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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第四 脫解王

第四 脫解王

 

脫解齒叱今[一作吐解尼師今] 南解王時[古本云 壬寅年至者謬矣 近則後於弩禮卽位之初 無爭讓之事 前則在於赫居世之世 故知壬寅非也] 駕洛國海中 有船來泊 其國首露王 與臣民鼓譟而迎 將欲留之 而舡乃飛走 至於雞林東下西知村阿珍浦[今有上西知 下西知村名].

탈해이질금[일작토해이사금] 남해왕시[고본운 임인년지류의 근즉후어노례즉위지초 무쟁양지사 전즉제어혁거지세 고지임인비야]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토해이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이 남해왕 시절[고본(古本)에는 임인년에 이르렀다고 하였지만 잘못된 것이다. 가까운 임인년이라면 노례왕의 즉위 초보다 뒤일 것이니, 왕위를 다투어 사양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 이전의 임인년이라면 혁거세의 시대일 것이다. 그러므로 임인년이 아님을 알 수 있다.]에 가락국 바다에 배를 타고 와서 정박하고 있었다. 그 나라의 수로왕이 신민들과 함께 북을 시끄럽게 치며 맞이하여 머무르게 하려고 하였지만, 배는 곧 나는 듯이 달아나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 지금도 상서지촌(上西知村하서지촌(下西知村)의 이름이 있다.

 

時浦邊有一嫗 名阿珍義先 乃赫居王之海尺之母 望之謂曰 此海中元無石嵓 何因鵲集而鳴?”

시포변유일구 명아진의선 내혁거왕지해척지모 망지위왈 차해중원무석암 하인작집이명?”

 

이때 갯가에 한 할멈이 있었는데 이름이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 하였으니, 바로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그 할멈이 배를 바라보고 말하였다. “본디 이 바다 가운데에는 바위가 없거늘, 어찌해서 까치가 모여서 우는고?”

 

拏舡尋之 鵲集一舡上 舡中有一櫃子 長二十尺 廣十三尺. 曳其船 置於一樹林下 而未知凶乎吉乎 向天而誓爾. 俄而乃開見 有端正男子 並七寶奴婢滿載其中. 供給七日 迺言曰 我本龍城國人[亦云正明國 或云琓夏國 琓夏或作花厦國 龍城在倭東北一千里] 我國嘗有二十八龍王 從人胎而生. 自五歲六歲 繼登王位 敎萬民修正性命 而有八品姓骨 然無揀擇 皆登大位. 時我父王含達婆 聘積女國王女爲妃 久無子胤 禱祀求息. 七年後 産一大卵 於是大王會問群臣 人而生卵 古今未有 殆非吉祥乃造櫃置我 幷七寶奴婢載於舡中 浮海而祝曰 任到有緣之地 立國成家便有赤龍 護舡而至此矣.”

나강심지 작집일강상 강중유일궤자 장이십척 광십삼척. 예기선 치어일수림하 이미지흉호길호 향천이서이. 아이내개견 유단정남자 병칠보노비만재기중. 공급칠일 내언왈 아본용성국인[역운정명국 혹운완하국 완하혹작화하국 용성재왜동북일천리] 아국상유이십팔년용왕 종인태이생. 자오세육세 계등왕위 교만민수정성명 이유팔품성골 연무간택 개등대위. 시아부왕감달파 빙적여국왕여위비 구무자윤 도사구식. 칠년후 산일대란 어시대왕회문군신 인이생란 고금미유 태비길상.’ 내조궤치아 병칠보노비재어강중 부해이축왈 임도유연지지 입국성가편유적용 획강이지차의.“

 

그리고는 배를 끌어당겨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 있었고 배 안에는 상자 하나가 있었는데, 길이 20척에 넓이 13척이었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숲 아래에 두고는, 길흉을 알 수 없어서 하늘을 향하여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상자를 열어보니 단정하고 잘생긴 남자 아이가 있었고, 또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가 그 안에 가득 차 있었다. 7일 동안 잘 대접하자 아이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입니다.[정명국(正明國)이라고도 하고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는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한다. 용성은 왜나라 동북쪽 1천 리에 있다.] 우리나라에는 일찍이 스물여덟의 용왕이 있는데, 모두 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5~6세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만백성을 가르치고 성명(性命)을 바르게 하였습니다. 팔품의 성골이 있는데 그들은 선택을 받지 않고 모두 다 왕위에 올랐습니다. 당시에 저의 부왕이신 함달파(含達婆)께서 적녀국의 왕녀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어서 아들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후 7년이 지나 커다란 알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대왕께서는 여러 신하들을 모아 물어보시기를, ‘사람이면서 알을 낳은 것은 예로부터 없었던 일이니, 아마도 좋은 징조는 아닐 것이다.’ 하시고는 거대한 상자를 만들어서 저를 그 안에 넣고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들도 함께 배 안에 싣고는, 바다에 띄워 보내며 아무 곳이나 인연이 있는 곳에 닿거든,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어라.’라고 축원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言訖 其童子曳杖率二奴 登吐含山上 作石塚 留七日望城中可居之地見一峰如三日月勢可久之地. 乃下尋之 卽瓠公宅也.

언흘 기동자예장솔이노 등토함산상 작석총 유칠일망성중가거지지견일봉여삼일월세가구지지. 내하심지 즉호공택야.

 

말을 끝내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끌고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吐含山) 위에 올라가 돌무덤처럼 생긴 집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7일 동안 머물면서 성안에 살만한 곳이 있는지 바라보니, 마치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가 보였는데 그 지세가 오래 살만한 곳이었다. 곧바로 내려가 살펴보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乃設詭計 潛埋礪炭於其側 詰朝至門云 此是吾祖代家屋.” 瓠公云爭訟不決 乃告于官 官曰 以何驗是汝家?” 童曰 我本冶匠 乍出隣鄕 而人取居之 請掘地撿看.”

