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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列傳 第十-甄萱

甄萱

 

甄萱 尙州加恩縣人也.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介 以農自活 後起家爲將軍.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 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勇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견훤 상주가은현인야. 본성이 후이견위씨 부아자개 이농자활 후기가위장군. 초견생유보시 부경우야 모향지 이아치우림하 호래유지. 향당문자이언. 급장 체모웅기 사기척당불범. 종군입왕경 부서남해방수 침과대적. 기용기항위사졸선 이노위비장.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본래 성은 이씨였는데 나중에 견()으로 성씨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가 뒤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견훤이 태어나 젖먹이로 강보에 싸여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면 어머니가 밥을 나르느라 아이를 숲속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고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 종군(從軍)해서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안으로 변방을 지키러 가게 되었는데, 잘 때도 창을 베고 적을 대비하였다. 그의 용기는 항상 다른 사졸들보다 앞섰으므로 이러한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당소종경복원년 시신라진성왕재위육년 폐수재측 절농정병 강기문이. 가지이기근 백성유이 군도봉기.

 

당나라 소종(唐昭)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은 바로 신라 진성왕(眞聖王) 6년인데, 왕의 총애를 받는 소인배들이 측근에서 정권을 농락하자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더욱이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於是 萱竊有覦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人 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 是時 北原賊梁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梁吉職爲裨將.

어시 훤정유유심 소취도려 행격경서남주현 소지향응 순월지간 중지오천인 수습무진주자왕유불감고연칭왕. 자서위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 시시 북원적양길웅강 궁예자투위휘하 훤문지 요수양길직위비장.

 

이에 견훤은 은근히 반란하려는 뜻을 품고 무리를 불러 모아 서울 서쪽과 남쪽 주, 현을 가서 치니, 가는 곳마다 모두 호응하여 한 달 만에 무리가 5천 명에 달하였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 광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히 왕이라고 일컫지는 못하고 직접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하였다. 이때 북원(北原)의 도적인 양길(梁吉)이 강성하자 궁예(弓裔)는 스스로 투신하여 그의 휘하가 되었다. 견훤은 이 말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벼슬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 謂左右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 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 摠章中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船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沘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今予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

훤서순지완산주 주민영노. 견희득인심 위좌우왈 오원삼국지시 마한선기 후혁세발흥 고진변종지이흥. 어시 백제개국금마산육백여년, 총장중 당고종이신라지청 견장군소정방 이선병십삼만월해 신라김유신권토 역황산지사비 여당병합공백제멸지 금여감불립도어완산 이설의자숙분호?”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에 이르니 주의 백성들이 맞이해 위로하였다. 견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주위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본디 삼국으로 시작했는데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났고 뒤에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므로,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연지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에 당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의하여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의 김유신도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기까지 휩쓸어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이제 내가 어찌 완산에 도읍을 세워 의자왕(義慈王)의 오랜 분노를 갚지 않겠는가?”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遣使朝吳越 吳越王報聘 仍加檢校太保 餘如故.

수자칭후백제왕 설관분직 시당광화삼년 신라효공왕사년야. 견사조오월 오월왕보빙 잉가검교태보 여여고.

 

마침내 후백제(後百濟) 왕이라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직책을 분담시켰으니, 이때가 당나라 광화(光化) 3년이오, 신라 효공왕(孝恭王) 4(서기 900)이다.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어 견훤에게 검교태보(檢校太保)를 더해주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天復元年 萱攻大耶城不下. 開平四年 萱怒錦城投于弓裔 以步騎三千圍攻之 經旬不解. 乾化二年 萱與弓裔戰于德津浦.

천복원년 훤공대야성불하 개평사년 견노금성투우궁예 이보기삼천위공지 경순불해. 건화이년견여궁예전우덕진포.

 

천복(天復) 원년(서기 901)에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개평(開平) 4(서기 910)에 견훤은 금성(錦城)이 궁예에게 투항한 것에 분노하여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금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건화(乾化) 2(서기 912)에 견훤이 덕진포(德津浦)에서 궁예와 싸웠다.

 

貞明四年戊寅 鐵圓京衆 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 秋八月 遣一吉飡閔郃稱賀 遂獻孔雀扇及地理山竹箭. 又遣使入吳越進馬 吳越王報聘 加授中大夫 餘如故.

