臺山 五萬眞身
按山中古傳 “此山之署名眞聖住處者 始自慈藏法師.” 初法師欲見中國五臺山文殊眞身 以善德王代貞觀十年丙申[唐僧傳云十二年 今從三國本史]入唐.
안산중고전 차산지서명진성주처자 시자장법사 초법사욕견중국오대산문수진신 이선덕왕태정관십년병신[당승전운십이년 금종삼국본사]입당.
산중고전(山中古傳)을 살펴보면 이러한 기록이 있다. “이 산이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르던 곳이라고 기록한 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五臺山)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고 싶어서 신라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貞觀) 10년 병신(서기 636)에[당승전(唐僧傳)에 12년이라고 하였지만, 여기서는 삼국본사(三國本史)의 기록에 따른다.] 당나라에 들어갔다.
初至中國太和池邊石文殊處 虔祈七日 忽夢大聖授四句揭. 覺而記憶 然皆梵語 罔然不解. 明旦忽有一僧 將緋羅金點架裟一領 佛鉢一具 佛頭骨一片 到于師邊 問 “何以無聊?”
초지중국태화지변석문수처 건기칠일 홀몽대성수사구게. 각이기억 연개범어 망연불해. 명단홀유일승 장비라금점가사일령 불발일구 불두골일편 도우사변 문 “하이무료?”
처음에 중국 태화지(太和池) 연못가의 문수보살 석상이 있는 곳에 이르러 경건하게 7일 동안 기도하였는데, 문득 꿈에 부처가 네 구절의 게송을 주었다. 꿈을 깬 뒤에도 그 게송을 기억할 수 있었지만 모두 범어였으므로 그 의미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홀연히 어느 한 스님이 붉은 비단에 금빛 점이 있는 가사 한 벌과 부처의 바리때 하나와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 옆으로 오더니 물었다. “어찌해서 그리도 수심에 잠겨 있소?”
師答以 “夢所受四句偈 梵音不解爲辭.” 僧譯之云 “呵囉婆佐曩 是曰了知一切法 達㘑哆佉嘢 云自性無所有. 曩伽呬伽曩 云如是解法性 達㘑盧舍那 云卽見盧舍那.”
사답이몽소수사구세 범음불해위사 승역지운 “가라파좌낭 시왈료지일체법 달예치거야 운 자성무소유. 낭가사가낭운 여시해법성 달예노사나 운즉견노사나.”
법사가 대답하였다. “꿈에 네 구절의 게송을 받았지만 범어여서 그 뜻을 풀지 못해서 그럽니다.” 그러자 승려가 번역하여 말해주었다. “가라파좌낭이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말이고, 달예치거야란 본래의 성품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오. 낭가사가낭이란 이와 같이 법성을 알았다는 말이고, 달예노사나란 노사나불을 곧 본다는 말이오.”
仍以所將架裟等 付而囑云 “此是本師釋迦尊之道具也 汝善護持.” 又曰 汝本國艮方溟州界 有五臺山 一萬文殊常住在彼 汝往見之 言已不現.
잉이소장가사등 부이촉운 “차시본사석가존지도구야 여선호지.” 우왈 “여본국간방명주계 유오대산 일만문수상주재치 여왕견지.” 언이불현.
그리고는 자신이 가지고 온 가사 등의 물건을 법사에게 주면서 부탁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본사 석가세존(釋迦世尊)이 쓰시던 도구요. 그대가 잘 보관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또 말하였다. “그대의 본국에 동북쪽 명주(溟州) 경계에 오대산(五臺山)이 있는데 1만의 문수보살이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다오.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遍尋靈迹 將欲東還 太和池龍現身請齋 供養七日 乃告云 “昔之傳偈老僧 是眞文殊也.”
편심영적 장욕동환 태화지용현신청재 공양칠일 내고운 “석지전게노승 시진문수야.”
법사는 영험 있는 유적을 두루 찾아보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태화지의 용이 나타나 재를 청하여서 7일 동안 공양을 올렸다. 그러자 용이 법사에게 말하였다. “지난번 게송을 전한 늙은 승려가 바로 진짜 문수보살입니다.”
