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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券 第三 塔像 第四- 鍪藏寺 彌陀殿

鍪藏寺 彌陀殿

 

京城之東北二十許里 暗谷村之北 有鍪藏寺. 第三十八元聖大王之考 大阿干孝讓追封明德大王之爲叔父波珍飡追崇所創也. 幽谷逈絶 類似削成 所寄冥奧 自生虛白 乃息心樂道之靈境也.

경성지동북이십허리 암곡촌지북 유무장사. 제삼십팔원성대왕지고 대아간쳐양추봉명덕대왕지위숙부파진찬추숭소창야. 유곡향절 유사삭성 소기명오 자생허백 내식심악도지영경야.

 

서울 동북쪽 20리쯤 암곡촌(暗谷村) 북쪽에 무장사가 있었다. 신라 제38대 원성대왕(元聖大王)의 돌아가신 아버지 대아간(大阿干) 효양(孝讓), 즉 추봉된 명덕대왕(明德大王)이 숙부 파진찬(波珍飡)을 추모하여 세운 절이다. 그윽한 골짜기는 너무나 험준하여 마치 깎아 세운 것 같고, 절이 있는 곳은 깊고 어두워서 저절로 마음이 텅 비고 순박해질 것이니, 마음을 쉬고 도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이었다.

 

寺之上方 有彌陁古殿 乃昭成[一作聖]大王之妃桂花王后 爲大王先逝 中宮乃充充焉 皇皇焉 哀戚之至 泣血棘心. 思所以幽贊明休 光啓玄福者 聞西方有大聖 曰彌陁 至誠歸仰 則善救來迎 是眞語者 豈欺我哉.’ 乃捨六衣之盛服 罄九府之貯財 召彼名匠 敎造彌陀像一軀.

사지상방 유미타고전 애소성[일작성]대왕지비계화왕후 위대황선서 중궁내충충언 황황언 애척지지 읍혈극심. 사소이유찬명휴 광계현복자 문서방유대성 왈미타 지성귀앙 즉선구래영 시진어자 기사아재.’ 내사육의지성복 경구부지저재 소피명장 교조미타상일구.

 

절 윗쪽에는 아미타를 모신 오래된 전각이 있으니, 곧 소성대왕(昭成大王)[소성(昭聖)이라고도 한다.]의 왕비인 계화황후(桂花王后)는 대왕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수심에 가득 차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피눈물을 흘리며 가슴 아파하였다. 그러다 왕의 밝고 아름다운 업적을 기리고 명복을 빌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서방에 아미타라 하는 큰 성인이 있어서 지극한 정성으로 귀의하면 구원하여 맞이한다는 말을 듣고는, ‘이것이 참말이라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왕후가 입던 여섯 벌의 화려한 옷을 희사하고 궁중에 있던 재물을 다 내어서 이름난 장인을 불러 미타상 한 구를 만들게 하고 아울러 신중(神衆)도 만들어 모셨다.

 

先是寺有一老僧. 忽夢眞人坐於石塔東南岡上 向西爲大衆說法. 意謂此地 必佛法所住也 心秘之而不向人說. 嵓石巉崒 流澗激迅 匠者不顧 咸謂不臧 及乎辟地. 乃得平坦之地 可容堂宇 宛似神基. 見者莫不愕然稱善. 近古來殿則壞圯 而寺獨在.

선시사유일노승. 홀몽진인좌어석탑동남상 향서위대중설법. 의위차지 필불법소주야 필비지이불향인설. 암석창출 유간격신 장자불고 함위부장 급호벽지. 내득평산지지 가용당우 완사신기. 견자막불악연칭선. 근고래전즉괴이 이사독재.

 

이에 앞서 이 절에는 노승 한 명이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진인이 석탑의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 서쪽을 향해 대중을 위해 설법하는 꿈을 꾸었다. 노승은 이곳이 반드시 불법이 머무를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 속에 숨기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곳은 바위가 험준하고 계곡의 물이 격하게 흐르는 곳이라 장인들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모두들 좋지 못하다고 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터를 닦을 때에는 평탄한 곳을 얻어 집을 세울 만하여, 완연히 신령스러운 터와도 같았다. 그래서 보는 이들마다 깜짝 놀라며 좋다고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미타전은 허물어졌고 절만 홀로 남아 있다.

 

諺傳太宗統三已後 藏兵鍪於谷中 因名之.

언전태종통삼이후 장병무어곡중 인명지.

 

세속에 전하기를, 태종(太宗)이 삼국을 통일한 후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묻었기 때문에 무장사(鍪藏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