내설궤계 잠매여탄어기측 힐조지문룬 차시오조대가옥.” 호공운쟁송불결 내고우관. 관왈 이하험시여가동왈 아본야장 사출인향 이인취거지 청굴지검간.”

 

그는 속임수를 써서 그 집 곁에 숫돌과 숯을 몰래 묻어 놓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 집에 가서 말하였다. “이 집은 우리 조상이 살던 집이오.” 호공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관청에 고발했더니, 관청에서 아이에게 물었다. “이 집이 네 집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겠느냐?” “우리 집은 원래 대장장이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이웃 고을에 나가 있는 동안 저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 땅을 파서 조사해보면 아실 겁니다.”

 

從之 果得礪炭 乃取而居焉 時南解王 知脫解是智人 以長公主妻之 是爲阿尼夫人.

종지 과득여탄 내취이거언 시남해왕 지탈해시지인 이장공주처지 시위아니부인.

 

관청에서 그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그래서 아이는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南解王)은 그 아이, 즉 탈해(脫解)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맏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으니, 바로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一日吐解登東岳 廻程次 令白衣索水飮之. 白衣汲水 中路先嘗而進 其角盃貼於口不解. 因而嘖之 白衣誓曰 爾後若近遙 不敢先嘗.” 然後乃解. 自此白衣讋服 不敢欺罔. 今東岳中有一井 俗云遙乃井是也.

일일토해등동악 회정차 영백의소수음지. 백의급수 중로선상이진 기각배첩어구불해. 인이책지 백의서왈 이후약근요 불감선상.” 연후내해. 자차백의섭복 불감기망. 금동악중유일정 속운요내정시야.

 

어느 날 탈해가 동악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인을 시켜 물을 길어오라고 하였다. 하인은 물을 떠 오다가 도중에 먼저 물을 마신 후 탈해에게 주려고 하니 물을 담은 뿔잔이 그만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탈해는 이를 보고 하인을 꾸짖으니 하인은 맹세하며 말하였다. “이제부터는 가깝건 멀건 감히 먼저 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요.” 그러자 그제야 뿔잔이 입에서 떨어졌다. 이후로 하인은 탈해를 두려워하여 감히 다시는 속이지 못하였다. 지금 동악에 있는 세간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 부르는 우물이 바로 그것이다.

 

及弩禮王崩 以光武帝中元二年丁巳六月 乃登王位 以昔是吾家取他人家 故因姓昔氏 或云 因鵲開櫃 故去鳥字 姓昔氏 解櫃脫卵而生 故因名脫解.

내노례왕붕 이광무제원년이년정사유월 내등왕위 이석시오가취타인가 고인성석씨 혹운 인작개궤 고거조자 성석씨 해궤탈란이생 고인명탈해.

 

노례왕(弩禮王)이 죽자 광무제(光武帝) 중원(中元) 2년 정사(서기 57) 6월에 탈해가 왕위에 올랐다. 옛날에 우리 집이라고 하며 남의 집을 빼앗았기 때문에 성을 석씨(昔氏)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까치 울음소리 때문에 상자를 열었으므로 새 조()자를 버리고 석씨를 성으로 삼은 것이고, 상자를 열고[] 알에서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한 것이다.”라고 한다.

 

在位二十三年 建初四年己卯崩. 葬䟽川丘中 後有神詔 愼埋葬我骨.”

재위이십삼년 건초사년기묘붕. 장소천구중 후유신조 신매장아골.”

 

탈해가 왕위에 오른 지 23년 만인 건초(建初) 4년 기묘(서기 79)에 세상을 떠났다. 소천구(䟽川丘) 가운데에 장사 지냈는데, 그 뒤에 탈해왕의 신령이 나타나서 명하였다. “내 뼈를 조심해서 묻으라.”

 

其髑髏周三尺二寸 身骨長九尺七寸 齒凝如一 骨節皆連鎖 所謂天下無敵力士之骨 碎爲塑像 安闕內 神又報云 我骨置於東岳故令安之[一云 崩後 二十七世文武王代 調露二年庚辰三月十五日 辛酉夜 見夢於宗 有老人貌甚威猛 曰 我是脫解也 拔我骨於疏川丘 塑像安於土含山王從其言 故至今國祀不絶 卽東岳神也云].

기촉루구삼척이촌 신골장구척칠촌 치응여일 골절개연쇄 소위천하무적역사지골 쇄위소상 안궐내 신우보운 아골치어동악고영안지[일운 붕후 이십칙세문무왕대 조로이년경진삼월십오일 신유야 견몽어종 유노인모십위맹 왈 아시탈해야 발아골어소천구 소상안어토함산 왕종기언 고지금국사부절 즉동안시야운]

 

왕릉을 파보니 해골의 둘레가 32치였고, 몸 뼈의 길이가 97치였다. 치아는 엉기어 하나처럼 되었고 뼈마디도 모두 이어져 있었으니, 참으로 천하무적 장사의 골격이었다. 그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 찰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대궐에 두었는데, 신령이 또 나타나서 명하였다. “내 뼈를 동악(東岳)에 두어라.” 그래서 동악에 모시게 되었다.[혹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탈해가 세상을 떠난 후인 27대 문무왕 때인 조로(調露) 2년 경진(서기 680) 3월 보름날 신유일 밤에, 문무왕의 꿈에 몹시 위엄 있고 무섭게 보이는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탈해왕이다.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두거라.’라고 하여서, 왕은 이 말대로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까지 나라에서 제사를 계속 지내왔으니, 이 분이 바로 동악신(東岳神)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