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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券 第三 塔像 第四- 栢栗寺

栢栗寺

 

鷄林之北岳曰金剛嶺 山之陽有栢栗寺 寺有大悲之像一軀 不知作始 而靈異頗著 或云 是中國之神匠 塑衆生寺像時幷造也.” 諺云 此大聖曾上忉利天 還來入法堂時 所履石上脚迹 至今不刓.” 或云 救夫禮郞還來時之所視迹也.”

계림지북악왈금강령 산지양유백률사 사유대비지상일구 부지작시 이영이파저. 혹운 시중국지신장 소중생사상시병조야.” 언운 차대성승상도리천 환래입법당시 소리석상각적 지금불완.” 혹운 구부례랑환래시지소시적야.”

 

계림(鷄林) 북쪽 산을 금강령(金剛嶺)이라 하는데 산의 남쪽에는 백률사(栢栗寺)가 있다. 이 절에는 관음보살상이 하나 있는데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자못 영험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이러한 말을 하였다. “이것은 중국의 귀신 같은 솜씨를 가진 장인이 중생사(衆生寺)의 불상을 만들 때 같이 만든 것이다.” 또 세상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부처님이 일찍이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갔다가 돌아와 법당에 들어갈 때 밟았던 돌 위의 발자국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이 부례랑(夫禮郞)을 구출해 돌아올 때 보였던 자취이다.”

 

天授三年壬辰九月七日 孝昭王奉大玄薩飡之子夫禮郞爲國仙. 珠履千徒 親安常尤甚. 天授四年[卽長壽二年]癸巳暮春之月 領徒遊金蘭 到北溟之境 被狄賊所掠而去. 門客皆失措而還 獨安常追迹之 是三月十一日也. 大王聞之 驚駭不勝曰 先君得神笛 傳于朕躬 今與玄琴 藏在內庫. 因何國仙 忽爲賊俘 爲之奈何[琴笛事 具載別傳].

천수삼년임진구월칠일 효소왕봉대현살찬지자부례랑국선. 주복천도 친안상우심. 천수사년[즉장수이년]계사모춘지월 영도유금란 도북명지경 피적적소략이거. 문객개실조이환 독안상추적지 시삼월십일일야. 대왕문지 경해불승왈 선군득신적 전우짐궁 금여현금 장재내고. 인하국선홀위적부 위지내하?”[금적사 구재별전]

 

천수(天授) 3년 임진(서기 692) 97일 효소왕(孝昭王)은 대현(大玄) 살찬(薩飡)의 아들 부례랑을 받들어 국선으로 삼았다. 따르는 무리가 1,000명이나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안상(安常)과 더욱 친하였다. 천수 4[장수(長壽) 2년이다.] 계사(서기 693) 3월에 부례랑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금란(金蘭)으로 놀러갔는데, 북명(北溟)의 경계에 이르렀다가 말갈에게 잡혀 갔다. 무리들은 모두 어쩔 줄 몰라 하며 돌아왔지만 유독 안상만이 홀로 추격하였으니, 이때가 311일이었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말하였다. “선왕께서 신령스러운 피리를 나에게 전해주시어 지금 현묘한 가야금과 함께 궁궐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국선이 갑자기 적에게 잡혀갔단 말인가?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가야금과 피리에 대한 일은 다른 전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時有瑞雲 覆天尊庫. 王又震懼 使檢之. 庫內失琴笛二寶. 乃曰 朕何不弔 昨失國仙 又亡琴笛?” 乃囚司庫吏金貞高等五人. 四月募於國曰 得琴笛者 賞之一歲租.”

시유단운 복천존고. 왕우진구 사검지. 고내실금적이보. 내왈 짐하부조 작실국선 우망금적?” 내수사고리김정고등오인. 사월모어국왈 득금적자 상지일세조.“

 

이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를 뒤덮었다. 왕은 또 다시 더욱 두려워하며 이를 조사해보도록 하였다. 그랬더니 천존고 안에 보관되어 있던 가야금과 피리 두 보물이 모두 사라졌다. 왕이 말하였다. “짐이 복이 없어 어제는 국선을 잃었고, 또 오늘은 가야금과 피리까지 잃었단 말인가?” 왕은 즉시 창고를 관리하던 김정고(金貞高) 5명을 가두었다. 그리고 4월에 나라 안에 사람들을 모집하여 말하였다. “가야금과 피리를 찾아오는 자에게는 1년 조세를 상으로 주겠노라.”

 

五月十五日 郞二親就栢栗寺大悲像前 禋祈累夕 忽香卓上 得琴笛二寶 而郞常二人 來到於像後 二親顚喜 問其所由來 郞曰 予自被掠 爲彼國大都仇羅家之牧子 放牧於大烏羅尼野[一本作都仇家奴 牧於大磨之野] 忽有一僧 容儀端正 手携琴笛來慰曰 憶桑梓乎?’” 予不覺跪于前曰 眷戀君親 何論其極.” 僧曰 然則宜從我來 遂率至海壖 又與安常會 乃批笛爲兩分 與二人 各乘一隻 自乘其琴 泛泛歸來 俄然至此矣.”