정화사년무인 철원경중 심홀변 추재아태조즉위 훤문지 추팔월 견일길찬민합칭하 수헌공작선급지리산죽전 우견사입오월진마 오월왕보빙 가수중대부 여여고.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철원경의 인심이 홀연히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견훤이 이 말을 듣고 가을 8월에 일길찬 민합(閔郃)을 보내 축하하고, 이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地理山)의 대나무 화살을 바쳤다. 또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말을 진상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 중대부(中大夫)를 더하여 제수하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六年 萱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移軍於進禮城. 新羅王遣阿飡金律 求援於太祖. 太祖出師 萱聞之 引退. 萱與我太祖陽和而陰剋.

육년 훤솔보기일만 공함대야성 이군어진례성. 신라왕견아찬김률 구원어태조. 태조출사 훤문지 인퇴. 훤여아태조양화이음극.

 

6(서기 920)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으로 옮겼다. 신라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군대를 출동시키자 견훤은 이를 듣고 물러갔다. 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듯하였으나 속으로는 대립하고 있었다.

 

同光二年秋七月 遣子須彌强 發大耶聞韶二城卒 攻曹物城 城人爲太祖固守且戰 須彌强失利而歸. 八月 遣使獻驄馬於太祖.

동광이년추칠월 견자수미강 발대야문소이성졸 공조물성 성인위태조고수차전 수미강실리이귀. 팔월 견사헌총마어태조.

 

동광(同光) 2(서기 924) 가을 7월에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보내 대야, 문소(聞韶) 두 성을 함락하고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으나, 성안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수비하며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8월에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쳤다.

 

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 太祖亦以精兵來 與之确 時萱兵銳甚 未決勝否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삼년동시월 훤솔삼천기 지조물성 태조역이정병래 여지학 시견병예심 미결승부 태조욕권화이노기사 이서걸화 이당제왕신위질 견역이외생진호교질.

 

3(서기 925) 겨울 10월에 견훤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는데 태조도 정예병을 거느리고 와서 서로 겨루게 되었다. 이때 훤의 군사가 대단히 날래어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가 일단 화평을 모색하여 견훤의 군사를 피로하게 하고자 글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사촌 아우 왕신(王信)을 볼모로 보냈다. 훤도 역시 그의 사위 진호(眞虎)를 보내 볼모로 교환하였다.

 

十二月 攻取居昌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십이월 공취거창등이십여상 견사입후당칭번 당책구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 의전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 식읍이천오백호.

 

12월에 거창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 제후국이라 일컬으니, 당에서 그를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로 책봉하고 종전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과 식읍 25백 호를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四年眞虎暴卒. 萱聞之 疑故殺. 卽囚王信獄中 又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 太祖笑還之.

사년진호폭졸. 훤문지 의고살. 즉수왕신옥중 우사인청환전년소송총마 태조소환지.

 

4(서기 926)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훤은 이를 듣고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곧바로 왕신을 옥에 가두고 또 사람을 보내 전년에 주었던 총마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그 말을 돌려주었다.

 

天成二年秋九月 萱攻取近品城 燒之 進襲新羅高鬱府 逼新羅郊圻 新羅王求救於太祖. 冬十月 太祖 將出師援助 萱猝入新羅王都. 時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置酒娛樂 賊至狼狽不知所爲. 與夫人歸城南離宮 諸侍從臣寮及宮女伶官 皆陷沒於亂兵. 萱縱兵大掠 使人捉王 至前戕之 便入居宮中 强引夫人亂之 以王族弟金傅嗣立.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帑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천성이년추구월 훤공취근품성 소지 진습신라고울부 핍신라교기 신라왕구구어태조. 동시월 태조 장출사원조 견졸입신라왕도. 시왕여부인빈어출유포석정 치주오락 적기낭패부지소위. 여부인귀성남이궁 제시종신료급궁여영관 개함몰어난병 훤종병대략 사인착왕 지전장지 변입거궁중 강인부인란지 이왕족제김부사립. 연후노왕제효렴재상영경 우취국탕진보병장 자녀백공지교자 자수이귀.