亦有叮囑創寺立塔之事. 具載別傳. 師以貞觀十七年 來到此山 欲覩眞身. 三日晦陰 不果而還. 復住元寧寺 乃見文殊. 云 “至葛蟠處 今淨嵓寺是.”[亦載別傳]
역유정촉창사립탑지사. 구재별전. 사이정관십칠년 래도차산 욕도진신. 삼일회음 불과이환 복주원영사 내견문수 운 “지갈번처 금정암사시.”[역재별전]
이렇게 말하고는 또 절을 짓고 탑을 세울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은 별전에 자세히 실려 있다. 법사는 정관 17년(서기 643)에 강원도 오대산에 이르러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3일 동안 날이 어둡고 흐려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가, 다시 원녕사(元寧寺)에 머물면서 문수보살을 뵈었다. 문수보살이 법사에게 “칡덩굴이 얽혀 있는 곳으로 가라.”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정암사(淨嵓寺)가 이곳이다.[이것도 역시 별전에 실려 있다.]
後有頭陁信義 乃梵日之門人也. 來尋藏師憩息之地 創庵而居. 信義旣卒 庵亦久廢 有水多寺長老有緣 重創而居. 今月精寺是也.
후유두타신의 내범일지문인야. 내심장사게식지지 창암이거. 신의기졸 엄역구폐 유수다사장노유연 중창이거. 금월정시야.
훗날 두타승 신의(信義)가 있었으니, 곧 범일대사(梵日大師)의 제자이다. 이 오대산에서 자장법사가 쉬던 곳에 암자를 짓고 머물렀다. 신의가 죽자 암자도 역시 오래도록 버려져 있었는데, 수다사(水多寺)의 장로 유연(有緣)이 다시 암자를 짓고 살았다. 지금의 월정사(月精寺)가 바로 이것이다.
藏師之返新羅 淨神大王太子寶川孝明二昆弟[按國史 新羅無淨神寶川孝明三父子明文 然此記下文云 神龍元年開土立寺. 則神龍乃聖德王卽位四年乙巳也. 王名興光 本名隆基 神文之第二子也. 聖德之兄孝照名理恭 一作洪. 亦神文之子. 神文政明字日照 則淨神恐政明神文之訛也 孝明乃孝照一作昭之訛也. 記云 孝明卽位 而神龍年開土立寺云者 亦不細詳言之爾. 神龍年立寺者 乃聖德王也]
장사지반신라 정신대왕태자보천효명이곤제[안국사 신라부정신보천효명삼부자명문. 연차기하문운 신룡원년개토립사. 즉신룡내성덕왕즉위사년을사야. 왕명흥광 본명융기 신문지재이자야. 성덕지형효조명리공 일작홍. 역신문지자 신문정명자일조 즉정신공정명신문지와야 효명내효조일작조지와야. 기운 효명즉위 이신룡년개토립사운자 역불세상언지이. 신룡연입사자 내성덕왕야.]
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淨神大王)의 태자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의 두 형제가[『국사(國史)』를 살펴보니, 신라에는 정신대왕과 보천과 효명의 세 부자에 대한 분명한 글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아래 글에서는, 신룡(神龍) 원년(서기 705)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하였다. 그러한 즉 신룡이란 곧 성덕왕(聖德王) 즉위 4년인 을사(서기 705)이다. 왕의 이름은 흥광(興光)인데 본명은 유기(隆基)이고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이다. 성덕왕의 형인 효조(孝照)의 이름은 이공(理恭)인데 공(恭)을 홍(洪)이라고도 한다. 역시 신문왕의 아들이다. 신문왕 정명(政明)의 자는 일조(日照)이니, 곧 정신은 아마도 정명 신문이 잘못 전해진 것이고, 효명도 곧 효조나 효소(孝昭)가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에서는 효명이 왕위에 오른 것은 말하였지만, 신룡 연간에 터를 잡아 절을 세웠다는 것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신룡 연간에 절을 세운 이는 바로 성덕왕이다.]
