들이 율사 앞에 무릎을 꿇고 울었다. 수레에 탔던 사람이 내려와서 물었다. “무슨 이유로 이 소들이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스님은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나는 금산수(金山藪)의 중 진표라 하오. 나는 일찍이 변산의 불사의방에 들어가 미륵과 지장의 두 성인께 계법진생(戒法眞栍)을 받고, 절을 지어 길이 수도할 수 있는 곳을 찾으러 오는 길이외다. 이 소들이 겉은 어리석은 듯하지만 속은 현명해서, 내가 계법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불법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다.”

 

其人聞已 乃曰 畜生尙有如是信心 況我爲人 豈無心乎?” 卽以手執鎌 自斷頭髮. 師以悲心 更爲祝髮受戒.

기인문기 내왈 축생상우여시신심 황아위인 기무심호?” 즉이수집겸 자단두발. 사이비심 경위축발수계.

 

이러한 말을 듣고 그 사람이 말하였다. “짐승도 이처럼 불법을 믿는 마음이 있는데, 하물며 저는 사람인데도 어찌 무심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는 즉시 손으로 낫을 잡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 율사는 자비심으로 다시 머리를 깎아주고 계를 주었다.

 

行至俗離山洞裏 見吉祥草所生處而識之. 還向溟州海邊 徐行次 有魚鼈黿鼉等類 出海向師前 綴身如陸. 師踏而入海 唱念戒法還出. 行至高城郡 入皆骨山 始創鉢淵藪 開占察法會. 住七年 時溟州界 年穀不登 人民飢饉 師爲說戒法 人人奉持 致敬三寶. 俄於高城海邊 有無數魚類 自死而出. 人民賣此爲食 得免死.

행지속리산동리 견길상초소생처이식지. 환향명주해변 서행자 유어별원타등류 출해향사전 철신여육. 사답이입해 창념계법환출. 행지고성군 입개골산 시창발연수 개점찰법회. 주칠년 시명주계 연곡부등 인민기근 사위설계법 인인봉지 치경삼보. 아어고성해변 유무수어류 자사이출. 인민매차위식 득면사.

 

율사는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가 난 곳을 보고 표시를 해두었다. 다시 명주(溟州) 해변으로 돌아와 천천히 가는데, 물고기와 자라 등이 바다에서 나와 율사 앞에서 몸을 이어서 육지처럼 만들었다. 율사는 그들을 밟고 건너며 계법을 염송하며 건너왔다.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러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 비로소 발연수(鉢淵藪)를 세우고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다. 7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는데, 그 해 명주 일대에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굶주렸다. 율사는 이들을 위해 계로서 설법을 하자 사람들이 받들어 지키고 삼보를 지극히 공경하였다. 얼마 후 고성 해변에 무수히 많은 물고기들이 죽어 밀려왔다. 사람들이 이것을 팔아 먹을 것을 마련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師出鉢淵 復到不思議房 然後往詣家邑謁父 或到眞門大德房居住 時俗離山大德永深 與大德融宗佛陀等 同詣律師所 伸請曰 我等 不遠千里 來求戒法 願授法門.”

사출발연 복도불사의방 연후왕지가읍알부 혹도진문대덕방거주 시속리산대덕영심 여대덕융종부라등 동지율사소 신청왈 아등 불원천리 래구계법 원수법문.”

 

율사는 발연수를 나와 다시 불사의방에 이르렀다. 그러한 연후에 고향으로 가 아버지도 찾아뵙고 진문대덕(眞門大德)의 방에 머물기도 하였다. 이때 속리산의 대덕 영심(永深)과 대덕 융종(融宗), 그리고 불타(佛陀) 등이 찾아와서 거듭 청하였다. “저희들이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와서 계법을 구하오니 법문(法門)을 주시기 바랍니다.”

 

師黙然不答 三人者 乘桃樹上 倒墮於地 勇猛懺悔. 師乃傳敎灌頂 遂與袈裟及鉢 供養次第秘法一卷 占察善惡業報經二卷 一百八十九栍 復與彌勒眞栍九者八者. 誡曰 九者法爾 八者新熏成佛種子. 我已付囑汝等 持此還歸俗離山. 山有吉祥草生處 於此創立精舍 依此敎法 廣度人天 流布後世.

율사묵연부답 삼인자 승도수상 도타어지 용맹참회. 사내전교관정 수여가사급발 공양차제비법일권 점찰선악업보경이권 일백팔십구생 복여미륵진성주가팔자. 계왈 구법이 팔자신훙성불종자. 아기부촉여등 지차환귀속리산. 산유길상초생처 어차창립정사 의차교법 광도인천 유포후세.

