蓋蘇文
蓋蘇文[或云蓋金] 姓泉氏. 自云生水中 以惑衆. 儀表雄偉 意氣豪逸. 其父東部[或云西部]大人大對盧死 蓋蘇文當嗣 而國人以性忍暴 惡之不得立. 蘇文頓首謝衆 請攝職 如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許.
개소문[혹운개금] 성천씨. 자운생수중 이혹중. 의표웅위 의기호일. 기부동부[혹운서부]대인대대로사 개소문당사 이국인이성인폭 오지부득립. 소문돈수사중 청섭직 여유불가 수폐무회. 중애지 수허.
개소문(蓋蘇文)[혹은 개금(蓋金)이라고 한다.]은 성이 천(泉)씨이다.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사람들을 현혹하였다.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호방하였다. 그의 부친 동부(東部)[혹은 서부(西部)라고 한다.] 대인(大人) 대대로(大對盧)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지위를 이어받아야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하다 하여 미워했기 때문에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소문이 머리를 조아리고 뭇 사람들에게 사죄하며 그 직을 임시로 맡을 것을 청하면서, 만약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쫓겨나도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마침내 허락하였다.
嗣位而凶殘不道 諸大人與王 密議欲誅 事洩. 蘇文悉集部兵 若將校閱者 幷盛陳酒饌於城南 召諸大臣共臨視. 賓至 盡殺之 凡百餘人. 馳入宮弑王 斷爲數段 棄之溝中. 立王弟之子臧爲王 自爲莫離支 其官如唐兵部尙書兼中書令職也.
사위이흉잔부도 제대인여왕 밀의욕주 사설. 소문실집부병 약장교열자 병성진주찬어성남 소제대신공임시. 빈지 진살지 범백여인. 치입궁시왕 단위수단 기지구중. 입왕제지자장위왕 자위막리지 기관여당병부상서겸중서령직야.
그가 직위를 잇게 되자 흉포하고 잔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여러 대인들이 왕과 은밀하게 논의하여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 일이 누설되고 말았다. 소문은 자기 부(部)의 병사를 모두 모아 마치 사열할 것처럼 하고, 아울러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려 놓고 여러 대신들을 불러서 함께 보자고 하였다. 손님들이 도착하자 그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는데 대체로 보아 백여 명에 달하였다. 이어서 궁궐로 달려 들어가 왕을 시해하고 몇 동강으로 잘라 도랑에 버렸다. 그리고 왕의 동생의 아들 장(臧)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이 관직은 당나라의 병부상서겸중서령(兵部尙書兼中書令)의 직위에 해당한다.
於是 號令遠近 專制國事 甚有威嚴. 身佩五刀 左右莫敢仰視. 每上下馬 常令貴人武將伏地 而履之. 出行 必布隊伍 前導者長呼 則人皆奔迸 不避坑谷 國人甚苦之.
어시 호령원근 전제국사 심유위엄. 신패오도 좌우막감앙시. 매상하마 상영귀인무장복지 이복지. 출행필포대오 전도자장호 즉인개분병 불피갱곡 국인심고지.
이에 전국을 호령하고 나랏일을 제멋대로 처리하니 위세가 대단하였다. 몸에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니니 주위에서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말에 오르내릴 때마다 항상 귀인(貴人), 무장(武將)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디디는 발판으로 삼았다. 나가 다닐 때에는 반드시 대오를 지어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이 길게 외치면 사람들이 모두 급히 흩어져 달아나는데 구덩이나 골짜기든 가리지 않으니, 나라 사람들이 이를 몹시 고통스럽게 여겼다.
唐太宗聞蓋蘇文弑君而專國 欲伐之 長孫無忌曰 蘇文自知罪大 畏大國之討 設其守備 陛下姑爲之隱忍 彼得以自安 愈肆其惡 然後取之 未晩也 帝從之.
당태종문개소문시군이전국 욕벌지 장손무기왈 “소문자지죄대 외댜국지토 설기수비 폐하소위지은인 피득이자안 유사기악 연후취지 미만야.” 제종지.
당 태종이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나라를 차지해 멋대로 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치려 하니,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말했다. “소문은 자신의 죄가 큰 줄을 스스로 알고 또한 대국의 정벌을 두려워하여 지킬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조금 참고 계시다가 그가 스스로 안심하여 나쁜 짓을 더욱 방자하게 하고 난 뒤에 나라를 빼앗아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蘇文告王曰 “聞中國三敎並行 而國家道敎尙缺 請遣使於唐求之.”
소문고왕왈 “문중국삼교병행 이국가도교상결 청견사어당구지.”
