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令胤
金令胤 沙梁人 級飡盤屈之子. 祖欽春[或云欽純]角干 眞平王時爲花郞 仁深信厚 能得衆心. 及壯 文武大王陟爲冢宰 事上以忠 臨民以恕 國人翕然稱爲賢相.
김영윤 사량인 급찬반굴지자. 조흠춘[혹운흠순]각간 진평왕시위화랑 인심신후 능득중심. 급장문무대왕척위총재 사상이충 임민이서 국인흡연칭위현상.
김영윤(金令胤)은 사량(沙梁) 사람으로 급찬 반굴(盤屈)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각간 흠춘(欽春)[혹은 흠순(欽純)이라고도 한다.]은 진평왕(眞平王) 때 화랑이 되었는데 인덕이 깊고 신의가 두터워 뭇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장성하자 문무대왕이 발탁하여 재상으로 삼았는데,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고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고 칭송했다.
太宗大王七年庚申 唐高宗命大將軍蘇定方 伐百濟 欽春受王命 與將軍庾信等 率精兵五萬以應之. 秋七月 至黃山之原 値百濟將軍階伯戰 不利 欽春召子盤屈曰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盤屈曰 “唯” 乃入賊陣 力戰死.
태종대왕칠년경신 당고종명대장군소정방 벌백제 흠춘수왕명 여장군유신등 솔정병오만이응지. 추칠월 지황산지원 치백제장군계백전 불리 흠춘소자반굴왈 “위신막약충 위자막약효 견위치명 충효양전.” 반굴왈 “유” 내입적진 역전사.
태종대왕 7년 경신(서기 660)에 당 고종이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백제를 정벌할 때, 흠춘은 왕명을 받들어 장군 유신(庾信) 등과 함께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당군에 호응하였다. 가을 7월에 황산(黃山, 충남 논산)벌에 이르러 백제 장군 계백(階伯)과 마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흠춘은 아들 반굴(盤屈)을 불러 말했다.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으뜸이요 자식의 도리로는 효성이 제일이니, 위급함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 충과 효가 모두 온전해진다.” 반굴이 “알겠습니다.”라고 하고, 곧 적진으로 들어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令胤生長世家 以名節自許 神文大王時 高句麗殘賊悉伏 以報德城叛 王命討之 以令胤爲黃衿誓幢步騎監. 將行 謂人曰 吾此行也 不使宗族朋友 聞其惡聲.
영윤생장세가 이명절자허. 신문대왕시 고구려잔적실복 이보덕반 왕명토지 이영윤위황금서당보기감. 장행 위인왈 “오차행야 불사종족붕우 문기오성.
영윤은 명문가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명예와 절개를 자부했다. 신문대왕 때, 고구려의 잔적 실복(悉伏)이 보덕성(德城叛)에서 모반하자 왕이 토벌할 것을 명령하고, 영윤을 황금서당(黃衿誓幢) 보기감(步騎監)으로 삼았다. 그가 떠날 때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번에 가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좋지 못한 소문이 들리지 않도록 하겠다.”
及見悉伏 出椵岑城南七里 結陣以待之 或告曰 今此凶黨 譬如鷰巢幕上 魚戱鼎中 出萬死以爭一日之命耳 語曰 ‘窮寇勿迫’ 宜左次以待疲極而擊之 可不血刃而擒也.
급견실복 출가잠성남칠리 결진이대지 혹고왈 “금차흉당 비여연소막상 어희정중 출만사이쟁일일지명이 어왈 ‘궁구물박’ 의좌차이대피극이격지 가불혈인이금야.”
이윽고 가서 보니, 실복은 가잠성(椵岑城) 남쪽 7리 지점까지 나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이제 이 흉악한 무리들은 비유하자면, 제비가 장막 위에 둥지를 틀고 물고기가 솥 안에서 노는 것과 같아서, 만 번 죽기로 싸워도 하루 사는 목숨밖에 안 된다. 옛말에 ‘궁지에 몰린 도둑은 쫓지 말라.’고 하였으니, 좀 물렀다가 적이 극도로 피로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한다면 칼날에 피도 묻히지 않고 사로잡을 수 있다.”
諸將然其言 暫退 獨令胤不肯之而欲戰. 從者告曰 “今諸將豈盡偸生之人 惜死之輩哉 而以向者之言爲然者 將俟其隙而得其便者也. 而子獨直前 其不可乎.
제장연기언 점퇴 독영윤불긍지이욕전. 종자고왈 “금제장이진투생지인 석사지배재 이이향자지언위연자 장사기극이득기편자야. 이자독직전 기불가호.”
모든 장수들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잠시 물러나려고 하는데, 유독 영윤만이 수긍하지 않고 싸우고자 하였다. 그의 종자가 여쭈었다. “지금 여러 장수들이 어찌 모두 살기를 탐하며 죽기를 애석하게 여기는 무리이겠습니까? 조금 전의 의견이 옳다고 여긴 것은 적들의 틈을 엿보아 이익을 얻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혼자 앞으로 나가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令胤曰 “臨陣無勇 禮經之所誡 有進無退 士卒之常分也 丈夫臨事自決 何必從衆.” 遂赴敵陣 格鬪而死.
영윤왈 임진무용 예경지소계 유진무퇴 사졸지상분야 장부임사자결 하필종중 수부적진 격투이사.
영윤이 말했다. “전쟁에 임하여 용기가 없는 것은 『예경(禮經)』에서 경계한 바이고, 전진이 있을 뿐 후퇴하지 않는 것은 사졸로서 지켜야 할 당당한 본분이다. 장부가 일에 임해서는 스스로 결정할 것이지, 어찌 꼭 무리의 의견만을 따르겠는가?” 그리고 마침내 적진으로 달려가서 싸우다가 죽었다.
王聞之 悽慟流涕曰 “無是父 無是子 其義烈可嘉者也.” 追贈爵賞尤厚.
왕문지 처통유체왈 “무시부 무시자 기의열가희자야.” 추증작상우후.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이런 부자가 어딨나 그 올곧음과 열정이 아름답도다.” 왕은 작위와 상을 추증하는데 특히 후하게 하였다.