 

천성(天成) 2(서기 927) 가을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쳐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며 신라의 서울 근처까지 접근하였으므로,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겨울 10월에 장차 군사를 내어 도우려 했는데 훤이 갑자기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 왕이 부인과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鮑石亭)에 나들이 가서 술상을 차려놓고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적이 쳐들어오자 낭패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왕은 부인과 함께 성의 남쪽 이궁(離宮)으로 돌아갔으며 시종하던 신료들과 궁녀, 악공들은 모두 반란군에게 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훤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사람을 시켜 왕을 잡아다가 앞에 끌어내 죽였다. 이어 곧바로 궁중으로 들어가 억지로 왕비를 끌어다가 강간하고, 왕의 집안 동생인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런 다음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포로로 잡고, 또 나라의 보물창고에 있는 진귀한 보물과 병장기, 왕실의 자녀와 솜씨있는 기술자를 빼앗아 데리고 돌아갔다.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太祖 僅以身免. 萱乘勝取大木郡.

태조이정기오천 요훤어송산하대전 태조장김악숭겸사지 제군패배태조 근이신면. 훤승승취대목군.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데리고 공산(公山, 대구 팔공산) 아래에서 견훤을 요격해 크게 싸웠는데,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숭겸(崇謙)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훤이 승세를 타고 대목군(大木郡)을 빼앗았다.

 

契丹使裟姑麻咄等三十五人來聘 萱差將軍崔堅 伴送麻咄等 航海北行 遇風至唐登州 悉被戮死.

거란사사고마돌등삼십오인래빙 훤차장군최수 반송마돌등 항해북행 우풍지당등주 실피육사.

 

거란의 사신 사고(裟姑), 마돌(麻咄) 35명이 와서 예방하니 훤이 장군 최견(崔堅)을 보내 마돌 등을 동반하여 전송하게 하였는데, 북으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서 당나라 등주(登州)에 이르게 되었는데 모두 살육당했다.

 

時新羅 君臣以衰季 難以復興 謀引我太祖結好爲援. 甄萱自有盜國心 恐太祖先之 是故 引兵入王都作惡. 故十二月日寄書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隼翼 必使生靈塗炭 宗社丘墟. 僕是用先着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皦日 諭六部以義風.

시신라 군신이쇠계 난이부흥 모인아태조결호위원. 견훤자유도국심 공태조선지. 시고 인병입왕도작악. 고십이월일기서태조왈 작자국상김웅렴등 장소족하입경 유동별응원성 시역안피준익 필사생영도탄 종사구허. 복시용선착조편 독휘한월 서백료여교일 유육부이의풍.

 

이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쇠퇴해진 국운을 다시 회복시키기 어렵다 하여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우호를 맺어 도움받을 것을 모색하고 있었다. 견훤은 나라를 빼앗을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태조가 선수를 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던 까닭에 병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울에 들어가 악행을 부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12월 중에 태조에게 글을 부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번에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그대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마치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여 메추라기가 송골매의 날개를 헤치려 하는 것과 같으므로, 반드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사를 폐허로 만들게 할 것이다. 내가 이 때문에 먼저 조편(조생지편(祖生之鞭)의 준말로, 남보다 먼저 공을 이루어 기선을 제압한다는 뜻)으로 홀로 한월(韓鉞)의 본을 따라 모든 관리들에게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고 6부를 의로운 가르침으로 타일렀다.

 

韓鉞: 이것은 한금호(韓擒虎)의 도끼를 말하는 듯하다. 한금호는 처음 북주(北周)에서 벼슬하다가 개황(開皇) 초 수 고조(高祖)로부터 여주총관(廬州總管)에 임명되어 진() 정벌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에 선봉장이 되어 정예 기병 5백 명을 이끌고 금릉(金陵)으로 진격해 후주(後主) 숙보(叔寶)를 잡고 진을 평정하였다.

 

不意姦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之表弟獻康王之外孫 勸卽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覦 多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불의간신둔도 방군훙변 수봉경명와지표제헌강왕지외손 권즉존위 재조위방 상군유군 어시호재. 족하물상충고 도청유언 백게규유 다방침요 상불능견복마수 발복우모.

 

그러나 뜻밖에도 간신들이 도망하고 나라 임금이 돌아가시는 변이 생겼으므로, 마침내 경명왕(景明王)의 외사촌 아우요 헌강왕(獻康王, 憲康王을 말한다.)의 외손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고하였으니, 위태한 나라를 바로잡고 임금을 잃었으나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흘러 다니는 말을 들어 온갖 계략으로 기회를 엿보고 여러 방면으로 침노하였으나, 아직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였고 나의 송아지 털 하나 뽑지 못하였다.