到河西府[今溟州 亦有河西郡是也 一作河曲縣 今蔚州非是也] 世獻角干之家 留一宿. 翌日過大嶺 各領千徒 到省烏坪 遊覽累日. 忽一夕昆弟二人 密約方外之志 不令人知 逃隱入五臺山. [古記云 太和元年戊申八月初 王隱山中. 恐此文大誤. 按孝照一作昭 以天授三年壬辰卽位. 時年十六 長安二年壬寅崩 壽二十六. 聖德以是年卽位 年二十二. 若曰太和元年戊申 則先於孝照卽位甲辰 已過四十五歲 乃太宗文武王之世也. 以此知此文爲誤 故不取之] 侍衛不知所歸 於是還國.
도하서부[금명주 역유하서군시야 일작하곡현 금울주비시야] 세헌각간지가 유일숙. 익일과대령 각령천도 도성오평 유람누일. 홀일석곤제이인 밀약방외지지 부령인지 도은입오대산.[고기운 태화원년무신팔월초 왕은산중. 공차문대오. 안효조일작소 이천수삼년임진즉위. 시년십육 장안이년임인붕 수이십육. 성덕이시년즉위 년이십이. 약왈태화원년무신 즉선어효조즉위갑진 이과사십오세 내태종문무왕지세야. 이차지차문위오 고불취지] 시위부지소귀 어시환국.
하서부(河西府)[지금의 명주이니 하서군(河西郡)이 이곳이다. 하곡현(河曲縣)이라고도 쓰는데, 그렇다면 지금의 울주(蔚州)이니 옳지 않다.]에 와서 각간 세헌(世獻)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큰 고개를 넘어 각자 1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이르러, 여러 날 동안 유람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두 형제는 속세를 벗어나기로 몰래 약속하고는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도망가서 오대산에 숨었다.[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태화(太和) 원년 무신(서기 648) 8월 초에 왕이 산속에 숨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글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효조(孝照)는 효소(孝昭)라고도 하는데, 천수(天授) 3년 임진(서기 692)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나이는 16세였으며, 장안 2년 임인(서기 702)에 세상을 떠났으니 26세였다. 성덕왕이 이 해에 왕위에 올랐으니 나이가 22세였다. 만약 태화 원년 무신이라면 효조가 왕위에 오른 임진년보다 이미 45년이나 앞서게 되니,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시대가 된다. 이것으로 이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취하지 않는다.] 호위하던 자들이 간 곳을 알지 못하여 그대로 서울로 돌아왔다.
二太子到山中. 靑蓮忽開地上. 兄太子結庵而止住 是曰寶川庵. 向東北行六百餘步 北臺南麓 亦有靑蓮開處 弟太子孝明 又結庵而止. 各懃修業.
이태자도산중 청련홀개지상 형태자결암이지주 시왈보천암. 향동북행육백여보 북대남록 역유청련개처 제태자효명 우결암이지. 각근수업.
두 태자가 산속에 이르자 푸른 연꽃이 문득 땅 위에 피었다. 형이 그곳에 암자를 짓고 머물렀는데, 이것을 보천암(寶川庵)이라 하였다. 동북 쪽으로 6백여 보를 가면 북쪽 대(臺)의 남쪽 기슭에도 푸른 연꽃이 핀 곳이 있었는데, 동생 효명도 여기에 암자를 짓고 머물렀다. 각자 부지런히 불법을 닦았다.
一日同上五峯瞻禮次 東臺滿月山 有一萬觀音眞身現在 南臺麒麟山 八大菩薩爲首 一萬地藏 西臺長嶺山 無量壽如來爲首 一萬大勢至 北臺象王山 釋迦如來爲首 五百大阿羅漢. 中臺風盧山 亦名地盧山 毗盧遮那爲首 一萬文殊. 如是五萬眞身 一一瞻禮.
일일동상오봉첨예차 동대만원산 유일만관음진신현재 남대기린산 팔대보살위수 일만지장 서대장령산 무량수여래위수 일만대세지 북대상왕산 석가여래위수 오백대아라한. 중대 풍로산 역명지로산 비로자나위수 일만문수 여시오만진신 일일첨예.