소문이 왕에게 아뢰었다. “듣자옵건대 중국에는 세 가지 교가 병행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도교(道敎)가 아직 빠져 있습니다. 당에 사신을 보내 구해오기를 바라나이다.”
王遂表請 唐遣道士叔達等八人 兼賜道德經 於是 取浮屠寺館之.
왕수표청 당견도사숙달등팔인 겸사도덕경 어시 취부도사관지.
왕이 마침내 표문을 올려 이를 청하니, 당에서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8인을 보내고 아울러 도덕경(道德經)을 보내주었다. 이에 불교의 절을 빼앗아 그 곳을 거처로 쓰게 하였다.
會新羅入唐告 ‘百濟攻取我四十餘城 復與高句麗連兵 謀絶入朝之路 小國不得已出師 伏乞天兵救援.’
회신라입당고 ‘백제공취아사십여성 복여구구려연병 모절입조지로 소국부득이출사 복걸천병구원.’
이때 신라가 당에 가서 ‘백제가 신라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또한 고구려와 병사를 연합하여 당에 조공하는 길을 끊으려 하므로 신라가 부득이 군대를 낼 수밖에 없으니, 당병의 구원을 엎드려 비옵니다.’라고 하였다.
於是 太宗命司農丞相里玄獎賚璽書 勅王曰 新羅委質國家 朝貢不闕 爾與百濟 宜各戢兵 若更攻之 明年 發兵討爾國矣.
어시 태종명사농승상상리현장새서 칙왕왈 “신라위질국가 조공불궐 이여백제 의각집병 약경공지 명년 발병토이국의.”
이에 당 태종이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에게 명하여 새서(璽書, 옥새찍은 문서)를 가지고 왕에게 칙명으로 “신라는 우리의 맹방으로서 조공(朝貢)을 빠뜨리지 않았으니, 너희와 백제는 각각 병사를 거두어야 마땅 할 것이다.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한다면 내년에는 병사를 내어 너희 나라를 토벌할 것이다.”하였다.
初玄獎入境 蘇文已將兵擊新羅 王使召之乃還 玄獎宣勅 蘇文曰 “往者 隋人侵我 新羅乘釁 奪我城邑五百里 自此怨隙已久 若非還我侵地 兵不能已.” 玄獎曰 旣往之事 焉可追論 今遼東 本皆中國郡縣 中國尙不言 句麗豈得必求故地 蘇文不從.
초현장입경 소문이장병격신라 왕사소지내환 현장선칙 소문왈 왕자 수인침아 신라승흔 탈아성읍오백리 자차원극이구 약비환아침지 병불능이. 현장왈 “기왕지사 언가추론 금요동 본개중국군현 중국상불언 구려이득필구고지.” 소문불종.
처음 현장이 고구려 국경에 들어왔을 때, 소문은 이미 병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고 있었으므로 왕이 사람을 보내 불러서야 돌아왔다. 현장이 칙서를 선포하니 소문이 말했다. “옛날 수나라가 우리를 침략하였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우리의 성읍 5백 리를 빼앗아갔다. 이것으로부터 원한과 틈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만약 우리에게 침탈해간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전쟁을 그만 둘 수 없다.” 현장이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 거슬러 논의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요동(遼東)은 본래 모두 중국의 군현(郡縣)이었는데도 오히려 따지지 않는데, 고구려는 어찌 반드시 옛 땅을 찾겠다고 하는 것인가?” 그러나 소문은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玄獎還具言之 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賊其大臣 殘虐其民 今又違我詔命 不可以不討.”
현장환구언지 태종왈 “개소문시기군 적기대신 잔학기민 금우위아조명 불가이불토.”
현장이 돌아가서 모두 보고하니 태종이 말했다. “개소문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고 그 대신들을 해쳤으며 백성들에게 잔인하고 포악하게 하고, 지금은 또 나의 명령마저 어기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又遣使蔣儼諭旨 蘇文竟不奉詔 乃以兵脅. 使者不屈 遂囚之窟室中 於是 太宗大擧兵 親征之 事具句麗本紀.
우견사장엄유지 소문경불봉조 내이병협. 사자불굴 수수지굴실중 어시 태종대거병 친정지 사구구려본기.
태종은 다시 사신 장엄(蔣儼)을 보내 타일렀으나 소문은 끝내 조서를 받들지 않고 병사로써 사신을 위협하였다. 사자(使者)가 굴하지 않자 소문은 그만 그를 동굴 속에 가두었다. 이에 태종이 크게 병사를 일으켜 몸소 정벌하였으니, 이 일은 모두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에 실려 있다.