 

冬初 都頭索湘 束手於星山陣下 月內 左將金樂 曝骸於美理寺前 殺獲居多 追擒不少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동초 도두색상 속수어성산진하 월내 좌장김악 폭해어미리사전 살획거다 추금불소 강리약차승패가지 소기자 괘궁어평양지루 음마어패강지수.

 

겨울 초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진(星山陣) 아래에서 손이 묶였고 한달도 안되어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理寺) 앞에서 해골을 드러냈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고 쫓겨 사로잡힌 자가 적지 않았다. 강하고 약함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지는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나의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의 문루에 활을 걸어 두고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다.

 

夏五月萱潛師襲康州 殺三百餘人 將軍有文生降.

하오월훤참사습강주 살삼백여인 장군유문생항.

 

여름 5월에 견훤이 몰래 군사를 내어 강주(康州)를 습격하여 3백여 명을 살해하자, 장군 유문(有文)이 산 채로 항복하였다.

 

秋八月 萱命將軍官昕 領衆築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擊之 退保大耶城.

추팔월 훤명장군솬흔 영중축양산 태조명명지성장군왕충 격지 퇴보대야성.

 

가을 8월에 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태조가 명지성(命旨城) 장군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게 하자 관흔이 물러가 대야성을 지켰다.

 

冬十一月 萱選勁卒 攻拔缶谷城 殺守卒一千餘人 將軍楊志明式等生降.

동십일월 훤선경졸 공발부곡성 살수졸일천여인 장군양지명식등생항.

 

겨울 11월에 훤이 날랜 병사를 선발하여 부곡성(缶谷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수비군 1천여 명을 죽이자, 장군 양지(楊志), 명식(明式) 등이 항복하였다.

 

四年秋七月 萱以甲兵五千人 攻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太祖哭之慟曰 吾失左右手矣.”

사년추칠월 훤이갑병오천인 공의성부 성주장근홍술전사. 태조곡지통왈 오실좌우수의.”

 

4(서기 929) 가을 7, 훤이 무장한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하였는데 성주였던 장군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태조가 슬프게 울면서 내가 두 팔을 잃었다.”고 말했다.

 

萱大擧兵 次古昌郡甁山之下 與太祖戰 不克 死者八千餘人. 翌日 萱聚殘兵 襲破順州城. 將軍元逢不能禦 棄城夜遁. 萱虜百姓 移入全州. 太祖以元逢前有功宥之 改順州 號下枝縣.

훤대거병 차고창군병산지하 여태조전 불극 사자팔천여인. 익일 훤취잔병 습파순주성. 장군원봉불능어 기성야둔. 훤노백성 이입전주. 태조이원봉전유공유지 개순주 호하지현.

 

훤이 크게 병사를 일으켜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의 병산(甁山) 밑에 주둔하여 태조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가 8천여 명에 달하였다. 다음날 훤이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장군 원봉(元逢)이 방어하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훤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전주(全州)로 이주시켰다. 태조는 원봉에게 예전에 세운 공로가 있다하여 용서하고, 순주를 고쳐 하지현(下枝縣)이라 하였다.

 

長興三年 甄萱臣龔直 勇而有智略 來降太祖. 萱收龔直二子一女 烙斷股筋.

장흥삼년 견훤신공직 용이우지략 래항태조. 훤수공직이사일녀 낙단고근.

 

장흥(長興) 3(서기 932), 견훤의 신하 공직(龔直)은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훤은 공직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을 잡아다가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어버렸다.

 

秋九月 萱遣一吉飡相貴 以舡兵入高麗禮成江 留三日 取鹽白貞三州船一百艘焚之 捉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추구월 훤견일길찬상귀 이강병입고려예성강 유삼일 취염백정삼주선일백수분지 착저산도목마삼백필이귀.

 

가을 9, 훤이 일길찬 상귀(相貴)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의 예성강(禮成江)에 들어와 3일간 머물면서 염주(鹽州), 백주(白州), 정주(貞州) 세 주의 배 1백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에서 기르던 말 3백 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淸泰元年春正月 萱聞太祖屯運州 遂簡甲士五千至. 將軍黔弼 及其未陣 以勁騎數千突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萱麾下術士宗訓醫者訓謙勇將尙達崔弼等降於太祖.

청태원년춘정월 훤문태조둔운주 수간감사오천지. 장군검필 급시미진 이경기수천돌격지 참획삼천여급. 웅진이북삼십여성 문풍자항 훤휘하술사종훈의자훈겸용장상달최필등항어태조.

