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後所將舍利
國史云 “眞興王太淸三年己巳 梁使沈湖 送舍利若干粒. 善德王代貞觀十七年癸卯 慈藏法師所將佛頭骨佛牙佛舍利百粒佛所著緋羅金點袈裟一領. 其舍利分爲三 一分在皇龍塔 一分在太和塔 一分幷袈裟在通度寺戒壇 其餘未詳所在. 壇有二級 上級之中 安石蓋如覆鑊.”
국사운 “진흥왕태청삼년기사 양사심호 송사리액간립. 선덕왕대정관십칠년계묘 자장법사소장불두골불아불사리백립불소착비라금점가사일령. 기사리분삼위 일분재황룡탑 일분재태화탑 일분병가사재통도사계단 기여미상소재. 단유이급 상급지중 안석개여복확.”
『국사(國史)』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진흥왕(眞興王) 때인 태청(太淸) 3년 기사(서기 549)에 양(梁)나라에서 심호(沈湖)를 보내어 사리 몇 알을 보내왔다. 선덕왕(善德王) 시대인 정관(貞觀) 17년 계묘(서기 643)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 부처의 사리 100개과 부처가 입던 붉은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가사 한 벌을 가져왔다.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皇龍寺) 탑에 두고 하나는 태화사(太和寺) 탑에 두고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通度寺)의 계단(戒壇, 승려가 계를 받는 단이다.)에 두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통도사의 계단은 두 층이 있는데, 위층 가운데에 돌 뚜껑을 모셔두었는데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모양 같았다.”
諺云 “昔在本朝 相次有二廉使 禮壇擧石鑊而敬之 前感脩蟒在函中 後見巨蟾蹲石腹. 自此不敢擧之. 近有上將軍金公利生庾侍郞碩 以高廟朝受旨 指揮江東 仗節到寺 擬欲擧石瞻禮. 寺僧以往事難之. 二公令軍士固擧之 內有小石函 函襲之中 貯以瑠璃筒 筒中舍利 只四粒. 傳示瞻敬 筒有小傷裂處 於是庾公適蓄一水精函子 遂奉施兼藏焉 識之以記. 移御江都四年乙未歲也.
언운 석재본조 상차유이염사 예단거석확이경지 전감유망재함중 후견거섬준석복. 자차불감거지. 근유상장군김공리생유시랑석 이고묘조수지 지휘강동 장절도사 의욕거석첨예. 사승이왕사난지. 이공영군사고거지 내유소석함 함습지중 저이유리통 통중사리 지사립. 전시첨경 통유소상열처 어시유공적축일수정함자 수봉이겸장언 식지이기. 이어강도사년을미세야.
세상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 우리 고려 때 두 안렴사(按廉使)가 차례로 와서 계단에 예를 올리고 돌뚜껑을 들어 돌솥을 들어보았더니,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돌 함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다음에는 큰 두꺼비가 돌 속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로부터는 감히 뚜껑을 들고 들여다보지 못하였다. 최근에 상장군 김이생(金利生) 공과 시랑(侍郞) 유석(庾碩)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고 강동(江東)을 지휘할 때, 부절을 가지고 이 절에 와서는 돌뚜껑을 들고 예를 올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절의 승려들이 지난 일을 들면서 어려워하였다. 그래서 두 공이 군사를 시켜서 돌뚜껑을 들게 했는데, 그 안에는 작은 돌함이 있었고 그 속에는 유리통이 있었고 또 그 통 속에는 사리가 겨우 네 알만 들어 있었다. 서로 돌려보면서 경배를 올렸다. 그런데 통이 조금 상한 곳이 있어서, 유공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함 하나를 시주하여 함께 보관하도록 하고 그 일을 기록해 두었다. 이때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지 4년째인 을미년(서기 1235)이었다.”
古記稱百枚分藏三處 今唯四爾 旣隱現隨人 多小不足怪也.
고기칭백매분장삼처 금유사이 기은현수인 다소부족괴야.
고기(古記)에는 이러한 기록되길 사리 100개를 세 곳에 나누어 보관했는데, 이제 다만 네 개뿐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보이지 않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므로 수효가 많고 적은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又諺云 “其皇龍寺塔災之日 石鑊之東面 始有大斑 至今猶然.”
우언운 “기황룡사탑재지일 석확지동면 시유대반 지금유연.”