하루는 형제가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올라 예를 올리려는데, 동대 만월산(滿月山)에 1만 관음보살의 진신이 나타났고 남대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이 나타났으며, 서대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대세지보살이 나타났고 북대 상왕산(象王山)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 대아라한(大阿羅漢)이 나타났다. 그리고 중대 풍로산(風盧山)은 혹 지로산(地盧山)이라고도 하는데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이 나타났다. 형제는 이와 같은 5만 보살의 진신에 일일이 예를 올렸다.
每日寅朝 文殊大聖 到眞如院 今上院 變現三十六種形. 或時現佛面形 或作寶珠形 或作佛眼形 或作佛手形 或作寶塔形 或萬佛頭形 或作萬燈形 或作金橋形 或作金鼓形 或作金鍾形 或作神通形 或作金樓形 或作金輪形 或作金剛杵形 或作金甕形 或作金鈿形 或五色光明形 或五色圓光形 或吉祥草形 或靑蓮花形 或作金田形 或作銀田形 或作佛足形 或作雷電形 或如來湧出形 或地神湧出形 或作金鳳形 或作金烏形 或馬産獅子形 或鷄産鳳形 或作靑龍形 或地白象形 或作鵲鳥形 或牛産師子形 或作遊猪形 或作靑蛇形. 二公每汲洞中水 煎茶獻供 至夜各庵修道.
매일인조 문수대성 도진여원 금상원 변현삼십육종형. 혹시현불면형 혹작보주향 혹작불안형 혹작불수형 혹작보탑형 혹만불두형 혹작만등형 혹작금교형 혹작금고형 혹작금종형 혹작신총형 혹작금루형 혹작금륜형 혹작금강저형 혹작금옹형 혹작금세형 록오색광명형 혹오샥원광형 혹길상초형 혹청련화형 혹작금전형 혹작은전형 혹작불족형 혹작뇌전형 혹여랴용출형 혹지신용출형 혹작금봉형 혹작금오형 혹마산사자형 혹계산봉형 혹작청룡형 촉지백상형 혹작자오형 혹우산사자형 록작유저형 혹작청사형. 이공매급동중수 전처헌공 지여각암수도.
매일 새벽마다 문수보살이 진여원(眞如院), 즉 지금의 상원(上院)에 이르러 36가지의 형상으로 변하여 나타났다. 어느 때는 부처의 얼굴 모양으로, 혹은 보주 모양으로, 혹은 부처의 눈 모양으로, 혹은 부처의 손 모양으로, 혹은 보탑 모양으로, 혹은 만 가지 부처 머리 모양으로, 혹은 만 가지 등(燈) 모양으로, 혹은 금으로 된 다리 모양으로, 혹은 금으로 된 북 모양으로, 혹은 금으로 된 종 모양으로, 혹은 신통 모양으로, 혹은 금으로 된 누각 모양으로, 혹은 금으로 된 바퀴 모양으로, 혹은 금강저(金剛杵) 모양으로, 혹은 금으로 된 항아리 모양으로, 혹은 금비녀 모양으로, 혹은 오색 광명의 모양으로, 혹은 오색 원광 모양으로, 혹은 길상초 모양으로, 혹은 푸른 연꽃 모양으로, 혹은 절 모양으로, 혹은 전각 모양으로, 혹은 부처의 발 모양으로, 혹은 번개 모양으로, 혹은 여래가 솟아오르는 모양으로, 혹은 지신이 솟아오르는 모양으로, 혹은 금 봉황 모양으로, 혹은 금 까마귀 모양으로, 혹은 말이 낳은 사자 모양으로, 혹은 닭이 낳은 봉황 모양으로, 혹은 청룡의 모양으로, 혹은 흰 코끼리 모양으로, 혹은 까치 모양으로, 혹은 소가 낳은 사자 모양으로, 혹은 놀고 있는 돼지 모양으로, 혹은 푸른 뱀 모양으로도 나타났다. 두 태자는 매일 골짜기 물을 길어다 차를 달여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자의 암자에서 도를 닦았다.