 

청태(淸泰) 원년(서기 934) 정월, 훤이 태조가 운주(運州)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무장군사 5천을 선발하여 왔다. 장군 검필(黔弼)이 그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 날랜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천여 명을 목 베거나 잡았다.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자진하여 항복하였다. 견훤 휘하의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원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ㆍ최필(崔弼)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甄萱多娶妻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其位. 其兄神劒良劒龍劒等知之 憂悶. 時良劒爲康州都督 龍劒爲武州都督 獨神劒在側. 伊飡能奐 使人往康武二州 與良劒等陰謀 至淸泰二年春三月 與波珍飡新德英順等 勸神劒 幽萱於金山佛宇 遣人殺金剛. 神劒自稱大王 大赦境內.

견훤다취처 유자십여인. 제사자금강 신장이다지 훤특애지 의욕전기위. 기형신검양검용검등지지 우민. 시양검위강주도독 용검위무주도독 독신검재측. 이찬능환 사잉왕강무이주 여양검등음모 지청태이년춘삼월 여차진찬신덕영순등 권신검 유훤어금산불우 견인살금강. 신검자칭대왕대사경내.

 

견훤은 아내를 많이 얻어 아들이 10여 명이었다.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았으므로 훤이 특히 아껴서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다. 그의 형 신검(神劒),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 번민하였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있었고 홀로 신검만이 측근에 있었다. 이찬 능환(能奐)이 강주와 무주에 사람을 보내 양검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청태 2(서기 935) 3월에 파진찬 신덕(新德),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金山)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금강을 죽였다. 신검이 대왕을 자칭하고 국내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其敎書曰 如意特蒙寵愛 惠帝得以爲君 建成濫處元良 太宗作而卽位 天命不易 神器有歸 恭惟 大王神武超倫 英謀冠古.

기교서왈 여의특몽총애 혜제득이위군 건성감처원량 태종작이즉위 천명불이 신기유귀 공유대왕신무초륜 영모관고.

 

그 교서는 다음과 같았다. “한나라 여의(如意)가 특별히 총애를 받았지만 혜제(惠帝)가 임금이 되었고, 당나라 건성(建成)이 외람되게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태종이 일어나 제위에 올랐으니, 천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고 임금의 자리는 정해진 데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삼가 생각컨대, 대왕은 신묘한 무예가 출중하였고 영특한 지혜는 만고에 으뜸이었다.

 

生丁衰季 自任經綸 徇地三韓 復邦百濟 廓淸塗炭 而黎元安集. 鼓舞風雷 而邇遐駿奔 功業幾於重興. 智慮忽其一失 幼子鍾愛 姦臣弄權.

생정쇠계 자임경륜 순지삼한 복방백제 곽청도탄 이려원안집. 고무풍뢰 이이하준분 공업기어중흥. 지려홀기일실 유자종해 간신농권.

 

말세에 나시어 세상을 구하려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 삼한을 다니며 백제를 회복하셨으며, 도탄을 제거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시었다. 바람과 우레처럼 북을 울리며 치달리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달려와 공업(功業)의 중흥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지혜롭고 사려 깊었으나 문득 한번 실수하여, 어린 아들이 사랑을 독차지하고 간신이 권력을 농단하였다.

 

導大君於晋惠之昏 陷慈父於獻公之惑 擬以大寶授之頑童 所幸者上帝降衷 君子改過 命我元子 尹玆一邦. 顧非震長之才 豈有臨君之智 兢兢慄慄 若蹈冰淵 宜推不次之恩 以示惟新之政 可大赦境內.

도대군어진혜지혼 함자부어헌공지혹 의이대보수지완동 소행자상제항쇠 군자개과 명아원자윤자일방. 고비진장지재 이유염군지지 긍긍률률 약도빙연 의추불차지은 이시유신지정 가대사경내.

 

군주를 진()나라의 혜제(惠帝)의 어리석음으로 인도하였으며 자애로운 아버지를 헌공(獻公)의 미혹한 길에 빠지게 하여 왕위를 철모르는 아이에게 줄 뻔했으나, 다행히 하늘에서 진실한 마음을 내려주셔서 군자께서 허물을 바로잡고 장자인 나에게 이 나라를 맡기셨다. 돌이켜보면 나는 태자의 자질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 임금이 될 지혜가 있겠는가? 조심스럽고 두려워 얼음이 언 연못을 밟는 것 같으니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새로운 정치를 보여야 할 것이므로, 나라에 크게 사면령을 내린다.