또 세상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에 돌솥의 동쪽 면에 처음으로 커다란 얼룩이 생겼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卽大遼應曆三年癸丑歲也 本朝光廟四載也 塔之第三災也. 曹溪無衣子留詩云 “聞道皇龍災塔日 連燒一面示無間” 是也.
즉대요응역삼년계축세야 본조광묘사재야 탑지제삼재야. 조계무의자유시운 “문도황룡재탑일 연소일면시무간.” 시야.
당시가 요(遼)나라 응력(應曆) 3년 계축(서기 953)으로 고려 광종 4년이었으며, 탑이 세 번째로 불타던 때였다. 조계종의 무의자(無衣子)가 시를 남겼는데, “듣건대 황룡사 탑이 불탔던 날에, 연이어 한 쪽 면이 불에 타 차이가 없었다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自至元甲子已來 大朝使佐 本國皇華 爭來瞻禮 四方雲水 輻湊來參 或擧不擧. 眞身四枚外 變身舍利 碎如砂礫 現於鑊外 而異香郁烈 彌日不歇者. 比比有之 此末季一方之奇事也.
자지원갑자이래 대조사좌 본국황화 쟁래첨예 사방운수 폭주래참 혹거불거. 진신사매외 변신사리 쇄여사력 현어확외 이이향욱렬 이일불갈자. 비비유지 차말게일방지기사야.
지원(至元) 갑자년(서기 1264) 이래로 원나라 사신과 본국 사신들이 다투어 와서 이 돌함에 예를 올렸고, 사방의 행각승들이 모여들어 예를 올렸는데, 혹은 돌뚜껑을 들어보기도 하고 혹은 들지 않기도 하였다. 진신사리 4개 이외에도 변신사리가 모래처럼 부서져서 돌함 밖으로 나타났는데, 이상한 향이 진하게 풍기며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는 일이 가끔 있었다. 이것은 말세에 나타난 한 지방의 기이한 일이었다.
唐大中五年辛未 入朝使元弘所將佛牙[今未詳所在 新羅文聖王代]. 後唐同光元年癸未 本朝太祖卽位六年 入朝使尹質所將五百羅漢像 今在北崇山神光寺. 大宋宣和元年己亥[睿廟十四年] 入貢使鄭克永李之美等所將佛牙 今內殿置奉者是也.
당대중오년신미 입조사원홍소장불아[금미상소쟈 신라문성왕대]. 후당공광원년계미 본조태조즉위육년 입조사윤질소장오백나한상 금재북숭산신광사. 대송선화원년기해[예묘십사년] 입공사정극영이지미등소장불아 금내전치봉자시야.
당나라 대중(大中) 5년 신미(서기 851)에 당나라로 사신으로 갔던 원홍(元弘)이 가져온 부처의 어금니와[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였다.] 후당(後唐) 동광(同光) 원년 계미(서기 923)인 우리 고려 태조께서 왕위에 오른 지 6년에 중국에 사신 갔던 윤질(尹質)이 가지고 온 500나한의 상은 지금 북숭산(北崇山) 신광사(神光寺)에 있다. 송나라의 선화(宣和) 원년 기묘(서기 1119)[예종(睿宗) 14년이다.]에 중국에 있던 정극영(鄭克永)과 이지미(李之美) 등이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는 지금 내전에 모셔 둔 것이 바로 그것이다.
相傳云 昔義湘法師入唐 到終南山至相寺智儼尊者處. 隣有宣律師 常受天供 每齋時 天廚送食. 一日律師 請湘公齋 湘至坐定旣久 天供過時不至. 湘乃空鉢而歸 天使乃至. 律師問 今日何故遲 天使曰 “滿洞有神兵遮擁 不能得入.”
상전운 석의상법사입당 도종남산지상사지엄존자처. 인유선율사 상수천공 매재시 천주송식. 일일율사 청상공재 상지좌정기구 천공좌정기구 천공과시부지. 상내공발이귀 천사내지. 율사문 금일하고루 천사왈 “만동유신병차옹 불능득입.”
서로 전해오는 이야기로 옛날 의상법사(義湘法師)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의 지엄존자(智儼尊者)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이웃에 선율사(宣律師)가 있는데 늘 하늘의 공양을 받고 재를 올릴 때마다 하늘의 주방에서 음식을 보내왔다. 하루는 선율사가 의상법사를 청하여 재를 올리는데, 의상이 와서 자리에 앉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음식이 나오지 않았다. 의상이 빈 바리때로 돌아가자 천사가 그제서야 선율사에게 내려왔다. 선율사가 오늘 왜 이리 늦었는지 물어보자, 천사가 대답하였다. “온 골짜기에 신병(神兵)이 막고 있어서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於是律師知湘公有神衛 乃服其道勝. 仍留其供具 翌日又邀儼湘二師齋 具陳其由. 湘公從容謂宣曰 “師旣被天帝所敬. 嘗聞帝釋宮有佛四十齒之一牙. 爲我等輩 請下人間 爲福如何.”
