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傳 第十-弓裔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 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궁예 신라인 성김씨. 고제사십칠헌안왕의정 모헌안왕빈어 실기성명. 혹운 사십팔경문왕응겸지자. 이오월오일 생어외가 기시 옥상유소광 약장홍 상속천.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빛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
日官奏曰 “此兒 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일관주왈 “차아 이중오일생 생이유치 차광염이상 공장래불리어국가 의물양지.”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日]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또한 광선과 불꽃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기르지 마옵소서.”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왕칙중사 저기가살지. 사자취어강보중 투지루하. 유비절봉지 오이수촉 묘기일목. 포이도찬 구노양육.
왕이 궁중의 사자(使者)를 시켜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누마루 아래로 던졌는데, 젖먹이는 종이 몰래 받다가 잘못해서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그길로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년십여세 유희부지 기비고지왈 “자지생야 견기어국. 여불인절양. 이지금일 이자지광여차 필위인소지. 즉여여자구불면 위지내하?”
나이 10여 세가 되도록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여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내가 차마 어쩌지 못해서 오늘날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런데 너의 미친 짓이 이와 같으니 필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 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궁예읍왈 “약연즉오서의 무위모우 변거세달사 금지흥교사 시야. 축발위승 자호선종.”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여기를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바로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及壯 不拘檢僧律 軒輊有膽氣. 嘗赴齋 行次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祕而不言 頗自負.
급장 불구검승률 헌지유담기. 상부재 행차유오조함물 낙소지발중. 시지 아첨서왕자 즉비이불언 파자부.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 한번은 재(齋)를 올리러 가는데 길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어다가 궁예의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상아로 만든 조각에 ‘왕(王)’자가 쓰여 있으므로, 비밀로 하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못 자만심을 가졌다.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群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 善宗鬱悒不自安 潛結箕萱麾下元會申煊等爲友.
견신라쇠계 정황민산 왕기외주현 반부상반. 원근군도 봉기의취. 선종위승란취중 가이득지. 이진성왕즉위오년 대순이년신해 투죽주적괴기훤. 기훤모만무례 선동울읍부자안 참결기훤휘하원회신훤등위우.
신라 말기에 정치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서울 인근 바깥의 주, 현 중에서 배반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도처에서 뭇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떼같이 모여들었다. 선종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眞聖王) 재위 5년, 대순(大順) 2년 신해(서기 891)에 죽주(竹州)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箕萱)에게 투신하였다. 기훤이 업신여기며 예로써 대우하지 않자, 선종은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여 기훤의 휘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景福元年壬子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委任以事 遂分兵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 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皆降之.
경복원년임자 투북원적양길 길선우지계임이사 수분병사동략지 어시출숙치악산석남사 행습주천나성울오어진등현개항지.
경복(景福) 원년 임자(서기 892)에 북원(北原, 강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신하였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드디어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의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면서 주천(酒泉), 나성(奈城), 울오(鬱烏), 어진(御珍)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盺長貴平張一等爲舍上[舍上謂部長也] 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 衆心畏愛 推爲將軍.
건녕원년 입명주 유중삼천오백인 분위십사대. 김대검모흔장귀평정일등위사상[사상위부장야]여사졸동감고노일 지어여분 공이불사. 시이 중심외애 추위장군,
건녕(乾寧) 원년(서기 894)에 명주(溟州, 강원 강릉)로 들어가니 무리가 3천 5백 명이 되어 14개 대오로 나누었다. 김대검(金大黔), 모흔(毛盺), 장귀평(長貴平), 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부장(部長)을 말한다.]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 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하여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경애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於是 擊破猪足狌川夫若金城鐵圓等城 軍聲甚盛 浿西賊寇 來降者衆多.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我太祖自松岳郡來投 便授鐵圓郡太守.
어시 격파제족생천부약금성철원등성 군성기성 패서적구 래항자중다. 선종자이위중대 가이개국칭군 시설내외관직. 아태조자송악군래투 변수철원군태수.
이에 저족(猪足), 생천(狌川), 부약(夫若), 금성(金城), 철원(鐵圓) 등의 성을 쳐부수어 군세가 매우 불어났다. 패서(浿西)에 있는 도적들이 와서 항복하는 자들이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세워 임금을 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太祖)가 송악군(松岳郡, 경기 개성)으로부터 와서 의탁하자 곧바로 철원군 태수의 직위를 주었다.
三年丙辰 攻取僧嶺臨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 善宗謂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 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삼년병진 공취승령임강양현 사년정사 인물현항. 선종위송악군한북명군 산수기수 수정이위도격파공검포혈구등성. 시양길유재북원 취국원등삼십여성유지 문선종지광민중 대노 욕이삼십여성경병습지. 선종잠인 선격대패지.