淨神王之弟與王爭位 國人廢之 遣將軍四人 到山迎之 先到孝明庵前 呼萬歲 時有五色雲 七日垂覆 國人尋雲而畢至 排列鹵簿 將邀兩太子而歸 寶川哭泣以辭 乃奉孝明歸卽位 理國有年[記云 在位二十餘. 盖崩年壽二十六之訛也. 在位但十年爾. 又神文之弟爭位事 國史無文 未詳]
정신왕지제여왕쟁위 국인폐지 견장군사인 도산영지 선도효명암전 호만세 시유오색운 칠일수복 국인심운이필지 배열함부 장요양태자이귀 보천곡읍이사 내봉효명귀즉위 이국유년[기운 재위이십여. 개붕년수이십육지와야. 재위단십년이. 우신문지제쟝위사 국사무문 미상]
이때 정신왕의 동생이 왕과 왕위를 다투자 나라 사람들은 이를 폐위시키고, 네 명의 장군을 보내어 산에 가서 이들 두 태자를 맞아오도록 하였다. 이들은 먼저 효명의 암자 앞에 와서 만세를 불렀다. 그때 오색구름이 7일 동안 덮고 있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 구름을 찾아 마침내 이르러서 임금의 의장을 벌리어 열을 짓고 두 태자를 맞이해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보천이 울며 사양했기 때문에 곧 효명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효명은 여러 해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기(記)에서는 20여 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고 하였다. 아마도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가 26세였다는 말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왕위에 있었던 것은 단지 10년뿐이었다. 또 신문왕의 동생이 왕위를 다툰 일은 『국사』에 그러한 글이 없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以神龍元年[乃唐中宗復位之年 聖德王卽位四年也.]乙巳三月初四日 始改創眞如院. 大王親率百寮到山 營搆殿堂 竝塑泥像文殊大聖 安于堂中. 以知識靈卞等五員 長轉華嚴經 仍結爲華嚴社 長年供費. 每歲春秋 各給近山州縣倉租一百石 淨油一石 以爲恒規. 自院西行六千步 至牟尼岾 古伊峴外 柴地十五結 栗枝六結 坐位二結 創置莊舍焉.
이신룡원년{내당중종복위지년 성덕왕즉위사년야}을사삼월초사일 시개창진여원. 대왕친솔백가도산 영구전당 병소니상문수대성 안우당중. 이지식영변등오원 장전화엄경 잉결위화엄사 장년공비. 매세춘추 각급근산주현창조일백석 정유일석 이위항규. 자원서행육천보 지모니재 고이현외 자지십오결 율지육결 좌위이결 창치장사언.
신룡 원년 을사(서기 705)[곧 당나라 중종(中宗)이 복위한 해이다. 성덕왕이 왕위에 오른 지 4년이다.] 3월 초 3일에 비로소 진여원(眞如院)을 고쳐 세웠다. 대왕은 친히 모든 관료들을 거느리고 산에 이르러서 불전과 불당을 세우고, 아울러 문수보살의 소상을 만들어 불당에 모셨다. 지식(知識)과 영변(靈卞) 등 다섯 명에게 돌아가며 오래도록 화엄경(華嚴經)을 읽도록 하고, 화엄사(華嚴社)를 만들어서 오랫동안 그 비용을 대었다. 해마다 봄가을에 이곳에서 가까운 주와 현에서 창고의 곡식 100석과 맑은 기름 한 섬씩 바치도록 규정을 정하였다.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천보를 가서 모니재(牟尼岾)과 고이현(古伊峴) 밖에 이르기까지의 땔나무를 댈 땅 15결, 밤나무 밭 6결, 좌위(坐位) 2결을 주고 농장의 집을 세웠다.
寶川常汲服其靈洞之水 故晩年肉身飛空 到流沙江外 蔚珍國掌天窟停止 誦隨求陁羅尼 日夕爲課. 窟神現身白云 “我爲窟神 已二千年 今日始聞隨求眞銓.”
보천상급복기영동지수 고만년육신비공 도유사강외 울진국장천굴정지 송수구다하니 일석위과. 굴신현신백운 “아위굴신 이이천년 금일시문수구진전.”
보천은 항상 그 영험한 골짜기의 물을 길어 마셨다. 그래서 만년에는 몸이 허공을 날아 유사강(流沙江) 밖 울진국(蔚珍國) 장천굴(掌天窟)에 이르러 머물면서, 수구다라니경(隨求陁羅尼經)을 외는 것으로 하루 일과로 삼았다. 장천굴의 신이 나타나서 말하였다. “나는 이 굴의 신이 된 지 이미 2천 년이지만, 오늘에야 비로소 『수구다라니경』의 진리를 들었습니다.”