 

限淸泰二年十月十七日昧爽以前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大辟已下 罪咸赦除之 主者施行.

한청태이년시월십칠일매상이전 이발각미발각 이결정미결정 대벽이하 죄감사제지 주자시행.

 

청태 2(서기 935) 1017일 동트기 이전을 기준하여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안을 막론하고 사형 이하의 죄는 모두 사면한다. 주관하는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萱在金山三朔 六月 與季男能乂女子哀福嬖妾姑比等逃奔錦城 遣人請見於太祖. 太祖喜 遣將軍黔弼萬歲等 由水路勞來之 及至 待以厚禮 以萱十年之長 尊爲尙父 授館以南宮 位在百官之上. 賜楊州 爲食邑 兼賜金帛蕃縟奴婢各四十口內廐馬十匹.

훤재금산삼삭 유월 여계남능예여자애복폐첩고비등도분금성 견인청견어태조 태조희 견장군검필만세등 유수로노래지 급지 대이후례 이훤십년지장 존위상보 수관이남궁 위재백관지상. 사양주 위식읍 겸사금백번욕노비각사십구내주마십필.

 

견훤은 금산에서 석달 동안 있었다.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금성(錦城)으로 달아나서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만날 것을 청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장군 금필(黔弼)과 만세(萬歲) 등을 보내 뱃길로 가서 그를 위로하고 데려오게 하였다. 견훤이 오자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견훤이 나이가 10년 위라 하여 높여 상보(尙父)라고 불렀으며, 남궁(南宮)을 숙소로 주고 백관의 윗자리 지위를 주었다.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금, 비단, 병풍, 금침과 남녀 종 각 40여명 및 궁중의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甄萱壻將軍英規 密語其妻曰 大王勤勞四十餘年 功業垂成 一旦 以家人之禍 失地 投於高麗 夫貞女不事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己君以事逆子 則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 況聞高麗王公 仁厚勤儉 以得民心 殆天啓也 必爲三韓之主 盍致書以安慰我王 兼殷勤於王公 以圖將來之福乎?”

견훤서장군영규 밀어기처왈 대왕근노사십여년 공업수성 일단 이가인지화 실지 투어고려 부정녀불사이부 충신불사이주 약사기군이사역자 즉하안이견천라지의사호? 황문고려왕공 인후근검 이득민심 태천계야 필위삼한지주 합치서이안위아왕 겸단근어왕공 이도장래지복호?

 

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英規)가 은밀하게 그의 처에게 말했다. “대왕이 40여 년 동안 노력하여 공업이 거의 이루어지려다가 하루아침에 집안 사람의 화란으로 땅을 잃고 고려에 투신하였다. 무릇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이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니 만약 제 임금을 버리고 역적인 자식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들을 볼 것인가? 하물며 고려의 왕공은 어질고 후덕하며 근면하고 검소함으로써 민심을 얻었다고 들었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인도하여 주는 것이다.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니, 어찌 편지를 보내 우리 임금을 위로하고 겸하여 왕공에게 공손히 하여 장래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其妻曰 子之言是吾意也.

기처왈 자지언시오의야.”

 

그의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말씀이 바로 저의 뜻입니다.”

 

於是 天福元年二月 遣人致意 遂告太祖曰 若擧義旗 請爲內應 以迎王師.”

어시 천복원년이월 견인치의 수고태조왈 약거의기 청위내응 이영왕사.”

 

이에 영규는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 2월에 사람을 보내 뜻을 전하고 마침내 태조에게 고하였다. “만약 의로운 깃발을 드신다면,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

 

太祖大喜 厚賜其使者而遣之 兼謝英規曰 若蒙恩一合 無道路之梗 則先致謁於將軍 然後升堂拜夫人 兄事而姉尊之 必終有以厚報之 天地鬼神 皆聞此言.”

태조대희 후사기사자이견지 겸사영규왈 약몽은일합 무도로지경 득선치알어장군 연후승당배부인 형사이자존지 필종유이후보지 천지귀신 개문차언.”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후하게 상을 주어 보내고 동시에 영규에게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만약 은혜를 입어 하나로 힘을 합쳐 길을 막는 장애가 없어진다면, 먼저 장군을 찾아뵙고는 마루에 올라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높여 반드시 종신토록 후하게 보답하리니, 이 말은 천지신명이 모두 듣고 있을 것입니다.”