어시율사지상공유신위 내복기도승. 잉유기공구 익일우격엄상이사재 구진기유. 상공종용위선왈 “사기피천제소경. 상문제석궁유불사십치지일아. 위아등배 청하인간 위복여하.”
그래서 선율사는 의상법사에게 신의 호위가 따르는 것을 알고, 그의 도가 자신보다 뛰어난 것에 탄복하였다. 그리고 하늘에서 보내온 음식을 그대로 두었다가, 이튿날 또 지엄과 의상 두 법사를 청하여 재를 올리고 그 사유를 말해주었다. 의상이 조용히 선율사에게 말하였다. “율사는 이미 천제의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 일찍이 들으니, 제석궁(帝釋宮)에는 부처님의 치아 40개 중에 어금니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을 위해 천제께 청하여 그것을 인간세계에 내려 보내어 복이 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律師後與天使 傳其意於上帝 帝限七日送與湘公. 致敬訖 邀安大內.
율사후여천사 전기의어상제 제한칠일송여상공. 치경흘 격안대내.
율사는 그 후 천사와 함께 그 뜻을 상제에게 전하였는데, 상제는 7일을 기한으로 의상에게 보내주었다. 의상은 예를 마친 뒤에 이것을 맞이하여 대궐에 모셨다.
後至大宋徽宗朝 崇奉左道 時國人傳圖讖曰 “金人敗國 黃巾之徒.” 諷日官奏曰 “金人者 佛敎之謂也 將不利於國家.”
후지대송취종조 숭봉좌도 시국인전도참왈 “금인패국 황건지도.” 풍일관주왈 “금인자 불교지위야 장불리어국가.”
훗날 송나라 휘종(徽宗) 때에 이르러 도교를 숭상하여 받들자, 당시 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예언하는 말을 퍼뜨렸다. “금인(金人)은 황건적과 같아서 이 나라를 망칠 것이다.”라며 천문을 담당하는 관리를 움직여서 아뢰게 하였다. “금인이란 것은 불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옵니다.”
議將破滅釋氏 坑諸沙門 焚燒經典 而別造小舡 載佛牙 泛於大海 任隨緣流泊. 于時適有本朝使者至宋 聞其事 以天花茸五十領 紵布三百疋 行賂於押舡內史 密授佛牙 但流空舡.
의장파멸석씨 갱제사문 분소경전 이별조소항 재불아 범어대해 임수연유박. 우시적유본조사자지송 문기사 이천화용오십령 저초삼백서 행로어압강내사 밀수불아 단유공강.
그러자 조정의 의논이 불교를 파멸시키고 중들을 죽여 묻고 경전을 불사르자고 하고 작은 배를 만들어 부처의 어금니를 실어 큰 바다에 띄워 보내 인연 닿는 곳으로 흘려 보내려고 하였다. 이때 마침 고려 사신이 송나라에 갔다가 그 일을 듣고 천화용(天花茸) 50령과 저포 300필을 배를 담당하는 관리에게 뇌물로 주고, 몰래 부처의 어금니만 받고 빈 배만 흘려 보내게 하였다.
使臣等旣得佛牙來奏 於是睿宗大喜 奉安于十員殿左掖小殿. 常鑰匙殿門 施香燈于外 每親幸日 開殿瞻敬.
사신등기득불아래주 어시예종대희 봉안우십원전좌액소전. 상약시전문 시향등우외 매친행일개전첨경.
사신들이 부처의 어금니를 가지고 와 아뢰자 예종(睿宗)은 크게 기뻐하며, 십원전(十員殿) 왼쪽에 있는 작은 전각에 모시었다. 그리고 늘 문을 자물쇠로 잠그고 밖에서 향을 피우고 등불을 밝혔으며, 왕이 친히 행차할 때만 전각의 문을 열고 예를 올렸다.