請受菩薩戒 旣受已. 翌日窟亦無形. 寶川驚異 留二十日 乃還五臺山神聖窟. 又修眞五十年 忉利天神 三時聽法 淨居天衆 烹茶供獻 四十聖騰空十尺 常時護衛. 所持錫杖 一日三時作聲 遶房三匝 用此爲鍾磬 隨時修業. 文殊或灌水寶川頂 爲授成道記莂.
청수보살계 기주이. 익일굴역무형. 보천경이 유이십일 내환오대산신성굴. 우슈진오십년 도리천신 삼시청법 정거천중 팽차공헌 사십성등공십척 상시호위. 소지석장 일일삼시작성 요방삼잡용차위종경 수시수업. 문술혹관수보천정 위수성도기별.
그리고는 보살계를 받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계를 받고 나자 그 다음날 굴 또한 없어졌다. 보천이 놀랍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여 20일을 머물다가 오대산 신성굴(神聖窟)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 50년 동안 수도를 하자, 도리천(忉利天)의 신이 하루 세 번 불법을 들었고 정거천(淨居天)의 무리들이 차를 달여 바쳤으며, 40명의 성인이 10척 위의 공중을 날면서 늘 호위하였다. 그의 지팡이는 하루 세 번 소리를 내며 방을 세 번씩 돌아다녔기 때문에 이것으로 쇠북과 경쇠로 삼아 시간에 맞추어서 수업하였다. 문수보살이 간혹 보천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기별(成道記莂, 부처가 제자에게 성불할 것을 예언하는 것)을 주기도 하였다.
川將圓寂之日 留記後來山中所行輔益邦家之事云 “此山乃白頭山之大脉 各臺眞身常住之地 靑在東臺北角下 北臺南麓之末 宜置觀音房 安圓像觀音 及靑地畫一萬觀音像 福田五員 晝書讀八卷金經仁王般若千手呪 夜念觀音禮懺 稱名圓通社.
천장원적지일 유기후래산중소행보익방가지사운 “차산백두산지대맥 각대진신상주지지 청재동대북각하 북대남록지말 의치관음방 안원상관음 급청지화일만관음상 복전오원 화서독팔권금경인왕반야천수주 야념관음예참 칭명원통사.
보천이 입적하는 날에 훗날 이 산 속에서 시행하여 나라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기록해 두었으니,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이 산은 곧 백두산(白頭山)의 큰 줄기로, 각 대(臺)에는 진신이 늘 있는 곳이다. 청색 방향인 동대의 북쪽 모퉁이 아래와 북대의 남쪽 기슭 끝에는, 마땅히 관음방을 설치하여 원상의 관음보살과 푸른 바탕에 1만의 관음보살상을 그려 모시고,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8권의 『금경(金經)』과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과 『천수주(千手呪)』를 읽게 하고 밤에는 『관음경(觀音經)』의 예참(禮讖)을 외우게 하며, 그곳을 원통사(圓通社)라 부르도록 하라.
赤在南臺南面 置地藏房 安圓像地藏 及赤地畫八大菩薩爲首 一萬地藏像 福田五員 晝讀地藏經金剛般若 夜占察禮懺 稱金剛社.
적재남대남면 치지장방 안원상지장 급적지화팔대보살위수 일만지장상 복전오원 화독지장경금강반야 야점착예참 칭금강사.
붉은색 방향인 남대의 남쪽 면에는 지장방(地藏房)을 설치하여 원상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팔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을 그려 모시고,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지장경(地藏經)과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읽게 하고 밤에는 점찰경(占察經)의 예참을 외우게 하며, 그곳을 금강사(金剛社)라 부르도록 하라.
白方西臺南面 置彌陁房 安圓像無量壽 及白地畫無量壽如來爲首 一萬大勢至 福田五員 晝讀八卷法華 夜念彌陁禮懺 稱水精社.