 

夏六月 萱告曰 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 願仗殿下威稜 以誅逆子耳 伏望大王借以神兵 殲其賊亂 則臣雖死無憾.”

하유월 훤고왈 노신소이투신어전하자 원장전하위릉 이주약자이 복망대왕차이신병 섬기적난즉신수사무감.”

 

여름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고하여 말했다. “노신이 전하에게 투항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역적인 자식을 베고자 함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신병(神兵)을 빌려 주시어 나라를 어지럽힌 자들을 섬멸케 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太祖從之 先遣太子武將軍述希 領步騎一萬 趣天安府. 秋九月 太祖率三軍 至天安 合兵進次一善. 神劒以兵逆之 甲午 隔一利川 相對布陣.

태조종지 선견태자무장군술희 영보기일만 취천안부. 추구월 태조솔삼군 지천안 합병진차일선. 신검이병역지 갑오 격일이천 상대포진.

 

태조가 그 말에 따라, 먼저 태자 무()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게 하여 천안부(天安府)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태조가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병력을 합쳐 일선(一善)에 진군하였다. 신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대치하여 갑오(甲午)일에 일이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진을 쳤다.

 

太祖與尙父萱觀兵 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大相金鐵洪儒守鄕將軍王順俊良等 領步騎三萬爲右翼 大匡順式太相兢俊王謙王乂黔弼將軍貞順宗熙等 以鐵騎二萬 步卒三千及黑水鐵利諸道勁騎九千五百爲中軍 大將軍公萱 將軍王含允 以兵一萬五千爲先鋒 鼓行而進. 百濟將軍孝奉德述明吉等 望兵勢大而整 棄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 問百濟將帥所在 孝奉等曰 元帥神劒 在中軍.” 太祖命將軍公萱 直擣中軍 一軍齊進挾擊 百濟軍潰北. 神劒與二弟及將軍富達小達能奐等四十餘人生降.

태조여상보견훤병 이대상견권술희금산용길고기언등 영보기삼만위좌익 대상김철홍유수향장 군왕순준양등 영보기삼만위우익 대광순식태상긍준왕겸왕예검필장군정순종희등 이철기이만보졸삼천급흑수철리제도경기구천오백위중군 대장군공훤 장군왕함윤 이병일만오천위선봉 고행이진. 백제장군효봉덕술명고등 망병세대이정 기갑항어진전. 태조노위지 문백제장수소재 효봉등왈 원수신검 재중군.” 태조명장군공훤 직도중군 일군제진협격 백제군궤배. 신검여이제급장군부달소달능환사십여인생항.

 

태조가 상보 견훤과 함께 군대를 사열하고 대상(大相) 견권(堅權)ㆍ술희ㆍ금산(金山)과 장군 용길(龍吉)ㆍ기언(奇彦)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좌익으로 삼고, 대상 김철(金鐵)ㆍ홍유(洪儒)ㆍ수향(守鄕)과 장군 왕순(王順)ㆍ준량(俊良)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우익으로 삼고, 대광(大匡) 순식(順式)과 대상 긍준(兢俊)ㆍ왕겸(王謙)ㆍ왕예(王乂)ㆍ금필과 장군 정순(貞順)ㆍ종희(宗熙) 등에게 철기 2만과 보병 3, 그리고 흑수(黑水)ㆍ철리(鐵利) 등 여러 방면의 날랜 기병 95백을 주어 중군으로 삼고, 대장군 공훤(公萱)과 장군 왕함윤(王含允)에게 군사 15천을 주어 선봉을 삼아서 북을 울리며 진격하였다. 백제 장군 효봉(孝奉)ㆍ덕술(德述)ㆍ명길(明吉) 등이 군사의 기세가 크고 정연한 것을 보고 무기를 버리고 진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을 위로하고 백제군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원수 신검이 중군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태조가 장군 공훤에게 명하여 곧바로 중군을 치라 하고 전군이 함께 나가 협공하자, 백제 군대가 무너져 패배하였다.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ㆍ소달(小達)ㆍ능환(能奐) 40여 명과 함께 항복하였다.

 

太祖受降 除能奐 餘皆慰勞之 許令與妻孥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劒等密謀 囚大王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當如是乎?”

태조수항 제능환 여개위노지 허령여처나상경 문능환왈 시여양검등밀모 수대왕입기자자 여지모야 위신지의당여시호?”