오월십오일 낭이친취백률사대비상전 연기누석 홀향탁상 득금적이보 이낭상이인 래도어상후이친전희 문기소유래 랑왈 여자피략 위피국대도구라가지목자 방목어대오라니야[일본작소구가노 목어대마지야]. 홀유일승 용의단정 수휴금적래위왈 억상제호?’” 여불각궤우전왈 권연군친하논기극.” 승왈 연즉의종아래 수솔지해연 우여안상회 내비적위양분 여이인 각승일척 자승기금 범범귀래 아연지차의.”

 

515일에 부례랑의 부모가 백율사 관음보살상 앞으로 나아가 여러 날 동안 저녁마다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갑자기 향을 놓는 탁자 위에 가야금과 피리 두 보물이 놓여 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불상 뒤에서 나와 이르렀다. 부모는 넘어질 듯 기뻐하며 어찌된 일인지 그 내력을 불어보았더니, 부례랑이 대답하였다. “제가 포로가 되어서 적국의 대도구라(大都仇羅)의 집에서 목동이 되어 대오라니(大烏羅尼)[다른 책에서는 도구(都仇)의 집 종이 되어서 대마(大磨)의 들에서 가축을 길렀다고 한다.]라는 들에서 방목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용모가 단정한 한 스님이 손에 거문고와 피를 들고 오셔서는, 저를 위로하며 고향 생각을 하느냐?’ 하시기에, 저는 저도 모르게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임금님과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그렇다면 나를 따라 와야 하느니라.’ 하시고는 저를 이끌고 바닷가로 가셨는데, 또 안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곧 피리를 둘로 쪼개어 저희 두 사람에게 각각 하나씩 타게 하고는 자신은 가야금을 타고서 둥실둥실 떠서 돌아왔는데, 잠깐 사이에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於是具事馳聞. 王大驚使迎. 郞隨琴笛入內. 施鑄金銀五器二副 各重五十兩 摩衲袈裟五領 大綃三千疋 田一萬頃納於寺 用答慈庥焉. 大赦國內 賜人爵三級 復民租三年. 主寺僧移住奉聖. 封郞爲大角干[羅之冢宰爵名] 父大玄阿飡爲太大角干 母龍寶夫人爲沙梁部鏡井宮主 安常師爲大統 司庫五人皆免 賜爵各五級.

어시구사치문. 왕대경사영. 랑수금적입내. 시주금은오기이부 각중오십량 마납가사오령 대초삼천서 전일만경납어사 용답자휴언. 대사국내 사인작삼급 복민조삼년. 주사승이주봉성. 봉랑위대각간[라지총재작명] 부대현아찬위태대각간 모용보부인위사량부경정궁주. 안상사위대통 사고오인개면 사작각오급.

 

이리하여 이 일을 갖추어 급히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매우 놀라며 사람을 보내 맞아들였다. 부례랑은 가야금과 피리를 가지고 대궐로 들어갔다. 왕은 금과 은 그릇 다섯 개씩 두 벌 각 50량과 비단 승복 5, 비단 3,000필과 밭 10,000경을 백률사에 바치어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하였다. 그리고 나라 안의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여 풀어주고 관리들에게는 벼슬 3계급씩을 높여 주었고 백성들에게는 3년 치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백률사의 주지는 봉성사(奉聖寺)로 옮겨 머물도록 하였다. 부례랑을 봉하여 대각간(大角干)[신라 재상의 관직 이름이다.]을 삼고, 그 아버지 대현아찬(大玄阿飡)은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삼고 어머니 용보부인(龍寶夫人)은 사량부(沙梁部)의 경정궁주(鏡井宮主)를 삼았다. 안상(安常)을 대통(大統)으로 삼고 창고 담당자 다섯 명은 모두 용서해 주고 각각 벼슬 5급을 올려주었다.

 

六月十二日 有彗星孛于東方 十七日 又孛于西方. 日官奏曰 不封爵於琴笛之瑞.” 於是冊號神笛爲萬萬波波息 彗乃滅. 後多靈異 文煩不載. 世謂 安常爲俊永郎徒 不之審也. 永郞之徒 唯眞才繁完等知名 皆亦不測人也[詳見別傳].

유월십이일 유혜성패우동방 십칠일 우패우서방 일관주왈 불봉작어금적지서 어시책호신적위만만파파식적 혜내멸. 후다영이 문번부재. 세위 안상위준영낭도 부지심야. 영랑지도 유진재번완등지명 개역불측인야[상견별전]

 

612일에 혜성이 동쪽에서 나타났는데, 17일에 또 서쪽에서 나타났다. 그러자 천문을 담당하는 관리가 아뢰었다. “가야금과 피리의 상서로움에 대해 작위를 봉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옵니다.” 그래서 신령스러운 피리를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으로 봉하였더니 혜성이 곧 사라졌다. 이후에도 영험하고 기이한 일이 많았지만 글이 번거로워 이루 다 기록하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안상을 준영랑(俊永郎)의 무리라고 하였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영랑의 무리에는 오로지 진재(眞才)와 번완(繁完) 등의 이름만 알려져 있는데, 이들 역시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다른 전에 상세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