蘇文至乾封元年死 子男生 字元德. 九歲以父任爲先人 遷中裏小兄 猶唐謁者也. 又爲中裏大兄 知國政 凡辭令皆男生主之. 進中裏位頭大兄 久之 爲莫離支兼三軍大將軍 加大莫離支. 出按諸部 而弟男建男産 知國事.
소문지건봉원년사 자남생 자원덕. 구세이부임위선인 천중리소형 유당알자야. 우위중리대형지국정 범사영개남생주지. 진중리위두대형 구지 위막리지겸삼군대장군 가대막리지. 출안제부이제남건남산 지국사.
소문(蘇文)은 건봉(乾封) 원년(서기 666)에 죽었다. 아들 남생(男生)은 자가 원덕(元德)이다. 9세에 아버지의 임명으로 선인(先人)이 되었다가 중리소형(中裏小兄)으로 옮겼으니, 이는 당의 알자(謁者)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다시 중리대형(中裏大兄)이 되어 국정을 보살피게 되었는데 모든 관리의 임명을 남생이 주관하였다.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으로 승진하여 오래 있다가 막리지(莫離支)가 되었고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하다가 대막리지(大莫離支)의 관직이 더하여졌다. 그가 여러 부(部)를 살피러 나가게 되자 그의 아우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이 나랏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或曰 男生惡君等逼己 將除之 建産未之信 又有謂男生 將不納君.“ 男生遣諜往 男建捕得 卽矯王命召之.
혹왈 “남생오군등박기 장제지 건산미지신 우유위남생 장불납군.” 남생견첩왕 남건포득 즉교왕명소지.
어떤 이가 남건과 남산에게 말하였다. “남생은 그대들이 자기 자리에 가까이 바짝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여 장차 당신들을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남건과 남산이 믿지 않았다. 또 어떤 이가 남생에게 이르기를 ‘아우들이 그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남생이 첩자를 보냈는데 남건이 그 첩자를 사로잡아두고 즉시 왕명을 사칭하여 남생을 불러들였다.
男生懼不敢入 男建殺其子獻忠 男生走保國內城 率其衆 與契丹靺鞨兵附唐 遣子獻誠訴之 高宗拜獻誠右武衛將軍 賜乘輿馬瑞錦寶刀 使還報 詔契苾何力率兵援之 男生乃免.
남생구불감입 남건살기자헌충 남생주보국내성 솔기중 여거란말갈병부당 견자헌성소지 고종배헌성우무장장군 사승여마서백보도 사환보 조설필하력솔변원지 남생내면.
남생이 두려워하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남건이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였다. 남생은 도주하여 국내성(國內城)에 의지하다가 그의 무리와 거란(契丹), 말갈(靺鞨) 병사와 함께 당에 붙고, 아들 헌성(獻誠)을 보내 하소연하였다. 당 고종이 헌성에게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을 제수하고 수레, 말, 비단, 보검을 내려주어 돌아가 보고하게 하고, 설필하력(契苾何力)에게 조서를 내려 병사를 거느리고 구원하게 하니, 남생이 그제서야 화를 모면하였다.
授平壤道行軍大摠管 兼持節安撫大使 擧哥勿南蘇倉巖等城以降. 帝又命西臺舍人李虔繹 就軍慰勞 賜袍帶金釦七事.
원평양도행군대총관 겸지절안무대사 거가물남소창엄등성이항. 제우명서대사인이건역 취군위노 사포대금구칠사.
고종이 남생에게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 겸 지절안무대사(持節安撫大使)를 제수하니 그는 가물(哥勿), 남소(南蘇), 창암(倉巖) 등의 성을 바쳐 항복하였다. 황제가 또 서대사인(西臺舍人) 이건역(李虔繹)에게 명하여 남생의 군중에 가서 위로하게 하고 도포와 띠, 금그릇 등 일곱 가지를 하사하였다.
明年 召入朝 遷遼東大都督玄菟郡公 賜第京師. 因詔還軍 與李勣攻平壤 入禽王. 帝詔遣子 卽遼水勞賜 還 進右衛大將軍卞國公. 年四十六卒. 男生純厚有禮 奏對敏辯 善射藝. 其初至 伏斧鑕待罪 世以此稱焉.
명년 소입조 천요동대도독현토군공 사제경사 인조환군 여이적공평양 입금왕. 제조견자 즉요수노사 환 진우위대장군변국공. 년사십육졸. 남생순후유례 주대민변 선사예. 기초지 복부징대죄 세이차칭언.