 

태조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능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을 모두 위로하여 주었으며, 처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조가 능환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함께 비밀히 모의해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운 것이 너의 소행이니, 신하된 도리로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能奐俛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一云三兄弟 皆伏誅] 甄萱憂懣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능환면수불능언. 수명주지. 이신검체위위인소협 비기본심 우차귀명걸죄 특원기사[일운삼형재개장주] 견훤우만발저 수일졸어황산불사.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신검이 왕위를 차지한 것은 남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 그의 본심이 아닐 것이라 여기고, 또 목숨을 바쳐 죄를 청했으므로 특별히 사형을 면제시켜 주었다.[혹은 삼형제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도 한다.]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黃山)의 불사(佛舍)에서 죽었다.

 

太祖軍令嚴明 士卒不犯秋毫 故州縣案堵 老幼皆呼萬歲. 於是 存問將士 量材任用 小民各安其所業. 謂神劒之罪 如前所言 乃賜官位 其二弟與能奐罪同 遂流於眞州 尋殺之. 謂英規 前王失國後 其臣子無一人慰藉者 獨卿夫妻 千里嗣音 以致誠意 兼歸美於寡人 其義不可忘.”

태조군령엄명 사졸불범사호 고주현안도 노유개호만세. 어시 존문장사 양재임용 소민각안기소업. 위신검지죄 여전소언 내사관위 제이제여능환죄동 수유어진주 심살지. 위영규 전왕실국후기신자무일인자자. 독경부처 천리사음 이치성의 겸귀미어관인 기의불가망.

 

태조가 군령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하여 사졸들이 털끝만치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와 현의 백성들은 모두 안도하였으며, 늙은이와 어린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에 장수와 사졸을 위로하고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서 임용하니, 백성들은 각각 자신의 생업에 안착하였다. 신검의 죄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하여 벼슬을 주고, 그의 두 아우는 능환과 죄가 같다 하여 진주(眞州)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후에 처형하였다. 태조가 영규에게 말했다. “전의 임금이 나라를 잃은 뒤에 그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도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경의 부부만이 천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다하였으며 겸하여 과인에게 귀순하였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다.”

 

仍許職左丞 賜田一千頃 許借驛馬三十五匹 以迎家人 賜其二子以官.

잉허직좌승 사전일천경 허차멱마삼십오필 이영가인 사기이자이관.

 

이로 인하여 좌승(左丞)의 직위를 주고 밭 일천 경()을 하사했으며, 또한 역마 35필을 빌려주어 집안 사람을 데려오게 하고 그의 두 아들에게도 관직을 내렸다.

 

甄萱起唐景福元年 至晋天福元年 共四十五年而滅.

견훤기당경복원년 지진천복원년 공사십오년이멸.

 

견훤은 당나라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에 일어나 진나라 천복(天福) 원년(서기 936)에 이르기까지 모두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 群盜投隙而作 若猬毛然. 其劇者 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 本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讐 圖夷滅之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 甚矣. 甄萱 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軼都邑 虔劉君臣 若禽獮而草薙之 實天下之元惡大憝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

논왈 신라수궁도상 천무소조 민무소귀. 어시 군도투극이작 약위모연. 기극자 궁예견훤이인이이. 궁예 본신라왕자 이반이종국위수 도이멸지 지참선조지화상 기위불인 심의. 견훤 기자신라지민 식신라지록 이포장화심 행국지위 침일도읍 건유군신 약금선이초체지 실천하지원악대대 고궁예견기어기신 견훤간화어기자. 개자취지야 우수구야? 수항우이밀지웅재 불능적한당지흥이황예훤지흉인 이가여아태조상항여? 단위지구민자야.

 

사관이 논평한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도의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고 일어나니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그 중에서 가장 심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조국을 원수로 여기고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畵像)을 베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이 극심하다. 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반역의 마음을 품어, 나라의 위기를 요행으로 여겨 도읍을 침탈하여 임금과 신하를 살육하기를 마치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하였으니, 실로 천하에서 가장 극악한 자이다. 그런 까닭으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 당했고, 견훤은 그 자식에게 화를 입었다. 이는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리오? 비록 항우(項羽)나 이밀(李密)과 같은 뛰어난 재주로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발흥을 대적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궁예나 견훤과 같은 흉악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와 서로 겨룰 수 있었겠는가? 다만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주는 자들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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