至壬辰歲移御次 內官悤遽中 忘不收檢. 至丙申四月 御願堂神孝寺釋蘊光 請致敬佛牙 聞于上 勅令內臣 遍檢宮中 無得也. 時栢臺侍御史崔冲 命薛伸 急徵于諸謁者房 皆未知所措. 內臣金丞老奏曰 “壬辰年移御時 紫門日記推看.” 從之 記云 “入內侍大府卿李白全 受佛牙函云.”
지임진세이어차 내관총거중 망불수검. 지병신사월 어원당신효사석온광 청치경불아 문우상 칙령내신 편검궁중 무득야. 시백대시어사최충 명설신 급징우제알자방 개미지소조. 내신김승노주왈 “임진년이어시 자문일기추간” 종지 기운 “입내시대어경이백전 수불아함운.”
임진년(서기 1232)에 강화로 서울을 옮길 때 내관이 경황이 없어 잊어버리고 거두지 못하였다. 병신년(서기 1236) 4월에 어원당(御願堂)인 신효사(神孝寺)의 승려 온광(蘊光)이 부처의 어금니에 예를 올리기를 청하여 왕에게 아뢰자, 왕은 신하에게 명하여 궁중을 두루 찾아보게 하였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때 어사대 시어사(侍御史) 최충(崔冲)이 설신(薛伸)에게 명해 급히 여러 알자(謁者)의 방에 물어 보았지만 모두들 모른다고 하였다. 내신 김승노(金丞老)가 아뢰었다. “임진년 서울을 옮길 때의 『자문일기(紫門日記)』를 조사해 보시옵소서.” 그 말대로 일기를 보니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입내시 대부경 이백전(李白全)이 부처 어금니의 함을 받았다.”
召李詰之 對曰 “請歸家更尋私記.”
소이힐지 대왈 “청귀가경심사기.”
이백전을 불러 물어보자 대답하였다. “청하옵건대, 집에 돌아가서 다시 저의 일기를 찾아보게 해주시옵소서.”
到家檢看 得左番謁者金瑞龍佛牙函准受記來呈. 召問瑞龍 無辭以對. 又以金承老所奏云 壬辰至今丙申五年間 御佛堂及景靈殿上守等囚禁問當 依違未決.
도가검간 득좌번알자김서룡불아함준수기래정. 소문서룡 무사이대. 우이김승노소주운 임진지금병신오년간 어불당금경영전상수등수금문당 의위미결.
집에 가서 일기를 찾아보니, 좌번알자(左番謁者) 김서룡(金瑞龍)이 함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기록을 가져다 바쳤다. 그래서 김서룡을 불러 물어보았지만 답이 없었다. 또 김승노가 아뢴대로 임진년에서 현재 병신년(서기 1236)까지 5년 동안 어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殿)에서 근무한 자들을 잡아 가두어 물어보았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隔三日 夜中瑞龍家園墻裏 有投擲物聲. 以火檢看 乃佛牙函也. 函本內一重沈香合 次重純金合 次外重白銀函 次外重瑠璃函 次外重螺鈿函 各幅子如之 今但瑠璃函爾. 喜得之 入達于內. 有司議 金瑞龍及兩殿上守皆誅. 晋陽府奏云 ‘因佛事不合多傷人.’ 皆免之.
격삼일 야중서룡가원장리 유투척물성. 이화검간 내불아함야. 함본내일중침향합 차중순금합 차외중백은함 차외중유리함 차외중나전함 각촉자여지 금단유리함이 희득지 입달우내. 유사의김서룡급양전상수개주. 진양부주운 ‘인불사불합다상인.’ 개면지.
그로부터 3일이 지난 밤에 김서룡 집 담장 안으로 물건을 던지는 소리가 났다. 불을 켜고 조사해 보니 바로 부처의 어금니를 담은 함이었다. 함은 본래 안에 한 겹의 침향합(沈香合)이 있고 그 다음 겹은 순금합(純金合)이 있으며, 외겹으로 백은함(白銀函)이 있고 그 다음 외겹으로 유리함(瑠璃函)이 있으며, 또 그 다음으로 나전함(螺鈿函)이 있어서, 각 함의 폭이 서로 꼭 맞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지 유리함뿐이었다. 김서룡은 다시 찾은 것을 기뻐하며 대궐로 들어가 아뢰었다. 담당 관원들이 의논하길, 김서룡과 전에 근무한 자들을 모두 처벌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진양부(晋陽府)에서 아뢰기를, ‘불교에 관한 일로 인해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모두 다 죄를 면할 수 있었다.