백방서대남면 치미타방 안원상무령수 급백지화무량수여래위수 일만대세지 복잔오원 화독팔궈법화 야념미타예참 칭수정사.
백색 방향인 서대의 남쪽 면에는 미타방(彌陁房)을 설치하여 원상 무량수불과 흰 바탕에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을 그려 모시고,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8권의 법화경(法華經)을 읽고 밤에는 아미타불의 예참을 외우게 하며, 수정사(水精社)라고 부르도록 하라.
黑地北臺南面置羅漢堂 安圓像釋迦 及黑地畫釋迦如來爲首 五百羅漢 福田五員 晝讀佛報恩經涅槃經 夜念涅槃禮懺 稱白蓮社.
흑지북대남면치나한당 안원상석가 급흑지화석가여래위수 오백나한 복전오원 회독불보은경열반경 야념열반예참 칭백련사.
검은색 방향인 북대의 남쪽 면에는 나한당(羅漢堂)을 설치하여 원상 석가불과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나한을 그려 모시고,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불보은경(報恩經涅槃經)』과 『열반경(涅槃經)』을 읽게 하고 밤에는 『열반경』의 예참을 외우게 하며, 백련사(白蓮社)라 부르도록 하라.
黃處中臺眞如院 中安泥像文殊不動 後壁安黃地畫毗盧遮那爲首 三十六化形 福田五員 晝讀華嚴經六百般若 夜念文殊禮懺 稱華嚴社
황처중대진여원 중안니상문수부동 후벽안황지화비로자나위수 삼십육화형 복전오원 화독화엄경육백반여 야념문수예참 칭화엄사.
황색 방향인 중대의 진여원에서는 중앙에 문수보살 부동상(不動像)을 모시고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36문수보살을 그려 모시고,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화엄경(華嚴經)과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읽게 하고 밤에는 문수보살 예참을 외우게 하며, 화엄사(華嚴社)라 부르도록 하라.
寶川庵改創華藏寺 安圓像毗盧遮那三尊及大藏經 福田五員 長門藏經 夜念華嚴神衆. 每年設華嚴會一百日 稱名法輪社 以此華藏寺. 爲五臺社之本寺 堅固護持. 命淨行福田 鎭長香火 則國王千秋 人民安泰 文武和平 百穀豐穰矣. 又加排下院文殊岬寺 爲社之都會 福田七員 晝夜常行華嚴神衆禮懺. 上件三十七員 齋料衣費 以河西府道內八州之稅 充爲四事之資. 代代君王 不忘遵行幸矣.
보천암개창화장사 안원상비로자나삼존급대장경 복전오원 장문장경 야념화엄신중. 매년설화엄회일백일 칭명법륜사 이차화장사. 위오대사지본사 견고호지. 명정행복전 진장향화 즉국왕천수인민안태 문무롸평 백곡풍양의. 우가배하원문수갑사 위사지도회 복전칠원 화야상행화엄신중예참. 상건삼십칠원 재료의비 이하서부도냐팔주지세 충위사지자. 대대군왕 불망준행행의.
보천암(寶川庵)을 화장사(華藏寺)라 고쳐 세우고, 원상 비로자나 삼존과 『대장경(大藏經)』을 모시고,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대장경』을 읽고 밤에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을 외우게 하라. 매년 100일 동안 화엄회를 베풀고 그곳을 법륜사(法輪社)라 부르도록 하라. 이 화장사를 오대사(五臺社)의 본사로 삼아 굳게 지키도록 하라. 행실이 깨끗하고 법력이 높은 승려에게 명하여 향불을 길이 받들게 하면, 국왕이 오래 살 것이고 백성들이 태평하며, 문무가 모두 화평하고 백곡이 풍성할 것이다. 또 하원에 문수갑사(文殊岬寺)를 배치하여 사(社)의 중심으로 삼고, 복전승 7명에게 밤낮으로 늘 「화엄신중」의 예참을 행하게 하라. 이상의 37명이 재에 쓰는 비용과 의복의 비용은, 하서부 도내 여덟 주의 세금으로 공양에 필요한 네 가지 물건의 비용으로 충당하라. 이렇게 대대로 군왕이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한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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