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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券 第三 塔像 第四- 南月山

南越山

 

[亦名甘山寺]

[또한 감산사(甘山寺)라고도 한다.]

 

寺在京城東南二十許里. 金堂主彌勒尊像火光後記云 開元七年己未二月十五日 重阿飡金志誠 爲亡考仁章一吉飡 亡妃觀肖里夫人 敬造甘山寺一所石彌勒一軀. 兼及愷元伊飡 弟良誠小舍玄度師 姉古巴里 前妻古老里 後妻阿好里 兼庶兄及漢一吉飡一幢薩飡 聰敏大舍 妹首肹買等 同營玆善. 亡妣觀肖里夫人 古人成之 東海欣支邊散也.”[古人成之以下 文未詳其意 但存古文而已 下同].

사재경성동남이십허리. 금당주미륵존상화광후기운 개원칠년기미이월십오일 중아찬김지성 위망고인장일길찬 망비관초리부인 경조감산사일소석미륵일구. 겸내개원이찬 제양성소사현석사매고파리 전처고노리 후처아호리 겸서형금한일길찬이당살찬 총민대사 매수힐매등 동영자선. 망비관초리부인 고인성지 동해흔지변산야.”[고인성지이하 문미상시의 단존고문이기 하동]

 

이 절은 서울 동남쪽 20리쯤에 있다. 금당의 주 부처인 미륵존상 화광의 후면의 기()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개원(開元) 7년 기미(서기 719) 215일에 중아찬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찬(一吉飡)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 정성껏 감산사(甘山寺) 한 채를 조성하고 돌미륵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겸하여 개원(愷元) 이찬(伊飡)과 동생 양성(良誠) 소사(小舍)와 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 고노리(古老里)와 후처 아호리(阿好里), 서형 급한(及漢) 일길찬과 일당(一幢) 살찬(薩飡), 총민(聰敏) 대사(大舍)와 누이동생 수힐매(首肹買) 등에게까지 미치게 하기 위해 이러한 선을 베풀었다. 어머니 관초리 부인이 고인이 되자 동해 흔지(欣支) 주변에 뼈를 뿌렸다.”[‘고인성지(古人成之)’ 이하는 글의 뜻을 알 수 없다. 다만 옛글 그대로 적어둔다. 아래도 같다.]

 

彌陁佛火光後記云 重阿飡金志誠 曾以尙舍奉御 又執事侍郞 年六十七 致仕閑居 奉爲國主大王 伊飡愷元 亡考仁章一吉飡 亡妃亡弟小舍梁誠 沙門玄度 亡妻古路里 亡妹古巴里 又爲妻阿好里等 捨甘山莊田 建伽藍. 仍造石彌陁一軀 奉爲亡考仁章一吉滄. 古人成之東海欣支邊散也.” [按帝系 金愷元乃太宗春秋之弟 太子愷元角干也 乃文姬之所生也. 金志誠乃仁章一吉飡之子 東海欣支 恐法敏葬東海也].

미타불화광후기운 중아찬김지성 증이상사봉어 우집사시랑 년육십칠 치사한거 봉위국주대왕이찬개원 망고인장일길찬 망비망제소사양성 사문현고 망처고로리 망비고파리 우위처아호리등 사감산장전 건가람. 잉조석미타일구 봉위망고인장일길찬. 고인성지동해흔지변산야.”[안제계김개원내태종춘추지제 태자개원각간야 내문희지소생야. 김지성내인장일길찬지자 동해흔지 공법민장동해야]

 

미타불 화광 후기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중아찬 김지성은 일찍이 상사봉어(尙舍奉御)와 집사시랑(執事侍郞)을 지냈는데, 나이 67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하게 지내면서, 나라의 대왕과 이찬 개원,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찬, 돌아가신 어머니, 죽은 동생, 소사 양성(梁誠), 사문 현도, 죽은 아내 고로리(古路里),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 또 아내 아호리 등을 위해 감산(甘山)의 농장을 희사하여 절을 세웠다. 또 돌미륵 하나를 만들어서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찬을 위하여 모셨다. 그가 고인이 되자 동해 흔지 주변에 뼈를 뿌렸다.”[제왕의 계보를 살펴보니, 김개원은 곧 태종(太宗) 춘추(春秋)의 여섯째 아들인 개원 각간이니, 곧 문희(文姬)가 낳았다. 김지성은 곧 인장 일길찬의 아들이다. ‘동해 흔지는 아마도 법민(法敏)을 동해에 장사 지낸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