更勑十員殿中庭 特造佛牙殿安之 令將士守之. 擇吉日 請神孝寺上房薀光 領徒三十人 入內設齋敬之. 其日入直承宣崔弘 上將軍崔公衍李令長 內侍茶房等 侍立于殿庭 依次頂戴敬之. 佛牙區穴間 舍利不知數. 晋陽府以白銀合 貯而安之.
경칙십원전중정 특조불아전안지 영장사수지. 택길일 청신요사상방온광 영도삼십인 입내설재경지. 기일입직승선최홍 상장군최공연이영장 내시다방등 시립우전전 의차정재경지. 불아구형간 사리부지수. 진양부이백은합 저이안지.
다시 십원전 안뜰에 특별히 불아전(佛牙殿)을 지어 함을 모시게 하고 장사에게 지키도록 명하였다. 길일을 택하여 신효사(神孝寺)의 상방 온광(薀光)을 청하여 승도 30명을 거느리고 궁에 들어와 재를 공경히 올리도록 하였다. 그날 입직한 승선(承宣) 최홍(崔弘)과 상장군 최공연(崔公衍)과 이영장(李令長), 그리고 내시 다방(茶房) 등이 불아전 뜰에서 왕을 모시고 서서 차례로 불아함을 머리에 이고 정성을 드렸다. 함의 구멍 사이에 사리가 무수히 나타났다. 진양부에서는 백은합(白銀合)에 그것을 담아 모셨다.
時主上謂臣下曰 朕自亡佛牙已來 自生四疑 一疑天宮七日限滿而上天矣 二疑國亂如此 牙旣神物 且移有緣無事之邦矣 三疑貪財小人 盜取函幅 棄之溝壑矣 四疑盜取珍利 而無計自露 匿藏家中矣 今第四疑當之矣.
시주상위신하왈 “짐지밍불아이래 자생사의 일의천궁칠일한만이상천의? 이의국난여차 아기신물차이유연무사지방의? 삼의탐재소인 도취함폭 기지구학의? 사의도취진리 이무계자로 닉장가중의? 금제사의당지의.
이때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짐은 부처님의 어금니를 잃어버린 이후로 네 가지 의심이 생겼소. 첫째는 천궁의 7일 기한이 다해서 하늘로 올라간 것은 아닐까? 둘째는 나라가 이처럼 어지러우니 부처님의 어금니는 신물인지라 인연 있고 평온한 나라고 옮겨 간 것은 아닐까? 셋째는 재물을 탐낸 소인이 그 상자만 훔치고 어금니는 구렁에 버리지는 않았을까? 넷째는 도둑이 보물을 훔쳐가기는 했지만 드러낼 수가 없어 집 안에 감추어 두지는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소. 그런데 지금 네 번째 의심이 들어맞았소.”
乃放聲大哭. 滿庭皆洒涕獻壽 至有煉頂燒臂者 不可勝計. 得此實錄於當時內殿焚修前祗林寺大禪師覺猷 言親所眼見 使予錄之.
내방성대곡. 만정개쇄채헌수 지유연정소비자 불가승계. 득차실록어당시내전분수전기림사대선사각유 언친소안견 사여록지.
이렇게 말하고는 목을 놓아 큰 소리로 통곡하였다. 뜰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임금님의 만수를 빌었는데, 심지어 이마와 팔을 촛불에 태우며 기도하는 사람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 실록(實錄: 사실)은 당시 내전에서 향를 피우며 기도하던 전 기림사(祗林寺) 대선사(大禪師) 각유(覺猷)에게 얻은 것인데, 자기가 직접 본 것이라며 나에게 기록하라고 한 것이다.
又至庚午出都之亂 顚沛之甚 過於壬辰. 十員殿監主禪師心鑑 亡身佩持. 獲免於賊難 達於大內. 大賞其功 移授名刹 今住氷山寺 是亦親聞於彼.
우지경오출도지난 전패지심 과어임진. 십원전감주선사심삼 망신패지. 획면어적난 달어대내. 대상기공 이수명찰 슴주빙산사 시역친문어피.
또 경오년(서기 1270)에 강화에서 나와 개경으로 환도할 때의 난리는 그 낭패를 당한 것이 임진년보다 더 심하였다. 십원전의 감주(監主)였던 선사(禪師) 심감(心鑑)은 목숨을 걸고 부처의 어금니가 든 함을 가지고 나왔다. 그 덕분에 도적들의 난을 피하여서 대궐에 바쳤다. 왕은 그 공을 크게 포상하고 이름난 절로 옮겨 주었는데, 지금 빙산사(氷山寺)에 살고 있다. 이 또한 각유에게서 직접 들은 것이다.