3년 병진(서기 896)에 승령(僧嶺), 임강(臨江)의 두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4년 정사(서기 897)에는 인물현(仁物縣)이 항복하였다. 선종은 송악군이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빼어나다고 생각하여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孔巖), 검포(黔浦), 혈구(穴口) 등의 성을 쳐부수었다. 당시에 양길은 그때까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國原, 충북 충주) 등 30여 성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었는데, 선종의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병으로 선종을 습격하려 하였다. 선종이 이를 알아차리고 먼저 양길을 쳐서 크게 깨뜨렸다.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광화원년무오춘이월 집송악성 이아태조위정기대감 아양주견주 동십일월 시작팔관회.
광화(光化) 원년 무오(서기 898) 봄 2월에 송악성을 수리하고 우리 태조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와 견주(見州)를 치게 하였다.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三年庚申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或云靑川]槐壤等 皆平之. 以功授太祖阿飡之職.
삼년경신 우명태조벌광주충주당성청주[혹운청천]괴양등 개평지. 이공수태조아찬지직.
3년 경신(서기 900)에 또 태조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 청주(靑州)[혹은 청천(靑川)이라고 한다.], 괴양(槐壤) 등의 고을을 치게 하여 다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태조에게 아찬의 직위를 주었다.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 鞠爲茂草 吾必報其讐.”
천복원년신유 선종자칭왕 위인왈 “왕자신라 청병어당 이파고구려 고평양구도 국위무초 오필보기수.
천복(天復) 원년 신유(서기 901)에 선종이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래서 평양(平壤)의 옛 도읍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劒擊之 其刃迹猶在 .
개원생시견기 고유차언 상남순 지흥주부석사 견벽화신라왕상 발검격지 기인적유재.
아마도 태어났을 때 버림받은 것을 원망했던 까닭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한번은 남쪽을 돌아다니다가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모습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天祐元年甲子 立國號爲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匡治奈[今侍中] 徐事[今侍郞] 外書[今員外郞] 又置兵部大龍部[謂倉部] 壽春部[今禮部] 奉賓部[今禮賓省] 義刑臺[今刑部] 納貨府[今大府寺] 調位府[今三司] 內奉省[今都省] 禁書省[今秘書省] 南廂壇[今將作監] 水壇[今水部] 元鳳省[今翰林院] 飛龍省[今太僕寺] 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 植貨府[掌栽植菓樹] 障繕府[掌修理城隍] 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中尹等品職 秋七月 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천우원년갑자 입국로위마진 연호위무태 시치광평성 비원광치나[금시중] 서사[금시랑] 외서[금원외랑] 우치병부대용부[위창부] 수춘부[금예부] 봉빈부[금예빈성] 의형대[금형부] 납화부[금대부사] 조위부[금삼사] 내봉성[금도성] 금서성[금비서성] 남상단[금장작감] 수단[금수부] 원봉성[금한림원] 비용성[금태복사] 물장성[금소부감] 우치사대[금습제역어] 식화부[장재깃과수] 당선부[장수리성황] 주도성[장조성기물] 우설정광원보대상원윤좌윤정조포윤군윤중윤둥품직. 추칠월 이청주인호일천 입철원성위경 벌위상주등삼십여주현 공주장군홍기래항.
천우(天祐) 원년 갑자(서기 904)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으로 광치나(匡治奈)[지금의 시중(侍中)], 서사(徐事)[지금의 시랑(侍郞)], 외서(外書)[지금의 원외랑(員外郞)]를 갖추었다. 또 병부(兵部), 대룡부(大龍部)[창부(倉部)를 이른다.], 수춘부(壽春部)[지금의 예부(禮部)], 봉빈부(奉賓部)[지금의 예빈성(禮賓省)], 의형대(義刑臺)[지금의 형부(刑部)], 납화부(納貨府)[지금의 대부시(大府寺)], 조위부(調位府)[지금의 삼사(三司)], 내봉성(內奉省)[지금의 도성(都省)], 금서성(禁書省)[지금의 비서성(秘書省)], 남상단(南廂壇)[지금의 장작감(將作監)], 수단(水壇)[지금의 수부(水部)], 원봉성(元鳳省)[지금의 한림원(翰林院)], 비룡성(飛龍省)[지금의 태복시(太僕寺)], 물장성(物藏省)[지금의 소부감(少府監)]을 설치하였다. 또한 사대(史臺)[모든 외국어 통역의 학습을 관장한다.], 식화부(植貨府)[과수 재배를 관장한다.], 장선부(障繕府)[성황(城隍) 수리를 관장한다.], 주도성(珠淘省)[기물 제조를 관장한다.] 등을 설치하고 또 정광(正匡), 원보(元輔), 대상(大相), 원윤(元尹), 좌윤(佐尹), 정조(正朝), 보윤(甫尹), 군윤(軍尹), 중윤(中尹) 등의 품직을 갖추었다. 가을 7월에 청주의 주민 1천 호를 철원성으로 옮겨 살게 하고 서울로 삼았다. 상주(尙州) 등 30여 주현을 쳐서 빼앗았다. 공주장군(公州將軍) 홍기(弘奇)가 와서 항복했다.