 

율사가 묵묵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세 사람은 복숭아나무에 올라가 거꾸로 땅에 떨어지며 용맹스럽게 참회하였다. 율사는 그제야 교()를 전하고 이마에 물을 뿌리고, 드디어 가사와 바리때, 공양차제비법1권과 점찰선악업보경2, 간자 189개를 주었다. 그리고 다시 미륵진생의 제9간자와 제8간자를 주면서 주의를 주어 말하였다. “9간자는 법이고, 8간자는 신훈성불종자이다. 내 이미 너희에게 주었으니 이것을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거라. 산에 길상초가 난 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에 의해 인간계와 천상계의 중생들을 제도하여 후세에 널리 펼치도록 하여라.”

 

永深等奉敎 直往俗離 尋吉祥草生處 創寺名曰吉祥 永深於此 始設占察法會.

영심등봉교 직왕속리 심길상초생처 창사명왈길상 영심어차 시설점찰법회.

 

영심 등이 가르침을 받들고 곧장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창건하고 길상사(吉祥寺)라고 하였다. 영심은 여기서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律師與父 復到鉢淵 同修道業而終孝之. 師遷化時 登於寺東大巖上示滅. 弟子等 不動眞體而供養 至于骸骨散落 於是以土覆藏 乃爲幽宮. 有靑松卽出 歲月久遠而枯 復生一樹. 後更生一樹 其根一也. 至今雙樹存焉. 凡有致敬者 松下覓骨 或得或不得. 予恐聖骨堙滅 丁巳九月 特詣松下 拾骨盛筒 有三合許. 於大嵓上雙樹下 立石安骨焉云云.

율사여부 복도발연 동수도업이종효지. 사천화시 등어사동대엄상시멸. 제자등 부동진체이공양 지우해골산낙 어시이사복장 내위유궁. 유청송즉출 세월구원이고 복생일수. 후경생일수 기근일야. 지금쌍수존언. 범유치경자 송하멱골 혹득혹부득. 여공성골인멸 정사구월 특지송하 습골성통 유삼합허. 어대암산쌍수하 입석안골언운운.

 

율사는 아버지와 함께 다시 발연사로 가서 함께 도를 닦으며 끝까지 효도하였다. 율사는 세상을 떠날 때 절 동쪽 큰 바위 위에 올라가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시체를 옮기지 않고 공양하다가 뼈가 흩어져 떨어질 때, 흙을 덮어 무덤을 만들었다. 그러자 푸른 소나무가 곧 나왔는데, 세월이 오래 흘러 말라죽자 다시 나무 하나가 나왔다. 그 뒤에 다시 나무 하나가 났는데, 이 두 그루의 뿌리는 하나였다. 지금도 두 그루의 나무가 남아 있다. 율사를 공경하는 사람들 중에 소나무 밑에서 뼈를 찾는 사람들도 있는데, 혹은 찾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율사의 뼈가 다 없어질까 염려되어서, 정사년(서기 1197) 9월에 특별히 소나무 밑에 가서 뼈를 주워 통에 담았는데 세 홉 정도 되었다. 그리하여 큰 바위 위에 두 그루 소나무 밑에 돌을 세우고 뼈를 모셨다.

 

此錄所載眞表事跡 與鉢淵石記 互有不同 故刪取瑩岑所記而載之 後賢宜考之 無極記.

차록소재진표사적 여발연석기 호유부동 고책취영잠소기이재지 후현의고지 무극기.

 

이 기록에 실린 진표의 사적은 발연석기(鉢淵石記)와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영잠(瑩岑)이 기록한 것만 추려서 싣는다. 후세의 현명한 이들은 마땅히 이를 살펴야 할 것이다. 무극(無極) .

 

 

* : 중국 강에 살았던 악어 비슷한 동물

, 본문에 나오는 동해는 바다가 아니고 동쪽 강으로 봐야 옳다 그 이유가 자라는 바다 생물 아니고 심지어 이 타는 앙쯔강 악어로도 알려져있다.

 

여기서 점찰이나 원광법사의 撲懺法, 塔懺法은 오늘날로 보면 일종의 自害를 통한 참회법으로 불교 고유의 것이기 보다는 본디 가진 민속신앙과 불교의 결합으로 볼 것이다.

 

이는 필리핀 축제에서 가시면류관이나 자기에의 매질등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