寺有龍王堂 頗多靈異. 乃當時隨經而來止者也 至今猶存.
사유용왕당 파다영이. 내당시수경이래지자야 지금유존.
이 해룡왕사에는 용왕당(龍王堂)이 있는데 자못 영험과 이적이 많았다. 용왕당은 그 당시 용이 대장경을 따라 왔다가 머물렀던 곳인데 지금도 남아 있다.
眞興王代天嘉六年乙酉 陳使劉思與釋明觀 載送佛經論一千七百餘卷.
진흥왕대천가육년을유 진사유사여석명관 재송불경론일천칠백여권.
신라 진흥왕(眞興王) 때인 천가(天嘉) 6년 을유(서기 565)에 진(陳)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이 불경의 경(經)과 논(論) 1,700여 권을 가지고 왔다.
貞觀十七年 慈藏法師載三藏四百餘函來 安于通度寺.
정관십칠년 자장법사재삼장사뱍여함래 안우통도사.
정관(貞觀) 17년(서기 643)에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삼장(三藏:《경장》, 《율장》, 《논장》의 세 가지 불서를 아울러 이르는 말) 400여 상자를 가지고 와서 통도사(通度寺)에 안치하였다.
興德王代太和元年丁未 入學僧高麗釋丘德 齎佛經若干函來. 王與諸寺僧徒 出迎于興輪寺前路.
흥덕왕대탸화원년정미 입학승고려석구덕 재불경역간함래. 왕여제사승도 출영우흥륜사전로.
흥덕왕(興德王) 때인 태화(太和) 원년 정미(서기 827)에 당나라에 유학 갔던 고구려 승려 구덕(丘德)이 불경 몇 상자를 가지고 왔다. 왕이 여러 절의 승려들과 함께 홍륜사(興輪寺) 앞길까지 나아가 맞이하였다.
大中五年 入朝使元弘 齎佛經若干軸來 羅末普耀禪師 再至吳越 載大藏經來 卽海龍王寺開山祖也.
대중오년 입조사원홍 재불경약간축래 나말보요선사 재지오월 재대장경래 즉해룡왕사개산조야.
대중(大中) 5년(서기 851)에 당나라에 사신 갔던 원홍(元弘)이 불경 몇 축을 가지고 왔고, 신라 말에는 보요선사(普耀禪師)가 두 번이나 오월국(吳越國)에 가서 대장경을 가지고 왔는데, 바로 해룡왕사(海龍王寺)를 창건한 시조이다.
大宋元祐甲戌 有人眞讚云 偉哉初祖 巍乎眞容 再至吳越 大藏成功 賜御普耀 鳳詔四封 若問其德 白月淸風.
대송원우갑술 유인진찬운 위재초조 외호진용 제지오월 대장성공 사어보요 봉조사봉 약문기덕 백월청풍.
송나라 원우 갑술년(서기 1094)에 어떤 사람이 보요선사의 진영을 다음과 같이 찬미하였다.
거룩하도다, 개조 스님이시여 우뚝 빼어났도다, 그 모습이여.
두 번이나 오월국에 가셔서 대장경을 가져오셨다네.
보요라 이름 내리시고 네 번이나 조서 내리셨다네.
만일 그의 덕을 묻는다면 밝는 달 맑은 바람이라 하리라.
又大定中 漢南管記彭祖逖留詩云 水雲蘭若住空王 況是神龍穩一場 畢竟名藍誰得似 初傳像敎自南方.
우대정중 한남관기팽조적유시운 수운란약주공왕 황시신룡은일장 필경명람수득사 초전상교자남방.
또 대정(大定) 연간(서기 1161~1189)에 한남(漢南) 관기(管記) 팽조적(彭祖逖)이 시를 남겼다.
물 구름 고요한 절에 부처님 계시는데 더욱이 이곳은 신룡이 있어 도량을 편안히 한다네.
마침내 이 좋은 절 누가 이어받을까. 처음에 불교는 남쪽에서 전해왔다네.
有跋云 “昔普耀禪師 始求大藏於南越 洎旋返次 海風忽起 扁舟出沒於波間 師卽言曰 ‘意者神龍欲留經耶’ 遂呪願乃誠 兼奉龍歸焉 於是風靜波息 旣得還國 遍賞山川 求可以安邀處 至此山 忽見瑞雲起於山上 乃與高弟弘慶 經營蓮社 然則像敎之東漸 實始乎此 漢南管記彭祖逖題.”.