天祐二年乙丑 入新京 修葺觀闕樓臺 窮奢極侈. 改武泰爲聖冊元年 分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將軍黔用降 甄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 善宗以强盛自矜 意慾倂呑 令國人呼新羅爲滅都 凡自新羅來者 盡誅殺之.
천우이년을축 입신경 수집관궐누대 궁사극치. 개무태위성책원년 분정패서십삼현. 평양성주장군검용항 증성적의황의적명귀등귀복. 선종이강성자긍 의욕병탄 영국인호신라위멸도 범자신라래자 진주살지.
천우 2년 을축(서기 905)에 새로운 서울에 들어가 궁궐과 누대를 수축하였는데 사치스럽기가 극에 달하였다. 연호 무태를 고쳐 성책(聖冊) 원년이라 하였고, 패서 지역의 13개 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성주(平壤城主)인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甄城)의 적의(赤衣)ㆍ황의(黃衣) 도적과 명귀(明貴) 등이 복속하여 왔다. 선종은 강성한 세력에 자만해져 병탄할 생각을 갖고 나라 사람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버렸다.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飡將軍.
주량건화원년신미 개성책위수덕만세원년 개국호위태봉. 견태조솔병 벌금성등 이금성위나주. 논공 이태조위대아찬장군.
주량(朱梁, 주씨가 세운 후량) 건화(乾化) 원년 신미(서기 911)에 연호 성책을 고쳐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이라 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태조를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錦城) 등을 치게 하고 금성을 나주(羅州)로 고쳤다. 전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장군으로 삼았다.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幘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鬃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鐵椎打殺之.
선종자칭미륵불 두재금책 신피방포 이장자위청광보살 계자위신광보살. 출즉상기백마 이채식기종미 사동남동녀봉번개향화전도 우명차구이백여인 범패수후. 우자술경이십여권 기언요망개불경지사. 시혹정좌강설 승석총위왈 “개사설괴담 불가이훈.” 선종문지노 청추타살지.
선종은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여 머리에는 금고깔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 네모진 가사)를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이라 하고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면 항상 백마를 탔는데 고운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꾸미고, 소년소녀들로 일산과 향화를 받들게 하여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 2백여 명에게 찬불가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 또한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요망하여 모두 정도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는 단정하게 앉아서 강설을 하였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그것을 두고 말했다. “전부 요사스러운 말이요, 괴이한 이야기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선종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철퇴로 그를 쳐죽였다.
三年癸酉 以太祖爲波珍飡侍中 四年甲戌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以太祖爲百船將軍.
삼년계유 이태조위파진찬시중 사년갑술개수덕만세 위정개원년 이태조위백선장군.
3년 계유(서기 913)에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4년 갑술(서기 914)에 연호 수덕만세를 바꾸어 정개(政開) 원년이라고 하였으며, 태조를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삼았다.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通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 殺之 及其兩兒 爾後.
정명원년 부인강씨 이왕다행비법 정색간지 왕오지왈 “여여타인간 하야?” 강씨왈 “안유차사?” 왕왈 “아이신통관지.” 이열화열철저 당기음 살지 급기양아 이후.
정명(貞明) 원년(서기 915)에 부인 강씨(康氏)가 왕이 그릇된 일을 많이 하므로 정색을 하고 간하였다. 왕이 그를 미워하여 말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무슨 일이냐?” 강씨가 말했다. “어찌 그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그리고는 뜨거운 불로 쇠방망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였다.
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다의급노 제료좌장리 하지평민 무고수륙자 빈빈유지 부양철원지인 불승기독언.
그 뒤로 의심이 많아지고 급작스럽게 성을 내어 여러 보좌진과 장수, 관리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니, 부양(斧壤)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견딜 수가 없었다.
先是 有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鬢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瓷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선시 유상객왕창근 자당래우철원시전. 지정명사년무인 어시중견일인 상모괴위 빈발진백 착고의관. 좌수지자완 우수지고경 위창근왈 “능매아경호?”
이에 앞서 상인 왕창근(王昌瑾)이란 자가 당나라에서 와서 철원 저자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그가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생김새가 매우 크고 머리카락은 온통 하얗고 옛날 의관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는 사기 주발을 들고 오른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는데 창근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 거울을 사겠는가?”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略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창근즉이미환지 기인이미표가항걸아이후 부지거처 창근현기경어벽상 일영경면 유세자서 독지약고시 기략왈 “상제강자어진마 선조계후박압. 어이년중이룡견 일즉장신청목중 일득현형흑금동.”