이듬해에 그를 불러 조정에 들어오게 하여 요동대도독현도군공(遼東大都督玄菟郡公)으로 바꿔주고 서울에 집 한 채를 하사하였다. 조서를 받고 군으로 돌아가 이적(李勣)과 함께 평양(平壤)을 공격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 왕을 사로잡았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아들을 요수(遼水)로 보내 위로하고 상을 하사했으며 돌아오자 우위대장군변국공(右衛大將軍卞國公)으로 올려주었다. 나이 마흔여섯에 죽었다. 남생은 순수하고 도타워 예의가 있었으며, 아뢰고 대답함에 영리하게 말을 잘하였고 활도 잘 쏘았다. 그가 처음 당에 갔을 때 도끼 밑에 엎드려 죄를 기다렸으니, 세상에서 이 일을 가지고 그를 칭찬하였다.
獻誠 天授中以右衛大將軍兼羽林衛 武后嘗出金幣 於文武官內 擇善射者五人 中者以賜之. 內史張光輔先讓獻誠 爲第一 獻誠後讓右王鈐衛大將軍薛吐摩支 摩支又讓獻誠. 旣而 獻誠奏曰 “陛下擇善射者 然多非華人. 臣恐唐官以射爲恥 不如罷之.”
헌성 천수중이우위대장군겸우림위 무후상출금폐 어문무관내 택선사자오인 중자이사지. 내사장광보선영헌성 위제일 헌성후양우왕금위대장군설토마지 마지우양헌성. 기이 헌성주왈 “폐하택선사자 연다비화인. 신공당관이사위치 불여파지.”
헌성(獻誠)은 천수(天授) 연간에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우림위(羽林衛)를 겸하고 있었다. 무후(武后)가 한번은 금화를 내걸고 문무관리 중에서 활 잘 쏘는 사람 다섯 명을 가려, 맞히는 이에게 상으로 주기로 하였다. 내사(內史) 장광보(張光輔)가 먼저 헌성에게 양보하여 그가 제일이 되었고, 헌성은 다시 우왕검위대장군(右王鈐衛大將軍) 설토마지(薛吐摩支)에게 양보하니, 마지는 다시 헌성에게 양보하였다. 조금 있다가 헌성이 아뢰었다. “폐하께서 활 잘 쏘는 사람을 가리려 하시오나 대부분 중국 사람이 아닙니다. 신은 당의 관리들이 활 쏘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길까 두렵사오니 그만두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后嘉納 來俊臣嘗求貨 獻誠不答 乃誣其謀叛 縊殺之 后後知其寃 贈右羽林衛大將軍 以禮改葬.
후가납 래준신상구화 헌성부답 내무기모반 액살지. 후후지기원 증우우림위대장군 이예개장.
무후가 옳다고 여겨 받아들였다. 내준신(來俊臣)이 일찍이 뇌물을 요구했는데 헌성이 응대하지 않자, 이에 헌성이 반역을 꾀한다고 무고하여 목매달아 죽였다. 무후가 후에 헌성의 원통함을 알고 우우림위대장군(右羽林衛大將軍)을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다시 장사 지냈다.
論曰 宋神宗與王介甫論事曰 “太宗伐高句麗 何以不克?” 介甫曰 “蓋蘇文 非常人也.” 然則蘇文 亦才士也 而不能以直道奉國 殘暴自肆 以至大逆 春秋‘君弑賊不討 謂之國無人’ 而蘇文保腰領 以死於家 可謂幸而免者 男生獻誠 雖有聞於唐室 而以本國言之 未免爲叛人者矣.
논왈 송신종여왕개포논사왈 “태종벌고구려 하이불극 개포왈 개소문 비상인애 연즉소문 역재사야 이불능이직도봉국 잔폭자사 이지대역 춘추군시적불토 위지국무인 이소문보요령 이사어가 가위행이면자 남생헌성 수유문어당실 이이본국언지 미면위반인자의.
송(宋)의 신종(神宗)이 왕개보(王介甫)와 옛일을 논하며 말하기를 “태종이 고구려를 쳤을 때 왜 이기지 못하였는가?” 하니 개보가 대답하길 “개소문이 비상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했으니, 그런즉 개소문도 역시 재주있는 인물임이 틀림없는데 곧은 도로써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인하고 포악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대역에 이른 것이다. 춘추(春秋)에는 ‘임금이 시해되었는데도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면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이른다.’라고 하였는데, 소문이 몸을 온전히 하여 집에서 죽은 것은 요행으로 모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생과 헌성은 비록 당 황실에 알려지기는 했지만, 본국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반역자임을 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