유발운 “석보요선사 시구대장어남월 계선반차 해풍홀기 편주출몰어파간 사즉언왈 ‘의자신룡욕유경야’ 수주원내성 겸봉룡귀언 어시풍정파식 기득환국 편상산천 구가이안요처 지차산 홀현서운기어산상 내여고재홍경 경영연사 연즉상교지동점 실시호차 한남관기팽조적제.”
그 「발문」은 이러하다. “옛날 보요선사가 처음으로 대장경을 남월에서 구해 돌아오는데, 갑자기 바람이 일어나 작은 배가 파도 사이에서 잠겼다 떴다 하였다. 선사는 말하기를, ‘아마도 신룡이 대장경을 머무르게 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고는 드디어 주문으로 축원하길 정성껏 하여 용까지 함께 받들고 돌아왔다. 그러자 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도 멎었다. 본국에 돌아와서는 산천을 두루 둘러보며 대장경을 안치할 만한 곳을 찾다가 이 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득 상서로운 구름이 산 위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수제자 홍경(弘慶)과 함께 절을 세웠다. 이러한 점으로 본다면,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 온 것은 진실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남 관기 팽조적 씀.”
又天成三年戊子 黙和尙入唐 亦載大藏經來 本朝睿廟時 慧照國師奉詔西學 市遼本大藏三部而來 一本今在定惠寺[海印寺有一本 許參政宅有一本]
우천성삼년무자 묵화상입당 역재대장경래. 본조예묘시 혜조국사봉조서학 시요본대장삼부이래 일본금재정혜사[해인사유일본 허삼정댁유일본]
또 천성(天成) 3년 무자(서기 928)에 묵화상(黙和尙)이 당나라에 갔다가 역시 대장경을 가지고 왔다. 우리 고려 예종(睿宗) 때에도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조서를 받들고 중국으로 유학 갔다가, 『요본대장경(遼本大藏經)』 3부를 사왔는데, 그중 한 부가 지금도 정혜사(定惠寺)에 있다.[해인사(海印寺)에도 한 부가 있고, 허참정(許參政) 댁에도 한 부가 있다.]
大安二年 本朝宣宗代 祐世僧統義天入宋 多將天台敎觀而來. 此外 方冊所不載 高僧信士往來所齎 不可詳記. 大敎東漸 洋洋乎慶矣哉.
대안이년 본조선종대 우세승통의천입송 다장천태교관이해. 차외 방책소부재 고승신사왕래소재 불가상기. 대교동점 양양호경의재.
대안(大安) 2년(서기 1086)인 고려 선종 때에는 우세승통(祐世僧統) 의천(義天)이 송나라에 갔다가 천태교(天台敎)의 교상(敎相)과 관심(觀心)에 대한 서적을 많이 가지고 왔다. 이밖에도 문헌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고승과 신자들이 왕래하며 가지고 온 것은 이루 다 상세히 기록할 수가 없다. 불교가 동방으로 널리 퍼졌으니 경사로운 일일 것이다.
讚曰 華月夷風尙隔烟 鹿園鶴樹二千年 流傳海外眞堪賀 東震西乾共一天.
찬왈 화월이풍상격인 녹원학수이천년 유전해외진감하 동진서건공일천.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중국과 동방은 드넓은 바다를 사이에 두었는데 부처님 열반에 드신 지 이천 년이로다.
동방으로 전해오니 진실로 축하할 일인데 우리나라와 인도가 한 세상이 되었도다.
按此錄義湘傳云 永徽初 入唐謁智儼. 然據浮石本碑 湘武德八年生 丱歲出家. 永徽元年庚戌 與元曉同伴欲西入 至高麗 有難而廻. 至龍朔元年辛酉入唐 就學於智儼. 總章元年 儼遷化 咸享二年 湘來還新羅 長安二年壬寅示滅 年七十八.
안차록의상전언 영휘초 입당알지엄. 연거부석본비 상무덕팔년생 관세출가. 영휘원년경술 여원효동반욕서입 지고려 유난이회. 지용삭원년신유입당 취학어지엄. 총장원년 엄천화 함형이년상해환신라 장안이년임인시멸 년칠십팔.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의상전」을 살펴보면, 의상은 영휘(永徽) 초년(서기 650)에 당나라에 가서 지엄(智儼)을 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석사(浮石寺) 본비(本碑)에 의하면, 의상은 무덕(武德) 8년(서기 625)에 태어나 어린 나이(15살)에 출가하였다. 영휘 원년 경술(서기 650)에 원효와 함께 당나라에 가려고 고구려까지 갔다가 어려운 일이 있어서 되돌아왔다. 용삭 원년 신유(서기 661)에 당나라에 들어가 지엄에게 배웠다. 총장 원년(서기 668)에 지엄이 죽자 함형(咸享) 2년(서기 671)에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 장안(長安) 2년 임인(서기 702)에 세상을 떠났으니, 78세였다.