창근이 곧 쌀을 주고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거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는 그 뒤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에 걸어 두었는데, 해가 거울 면을 비추자 가느다랗게 쓴 글자가 나타났다. 그것을 읽어 보니 옛 시와 같았는데,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께서 아들을 진마(辰馬) 땅에 내려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 사(巳)년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 동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勃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解之. 含弘等相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飡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飡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창근초부지유문 급견지 위비상 수고우왕. 왕명유사 여창근물색구기경주 불견 유어발삽사불당유진성소상 여기인언. 왕탄이구지 명문인송함홍백탁허원등해지. 함홍등상위왈 “상제강자어진마자 위진한마한야. 이룡견 일장신청목 일현흑금자 청목 송야 송악군인 이용위명자지손 금파진찬시중지위여 흑금 철야 금소도철원지위야. 금주상초흥어차 종멸어차지험야. 선조계후박압자 파진찬시중선득계림 후수압록지의야.”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몰랐다가 이를 발견하고는 범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왕에게 아뢰게 되었다. 왕이 해당 부서에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하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다만 발삽사(勃颯寺) 불당에 있는 진성소상(鎭星塑像)의 모습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오래도록 탄식하고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풀이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보냈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이르는 것이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에 몸을 드러낸다는 구절에서, 푸른 나무는 소나무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龍)’자로 이름을 지은 사람의 자손을 뜻하므로 이는 지금 파진찬 시중(侍中, 태조 왕건)을 이르는 것이며, 검은 쇠는 철이니 지금의 도읍지 철원을 이름이다. 이제 왕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일어났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멸망할 징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
宋含弘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葅醢 波珍飡亦必遭害.” 迺飾辭告之.
송함홍등상위왈 “금주상 학란여차 오배약이실언 부독오배위저염 파진찬역필조해.” 내식사고지.
송함홍 등이 서로에게 말했다. “지금 주상이 이토록 포학하고 난잡하니 우리들이 만약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소금에 절여지는 신세가 될 뿐 아니라 파진찬 또한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다.” 이내 말을 꾸며서 보고하였다.
王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 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왕흉악자사 신료진구 부지소조. 하유월 장군홍술백옥삼능산복사귀 차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지소명야 사인밀모 야지태조사제 언왈 “금주상 음형이령 살처육자 주이신료 창생도탄 부자료생. 자고폐혼입명 천하지개의야 청공행탕무지사.”
왕이 흉악하고 포학한 짓을 제멋대로 하니 신료들이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해 여름 6월에 장군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 능산(能山), 복사귀(卜沙貴) 이는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젊은 시절의 이름인데, 네 사람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와서 말하였다. “지금 주상이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신료들의 목을 베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리석은 군주를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크나큰 의리이니, 공이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일을 행하시기를 청합니다.”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태조작색거지왈 “오이풍순자허 금수폭란 불감유이심. 부이신체군 사위혁명 여실부덕 감효은주지사호?”
태조가 얼굴빛을 바꾸고 거절하며 말했다. “나는 충성스럽고 순직한 것으로 자처하여 왔는데 지금 임금이 비록 포악하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무릇 신하로서 임금을 교체하는 것을 혁명이라 하는데, 나는 실로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은 탕왕과 주 무왕의 일을 본받겠는가?”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
제장왈 “시호부재래 난조이이실 천여불취 반수기구. 금정란국위 민개질시기상여구수 금지덕망미유거공지우자. 황왕창근소득경문여피 이가자복 취사독부지수호?”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들이 모두 자기 임금을 원수같이 싫어하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포악한 군주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迺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群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부인유씨문제장지의 내위태조왈 “이인벌불인 자고이연 금문중의 첩유발분 황대장부호? 금군심홀변 천명유귀의.” 수제감영진태조.
이때 부인 유씨(柳氏)가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는 것을 듣고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자가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의논을 들어보니 저조차도 오히려 분이 치밀어 오르는데 하물며 대장부로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홀연히 변하는 것은 천명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드렸다.
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噪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迺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제장부위태조출문 영전창왈 “왕공이거의기 어시 전후분주 래수자부지기기인 우유선지궁성문고조이대자 역일만여인. 왕문지 부지소도 내미복도입산림 심위부양민소해.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호위하고 문을 나서면서 “왕공께서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라고 앞에서 외치게 하였다. 이에 앞뒤로 달려와서 따르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또한 먼저 궁성 문에 다다라 북을 치고 떠들어대며 기다리는 자도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어찌할 줄 몰라 평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산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부양(斧壤)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궁예기자당대순이년 지주양정명사년 범이십팔년이멸.
궁예는 당나라 대순(大順) 2년(서기 891)에 일어나 주량 정명(貞明) 4년(서기 918)까지 이르렀으니, 대략 28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