則疑與儼公齋於宣律師處 請天宮佛牙 在辛酉至戊辰七八年間也. 本朝高廟入江都壬辰年 疑天宮七日限滿者 誤矣. 忉利天一日夜 當人間一百歲. 且從湘公初入唐辛酉 計至高廟壬辰 六百九十三歲也. 至庚子年 始滿七百年. 而七日限已滿矣 至出都至元七年庚午 則七百三十年 若如天言 而七日後還天宮 則禪師心鑑出都時 佩持出獻者 恐非眞佛牙也.
즉의여엄공재어선율사처 청천궁불아 재신유지무진칠팔년간야. 본조고묘입강도임진냔 의천관칠일한만자 오의. 도리천일일야 당인간일백세. 차정상공초입당신유 계지고묘임진 육백구십삼세야. 지경자년 시만칠백년. 이칠일한이만의 지출도지원칠년경오 즉칠백삼십년 약여천언 이칠일후환천궁 즉선사심감출도시 패지출헌자 공비진불아야.
그렇다면 지엄과 함께 선율사가 있는 곳에서 재를 올리고, 천궁에 있는 부처님 어금니를 청했던 일을 신유년(서기 661)에서 무진년(서기 668)까지의 7~8년 사이일 것이다. 우리 고려 고종이 강화로 들어간 임진년(서기 1232)에 천궁의 7일 기한이 다 찼다고 의심한 것은 잘못이다. 도리천(忉利天)의 하루 밤낮은 인간 세상의 100세에 해당한다. 의상이 처음 당나라에 들어갔던 신유년(서기 661)부터 고려 고종 임진년(서기 1232)까지 계산하면 693년(실제는 571년으로 계산에 착오가 있었다.)이다. 경자년이 되어야 비로소 700년이 차서 7일 기한의 만기가 된다. 개경으로 환도하던 지원 7년 경오(서기 1270)까지는 730년(실제는 609년이다.)이니, 만약 천제의 말처럼 7일 후에 천궁으로 환수시켰다면 심감선사(心鑑禪師)가 수도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와 바친 것은 아마도 진짜 부처님의 어금니가 아닐 것이다.
於是年春出都前 於大內 集諸宗名德 乞佛牙舍利 精勤雖切 而不得一枚. 則七日限滿上天者幾矣.
어시년춘출도전 어대내 집제종명덕 걸불아사리 정근수절 이부득일매. 즉칠일한만상천자기의.
이해 봄, 왕은 환도하기 전에 대궐에서 여러 종파의 고승들을 모아 부처님의 어금니와 사리를 얻기 위해 매우 정성스럽게 빌었지만 하나도 얻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7일 기한이 다 되어서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二十一年甲申 修補國淸寺金塔. 國王與莊穆王后 幸妙覺寺 集衆慶讚訖. 右佛牙與洛山水精念珠如意珠 君臣與大衆 皆瞻奉頂戴 後幷納金塔內. 予亦預斯會 而親見所謂佛牙者 長三寸許 而無舍利焉. 無極記.
이십일년갑오 수보국청사금탑. 국왕여장목왕후 신묘각사 집중경찬흘 우불아여낙산수정년주여의주 군신여대중 개첨봉정재 후병납금탑내. 여역예사회 이친견소위불아자 장삼촌허 이무사리언. 무극기.
지원 21년 갑신(서기 1284)에 국청사(國淸寺)의 금탑을 보수하였다. 왕과 장목왕후(莊穆王后)가 함께 묘각사(妙覺寺)에 행차하여 대중을 모아 경하하고 찬미하였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부처님 어금니와 낙산사(洛山寺)의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임금과 신하, 그리고 대중들이 모두 받들어 머리에 이고 예불을 한 후에 모두 금탑 속에 넣었다. 나도 이 법회에 참여하여 부처님 어금니라는 것을 직접 보았는데, 길이가 3치 정도였고 사리는 없었다. 무극(無極)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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